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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7)-(20) 떼제공동체 ① - ④

영국신사77 2016. 4. 13. 22:1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7) 떼제공동체 ① 침묵


                                       입력 2012-04-29 18:18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7) 떼제공동체 ① 침묵 기사의 사진


침묵은 단순히 ‘말 없음’이 아니라 ‘말씀 채움’이다 

떼제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철도인 떼제베(TGV)를 탔다.

파리까지 4시간 걸렸고 파리 동역에서 리옹역까지 택시로 15분 걸렸다.

리옹역에서 다시 떼제베로 갈아타고 마콩에서 내린 후

무거운 가방을 들고 허름한 시골버스 뒷좌석에 앉을 때까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낯선 이국땅의 정취는 그만두고

우선 당장 길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나에겐 시급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목가적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겨운 종소리가 뎅그렁거리는 언덕에 들어서자

떼제는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길은 멀었지만 마음은 가까웠다.

처음 왔지만 언젠가 와 봤을 것 같은 마음의 고향,

떼제가 가깝다고 느낀 이유는 또 있었다.

창시자 로제 수사 때문이다.

로제 슈츠(Roger Schutz)는

1915년 스위스의 너샤텔 근처 프로방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혁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역시 로제가 어렸을 때

가톨릭교회에서 기도할 만큼 에큐메니컬한 사람이었다.

로제가 교파를 초월한 화해의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그 자신 역시 개신교 출신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안심이 되고 자랑스러운지…. 

로제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의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젖은 유럽의 영성적 기후 아래 자랐다.

폐결핵으로 요양하던 중 강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유럽의 평화와 갈라진 그리스도인의 화해를 위해

아주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오랜 기도와 준비 끝에

25세의 나이로 로제는 스위스를 떠나

전쟁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로 갔다.

공동체를 시작할 집을 찾던 중 고도(古都) 클루니(Cluny)에 도착했고

근처에 집 하나가 났다는 말을 듣는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두리번거리다가

폐허처럼 버려진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먹을 것을 구했는데

할머니가 음식을 주고 잠자리도 제공했다. 

다음 날 길을 떠나려고 집을 나설 때

할머니가 한 말이 로제의 영혼에 부딪쳤다.

“젊은이, 여기에 머물게. 우리는 너무 가난하고 외롭다네.”

그날 로제는 이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리고 근처에 집을 사 혼자서 기도하며 살기 시작했고

피난민들, 특히 유대인들을 맞이했다.

그 마을의 이름이 떼제였다.

몇 년 뒤 첫 형제들이 동참했다.

떼제의 생활은 성찰과 나눔의 시간, 매일 세 번의 공동기도 참석,

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인 노동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하루 세 번 드리는 공동기도(예배) 시간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일손을 내려놓고 교회로 모인다.

아침 기도는 8시15분, 낮 기도는 12시20분, 저녁 기도는 8시30분에 시작된다. 

기도회에서 떼제의 수사들은 한 가운데 흰 기도복을 입고 앉고

그 좌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방문객들이 앉는다.

약 40분간 진행되는 예배는

찬양과 성경봉독(각 나라말로), 중보기도, 마침기도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심에 침묵기도가 있다.

침묵은 8∼10분 진행된다.

얼마나 침묵이 중요한지

아예 예배 때마다 입구에

침묵(silence)이라고 쓴 표지판을 든 사람들이 서 있다.

예배 때 소란하거나 사진을 찍으면 즉시 달려와 제지한다.

침묵은 떼제에 흐르는 기본적인 영적 분위기다.

소음은 현대인을 이루는 가장 필수적인 존재요소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 침묵은 낯설 뿐 아니라

삶의 방해요소이기도 하다.

부지런히 말하고 설득해야 성공하는 세상에

스스로 말을 중단한다는 것은 성공을 포기한 것과 같다.

떼제의 침묵은 예배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 에티엔느 샘이라는 정원은 그야말로 침묵의 섬이다.

이곳은 침묵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두 번 개방한다.

아름다운 숲이 있고 오솔길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못이 있고 다리가 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눕거나 걸으면서 침묵으로 기도한다.

침묵은 처음에는 답답하지만 적응될수록 자유롭다.

