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단순히 ‘말 없음’이 아니라 ‘말씀 채움’이다
떼제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철도인 떼제베(TGV)를 탔다.
파리까지 4시간 걸렸고 파리 동역에서 리옹역까지 택시로 15분 걸렸다.
리옹역에서 다시 떼제베로 갈아타고 마콩에서 내린 후
무거운 가방을 들고 허름한 시골버스 뒷좌석에 앉을 때까지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낯선 이국땅의 정취는 그만두고
우선 당장 길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나에겐 시급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목가적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겨운 종소리가 뎅그렁거리는 언덕에 들어서자
떼제는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길은 멀었지만 마음은 가까웠다.
처음 왔지만 언젠가 와 봤을 것 같은 마음의 고향,
떼제가 가깝다고 느낀 이유는 또 있었다.
창시자 로제 수사 때문이다.
로제 슈츠(Roger Schutz)는
1915년 스위스의 너샤텔 근처 프로방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혁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역시 로제가 어렸을 때
가톨릭교회에서 기도할 만큼 에큐메니컬한 사람이었다.
로제가 교파를 초월한 화해의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그 자신 역시 개신교 출신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안심이 되고 자랑스러운지….
로제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의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젖은 유럽의 영성적 기후 아래 자랐다.
폐결핵으로 요양하던 중 강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유럽의 평화와 갈라진 그리스도인의 화해를 위해
아주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오랜 기도와 준비 끝에
25세의 나이로 로제는 스위스를 떠나
전쟁으로 고통 받는 프랑스로 갔다.
공동체를 시작할 집을 찾던 중 고도(古都) 클루니(Cluny)에 도착했고
근처에 집 하나가 났다는 말을 듣는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두리번거리다가
폐허처럼 버려진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먹을 것을 구했는데
할머니가 음식을 주고 잠자리도 제공했다.
다음 날 길을 떠나려고 집을 나설 때
할머니가 한 말이 로제의 영혼에 부딪쳤다.
“젊은이, 여기에 머물게. 우리는 너무 가난하고 외롭다네.”
그날 로제는 이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리고 근처에 집을 사 혼자서 기도하며 살기 시작했고
피난민들, 특히 유대인들을 맞이했다.
그 마을의 이름이 떼제였다.
몇 년 뒤 첫 형제들이 동참했다.
떼제의 생활은 성찰과 나눔의 시간, 매일 세 번의 공동기도 참석,
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인 노동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하루 세 번 드리는 공동기도(예배) 시간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일손을 내려놓고 교회로 모인다.
아침 기도는 8시15분, 낮 기도는 12시20분, 저녁 기도는 8시30분에 시작된다.
기도회에서 떼제의 수사들은 한 가운데 흰 기도복을 입고 앉고
그 좌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방문객들이 앉는다.
약 40분간 진행되는 예배는
찬양과 성경봉독(각 나라말로), 중보기도, 마침기도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심에 침묵기도가 있다.
침묵은 8∼10분 진행된다.
얼마나 침묵이 중요한지
아예 예배 때마다 입구에
침묵(silence)이라고 쓴 표지판을 든 사람들이 서 있다.
예배 때 소란하거나 사진을 찍으면 즉시 달려와 제지한다.
침묵은 떼제에 흐르는 기본적인 영적 분위기다.
소음은 현대인을 이루는 가장 필수적인 존재요소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 침묵은 낯설 뿐 아니라
삶의 방해요소이기도 하다.
부지런히 말하고 설득해야 성공하는 세상에
스스로 말을 중단한다는 것은 성공을 포기한 것과 같다.
떼제의 침묵은 예배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 에티엔느 샘이라는 정원은 그야말로 침묵의 섬이다.
이곳은 침묵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두 번 개방한다.
아름다운 숲이 있고 오솔길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못이 있고 다리가 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눕거나 걸으면서 침묵으로 기도한다.
침묵은 처음에는 답답하지만 적응될수록 자유롭다.
길게 자신을 변호하거나
장황하게 자신을 광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몇 시간 동안 침묵하며 앉아 있을 때
테레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도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기도를 하려면 우선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요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테레사의 말이 이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토머스 머튼이 ‘묵상의 능력’에서 말한 대로
성스러운 태도는 본질상 묵상적이며,
세속적인 태도는 본질상 활동적이다.
활동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활동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의 기초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활동은 필요하지만
우리의 활동이 하나님의 활동을 대신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묵상적이다.
그러나 침묵을 위한 침묵은
묵상적인 것도 아니고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근육을 위해 근육을 만드는 운동선수와 같다.
침묵을 위해 침묵하는 것을 머튼은 정적주의(quietism)라 불렀다.
정적주의는 침묵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불교의 선(禪)과 비슷하다.
정적주의는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고독한 인간으로 선다.
정적주의는 자기를 비우기는 하지만
비움의 목적이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침묵은 다만 비우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다.
하나님 없이 무기력한 영적 진공상태로 남아
그 중심에 자기가 자리한 상태를 성경은 침묵이라 부르지 않는다.
정적주의의 근본은 자기 사랑(自愛)이요,
침묵의 근본은 하나님 사랑이다.
정적주의는 하나님과 분리된 공간 안에 자기가 사는 것이고,
침묵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된 상태로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성경적 침묵이냐 아니냐의 시금석이 된다.
침묵은 본회퍼의 말 같이
다만 말 없음이 아니라 말의 성찬, 말의 넘침이다.
영혼 깊숙한 곳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다.
침묵은 또한 무언 이상의 삶의 태도이다.
로제 수사가 즐겨 사용했던 말 중에
잠정적이란 말이 있다.
잠정적인 것의 반대는 항구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구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 가장 잠정적인 것이 가장 항구적인 것이요,
가장 불확실한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침묵은 말없이 하나님의 잠정성을 받아들이는 삶의 고요한 태도이다.
침묵은 말없이 하나님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떼제에 화해의 교회를 확장하면서 지은 공간은 콘크리트로 짓지 않았다.
언제나 허물 수 있고 언제나 증축할 수 있는 임시적인 칸막이로 지었다.
부분이 모이면 전체가 되고
전체도 언제나 부분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잠정성이다.
우리에게 침묵은 가능한가?
서로 사랑하면 말이 필요 없다.
침묵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사랑의 밀어(密語)이다.
우리는 자주 침묵하는가?
침묵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가 더 침묵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자주 말씀하신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