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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1)-(23) 잔느 귀용 ① - ③

영국신사77 2016. 4. 15. 16:0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1) 잔느 귀용 ① 자기 포기

입력 2012-05-27 18:06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1) 잔느 귀용 ① 자기 포기 기사의 사진
 
사랑·자유 등 모두 빼앗긴 빈자리에 예수님을 채웠다
 
떼제를 떠나 독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낮은 언덕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초원의 양떼, 소담스러운 포도원의 풍경은 이곳이 바로 프랑스의 아름다운 전원임을 알게 했다. 
독일 칼스루에까지 6시간, 그러나 그 6시간이 필자에게 좋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오면 반드시 찾아보고 싶은 인물 하나를 놓고 가기 때문이다.
 
잔느 귀용. 오래 전 한국의 어느 서점에서 우연히 그가 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를 읽었다. 그때 300년 전 프랑스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가 하고 깜짝 놀란 후 귀용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프랑스에 가면 반드시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바쁜 일정상 그럴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프랑스에 가면 읽으리라 생각한 귀용의 책들을 다시 꺼냈다. 
정말 귀용만큼 인생의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성경의 욥을 제외하고 그만큼 인생고를 많이 겪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난만 많이 겪은 것이 아니라 고난의 풀무불에서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래서 정금같이 단련된 사람, 그는 정말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은 사람이었다.
귀용은 1648년 프랑스 파리 몽타르지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 7개월 조산아로 태어난 귀용은 평생 연약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 그의 본격적인 불행은 16세의 나이에 22살이나 연상인 귀족 자크 귀용과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 결혼 첫날부터 귀용은 남편 병 수발과 괴퍅한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뎌내야만 했고 곧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죽자 재산까지 다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귀용의 가장 큰 고난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감옥에 가둔 사람들 때문에 왔다. 1695년 그는 루이 14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체포돼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도 귀용은 다시 붙잡혀 프랑스 중부 블루아 지역에서 아들과 함께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가?(롬 5:20).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 오해와 정죄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전한 사랑은 깊어만 갔다. 그는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침묵과 묵상을 통해 주님과 만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난을 이겨내고 순금 같이 되어 교회사를 빛내는 인물이 되었다.

드디어 1717년 6월 9일. 귀용은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의 품에 안겼다. 칠흑 같은 고난을 통해 귀용이 발견한 첫 번째 진주 같은 영적 보화는 ‘자기포기’의 보화였다. 처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기 포기는 처음부터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삶의 여러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빼앗기고 살았다. 어릴 때는 동생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겼다. 결혼한 후에는 오해와 불신으로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기고 살았다. 병으로 자녀를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 자유롭게 살 권리도 빼앗기고, 무엇보다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자유를 빼앗겼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자기 포기는 그에게 행복한 은혜의 선택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선 그 자신 안에 있는 죄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곡식처럼 쭉정이에서 분리된 알곡과도 같았다. 곡식은 식물이 되기 위해서 쭉정이와 분리된 후 잘게 부서지고 빻아진다. 하나님의 사람도 쓰임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어 버려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매일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의 옛 자아는 항상 자기 죽음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단 죽으면 영은 자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간다.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자기 포기 자체가 자기 포기의 목적이 아니다. 자기 포기는 우리가 주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주님이 임재하는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곧 자기 포기다. 따라서 자기 포기란 곧 자기의 모든 염려를 던져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란 자기의 모든 필요, 곧 자신의 모든 문제를 떨쳐 버리는 것이다. 자기 포기란 자신의 모든 영적인 문제들을 영원히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해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귀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원저:기도의 방법, 1685)에서 자기 포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의 하나님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포기가 단순히 비이기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이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과거의 자기 포기는 ‘비이기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답을 얻는다면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이기심은 내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없이 지내는 것이다. 내가 나 없이 지낸다고 하나님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우리 마음에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본성 때문에 자신에 대해 죽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에 변화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포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포기해야 한다. 심오한 것들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단순한 것들을 즐거워해야 한다. 모든 자의식과 불안이 자기 사랑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비난하지 말아야 할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어떠한 변명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귀용은 그의 책에서 자기 포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죽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여러분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그분을 소유하길 갈망합니다.” “자기애를 통해서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나에게 채찍과 핍박과 불명예와 천함과 자아의 죽음은 나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영적 결혼지참금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포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렇다. 자기 포기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귀용은 고난에 찬 삶의 모든 역정을 통해 자기 포기의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었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2) 잔느 귀용 ② 깊은 기도