길게 자신을 변호하거나

장황하게 자신을 광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몇 시간 동안 침묵하며 앉아 있을 때

테레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도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기도를 하려면 우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요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테레사의 말이 이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토머스 머튼이 ‘묵상의 능력’에서 말한 대로

성스러운 태도는 본질상 묵상적이며,

세속적인 태도는 본질상 활동적이다.

활동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활동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의 기초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활동은 필요하지만

우리의 활동이 하나님의 활동을 대신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묵상적이다.

그러나 침묵을 위한 침묵은

묵상적인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근육을 위해 근육을 만드는 운동선수와 같다.

침묵을 위해 침묵하는 것을 머튼은 정적주의(quietism)라 불렀다.

정적주의는 침묵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불교의 선(禪)과 비슷하다.


정적주의는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고독한 인간으로 선다.

정적주의는 자기를 비우기는 하지만

비움의 목적이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침묵은 다만 비우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다.

하나님 없이 무기력한 영적 진공상태로 남아

그 중심에 자기가 자리한 상태를 성경은 침묵이라 부르지 않는다.


정적주의의 근본은 자기 사랑(自愛)이요,

침묵의 근본은 하나님 사랑이다.

정적주의는 하나님과 분리된 공간 안에 자기가 사는 것이고,

침묵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된 상태로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성경적 침묵이냐 아니냐의 시금석이 된다.

침묵은 본회퍼의 말 같이

다만 말 없음이 아니라 말의 성찬, 말의 넘침이다.

영혼 깊숙한 곳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다.

침묵은 또한 무언 이상의 삶의 태도이다. 

로제 수사가 즐겨 사용했던 말 중에

잠정적이란 말이 있다.

잠정적인 것의 반대는 항구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구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 가장 잠정적인 것이 가장 항구적인 것이요,

가장 불확실한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침묵은 말없이 하나님의 잠정성을 받아들이는 삶의 고요한 태도이다.

침묵은 말없이 하나님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떼제에 화해의 교회를 확장하면서 지은 공간은 콘크리트로 짓지 않았다.

언제나 허물 수 있고 언제나 증축할 수 있는 임시적인 칸막이로 지었다.

부분이 모이면 전체가 되고

전체도 언제나 부분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잠정성이다. 

우리에게 침묵은 가능한가?

서로 사랑하면 말이 필요 없다.

침묵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사랑의 밀어(密語)이다.

우리는 자주 침묵하는가?

침묵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가 더 침묵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자주 말씀하신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8) 떼제공동체 ②찬양

                                   입력 2012-05-06 18:0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8) 떼제공동체 ②찬양 기사의 사진


인도자도 특송도 없는 단순한 찬양, 그러나 생명력이 넘친다 

영혼을 울리는 찬양은 어떤 것일까?

예배가 하나님의 쉐키나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찬양은 그 쉐키나 속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다.

우리의 영이 속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가슴을 적시는 임재의 예배가 아닐까?

그 가슴 절절한 예배를 단 한번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혼은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하늘을 날 것이다.

떼제의 생명력은 예배에 있다.

하루 세 번 드리는 예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달려가고픈 거룩한 기대를 갖게 한다.

떼제 예배는 곧 찬양의 예배다.

예배 속에 찬양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곧 찬양이요, 찬양이 곧 예배다. 

먼저 예배는 묵상적인 분위기가 담긴 찬양 한두 곡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시편을 찬양한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시편을 한 구절씩 읽거나 아니면 독창으로 노래한다.

그러면 모두가 “할렐루야”로 응답한다.

찬양하는 사이에 몇몇 사람이 촛불을 손에 들고

미리 준비된 등잔이나 촛대에 가서 불을 붙인다.

 그 불은 침묵 가운데 타올라

그리스도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을 상기시킨다. 

그런 다음 성경을 읽는다.

성경 구절은 주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짧고 쉬운 것으로 택한다.

말씀을 읽은 후 묵상의 노래를 하나 부른다.

그리고 침묵기도가 시작된다.

찬양은 침묵으로 이어지고 침묵은 찬양을 낳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몸을 맡기듯

침묵은 예배자를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한다.

