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4)-(27) 마르틴 루터 & 카타리나 폰 보라/ (28)-(30)스페너, 뷔르츠부르크 ,귀츨라프 선교사

영국신사77 2016. 4. 15. 16:08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4) 스토테른하임, 무서운 하나님

2012.06.17 18:00 국민일보

벼락을 맞고 혼비백산한 루터가 서원한 스토테른하임 들판에 세워진 기념 돌비.
사진 (2)  루터가 무릎으로 올라간 로마 라테란 성당의 빌라도 계단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그날의 개혁, 오늘 교훈으로… 한국교회 갱신 대장정 나선다 기사의 사진

루터, 무서운 하나님 벗어나 은혜로운 하나님 찾다 
-에르푸르트 

잔느 귀용의 고향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 도착하자 밤이 시작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 내려 아름다운 고성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지낸 후 새벽에 일어났다. 
아직도 안개에 덮인 라인강변을 아침 일찍 걸으며, 
문득 독일에서의 첫날이 새벽과 함께 시작된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500여년전 이 땅에서도 개혁의 새벽이 밝았기 때문이다. 
1500년 동안 유럽의 밤하늘을 덮고 있던 어두운 중세는 
16세기와 함께 여명을 맞았다. 
그렇다. 오늘부터는 마르틴 루터와 함께 가는 길이다.

루터의 길을 출발하면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에르푸르트였다. 
젊은 루터가 청운의 꿈을 안고 법학을 공부한 곳, 
그러나 하나님은 이곳에서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을 통하여 
2000년 교회사를 바꾸어 놓았다. 
서둘러 에르푸르트의 외곽지역에 있는  스토테른하임으로 향하였다. 

1505년 7월 2일 루터는 
친구와 함께 부모님 집에 다녀오다가 이 들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내리쳤다. 
루터는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고 
친구는 즉사하고 말았다. 
그것은 루터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황한 루터는 깜짝 놀라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고, 
곧이어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스토테른하임에는 
현재 그것을 기념한 약 2m의 돌비가 세워져 있다. 
돌비의 맨 위에는 ‘거룩한 땅’이라 쓰여 있고, 
그 밑에는 ‘종교개혁 운동으로의 전환점’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번개 속에서 
 이곳에 있던 젊은 루터를 향하여 
 그 길이 제시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맨 밑에는 
당시 루터가 외쳤던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Hilfe, Du Sankt Anna, ich will ein Monch werden
(도우소서, 성 안나여,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이 충격적인 경험이 
젊은 루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때까지 루터의 마음에 있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었다. 
 
루터가 하나님을 무섭게 생각했던 이유는 
우선 엄한 가정환경 때문이었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는 본래 농부였으나 광부로 전향했고, 
어머니 마가레타는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신적인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따라 
매우 엄격하게 살았다. 
훗날 루터가 쓴 대로 어머니는 
그가 호도 한 개를 훔쳤다고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때렸고, 
아버지도 무슨 일로 루터를 때려 
루터가 무서워 도망친 적도 있었다. 

루터가 받은 교육 또한 루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는 학교에서 아무 이유 없이 
15대의 회초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의 종교적 상황과 교회의 가르침이 
루터의 마음을 공포에 잠기게 했다. 
당시 독일에는 미신 사상이 만연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숲과 바람과 물속에 
요정들과 귀신들과 유령들과 마녀들이 산다고 믿었다. 
 
교회는 지옥의 공포와 아울러 성례와 면죄부를 통해 
사죄가 주어진다고 미신처럼 믿었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도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로서 
성모 마리아와 성 안나를 통해 
겨우 그 진노를 무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 앞에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살았다. 
그는 매일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적은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일하며, 
육체를 죽이고, 가난의 치욕과 구걸의 수치를 당하며 살았다. 
 
그가 사제로서 첫 미사를 집행할 때 
제단 위에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성례 집행으로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사실에 무서워 떨었다. 
 
나는 티끌과 재이며 죄로 가득한데 
 어떻게 감히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번뇌와 시련은 
오랫동안 그의 여린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3일간 금식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혹독하게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이 그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을 너무 지키기 어려워,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1510년[27세], 때마침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논쟁이 생겨 
그 논쟁에 대한 교황의 급한 대답을 구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 루터는 로마로 파송되었고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교황의 자문뿐 아니라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온갖 정력을 쏟았다. 

그는 로마의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Scala Sancta’, 
곧 28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갔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이 오른 계단이라고 전해지는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입을 맞추며 28계단을 올라갔으나 
그에게는 아무런 마음의 변화도 없었다. 
 
그때 그가 부르짖었다. 
“이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로마를 찾았으나 
실망과 환멸만 안고 로마를 떠났다. 
그리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루터의 체험은 
중세적 신앙과 영성으로 살아온 그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의 길을 찾는 계기를 제공했다.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을 쓴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영적이라는 것은 속세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지향하는 생명이다.” 
 
