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1)-(46·끝)

영국신사77 2016. 4. 15. 16:12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1) 무지(無知)의 구름

                                            입력 2012-10-21 18:1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1) 무지(無知)의 구름 기사의 사진

기도는 하늘을 담은 소망상자… 항상 갈망해야 한다 

14세기 영국, 줄리안의 시대에 또 한 명의 기도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도무지 나타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익명으로 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서 의미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그가 사제였을 것이라고도 하고 수사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통해

우리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에 대한 대응적 질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질문인 데 비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는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무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적 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두 가지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식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직 사랑의 능력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

그는 이것을 ‘무지의 구름’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구름’이란 대기를 떠도는 물방울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근원적 결핍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지적 한계가 ‘무지의 구름’이다.

이 책의 저자가 스승으로 삼는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이성을 통한 길과 신비적인 묵상의 길.

이성을 통한 길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디오니시우스의 말대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경건한 지식은 무지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책의 저자)에게

‘우리가 하나님만 생각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며

또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 역시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분이지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잡고 소유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하나님만 생각하려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갈망, 하나님께 나아가는 힘

그렇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름 너머에 도달하여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무지의 구름이 당신 위에서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듯이

당신 아래, 즉 당신과 온갖 피조물 사이에 망각의 구름을 놓아야 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그분이고, 내가 찾는 것도 그분이고,

그분 이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 사이에 막힌 구름을 뚫으려면

자신의 지식은 망각의 구름에 파묻어 놓고

짧은 기도로 그 하늘나라를 침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적 지연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바와 같다.

“지연될 때 거룩한 갈망은 예외 없이 성장한다.

그리고 지연되었다고 해서 느낌이 줄어들면

그것은 결코 거룩한 갈망이 될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거룩한 갈망’이라고 불렀다.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거룩한 갈망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보여주는 성경적 이야기가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활동적인 방식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삶은 몇 가지 다른 측면이 있지만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

상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느 쪽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온전하게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없고,

활동적 삶을 살지 않으면 올바르게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도의 삶이 우선이다.

“주여,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불평했듯이

오늘날도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기도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오직 기도하는 일에만 영적인 힘을 쏟아야 한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42)

‘한 가지’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일이다.


마리아가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지식으로 나가지 않고 사랑으로 나갔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사랑을 얻으려고 죄를 의식하는 것보다 더 크게 슬퍼했고,

간절히 갈망했으며, 깊은 한숨을 쉬는 등 고통스럽게 번민했다.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갈망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한계를 무지의 구름에 매달고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안 되고 오직 사랑으로만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활동적인 삶은 이 땅에서 시작해서 이 땅에서 끝나지만

기도하는 삶은 이 땅에서 시작되어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했다.”


기도, 하늘을 품은 소망 상자

결국 ‘무지의 구름’의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평생 하나님께 사랑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삶이다.


아프리카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족 사람들이

암소들이 예전만큼 우유를 많이 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던 어느 날 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하늘에서 큰 통을 들고 내려와

우유를 짜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밤, 사람들이 여인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선녀였다.

선녀를 잡은 청년은

자신과 결혼해 주겠다고 약속만 하면 놓아 주겠다고 했고

선녀는 사흘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사흘 후 선녀는 큰 상자를 가지고 와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결혼하겠다고 했다.

결혼 후 어느 날, 선녀가 외출한 뒤

호기심이 발동하여 상자를 열고 들여다본 남자는 깜짝 놀랐다.

그 상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랑이 상자를 열어보았다는 걸 알게 된 선녀는

더 이상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왜 빈 상자처럼 사소한 것 때문에 자신을 떠나려는지 물었다.

이때 선녀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떠나려는 것은

당신이 그 상자를 열어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당신이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려는 것은

당신이 그 상자가 비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상자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자는 제 고향 하늘의 빛과 공기와 냄새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이 땅에 살면서 날마다 상자를 보고 사는 것은

언젠가 저 상자에 담긴 하늘의 빛과 공기를

영원토록 마시리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상자가 비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내 어찌 당신의 아내로 이 땅에 살 수 있겠습니까?”

선녀는 떠났고 남자만 홀로 남았다.

‘무지의 구름’에서 저자가 꿈꾼 것은,

선녀와 상자의 관계 같은 삶이 아닐까?

기도는 하늘을 담은 소망 상자가 아닌가?  


