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5)영성순례의 길,네트비야교회 예배,이스라엘 예시바 학교,유다광야,채리톤 수도원

영국신사77 2016. 4. 13. 21:19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 영성순례의 길

2012.01.01 17:50 

 


 































초대교회 이스라엘서 근세교회 영국까지 예수님과 여행


성경이 가르친 인생에 대한 좋은 은유가 있다.

그것은 인생은 순례와 같다는 것이다.

순례는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은 아마도 아브라함일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례의 길을 떠났다. 

 

성경의 순례는 그래서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다.

까를로 마짜가 그의 ‘순례영성’에서 말했듯이,

순례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피조물적 본성이요 신앙의 핵심이다.

“어느 곳이나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열망과 향수를 잠재워줄 영원한 고국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여행자(homo viator)이다.”

그에 의하면 순례는 본질적으로 거룩한 장소로의 회귀이며

존재의 원천인 하나님으로의 복귀이다.

그리고 교회는 순례자의 공동체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적 순례를 꿈꾸었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2000년 교회사를 흐르는 영성의 현장을

발로 밟아보는 것은 필자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은혜로 주어졌다.

한신교회 목회 6년을 마친 작년 7월, 안식년이 시작된 것이다.

안식년이 닥치자 교회를 오래 비워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걸렸지만

영성의 현장은 이미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 날 떠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다.

성경이 쓰인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사의 행로를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먼저 이스라엘로 가서 영성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다음 로마에서 초대교회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중세교회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독일, 스위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를,

그리고 영국에서 근세교회의 영성을 보고 싶었다. 

그 중에서 반드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떼제공동체였다.

떼제와 함께 유럽의 중요한 수도원,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 계획을 가능한 일정표로 만들어 보니 2∼3개월이 나왔다.

그래서 3개월을 쉬기로 하고 영성순례를 출발했다.

짧은 기간 필자가 경험한 영성의 경험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다.

다만 받은 은혜가 너무 컸다는 것은 말하고 싶다.

영성순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달았다. 

첫째, 목표는 하나님이다.

순례란 목표를 향해 길을 나아가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방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의 영성은 목표지향적 영성이다.


순례의 영성을 대표하는 작품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다.

천로역정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장망성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시온성에 도착한다는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겪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끝내 시온성에 도착한다.

시온성은 곧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의 신앙적 목표는 어디인가?

‘잘 되는 나’인가?

‘행복한 현재’인가?

순례의 영성은 현재의 행복에 안주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구도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과정이 중요하다.

순례의 영성이 하나님을 향한 목표지향적 영성이지만

그것은 수많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파울로 코엘료가

스페인의 산티아고에 있는 성 야고보 무덤을 순례하고 쓴 책이 ‘순례자’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한다.

“순례할 때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느리게도 걷지 말 것이요

언제나 길의 법칙과 요구를 존중하며 걸어갈 것이며

그대를 인도하는 이에게 절대 복종하기를

심지어 살인이나 신성모독을 명할지라도 그대로 복종해야 하리라.”


과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보려거든 속도를 줄여야 한다.

우리는 너무 목표지향적인 나머지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산에 올라도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만 오른다.

정상 정복이 유일한 목적이면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길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도 볼 수 없다. 

셋째,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

여행에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다.

이번 순례는 아내와 함께 갔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좋은 동역자들을 만났다.

그래서 행복했다.

순례하면서 예수님과 매일 동행한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백성들과 함께 사시고

마지막에 오른편 강도와 함께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영성일기다.

매일 저녁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느끼고 배운 것을 깨알같이 적었다.

시간이 진행되면서 영성일기는 조금씩 깊어졌다.

단순한 여행기록이 아니라 오늘 내가 예수님과 동행했는가를 물었다.

그렇게 몇 달 쓰는 사이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점차 생활화됨을 느꼈다.


시리아의 성자 아이작이 말했다. “

어머니를 붙잡아라. 그러면 자녀들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모든 것을 얻는다.

영적 순례는 예수님과의 동행하는 삶이다. 

넷째,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여행에서 좋은 가이드를 만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가이드는 길 안내자다.