이미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수도원으로 삼는 영성을 몸소 실천한 바 있다. 
그러나 영성의 개혁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영성의 중심에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있어야 하며, 
공간적 중심도 
수도원에서 일상생활로 전환되어야만 했다. 

그나마 그것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짓눌린 의무감과 종교심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영성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 삶의 문제다.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두렵고 떨리는 삶을,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나님은 법학도 루터를 
어느 날 벼락 가운데 불러 
율법적인 수도원과 부패한 로마를 통해 
새로운 개혁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먼저 루터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전기작가 베인톤 교수가 쓴 
‘Here I Stand’에 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성자의 이름을 부른 이 청년이 
 나중에는 성자 숭배를 배격하게 되었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수도원 제도를 거부하게 되었고, 
 가톨릭교회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중세 가톨릭주의의 구조를 깨뜨려 버렸고, 
 교황에 대한 헌신을 다짐했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다. 
모든 영성의 뿌리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영성의 방향을 결정한다. 
 
루터의 역사는 
곧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전환되는 역사였다. 
 
그리고 스토테른하임에서 만난 하나님은 
중세의 오랜 세월, 
사람들을 눌러왔던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하나님으로 가는 개혁의 역사적 갈림길이었다. 
우리도 매일 그 길을 지난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5) 바르트부르그, 강하신 하나님

 

입력 2012-06-24 17:38 국민일보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5) 바르트부르그, 강하신 하나님 기사의 사진
 
루터, 영적불안 걷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 노래
루터의 삶의 궤적을 따라 
아이제나흐(Eisenach)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하의 고향이기도 한 이 곳은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도움으로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이다.

 

또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의

찬송가 가사를 쓴 곳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루터가 이곳에 온 것은 1521년 5월로

베텐베르그 95개조 선언 발표(1517년) 4년 후지만,

이 성은 시기와 관계없이 

루터의 일생에 중요한 전환과 상징을 제공한다.  

 

루터가 일생동안 품고 있었던 신학적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신학자 커(Hugh T. Kerr)는 

의로운 하나님’과 ‘은혜로운 하나님’의 갈등이었다고 한다.

 

의로운 하나님은 누구일까.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적 하나님이다.

 

믿음과 삶의 표준이 

하나님의 완전에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언제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하나님이다.

그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고 그 괴리가 불안을 가져온다.  

 

폴 틸리히는 

중세의 영적 핵심은 불안이었고,

이 불안이 

곧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중세의 사람들은 

이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려고 했는가.

사람들은 자신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리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지를 무릎으로 순례하기도 하고,

(예루살렘, 스페인 콤포스텔라, 영국의 켄터베리 등),

 

거룩한 성물을 수집하고 숭배하기도 하고,

(프리드리히 선제후도 5000점의 성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 선제후(選帝侯, 영어로는 일렉터 (Elector), 라틴어: Princeps Elector 

  프린켑스 엘렉토르, 독일어: Kurfürst 쿠르퓌르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이다. 선거후라고도 한다.

 

빈번하고 화려한 예배의식과

기도생활

(예배가 없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과도한 봉헌(기부)과 속죄권의 구입,

금욕적인 자기 고행,

우람한 교회 건축,

예술 작품의 봉헌 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했다.

 

이 불안이 루터에게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가 

수도원에서 고민한 문제가 이것이었다.

 

죄로 고뇌하는 루터를 보고 

수도원장 슈타우피츠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

 그대는 어째서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가?”

그러나 슈타우피츠의 조언이

그리고 필사적인 참회와 고행이 루터를 평안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수도원 탑 안에 있는 서재에서 

소위 ‘탑속의 체험’을 경험한다.

 

그때 루터는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루터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그린 것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부르짖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도 없고 불경건하지도 않은 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 대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내 죄를 담당하셨다.”

 

그 순간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었다.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은 구원자의 모습,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발견은 

그 후 로마서 연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롬 1:17에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

*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 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천국의 문이 열리고 

그 속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무거운 짐같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달콤한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로 루터는 한번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았다.

 

1521년 1월, 

교황이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출교처분을 내리자,

독일 정부와 교회가 보름스로 루터를 소환했다.

 

독일 정부는 루터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요한 후스를 상기시키면서 강력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루터는 말했다.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

 

보름스에서 의회가 그의 주장과 사상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증거와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옳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다른 방도를 취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가 보름스를 떠날 때 

독일 정부는 군사들로 하여금 호위하게 했지만,

로마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기 위하여 교활한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 챈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기사들을 보내

루터를 납치하는 형식으로 

바르트부르그라는 성에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에서 

융거 에코라는 이름으로 10개월을 보내면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12주만에 독일어로 번역했다. 

 

나는 바르트부르그 성을 직접 걸어 

루터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던 ‘루터의 방’이 아담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 방은 사실 교황이나 왕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가둔 죄수의 감옥이었다.

 

죄수의 감옥을 

루터는 자유의 방으로 바꾸었다. 

산 아래 아이제나흐 도시가 펼쳐졌다.

 

루터는 바로 이곳에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의 가사를 썼다.

