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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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노동, 복종-자유의 균형 등 극단을 떠나 중용 제시 그러나 모나코의 카지노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카지노다. 정확히 말하면 몬테 카지노는 이탈리아 라치오 지방 카지노 시에 있는 산(Monte) 이름이다. 높이는 해발 519m. 이 산에 1500년 동안 서구 정신사에 영향을 준 수도원이 하나 서 있다. 이름은 베네딕트 수도원. |
2012.03.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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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근거 없는 마리아 신격화 안되지만 |
2012.04.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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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예수님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들은 프란체스코에 관한 설교만도 책 몇 권은 되리라.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다시 머리에 입력했다. “약간 작은 키에 가지런한 둥근 머리, 갸름하고 진취적인 얼굴, 평평하고 작은 이마, 보통 크기의 검은 눈, 곧은 눈썹, 얇고 곧은 코, 귀는 곧으나 작으며 평평한 관자놀이, 온화한 말투, 달콤하고 다부지며 낭랑한 목소리, 희고 가지런한 이, 작고 얇은 입술, 검고 드문드문 난 턱수염, 곧은 어깨, 가느다란 손, 긴 손가락, 불쑥 나온 손톱, 홀쭉한 허리, 작은 발, 섬세한 피부, 허름한 의복, 단잠, 고귀한 손, 우수한 겸손.” 나도 모르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룩에의 본능일까? 멀리 보이는 수비오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시시 마을. 저 마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났다니….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프레스코화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중세풍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고 그 앞에는 가슴이 탁 트이는 움부리아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이 유난히도 가까운 마을, 그 분위기는 마치 갈릴리 같고 나사렛 같았다. 성당 안에는 작은 집 안에 누워 있는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주변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지오토, 치마부에, 로렌체티, 마르티니 등의 그림이 위대한 삶을 산 프란체스코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십자군 병사를 꿈꾸던 그는 어느 날 산 다미아노 성당의 제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체스코, 너는 가서 무너진 나의 집을 수축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얼마 후 육체로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다. 어느 날 그가 말을 타고 가는데 나병환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가난한 시대, 유난히도 나병환자가 많았다. 보통 때 같으면 스쳐갔을 프란체스코는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죄인인 내가 그 나병환자를 보았을 때 나는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그들 가운데 있게 하셨고 그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껴안고 돌아섰을 때 나의 비통한 마음은 영혼과 몸의 달콤함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 4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삶을 살았다. 사람에 따라 가난(청빈), 겸손, 복음적 선교, 사랑, 십자가, 성령의 이끌림, 우주적 형제애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이것이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이다. ‘unconditional love for Christ(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이라고 말한다. 리처드 포스터는 성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은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쇼트는 ‘거울론’으로 설명한다. 프란체스코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는 데서 왔다는 것이다(고후 3:18). 하나님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고 만물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만물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물을 본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에 의하면 프란체스코의 영성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보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라.” 가난할 뿐 아니라 아예 가난 자체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위해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그가 가난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눅 9:3),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이 세 본문이 프란체스코 가난의 성경적 기초다. 따라서 그의 가난은 해방신학적 가난이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회적 가난이 아니라 복음적 가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수축하라는 음성을 듣고 세 교회를 수리했다. 성 다미아노 교회, 포르티운쿨라 교회 그리고 성 피에트로 교회이다. 그는 종종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를 떠난 교회사의 다른 인물들처럼 한 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교회와의 단절은 곧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매일 죽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매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성육신적 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순종해야 한다. “형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거룩한 성녀인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 또한 거룩한 어머니 교회와 그 종(성직자)들에게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육체적 영적으로 유사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프란체스코를 좁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끌어내어 세계를 수도원으로 만든 힘이다(리처드 포스터). 선교는 이러한 신앙고백의 자연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생애 동안 이슬람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도했다. 그리고 1314년에는 프란체스칸 선교사들이 당시만 해도 지구의 끝이었던 중국을 향해 선교를 떠났다. 프란체스코 영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를 수축할 것인가? 프란체스코의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소원하지 말고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오직 한 분 거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부로 삼아야 한다(수도회규칙·1209).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