침묵은 찬양을 깊게 하고 찬양은 침묵의 샘에서 더 맑아진다.

침묵은 곧 청원의 기도(혹은 중보기도)로 이어진다.

한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청원(중보)의 기도를 드리면(주로 수사들)

사람들은 “주여 들어 주소서”로 응답한다.

청원의 기도가 끝나면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짧은 마음의 기도이다.

하나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들어 주소서” 등으로 응답한다. 

우리 예배와 비교하면 떼제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예배의 중심이 설교가 아니라 찬양이라는 것이다.

설교는 성경읽기와 침묵기도가 대신한다.

성경은 수사석 뒤편의 연단에서 읽고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그쪽으로 몸을 돌려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한다.

주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읽고 가끔 다른 나라의 언어로도 읽지만

본문은 그다지 길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양이 너무 많으면

충분히 묵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떼제 찬양은 떼제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톨릭 미사곡이 중후하지만 너무 무겁고

개신교 찬양은 자유스럽지만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는데,

떼제 찬양은 이 양 극단을 보완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작곡가 자크 베르티에(Jaque Berthier)가 대부분을 작곡했다.

베르티에가 곡을 쓰면 공동체 안에서 먼저 불러 보고

익숙해지면 공식적인 찬양으로 올렸다고 한다.

떼제 찬양은 단순하다.

대부분 한두 소절의 반복이요, 내용은 물론 성경적이다.

찬양의 내용은 주로 ‘경배(adoration)’이다.

인간의 요구를 위한 찬양은 거의 없다.

키리에’ ‘할렐루야’ ‘글로리아’ 등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떼제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찬양을 지향한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인간을 위한’ 찬양에 익숙한 사람들은

순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에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점차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체험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향해 직접 말하는 찬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떼제 찬양은 반복한다.

찬양을 반복하는 이유는

처음에 가사가 주로 프랑스어 라틴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도움을 줄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이 찬양에 도움이 되고

반복 자체가 찬양의 본질임을 알고

한 곡을 보통 대여섯 번 아니 스무 번 이상 부른다.

처음에는 진부하게 느끼지만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 가사의 내용이 화선지에 먹물이 배듯

심령에 배어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그것은 분명 여러 가지 다양한 찬양을 많이 불러야

좋은 찬양이라고 인식하는 우리의 찬양과는 다르다.

우리의 찬양은 가사가 갖는 깊은 영적 의미보다

찬양의 감성적 선율에 더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떼제 찬양은 기교가 없고 단순하다.

일체의 당김음, 가성도 없다.

선율은 서양의 이지적 선율도 아니며 동양의 구슬픈 가락도 아니다.

고도의 절제된 균형미와 축제의 기쁨이 배합된 노래로,

감성적 파토스(pathos)를 뛰어넘어 영혼을 해방시키는 깊은 영성의 경지에 이른다.

우리의 찬양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양된 감정, 자기 연출, 의도적 기획 등을 볼 수 없다.

소란스러운 악기 연주를 통해 공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물론 없다.

조용한 것이 반드시 경건한 것은 아니며,

시끄러운 것이 반드시 경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예배를 두 종류로 나눈다.

경건한 예배와 축제적인 예배다.

전통적인 예배는 경건성을 지향하고 현대적인 예배는 축제성을 지향한다.

두 예배의 차이는 예배신학의 차이는 물론, 하나님의 성품의 차이에서 나온다.

경건성을 지향하는 예배는 초월적인 하나님,

즉 하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축제성을 지향하는 예배는 내재적인 하나님,

즉 우리와 가까이 함께하시고 친밀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나이 든 세대는 주로 경건성이 익숙하지만 젊은 세대는 축제성에 익숙하다.

그래서 교회마다 어떤 예배는 경건한 전통예배,

어떤 예배는 현대적인 축제예배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예배자들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에게는 유익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예배를 수요자 중심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닌가?

과연 예배자가 좋아하는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가 하나님께 무엇일까?

떼제 찬양은 특별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지휘자도 없고 앞에 나가서 특송을 부르는 사람도 없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특별 연주나 찬양자도 없다.

이름 있는 성악가의 특별출연도 물론 없다.

