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6)-(40)

영국신사77 2016. 4. 15. 16:10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6) 성 버나드 ① 하나님을 향한 갈망

 

2012.09.09 18:04


‘신랑으로서의 하나님’을 갈망하라

라인 강을 거쳐 영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 한 명이 떠올랐다. 
성 버나드(St. Bernard·1090∼1153)이다. 
클레이보(Clairvaux)에 세운 수도원 때문에 ‘클레이보의 버나드’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필자가 오래전부터 사모해 왔던 사람이다. 

어느 날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를 부르다가 
왼쪽 작사자 이름에 ‘클레이보의 버나드’라고 쓰여 있어서 
버나드가 누굴까 늘 궁금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가장 좋은 것은 4절이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가슴을 적시는 글을 쓴 사람이라면 
분명 훌륭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그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처럼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는데 
이번 여름, 목회자들과 함께 떠난 유럽영성투어에서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아가서, 버나드 영성의 진수 

그러나 역시 버나드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테제에 도착해서 프랑스 지도를 살펴보니 테제에서 
그가 몸담았던 수도원이 있는 시토(디종)까지 100㎞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동차가 없이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버나드를 두고 오면서 
대신 책을 통해 버나드를 만나기로 했다. 

버나드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우선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에서 자신의 개혁이 
세 가지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말한다. 
첫째 성경, 
둘째 어거스틴, 
그리고 셋째가 버나드와 타울러. 

버나드의 무엇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아마도 버나드가 수도원에 속해 있었지만 수도원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스콜라시대에 살았지만 신학보다는 성경을 붙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은 수도원에 남아 있고 한 사람은 수도원에서 나왔지만 
두 사람은 모두 성경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버나드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가서’이다. 
그는 아가서 1장과 2장을 설교하는 데만 18년이 걸렸으며 
평생 아가서를 88편이나 설교했다. 
그는 ‘아가서’를 전형적인 알레고리적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신랑과 신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아 3:1) 
버나드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최고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유비로 본다.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요,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공경의 대상이지만, 
신랑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사랑의 대상이다. 

주인에 대해 종은 죄 때문에 두려워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은 유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두려워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랑도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며,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사랑은 사랑 외에 어떤 다른 원인으로도 열매 맺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가장 순수한 사랑은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아가서’이다. 

사랑은 찾는 것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찾는 것이다. 
사랑은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다. 
찾아야 사랑이며 찾아져야 사랑이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아 3:1) 
신부는 ‘사랑하는 자’를 찾지 않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 
신부는 ‘밤에’ 찾지 않고 ‘밤마다(All night)’ 찾는다. 
사람들은 밤에 육체의 목마름을 찾지만 신부는 밤에 마음(영혼)의 목마름을 찾는다.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아 3:2) 
신부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성안을 돌아다닌다.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아 3:2) 
찾아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은 얼마나 비참한 사랑인가. 

신랑으로부터 보냄 받은 순찰자

신부는 피곤에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바로 그때, 신부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난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아 3:3)라 할 때의 그 순찰자이다. 
어두운 밤거리를 지키며 이리저리 다니는 순찰자란 신부에게 누구인가? 

버나드는 그 순찰자가, 
성경에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라고 언급할 때 
가리키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두운 밤, 하나님이 보내서 영혼을 지키는 영혼의 지킴이들이다. 
이들이 곧 사도요, 사도 같은 사람들이다. 
교회가 공격을 받아 위험할 때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영혼들을 돌보는 목자들이 그들이다. 
중세를 살았던 버나드는 그것이 바로 교회요, 
교회적 사명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도든, 교회든, 목양자든, 시대적 사명자든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순찰자를 예비하신다. 

그런데 신부가 순찰자를 만난 장면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언뜻 보면 신부가 순찰자를 찾았고 순찰자가 신부를 발견했지만 
자세히 보면 신부가 찾아졌고 발견되었다. 
순찰자는 스스로 성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신랑)의 명에 따라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순찰자는 보냄 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버나드는 이렇게 말했다. 

