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1)-(16)

영국신사77 2016. 4. 13. 22:02

2012.03.18 18:20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1) 몬테 카지노의 베네딕트 수도원

 

































기도-노동, 복종-자유의 균형 등 극단을 떠나 중용 제시

몬테 카지노를 아는가? 언뜻 들으면 모나코의 카지노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모나코의 카지노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카지노다. 

정확히 말하면 몬테 카지노는 

이탈리아 라치오 지방 카지노 시에 있는 산(Monte) 이름이다. 

높이는 해발 519m. 

이 산에 1500년 동안 서구 정신사에 영향을 준 

수도원이 하나 서 있다. 

이름은 베네딕트 수도원. 

멀리서 볼 때 산 정상에 무슨 건물 하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시야는 달라진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면 마치 변화산에 올라온 듯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 아래 펼쳐진 움부리아 평원은 온통 운무로 덮여 있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마치 다도해처럼 펼쳐져 있다.

‘Pax(평화)’라고 쓰여 있는 정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오고 정원에는 한 사람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다. 베네딕트가 주후 547년 제자들에 부축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다. 베네딕트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 앞에 누워서 갈 수 없다며 성찬을 받은 후 서서 주님을 맞이하는 자세로 손을 들고 운명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너른 광장이 나오고 광장 앞에는 지팡이를 든 또 하나의 동상이 나온다. 이 동상은 1943∼1944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수도원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요새화하여 전쟁하는 가운데 35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도 거의 초토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베네딕트 자신의 또 다른 동상이다. 

베네딕트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것은 주후 529년, 그는 그 이전에도 수비야코의 한 동굴에서 조용히 수도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3년 수도생활을 통해 그는 영혼의 거듭남을 체험하며 수도생활의 기초를 쌓았다. 수비야코 수도 생활은 그 후에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의 요람이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만났던 첫 사랑의 밀회장소였을 것이다. 

베네딕트는 이곳으로 이주해 아폴로 신전이 있던 이곳을 정결케 한 후 무릎을 꿇고 수도원의 기초를 놓았다. 베네딕트가 후대의 영성사에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베네딕트 규칙(The Rule of Benedict)’일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규칙을 베네딕트 자신의 창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구 결과 규칙집은 그 이전에 있었던 ‘스승의 규칙(Regula magistri)’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략 4분의 1은 스승의 규칙을 그대로 따랐고, 4분의 2는 많은 영향을 받았고, 나머지 4분의 1은 베네딕트 자신의 창안이라고 볼 수 있다. 

베네딕트 규칙은 73장으로 되어 있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장에서 7장은 교리(원리)를 다루고, 8장에서 73장은 수도자들의 생활과 훈련(실제)을 다룬다. 규칙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너의 마음의 귀로 경청하라.” 

베네딕트에게 수도원은 하나님의 학교였다. 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고 불렀다. 학교라면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다. 수도자인 제자는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이 그 이전의 수도원에 대해 혁명적 발전을 이룬 것이 있다면 바로 수도자의 정착생활이다. 그 이전의 수도사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자를 네 종류로 나누었다. 공동체 질서 안에 사는 공동체 수도자(cenobites), 혼자 사는 독거 수도자(hermites), 규칙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라바이트(sarabaites), 여기저기 정처 없이 옮겨 다니는 기로바구스(gyrovagus). 

그는 모든 수도자는 반드시 한 곳에 정착할 것을 요구했다.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수도자를 악한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래서 수도자가 될 때 반드시 ‘정주서원(定住誓願)’을 해야 했다. “반드시 수도자는 한 수도원에 소속하고 일단 소속하면 떠나지 마라.” 이것이 정주서원이다. 

정주서원의 요구는 베네딕트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를 정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교회방랑자로 사는 한국교회 일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메시지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서 오는 문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 때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나도 모르게 깨뜨리는 것이다. 

