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 참 제자의 길을 보다
무덤은 영성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언뜻 보면 아무 관계가 없다. 우선 무덤은 죽은 자가 묻혀 있는 곳이요, 영성은 사는 길이다. 어떻게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관계가 있는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 3대 순례지가 모두 무덤이라는 것이다. 로마 순례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무덤을 보는 것이요, 예루살렘 순례는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교인들이 많이 가는 산티아고 순례는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성 야고보 무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루살렘에는 무덤이 많다. 우선 감람산에 오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유대인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아마 메시아가 오시면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그곳에 묻혔을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여기저기 감람산 동굴에 유골을 모아둔 유골함들이 있다. 유골함은 석회암으로 깎아 기하학적인 꽃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이름을 썼다. 요셉, 마르다 등 우리가 알 만한 이름도 있다.
감람산에서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로 가면 피라미드형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압살롬의 무덤과 아디아베네의 여왕 헬레나의 무덤이다. 시대상으로 예수님보다 앞섰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도 보셨을지 모른다. 그리고 시온산으로 가면 다윗왕의 무덤이 있는데 다윗왕의 실제 무덤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만든 상징적인 무덤일 것이다.
전형적인 유대인 무덤은 삼중 구조
그 외에 정원 무덤, 산헤드린 무덤 등 많은 무덤들이 예루살렘에 있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다. 예루살렘 성묘교회 구석에 위치한 이 무덤은 전통적으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무 덤의 형태와 모양에 있어서 제2성전시대(예수님)로 평가되는 이 무덤은 성묘교회에서 유일하게 에티오피아 교회가 관할하고 있다.
과연 이게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일까?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을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소개한다. 그는 율법에 철저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부자로서(마 27:57)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눅 23:50). 그는 공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찬성하지 않았고(눅 23:51) 사람들 뒤에 숨어서 조용히 예수님을 따랐다(요 19:38).
그러나 숨어 있는 것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형을 받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한 사람이 빌라도 공관에 나타났다.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한다. “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 27:57∼60).
작년 여름 어느 날 성묘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묘교회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예수님 무덤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고랄)은 없었다. 컴컴한 내부는 작은 불빛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침침했다. 세월의 깊이가 무덤 속에 배어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전형적인 유대인 무덤이었다. 전형적인 유대인의 무덤은 삼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무덤을 이루는 외부 면과 그 안의 현관,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납골실이다. 무덤을 이루는 외부의 돌은 사람의 눈에 드러나 보이는 곳에 있다. 돌(고랄)은 무덤 밖과 무덤 안을 이어주는 경계선이다.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이 나온다. 현관은 사람이 죽으면 거기에 시신을 놓고 해체를 기다리는 곳이다. 팔레스타인의 더운 날씨에 1년쯤 지나면 시신이 해체되어 뼈만 남는다. 그것을 납골관에 모아 안장한다. ‘ 고킴’이라고 부르는 납골실은 무덤 안에 있는 또 다른 무덤이다. 돌을 깎아 뼈를 담은 납골관이 들어갈 정도로 여러 개를 파놓는다. 그 무덤 속에 가족들이 매장된다.
타임머신 타고 2000년 전으로 간 느낌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판 새 무덤에 예수님을 매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의 무덤은 옛날 형태 그대로라고 볼 수 없다. 아마도 수많은 세월, 이곳을 순례한 사람들에 의해 그 바위가 조각나고 그것을 성물로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자기 나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래서 성묘교회에 실제로 남은 무덤은 요셉의 무덤밖에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무덤만 생각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무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아직도 습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판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신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그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만큼 그 일은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때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는 자기 부정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모른다. 그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리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의 헌신통해 하나님이 인류 구원
그렇게 함으로써 아리마대 요셉이 이룬 일이 있다. 그의 개인적인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지 않았는가? 그 뿐 아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살아 있는 역사적 증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들어가려고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 대신에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역사적으로 고백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비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멀찍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못 박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된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말대로 제자란 자기 주인의 고난과 버림받음과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자다. 아리마대 요셉은 온몸으로 이것을 고백했으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는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를 고백하고 그가 죽은 후에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혀 “나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았다”를 고백했으니 그는 참 제자요,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다. 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롬 6:8) 아리마대 요셉이 그립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7) 갈릴리의 예수님 2012.02.19 17:42
|
|
게네사렛·가버나움… ‘나를 따르라’던 그 말씀 들리는듯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소원은 예수님과의 만남일 것이다. 1세기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을까? 아마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분을 가깝게 만나는 방법이 있다면 갈릴리로 가는 것이다.