                                   <분당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2) 리처드 백스터의 ‘개혁된 목자’

2012.10.28 17:42

 


설교자는 타인에 앞서 자신에게 먼저 설교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청교도가 있을 것이다.
청교도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영국개혁교회의 정신을 찾는 일이요,
개신교 목회의 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키더민스터, 청교도 목회의 요람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라트포드(Stratford-upon-Avon)를 지나 키더민스터에 도착했다.
키더민스터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했던 곳이다.
백스터의 시대에 이곳은 성인만 약 2000명 살았다.
그런데 그 마을에 기적이 일어났다.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 없고 술 마시고 떠들던 사람들의 마을이
백스터의 목회로 전혀 새로운 마을이 되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백스터가 활동했던 시기는 국교와 청교도의 싸움이 종말로 치닫던 때,
곧 핍박과 싸움이 마무리되어가는 때였다.
찰스 1세의 처형(1649)으로 1658년까지 올리버 크롬웰이 영국을 공화정으로 다스렸으며,
크롬웰의 사후(1658년) 찰스 2세의 즉위(1660)로 왕정이 복고되고 국교가 복귀되었으나
곧이어 일어난 명예혁명(1688)으로 청교도에게 완전한 종교자유가 주어졌다.
이 변화무쌍한 역사의 순간에 하나님이 세우신 청교도의 사람들이
존 버니언(1628-1688), 존 밀턴(1608-1674), 그리고 리처드 백스터(1615-1691) 등이다.
백스터는 그의 개인적 신실성에 청교도적 정신을 담은 저작과 목회로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설교와 삶은
철저히 회심과 중생에 초점을 둔 청교도 신앙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은혜는 행동의 핑계가 아니다

그는 ‘회심’에서 은혜를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은혜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지만,
여러분의 고의적인 범죄와 무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을 치료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독을 마시게 할 수는 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부패시키는 자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고의로 독을 마시겠는가?”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이 내세우는 잘못된 궤변처럼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없이 회심할 수 없지만, 하
나님께서 자신이 정하신 거룩한 수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백스터는 은혜를 핑계로
거룩에 이르지 못한 신자의 행동하지 않는 삶을 꾸짖는다.
그것은 구원은 단지 마음의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거룩에 이르는 성장이라는
전형적인 청교도의 믿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청교도에게 칭의는 시작에 불과하며
칭의는 반드시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신앙과 선택의 확실성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타난 신자의 변화된 삶을 통해 나타난다.”
“신자가 삶 가운데에서 성화를 위해 활동하지 않음은
  그가 선택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다.( Inactivity was a sure sign of the lost.)” 

목사는 개혁되어야 한다

백스터의 날카로운 설교는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부름 받은 목자들에게 더 빛을 발했다.
그의 대표작 ‘개혁된 목자(Reformed Pastor,한국어 번역: 참목자상)’가 바로 그것이다.
양을 맡은 목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혜의 역사가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새겨져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
특히 설교자는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그가 의롭고 성화되어
그로 인해 주님의 일에 신실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단지 설교자가 되었기 때문이거나 유능한 설교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설교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피조물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의 영혼의 상태는 그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진다.
 설교자의 마음이 차가우면 그 설교도 차가워진다.
설교자의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설교 역시 혼란스러워진다.
“정확하게 설교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것보다
설교한 대로 정확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 시간 동안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연구하느라
한 주를 보내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한 주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단 한 시간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설교에서 한 마디라도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자신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잘못된 감정이나 말, 행동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자신이 강대성에 있을 때만 목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강대상에 있는 시간 이외에는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백스터의 경고는 계속된다.
“당신이 목사라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설교자는 “자기 자신도 극복하지 못한 죄를 비난하지 말며,
또한 다른 사람의 죄는 굴복시키려 하면서도
자신은 죄에 머리 숙여 자발적으로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평생 주의해야 한다.”

백스터의 경고의 메시지는 오늘날 모든 설교자를 향한다.
필자도 가끔 사명감이 식을 때 백스터의 ‘개혁된 목자’를 꺼낸다.
그것은 나태한 내 영혼에게 엄한 회초리이다. 

