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1)-(35)

영국신사77 2016. 4. 15. 16:09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1) 에크하르트 ① 존재를 넘어선 하나님

2012.08.05 17:42


라인강의 깊은 묵상… 초월해 계신 신비한 하나님 만나다

강은 영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영성이란 마치 강처럼 자유롭고 부드럽게 흘러
마침내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루터, 그리고 경건주의의 도시들을 지나 만하임을 벗어났을 때
눈앞에 라인강이 펼쳐졌다.
강 좌우편에는 포도원이 이어지고
절벽에는 고색창연한 고성(古城)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라인강의 영성 

라인강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필자에게 더 그리운 것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영성의 역사에 영향을 준,
소위 ‘라인강 신비주의’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수 세기(특히 14∼15세기) 동안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을 비롯한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주로 도미니칸 수도회에 소속한 그들의 주요 거점은
스트라스부르와 쾰른이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하인리히 수소, 요한 로이스브루크, 토마스 아 캠피스
등이다.
이들의 생각이 언제나 동일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함으로써 마음과 생활의 순결을 얻으려는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하나였다.
훗날 종교개혁도 이들의 토양에서 나왔고
특히 루터는 타울러를 통해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타울러의 영적 스승이 에크하르트(1260∼1329)였다. 

멀리 그리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에크하르트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하나님을 광범위하게 묵상했고 또한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그가 살았던 지리적 환경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의 스케일은 마치 알프스 같고 그의 깊이는 라인강과 같았다.
그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에 대해
매튜 폭스의 분석대로 분류하자면
창조세계에 대한 관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기부정의 삶,
신비한 하나님 묵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비로운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는 신비한 하나님이 있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가지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나에게서 더 멀어진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며 또한 우리보다 가까이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넘어서 계시며,
자기 자신 스스로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어떤 존재다.”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 경험세계에 붙잡힐 만큼 겸손하신 분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험이 곧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자연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본가(本家), 하나님의 성전이다.
실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메아리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왔지만 또한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피조물이 곧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에서 경험되고,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피조물이 곧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피조물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계신다’는 에크하르트의 믿음을
범신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범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언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믿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어거스틴의 맥을 잇고 있다. 

거울은 거울이고 태양은 태양이다 

그에 의하면 창조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 머문다.
대야 속에 거울을 집어넣고,
그 대야를 태양 아래 둔다고 하자.
거울 속에 태양이 비치지만 태양이 비친 거울 자체가 태양은 아니다.
거울은 여전히 거울일 뿐, 태양은 거기에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안에 있지만 모든 존재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영혼에 하나님이 비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영혼은 영혼일 뿐이다.
하나님은 초월의 세계에 계시므로
우리가 이성을 통해 피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해도
내가 발견한 하나님이 곧 모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인식 너머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는 침묵이다. 

이러한 생각은 어거스틴의 말과 닿아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적 풍요의 지혜로 침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대는 또한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안다 해도
하나님은 그대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대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았다’고 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불가지론 같이 여겨지는 에크하르트의 하나님 론은,
하나님을 인간화 또는 수단화하려는 일체의 인간적 시도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들린다. 

하나님을 자유케 하라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 아닌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된 하나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 하나님,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방법이 된 하나님을 우리는 믿지 않는가.
우리는 소위 도구적 하나님을 떠나
본질적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믿음의 회복을 위해 에크하르트는
우리의 머리와 손에 붙잡혀 있는 하나님,
우리의 주머니·성공·행복·소유 속에 예속된 하나님을
본래의 위치에 돌려놓으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런 생각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면
과연 어떤 것일까.
중세의 성례전적 속박에 예속되어 교회화된 하나님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1329년 에크하르트는 당시 교황 요한22세로부터 이단으로 단죄 받는다.
에크하르트에 대해 총 27개 항목으로 된 교황의 문서에서
16개는 ‘이단적’으로, 11개는 ‘위험한 것’으로 단죄하고 있다.
교황이 단죄한 사람이 어찌 에크하르트뿐이었겠는가.
아마도 (거의 확실히) 교황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중세적 구조 속에 갇혀있었던 ‘하나님의 자유(해방)’가 아니었을까. 