갈릴리를 갈 때마다 아쉬운 것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직접 걸어보는 것이었다. 작년 여름, 드디어 그 길을 직접 걸어볼 수 있었다. 본부는 엔게브로 정했다. 엔게브는 갈릴리 동쪽에 위치한 항구, 전통적인 거라사와 데가볼리 중 한 도시인 수시타(히포스)의 중간에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티베리아로 가는 배를 탔다. 아직도 바다에는 물안개가 덮여 있고 날씨는 서늘했다. 필자가 탄 배는 소위 ‘예수의 배’다. 1986년 1월 중순, 믹달 해변에서 두 어부가 한 배를 발견했다. 길이 8.2m, 너비 2.3m, 높이 1.25m의 이 배는 학자들에 의해 1세기 때의 것으로 밝혀졌다. 모두 15명 가량 탈 수 있는 이 배는 지금 키부츠 기노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배와 똑같은 모양의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는 동안 갈릴리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일들이 생각났다. 피곤해서 배 고물에서 주무신 예수님(막 4:38), 그가 앉았을 고물에 앉아 보았다. 시원하고 전망이 좋았다. 저만치 풍랑 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듯했다.
드디어 티베리아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작은 물고기였다. 아마 ‘비니’라고 불리는 갈릴리 연어(정어리)일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 믹달에 생선 가공공장이 있어서 고 기를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했다고 한다. 벳새다 들녘에서 소년이 가져왔던 물고기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티베리아에 내렸다. 티베리아는 갈릴리 최대의 도시, 이 도시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를 위하여 세웠다.
티베리아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왜 성경은 티베리아에 대해 침묵하는가? 분명히 역사적으로 티베리아는 예수님 시대에 이미 존재했는데 왜 예수님은 이 도시에 대해 말씀하지 않는가?
티베리아뿐 아니다. 세포리스(찌포리)도 그렇다. 세포리스는 예수님 시대 갈릴리의 수도였고, 나사렛에서 6㎞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30년을 사신 예수님이 모르실 리 없다. 그런데 성경은 티베리아와 세포리스에 대하여 한번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곳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벳새다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는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도시보다 자연 그대로를 더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신 무대는 해발 600m 미만의 갈릴리 언덕이었다. 거기에는 포도원이 있고 새가 날고 들의 백합화가 핀다. 티베리아를 벗어나 예수님이 활동하신 갈릴리 서북쪽을 향하였다.
고개를 돌리자 왼쪽엔 타우벤 계곡, 오른쪽엔 믹달이 나타났다. 타우벤 계곡에서는 옛날 로마와 싸웠던 갈릴리 투사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믹달은 ‘탑’이란 뜻의 항구,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이곳은 인구 4만명 가량 살던 유대인 반란군의 본거지였다. 이 도시에서 성경의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는가?
야영지가 된 해변은 말없이 출렁거렸다. 계속해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게네사렛, 말만 들어도 설레는 곳, 예수님이 가장 많이 활동하셨던 곳이다. 벌써 땅 색깔이 다르다. 거무스레하니 누가 보아도 옥토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갈릴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갈릴리 호수는 천연적인 풍부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호수의 물은 맑고 순하며 모두 22종류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호도, 종려, 감람나무, 포도, 무화과 등 연중 열 달 동안 열매를 맺고 있다. 갈릴리의 땅은 비옥하여 노는 땅이 없으며 천하의 게으름뱅이라도 이곳에 오면 경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키부츠 기노사는 게네사렛의 현재 이름이다. 천천히 게네사렛 호숫가를 거닐었다. 부둣가에 길게 늘어선 검은 방파제가 눈에 들어왔다. 갈릴리 특유의 검은 돌(바살트)은 이곳이 아주 오래된 항구임을 보여준다.