입력 2012-06-03 18:04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2) 잔느 귀용 ② 깊은 기도 기사의 사진
 
아기가 엄마 품에서 젖을 빨듯 기도도 그래야 한다
 
고난은 우리를 기도로 내몰고, 기도는 우리에게서 고난을 내모는가? 잔느 귀용의 삶을 통해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최종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유익을 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귀용은 어떻게 그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었을까? 그가 겪은 많은 고난들은 그의 자서전적 고백 ‘순전한 사랑’에 잘 나타난다. 이 책에서 귀용은 그의 삶이 한마디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 축복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나의 기도의 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더욱 성장해갔습니다.” 
 
고난은 말하자면 그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에게 추운 겨울과도 같았다. 누구나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겨울은 새 봄을 잉태하는 계절이다. ‘영적 성장 깊이 체험하기’(원저:변명)에서 귀용은 이렇게 말한다. “겨울은 순례 길을 걷는 우리에게 축복의 계절이다. 왜냐하면 겨울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제거해주는 정화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겨울은 나무의 외면을 위축시킨다. 이를 통해 나무 깊은 곳에 있는 생명이 더 이상 쓸데없이 소진되지 않도록 돕는다. 대신 나무의 생명은 가장 깊숙한 줄기와 보이지 않는 뿌리 부분으로 모여든다.”
 
그는 삶의 긴 겨울을 통해 자기 포기를 배웠고 자기 포기는 곧 기도로 이어졌다. 자기 포기는 마치 추운 겨울에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과 같다. 나무 입장에서는 힘들겠지만 잘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무성한 잎으로 옷 입혀진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귀용의 기도는 먼저 성경으로 시작한다. 그는 간단하면서도 실천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기도로 안내한다. 

기도할 때 먼저 짧은 성경 구절을 읽으라. 성경을 많이 그리고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화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읽다가도 잠시잠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지성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시키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읽을 때 감동이 오면 곧바로 성령님께 집중하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목적도 중요하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에서 귀용은 이렇게 말한다. “왜 기도합니까? 왜 주님께 나아갑니까? 주님 앞에서 얻는 감미로움 때문입니까? 주님의 임재의 즐거움 때문입니까? 내가 더 고상한 길을 제시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주님께로 나아갈 때 순결한 사랑, 즉 그 자체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다만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기도에는 반드시 영적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기도는 단지 수단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귀용은 많은 기도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 겪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룬다. 기도할 때 집중이 잘 안 되고 산만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당황하지 말고 기도를 잠시 쉬는 것이 좋다. 기도할 때 생각이 흐트러지고 복잡해지면 그 원인을 찾거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자신의 생각에 집중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혹이 올 때는 어떻게 하는가? 우선 기도하는 나에게 유혹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혹이 올 때 유혹과 맞붙어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영적 멘토 페네롱의 말을 인용한다. “아이들이 늑대나 곰을 보았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다. 아이는 자기를 향해 무서운 존재가 달려올 때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재빨리 엄마의 품으로 달려간다. 마찬가지로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유혹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로 즉시 달려가야 한다.