중세의 하나님이란
오직 성직자의 중개(mediation)를 통해서만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였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구조적 방법이 성례전이었다(7성사).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교회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 안에 평생 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님과의 즉각성(immediacy)을 강조했으며,
그러한 주장이
성례전과 사제의 중보를 무기로
교회화한 중세 교회와 교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었던가.
에크하르트가 말하고 믿었던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도전이 되고 경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우리 안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인간의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자유를 더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에크하르트와 우리 시대의 공통된 과제가 아닐까. 

-하나님을 수단화하려는 시도 경계-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방법이 된 하나님…
우리는 소위 도구적 하나님을 떠나 본질적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욕심 안에 붙잡혀 성공·행복·소유 속에 예속된 하나님을
본래 위치에 돌려 놓아야 한다” 

“성직자의 중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2) 에크하르트 ② 버리고 떠나 있음

2012.08.12 17:58


겸손하라, 그래야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에크하르트의 첫 번째 주제가 하나님이었다면
두 번째 주제는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존재를 넘어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겸손’의 언어로 설명한다. 

신적인 존재는 겸손한 자요, 겸손한 자는 곧 신적인 존재이다.
겸손한 사람과 하나님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겸손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겸손의 극치는 성육신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실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것은 그가 보이신 최고의 겸손이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이시기 때문에
오직 겸손한 자에게만 알려진다. 

겸손은 하나님의 본성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하
나님께 나아가는 겸손의 길이 곧 ‘버림과 떠나 있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버리고 떠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물의 전체성과 거룩함을 한꺼번에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버리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광활한 어둠이자 알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만큼 하나님을 알 뿐이다. “
하나님은 피조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제한된 지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찾아지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기능

우리 영혼에는 몇 가지 기능이 있다.
우선 낮은 기능이 있다.
첫 번째 낮은 기능은 구별하는 능력이다.
이 기능에는 교화라는 금반지가 끼워져야 한다.

둘째 기능은 분노라고 한다.
이 반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금반지가 끼워져야 한다.

셋째 기능은 욕망이라고 부른다.
이 기능에 우리는 자족이라는 반지를 끼워야 한다. 

영혼의 고차적인 기능도 있다.
먼저 기억하는 능력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짝을 이룬다.
둘째 기능은 지성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짝을 이룬다.
셋째 기능은 의지의 기능이다.
성령님과 짝을 이룬다.
이 모든 영혼의 기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버린다는 것은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마음 아닌 분으로, 사람 아닌 분으로,
표상이 아닌 분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무리하게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일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살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의도하지 말고, 바라지 말고,
그리고 어떤 것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놓아두는 것,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놓아두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놓아두는 것.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다는 것

가난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적 가난이다.
외적 가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난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한 종류의 가난이 있다.
내적 가난이다.
우리 주님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했을 때
뜻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알지 않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다. 

먼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참회와 외적인 행사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런 의지를 충족시키고자 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참되게 가난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에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그처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의지를 모조리 버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말아야 한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진리를 위해 살지 않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아는 것에서 아주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만큼 모든 앎에서 가난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또한 가난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은 지상의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가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가난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은 하나님이 작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떤 자리에 앉지 말고
또 어떤 자리도 갖지 말아야 한다.” 

에크하르트에게 가난은 점점 나은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아는 것에 대한 가난은 의지의 가난보다 더 나아간 것이며,
가짐에 대한 가난은 아는 것에 대한 가난보다도 더 나아간 것이다. 

버림은 그대로 둠이다

에크하르트의 ‘버림과 떠남’을 바울의 말로 바꾸면 ‘자기죽음’(갈 2:20, 갈 5:24)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우리 지성과 우리의 의지 또한 죽었다고 믿어야 한다.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할 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바깥에 있는 것은 모두 무(無)일 뿐이다.’ 