수도자가 한 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사막 교부들의 오래된 이상이었다. 성 안토니의 말과 같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처럼 기도실(수실) 밖에서 빈둥거리거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도자들은 내면의 평화를 잃을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에서 헤엄치듯이 수도자는 기도실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밖에서 지체하면 반드시 내면의 경성을 잃게 된다.”(사막 교부들의 금언) 

아마도 베네딕트가 후대 기독교 영성에 대해 남긴 큰 공헌은 균형의 영성일 것이다. 그는 베네딕트 규칙에서 다양한 영성적 삶을 균형 있게 조화시켰다. 기도와 노동, 공동체적 복종과 개인적 자유, 독거생활과 공동체적 질서, 엄격함과 관대함, 침묵과 사랑, 남성성과 여성성, 수도원장에 대한 절대적 권위와 동료 수도자와의 형제적 관계, 영적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열심히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에게 극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다. 율법주의가 그렇고 신비주의, 열광주의가 그렇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영적 삶의 후퇴라고 볼 수도 있을 중용적 삶을 과감하게 선택하여 모든 사람이 적응할 수 있는 실용적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베네딕트 운동이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베네딕트의 균형적 영성에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성경, 전통, 개인적 영성의 삶, 그리고 공동체적 삶이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베네딕트의 영성의 중심이다. 거룩한 독서와 묵상은 베네딕트 영적 삶의 핵심이다. 그는 전통으로부터 많은 교훈과 빛을 받았다. 그는 안토니, 카시안으로 이어진 이전 시대의 수도원 정신을 계승했으며 어거스틴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카시안의 ‘강화집’은 그의 수도원 운동의 교과서였고 어거스틴에게 받은 영향은 11세기의 클레이보의 버나드를 통해 루터, 칼뱅에게까지 이어졌다. 

개인적 영성의 삶은 베네딕트 영성의 일상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에 일곱 번 드리는 성무일과는 베네딕트가 만들어낸 수도원 예배의 가장 큰 모델이었다. 노동은 베네딕트가 서방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일 것이다. 노동을 경시하던 당시의 풍습에 노동을 기도만큼 중요시함으로써 수도원의 자립은 물론, 영성의 사회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지 않을까? 길고 긴 교회의 역사에서 개신교 전통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파적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가? 전통주의는 나쁘지만 전통은 아름답다. 몬테 카지노를 내려오면서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오묘하게 자리잡은 베네딕트 수도원이 1500년 동안 변함없이 세상을 비춘 이유를 묻고 또 물었다.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 


          2012.03.25 18:1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2) 마리아 그림 앞에서

 





































성경 근거 없는 마리아 신격화 안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母性을 느껴

세상을 치유하는 영적교훈 얻어야

마리아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유럽 영성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쉬지 않고 필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평소에 생각한 대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톨릭 국가를 여행하는 기독교인에게 이 질문은 계속 따라다니는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방문하는 교회, 박물관, 미술관마다 마리아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도 그랬다. 피렌체(플로렌스)는 글자 그대로 꽃의 도시다. 이탈리아의 예향이요, 르네상스의 진원지다. 단테의 고향이요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보티첼리가 활동했던 주무대였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여기에 있는 성화 몇 점만으로도 피렌체는 충분히 세계적인 도시다. 

그중에서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우피치 미술관에 가보자. 대표적인 그림이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이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 작품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외 없이 마리아 앞에 선다.

대표적으로 지오토의 ‘오니산티의 마리아’(1306∼1310)가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전체적으로 황금빛이다. 마리아가 보좌에서 예수님을 안고 있고 사방에 천사와 성인들이 둘러서 있다.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보면 이상하리만큼 크게 그려져 있다. 주변에 있는 성인, 천사들을 크게 압도한다. 마리아의 우람한 품안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 

보티첼리가 그린 ‘대공의 성모 마리아’(1483∼1485)도 있다. 이 그림에서도 마리아는 주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수님을 안고 있다. 천사들은 하늘의 빛을 받아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다. 한 천사는 마리아의 노래라고 쓰인 성경을 펼친다. 이 그림에 나타난 마리아는 누가 봐도 하늘의 여왕이다. 마리아 덕에 예수님도 귀하게 보이지만 예수님을 그리려다 마리아를 그렸는지 마리아를 그린 후에 예수님을 끼워 넣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0년 미술사에 나타난 마리아 그림이 이뿐이겠는가? 마리아 그림은 아마도 모든 세대 기독교 미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주제였음이 분명하다. 마리아는 그의 부모 안나와 요아킴과 함께, 세례 요한과, 수태고지, 동방박사, 예수님의 다양한 일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과 함께 우리에게 많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름값을 하는 화가 치고 마리아를 그리지 않은 화가가 없다. 문제는 그림이 아니다. 그림으로 표현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다.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를 어떻게 그렸는가가 아니다. 마리아를 어떻게 그렸느냐 하는 것은 마리아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형상은 본질에서 나오며 본질은 어떤 방식으로도 형태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성상파괴 운동을 종결했던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787)의 선언과도 같다. 성상파괴 문제로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난 후 공의회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형상에게 바쳐진 존숭은 그것의 원형에게로 옮겨가며, 성상을 존숭하는 사람은 그 성상 안에 표현되어 있는 위격을 존숭한다.” 