“순찰자가 그녀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분이 그녀를 찾아내도록 예비하셨다.” 

성경을 보자.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할 때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았는가?(행 10:1)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위해 기도할 때 
아나니아가 바울을 발견했는가?(행 9:10).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예비하셨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발견했지만(요 1:45∼48), 
주님은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그를 보셨다. 
안드레가 시몬을 찾아갔지만, 
주님은 이미 시몬에게서 게바를 보셨다(벧전 5:9). 
순찰자를 만난 신부는 곧 신랑을 만났다. 

붙들려서 붙잡는 은혜

아가서 3장 4절이 중요하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 
왜 ‘지나치자마자’일까? 
순찰자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었다는 뜻이다. 
신부가 순찰자를 만나 도움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순찰자 때문에 신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 신랑 때문에 신랑을 만났다. 
그래서 ‘지나치자마자’이다. 

우리도 신부처럼 밤마다 하나님을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큰 선이요 영혼이 알고 있는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영혼이 받은 으뜸가는 선물이며 
영혼의 발달의 마지막 단계이다.” 

누구든지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마 7:8)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불러야’(사 55:6)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부가 신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신부가 찾아졌고, 
  신부가 신랑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부가 발견되었다.”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 갈망은 우리의 인간적 노력이 되고 
우리의 기도는 종교적 염원이 된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마지막 장면이 중요하다.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그를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붙들리지 않으면서 붙잡는 수가 있을까? 
중세를 살았던 버나드는 이렇게 우리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7) 성 버나드 ②사랑의 상승

 

2012.09.16 17:54


사랑은 마치 계단과 같다 은혜의 정점은 하나님과 입맞춤 하는 것이다

버나드가 작사한 찬송가 ‘구주를 생각만 해도’는 언제 불러도 좋다. 
5절이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로부터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버나드의 평생 모토는 
‘예수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아는 것’이었다. 
그의 철저한 예수님 사랑과 십자가 중심의 신앙 때문에 
리처드 포스터는 그를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사이의 위대한 기독교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이 만든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의 경계를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했을까? 
그 비결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 

버나드가 끝까지 의지하고 붙잡았던 것은 하나님 사랑이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그의 고백은 그가 쓴 ‘하나님의 사랑’에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버나드는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묻는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 자신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버나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내가 당신과 다른 것을 아울러 사랑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도록, 
내게서 다른 모든 경쟁적인 것들이 떠나가게 하옵소서. 
당신만이 진실로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사랑이십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그것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그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네 가지 사랑 

버나드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특징은 
사랑이 끊임없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육신적이며 타락한 죄인의 사랑으로부터 
천국의 열매로 맺어지는 사랑까지 
사랑은 끊임없이 상승한다. 
그 사랑은 마치 계단과 같다. 
즉각적이고 신속히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정점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사랑에는 크게 네 단계가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인간의 본래적 성향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버나드에 의하면 이기적 죄성에서 나오는 육신적 사랑으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이런 사랑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고 부패한다. 

둘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도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다. 
이 사랑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사랑이 필요한 것은 
이 사랑을 통하여 온전하신 하나님께 점점 나아가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도 이 사랑을 위하여 어떠한 대가나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잘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라 

넷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고의 사랑이다. 
이 사랑에 대해 버나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랑은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완전히 중단하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순구 무후한 사랑이다.” 

버나드는 위의 네 가지 사랑을 이렇게 요약했다. 

“인간은 육신적이며 육신의 죄악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육신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첫째 단계다. 

그러다가 자신 스스로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며,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하나님이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 번째 단계로 인도하신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 번째 단계에 오랫동안 머무른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랑하는 것인데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선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주님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은 풍성함으로 채워질 때만 가능하다. 