버림은 곧 그대로 둠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놓아두는 경험, 신성을 신성으로 놓아두는 경험,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 놓아두는 경험,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놓아두는 경험,
사물을 사물로 놓아두는 경험,
하나님을 사물 속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경험,
사물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경험, 안을 그대로 두는 경험,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든 진리를 위해서든 하나님을 위해서든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살아야 한다.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의지를 버려야 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주여, 당신께서는 먼저 당신의 것이 되지 않은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버림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완성하지만
우리도 매일 우리 자신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는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버림은 억압이 아니다.
강압으로 거룩해질 수 없듯이 억압으로 버릴 수 없다.
“버림은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에크하르트의 ‘버림과 그대로 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노력, 지성, 의지의 불필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함을 말한다.
사람이 붙잡는 것 중에 가장 마지막이, 하나님을 붙잡는 행위이다.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조차 놓아 버리는 철저한 자기포기,
하나님 소유의 자기 애착을 놓아버릴 때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다는 역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별세(別世)가 곧 승세(勝世) 아닌가?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3) 에크하르트 ③ 하나님 아들의 탄생

2012.08.19 17:54


자기를 비우고 無가 될 때 영혼 안에 하나님 아들이 태어난다

자기를 비우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놓아버리는 삶이
궁극적으로 다다르려는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다.
에크하르트는 매일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왕국이나 심지어 온 세상을 놓아버렸다 해도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놓아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

자기를 버리고 떠나는 삶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삶이란 모든 일이나 사물에서 자기를 무(無)로 만드는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에크하르트에게 자기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태어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에크하르트는 세 가지 탄생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가 신성 안에서 태어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탄생이 있다.
삼위일체 내에서 성자 하나님의 탄생,
이 탄생은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탄생이다.
성육신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탄생,
이 탄생은 유일회적 탄생이요 역사적 탄생이다.
그리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아들의 탄생,
이 탄생은 성령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탄생이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나를 자기 아들로,
그것도 똑같은 아들로 낳으신다.” 

에크하르트는 성육신으로서 예수님의 탄생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이 나 자신의 탄생이 되지 않는 한 부족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를 위해 한 가지 예를 든다. 

한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불행을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부인, 왜 그렇게 슬퍼하오?”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때문에 나를 덜 사랑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얼마 후에 남편이 자기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아내에게 왔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눈 하나밖에 없소.”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다.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묻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내 안에 똑같은 하나님이 태어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
(요 15:15)는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를 낳지 않을 수 없었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성자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서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

“성부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신성의 깊이에서 성자 하나님을 낳고
  성자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낳으신다.” 

그래서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선언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어머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독자는 없으리라고 본다.
하나님이 그 아들 안에서 역사에 태어난 것처럼
그의 아들도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는 이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창조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우리의 모든 욕망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의 근저에 흐르는 생명의 샘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본성의 씨앗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보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는 우리를 그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벧후 1:4).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신성에 참여케 하기 위해 하시는 일이
탈형(脫形)과 입형(入形)이다.
탈형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요,
입형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 속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탈형이든 입형이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물론 영혼의 근저를 덮고 있는 잡다한 상들을 벗겨 내는 데에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 

돌파, 자기 깨뜨림

에크하르트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독특한 단어를 사용한다.
바로 ‘돌파(durchbruch)’라는 단어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자기 버림의 극치는 돌파이다.
돌파는 버림으로 시작된 자기포기를 극단으로 가져가는
지고의 신앙적 노력이며 결단이다.
버림(초탈)은 돌파를 낳고 돌파는 탄생을 낳는다. 