평생 엔게브에서 고기를 잡고 살았던 고고학자 멘델 눈(Mendel Nun)은 예수님 시대의 갈릴리 항구가 13개라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가 아는 뱃새다, 가버나움, 거라사, 게네사렛, 믹달 외에 8군데가 더 있었다.
게네사렛은 베드로가 그물 씻던 곳이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눅 5:5)고 말씀하신 곳이다. 또한 예수님이 바닷가에 앉아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했던 곳(마 13:1)이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자유분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옷을 벗고 수영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보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할까? 조용히 웃음이 나왔다.
게네사렛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릴리는 빨리 걷지 않아도 좋다.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으면 된다. 여기저기가 다 예수님의 발자취다. 공중에 새가 떼지어 날아간다. 분명 철새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과 북, 동과 서의 철새들의 서식지요 통과지다. 그래서 약 350종류의 새가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예수님에게 그 많은 새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설교의 주제다. 하나님은 심지도 거두시지도 않지만 그들을 먹이신다(마 6:26). 도로 주변에는 포도밭과 감람나무가 풍성하다. 예수님에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소중한 실물교재였다.
한참을 걸어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이름하여 ‘예수님의 본고장’, 예수님에 관한 대부분의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른 아침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고(막 1:35),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 중풍병자,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다(막 2:21∼31). 그리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곳도 이곳이다(요 4:46∼54).
중풍병자를 고친 곳으로 갔다. 현재 발굴된 가버나움의 주거지는 약 500㎡, 성서학자 머피 오코너(Murphy O’conner)가 1인당 주거 공간을 5㎡ 정도로 잡았을 때 대략 15가족이 대가족 형태로 살았을 것으로 본 곳이다. 집들은 빈약한 재료와 함께 원시적 모양으로 지어졌다. 충분치 않은 기초 위에 다듬지 않은 현무암 덩어리를 쌓아 올려 모래와 흙으로 메워 발랐다. 그 리고 지붕은 대충 회반죽으로 덮은 뒤 나뭇가지들을 얹었을 것이다. 그런 지붕에 가끔 비라도 오면 흙 속에 잡초가 자라 시편 129편 6절 같이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하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마가복음 1장의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좁은 골목을 지나 들것에 실린 채 계단을 따라 지붕으로 올라간 후 이 지붕을 헐고 예수님께 내려왔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때 어디 살았을까? 가버나움은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갈릴리의 예수님과 다시 만나는 곳이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피곤한 발을 뻗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나를 따르라”(마 4:19) “내 양을 먹이라”(요 21:15)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분이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신 곳,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갈릴리로 가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으로 가기 위해 갈릴리를 떠난다.
<한신교회 목사> |
2012.02.26 18:06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8) 로마 카타콤의 순교신앙 |
|
믿음 고백후 처형당한 로마 귀족
일곱 아들과 순교한 유대인 여성
자신을 죽여 세상을 살린 힘은?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는 무엇을 볼 것인가? 먼저 팔라티노 언덕에 오르면 천년 로마의 흥망성쇠를 볼 수 있다. 포로 로마노에 있는 신전, 개선문, 원로원, 공회당, 그리고 유대인 노예들의 한이 서린 콜로세움이 보인다. 바티칸으로 가면 하늘을 찌르는 베드로 성당의 돔,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가 설계한 정교한 설교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으로 가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우리를 압도한다.
로마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로마가 있다. 카타콤이다. 지하 12m로 내려가면 우리 앞에 거대한 지하도시가 반지의 제왕처럼 펼쳐진다. 그 지하도시는 화려한 지상도시와 다른 또 하나의 로마다.
로마 안에 있는 이 두 도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로마에 올 때마다 필자는 그 기막힌 대조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도시들이 모두 기독교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 도시들은 과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생겨난 도시일 뿐 아니라 현재 기독교 안에도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들이라고 믿어졌다.
