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하늘을 담은 소망상자… 항상 갈망해야 한다
14세기 영국, 줄리안의 시대에 또 한 명의 기도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도무지 나타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익명으로 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서 의미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그가 사제였을 것이라고도 하고 수사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통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에 대한 대응적 질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질문인 데 비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는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무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적 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두 가지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식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직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그는 이것을 ‘무지의 구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구름’이란 대기를 떠도는 물방울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근원적 결핍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지적 한계가 ‘무지의 구름’이다.
이 책의 저자가 스승으로 삼는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이성을 통한 길과 신비적인 묵상의 길.
이성을 통한 길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디오니시우스의 말대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경건한 지식은 무지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책의 저자)에게
‘우리가 하나님만 생각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며
또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 역시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분이지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잡고 소유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하나님만 생각하려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갈망, 하나님께 나아가는 힘
그렇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름 너머에 도달하여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무지의 구름이 당신 위에서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듯이
당신 아래, 즉 당신과 온갖 피조물 사이에 망각의 구름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그분이고, 내가 찾는 것도 그분이고,
그분 이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 사이에 막힌 구름을 뚫으려면
자신의 지식은 망각의 구름에 파묻어 놓고
짧은 기도로 그 하늘나라를 침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적 지연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바와 같다.
“지연될 때 거룩한 갈망은 예외 없이 성장한다.
그리고 지연되었다고 해서 느낌이 줄어들면
그것은 결코 거룩한 갈망이 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거룩한 갈망’이라고 불렀다.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거룩한 갈망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보여주는 성경적 이야기가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활동적인 방식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삶은 몇 가지 다른 측면이 있지만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상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느 쪽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온전하게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없고,
활동적 삶을 살지 않으면 올바르게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도의 삶이 우선이다.
“주여,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불평했듯이
오늘날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기도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영적인 힘을 쏟아야 한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42)
‘한 가지’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일이다.
마리아가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지식으로 나가지 않고 사랑으로 나갔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사랑을 얻으려고 죄를 의식하는 것보다 더 크게 슬퍼했고,
간절히 갈망했으며, 깊은 한숨을 쉬는 등 고통스럽게 번민했다.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갈망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한계를 무지의 구름에 매달고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안 되고 오직 사랑으로만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활동적인 삶은 이 땅에서 시작해서 이 땅에서 끝나지만
기도하는 삶은 이 땅에서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했다.”
기도, 하늘을 품은 소망 상자
결국 ‘무지의 구름’의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평생 하나님께 사랑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삶이다.
아프리카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족 사람들이
암소들이 예전만큼 우유를 많이 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던 어느 날 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하늘에서 큰 통을 들고 내려와
우유를 짜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밤, 사람들이 여인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선녀였다.
선녀를 잡은 청년은
자신과 결혼해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놓아 주겠다고 했고
선녀는 사흘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사흘 후 선녀는 큰 상자를 가지고 와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결혼하겠다고 했다.
결혼 후 어느 날, 선녀가 외출한 뒤
호기심이 발동하여 상자를 열고 들여다본 남자는 깜짝 놀랐다.
그 상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랑이 상자를 열어보았다는 걸 알게 된 선녀는
더 이상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왜 빈 상자처럼 사소한 것 때문에 자신을 떠나려는지 물었다.
이때 선녀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떠나려는 것은
당신이 그 상자를 열어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당신이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려는 것은
당신이 그 상자가 비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상자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자는 제 고향 하늘의 빛과 공기와 냄새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이 땅에 살면서 날마다 상자를 보고 사는 것은
언젠가 저 상자에 담긴 하늘의 빛과 공기를
영원토록 마시리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상자가 비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내 어찌 당신의 아내로 이 땅에 살 수 있겠습니까?”
선녀는 떠났고 남자만 홀로 남았다.
‘무지의 구름’에서 저자가 꿈꾼 것은,
선녀와 상자의 관계 같은 삶이 아닐까?
기도는 하늘을 담은 소망 상자가 아닌가?
<분당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