그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 그 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따뜻하고 친절하면 더 좋을 것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인도자라고 말한다.

그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

레이 프리차드는 ‘하나님, 아직도 나를 인도하시나요?’에서

민수기 9장 18절에 나타난 말씀을 성령님의 인도라는 시각에서 해석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이 말씀에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먼저 성령님은 우리를 한 번에 한 단계씩 인도하고,

성령의 인도는 우리의 온전한 순종을 요청하며,

누구도 성령의 감동보다 앞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순례의 영성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다섯째, 교회는 순례자의 집이다.

여행 중 피곤한 나그네는 잘 쉼터와 양식을 제공받아야 한다.

함께 온 사람들은 순례의 길에서 만난 순례의 친구들이고

목회자는 그들을 두 손 벌려 환영하는 환대자다.

다음 주부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

거룩한 영적 순례를 예수님과 함께 떠났으면 좋겠다. 

                                                (서울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 네트비야교회 예배

2012.01.08 17:35 

 


 

























유대인 대표적 크리스천 교회 

열심히 성경읽는 회당식 예배 

설교 들으며 쉴새없이 “아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은혜의 역사였다.

유대교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말한 바와 같다.

“유대인은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막대기다”.

막대기는 언제나 잘 보이는 곳에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오랜 세월 거기 있었는가?

아마도 하나님일 것이다.

그들의 삶과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한 예가 예배이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약 1만5000명의 크리스천이 있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도 120여개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라고 부르지만

메시아닉 주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앙고백 외에

각기 다른 전통과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예배의 형태도 그렇다.

온건한 장로교식 예배로부터 과격한 열린 예배,

그리고 전통적인 회당식 예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배 형태가 있다. 

필자는 작년 8월,

그 중 하나인 요셉 슐람 목사가 시무하는

네트비야교회(케힐랏 네트비야:네티비야 공동체)를 방문했다.

요셉 슐람 목사는 정통파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도자가 되었다.

그가 세운 예루살렘 네트비야 교회는

대표적인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이 교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 예배를 계승한 회당식 예배 때문이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예배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히브리어로 진행된 데다가 유대교 회당예배와 너무 비슷해

처음에는 잘 적응이 안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예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예배는 전체적으로 유대인의 전형적인 찬양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찬양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는 찬양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기도문(시두림)은 말씀에 곡을 붙인 것으로,

악보는 없으나 전통적인 운율에 맞추어서 부른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생소하지만 마음을 열고 참여하면 많은 은혜를 받는다.

랍비 이삭 레비가 ‘회당: 그 역사와 기능’에서 한 말과 같다.

“유대인들은 항상 노래 속에서 기도한다”. 

찬양은 예배시간 내내 이어졌다.

찬양과 함께 긴 성경읽기가 시작되었다.

회당식 예배를 드리는 네트비야에서는

유대인 회당의 전통에 따라서 먼저 모세오경 중 한 부분을 읽는다.

유대인들은 오경을 53개의 파르시욧(단락)으로 나누어서

매주 회당에서 하나씩 읽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관련된 선지서의 말씀을 읽고,

유대인 기독교공동체의 경우는

이 이외에 관련된 신약의 메시지도 같이 읽는다. 

필자가 참석했을 때에도 오경에서 하나(신 30∼31장),

예언서에서 하나(렘 1장), 그리고 신약에서 하나(마 4장)를 읽었다.

성경읽기는 유대인 전통예배의 중심에 속한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셨다.

전통적 유대교 예배는

설교보다는 성경읽기가 더 강조된다. 

탈무드에도 성경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말씀을 백 번 읽는 것과 백한 번 읽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말씀을 공부하되 반복해서 읽지 않으면

  씨 뿌리고 거두지 않는 농부와 같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예배는 설교로 이어졌다(눅 4:20∼21).

설교는 예배의 하이라이트였다.

모든 예배자가 한 시간 이상 설교를 들었지만

누구 하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멘’은 예배의 중요한 응답 수단이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동안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아멘을 반복했다.

한 유대인 랍비는 아멘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힘을 다해 아멘 하고 말하면 천국문이 그에게 열릴 것이다.” 