거룩에 이르는 삶의 실천이 필요하다

백스터는 목자를 향하여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가 돌보는 신자를 개혁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양육은 그의 목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백스터가 이를 위해 한 것은 한 주에 2일을 할애하여
매일 7, 8가정을 만나 교제하면서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는 매년 800가정과 만났다.
만남의 순서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을 암송하도록 하고,
그 의미를 묻는 구두시험을 본 후,
열심을 다해 책임 있는 사랑과 실천의 삶을 살 것을 권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교육적이며 실제적인 책을 많이 썼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으로 시작하여 ‘기독교 훈련집’ ‘빈자의 가정서’
‘가정교리 문답’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저술활동을 통해 그는,
청교도적 신앙의 목표 곧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신자의 모든 삶이 거룩에 이를 수 있도록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는 데 집중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은 신자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고백된다.
신자의 삶은, 성경에 기초를 둔 모든 생활 속에서의 거룩한 체험적 삶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청교도의 삶의 초점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시급하게 회복할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며,
값싼 회심이 아니라
거룩에 이르는 삶의 실천과 행동이다. 

                                     <분당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3)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따라

                                            2012.11.04 18:17


4가지 城에 붙잡힌 우리들… 탈출할 열쇠는 오직 ‘소망’

전 세계 성도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사랑받는 책을 든다면
그것은 단연코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일 것이다.
이 책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평신도에 의해,
더욱이 감옥에서 쓰였다는 점에서 놀라움은 더 크다.
저자인 존 번연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쓴 천로역정은 어떤 책인가.
번연의 발자취를 그가 태어나고 자란 현장에서 찾는 것은
그가 쓴 ‘천로역정’의 과정만큼이나 흥분되는 일이었다.

땜장이, 번연 

케임브리지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쯤 올라가니 고즈넉한 구릉지역이 나타났다.
1628년 11월, 번연이 태어난 베드포드다.
먼저 존 번연의 박물관을 찾았다.
번연이 1671∼88년 목회했던 기념교회와 함께
번연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게 하는 곳이다.
박물관에는 번연이 짊어졌던 땜장이 도구, 옷, 의자, 사진, 가족들의 모습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곳은 번연이 전설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숨 쉬고 고민하며 살았던 시대의 아들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크리스천은 번연 자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난보다 더 무거운 땜장이 일을 물려받아
무거운 짐을 지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땜장이였다.
크리스천이 그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울부짖었을 때
그것은 번연 자신의 인생고요, 우리들의 탄식이다. 

베드포드를 걷다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언덕에 이르렀다.
그 언덕에는 돌기둥이 있었는데,
한참동안 허리를 구부린 채 걸어온 여행객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 언덕이 번연에게,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었던 십자가 언덕의 영감을 주었을까.

천로역정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날 때까지 크리스천은 줄곧 앞만 보고 달렸다.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아래쪽에는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언덕을 기어올라 십자가에 이르자
짐 보따리가 등에서 툭 떨어져 나가더니
떼굴떼굴 굴러서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그 장소였다.
번연이 무거운 땜 기구를 등에 지고 언덕을 오를 때마다 휴식과 평안을 주었던 곳,
십자가 언덕은 번연에게 2000년 전 사건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친근한 고향의 언덕이었다. 

십자가의 은혜로 

번연이 어릴 때 다녔던 베드포드 교회로 향했다.
그의 위대한 신앙은 곧 많은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이었다.
그로 하여금 경건한 삶에 눈뜨게 한 아내가 아마 첫 번째일 것이다.

베드포드 교회 담임목사로서 번연에게 청교도 신앙을 가르친 기포드 목사
또한 중요 인물이었을 것이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의외로 좁았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까.
그 문을 지나면서 크리스천이 들어갔던 좁은 문을 떠올렸다.
크리스천이 문을 두드리자
선의(Goodwill)가 재빨리 뛰어나와 크리스천을 데리고 들어갔던 문.
문 앞 교회 건물 꼭대기에서는 화살형의 십자가가 바람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번연에게 의심의 성에 불화살을 쏜 사단의 이미지를 주었을까.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세속현자가 나타나 공교한 말로 크리스천을 유혹했다.
세속현자는 세상이치 시에 살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도덕 골에는 율법이 아들 예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세속현자와 율법 이야기는
번연 자신이 경험한 영적 삶의 실패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아내의 도움으로 경건의 길에 들어선 번연은
자신 속에 뿌리박은 죄악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끼면서
더욱 양심과 의를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라디아서와 요 6:37에 대한 루터의 해석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이 그의 첫 저서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에 나타난다.