카타콤은 안내인 없이는 갈 수 없다. 혼자 들어갈 수도 없지만 거기서 길을 잃으면 억지로 순교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카타콤은 기독교인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을 때 돌로 된 지하 굴에 매장하던 고 대의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권의 어느 지역에서도 카타콤을 발견할 수 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카타콤도 기독교인들의 무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무덤들이 복합적으로 모여 있다.
크게 세 시대다. 1세기에서 3세기 중반까지는 주로 이교도들의 무덤이다.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중반 곧 핍박의 시기가 바로 기독교 시대의 무덤이다. 그리고 그 이후 현대에 이르는 무덤이 있다.
현재의 카타콤은 1892년 독일의 안톤 데 발이 발굴했다고 한다. 안내인과 함께 돌아본 카타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산 공간이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으며 죽은 자들은 또한 산 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곳에 오래 살면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먼저 성 세바스티안의 무덤에 갔다. 성 세바스티안은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 때 순교했기 때문에 3세기 순교자다. 그는 본래 귀족 출신으로 기원전 283년경에는 프레토리안 경비대에 근무한 로마군 장교였다.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을 알게 되고 비밀리에 그를 믿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동료들이 발각돼 잔인하게 처형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사형장 앞에 섰다. 사형장 앞에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마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분개한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결박해 숨이 끊어질 때까지 화살을 쏘도록 했다. 그러나 세바스티안은 수많은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남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화가 치민 황제는 세바스티안을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도록 했고 시신은 로마의 하수구에 버리도록 했다.
그가 죽자 몇몇 사람들이 하수구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핍박당한 장소 부근에 묻어 주었다. 오늘날의 아피아 길이었다. 그래서 성 세바스티안 교회는 오늘날 로마의 아피아 길에 우뚝 서 있다.
그 후에 그는 로마시대 순교의 표상이 되었다. 그가 귀족, 군인 출신이면서 예수를 믿었다는 점, 심문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점,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를 그 시대의 대표적인 순교자로 추앙받게 했다.
카타콤에서 순교한 사람이 어찌 세바스티안 한 사람뿐이겠는가. 순교는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필연적인 존재론적 구성요소다. 외적 환경 때문에 순교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가진 본래적 속성 때문에 순교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유대-크리스천 신앙의 본질은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이다. 하나님이 유일하다면 다른 신이 있을 수 없다. 순교의 불가피성은 여기서 일어난다.
전형적인 순교가 일곱 아들을 둔 유대인 어머니의 순교다. 주전 167년 시리아의 안티우쿠스 3세가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 일곱 아들과 어머니가 있었다. 황제는 성전에 돼지고기를 올려놓고 유대인들에게 절하라고 명했다. 어머니 앞에서 여섯 아들이 차례로 순교했는데 일곱째가 몹시 두려워했다. 이때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아, 이 어미를 불쌍히 생각하라. 나는 너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었고 너에게 삼년간 젖을 먹였다. 아들아, 이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다오. 이 도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거라.” 결국 일곱 아들은 순교했고 어머니도 그 뒤를 따랐다(마카비하 6:18∼7:41).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주님을 향한 제자도의 신앙으로 이어졌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제자도는 스승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카타콤의 순교는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이 무신론자, 인육을 먹는 자, 근친상간자로 오해를 받아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순교의 근본적 이유는 아니다. 순교의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 자체에서 왔다. 순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복음은 세상과 타협할 수 없고 주님은 다른 신과 같지 않았다.
초대교회 순교를 가장 가까운 시대에 증거한 사람이 있었다.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다. 그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4세기까지의 주요한 순교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사도 야고보의 순교,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네로의 박해와 바울의 순교, 도미치안 치하의 순교, 예루살렘 감독 시므온의 순교, 서머나 감독 이그나티우스, 폴리캅의 순교, 저스틴의 순교. 이 모든 순교를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방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순교자라고 선언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순교자로 알려지기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교도들에게는 큰 담대함과 인내와 용기를 보여준 반면,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들에게 순교의 칭호를 붙이는 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굴복시켰을 뿐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만이 존귀히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 앞에서 변증했지만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위해 스데반처럼 기도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가? 순교는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제자도의 아름다운 열매이다. 한국교회여, 다투기를 그치고 카타콤으로 가자. 위에 보이는 영광의 도시에 연연하지 말고 도시 아래에 있는 또 하나의 도시로 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카타콤이 우리를 부른다.