네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망각하며 
자기를 더 이상 자신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즉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 하나님과 입맞춤 

버나드는 ‘아가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키스로도 비유한다. 
사랑은 여기서도 상승적 구조로 나타난다. 

사랑의 최고봉은 하나님과 입맞춤하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입 맞추듯 하나님과 입 맞추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정점이다. 
하나님과 합일된다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 존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준비단계가 있다. 
발에 하는 키스와 손에 하는 키스이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려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히며 하나님의 발에 키스할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갱신과 새 힘을 얻으려는 예배자의 정성어린 헌신은 
하나님의 손에 키스하려 할 것이며, 
명상의 즐거움은 황홀경에 이르는 안식으로 인도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이다.” 

발에 입맞춤하는 것도 감사하고, 손에 입맞춤하는 것도 감사하지만 
입으로 하나님께 입맞춤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과의 입맞춤, 이것이 그가 말한 최고의 사랑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그분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이 세 가지 키스를 버나드는 
고백(confession), 헌신(devotion), 명상(contemplation)의 단계로 표현한다. 

버나드의 평생 관심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와 같은 사랑의 합일에 이르는 것이었으며, 
그 합일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에게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존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달라짐으로써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 이르는 것, 
이것이 버나드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기도의 극치였다. 

버나드는 그러한 신앙의 고백을 다음과 같은 기도로 요약한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함으로써 나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내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버나드였기에 
그에게서 찬송가 ‘구주를 생각만 해도’가 탄생한 것이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우리도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향해 매일 자랄 수 있을까?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한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8) 옥스퍼드와 토마스 크랜머

 

2012.09.23 17:53


“신앙과 교회 최고 권위는 성경”… 영국교회의 영성 기초 쌓고 화형장에서 장엄한 순교하다

긴 유럽대륙 여행을 마치고 영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옥스퍼드였다. 
필자가 옥스퍼드를 찾은 것은 우선 대학 때문이었다. 
13세기에 시작된 세계적인 대학의 도시. 도시 전체가 캠퍼스였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번쯤 머물며 공부하고 싶은 곳. 
옥스퍼드는 그 고색창연한 건물만큼이나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자료에 의하면 영국 수상만 26명, 영국 국왕 2명, 19개국의 국가원수 35명, 
9개국의 왕, 대통령 12명, 성인 12명, 캔터베리 대주교 20명, 
노벨상 수상자 47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옥스퍼드의 순교탑

옥스퍼드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뚝 솟은 고딕형 탑이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니,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화형된 순교를 기리는 탑이었다.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휴 라티머(Hugh Latimer), 
그리고 니콜라스 리들리(Nocholas Ridley)가 로마교회에 저항하다가 
여왕 매리에 의해 화형을 당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탑은 1841년 대중들의 기부를 받아 
조지 길버트 스캇(George Gilbert Scott)이 만든 작품이다.

대못같이 뾰족한 탑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문득, 유럽에서 같은 뜻을 위해 살고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루터, 멜란히톤, 칼빈, 부처, 쯔빙글리, 불링거, 
그들보다 앞서 살았던 요한 후스와 사보나롤라, 
그리고 그 이전에 내면의 불꽃을 태우며 
교회개혁을 위해 일한 수많은 성직자들, 학자, 신비주의자들. 
그들의 외침이 바다 건너 이곳까지 메아리치다니….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절대 권력은 이 세상에 없었다. 
옥스퍼드의 개혁자들은 모두 1500년대 초,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공감하여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국교회를 위한 순교의 씨앗이 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크랜머이다.