그렇다. 우리가 보는 성화 한 점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다. 마리아가 보좌에 앉았다면, 마리아가 화려한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태어난 분으로 믿는다. 소위 ‘마리아 무염시태설’이다. 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마리아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부활, 승천한 분으로도 믿는다. 소위 교황 피우스 12세가 선포한 마리아 부활승천교리의 내용이다. 마리아는 죽어 무덤 속에 내려갔으나 썩지 않고 부활한 후 승천했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없는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당연히 믿지 않는다. 마리아를 이렇게 신격화하면 기왕에 마리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조차도 마리아를 멀리하게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감동을 주려면 마리아도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이 아닌 신에게서 하나님인 아들이 태어났다면 그 성육신은 신비롭지도 않고 은혜롭지도 않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마리아에 대한 신격화에는 우리가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신성이 있다고 성경 어디에서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평범한 나사렛 처녀로 묘사하고 있는 분명한 성경적 기록에도 불구하고(눅 1:26∼30), 성상파괴 운동 같은 거센 교회사의 반 마리아 우상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이 계속해서 마리아를 그리고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명백하게 잘못된 비성경적인 교리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숙연해지는가? 거기에는 교리적인 입장에서만 볼 수 없는 다른 요소가 분명히 있다. 

역사적으로 마리아론은 기독론과 함께 발전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낳은 마리아는 당연히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일 것이다. 마리아론은 역사적으로 성육신 교리를 변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신앙고백의 배경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말한 하나님은 부성적 하나님만이 아니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모성적 하나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새끼를 업는 어미 독수리”(신 32:11) 같은 하나님이요, “숨이 차서 헐떡이며 해산하는 여인”(사 42:14) 같은 하나님이다.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사 49:15) 하나님이며 또 “젖을 빨게 하고 품에 안고 무릎에서 놀게 하시는”(사 66:12∼13) 하나님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 모성적 이미지는 어머니 하나님의 전통으로 신약과 교부시대를 통해 교회사에 흘러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하나님은 요즘 어떤 이단이 주장하는 ‘어머니 하나님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겐, 이레니우스, 크리소스톰, 암브로우스, 어거스틴 등의 초기교회를 거쳐 중세시대의 클레이보의 버나드, 리보의 엘레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이 이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이러한 모성적 하나님 신앙이 역사 속에서 한 인물로 수렴되었는데 그가 바로 마리아다. 마리아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공(功)은 그들의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도 불구하고 모성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이 ‘모성적 하나님’의 성경적 전통을 ‘하나님 어머니’의 신학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또한 마리아는 남성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페미니스트들의 아이콘도 아니다. 우리가 마리아에게서 긍정적으로 볼 것은 한 평범한 인간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와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 있는 부드러운 모성적 속성이다. 그리고 그 모성적 하나님이 성공주의와 개교회주의, 세속주의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부드럽게 치유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한신교회 목사>
 


        2012.04.01 18:05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3)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그의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예수님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

역사상 가장 예수님과 닮았다는 성 프란체스코를 만날 수 있을까?

성 프란체스코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들은 프란체스코에 관한 설교만도 책 몇 권은 되리라.

떠나기 전 프란체스코의 전기 작가 톰마소 디 첼라노가 묘사한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다시 머리에 입력했다.