<한신교회 목사>
|
2012.03.04 18:17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9) 밀라노의 성 어거스틴 |
|
과거를 씻은 참회의 눈물, 진솔한 신앙을 세상에 일깨우다
우리가 영향을 받고 자란 교회사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는 어거스틴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 이야기도 감동적이지만 ‘참회록’을 통해 고백한 그의 진솔한 신앙이 늘 우리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고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의 한 명일 것이다. 32세 때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한 이후 76세 때 히포의 감독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모든 기독교 신앙의 밑그림을 완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어떤 신학자는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통해 어거스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다른 사상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한다.
그 어거스틴을 밀라노(밀란)에서 만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에서 밀라노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한번은 회심으로 만났고 또 한번은 세례로 만났다. 밀라노는 어거스틴의 인생역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곳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밀라노는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평원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알프스를 통해 유럽 본토로 이어지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밀라노는 예로부터 유럽의 중요한 도시였다. 오늘날 일반인에게 밀라노는 패션의 도시요, 사실상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 더 유명하지만 우리에게 밀라노는 어거스틴 때문에 그리운 도시다.
그 밀라노에서 어거스틴을 만나는 것은 가능할까? 안내자를 따라 길을 출발했다. 먼저 두오모 성당으로 알려진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을 방문했다. 하늘을 찌르는 성당의 돔은 찬탄 그 자체였다. 크기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있어서 세계의 어느 성당, 교회를 뛰어넘는 것 같았다. 파리의 노트르담, 독일의 쾰른 대성당과 함께 고딕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성당은 1386년에 시작되어 500년 가까이 동안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밀라노 대성당의 아름다움은 필자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우리에게 감동은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스토리가 아닌가? 두오모 성당에서 조금 외곽으로 나갔다. 외곽이라고 해야 두오모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 간판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산 탬브로조 성당(Basilica di Sant’ Ambrogio)’, 우리말로 하면 성 암부로시우스 성당이다. 이 성당은 주후 379년 암부로시우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며 지하에는 암부로시우스 유해가 남아 있다. 이 성당은 그 후 많은 개축이 있었고 현재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되었지만 그 골격은 4세기 비잔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어거스틴이 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던 곳인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열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천장을 지탱하며 서 있는 기둥들은 수천년 연륜과 함께 거기 나란히 서 있었다. 반쯤 벗겨진 벽화에는 아직도 뚜렷이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렸던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온 것은 주후 384년이었다. 그에게 밀라노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오랜 세월, 그는 어머니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방황과 이교에의 탐닉과 성적 방종으로 상처난 인생을 살았다. 그런 어거스틴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웅변술과 수사학으로 재능을 보인 그를 로마의 장관 시마쿠스가 발탁하여 밀라노 황제의 궁전 수사학 교수로 보낸 것이다. 그가 만일 밀라노에서 잘 해낸다면 지금까지 그가 한 모든 실패를 일거에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거스틴을 위해 전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설교자 암부로시우스였다. 밀라노에서 그동안 조금씩 열려왔던 어거스틴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암부로시우스를 통해서 빠른 속도로 열리기 시작했다. 암부로시우스는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이 준비한 맞춤형 교사였다. 우선 그는 어거스틴이 그동안 추구했던 로마와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또한 달변가였다. 그가 가진 지적, 영적 자산들은 어거스틴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어거스틴은 서서히 그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그 결과 불륜의 아내와 결별하며 철학서적 대신에 바울서신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드디어 결정적인 회심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 날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감동이 임했다. 강력한 성령의 감동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집 밖에 나가 정원에 있는 무화과나무로 뛰어갔다. 그때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가 보이면서 너무 시시한 일, 과거의 온갖 애착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과거는 그에게 “당신은 나를 버리실 건가요? 그러면 이 순간부터 영영 이별이에요”라고 속삭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 과거를 버리고 나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친구 알리피우스가 보는 가운데 그는 역사적인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참회록’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이 숨겨진 깊은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내 영혼 속으로부터 부끄러운 비밀을 짜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들을 고스란히 내 마음의 눈앞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때 내 속에서는 커다란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내 눈에서는 홍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알리피우스 곁을 떠났습니다. 속이 후련할 때까지 울고 부르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알리피우스에게 방해받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졌습니다. 나는 무화과나무 아래 몸을 던지고 눈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 드려진 합당한 제사였습니다.”(참회록 8권 12장 28절).