크랜머, 영국교회 개혁자

크랜머는 1489년 영국의 노팅햄주에서 태어나 
평생 영국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 헌신했다. 
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도와 영국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

그는 헨리 8세의 결혼 문제와 개혁 활동에 관여하여 왕을 보좌했다. 
개혁의회(1529∼1536)를 소집해 반 교황 입장을 표명했고, 
1531년에는 감독들로 하여금 헨리 8세가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유일한 최고 통치자이자 
교회와 성직자들의 수장임을 인정하도록 했으며, 
1534년에는 마침내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영국교회를 로마교회와 영구 분리, 영국에서의 개신교회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그가 단행한 교리적 개혁은 영국교회사에서 중요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에드워드 6세가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를 도와 개신교적 개혁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먼저 예배 의식을 개혁했다. 
가톨릭적인 전통적 육조문(Six Articles, 1539)을 철회하고 
성상을 제거했으며 
미사를 성찬으로 바꿨다. 
그리고 예배 의식들을 단순화하고 
라틴어 대신 영어를 쓰도록 했다.

‘공동기도서’ 영국교회 영성의 기초

1549년에는 ‘제1기도서(The First Prayer Book)’를 제정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 기도서에 따라 영어로 예배드리도록 했고 
위반자는 처벌하게 했다. 
1552년에는 ‘제2기도서’를 제정하여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금지하고 
제단(altar)을 상(table)으로, 
승려(priest)를 목사(minister)로 바꾸었으며 화체설을 폐기했다. 
또한 교리적 개혁을 단행하여 
1552년에 ‘42조문(Forty Two Articles)’을 제정했는데 
42조문은 루터와 칼빈 등 개혁가들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서 
주요 내용은 이렇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신앙과 교회의 최고 권위는 성경이다. 
7성례 중 세례와 성찬 두 성례만 인정한다. 
성찬에 있어서 화체설은 폐지한다. 
사제의 결혼은 인정하며, 고해성사는 폐지한다. 
그리고 성찬에서 잔과 떡을 동시에 제공한다.”

특히 그가 제정한 ‘공동기도서’(1552)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국 개신교 영성의 기초를 형성했다. 
우선 그것은 전례적이었다. 
그것은 예배를 예배자의 감정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에 따라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예배가 일치의 방편이 되게 했다. 
본문은 어디서나 같았고 
구약은 매년 한 번, 신약은 세 번 낭독하도록 했다. 
<공동기도서>는 또한 교회예배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용하도록 했다. 
매주 교회의 선반에서 꺼내어 읽는 책이 아니라, 
매일 가정에서 사용되는 일상적 신앙의 동반자였다. 
크랜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이 기도서는 
기도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나누어 지속적으로 드리게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 이후의 영국 개신교회는 
에드워드의 이복누이인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이혼한 캐서린의 딸이었으므로, 
영국교회가 가톨릭으로 회복되어야만 
자신의 어머니와 메리 자신이 왕으로서 권위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개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으로 복귀시키고자 하였다.

1556년, 크랜머는 여왕 매리에 의해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당했다. 
여왕 매리는 개신교 운동의 대표자 크랜머를 공개처형함으로써 
반가톨릭운동의 물결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처형 직전에 사면을 미끼로 
크랜머에게 여왕 매리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는 한편 
크랜머 자신의 과거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크랜머는 매리의 강요에 못 이겨 철회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철회 서명을 부인하고 
다시 개신교 운동의 신앙으로 돌아왔다.

개혁자들의 순교

이로 인해 크랜머는 1555년 9월, 
교황이 세운 법정에 소환되어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고 
1556년 3월 21일 드디어 동료 라티머와 리들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형당하게 되었다. 
불이 치솟았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때 크랜머가 크게 소리쳤다.

“나는 이제 나의 전 생애에서 내가 행하고 말했던 
그 무엇보다도 가장 나의 양심을 괴롭힌 큰 실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환경 아래에서 진리가 아닌 것에 내가 작성한 성명서입니다. 
이제 나는 내가 마음속 깊이 생각했던 진리와는 다른 것을 
내 손으로 쓴 것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쓴 철회 성명서 작성을 부인하며 거부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일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타락한 내가 내 손으로 ‘
그동안 주장해온 많은 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작성하고 서명한 모든 문서를 말합니다. 
나의 진심과는 다르게 나의 손이 범죄하였으므로 
나의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래서 나는 내가 화형에 처해질 때 그 손을 먼저 태울 것입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반그리스도적이기 때문에 
그의 잘못된 모든 교리를 나는 부인합니다.”