그렇다.
누구나 십자가(구원)로부터 좁은 문(성화)에 이를 때까지,
세속현자와 율법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유혹은 신자가 통과해야 할 많은 시험의
지극히 작은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고난을 넘어 

크리스천은 허영의 도시를 지나
환락 성을 통과한 후 의심의 성에 갇힌다.
그 성을 지배하는 성주는 아볼리온이다.
그때부터 소망이 동행하며
소망의 도움을 받아 약속이란 열쇠로 성을 탈출한다.
크리스천을 가두고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아볼리온은
분명 마귀로 상징된 이 세상 임금이다(요8:44, 요10:10).
크리스천이 갇힌 성채와 비슷한 성을 베드포드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을씨년스러운 성이
번연에게 의심의 성의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자주 경험하는 감옥 이야기는
번연 자신의 감옥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번연은 일생동안 두 번 투옥되었다.
첫 번째는 찰스 2세 때 설교자 면허도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1660년, 이후 12년간 감금되었다),
두 번째는 ‘심사령’에 의해 자격 없는 자가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갇혔는데(1672년)
천로역정은 두 번째 감옥에서 1676년에 쓴 것이다.

번연이 그 긴 감옥생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아볼리온은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교회였는지 모른다. 

힘을 내세요. 다 왔습니다 

가는 길에 놓인 수많은 유혹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끝까지 완주하게 한 것은
뷰티풀 저택과 목자들 그리고 소망이다.

뷰티풀 저택은 아름다운 교회의 표상이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은 좋은 음식과 사랑으로 대접받고 영적 교훈을 받는다.
그가 거기에서 본 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복음의 메시지들이다.
저택 입구에는 무서운 사자가 쇠사슬에 매어 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묶여 있고
고난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택 벽에는 엄숙하고 진지한 인물의 초상화가 있다.
교회는 곧 목회자다.
참다운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곧 교회의 얼굴이다.
먼지로 가득한 응접실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한다.
율법은 먼지를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정결케 한다.
정욕과 인내의 두 어린이는
종말의 시대에 교회가 한 가지(정욕)는 버리고
한 가지(인내)는 붙잡아야 함을 상징한다.
벽난로-마귀는 우리 영혼의 불을 끄고,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지핀다.

철창 속에 갇힌 남자-한때 잘 믿었으나 세상 욕망에 묶여
지금은 영적 감옥에 사는 불행한 그리스도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덜덜 떨고 있는 남자-마지막 심판대 앞에 선 인간의 최후 모습이다.
크리스천은 초원에서 네 목자를 만난다.
그들의 이름은 ‘지식’ ‘경험’ ‘경계’ 그리고 ‘성실’이다.
목자들의 이름은 곧 오늘날 교회지도자, 목자들이 갖춰야 할 영적 덕목이다.
크리스천을 도와 끝까지 완주한 친구는 ‘소망’이다.
이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가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만큼 왔는가.
혹시 ‘낙심’의 구덩이에, ‘환락 성’의 덫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
허영’의 시장에 붙잡혀 있는가.
우리와 끝까지 동행하는 ‘소망’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지 않겠는가.
“자, 형제여! 힘을 내세요. 성문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맞으러 나와서 기다립니다.” 

                                          <분당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4) 존 오웬의 ‘죄죽이기’

2012.11.11 18:03


먼저 회심을 하고… 영으로써 죄를 죽여야한다 그때 우리가 산다

그리스도인으로 죄 문제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죄는 영적 생활을 위한 가장 소중한 문제이면서도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자신만만해 할 사람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성경이 말한 죄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고(갈2:20, 롬6:2, 골3;3),
다른 하나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갈5:24, 골3:5).

‘죽었다’와 ‘죽이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죽이기보다 회심이 먼저다

존 오웬(1616∼1683)을 통해 받는 은혜가 이것이다.
물론 오웬이 이것만 말한 것은 아니다.
오웬은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시대에
목회자들이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거주의 한계를 5마일 이내로 제한받으며,
반국교 운동을 반대하면 체포되거나 감옥에 투옥되는 상황에서
성경에 입각, 올바른 교회를 사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성공회 사제였다.
그러나 성공회 예배의 의식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 때문에
그는 칼뱅주의로 돌아섰다.
그의 대표작인 ‘죄죽이기’(Mortification of Sin)에서 오웬은
죄 죽임에 대한 성경적 원론과 구체적인 방법들을 소개한다.