모든 회중이 십자가나 성화, 제단 쪽을 바라보고 함께 찬양하며

선창자도 회중 가운데 있다.

처음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인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에 신기해한다.

찬양의 형태는 거의 유니송이고 대부분은 4부 합창 혹은 윤창으로 부른다.

물론 좋은 예배를 위해서

떼제는 매일 오후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찬양을 배우도록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만큼 잘 준비되고 기획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기획하면서

우리의 예배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예배의 영성보다 예배의 감성을,

모두의 예배보다 특별한 사람의 예배를,

예배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쉐키나보다

예배를 위한 인간적 준비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가?

한국교회 예배, 떼제가 한 대안이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9) 떼제공동체 ③환대

                                        입력 2012-05-13 18:02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9) 떼제공동체 ③환대 기사의 사진


세상 나그네가 ‘나’를 얘기하면 들어준다, 행복해진다 

떼제가 주는 은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환대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떼제에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수사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그네들이다.

많을 때는 매주 5000명까지 오고 1년에 10만명이 온다.

매주 토요일 저녁, 주일 오후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필자가 만난 스웨덴에 사는 한인 이숙일씨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버스로 33시간이나 걸려 왔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를 비롯, 전 유럽을 망라한다.

유럽은 말한 것도 없고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다.  

떼제의 은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서로 나그네이면서

마치 오랫동안 만난 형제와 같다는 데 있다.

처음 만나도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인 듯

한번 보고 싱긋 웃기만 하면 금방 친구가 된다.

왜 처음 만난 사람끼리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까?

떼제에서는 떼제에 여러 번 왔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매년 가족과 함께 온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자주 오느냐고 물으면 공통된 대답이 있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환영받는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아요.”  

누가 떼제에서 환영하는가?

누가 떼제의 주인이고 나그네인가?

모두가 나그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영받는다고 느낀다면 그 실체가 무엇일까?

우선 환대의 중심에 수사들이 있다.

수사들은 기도 외에

나그네를 섬기는 일이 그들의 중요한 사역인 것처럼 산다.

이들이 나그네들을 섬기는 방식 중의 하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매일 저녁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은 수사들 앞에 선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분명 시간으로 보아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내일 아침부터 시작할 인생의 실제적인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젊은이는 아마도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나이든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처한 어떤 영적 상황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사들이 길게 답변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해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들어줄 뿐이다.

기껏해야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러면 그 다음 날 나그네들은 조금 더 밝은 얼굴로 자기 길로 떠난다.

길을 가면서 길을 물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그네 길에서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 신앙의 길은 순례의 길이다.

그것은 천국까지 가는 은혜의 길을 걷는다는

반적인 순례의 의미 이상의 순례의 길이다.

신앙은 언제나 익숙한 길만 가고자 하는 우리 자신에게

익숙한 길을 떠나 최상의 길을 걷게 하는 순례의 길이다.

신앙은 천국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지만

다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긴 과정을

더 많고 즐기고 간다는 점에서 순례의 길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떠난다는 의미의 순례가 아니라

낯선 곳이든 익숙한 곳이든

새롭게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순례의 길이다. 

신앙이 순례의 길이라면 교회는 나그네의 집이다.

순례의 집에 필요한 것은 나그네를 위한 정성스러운 환대와 그

들의 허기를 채울 떡과 생수다.

지금도 이스라엘 유다광야의 베두인 촌에 가면

베두인들이 이렇게 환영한다.

“알란 왈 살란(당신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차와 요구르트와 양고기를 내놓는다.

옛날 예루살렘에서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집에 깃발을 꽂아둔 집이 있었다.

‘음식을 준비했으니 와서 먹으시오’라는 뜻이다.  

교회는 광야의 피곤한 나그네들을 향해 지붕 위에 높이 깃발을 꽂고

“여기 음식이 있으니 아무나 오시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언제나 식탁을 준비해야 하며

먹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뷰티풀 저택’과 같다.

피곤한 크리스천이 고개를 넘었더니 크고 아름다운 집이 나타났다.

이름은 뷰티풀 저택이었다.

문을 두드렸더니 주인이 나와 반갑게 영접했다.