하나님의 번개 같은 계시는 그때 일어났다. “Tole, lege, tole, lege”(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어거스틴은 처음에 이 음성을 소년이나 소녀 곧 어린 아이의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친구 알리피우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를 떠날 때 그에게 맡겨둔 바울서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움켜쥐자마자 서둘러 폈다. 그리고 눈이 처음 닿는 곳을 읽어 내려갔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어거스틴은 더 읽고 싶지 않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가 임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주후 386년 8월. 어거스틴은 그 다음 해 4월,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세계 교회사가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이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며 하나님께 돌아온 무화과나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안내인도 모른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그 나무도 언젠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만 생각하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밀라노는 우리에게 멀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곳이 밀라노이다. 무화과나무는 어디 있는가? 우리가 홍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선 곳이 무화과나무다. 아, 어거스틴의 눈물이 이 시대에 그립다.
#어거스틴, 참회록 통해 신앙 고백
“나는 내 영혼 속으로부터 부끄러운 비밀을 짜내었습니다. (중략) 나는 무화과나무 아래 몸을 던지고 눈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 드려진 합당한 제사였습니다.”
#어거스틴이 계시받고 읽은 바울서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한신교회 목사> |
2012.03.11 20:11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0) 라벤나의 성화(聖畵) |
|
성화는 초대교회 신앙관이 담긴 ‘복음, 또 하나의 그릇’
서구의 교회 특히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피할 수 없이 만나는 것이 성화(聖畵)나 성상(聖像)이다. 그림, 모자이크, 프레스코, 조각, 석상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성화, 성상들은 우리에게 이것들이 우상이냐 예술이냐의 오래된 논쟁 앞에 서게 한다.
주로 예수님, 열두 제자 등 성경의 인물들을 묘사한 것이지만 때로는 교황, 마리아, 성인, 황제 등의 형상도 있어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화, 성상은 교회사에 엄연히 존재해 왔고 지금도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신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여길 주제는 아니다.
이탈리아의 라벤나는 필자에게 이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라벤나는 현재 이탈리아 동북부 아드리아 해변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사실은 한때 서로마제국의 수도(주후 402∼476)이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라벤나는 위치 때문에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그곳은 우선 아드리아 바다를 지키는 곳에 위치했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야만족을 막아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라벤나는 일반인에게는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이 8곳이나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남긴 성화, 모자이크 등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 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중요하다.
라벤나를 대표하는 교회는 산 비탈레(San Vitale) 교회이다. 이 교회는 주후 548년 비숍 막시미안에 의해 초대교회의 전설적인 순교자 비탈레의 이름으로 봉헌된 교회다. 주후 548년이라면 비잔틴 시대의 한복판이고, 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뒤 2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시기이다.
이 교회 안에는 그 시대의 모자이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 성서 이야기를 담은 모자이크는 1500년을 뛰어넘어 콘스탄틴 이후 200년을 산 비교적 초기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조명해 준다. 먼저 중앙으로부터 보면 교회 천장 한 중앙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그는 계시록이 말한 대로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린다. 그의 팔은 두 곳을 향한다. 한 곳은 성경으로 교회를, 다른 곳은 왕관으로 세상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강단 좌우에는 네 생물이 나타난다. 사자와 소와 사람과 독수리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네 속성 혹은 복음서의 네 가지 특징을 우리와 같이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는 왕을 상징하고 마태복음을 의미한다. 소는 섬김을 상징하고 마가복음을, 사람은 인성을 의미하고 누가복음을, 독수리는 신성을 의미하고 요한복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네 속성이다.