크랜머는 불이 붙을 때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다 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타오르는 화염 속에 자기 몸을 맡겼다. 
운명의 순간, 그는 스데반처럼 크게 외쳤다.

“주 예수시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크랜머는 그렇게 이 땅을 떠나갔다. 
그 역사적 순교의 현장이 
영국 영성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출발점이 된 것을 감사하며 
순교탑을 떠났다.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9) 권력과 영국교회

                             입력 2012-10-07 17:4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9) 권력과 영국교회 기사의 사진

교회는 권력이 돼선 안되지만 종속돼서도 안된다 

권력(정치)과 무관한 교회의 시대가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권력에 의해 핍박받던 시대요,

중세교회는 교회가 스스로 권력이 된 시대였다.

근세교회는 교회가 새로운 권력을 낳은 시대요,

현대교회는 교회가 권력과 갈등을 빚은 시대였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교회는 권력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교회와 권력의 관계는

메디치가, 루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뮌처, 히틀러, 중국 공산당,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역사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영국 교회와 권력

그것이 가장 치열하게 나타난 것은 영국 교회였다.

영국 교회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권력과의 변화무쌍한 관계를 거쳐 왔다.


그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헨리 8세: 수장령 선포 및 가톨릭으로부터 분리.

에드워드 6세: 개신교 개혁.

메리 여왕: 가톨릭으로 후퇴.

엘리자베스 여왕: 영국국교 정착.

제임스 1세: 가톨릭 옹호, 왕권신수설.

찰스 1세: 청교도 박해.

찰스 1세: 처형 후 크롬웰 공화정.

찰스 2세: 영국 국교 복귀, 비 국교 박해.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윌리엄: 명예혁명, 통일령으로 개신교 종교자유화.


이렇게 변화무쌍한 역사가 또 있을까?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시작된 권력과 교회의 긴장은

1689년 통일령에 의해 모든 개신교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볼 수 없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왕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교회가 좌지우지되었다는 점이다.

권력은 교회를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킨 개혁의 힘이었지만

동시에 교회를 핍박하는 힘이기도 했다.


도대체 청교도는 언제, 왜 일어났는가?

메이플라워호는 언제 미국을 향해 떠났는가?

영국 교회의 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영국의 정치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헨리 8세, 개혁운동의 시작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리나 신조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 교회 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부터 발생했다.


그러나 헨리의 이혼 문제 때문에 영국 교회 개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의 이혼이 개혁의 계기가 되었지만 원인이 되지는 않았다.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개혁에 대한 시대적 정신이 있었고 국민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18세 때 왕이 되면서

아버지 유언에 따라 형의 아내 캐서린과 결혼했다.

훗날 헨리는 그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정에 서야 했다.

분노한 헨리는 토머스 크랜머의 도움으로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선포하고

반 가톨릭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1536, 1538) 교리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반 가톨릭 정책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1547∼1553)로 이어졌다. 

크랜머의 보좌를 받은 에드워드는

가톨릭적인 예배 의식을 개혁하고

공동기도서를 통해 예전적인 영국 교회 영성의 기초를 놓았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42개 조문’은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 때 ‘39개 조문’으로 개조되어

오늘까지 영국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고 있다.


에드워드가 갑자기 사망하자

헨리와 캐서린의 딸 메리가 즉위했다.

메리는 반 개신교적이었는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가톨릭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그는

에드워드 때 쫓겨난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개혁파 지도자들을 투옥했다.

크랜머, 래티머, 리들리가 순교한 것이 이때였다.

그래서 역사는 그녀를 ‘피의 메리’라고 부른다.