 

 

그렇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모든 두려움의 근저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종교적 본심일 수 있으나,

성경적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도 무서운 분도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값어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값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폴 틸리히).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효험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분이 

  신뢰할 만한 분인가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이다.

 

  비록 내 믿음이 연약해도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과 똑같은 보배,

  똑같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이 각자 백 굴덴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은 그것을 종이 주머니에 담아 놓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쇠로 만든 금고에 보관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똑같은 보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당신과 나의 신앙이 강한가 약한가에 상관없이

  똑같이 은혜로운 분이시다”(루터). 

 

무엇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가?

우리의 믿음,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렇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신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6) 비텐베르크, 은혜의 하나님

                                           

2012.07.01 17:58 국민일보


용감했던 개혁자 루터, 하나님 앞에선 은혜받은 ‘거지’였다

루터 여행은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비텐베르크로 가는 길에 아이스레벤에 들렀다. 
아이스레벤은 루터가 태어나고 세례받고 죽은 곳이다. 
 
우리나라 읍 장터 정도의 작은 시장을 지나 
루터가 세례받은 교회, 
루터가 태어나고 살았던 집, 
그리고 어린 루터가 다녔다는 교회에 들렀다. 

어린 루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드디어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도시가 주는 무게가 느껴졌다. 
 
비텐베르크는 멜랑히톤과 함께 루터가 묻힌 곳, 
무엇보다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든 95개 조항이 새겨진 곳이다. 
 
‘루터하우스’에 들어갔다. 
루터가 1508년부터 살고 활동했던 곳으로 
1883년부터 루터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루터박물관에는 루터에 관한 1000여점의 원본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통, 
루터가 직접 설교했다는 강단(이 강단에서 루터는 면죄부를 비판하는 등 
2000회 이상 설교했다고 한다), 
1524년까지 마지막으로 입었던 루터의 수도복,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초판, 
그리고 지하에 있는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발자취 등이다.

또 루터박물관에는 루터가 한 중요한 말들이 새겨져 있었다. 
“Wo Christus ist, geht er allzeit wider den Strom
(Where Christ is, there he always goes against the flow·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 있다).” 
“The true treasure of the Church is the most holy gospel of the glory and grace of God(교회의 진실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루터가 쓴 95개항 중 62번 논제다) 
“Trust in God, and do whatever you want
(하나님을 믿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러나 가장 감명 깊은 루터의 말은 
루터가 임종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 
“We are beggar, it is true(우리는 모두 거지다. 그것은 사실이다).” 
 
왜 루터는 자신을 ‘거지’라고 했을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그가 거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거지’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거지는 은혜받은 자의 표상이다. 
 거지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루터는 사람 앞에는 용감했던 개혁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거지였던 것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받은 거지임을 깨달았다. 

루터가 평생에 걸쳐 발견한 은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선 사랑하고 사랑받을 만한 자로 만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보지만 
하나님 앞에는 누구나 죄인이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누구나 의롭다. 
하나님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만 
그들을 받으신 후 
그가 원하시는 모습대로 그들을 만들어 가신다. 
 
“우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받아들인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은혜와 믿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심중의 믿음을 붙잡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따라서 오로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루터)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무 공로 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방해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 
 
루터가 가톨릭의 성례전을 거부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어떤 다른 장애물 혹은 중보자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외의 다른 중보자는 없다. 
이것을 위해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년 10월)를 썼다. 
 
루터는 이 책에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동행하며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모든 중요한 행동과 사건을 사제의 권위 아래 두는 제도라고 말했다. 
루터는 이 제도를 
현대판 바빌론의 ‘포로(captivity)’로 비유했다. 

성례전의 오류와 남용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루터는 
7가지 성례 중 세례와 성찬만 받아들이고 
5가지(견신례, 혼례, 안수례, 고해성사, 종부성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제의 배타적 중재권은 당연히 거부된다. 
금욕적 고행주의도 마땅히 받아들일 수 없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우위성과 만인제사장주의는 
그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루터의 은혜는 
모든 인간적 노력과 훈련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 
루터의 은혜와 자유가 
역사적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에게 무절제의 구실이 된 것은 사실이다. 
육신적 인간들이 은혜를 남용하여(롬 6:1), 
자유를 육체의 기회(갈 5:13)로 삼은 것이다. 

그 결과 개혁의 반율법주의적 경향과 공중도덕의 퇴보, 
심지어 폭력적인 농민전쟁까지 발생했다. 
교파의 난립과 분열, 개인주의적 경향도 
개혁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작용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세계교회 
특히 한국교회를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그렇게 가르쳐서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위’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던 로마 교회에 대하여 
‘자유’의 원리를 새로운 지배의 원리로 제시한 개혁의 비고의적 결과였다. 

그나마 그것은 루터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있었고 로마 교회에서도 충분히 나타난 문제였다. 
 