예배 전체를 이끄는 사람이 랍비가 아니라는 점도 특이했다.

‘하잔’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성인 남자로

예배 앞자리에서 예배를 이끌지만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기도는 그가 시작했고 그가 마무리했다.

예배 도중 어린이를 위한 축복기도가 있었고 간단한 광고도 있었다.

복장은 대부분 머리에는 키파를 쓰고,

예배시에 옷 위에 탈리트(기도 숄)를 걸쳐서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교 예배인지 크리스천 예배인지 모를 정도였으나

예배 드리는 성도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한국의 전통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대로 몸을 흔들거나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하고

손뼉을 치며 찬양하기도 했다.

오늘날 유대인 크리스천 예배는

오랜 세월 저들 조상들이 해왔던 회당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회당식 예배를 통해서 배우는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권의 안내서가 있다.

Hayim Halevy Donin의 ‘To Pray as a Jew’와

윌리엄 심프슨의 ‘유대인의 예배와 기도’ 등이다. 

유대인 예배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나님 경외와 임재의 예배이다.

예배의 인간적인 요소는 극히 제한되고 하나님께만 집중되는 예배이다.

예배는 과거 성전구조를 재현한다.

과거 성전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들의 뜰, 여인들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을 거쳐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로 나아간다.

유대인 예배는 이것을 예배에서 형상화한다. 

이방인의 뜰은 하나님 없는 불신 세상을 의미한다.

누구나 예배자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 이방인의 뜰을 헐고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분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이방인의 뜰을 열고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 있다.

여인들의 뜰은 여인들만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여인들도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뜰은 ‘행동하는 세상(world of action)’을 의미한다.

아마 여기서부터 찬양이 시작되고 예배가 시작될 것이다.

이때 고백하는 주제는 하나님 앞에 선 연약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 나는 흙입니다. 나는 연약한 피조물입니다”(창 2:7). 

이어 예배자는 이스라엘 뜰로 들어간다.

이 뜰을 ‘형성의 세계(world of formation)’라고 부른다.

이 때 예배자는 흙으로 지음 받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지음 받기 원하는 간절한 소원과 간구를 드린다.

말씀과 찬양과 기도는 이것을 함께 고백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을 거쳐 제사장의 뜰로 가면

왕이신 하나님 앞에 바짝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을 ‘창조의 세계(world of creation)’라고 부른다.

성소에서 드리는 기도를 ‘아미다 기도’라 한다. ‘

아미다’는 ‘일어섬(stand)’이라는 뜻으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소의 세계는 ‘아찔루트의 세계’이다.

‘아찔루트’란 ‘방출하다, 빛을 뿜다’라는 뜻이다.

성소에 들어가면 메노라, 떡상, 분향단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아가서 1장 4절의 말씀이 그 상황을 표현한다.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배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신부로 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유대인 크리스천 예배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인간적이며

자기도취적인 예배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네티비야 교회를 나오면서 필자는 그것을 묻고 또 물었다.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 이스라엘 예시바 학교에서

                                            2012.01.15 18:03 

 


 















율법주의 경계하다가 하나님 말씀 율법을 버려선 안된다

오래 전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못 가본 곳이 있었다.

예시바 유대인 학교였다.

거의 동네마다 있다시피 한 이 학교를 못 가본 것은

아마도 내 안에 있었던 어떤 경계심 때문인 것 같다.

그 경계심은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심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까만 모자에 까만 양복을 입은 종교인(‘다띠’라고 부름)을 보면

율법주의자를 본 것 같아 한동안 옆으로 피하곤 했다.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을 좋아하면서도

율법주의 때문에 유대인들을 경계하는 이 이중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과연 유대인은 율법주의자인가. 율법주의라면 그것은 왜 우리에게 불필요한가.

유럽의 한 도시에 유명한 미술관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미술관장이 보았더니 유명한 그림 하나에 칠이 벗겨지고 있었다.

관장은 화가를 불러 빠른 보수를 지시했다.

화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벗겨진 칠 안에 또 하나의 그림이 있었다.

더 자세히 보니 그것이 바로 그림의 원작이었다.