“약간 작은 키에 가지런한 둥근 머리, 갸름하고 진취적인 얼굴,

평평하고 작은 이마, 보통 크기의 검은 눈, 곧은 눈썹, 얇고 곧은 코,

귀는 곧으나 작으며 평평한 관자놀이, 온화한 말투,

달콤하고 다부지며 낭랑한 목소리, 희고 가지런한 이, 작고 얇은 입술,

검고 드문드문 난 턱수염, 곧은 어깨, 가느다란 손, 긴 손가락,

불쑥 나온 손톱, 홀쭉한 허리, 작은 발, 섬세한 피부, 허름한 의복,

단잠, 고귀한 손, 우수한 겸손.”

멀리 버스 밖으로 아시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거룩에의 본능일까?

멀리 보이는 수비오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시시 마을.

저 마을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났다니….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도착하자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프레스코화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중세풍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고

그 앞에는 가슴이 탁 트이는 움부리아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이 유난히도 가까운 마을,

그 분위기는 마치 갈릴리 같고 나사렛 같았다.

좋은 영성은 좋은 환경에서 나오는가?

성당 안에는 작은 집 안에 누워 있는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주변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지오토, 치마부에, 로렌체티, 마르티니 등의 그림이

위대한 삶을 산 프란체스코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프란체스코는 1181(1182)년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십자군 병사를 꿈꾸던 그는

어느 날 산 다미아노 성당의 제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체스코, 너는 가서 무너진 나의 집을 수축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프란체스코는

얼마 후 육체로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다.


어느 날 그가 말을 타고 가는데 나병환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가난한 시대, 유난히도 나병환자가 많았다.

보통 때 같으면 스쳐갔을 프란체스코는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먼 훗날 그는 ‘유언(Testament)’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죄인인 내가 그 나병환자를 보았을 때

나는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그들 가운데 있게 하셨고

그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껴안고 돌아섰을 때

나의 비통한 마음은 영혼과 몸의 달콤함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 4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삶을 살았다.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가난(청빈), 겸손, 복음적 선교, 사랑,

십자가, 성령의 이끌림, 우주적 형제애 등으로 다양하게 말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핵심에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다.”

이것이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이다.

에릭 도일은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을

‘unconditional love for Christ(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이라고 말한다.

리처드 포스터는 성 프란체스코 영성의 핵심은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실제로 그렇게 살아간 것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쇼트는 ‘거울론’으로 설명한다.

프란체스코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는 데서 왔다는 것이다(고후 3:18).

하나님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고

만물을 거울로 비춰보면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만물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물을 본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에 의하면 프란체스코의 영성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보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라.”

성 프란체스코는 일생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할 뿐 아니라 아예 가난 자체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위해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

그가 가난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눅 9:3),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이 세 본문이 프란체스코 가난의 성경적 기초다.


따라서 그의 가난은 해방신학적 가난이 아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회적 가난이 아니라 복음적 가난이었다.

프란체스코는 교회를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수축하라는 음성을 듣고

세 교회를 수리했다.

성 다미아노 교회, 포르티운쿨라 교회 그리고 성 피에트로 교회이다.

그는 종종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를 떠난 교회사의 다른 인물들처럼

한 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교회와의 단절은

곧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매일 죽고

세상의 악으로부터 매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성육신적 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순종해야 한다.

그가 쓴 ‘유언’의 한 부분이다.

“형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거룩한 성녀인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

또한 거룩한 어머니 교회와

그 종(성직자)들에게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

프란체스코는 또한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육체적 영적으로 유사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다.

이 믿음이 프란체스코를 좁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끌어내어

세계를 수도원으로 만든 힘이다(리처드 포스터).

선교는 이러한 신앙고백의 자연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생애 동안

이슬람을 비롯하여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도했다.

그리고 1314년에는 프란체스칸 선교사들이

당시만 해도 지구의 끝이었던 중국을 향해 선교를 떠났다.

반제도적이며 반권위적인 개인주의, 어지러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프란체스코 영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를 수축할 것인가?


프란체스코의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소원하지 말고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오직 한 분 거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부로 삼아야 한다(수도회규칙·1209).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한신교회 목사 


              2012.04.08 18:05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4) 라 베르나 산의 오상(五傷) 체험

 















천사가 프란체스코 몸에 못박음 상처내고 피흘리게 한 뜻은?

성 프란체스코가 우리를 끄는 힘 중의 하나가 바로 영적 체험이다.