루터의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의(in) 자유에서 오는 것이지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자유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없는 은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믿음은 은혜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선행의 어머니이다. 
선행은 칭의의 조건이지만 
또한 그것의 필연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우리는 믿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행과 훈련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좋은 뿌리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듯이 
좋은 믿음의 뿌리는 반드시 좋은 선행의 열매를 낳는다. 
뿌리가 좋으면 반드시 좋은 열매도 맺는 것이다. 
뿌리 안에 열매가 있듯 믿음 안에 선행이 있다. 
 
루터 자신의 말이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렇게 묻기 전에 
 이미 선행을 행할 뿐만 아니라 
 항상 선행을 하고 있다. 
 믿음과 선행을 분리시키느니 
 차라리 불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 낫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0월)에서 했던 말이 결론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산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를 넘어(above himself) 하나님에게 이르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보다 아래로(below himself) 내려간다.” 
 
그렇다. 진실로 우리는 거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살 수 없다. 
그것은 루터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모든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7)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2012.07.08 18:08


개신교 윤리 맞는 거룩한 가정 꾸려 세상을 성스럽게 하다 

“건강한 가정 없이 건강한 영성이 가능할까” 

이는 가정 사역자 찰스 셀의 질문이다. 
영성이 관계성을 근거로 한다면 이 질문은 사실 피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루터의 길을 살펴 보면서 계속 궁금했던 것이 
루터의 가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루터의 가정은 행복했을까. 
‘루터하우스’에 들어가자마자 질문의 답을 얻었다. 
정원 입구에 루터 아내의 청동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키는 크지 않으나 눈매는 매섭고 부지런한 듯 한 인상을 준 여자, 
마치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erina von Bora·1499-1552, 53세)이다. 

우선 동상의 위치에 놀랐다. 
루터의 그 많은 유적들을 모은 박물관 앞에 
카타리나가 마치 손님들을 맞이하는 느낌으로 서 있다. 
누가 설계한 구도인가. 
아마도 이는 이 집에서 루터가 35년간 살았고 
또 카타리나와 결혼해 21년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가 아내의 동상을 만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루터의 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루터의 긴 개혁의 역사에서 
카타리나와의 결혼만큼 중요한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처음부터 성직자의 결혼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독신의 서원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결혼으로 종교개혁이 방해를 받을까 염려했다. 
실제로 그는 결혼으로 인해 로마교회의 많은 비판을 받았고 
실제 상당수의 지지자를 잃기도 했다. 

카타리나는 본래 수녀였다. 
1523년 4월, 아홉 명의 수녀가 근처 수녀원에서 탈출하여 
비텐베르크로 피신한 뒤 
루터에게 보호와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 카타리나가 있었다. 
그는 본래 귀족 출신이었으나 가난했고 루터보다 16살 연하였다. 
외모나 교양이 특출하지 않았으나 건강하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다. 
처음에 루터는 그를 다른 사람과 맺어주려고 했으나 
카타리나의 마음은 처음부터 루터에게 있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어 1525년 6월 13일, 역사적인 결혼을 했다. 
당시 루터의 결혼은 교회와 세상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것은 1059년 라테란 회의에서 사제의 결혼을 금지한 로마교회 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멜랑히톤이 루터보다 먼저 결혼했다). 
교회역사의 처음 2세기까지는 교회 안에 독신제도가 없었다. 

3세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면서 자발적 독신운동이 일어났고 
중세로 오면서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의무화됐다. 
초기 교회의 수도원 운동이나 중세교회의 성례전적 정결이 
‘선행’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선행적 사고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원죄론도 독신주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죄는 성적 행위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독신주창자 피터 다미안(Peter Damian, d. 1072)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동정녀였고 
예수님도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니 
그의 몸인 떡을 만지는 사제도 당연히 독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중세에 널리 퍼진 미신적 신앙을 극복해야 했다. 
중세인들은 배교한 수도사와 도망친 수녀 사이(영적인 근친상간)에서는 
반드시 적그리스도나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과연 루터의 아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다행히도(그리고 당연히) 루터의 큰 아들 요하네스(Johannes)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만약 루터의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났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더 큰 핍박의 이유를 제공했을 것이다. 

루터의 결혼은 다만 한 남자와 여자의 감정적 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대한 응답이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지 교회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정을 대표로 하는 세상에로의 부름이었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배타적 영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독신주의가 개인을 ‘성인(聖人)’으로 만든다면 
가정은 세상에 ‘성화(聖化)’를 가져온다. 

이 믿음으로 가정을 이룬 루터와 카타리나는 21년간 같이 살았다. 
그들의 집은 늘 사람들로 넘쳐났다. 
방문이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온 수많은 사람들, 학생, 성직자, 동료, 
고아가 된 친척, 방문객들에게 
카타리나는 따뜻한 어머니의 환대를 제공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네 아이뿐 아니라 
고아가 된 6명의 친척 아이를 길렀고 
1527년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덮쳤을 때는 
자신의 집을 구호소로 바꾸어 그들을 치료하고 섬겼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 셋(두 딸은 어려서 죽음)에 아들 셋이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은 한스(요한)와 마르틴, 파울이었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개신교의 목회와 윤리에 잘 맞는 
이상적인 목회자 가정을 이루었다. 