죄 죽이기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롬 8:13절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나 이 말씀이 위치한 자리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루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미 바울은 롬3∼4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칭의)에 대하여 언급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건은 이 말씀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회심하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거듭나지 않은 자의 당면 과제는 죄 죽이기가 아니다.
  그는 아직까지는 그 일로 부름 받지 않았다.”
오웬의 말이다.
“회심하지 않고 죄를 죽이려는 것은
  마치 기초는 생각지 않고 건물만 세우려는 사람과 같다. 

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적절한 순서가 있다.
죄 죽이기에 앞서 회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웬이 말한 회심의 기초는 분명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갈2:20)는 선언일 것이다.
그때의 죽음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나 도덕적 죽음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은혜로 우리가 함께 죽는 은혜의 죽음 곧 법적, 신분적 죽음이다.
그 죽음은 선제적이고 선언적이고 그리고 고백적이다.
그 죽음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위치적(신분적) 죽음이다.
이 죽음은 이미 롬3∼4장(특히 3:21∼26)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우리는 롬5장(하나님과 평화), 6장(그리스도와 연합),
 7장(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성령의 내주와 최후 승리)의 연속적 축복을 받았다.
롬 8:13의 죄 죽이기를 말할 사람은 먼저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회심’이다. ‘
죄죽이기’는 ‘회심’ 이후에 일어난 신자의 과제다.

내 약점이 무엇인가 보라

롬 8:13은 죄 죽이기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몸’은 육신에 속한 본성의 타락과 부패를 말한다.
‘몸의 행실’은 밖으로 나타난 ‘육체의 일’(갈5:19)
곧 부패한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거하는 죄가 있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롬7:20)
우리를 사로잡는다(롬7:23).
만일 우리가 그 죄를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비참한 죄의 패잔병들이 될 것이다(롬7:24).
따라서 죄 죽이기는 우리의 신성한 의무다.
죄를 죽여야 할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너희’(우리)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영으로써’ 죽여야 한다.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인 죄를 죽이면
그때 우리는 ‘산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죽이는가.
먼저 내가 무엇에 약한지 알아야 한다. ‘
내 속에 있는 죄’라고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죄를 죽일 수 없다.
평소에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약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죄의 본성은 같지만
마귀의 공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삼손은 이성문제로, 가롯 유다는 물질문제, 데마는 세상욕심으로 유혹받았다.
나를 주로 넘어지게 하는 죄의 실체를 알아야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한 시간만 묵상하면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알 수 있다.
수도자 에바그리우스(399년 사망)가 말한 인간의 여덟 가지 본성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탐식, 음욕, 물질욕, 불만감, 분노, 절망감, 허영심 그리고 교만이다.
언젠가 필자가 이 문제로 기도할 때
내 안에 뜻밖의 죄악이 있음을 알았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자기 의로움의 교만이다.
내 안에는 남보다 의롭다는 성자형 교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승리가 또 다른 승리를 낳는다

죄를 죽이는 두 번째 방식은
반드시 한 번에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웬이 보여주는 지혜가 이것이다.
‘하나의 승리가 또 다른 승리를 낳는다.’
죄 죽이기를 시도한 사람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성급해서이다.
모든 죄를 한 번에 일망타진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에 하나의 죄만 상대하라.
한꺼번에 모든 죄를 상대하지 말라.
한꺼번에 모든 죄를 상대하면
한꺼번에 모든 죄가 달려든다.
이 때가 죄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한 가지 죄를 이기기도 하지만 또 다른 죄에서 지기도 한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기억할 것은 영적 승리에 즉효약이 없다는 것과
야곱의 사다리는 한 계단씩 오른다는 것이다.
영성의 새벽도 천천히 밝아온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래서 세 번째가 중요하다.
혹시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했다면
실패한 나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모든 영적 전투자는 롬 7:25을 목숨처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롬 7장에서
자기 안에 있는 죄로 인해 비참하게 사는 자신을 실토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7:24).
이쯤 되었으면 바울은 영적 싸움을 포기했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이다.
이 선언 이후 바울은 롬 8장으로 나아갔다.
롬 8장의 최후 승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영적 싸움에 항상 승리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소리 높여 선포할 말씀이 있다.
롬 7:25이다.