그는 라 베르나 산에서

교회 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소위 오상(五傷) 체험이다.

예수님처럼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가 나고 실제 피가 흐른 것이다.

아시시에서 라 베르나 산까지 가는 사이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만일 프란체스코처럼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루돌프 오토의 말대로

하나님의 불은 우리에게 매혹적이면서

또한 두려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두려워하면서도 누구나 속으로 바라는 신비로운 체험,

버스 안에서 연신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섞였다.

라 베르나 산은 아펜니노 산맥의 한 부분으로

높이가 1283m에 이르는 높은 산이다.

성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지역은 해발 1128m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라 베르나 산은

원래 이 지방의 지주였던 오를란도 카타니 백작의 소유였다.

프란체스코가 이 지역을 지나갈 때

몬테펠트로라는 마을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를 감명 깊게 들은 카타니 백작이

이 산을 프란체스코에게 선물했다.

프란체스코는 형제들을 보내어 답사하게 한 후

이 산이 기도생활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였다.

라 베르나 산에 도착하면 너른 광장이 나오고

광장을 지나면 아시시 대성당과 비슷한 교회가 나온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갈라진 바위가 나오는데

프란체스코가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곳이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곳에 프란체스코가 오상을 체험했던 곳이 있다.

그곳에는 13세기 말에 만들어졌다는 육각형의 대리석 표시가 있고

그 위에 고딕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

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체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주셨도다.”

프란체스코가 이곳에 와서 기도를 시작한 것은 1224년 여름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40일간의 기도를 시작했다.

그가 거기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할 때

두 가지 빛이 그 영혼에 비추었다고 한다.

하나는 창조주를 아는 빛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아는 빛이다.

그가 하나님께 “주님,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비참함을 알았고,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처럼 천하고 더러운 벌레를 방문하십니까?”

라고 기도할 때

화염 속에 계신 하나님이 불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다음날 프란체스코는 새벽 동이 트기 전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계속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간구하오니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첫째는 저의 생애 동안 제 영혼과 육체가 가능한 한 많이,

사랑하는 당신께서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수난의 고통을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그 크신 사랑을

저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한

많이 제 마음에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그때 하늘로부터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한 스랍 천사가 내려왔다.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녔으며

여섯 개의 날개 중 두 날개는 머리를 가리고

두 날개는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으며,

다른 두 날개는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사건 직후 프란체스코의 몸에는 이상한 흔적이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에는 못으로 관통된 흔적이 나타났고,

못의 윗부분은 발바닥과 발등에,

못의 아랫부분은 반대쪽으로 나온 것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손바닥에는 안에서 볼 때는 둥글지만

반대쪽에서는 네모꼴 모양의 흔적이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것 같은 네모꼴 상처가 나타났는데,

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와

튜닉과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처음에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레오 형제에게만 알리고 그 상처를 돌보아 주도록 부탁했다.

레오는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붕대를 못자국에 감아주었다.

프란체스코의 이 체험은

기왕의 유명하던 그의 이름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대에 신비체험의 모델이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오상 체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나님은 불의 하나님이시다.

불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과 사랑의 강력한 상징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불 가운데 언약을 맺었고,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불 가운데 타죽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와 하늘의 불을 두고 다퉜고,

모세는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 맨발로 섰다.

이사야, 에스겔은 불 가운데 임한 하나님과 스랍들을 엎드려 만났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빛난 주석 같은 인자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렸다(계 1:15∼17).

불은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모든 성도의 영적 갈망의 표상이었다.

신신학자라고 불리는 시므온(949∼1022)이 그 중 하나다.

그는 하나님 체험을 ‘빛의 도취’ ‘불의 움직임’

‘내 속에 있는 불꽃의 소용돌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오는 불과 동일시했다.

성령은 곧 마음의 불이다.

하나님은 불의 원천이며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빛의 공유자가 된다.

그가 지은 찬송가의 한 부분이다.

“나는 불길에 휩싸였네. 나는 불탔네. 내 모든 존재 불에 타고 있었네….

 그분이 갑자기 거기 계셨네. 불이 철로 나를 녹이듯이,

 빛이 크리스털로 나를 녹이듯이, 그분은 나를 온통 불로 만드셨네.”