영적 메마름은 어떤가? 영적 메마름이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종종 찾아오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왜 영적 메마름이 찾아올까? 귀용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허락하시는 목적은 영적인 게으름으로부터 당신을 깨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목적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적 메마름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 잠시 숨어 있는 상태다. 우리가 영적 포만감에 젖어 자만해 있을 때, 우리가 영적 부요의 타성에 젖어 감사를 잃어버릴 때 엄마가 아이를 떠나 잠시 장롱 뒤에 숨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 숨으신다. 그러나 이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 메마름이 올 때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절대 조급해 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귀용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의 조화다. 이 경우의 좋은 비유가 아기와 엄마의 비유이다. 아기가 배가 고프면 엄마 품으로 들어간다. 그에게는 젖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엄마에게도 젖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엄마 품에 있는 아기는 드디어 입을 벌려 젖을 빤다. 젖은 엄마 품에 안겼다고 자동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기가 입을 벌려 젖을 빨아야 젖이 나온다. 그러나 일단 아기가 젖을 빨면 젖은 스스로 나온다. 아기는 젖을 빨지만 젖은 스스로 나온다는 사실이 기도의 신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단 젖이 나오면 아기는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고 단지 흘러나오는 젖을 삼키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나오는 젖을 삼키는 아기는 행복감에 취하게 되고 곧 엄마 품에서 잠들게 된다. 

이것이 귀용이 우리에게 가르친 탁월한 기도의 진수다. 여기에 언제라도 아기에게 젖을 주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품에서 입술을 벌려 기도해야 하는 인간의 노력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하나의 비유가 있다. 돛단배의 비유다. 강과 바다의 이미지는 귀용이 자주 사용하는 영적 이미지다. 돛단배가 바다로 항해할 때 먼저 강에서 노를 저어야 한다. 배가 돛으로 가던 시절, 배는 노를 저어 강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것은 힘든 출발이지만 또한 희망의 출발이기도 했다. 좁은 강을 저어 한참 나가면 바다가 나오고 사공은 그때부터 돛을 편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 돛은 움직이고 배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간다. 듣기만 해도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 비유를 통하여 귀용이 말하고자 한 것은 기도는 내면의 작은 갈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처음부터 망망대해가 아니다. 망망대해를 향하는 배는 작은 강에서부터 노를 저어야 한다. 노를 젓지 않으면 망망대해도 없다. 그러나 일단 배가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면 돛이 스스로 움직인다. 그때부터는 배는 사공의 힘이 아니라 바람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사공이 바람에 자신을 잘 맡기는 한, 배는 곧 망망대해에 이르게 된다. 

기도의 사람, 잔느 귀용. 그가 칠흑 같은 고난 속에서 깨닫고 발견한 깊은 기도에의 초청이 얕은 물가에서 서성대는 우리의 기도를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귀용이 칠흑 같은 고난 속에서 깨달은 기도 본질 

▶아기가 젖을 빨면 젖은 스스로 나온다. 젖이 나오면 아기는 흘러나오는 젖을 삼키기만 하면 된다. 아기는 곧 행복감에 엄마 품에서 잠들게 된다. 언제라도 ‘젖’을 주려는 하나님과 인간 노력의 조화를 나타낸다. 

▶배는 노를 저어 강에서 출발한다. 곧 바다가 나오고 사공은 그때부터 돛을 편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 돛은 움직이고 배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간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3) 잔느 귀용 ③ 하나님과 연합

입력 2012-06-10 18:1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3) 잔느 귀용 ③ 하나님과 연합 기사의 사진

강물이 바다에 합쳐지듯, 자아를 버리고 영혼을 하나님께 예속 

잔느 귀용의 자기포기가 기도에 이른 것처럼 그의 기도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하나님과의 연합이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고난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었던 귀용에게 피할 수 없는 영혼의 지순한 지향점이었다. ‘순전한 사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된 인간의 의지는 혼을 하나님께 예속시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자아의 뜻을 점차 버리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연합된 의지는 마침내 점차 혼의 본성과 힘을 없앱니다. 이것을 보통 혼적인 힘의 소멸이라 부릅니다. 혼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사랑이 가득 차고 불타오르는 만큼 혼은 우리에게서 소멸됩니다.”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합될까? 귀용은 그리스도인이 회심하는 순간부터 연합이 시작된다고 한다. 회심은 교회를 출석하는 것과 세례 받는 것과는 다르다. 회심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혼이 중심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죄로부터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성품이 하나님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되는 시점은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영혼이 내적으로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의 방향으로 돌이키기 시작할 때다. 누가 언제 하나님께 방향을 돌이켰느냐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의 연합 여부를 아는 분도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중심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에게는 자석과 같이 우리를 끄는 힘이 있다. 그분은 계속해서 우리를 자신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신다. 그분이 우리를 끌어들이실 때 그분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부정한 것들은 여지없이 소멸된다. 불순물이 제거되고 방해물은 축출된다. 