비유한다면 이렇다.
버림이란 한 여자로서 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과 같다.
결혼하는 순간 그녀는 세상 모든 남자로부터 단절된다.
모든 남자와의 관계가 끊기고 한 남자에게 매인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곧 출산으로 이어지고 출산은 반드시 산고의 고통을 동반한다.
누구나 결혼했다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처럼
자기를 버렸다고 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꺼이 산고의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산고가 산고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돌파’도 ‘돌파’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돌파의 목적은 아기의 탄생이다.
‘돌파’는 요즘 용어로 ‘자기 깨뜨림’이다. 

“조개의 안에 있는 속살이 밖으로 나오려면, 껍데기가 깨져야 할 것이다.
  조개의 속살을 얻고자 한다면, 껍데기를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태어나는 데 돌파가 먼저냐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냐고 묻지 말자.
왜냐하면 돌파는 처음부터 은총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은총은 인간적 노력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을 끊는 단호한 인간적 결단도 필요하다.
그래도 굳이 어느 편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은총이든 자연이든 둘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이다. 

마리아, 마르다 이야기

탄생을 중요시하는 그의 강조점은 마르다-마리아 두 자매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게 한다.
보통 마르다-마리아 사건의 핵심은 마리아는 관조적 삶을 대표하고,
마르다는 활동적 삶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선적인 것은 마리아의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반대로 해석했다.
동생 마리아는 영혼의 갈망이 있어 예수님 발 앞에 앉았지만 그 안에 있고,
언니 마르다는 관조적 삶에서 벗어나 남을 섬기고 돕는 삶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있는 삶이요,
마르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또한 세상 안에도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이렇게 영적 태중아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힘차게 세상 안에서 사는 삶이다. 

그가 신비주의자였으나
하나님과 나, 그리고 수도원 안에 침잠하는 정적주의, 체험주의,
고행주의적 신비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종교개혁을 실천한 루터의 삶과 행동에
어떤 원형을 제공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가깝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 안에서 힘차게 살라고 소리친 에크하르트의 음성이
오늘날과 같은 탈종교 시대에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는가?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4) 요한 타울러와 독일신학

2012.08.26 17:57


독일신학, 피조물인 인간영혼의 소중함과 한계서 출발 

에크하르트의 영성은 그의 제자 요한 타울러(1300∼1361)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라인강(쾰른, 스트라스부르), 도미니칸 수도회, 설교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기 부정과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공통적 기반 위에 서 있었지만
강조점이 달랐고 평가 또한 달랐다. 

굳이 비교한다면 에크하르트가 창조 세계의 중심인 우주적 하나님에 관심했다면
타울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도에 관심했다고 할까.
확실히 타울러는 실제적인 예수님을 닮는 성화의 삶에 대해
에크하르트보다 관심이 더 많았다.
에크하르트가 성육신적이라면 타울러는 십자가적이요,
에크하르트가 철학적이라면 타울러는 목회적이었다. 

타울러, 독일교회의 아버지 

‘독일신학’의 원저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루터도 그 저자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루터가 이 책을 성경과 어거스틴 다음으로 유익한 책이라고 격찬하면서
세 차례나 직접 편집, 출판하고
타울러를 ‘독일교회의 아버지’라고 찬양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타울러를 저자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타울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의 저자는 타울러와 동시대 사람이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에 나타난 메시지가
타울러의 분위기와 매우 비슷하고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독일신학’은 피조물인 인간 영혼의 소중함과 그 한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피조물은 완전한 것을 알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이 피조됐기 때문이다.
피조된 것은 피조성을 토대로 자신과 사물을 이해하기 때문에
결코 온전한 것을 알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 온전하시다.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 존재, 분리된 존재, 부분적인 존재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만 향하는 존재이다.” 

죄는 바로 이 피조물의 불완전성에서 나온다.
죄는 피조물의 피조적 본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 문제이다. 

아담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타락하고 주제넘음,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이다.
인간은 피조적 본성과 본성적인 거짓 빛의 존재로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맨다.
이것이 인간의 속임수요 미혹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필요하게 여기실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인간도 없지만
인간 없이는 또한 하나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전하시지만 인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고
인간의 불완전도 하나님을 통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하나님도 인간과 상관없이 그 일을 명하시거나 행하시지 않는다.
중요한 명제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간화와 인간의 신화(神化)이다. 