철봉이 뜨겁게 달궈지면 불이 되는 것처럼,

공기가 햇빛으로 빛날 때 조명을 받는 것처럼,

성도의 내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그것이 녹아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불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의 강력한 상징이다.

불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금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금은 가만히 있고 불순물만 제거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불순물이 소멸될 때까지 우리 영혼을 불속에 두신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불 앞에 서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바 요셉이 아바 롯에게 찾아가 말했다.

“아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기도와 금식, 침묵과 묵상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생각을 순결하게 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을 더 해야 합니까?”


아바 롯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은 마치 화염처럼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의 몸 전체가 화염이 될 수 있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눅 12:49).”

이 불이 우리 가운데 붙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0년 교회 역사는 곧 불의 역사였다.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

우리에게도 이 불이 있는가?

이 불로 인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흔이 있는가?(갈 6:17)

프란체스코 오상(五傷) 체험의 의미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 불은 신적 본성과 사랑의 강력한 상징.

-성령은 마음의 불,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될 때 빛의 공유자가 돼.

-불은 우리 내면의 불순물을 제거, 생각을 순결하게 정화시켜.

-2000년 교회 역사는 불의 역사,

 이 불이 붙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렇지 않은 시대에는 영적 흑암이 지배했다.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5) 성녀 클라라

 -평생 가난에 몸 맡기고 주님 찬미한 프란체스코 여제자

                                      2012.04.15 18:28

 




























평생 가난에 몸 맡기고 주님 찬미한 프란체스코 여제자

한 사람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면 사람은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는가? 아시시를 떠나기 전에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오른 것은 클라라 때문이다. 프란체스코가 남긴 충성스러운 여제자 클라라를 두고 아시시를 떠날 수는 없었다. 

아시시에서 프란체스코를 만났다면 클라라도 만나야 한다. 서둘러 프란체스코 대성당에서 빠져나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담하고 예쁜 중세풍의 집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집들 사이로 난 벽돌 보도 블록을 따라 계속 걸었더니 꼬무네 광장이 나타나고 미네르바 신전이 나타났다. 그곳을 지나 좁고 반질반질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언젠가 한번쯤 와본 것 같은 긴 골목을 지나자 드디어 작고 아담한 교회가 나타났다. 성녀 클라라를 기념한 키아라 교회다. 800년 전 이곳에서 프란체스코의 이상을 가장 강하고도 아름답게 실현했던 성녀 클라라가 살았다.

영성의 역사에는 남성 말고도 탁월한 여성들이 많다.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는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독일 신비주의의 새벽을 열었다.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는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성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는 순례자들을 안내했다. 귀용 부인(1648∼1717)은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된 후 상상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의 삶을 살았다. 이블린 언더힐(1875∼1941)은 신비주의 연구로, 시몬 베이유(1909-1943)는 철학자요 사회운동가이며 신비가로, 그리고 마더 테레사(1910∼1997)는 인도 캘커타의 성녀로 각각의 이름을 남겼다. 

클라라도 여성 영성가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1193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앙적 영향 가운데 믿음으로 자랐다. 그녀의 삶의 운명은 우연히 듣게 된 성 프란체스코의 한 번의 설교로 결정되었다. 어느 날 기도하러 성 루피노 성당에 들어갔는데 성 프란체스코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타락성에 대해 프란체스코가 설교할 때 클라라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광석화와 같은 깨달음이 임했다. 이것이 그녀의 구도의 삶의 출발이었고, 그 후로 한 번도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단 한 번으로 영혼을 사로잡은 설교는 어떤 것일까? 설교의 영광이 사라진 이 시대에 설교자는 그런 영광을 다시 한 번 꿈꿔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의 설교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설교자도 자기 길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클라라는 그 길로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모험의 길로 나섰다. 프란체스코 성당에 도착한 클라라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고 프란체스코는 그의 머리를 자르고 수도복에 허리띠를 해주었다. 가족들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달려왔지만 그녀는 제단으로 달려가 이미 밀어버린 자기 머리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선언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일생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영원한 스승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다만 클라라가 프란체스코와 달랐던 것은 그녀의 스승과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살았던 성 다미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아마도 그녀는 초기 교회에서부터 있어온 봉쇄 수도원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 같다. 그 속에서 그녀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철저한 가난이었다. 그것은 가난을 부인 삼은 스승 성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길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빌려온 삶이요, 이 세상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클라라 회칙’ 3, 6∼9에 의하면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또한 1년 내내 단식도 했을 만큼 음식은 아주 간소하고 소박했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함께 자는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그리고 잠자리는 긴 벽을 따라 일렬로 배치된 크고 누추한 방이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다른 수도자보다 훨씬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는 프란체스코가 먹으라고 명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가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는 믿기를,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무력하게 사신 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빈궁하여 영원한 가치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영적인 부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완전한 가난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의 길은 하늘나라로 가는 좁은 문의 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가난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지속적인 기도의 생활이다. 클라라는 말년에 자주 탈혼 상태에 빠졌으며 특히 금요일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깊이 심취되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자매들은 그녀의 기도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어머니 성녀 클라라는 밤낮으로 꾸준히 기도를 하셨다. 클라라 어머니는 저녁 끝기도 후 긴 시간 기도에 머물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곤 했다.” 