루터는 저녁식사 이후 친구들 및 자녀들과 어울려 음악을 즐겼다. 
독일어 및 라틴어 찬송과 세속음악을 함께 연주하며 불렀다. 
그는 시, 회화와 모든 순수 예술을 좋아했다. 
 
그는 음악을 신학 다음 자리에 두었다. 
음악이야말로 우울증을 몰아내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나무와 꽃들을 사랑했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벌집을 관찰했다. 
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즐거워했고, 다시 찾아온 봄으로 젊음을 회복했고, 
어디를 가든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앙모했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모든 일을 현명하고 검소한 아내의 손에 맡겼다. 
자신에 대해서는 태만하고 무심한 가장으로 평가했으나 
아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아내가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근검절약으로 가정과 자녀들을 돌본 것에 늘 감사했다. 
그의 말년에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거룩한 결혼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 없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내리신 가장 큰 선물은 
 경건하고 활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지키는 아내이며, 
 그런 아내와는 서로 화목하게 살면서 
 재산과 몸과 생명을 맡길 수 있다.” 

루터의 결혼은 어쩌면 그가 비텐베르크에 내건 95개 조항보다 위대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었던 성직자 중심의 영성이 
가정을 중심으로 세상에 퍼져나가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가정을 가져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변두리가 아니다. 
창조의 완성이 가정이었듯이 종교개혁의 완성도 가정이었다. 

루터의 긴 일정을 따라 가면서, 그리고 ‘루터하우스’를 떠나면서, 
루터와 카타리나가 아름다운 가정으로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통해 
훗날 모든 개신교 가정(훗날 쯔빙글리, 칼빈, 존 녹스 등도 결혼했다)의 귀감이 됐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의 가정도 루터, 카타리나의 가정처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성화의 한복판에 있게 하옵소서.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8) 스페너의 ‘경건한 소원’

2012.07.15 15:20 국민일보


꺼져가던 루터의 개혁, 경건주의로 다시 불지피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주제는 루터 이후에도 이어졌다.
때는 17세기 중엽, 루터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독일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있었다.
루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루터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역사가 정통주의로 화석화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사변적 교리 논쟁에 열을 올린 나머지 목회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교인들은 길고 지루한 설교에 영혼이 잠들어 있었다.
영적 각성이 필요한 시대였다.
 
이때 하나님이 또 한번의 은혜의 소나기를 부어 교회를 새롭게 했는데
그것이 경건주의 운동이다. 

프랑크푸르트, 경건주의의 태동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의 지리적 중심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주요 볼거리는 다행히도 중앙역 근처에 몰려 있었다. 중앙역 근처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뢰머광장과 대성당을 지나 괴테의 생가를 지났다. 괴테가 이곳에서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고 한다. 괴테의 집을 지났더니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가 살았던 집과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안네 프랑크가 살았던 집이 나왔다. 그 집들을 지나자 바울교회가 나타났다. 바울교회는 스페너가 교회 개혁의 열망을 품고 사역했던 곳, 교회 한 쪽 명판에 스페너가 ‘교회와 사회의 개혁자였다’고 씌어 있었다.

스페너는 누구인가? 스페너는 1635년, 스트라스부르 근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666년, 프랑크푸르트로 자리를 옮겨 19년 동안(1666∼1685) 그곳에서 목회하면서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다. 스페너가 목회하면서 만난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은 대부분 사치와 부도덕, 그리고 불경건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루터가 지폈던 개혁의 불을 다시 한번 점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민들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670년, 스페너가 마태복음 5장 20∼26절을 본문으로 철저한 회개와 산믿음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주일과 수요일마다 스페너의 집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말씀에 대한 열띤 토론과 함께 뜨거운 기도운동이 시작되었다. 

‘경건한 소원’, 경건주의의 불꽃

이 운동은 1675년, 스페너가 쓴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이 출판되자 폭발하기 시작했다. 스페너 이전에도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건한 소원’은 개혁을 열망하는 뜻있는 사람들에게 시의적절했고 대담했으며 또한 개혁의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건한 소원’은 당시 교회의 불경건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된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비참상은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심각하고, 위태롭고 불쌍한 형편이다.” 무엇이 교회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가?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들의 타락이다. 성직자들은 세속적 풍습에 빠져 있고 육체적 쾌락과 안목의 정욕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 부정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경의 문자와 올바른 교리를 배웠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스페너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촉구했던 것도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올바른 실천이었다. 올바른 믿음은 종교개혁의 결과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닌가? 문제는 그 올바른 믿음이 올바르게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정통적 교리(orthodoxy)보다 정통적 실천(orthopraxis)이 더 중요했다. 