강단 왼쪽에는 아브라함 사건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찾아왔고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아 그들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의 손이 그것을 막는다. 천장 꼭대기에는 어린 양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네 방향으로 천사들이 어린 양을 경배하고 있다. 그것은 어린 양 예수를 높이는 요한계시록의 그림이다.
강단 왼쪽에는 아벨이, 오른쪽에는 멜기세덱이 각각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 아벨은 양을, 멜기세덱은 떡을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손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열두 제자가 있다.
비탈레 교회 모자이크에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양이다. 양도 다양하다. 아벨의 양, 아브라함의 번제의 양, 모세의 호렙산 양, 그리고 승리자이신 어린 양 같은 그림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 시대 성도들의 신앙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비탈레 교회 성화에 나타난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나오는 인물만을 그렸다는 것이다. 후대에 보이는 교황이나 성인, 심지어 마리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존숭이 초대교회부터 있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 시대 그림의 초점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를 위해 양처럼 헌신적으로 사는 성도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비탈레 교회 성화 중에 마리아나 교황, 성인들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 필자에게 큰 깨달음을 갖게 했다. 그것은 교황, 마리아상과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성화나 성상은 그 시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 시대에 성도들이 믿고 고백한 것이 그 시대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마리아 상이나 성인 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6세기까지만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성화와 성상은 무엇인가? 단호하게 우상이라고 배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개혁자, 특히 츠빙글리가 그랬다. 츠빙글리는 1524년에 시민, 시당국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석공, 목수들을 대동하고 그로스 뮌스터 교회에 들어가 거기에 있는 성화, 유물, 십자가고상, 제단, 초 등 장식물을 다 제거하고 프레스코화는 걷어내고 벽은 회로 칠했다. 성화는 불태웠고 심지어 오르간마저도 치웠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예배를 위한 우상숭배의 요소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교회에 남겨두도록 했다. 개혁자들의 공통된 관심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우상은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성화, 성상, 성물들은 우상숭배의 위험이 없을 때에만 존속할 수 있고,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을 때는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든 성화에 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치다. 교회의 성화는 복음을 말하는 교회의 또 하나의 언어일 수 있다. 교회의 언어가 설교로만 제한된 것이 우리 기독교의 한계일 수 있다.
복음을 그림의 형식으로 고백한 것은 중세기가 처음이 아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라. 내일이면 죽을 성도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 경우 그림은 그들이 믿는 복음을 표현하는 마지막이며 유일한 수단이었다. 상징은 우리가 복음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상징과 그림은 콘스탄틴 이후 많은 이방 개종자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8, 9세기에 있었던 성상파괴 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에서 한 번도 성화, 성상은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표현적 본능 외에도 성육신을 통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전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 속에 복음의 내용과 형식이 함축되어 있다.
복음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그 경우의 표현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 예술이 복음을 담는 그릇인 한 그것은 더 발전되어야 한다. 복음과 예술은 함께 간다. 교회 예술은 상징의 형태로 표현된 그 시대의 복음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도 하지만 보기도 한다. 복음의 진수를 드러낸 라벤나의 그림이 그립다.
산 비탈레 교회 성화의 특징
-대부분 성서 이야기를 그림으로
-예수님이 다스리는 교회와 세상, 두 세계를 보여줘
-사자(왕/마태복음), 소(섬김/마가복음), 사람(인성/누가복음), 독수리(신성/요한복음)는 예수님과 복음서 네가지 특징을 우리와 공유한다는 뜻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양… 어린 양때문에 희생하신 예수님, 양처럼 헌신하는 성도들의 삶을 담아
-오직 성경에 나오는 인물만 그려. 교황이나 성인, 심지어 마리아도 없어. 오직 십자가 예수님과 성도들에 초점. 이것은 적어도 6세기전까지는 교황이나 마리아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
<한신교회 목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