그래서 그것이 힘들어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심판, 무서운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의 영혼은 한없이 침체하고 메말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잘 견디면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귀용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아마도 그것이 오해가 되어 그는 루이14세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당시 의식적인 종교인들에게는 귀용의 살아 있는 믿음이 신비적이며 이단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하나님과의 연합’ ‘영혼의 폭포수’ 등에 남아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귀용은 연합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하심으로만 된다고 강조한다. “거룩한 연합, 이것은 단지 우리의 체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묵상이 거룩한 연합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나 예배, 경건 생활이나 희생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연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도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준비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준비하는 상호적 과정이다. 모든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모든 묵상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수동적인 상태로 서게 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준비과정일 뿐이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인간은 준비할 뿐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귀용은 기도 자체를 하나님과의 연합의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말함으로써 기도 신비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다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그의 거룩한 연합에 맞지 않는 우리의 ‘자아’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예를 들면 먼지의 더러움이 순금의 깨끗함과 연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찌꺼기를 제거하고 금을 깨끗한 상태로 남게 하기 위해서는 불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이 부정함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자아입니다. 자아는 모든 불결함의 원인이며, 불결함은 정결하신 하나님과의 어떤 연합이라도 방해합니다. 태양광선은 진흙 위에 비칠 수 있으나 진흙과 섞일 수는 없습니다. 불순물이 있는 금은 값비싸고 정제된 순금과 섞이지 않습니다. 이때 연금사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을 불로 처리합니다. 그 후에, 오직 그 후에야 그 두 가지 금이 하나로 연합되고 섞여집니다.” 

기도가 필요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기도가 교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거룩의 준비과정이라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얼마나 더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을까? 기도가 축복의 수단이 된 현대에 있어서 거룩을 위한 기도는 더욱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기도한 기도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17:19). 

기도 자체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도 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귀용의 평생에 걸친 소원이었다. 그 소원은 그의 표현대로 작은 강물이 큰 바다에 합쳐지듯, 한국적으로 적용할 때 감나무가 고염나무에 접붙여져 고염나무에 감이 맺히듯,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사는”(롬 6:8) 신비를 체험하는 하나님께 나가는 은혜의 관문이다. 귀용은 그 간절한 소원을 그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남긴 시 한 편에 담았다. 제목은 ‘사랑이 나로 범죄케 했다’이다. “사랑이 나로 범죄케 했네. 이것 때문에 그들이 나를 이곳에 가두었고, 나는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그분을 위해 이렇게 오랫 동안 갇혀 있다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여전히 거룩한 불꽃에 복종한다네. 아!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으로부터 날아갈 수 있을까! 나를 가둔 그들은 참 사랑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렇다. 참 사랑을 밟고 짓눌러 보라! 그곳은 다시 살아서 타오를 것이다. 그분이 항상 내 눈 앞에 계시네. 내 안에 불을 지피신 그분이 그 불을 항상 밝게 하신다네. 이것 때문에 그들이 나를 때리고 비난한다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 그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있을까? 영원한 생명은 결코 썩지 않을 것일세. 하나님이 사랑의 생명이라네. 오직 생명의 근원이 끊어질 때에만, 빛이 더 이상 비추지 않겠지.” 

무엇이 고난에 찬 가냘픈 한 여성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한 이름 없는 연약한 여인을 그토록 빛나는 보석 같은 믿음으로 연단했을까? 하나님과의 연합의 은혜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고의 소원은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다. 초에 불이 붙듯이, 부지깽이에 장작불이 붙듯이,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써, 나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으로 흘러가고 나를 통해 세상이 예수님께 오는 은혜, 그 은혜의 근원을 우리는 사모해야 한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