바른 교리보다 바른 실천

정통루터 이후 교회는 로마교회의 바벨론 포로로부터 자유한 것에는 만족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너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바벨론에서 빠져나온 것을 자랑하면서 우리 또한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다면 우리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탈퇴한 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 답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행함으로 실천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에 앞장서야 할 성직자들이 세상 유행을 따르고 온갖 세속적 정신과 추문으로 가득 차 있으니 교회는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에 빠진 것이다. 빌립보서 2장 21절 말씀이 목회자들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되.” 어쩌면 이 경고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에도 해당되지 않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인간의 죄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있기 때문이다(롬 5:20). 그러나 값싼 은혜는 힘이 없다. 은혜가 비싼 만큼 우리도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경건한 삶의 실천

그래서 스페너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개혁을 위한 여섯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선포해야 하며 신자는 주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모두 영적 제사장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영적 기능을 성직자들에게만 부여한 것이 중세 교회의 큰 실수였다. 셋째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다. 넷째 논쟁을 피하고 오류에 빠진 자를 사랑으로 권면해야 한다. 불신자를 보거나 이단과 논쟁할 때 우리가 취할 태도가 이것이다. 그들을 가르치고 좋은 본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스페너의 기본 메시지는 그가 존경했던 요한 아른트(John Arnt)에서 왔다. 아른트가 ‘진정한 기독교’에서 한 말을 그는 항상 마음에 품었다.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은 논쟁이나 많은 책을 저술함으로써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거룩한 생활에 의해 유지된다.” 다섯째 교회 및 신학교육의 개혁은 적절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 적절한 사람이란 참 신자요 신학적으로 잘 훈련받은 사람이다. 여섯째 설교는 신앙과 열매를 맺게 하는 목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강단은 사람의 지식이나 재주를 나타내는 곳이 아니다. 강단은 주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능력 있게 전파하는 곳이며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선포하는 곳이다. 

한국교회와 삶의 실천

스페너의 ‘경건한 소원’은 17세기 독일교회 상황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 상황을 보여준다. 이 책이 요즘 한국교회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옳은 교리와 올바른 교회에 속해 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유진 피터슨이 말한대로 영성의 삶은 올바른 믿음과 함께 올바른 기도, 올바른 삶이 함께 가야 한다. 올바른 기도가 토양이라면, 올바른 믿음은 나무, 올바른 삶은 그 열매다. 올바른 기도가 골짜기라면, 올바른 믿음은 높은 산, 그리고 올바른 삶은 산위에서 비치는 세상의 빛이다. 루터가 올바른 믿음을 위해 싸웠다면 경건주의는 올바른 삶을 위해, 그리고 영성가, 신비주의자들은 올바른 기도를 위해 살았다. 그렇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열심있는 기도와 올바른 믿음으로 성장의 축복을 받았다. 이제는 삶의 실천이다. 실천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닌가?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9) 뷔르츠부르크의 ‘에케 호모’
                                             2012.07.22 18:10

 



































가시관 쓰신 예수님 그림 19세 청년의 영성 불지펴

루터를 잇는 독일 경건주의의 발자취를 더듬을 때

반드시 거쳐야 할 도시가 프랑크푸르트(스페너)와 할레(프랑케)이다.
그리고 스페너와 프랑케에 이어
경건주의를 꽃피운 진젤도르프(1700∼1760)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뷔르츠부르크이다.

도메니코 페티, 에케 호모 

뷔르츠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 밑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인 강의 도시다.

이곳은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가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바로 이곳에 있는 한 작은 그림이 독일의 평범한 젊은이의 영성에 불을 질렀다. 그가 진젤도르프다. 

마인 강을 가로지르는 알테마인 교를 건넜다.

분위기는 마치 프라하의 카를 교 같았다.
강 주변에 늘어선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이 도시의 역사성을 보여 주었다.
다리를 건너자 대성당이 나왔고
대성당을 지나자 ‘레지덴츠’라는 옛날 대주교의 집이 나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대주교의 부와 명성이 얼마나 화려했으면
그 많은 그림들과 화려한 가구들이 남았을까.
2층으로 올라가자 한쪽 구석에 그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1589∼1624)가 그린
에케 호모(Ecce Homo)’라는 그림이다.
그림의 내용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하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도 이 그림에 주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여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했다. 

이 그림을 그린 도메니코 페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무명 화가였다.

사실 그는 ‘에케 호모’를 두 장 그렸는데
하나는 뷔르츠부르크에 있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래 정성을 기울여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에케 호모’보다
뷔르츠부르크의 그림이 더 유명하다는 점이다.
아마 진젤도르프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다 

진젤도르프가 이 그림 앞에 선 것은 1719년 19세 때였다.

당시 진젤도르프는 많은 가능성을 가졌지만 아직은 어린 젊은이였다.
그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
슈페너의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할머니의 신앙교육 아래 자랐다.
할레 학교를 통해서는(1710∼1716) 프랑케로부터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자란 그는
할레 학교 시절 소년단을 조직해 사랑의 실천에 힘쓰고
할레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선교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가 4세 때 경건주의의 아버지 슈페너로부터
머리에 손을 얹는 축복기도를 받은 것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영적 추억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리라는 예약은 없었다.
그는 그저 그 시대 여느 젊은이와 다름없는 19세의 젊은이였을 뿐이었다.
열심은 있었으나 아직은 어리고,
추진력은 있었으나 아직은 감정에 휘둘리는 젊은이였다.
그렇다. 누구나 어릴 때 총명하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릴 때 착했다고 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타고난 태생과 교육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한다. 