죄 이기기에 승리하고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보다
죄 이기기에 실패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낫다(눅18:9-14).
진정한 승리는 내가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다.
내 승리에 대한 지나친 자기만족을 경계할 뿐 아니라
내 실패에 대한 지나친 자기연민도 경계해야 한다.
한 번의 승리가 나를 천사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한 번의 실패가 나를 영원한 패배자로도 만들지 않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은혜에 의존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롬 6:12-14)
죄 죽이기의 열쇠이다. 
 *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당신은 지금 그 싸움의 한복판에 있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5)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발자취를 따라 

 

                                             2012.11.18 18:30 


신대륙에 미국 탄생 씨앗 심고 추수감사∼ 

추수감사절을 맞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을 생각한다.
미국에 있을 때 보스턴 근교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모형 메이플라워호에 올랐을 때
생각보다 배가 작고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그 작은 배에 102명이나 탔을까?
그때 기억에 남은 사람이 윌리엄 브래드포드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하여
33년간이나 플리머스 주지사로서 정착 초기의 미국을 인도했다.
추수감사절을 처음 시작한 것도 그였다.

브래드포드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브래드포드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었다. 

청교도 신앙과의 만남 

브래드포드의 신앙 역정은 영국 게인스보로에서 시작된다.
청교도 목회자 존 스미스가 최초로 목회를 시작한 곳이다.
존 스미스는 결국 그곳에서 청교도 목회 때문에 쫓겨나 네덜란드로 간다.
다음 도착한 곳이 밥워스.
그곳에서 젊은 브래드포드를 만났다.
큰길에서 약 400m를 걸었더니 숲이 나오고 숲 속에 낡은 교회 하나가 보였다.
그 교회가 바로 올 세인트 교회.
때마침 내린 비로 교회는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곧 옷깃을 여미었다.
그 교회는 유명한 청교도 4인방이
신앙의 자유와 올바른 교회를 꿈꾸며 기도했던 곳이다.
리처드 크리프톤, 윌리엄 브루스터, 존 로빈손, 그리고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그 4인방이다. 

당시 청교도는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영국교회 안에 남아 개혁하자는 개혁파와
이들과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분리파.
분리파에게 사상적 영감을 준 사람이 리처드 크리프톤이다.
그는 이곳에서 목회할 때 함께했던 청년이
윌리엄 브루스터와 윌리엄 브래드포드였다.
당시 브래드포드는 20대 청년. 

그는 영국 북쪽 오스터필드에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삼촌들 밑에서 자라는 동안 잦은 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질병 때문에 신앙에 눈을 떴고 청교도 신앙과도 만날 수 있었다.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크리프톤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친구의 초청으로 리처드 크리프톤이 인도하는 청교도 예배에 참석,
설교를 듣고 믿음의 확신을 가졌다.
크리프톤이 청교도 사상 때문에 올 세인트 교회에서 쫓겨나
스크루비 교회로 가자 그도 따라갔다.
밥워스에서 7㎞쯤 떨어진 스크루비로 향했다.
스크루비는 평범한 시골풍 교회로서
교회의 모습은 남아 있지만 지금은 교회로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교회가 중요한 것은
분리파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나그네의 땅 

브래드포드 일행은 어떤 길을 따라 네덜란드로 떠났는가?
안내자를 따라간 곳은 이밍함과 보스톤이었다.
물줄기를 따라 항구로 이어지는 작은 강둑에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길을 떠났다.

보스톤에는 커다란 기념비가
받침목으로부터 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화살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념비에는 “후에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이
바다 건너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으려는 첫 시도를
1607년 9월 이 근처에서 감행했다”라고 쓰여 있다. 

브래드포드는 1609년 크리프톤, 브루스터 등의 스크루비 교인들과 함께
이곳을 떠나 네덜란드 라이덴에 도착했다.
그는 1612년 라이덴 시민권을 획득하고 회중 내에서 높은 지위도 얻었다.
1613년에는 도로시 메이와 결혼하여 4년 후 아들 존도 낳았다.
그러나 안락한 생활의 네덜란드도, 그에게는 먼 순례지를 향한 나그네의 땅이었다.
그는 이주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네덜란드화되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크루비의 교인들과 함께 또 한번의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은 신세계로의 모험에 찬 이주였다.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 

1619년 봄 그는 상속받은 집과 재산을 팔아 이주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두 척의 배를 마련했다.
스피드웰과 메이플라워호였다.