누군가가 원작 위에 칠을 덮어씌운 것이다.

화가가 조심스럽게 칠을 벗겨내자 오래된 원작이 나타났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 신조, 전통

그리고 크리스천의 삶은 얼마나 원작에 가까울까.

혹시 우리 자신의 생각과 편견으로 덮어씌운 칠은 없는가.

그 칠은 보존해야 하는가, 벗겨내야 하는가.

필자에게 이스라엘에 산다는 것은,

그리고 이스라엘을 순례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런 고민을 포함한다.

유대인의 한과 꿈이 서려있는 곳

예시바 문 앞에 선 필자의 심정이 그러했다.

필자가 찾은 예시바는 예루살렘 유대인 지역에 있었다.

유대인 지역은 예루살렘 동남쪽 성전, 통곡의 벽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오랫동안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의 한과 꿈이 서려있는 곳이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회당들이 보이고 각종 유대인 관련 시설들이 나온다.

그 중의 한 건물이 유대인 학교 예시바다.

예시바 학교 앞에는 총을 든 유대인 군인이 서 있었다.

학교 분위기와는 달랐지만

이스라엘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허락을 받고 예시바에 들어갔을 때

첫인상은 매우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이곳이 학교이고 도서관이라면 분명 조용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소리가 나고 떠들썩한 것은 거의 술집 수준이었다.

마침 수업시간인지 둘씩 서로 마주보며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의자와 책상의 구조도 특이했다.

개인 책상은 서로 마주보도록 되어 있고

전체 책상은 앞을 향하여 반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책은 앞에 있었지만 책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웃으며, 또 어떤 사람은 소리높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필자에게 그것은 낯선 광경이었지만 또한 부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갑자기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열두 살 된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박사들과 토론하는 장면이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눅 2:46).

예수님은 바로 그런 문화에서 자라나셨다.

우리 같으면 “말하기도 하시며 가르치기도 하시니”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

도서관엔 토라 사본·방대한 탈무드…

우리 같으면 분명 칸막이 있는 도서실에서

산더미 같은 책을 쌓아놓고 그것을 달달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시바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칸막이뿐 아니라 대화의 칸막이도 없었다.

토론과 논쟁, 서로 마주보는 대화 속에서

필자는 우리 교육이 가진 개인주의와 폐쇄성의 한계를 보았다.

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성적과 대학 앞에 한없이 숨죽이고 사는지,

왜 그것이 힘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왜 우리 교육에는 이런 개방성이 없는 것일까.

비단 교육에만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좁은 폐쇄성과 밀폐성이 개교회주의를 낳고 교파주의를 부추기고

동서 갈등,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만든 것은 아닌가.

우두커니 서 있는데 키파를 쓴 한 사람이 다가왔다.

선생인 듯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탈무드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분명 내가 탈무드를 안다고 말하면 그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아는 탈무드는

유대인의 재미있는 이야기책 한 권에 불과했다.

진짜 탈무드는 63권으로 된 방대한 성경 구전집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잘 모른다고 했더니 나를 거대한 도서관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그는 나에게 수많은 토라 사본과

유대인의 구전, 미쉬나, 토셉타, 그리고 방대한 탈무드를 보여주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책들은 하나같이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책 한권을 꺼내더니 어느 한 부분을 펼쳤다.

탈무드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그 부분을 읽었다.

“모세는 8번 시내산에 올라갔다. 왜 8번인가?”

낯선 이방인을 안내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탈무드를 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유대인의 친절한 안내와 질문을 받으며

유대인 격언 하나를 떠올렸다. 

“만일 눈앞에 천사가 나타나

  토라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해도 나는 거절할 것이다. 

  배우는 과정이 배움의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교를 ‘사색의 종교’와 ‘삶의 종교’로 구분한 사람이 있다.

마빈 윌슨(Marvin R. Wilson)이다.

그는 저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에서

기독교를 히브리 전통에 기초한 삶의 종교로 이해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삶의 종교를 지향하는가.

우리는 삶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자주 율법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목욕물을 버리다가 어린아이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율법주의를 경계하다가 율법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예시바에서 돌아온 날부터 4복음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눈이 멈췄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마 11:29).”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 믿는 것이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었다(마 5:17).