진젤도르프가 그날 그 그림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부어졌다.
그가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영혼에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이 글이 당시 그림 앞에 쓰여 있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고,
다만 음성이 진젤도르프에게 들렸던 것이라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글이 있었든 없었든
그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을 바꾼 다메섹 체험,
루터를 부른 벼락 사건이 진젤도르프에도 임한 것이다. 

나도 그 그림 앞에 섰다.

오래전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불렀던 그림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십자가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요,
그 주제로 그려진 그림도 한두 점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특별했다.
그림이 특별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의 주인공이 특별해서 특별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가시가 머리를 눌러 이미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예수님의 얼굴은 창백했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외칠 때 빌라도는 무슨 의도였을까?
“이 사람을 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 그림은 나에게도 묻고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음성은 나에게 조용한 책망으로 그리고 영혼의 깊은 울림으로 들려왔다. 

진젤도르프의 변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진젤도르프는

그 후 고향인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했다고 한다.
백작으로서 태생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편안하고 호화로운 삶을 모두 포기하고
자기 집도 예배와 모임의 장소로 내놓았다.
그러던 중 체코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동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다.
모라비안 교도는 체코의 개혁자 존 후스를 따르는 루터 이전의 개신교도들이었다. 진
젤도르프는 그들을 자신의 영지인 헤른후트로 피신하게 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 모라비안 운동이 할레대학과 함께 근대 선교의 불을 일으켰고
1832년 7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1803∼1851)를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보냈으며,
고아원의 아버지 조지 뮐러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냈고,
그리고 감리교를 탄생시켰다.
지금도 헤른후트에 있는 모라비안 교회에 가면
진젤도르프와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당시 개신교 신자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옥스퍼드 출신의 웨슬리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1729년, 미국 선교를 위해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평화롭게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다.
두려움에 떨던 웨슬리는 그들에게서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
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다.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사람을 보라 

한 사람 진젤도르프를 불러 경건주의 운동의 기수로 쓰신 하나님이

그 뿌리에서 또다시 요한 웨슬리를 불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게 하시고
한국 최초의 선교사까지 보내게 했으니,
그 장한 역사의 뿌리가
한 작은 무명 화가의 그림이었다는 것이 신비하기만 하다.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우
리는 누구를 보는가.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는가. 

이 그림은 그 뒤 또 한 사람을 감동시켰다.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갈이다.
그가 독일에 유학할 때 이 그림을 보고 찬송가를 작사했다. ‘
내 너를 위하여’(찬송가 311장)가 그것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그렇다. 영성은 우리 앞에 십자가 지고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서는 것이다.
당신도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가.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0) 할레대학과 귀츨라프 선교사

2012.07.29 18:11


‘중세→루터→경건주의’ 영성 물줄기 한반도까지 흘러와

영성은 자신의 영혼의 정화만을 위해 있는가.
아니다.
뿌리는 줄기를 낳고 줄기는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영성의 발자취를 걸으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묻는 분들이 있다.
단언컨대 영성의 역사에 불연속이란 없다. 
기도의 삶은 믿음의 고백으로 이어지고
믿음의 고백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삶의 실천은 더 깊은 기도를 요청하고
더 깊은 기도는 더 큰 믿음으로 나타난다. 
 
2000년 영성사는 분명 기도, 믿음, 삶의 은혜가 연속적으로 나타난 역사였다.
루터의 개혁이 그 이전의 영성적 뿌리에서 시작된 것처럼,
그것 또한 경건한 삶의 열매를 잉태했다.
루터 개혁의 영성적 뿌리가
버나드, 타울러, 독일 신비주의라면
그 열매는 경건주의였다. 

할레와 프랑케

비텐베르크에서 할레로 향했다.
할레는 예상보다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동부 독일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까.
할레에는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의 흔적,
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뮐러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케의 흔적이다. 

프랑케(1663∼1727)는 뤼벡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종교적이었으나
에르푸르트대학과 키일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면서
깊은 종교적 고민에 빠졌다. 
그를 종교적 회의주의에서 건져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경건주의의 창설자 스페너였다. 

프랑케는 1688년 슈페너를 만나 경건주의 감화를 받았고
1689년에는 라이프치히로 돌아가 성경공부 반을 지도하며 경건주의 운동에 전념했다.
할레대학에서의 강의와 목회는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그의 사역에 놀라운 경건의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고 많은 고아를 돌봤다.
1696년에 고아들을 위한 ‘고아의 집’을 세웠고,
1698년에 과부들을 위한 ‘과부의 집’을 세웠다.
아마도 그 뿌리에서 고아원의 아버지 조지 뮐러가 태어났을 것이다.
1701년에는 병원을 세워 병자들을 돌보았고,
1704년에는 교사양성 학원과 성경 보급소를 세워
성경을 각국어로 출판한 후 싼값에 보급했다. 
 