“죄인인 나의 타락은 다른 방법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하나님 없이 그 일을 할 수 없고,
  나 없이 하나님 또한 그 일을 하시지 않는다.
  그 일이 발생하려면,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인간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절대타자인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는 지점이다. 

나를 죽이라는 뜻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나’를 죽이는 일이다.
모든 죄는 내 안에 있는 ‘나’에게서 온다. ‘
나, 나의, 나를’이 곧 죄의 특징이요 표식이다.
“만일 사람이 하나의 진리에 대한 내적 지식에게로 나아오려면, ‘
나’와 ‘나의 것’은 죽어 없어져야 한다.” 

“만일 내 안의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하는 즉시
  나도 그것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를 죽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내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지금도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이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무관하게는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요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는 더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옛사람의 죽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옛사람’이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죽음의 훈련과 목표 

이러한 자기죽음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다. 

첫째, 주님을 위해 예비해야 할 길에 대한 갈망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갈망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필요하다.
최고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시다.
셋째, 교사이신 그분을 끊임없이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므로 지속성이 필요하다.
넷째, 그 일을 오늘 바로 시작하고 실천해야 한다.
결코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된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거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목표는 무엇인가.
온전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
온전한 것이 올 때에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진다(고전13:10).’ 

온전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사람의 영혼 안에 황홀한 상태가 나타나고,
완전하신 선에게 가까이 가고 그와 연합하려는 갈망이 생긴다.
그 갈망이 자람에 따라 영혼 안에 더 많은 것이 계시되고,
그것들이 많아질수록 영혼은 더 많이 갈망하고 더 많이 이끌린다.
이끄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하지 않고는 그분과 연합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신 두 가지 말씀이 중요하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곧 나의 생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 

이것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영광의 목표, 그분과 함께 있는 것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 안에서의 순수하고 단순한 휴식이다.” 

“연합이란 피조된 의지가 영원한 의지 안으로 흘러 들어가
  거기에서 소멸되고 무(無)가 되어서,
  영원한 의지만이 우리 내면에서
  의도하고 일하고 말씀하도록 만들어진 축복된 상태이다.” 

우리의 말이나 행위나 규칙, 노력, 모든 피조물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없다.
행위, 학습, 능력, 활동으로도 연합을 이룰 수 없다.
이런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온갖 종류의 행위, 말, 규칙, 재치, 뛰어난 기능 등도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데 기여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그의 노리개가 되거나 부속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사람과 사물로부터 자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인해 영원한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도 세상과 자아로부터 분리하여 자유롭게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신화(神化)된 사람, 또는 성화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빛을 전하고 발산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타오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우리의 최고 영광은 그분과 함께 있는 그것이다.
당신에게도 그 소원이 있는가?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5)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2012.09.02 17:38

 


“예수님을 위해 모든 사람 사랑하고 당신 자신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라”

라인강은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로 흐른다.
멀리 북해가 보이는 네덜란드의 끝자락에서 또 한 사람의 영성가가 나왔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이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어거스틴의 ‘참회록’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 서적 가운데 단연 최고봉이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주 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더위를 피하여 모처럼 기도원에 올랐다.
그때 손에 들려진 책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평소 다독과 속독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책만은 정독하리라 다짐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 그리스도를 본받아’, 일기 형식의 영성고전 

우선 이 책이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일기 형태로 된 영성의 고전이 얼마나 많은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존 울만 그리고 토머스 머튼 등이
이 범주의 책을 남긴 인물들이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삶을 진솔하게 토해내는 영혼의 독백이다.
미뤘다가 한꺼번에 쓰지 않기 때문에
신선하고, 매일 쓰기 때문에 진솔하다.
모톤 켈시가 ‘내면세계로의 여행’에서 강조한 대로 ‘
일기(특히 영적 일기)는 우리 내면의 영적 여행의 외적·가시적인 표지판’이다. 