기도·제자도·평화 철저히 실천돼야

데이비드 플루서(David Flusser)가 저서 ‘Jesus’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새로운 도덕에 대한 부름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새 도덕’은 ‘옛 도덕’의 폐기가 아니다.

오히려 더 철저한 준행이다.

살인(마 5:21∼26), 간음(마 5:27∼32), 맹세(마 5:33∼37),

원수사랑(마 5:38∼42), 구제(마 6:1∼4), 기도(마 6:5∼15),

금식(마 6:16∼18), 물질(마 6:19∼34), 제자도(마 7:18∼22),

평화(마 10:34∼39), 가족관계(마 12:46∼50),

세금(마 17:24∼27)은 더 성실히 그리고 철저히 실천되어야 한다.

짊어진 멍에를 벗어버리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것이 은혜다.

은혜는 반율법도 비도덕도 아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진 것이 구원이라면

은혜에서 삶으로 옮겨진 것이 성화이다.

예시바 학교를 나오며 나 자신이 벗겨내야 할 칠과

붙잡아야 할 원작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아서 감사했다. 

                                  (서울 한신교회 목사)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4) 유다광야에서

                                          2012.01.29 18:12 

 


 

























다윗·엘리야… 성경 속 사람들은 왜 고독한 광야로 갔을까

오랫동안 내 영혼에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 있었다.

유다광야였다.

다윗, 엘리야, 엘리사,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 고향인 유다광야는

오랫동안 필자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러나 섭씨 40도의 폭염과 함께

남북으로 약 100㎞, 동서로 약 25㎞나 되는 황무지를 걷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유다광야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 식지 않는 여름처럼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유다광야는 성경적 영성의 중심무대였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위로는 벧엘, 실로, 아이,

옆으로는 베들레헴, 드고아, 엔게디를 지나

남쪽으로 헤브론, 아라드, 브엘세바에 이르는 이곳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헤롯이 짓게한 헤로디온 장관

작년 7월, 몇 명의 목회자가 의기투합하여

마치 가나안 정탐꾼처럼 무장하고 길을 떠났다.

빵과 물, 배낭을 갤로퍼에 싣고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만 해도 길은 순탄한 듯했다.

팔레스타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새로 난 유대인 정착촌으로 가는 길은 잘 포장됐다.

베들레헴 입구의 수도원 앞에서 좌회전하여 시스 고개를 넘어

헤로디온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멀리 헤로디온의 위용이 들어왔다.

헤롯이 죽기 직전 신하들을 시켜 짓게 한 인공무덤,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헤로디온을 지나자 시련이 시작되었다.

형편없는 비포장도로가 시작된 것이다.

차가 흔들리고 먼지가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국산 갤로퍼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움푹 파인 골짜기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내지르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벨트를 단단히 조이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광야는 험해지고 날씨는 무더웠다.

보이는 것은 먼지로 덮인 하늘과 끝없는 광야뿐이었다. 

그렇게 40분쯤 가자 멀리 하얀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보니 뜻밖에 요르단과 사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광야의 끝이었다.

엔게디가 바로 발아래 있었다.

광야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엔게디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오른쪽에 키부츠 엔게디가 보이고 왼쪽에 엔게디 국립공원이 보였다.

롯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창 13:14)고 했던 곳인지 모른다. 

엔게디 정상에서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동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 동굴 중 어느 곳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는지 모른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던 십황무지(삼상 23장), 엔게디동굴(삼상 24장),

하길라산(삼상 26장) 등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다윗이 광야를 전전할 때 마온과 갈멜에서 만난

나발과 아비가일 이야기의 현장(삼상 25장)도 이 근방 어디일 것이다.

다윗은 분명 이런 상황에서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하고 고백했을 것이다. 

광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단지 사람이 살지 않는 버림받은 땅이 아니다.

그곳은 고독한 곳이다.

고독은 다만 외롭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침묵의 섬이다.

극단적 고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 과학자 미셸 시프르이다.