청교도의 탄생

그러나 메리의 급진 정책은 영국 국민의 반감을 샀고

결과적으로 영국을 개신교 국가로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메리를 이은 엘리자베스(1558∼1603)는 종교 문제에 전념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 하에 영국은 강력한 개신교 국가로 등장했다.

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의회에서 수장령을 재선포(1559)하여

자신이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임을 선언했고

통일령을 발표, 가톨릭적 규칙들을 폐지했다.


그러나 겉으로 개혁적으로 보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치들이

오히려 미온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책은 겉으로는 개신교적이었지만

가톨릭과 루터, 칼빈주의를 절충한 혼합적인 것이었다.

그녀에게 교회는 국가적 통일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스도가 아닌 왕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한 점도

반대 진영은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청교도운동(puritanism)이다.


청교도운동은 156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혼합적 종교 정책에 반대하여

교회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미신적 찌꺼기를

더 많이 걷어내야 한다고 믿은 개신교 서클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교파운동이 아니라

다양한 교파들(장로교, 회중교, 분파적 회중교, 침례교 등)의 연합운동이었다.


이러한 개혁적 청교도운동도

또 다른 왕이 나타나자 핍박받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왕이었다가

영국 전체의 왕이 된 제임스 1세(1603∼1625)였다.


제임스는 즉위하자마자(1603) 청교도들이 탄원한

성찬 시 무릎 꿇는 것,

세례 시 십자가 긋기 등의 의식 폐지 요청을 거부하고

영국 국교 의식에 따르지 않는 자를 영국에서 추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감독이 없으면 왕도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청교도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만명의 ‘언약도’가 스코틀랜드에서 순교했으며

그때부터 분리파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메이플라워호는 이때(1620) 신대륙으로 향했고

그후에도 20여년간 약 2만여명의 청교도들이

조국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통일령’, 개신교의 승리

제임스 1세 서거 후

아들 찰스 1세 때 영국의 사태는 더 악화되어

비 국교도에 대한 박해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왕의 탄압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국민과 의회는 왕과의 싸움을 선언했고

그 열매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나타났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7년 의회에서 최종 통과되었는데

루터 종교개혁 이후 125년간의 개혁적 신앙고백과

청교도적 칼빈주의 사상을 포괄했다.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되었고,

1649년부터 1658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이 호민관으로 영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함으로써

왕정이 복고되고 영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리처드 박스터(1615∼1691), 존 번연(1628∼1688),

존 밀턴(1608∼1674) 등의 기독교 문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다.


찰스 2세 사후(1685년) 그의 아들 제임스 2세가 잠시 계승했으나

곧 국외로 추방되고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

명예혁명으로(1688) 즉위하자

청교도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결국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1689년 ‘통일령’에 의해

드디어 모든 개신교 교파에게 최종적인 자유가 선포되었다.


교회는 권력(정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교회는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타협하거나 종속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지배하지도 말아야 한다.

니버가 말한 대로

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transform) 역사 변혁의 능력이다.

영국 교회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0) 노리치의 줄리안

                                    2012.10.14 20:34


16가지 ‘사랑의 계시’ 받고 교회에 은둔 기도의 삶

지난 추석 연휴, 가까운 산에 올랐다. 
골짜기를 타고 힘겹게 정상에 올라가니 청명한 가을 하늘이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역시 높은 산은 깊은 골짜기가 만든 것이었다. 
영성의 산도 그러한가? 
그렇다. 무대처럼 드러난 영광의 역사 배후에는 
반드시 기도의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영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헨리8세로 촉발된 교회 개혁이 
오랜 고난과 핍박의 산고 끝에 청교도를 낳고 
그 뿌리에서 미국이 태어났으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 구세군, 스펄전, 웨일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이 땅에 토마스와 존 로스의 선교의 발자취가 남겨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골짜기에서 말없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 첫 번째가 노리치의 줄리안이다. 