프랑케는 윌리엄 캐리보다 100여 년 전에 직접 인도에 나가 선교

프랑케의 관심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었다.
그들을 섬겨 세상 전체가 구원받게 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꿈이었다.
그의 경건의 실천은 선교 분야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그는 윌리엄 캐리보다 100여 년 전에 세계선교의 환상을 보았고,
그 자신이 직접 인도에 나가 선교하기도 했다. 

선교사 귀츨라프

이 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 귀츨라프였다.
귀츨라프는 1803년 독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할레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할레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시아, 특히 한국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섭리였다. 
그는 거기에서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 경건주의와 만났고
믿음의 확신과 함께
신앙 실천으로서의 선교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는 1823년 네덜란드 선교사로 지원해 목사가 됐고
1827년에는 그토록 꿈꾸고 기도했던 아시아 선교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그가 처음으로 선교의 닻을 내린 곳은 인도네시아와 태국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의 아내 뉴엘이 딸 쌍둥이를 낳다가 죽는 큰 슬픔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중국 동해안을 따라 새로운 선교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익힌 중국어 실력을 발판으로
통역관을 겸하여 암허스트 호를 타고 1832년 2월 마카오를 출발했다.
그리고 아모이, 타이완, 푸조우, 닝포, 상하이, 웨이하이위이 등
중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뒤
7월 17일 처음으로 한반도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말하자면 1832년 7월 17일은 한국 땅에 처음으로 외국선교사가 발을 디딘
한국교회 선교의 첫날인 셈이다. 

그의 선교보고인 ‘귀츨라프 행전’은
1832년 7월부터 8월 사이 한국 서해안을 방문하여 선교한 일정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한국에 오기 이전부터 한국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정보가 있었다.
그는 한문에 통달했고
1653년에 있었던 하멜의 표류 사건도 알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선교

귀츨라프 일행이 처음 상륙한 한국 서해안은 황해도 몽금포였다.
귀츨라프는 배에서 내려 해안에서 낚시하고 있던 어선에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어부 두 명과 필담을 나누면서
책 몇 권과 사자 무늬가 있는 단추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귀츨라프와 처음 만난 어부는 김대백과 조천의였다.
귀츨라프가 두 어부들에게 준 책은 한문성경이었다. 

이 사실은 조선 정부 문서에
‘1832년 7월 17일 오후 5시경 어부 김대백이
외국인으로부터 책을 받고 답례로 농어 세 마리를 주었으나
그 책이 이단좌설로 밝혀져 황해감사 김난순에 의해 불태워졌고
그 외국인은 쫓겨났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귀츨라프와 한국인의 첫 접촉은 그렇게 끝났다. 

귀츨라프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몽금포 앞바다를 벗어나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는데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계속된 강한 비와 짙은 안개 때문에
해안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해 이틀이 지난 후 충청도 어느 섬에 도착했다.
그곳이 지금의 충남 서천군 비인만 일대의 작은 섬.
배는 7월 21일 외연 열도에 정박하고 22일 녹도, 23일 불모도를 지나
24일 고대도, 25일에 원산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귀츨라프는 8월 12일까지 머물면서
19일 동안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두 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하나는 지역주민들에게 감자를 보급한 것이다. 그날이 7월 30일이었다.
그는 수많은 원산도 주민과 군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자를 파종하고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또 하나는 주민들에게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을 주어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게 한 것이다. 그가 번역하게 한 한글 주기도문이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는 주기도문과 함께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조선인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임을 거듭 들려주려 하였지만 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무관심은 조선인의 두드러진 특징처럼 보인다.”

주께서 열매 맺으소서

시간이 지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인들과 어떤 책이나 물건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는 접촉 금지령을 받았고 결국 군인들의 협박에 의해 그 땅을 떠나야 했다. 8월 12일 귀츨라프는 “나를 슬프게 한 것은, 고관들이 백성들에게 더 이상 어떤 책이나 물건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킨 일이다…이 모든 일들은 내가 늘 기도로써 간구한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역사다. 조선 땅에 씨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가 완전히 소멸될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조선 땅에 씨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열매 맺을 것이다”고 책에 썼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34년이 지난 후 토마스 목사를,
그리고 53년 지난 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이 땅에 보내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귀츨라프의 선교는 우연인가.
아니다.
중세-루터-경건주의로 이어지는 하나님 역사의 큰 손,
그 속에 흘렀던 영성의 물줄기가
어느 날 한민족의 서해안에까지 흘러온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아닌가.
그렇다.
영성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누군가 심으면 반드시 열매 맺는다. 

귀츨라프가 조선땅 떠나며 쓴 글

“조선 땅에 씨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가 완전히 소멸될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중략)
 조선 땅에 씨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열매 맺을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