2012.04.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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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프란체스코 몸에 못박음 상처내고 피흘리게 한 뜻은? 그는 라 베르나 산에서 교회 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소위 오상(五傷) 체험이다. 예수님처럼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가 나고 실제 피가 흐른 것이다. 만일 프란체스코처럼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루돌프 오토의 말대로 하나님의 불은 우리에게 매혹적이면서 또한 두려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두려워하면서도 누구나 속으로 바라는 신비로운 체험, 버스 안에서 연신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섞였다. 높이가 1283m에 이르는 높은 산이다. 성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지역은 해발 1128m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라 베르나 산은 원래 이 지방의 지주였던 오를란도 카타니 백작의 소유였다. 프란체스코가 이 지역을 지나갈 때 몬테펠트로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감명 깊게 들은 카타니 백작이 이 산을 프란체스코에게 선물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을 보내어 답사하게 한 후 이 산이 기도생활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였다. 광장을 지나면 아시시 대성당과 비슷한 교회가 나온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갈라진 바위가 나오는데 프란체스코가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곳이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곳에 프란체스코가 오상을 체험했던 곳이 있다. 그곳에는 13세기 말에 만들어졌다는 육각형의 대리석 표시가 있고 그 위에 고딕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 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체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주셨도다.” 그는 여기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40일간의 기도를 시작했다. 그가 거기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할 때 두 가지 빛이 그 영혼에 비추었다고 한다. 하나는 창조주를 아는 빛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아는 빛이다. 그가 하나님께 “주님,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비참함을 알았고,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처럼 천하고 더러운 벌레를 방문하십니까?” 라고 기도할 때 화염 속에 계신 하나님이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계속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간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첫째는 저의 생애 동안 제 영혼과 육체가 가능한 한 많이, 사랑하는 당신께서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수난의 고통을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그 크신 사랑을 저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한 많이 제 마음에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한 스랍 천사가 내려왔다.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녔으며 여섯 개의 날개 중 두 날개는 머리를 가리고 두 날개는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으며, 다른 두 날개는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손과 발에는 못으로 관통된 흔적이 나타났고, 못의 윗부분은 발바닥과 발등에, 못의 아랫부분은 반대쪽으로 나온 것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손바닥에는 안에서 볼 때는 둥글지만 반대쪽에서는 네모꼴 모양의 흔적이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것 같은 네모꼴 상처가 나타났는데, 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와 튜닉과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레오 형제에게만 알리고 그 상처를 돌보아 주도록 부탁했다. 레오는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붕대를 못자국에 감아주었다. 프란체스코의 이 체험은 기왕의 유명하던 그의 이름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대에 신비체험의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이시다. 불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사랑의 강력한 상징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불 가운데 언약을 맺었고,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불 가운데 타죽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와 하늘의 불을 두고 다퉜고, 모세는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 맨발로 섰다. 이사야, 에스겔은 불 가운데 임한 하나님과 스랍들을 엎드려 만났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빛난 주석 같은 인자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렸다(계 1:15∼17). 모든 성도의 영적 갈망의 표상이었다. 신신학자라고 불리는 시므온(949∼1022)이 그 중 하나다. 그는 하나님 체험을 ‘빛의 도취’ ‘불의 움직임’ ‘내 속에 있는 불꽃의 소용돌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오는 불과 동일시했다. 성령은 곧 마음의 불이다. 하나님은 불의 원천이며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빛의 공유자가 된다. 그가 지은 찬송가의 한 부분이다. “나는 불길에 휩싸였네. 나는 불탔네. 내 모든 존재 불에 타고 있었네…. 그분이 갑자기 거기 계셨네. 불이 철로 나를 녹이듯이, 빛이 크리스털로 나를 녹이듯이, 그분은 나를 온통 불로 만드셨네.” 공기가 햇빛으로 빛날 때 조명을 받는 것처럼, 성도의 내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그것이 녹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불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강력한 상징이다. 불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금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금은 가만히 있고 불순물만 제거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불순물이 소멸될 때까지 우리 영혼을 불속에 두신다. 사막 교부들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바 요셉이 아바 롯에게 찾아가 말했다. “아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기도와 금식, 침묵과 묵상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생각을 순결하게 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을 더 해야 합니까?” 아바 롯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은 마치 화염처럼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의 몸 전체가 화염이 될 수 있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눅 12:49).” 2000년 교회 역사는 곧 불의 역사였다.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 우리에게도 이 불이 있는가? 이 불로 인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흔이 있는가?(갈 6:17)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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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난에 몸 맡기고 주님 찬미한 프란체스코 여제자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줘 |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6)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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