줄리안, 기도의 사람 

줄리안은 1342년 12월, 영국 노리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노리치는 영국의 동부, 멀리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18세기 후반까지 영국 지방도시 중 가장 번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30여개의 교회는 당시의 번영을 말해준다. 

줄리안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은둔하며 기도했던 교회가 줄리안교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줄리안이 평생 기도했던 줄리안교회는 지금 어디 있을까? 
줄리안교회는 현재 성공회 수녀회에서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 
1942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를 성공회가 재건한 것이다. 
낡은 교회의 담을 손으로 만졌다.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이 작은 교회에서 
한 여성이 평생 기도하며 살았다니….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고통과 절망의 시대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민생이 파탄되고 흑사병으로 유럽인 3분의 1이 죽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 농민혁명(1381) 등으로 유럽 전체가 혼란에 빠졌고 
교황은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끝내고 막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치는가?(롬5:20)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 독일 라인강에서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헨리 수소, 토마스 아 켐피스 등이 
활동했던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똑같은 시대 영국에서도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들을 일으키셨다. 
그들이 리처드 롤, 윌터 힐톤, 무명의 ‘무지의 구름’ 작가, 그리고 줄리안이다. 

주님은 나의 기쁨, 나의 만족 

평범했던 중세의 여성 줄리안이 은혜의 사람이 된 것은 
어느 날 임한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다. 
1373년 5월 13일, 서른한 살의 줄리안은 
심하게 앓다가 하나님으로부터 16가지 계시를 받았다. 
이것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에 기록했다. 

줄리안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다. 
그가 본 16가지 계시 중 10가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었고 
나머지는 예수님의 말씀, 그 주변의 모습, 그리고 줄리안과의 대화였다. 

우리도 어느 날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감격을 느낄 것이다. 
줄리안이 그랬다. 
그는 놀라움과 감탄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앞에 눈물로 고백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에 만족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선하신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은 나에게는 기쁨이며 무한한 즐거움이다. 
만일 더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줄리안은 예수님이 
고난은 그에게 즐거움이요 기쁨이요 무한한 행복이라고 한 말 속에서 
세 가지 천국을 보았다. 
천국은 ‘기쁨’ 곧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곳이요, 
‘행복’ 곧 예수님이 영광 받는 곳이며, 
‘무한한 즐거움’ 곧 성령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곳이다.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즐거워하시는 곳. 
그런데 그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는 순간 이런 은혜가 임했다. 
“나는 당시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고통 속에 계신 예수님을 나의 천국으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천국도 나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장차 내가 그곳에 있을 때에 
예수님은 나의 기쁨이 되실 것입니다.”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줄리안에게 예수님을 유일한 기쁨이요 만족으로 여기게 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기쁨, 다른 만족은 없었다. 
기쁨은 동시에 통회와 영혼의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세 가지 선물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서른 살에 육신의 병에 걸리게 해달라는 것이요, 
셋째는 그가 세 가지 상처를 체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레너드 스위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응할 뿐이다.’ 
작은 사랑은 갚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큰 사랑은 갚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너무 커서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 

줄리안도 십자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상처를 달라고 기도한다. 
“주여, 나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나의 죄를 회개하는 통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을 깨닫는 깨달음의 상처를 주옵소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것을 ‘상처’라고 불렀을까? 
십자가에서 입은 예수님의 상처의 작은 부분이라도 
그는 자기 몸에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이 모든 기도를 생전에 응답받았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줄리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에게 죄는 치명적인 것이다. 
죄가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만일 죄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깨끗했을 것이며, 
우리를 처음 지으셨을 때의 하나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한 역설적인 은혜를 베푸신다. 
즉 “죄는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들이 잘될 것이다.” 
죄는 분명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은 죄가 인간에게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다. 
“선하신 주님은 내가 제기할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의심에 대답하시면서, 
‘나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친히 모든 종류의 것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 고난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보좌에 앉으신(계4:2), 일찍이 죽임 당한 그리스도를(계5:6) 바라보아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일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