곧 이어 신중, 경건, 분별, 자선의 이름을 가진 아가씨들이 나왔다.

그들은 크리스천에게 최선의 대접을 하며

고된 나그네의 길에서 피곤에 지친 그의 여독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새벽녘까지 깊이 자고 일어난 크리스천이 만족해서 이렇게 노래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그네 같은 인생을 위해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가득한 곳,

주님이 예비하신 그 곳, 죄를 용서받은 이 몸, 이미 천국 문턱에 사네.”  

이것이 바로 교회다.

우리가 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원들은

나그네를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있다.

유진 피터슨이 히브리서 13장 1∼3절을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었다.

“사랑이 붙드는 가운데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십시오.

필요에 따라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해 두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사들에게까지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탈무드도 환대의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회당에 공부하러 가는 것보다 낫고

나그네를 구제하는 것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낫다.” 

교회가 나그네의 집이라면

목회자는 마치 나그네를 맞이하는 사마리아 여관의 주인과 같다.

떼제의 환대의 중심에 수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수사들만 환대하는 것은 아니다.

떼제의 환대의 조금 더 깊은 곳에는 떼제의 기본정신인 화해가 있다.

떼제의 창설자 로제의 마음에 불탔던 것은 화해의 정신이다.

그는 세계 2차대전 이후 분열된 교회, 분열된 사회를 살면서

이 화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열된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형제로 품고

분열된 유럽을 치유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집에 유대인까지 숨겨 주었다.  

그래서 떼제 대예배당의 이름도 ‘화해의 교회’다.

이 교회는 1962년 독일의 ‘쉬넨 차이넨’(화해의 표징)이라는 기관이

보낸 기금으로 지어졌다. 교회당 밖에는

네 나라 언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가 화해하게 하소서.

아버지와 아들이, 남편과 아내가, 신자와 불신자가,

갈라진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서로 화목하게 하소서.”  

떼제 공동체의 정신은 화해와 일치다.

떼제의 환대 정신은 바로 화해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떼제 규칙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손님은 곧 그리스도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떼제를 찾는가?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떼제로 몰리는가?

분열과 갈등 속에 사는 세상의 상처 속에서

화해와 환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성이 더 중요하다.

신학자 올리버 크레멘트의 말이다. “

우리는 핵심이 아닌 작은 부분을 인정할 때 서로 화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화해와 환대의 정신을 잃고

우리 생각, 우리 이데올로기에 집중할 때

사람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화해가 환대를 낳고 환대가 사람을 낳는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0) 떼제공동체 ④일상의 영성

                                               입력 2012-05-20 18:13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0) 떼제공동체 ④일상의 영성 기사의 사진


소박·자유… 평범한 일상서 비범한 하나님을 만난다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거룩해질 수는 없을까?

서구 수도원의 역사는 거룩을 위해 현실을 떠나는 역사였다.

3세기의 성 안토니부터 시작하여 6세기의 베네딕트를 거쳐

현대의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은 분리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택해 왔다.


분명 분리는 거룩에 이르게 하는 길 중 하나이다.

“가서 네 독방에 앉으라. 네 골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

사막 교부의 이 말은 분리를 통해

거룩을 찾는 수도원적 거룩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누가 복잡한 현실을 떠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거룩을 찾을 수 있다면,

평범 속에서 비범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떼제가 시도한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이집트 사막이나 유다 광야에 가지 않고도 거룩에 이를 수 있을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떼제가 물었던 질문이다.

그래서 떼제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수도원은 아니다.

떼제는 모여서 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사막의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지 않는다.

떼제의 이상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나

세상과 연합된 공동체를 만들 것이냐 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떼제의 이상이다.

이런 눈으로 떼제를 보면

떼제에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많은 거룩의 부스러기들이 있다. 

떼제는 일단 전통적인 수도원 형태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삶은 철저한 공동 소유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처음부터 떼제는 자신들을 위해

어떤 기부나 선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토지도 소유하지 않으며 자본도 축적하지 않는다.


떼제 공동체의 회원이 되는 중요한 조건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3∼5년 정도 살아보면

자신이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때 종신 서원하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규율은

전통적인 수도원 규칙과는 차이가 있다.

