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바다에 합쳐지듯, 자아를 버리고 영혼을 하나님께 예속
잔느 귀용의 자기포기가 기도에 이른 것처럼 그의 기도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하나님과의 연합이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고난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었던 귀용에게 피할 수 없는 영혼의 지순한 지향점이었다. ‘순전한 사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된 인간의 의지는 혼을 하나님께 예속시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자아의 뜻을 점차 버리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연합된 의지는 마침내 점차 혼의 본성과 힘을 없앱니다. 이것을 보통 혼적인 힘의 소멸이라 부릅니다. 혼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사랑이 가득 차고 불타오르는 만큼 혼은 우리에게서 소멸됩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합될까? 귀용은 그리스도인이 회심하는 순간부터 연합이 시작된다고 한다. 회심은 교회를 출석하는 것과 세례 받는 것과는 다르다. 회심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혼이 중심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죄로부터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성품이 하나님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되는 시점은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영혼이 내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의 방향으로 돌이키기 시작할 때다. 누가 언제 하나님께 방향을 돌이켰느냐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의 연합 여부를 아는 분도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중심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에게는 자석과 같이 우리를 끄는 힘이 있다. 그분은 계속해서 우리를 자신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신다. 그분이 우리를 끌어들이실 때 그분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부정한 것들은 여지없이 소멸된다. 불순물이 제거되고 방해물은 축출된다.
그래서 그것이 힘들어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심판, 무서운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의 영혼은 한없이 침체하고 메말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잘 견디면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귀용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아마도 그것이 오해가 되어 그는 루이14세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당시 의식적인 종교인들에게는 귀용의 살아 있는 믿음이 신비적이며 이단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하나님과의 연합’ ‘영혼의 폭포수’ 등에 남아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귀용은 연합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하심으로만 된다고 강조한다. “거룩한 연합, 이것은 단지 우리의 체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묵상이 거룩한 연합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나 예배, 경건 생활이나 희생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연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준비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준비하는 상호적 과정이다. 모든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모든 묵상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상태로 서게 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준비과정일 뿐이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인간은 준비할 뿐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귀용은 기도 자체를 하나님과의 연합의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말함으로써 기도 신비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다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그의 거룩한 연합에 맞지 않는 우리의 ‘자아’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예를 들면 먼지의 더러움이 순금의 깨끗함과 연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찌꺼기를 제거하고 금을 깨끗한 상태로 남게 하기 위해서는 불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이 부정함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자아입니다. 자아는 모든 불결함의 원인이며, 불결함은 정결하신 하나님과의 어떤 연합이라도 방해합니다. 태양광선은 진흙 위에 비칠 수 있으나 진흙과 섞일 수는 없습니다. 불순물이 있는 금은 값비싸고 정제된 순금과 섞이지 않습니다. 이때 연금사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을 불로 처리합니다. 그 후에, 오직 그 후에야 그 두 가지 금이 하나로 연합되고 섞여집니다.”
기도가 필요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기도가 교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거룩의 준비과정이라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얼마나 더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을까? 기도가 축복의 수단이 된 현대에 있어서 거룩을 위한 기도는 더욱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기도한 기도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17:19).
기도 자체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도 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귀용의 평생에 걸친 소원이었다. 그 소원은 그의 표현대로 작은 강물이 큰 바다에 합쳐지듯, 한국적으로 적용할 때 감나무가 고염나무에 접붙여져 고염나무에 감이 맺히듯,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사는”(롬 6:8) 신비를 체험하는 하나님께 나가는 은혜의 관문이다. 귀용은 그 간절한 소원을 그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남긴 시 한 편에 담았다. 제목은 ‘사랑이 나로 범죄케 했다’이다. “사랑이 나로 범죄케 했네. 이것 때문에 그들이 나를 이곳에 가두었고, 나는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분을 위해 이렇게 오랫 동안 갇혀 있다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여전히 거룩한 불꽃에 복종한다네. 아!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으로부터 날아갈 수 있을까! 나를 가둔 그들은 참 사랑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렇다. 참 사랑을 밟고 짓눌러 보라! 그곳은 다시 살아서 타오를 것이다. 그분이 항상 내 눈 앞에 계시네. 내 안에 불을 지피신 그분이 그 불을 항상 밝게 하신다네. 이것 때문에 그들이 나를 때리고 비난한다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 그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있을까? 영원한 생명은 결코 썩지 않을 것일세. 하나님이 사랑의 생명이라네. 오직 생명의 근원이 끊어질 때에만, 빛이 더 이상 비추지 않겠지.”
무엇이 고난에 찬 가냘픈 한 여성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한 이름 없는 연약한 여인을 그토록 빛나는 보석 같은 믿음으로 연단했을까? 하나님과의 연합의 은혜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고의 소원은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다. 초에 불이 붙듯이, 부지깽이에 장작불이 붙듯이,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써, 나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으로 흘러가고 나를 통해 세상이 예수님께 오는 은혜, 그 은혜의 근원을 우리는 사모해야 한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