토마스 첼라노가 집필한 ‘성녀 클라라의 전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클라라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고 눈물은 애도의 격정 때문에 마를 줄을 몰랐다. 어느 날 마귀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너무 울면 못쓴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너의 뇌가 눈물로 녹아서 코로 흘러나와 코가 삐뚤어질 것이다.’ 이에 그녀가 재빨리 응수하였다. ‘주님을 아는 이는 조금도 삐뚤어지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는 또 울면서 기도했다.” 

기도의 사람 클라라도 프란체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죽음이 임박한 때 클라라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그분이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도 저 영광의 왕이 보입니까?” 감동을 받은 자매들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리며 클라라를 바라보았다. 흐느낌이 지나간 후 짧은 침묵의 순간을 깨뜨리며 클라라가 말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주시고 또 이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때가 1253년 8월 11일 석양이었다. 그 유해가 지금 아시시의 클라라 성당에 있다. 

조용히 그녀 앞에 섰다. 작은 이탈리아 마을 아시시를 베들레헴만큼이나 유명하게 만든 두 사람, 성 프란체스코와 클라라. 나도 성 프란체스코처럼 오직 주님만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성도들로 하여금 나를 닮아 주님께 헌신하는 클라라 같은 제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시시를 내려오면서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제자인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의 충성스러운 제자인 클라라가 얼마나 이 시대에 귀한 사람들인가를 생각했다. 

◎ 클라라의 삶

-항상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 입어 

-사시사철 맨발, 삭발한 머리엔 흰 두건과 검은 수건 

-잠은 춥고 누추한 방 맨바닥서 나무토막 베개삼아 

-식사는 대개 하루 한 끼,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으며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줘

                                           이윤재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6)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6)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기사의 사진
종교개혁 새벽을 열고 피렌체 광장에 순교의 피 쏟아  

역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역사의 개혁은 영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피렌체에서 이것을 묻는 것은 이곳 출신 개혁자 사보나롤라 때문이다. 사보나롤라는 누구인가? 그는 훗날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한 대로 개혁의 첫 번째 봉화를 든 사람인가?  

사실 오늘날의 피렌체는 이런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기에는 잘 맞지 않는 도시 같다. 왜냐하면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비극적으로 죽은 15세기의 순교자를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그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길을 떠나면 그의 발자취는 피렌체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두오모 성당이 있다. ‘꽃의 성모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어떤 시인의 말 그대로 “도시의 한가운데 피어난 영원한 구원의 꽃”과 같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20년 공사에 착수하여 1434년 완성된 이 아름다운 교회에서 사보나롤라는 피를 토하며 피렌체 시민을 향하여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성시를 이루자고 호소했을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면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하는 몬테 베키오 궁전이 있고 그 옆에 시노리아 광장이 나온다. 피렌체의 역사가 한눈에 녹아 있는 곳이다.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코시모 1세의 동상이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룬 군주다.  

그 우람한 동상 바로 옆에 작고 초라한 사보나롤라의 화형터가 있다. 사보나롤라는 이곳에서 1498년 5월 23일, 한때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훗날 무서운 적대자로 돌아선 성난 피렌체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염 속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뼈는 광장 옆을 가로지르는 아르논 강에 산산이 뿌려졌다. 