공동체 규율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지

사람을 속박하기 위한 법적 조항은 아니다.

떼제는 아무도 붙잡지 않으며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다.

떼제는 마치 옹달샘과 같다.

누구든지 목마르면 와서 갈증을 풀고 가면 된다.

자원봉사가 있지만 그것은 하는 만큼만 하면 되고 힘들면 쉬어도 된다.

어떤 강제규정도 어떤 종파적 규율도 없다.


창설자 로제수사의 말이다.

“하나님은 힘센 방법으로 겁을 주어 자신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거룩은 결코 강압으로 되지 않는다.”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드는 것은 규율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다.

강압으로 거룩해지는 방법은 없다.

자유가 규율보다 중요하다.


‘떼제로 가는 길’을 쓴 제이슨 브라이언 산토스는

이 자유를 “침투할 수 있는 경계”라고 불렀다.

그동안의 전통적인 영성운동은

침투할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놓고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영성은 일상의 영성이 아니라 전문가의 영성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 일반인

특히 젊은이가 갖는 느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교회 안에는 침투할 수 없는 경계가 너무 많은 것이다.

전통, 혹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규격화되어 있는 숨막히는 부자유 속에서

강요되는 거룩은 자발성도 없고 생명력도 없다.


물론 자유에 한계가 있다.

떼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떼제에서도 알코올을 비롯한 음료수를 팔지만

제한된 곳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팔고 그나마도 제한된 양만 판다.

예배 때도 아무 때나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숙소에도 밤 11시까지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침묵의 정원도 아무 때나 열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이 따르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누구나 풍성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배가 중요하지만 틀에 박힌 하나의 예배 형태는 없다.

찬양-성경봉독-응송-침묵-중보기도-응송-찬양의 전체적인 순서 안에서 자유롭다.

일상의 영성은 신성한 여유에서 나온다.

전문적인 수도사가 되지 않을 사람에게

규격화된 예배, 조금도 예외가 없는 규율, 규칙, 훈련은 영성의 생명을 빼앗아 간다.

“신성한 여유란 한계를 침투하는 자유다(산토스).”


우리 교회에도 분명 침투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

그러나 너무 무거운 한계 때문에

사람들이 영성이 아닌 종교성으로 묶여 있지 않은가?  

떼제가 보여준 일상의 영성의 생명은 단순성이다.

우선 식사가 단순하다.

아침은 그야말로 작은 빵 한 덩어리와 커피 한 잔이다.

처음에는 사발 하나를 주기에 무언가 했다.

그 사발에 커피, 차, 우유 등을 알아서 타먹으면 된다.

점심, 저녁은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잘 먹는 것은 아니다.

여행하면서 호텔에서 먹는 간단한 한 끼 아침만으로도

떼제에서는 세 끼 식사가 된다.


오후에 간식을 한번 주는데 마시는 음료 하나와 비스킷 하나가 전부다.

수사들이라고 더 잘 먹는 것도 아니다.

없어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있어도 단순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먹는 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자리는 어떤가?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텐트에서 자거나 집단으로 몇 명씩 같이 잔다.

자기 방, 자기 침대가 있는 현대인에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필자는 한국인 신한열 수사의 도움으로 작은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두 평 정도 되는 방에 1,2층으로 된 침대방이다.

아내는 1층에서 자고 나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단순성의 행복이다.

자유 안에서 나누는 교제가 행복을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든 사람과의 교제든 마찬가지다.

로제가 ‘샘에서 생기를’에서 한 말과 같다.

“우리는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확신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 애쓰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과 진실한 기도를 하게 한다.

마더 테레사의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이것도 깊은 자유에서 나오는 일상의 기도다.


떼제의 오후는 성경공부, 노동, 침묵, 찬양배우기, 상담 등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우리가 떼제를 가지 않아도 매일 만나는 영적인 메뉴들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 와서 엄숙히 진행하는데

떼제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한다는 것이다.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오후, 콧노래 부르며 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성가대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행복해질까?


우리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거룩은 거룩한 공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의 임재를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 최고의 영성이다.

떼제가 보여준 이상은

세상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합되는 일상의 영성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