두 배는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 사우샘프턴을 지나
서쪽으로 120㎞ 떨어진 다트머스 항구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스피드웰호가 고장 난 것이다.
돛에 바람이 새서 속도가 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배에 물까지 새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플리머스 항구로 돌아와 스피드웰호는 포기하고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로 옮겨 탔다.

1620년 9월 20일 드디어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했다.
어둡고 축축한 좁은 선실에서 5000㎞에 이르는 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뱃멀미가 계속되었고 폭풍이 불어 닥쳤다.
메이플라워호는 버지니아를 향해 출발했으나
항해사의 실수로 버지니아보다 북쪽에 위치한
매사추세츠주의 케이프콧에 도착하게 되었다. 

플리머스에 정착하다 

1620년 11월 11일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브래드포드 일행은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결정하고 12월 11일 플리머스록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추위와 배고픔뿐으로,
먹을 만한 음식도 머물 만한 숙소도 없었다.
간혹 인디언의 괴성으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만 있을 따름이었다.
브래드포드에게는 인간적인 고난도 겹쳤다.
아내가 배에서 떨어져 익사한 것이다.
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었다.
1621년 1∼2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했다.
102명 가운데 50여명 넘는 사람이 죽음을 맞았는데
대부분 비타민C 결핍으로 발생한 괴혈병 때문이었다.
3월이 되자 황량한 허허벌판에 영국에서 가져 온 완두콩, 콩, 보리를 심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싹이 나지 않아 그해 가을까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1621년 4월 브래드포드는 초대 정착촌장 존 카버의 후임으로
31세에 정착촌의 지도자가 되었다.
브래드포드는 어려운 시기에 정착촌 촌장이 되어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해야 했다.
가까스로 씨앗을 심어 가을에 얼마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래드포드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 절기를 가질 것을 선언하였다.
절기 동안 3일간 운동경기와 무술경연 등을 벌이면서
인디언들과 친교의 시간을 가지며
한 해 동안 박해 없이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것,
어려움 가운데도 인디언 친구를 주신 것,
적은 양이지만 수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그 후 브래드포드는 1657년 영면할 때까지
아름다운 믿음의 지도자로 최선을 다했다.
주어진 권세를 자신의 영달이나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땅도 이민자들에게 모두 분배했다.

브래드포드를 찾아 떠난 여행의 마지막은 영국 플리머스였다.
인구 30만의 그 도시는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비전을 향해 출발한 청교도의 모험이 시작된 곳이다. 

메이플라워호의 출발을 기념한 작은 기념비 앞에 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하늘을 향해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아닌가?
나도 더 나은 신앙을 향해 매일 나를 버리고 이 항구를 떠나는가?
출렁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성경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렇다.
한 사람 브래드포드를 통해 오늘의 미국이 만들어졌다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가?
오늘 영국을 떠나면 반드시 내일 미국의 새 플리머스에 도착한다.

                                         <분당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6·끝) 영성의 새 출발을 위하여

                                            2012.11.25 17:42


예수님과 함께 한 영성 여행… 은혜의 선물 받았다 

긴 여정이었다.
영성을 찾아 1년 가까이 걸었지만 아직도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영성이 말로 설명되는 것인가?

목회 문제로 어느 목사님을 찾았더니 그가 이렇게 물었다.
“이 목사, 오늘 아침 Q.T 뭐 했어?”
그에게 영성이란 아침마다 만나는 하나님이었다.
그 앞에서 내 영성은 말장난인 것만 같았다.
영성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없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확실한 것이 있다.
영성은 말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 

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교회에 그래도 영성이 필요하다는 많은 징후들이 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은 용서했지만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저주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다만 좋은 사람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이상(열매)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열매에 대한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존재의 문제로 더 신음하고 있다.
우리의 교회는 의식과 제도에 대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도전은 영적 실재에 대한 체험의 결여,
초월성에 대한 거부 등에 기인한 불만으로부터 온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교회가 종교적 형식은 최소화하면서
종교적 내용은 최대화할 수 있을까?
외적 형식은 줄이고 내적 생명력은 풍부하게 할 수 없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교회가 종교성에서 영성으로 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교회 생명의 부재가
우리를 많은 이단과 타종교 그리고 영적 침체로 내몰고 있다.

우리에게 진실로 시급한 것은 내적 생명력의 회복이다. 