그의 화형터 앞에 잠시 서서 물었다. 개혁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는 무엇으로 바뀌는가? 사보나롤라는 훗날 칼뱅이 제네바에서 했던 것처럼 피렌체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범적인 복음 국가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으며, ‘신곡’을 쓴 단테와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가문은 메디치(Medici) 가였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4세기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정치 쪽으로도 영향력을 넓혀 살베스트로가 처음으로 피렌체의 지도자가 되었고 뒤를 이은 조반니가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코시모에 이르러 영토는 크게 확장되고 드디어 최초의 피렌체 왕국으로 선포된다. 

그러나 세속의 역사에는 반드시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돈은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결국 권력 중에서도 최고인 종교권력과 야합한다는 공식이다. 불행하게도 메디치 가문에 이 공식은 정확하게 적용된다. 메디치 가문은 결국 세속권력과 함께 종교권력을 장악하였고 그 열매는 그 가문이 배출한 두 명의 교황 조반니와 일렉산드로를 통해서 나타난다. 조반니는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알레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물론 역사에 아무런 유익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의 예술을 후원하고 진작시키는 데 있어서 메디치 가문보다 더 큰 공을 세운 가문이나 권력도 없다.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을 후원하고 그 결과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남겨진 수많은 미술 작품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파견된 것은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정점으로 치닫던 바로 그무렵(1481년)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대담하게도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메디치 가문의 세속적 통치도 강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부자의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음란과 방탕함을 강하게 질타했다. 사회적인 도덕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경건한 수도생활을 개혁의 방향으로 제시한 사보나롤라에게서 민중들은 어두운 중세를 비추는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가난과 권력에 눌린 민중들은 여름 한 나절의 소나기 같은 환호를 그에게 보냈다. 그 환호는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사보나롤라가 평민들과 함께 그들을 용감하게 물리쳤을 때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수도원장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최고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497년 사보나롤라는 강력한 종교개혁을 선포하면서 시 광장에서 보석과 의복 등 화려한 것들과 풍기를 문란케 하는 서적들을 수거, ‘허영의 화형식’을 가졌다.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성가를 보급했으며 행정과 조세 개혁을 단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공격한 대상은 교황 알렉산더 6세였다. 그는 자식을 다섯이나 둔 세속적인 교황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던 인물이었다. 교황은 군중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보나롤라를 어떻게 복종시킬까 노심초사하다 설교하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으나 사보나롤라의 태도는 확고했다. 추기경 자리로 유혹하는 교황에게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신 바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결국 교황은 그를 반대한 무리의 선동을 들어주는 교묘한 방식으로 사보나롤라를 파문했고 화형에 처했다. 그에게 화형이 선고되자 이제껏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적대자로 돌변했고 사보나롤라는 군중들의 야유와 함께 그가 예언한 대로 순교의 붉은 피를 피렌체 바닥에 쏟았다.  

사보나롤라는 어떻게 개혁했는가? 무엇보다 그는 당대에 보기 드문 용기의 사람이었다. 피렌체의 작은 수도원장이 당대 최고 권력의 교황을 상대로 과감하게 교회의 부패와 오류를 지적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용기와 함께 자기도 그렇게 사는 용기,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사보나롤라는 루터가 말한 대로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순교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강압으로 거룩해질 수 있을까? 그 개혁이 영적인 개혁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개혁이 되기 위해서 다만 힘으로 밀어붙인 개혁만으로 충분한가? 거룩은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대로 단순히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로 덧입혀지지 않은 어떤 정치적 개혁이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시청광장 앞에서 ‘허영의 화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도랑이 흐르기 시작하면 강도 흐른다는 자연의 원리는 역사의 변혁에도 통한다.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어쩌면 존 위클리프(1302∼1384)와 요한 후스(1369∼1415)로부터 흘러 루터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작지만 거센 도랑소리였을 것이다. 새벽은 어느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길고 어두운 밤과 싸워서 마침내 오는 것이다. 사보나롤라도 역사의 어둠과 싸워 개혁의 새벽을 열어간 당대의 수많은 시대정신 중 하나였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