갈급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자
살아 있는 언어가 펄떡거리며 가슴에 들어왔다.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하여 이토록 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쉽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 한마디를 위해 켐피스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묵상했을까.
그렇다. 예수님은 나와 모든 사람의 중심이다.
또 하나의 문장이 나를 잠시 머물게 했다. 

“길이 없으면 진보가 없으며, 진리가 없으면 지식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느니라.” 

켐피스의 평생 기도가 이 한마디에 녹아 있는 것 같다. 

회개가 영적 묵상의 시작 

켐피스는 이어 회개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묵상을 시작한다. 

“나는 삼위일체의 정의에 관하여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켐피스는 회개의 정의를 아는 것보다는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은 사변적인 중세 스콜라신학이 가져다 준 폐해 때문이리라.
그렇다. 회개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회개 없이는 어떤 성장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회개는 곧 자기부정과 겸손으로 이어진다.
“너희 자신이 경건하다는 생각에 너무 열렬히 집착하지 말라.
그러한 경건함이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쉽사리 변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러한 은혜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비참하고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라.”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주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 주님! 그러므로 당신께서 만일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신다면
우리에게는 진실로 거룩함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만일 우리를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용기는 도움이 되지 못하며,
당신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순결성은 지켜지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거룩하신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다면
우리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조심성이란 아무 소용이 없나이다.” 

이것을 진부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문장이 길지만 사실이다.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죄성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완전하기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사실상 고치려 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결점은 고쳐지기를 바라며 엄하게 다루면서도,
우리 자신은 고치려 하지 않고 남에게 간섭받기조차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마구 자유를 누리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남의 죄만 보이는 것.
그때 우리는 먼저 침묵해야 한다. 

“기꺼이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사람만이
  외부로 나가 대중들 앞에서도 안전하고 자신감 있게 되는 것입니다(전3:7).” 

침묵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을 고치기 위하여 매우 좋은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악에 빠지기 쉬운 성향과 더불어 싸워서 그것에 지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은혜와 미덕이 필요할 때에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은 곧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 진지해야 영적으로 승리한다.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법 

영적 생활에 있어서 항상 조심할 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보이는 현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행동을 인정받거나 칭찬받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무익한 일이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순수하고 맑은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나 쉽게 만족과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이 거룩한 사람은 아니며,
또한 사람들의 책망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이 사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말에 의하여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증거도 요구하지 않았다(요2:24∼25).
하나님의 사람이 늘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행동이 삶의 표준이 되거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의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영적 생활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적 생활이 고통 없는 삶은 아니다.
고통 없는 삶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참 평화인 줄 생각하지 말라.
또한 아무도 나를 반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만하다고 생각하지 말며,
모든 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간다고 해서
만사가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영적인 생활이란,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풍랑 치는 바다에서 베드로가 한 것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켐피스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주님 안에 영원히 거하고 싶은 열망이다. 

“내가 간구 하옵나니
저로 하여금 온전히 당신과 연합하게 하사,
모든 피조물로부터 제 마음이 멀어지게 하시고,
거룩한 성찬식에 자주 참여함으로써
하늘에 속한 영원한 신비를 점점 더 많이 맛볼 수 있게 하소서.
오! 주 하나님이시여,
제가 언제 당신과 더불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사오며,
제가 언제 당신 안에서 저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잊을 수 있사오리까?
당신께서 제 안에 거하시고 제가 당신 안에 거하게 하사
당신과 제가 영원토록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5:4).” 

켐피스는 어떤 상황에서 이 책을 남겼는가.
아마도 평생에 걸친 기도와 자기부정의 삶,
공동체적 삶(Devotio Moderna·오늘의 헌신운동) 속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당신이 신학보다 경건을, 사색보다 예배를, 형식보다 내적 체험을,
의식보다 예수님을 더 좇아간다면
켐피스가 갔던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