더 포용적인 영성이 필요하다 

내적 생명력의 시급한 회복을 위해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그것을 무지로 고백하고
우리가 유일하게 옳다고 여기는 그것을 상대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종교개혁적 전통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혁자만의 후예가 아니라
2000년 교회사와 성서 전통의 후예들이다.
성서의 세계에는 불연속성이 없다.
역사는 흘러가고 영성의 바다는 크고 깊다. 

우리는 먼저 개신교-정통, 가톨릭-이단의 이분법적 구도를 뛰어넘어야 한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하나인 성경의 전통을
말씀과 성례전, 바울과 베드로, 예언자 전통과 제사장 전통, 칼과 열쇠,
들리는 말씀과 타는 불 등 둘로 분리시켰다.
 500년 전 루터는 수도원에서 세상으로, 성자(聖者)에서 죄인으로, 율법에서 은혜로 나왔지만
지금은 오히려 세상에서 수도원으로, 죄인에서 성자로,
은혜에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루터의 by faith alone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여전히 유효하지만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서는 by both faith and love가 더 필요하다.
가톨릭의 영성이 중재(mediation) 영성이요,
개신교의 영성이 즉각성(immediacy)의 영성이라면
영적 생활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사의 누구에게든 배워야 하지만 누구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의 빛에서 비춰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
우리의 영성이 개인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더 도그마적이면 더 철저할 수 있지만
그 철저한 믿음이 종종 파당을 일으켜
그리스도 교회 전체의 일치를 깨뜨려 왔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금욕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막교부들에게서
자기 부정의 제자도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사랑의 눈물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수도원운동을 통해서도 청빈, 순결, 순종의 수덕의 삶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2000년 교회사의 다양한 전승과 성경적 진리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님 생명이 영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많이 안다고 영성을 알았다 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영성은 영성의 탈을 쓴 기독교적 이단이다.
영성은 곧 예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고,
그 생명을 우리가 체험했다(요일1:1-3).
영성이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가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생명이 피조물인 우리에게서 체험된다는 점에서
영성은 곧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그러나 체험주의가 곧 영성은 아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지만
체험의 환영이 깨지자 곧 예수님만 남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체험, 지식, 생각, 성취, 자아를 넘어선 곳에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계신다.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으며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생명은 감추어져 있어서(골3:3) 종종 없는 것처럼 느끼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못 보는 것이다.
생명은 마치 살아 있는 씨와 같아 언제나 거름 주고 물 주면 자란다.
영적 훈련의 필요성은 여기서 제기된다.
생명은 영적으로 훈련할 수 있으며 훈련되어야 한다.
생명은 훈련을 통해 은혜의 실재가 되며
은혜는 또한 지속적인 훈련을 낳는다.
훈련은 은혜에 이르는 관문이며
은혜는 훈련을 율법으로부터 구원한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이 나에게도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훈련을 통해 더 풍성한 은혜에 이른다. 

영성은 교회에서 가르쳐져야 하고 실천되어야 한다 

책상머리에서 논의되는 영성으로는 세상을 살리지 못한다.
영성은 삶이요 삶은 곧 실천이다.
올바른 영성은 기도와 믿음과 실천의 종합체다.
구원은 다만 죄 사함이 아니라 전인적 인격의 변화요 하나님 생명의 충만이다.
올바른 기도는 올바른 믿음을 낳고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실천을 낳는다.
생명은 이 통로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간다.
야곱의 사다리위에 있던 천사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날지 않고 한 계단씩 오르고 내렸다.
영성의 새벽도 한 순간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유능한 설교자나 능력 있는 행정가가 되기 전에
좋은 영성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영성 지도자는 곧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아버지처럼
그 자녀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해야 한다”(살전2:11).
학식 있는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경험 있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경험 있는 목회자는 오랜 기도를 통해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을 소유한다.
그는 지식을 가져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저녁 자신의 삶을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도록 자신을 깨끗한 통로로 드려야 한다.
물은 결코 수원지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영성훈련은 반복을 통해 예수님을 닮은 영적 품성을 기르는 것이다.
습관이 되지 않은 훈련은 자칫 일방적 교육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영성훈련은 아이에서 청년, 청년에서 아비의 단계로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성장은 영성훈련의 목표가 아니라 선물이다.
교회 안에서의 훈련은 세상에서 실천해야 하며 가정은 곧 실천의 중심지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그 생명이 날마다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비전이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