그는 지하 30m의 동굴에서 무려 205일 동안

음식과 읽을거리만 갖고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껴 86일째가 되던 날에는 자살을 생각했다.

그 고비를 넘기자 점점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156일째 되는 날 드디어 고독의 진가가 나타났다.

갑자기 그 자신이 얼마나 거짓되며

가식적인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면을 보려면 고독이 필요하다

고독은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해방시켜 단순한 존재가 되게 한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고 선 곳,

그곳에 서면 우리의 거짓된 자아상이 폭로된다.

진정한 고독 없이는 진정한 자기 발견도 없다.

진정한 자기 발견 없이는 진정한 영적 삶도 없다.

모든 경건, 모든 기도, 모든 각성이 이 고독에서 나온다. 

사막교부들의 이야기다.

한 수도자가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들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참 후에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 얼굴이 보입니다.”

그렇다. 내면의 세계는 금방 보이지 않는다.

고독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토머스 머튼이 말했다.

“고독은 자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고독 없이 진정한 친교도 없다.

고독과 친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윌리엄 맥나마라의 말과도 같다. “

고독 없는 공존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란히 있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이 왜 광야로 나갔을까?

왜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격리되었을까?

왜 다윗은 그토록 많은 세월을 고독한 광야에서 헤매야 했을까?

왜 엘리야는 광야에서 죽기를 자청했을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 앞에 서야 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도시에서는 내가 가진 것이 적게 보인다. 그

러나 광야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많아 보인다.

광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부분 불필요한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들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구원은 시험과 시련 없이는 불가능

‘벗기움’은 우리 입장에서는 ‘박탈’일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새로운 ‘옷입기’일 수 있다.

반 젤러의 말과도 같다.

“벗기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박탈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는 새로운 과정이다.

비우는 것은 빼앗김이 아니라 새로운 채움의 시작이다.

인간에게 탈출은 곧 하나님에게 유입이다.”

따라서 고독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할 많은 유혹과 투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월터 브뤼게만이 그의 책 ‘The Land’에 쓴 대로

성서의 땅은 네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선물(gift)로서의 땅, 유혹(temptation)으로서의 땅, 과제(task)로서의 땅,

그리고 위협(threat)로서의 땅이다.


본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땅이 선물임을 잊을 때 유혹이 되었다.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제를 주셨다.

그것이 말씀이요 계명이며 안식일이다.

그것을 지키는 데는 많은 위협과 공격이 있다.

그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

수도원 운동은 그 영적 싸움의 한 현장이었다.

사막 교부들이 말했듯이

구원은 시험과 시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영적 싸움으로 말미암는다. 

낮의 광야가 아름답지만 밤의 광야는 더 아름답다.

쏟아지는 별빛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맞이한 아침은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파수꾼의 오랜 기다림 끝에 오는 행복한 축복의 시간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광야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그의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을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신다(신 32:10).

유다광야는 예나 지금이나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려는 성도들의 영혼의 요람이요

하나님이 사람을 길러내는 영혼의 훈련장이다. 
 


 

[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5) 채리톤 수도원(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에서

                                                        2012.02.05 18:14 

 


 










초기 동굴 교회, 수도자의 삶이 녹아있는 ‘영성의 샘’

순례 중 어떤 가이드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는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자유시간입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만날 텐데 혹시 길을 잃으면 이렇게 하십시오.

먼저 그 자리에 멈춰 서십시오.

더 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가던 길의 반대편으로 곧장 걸어오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처음 헤어진 곳에서 만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다시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창기 교회 신앙인들이 보여준 삶의 자리는

우리가 길을 잃을 때 돌아갈 영적 출발지이다.

초대 교회 수도원이 그 중 하나다.

아직도 험한 동굴서 평생 기도만 하며 살아

필자의 수도원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유학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유다광야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절벽의 동굴에서

아직도 기도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가슴은 뛰었다.

어떻게 그 험한 동굴에서 평생 기도하며 살 수 있을까?

그들과 세상이 만나는 접촉점은 오로지 밧줄에 연결된 바구니 하나였다.

그 바구니에 전달된 최소한의 음식으로

겨우 목숨을 연장하며 기도에만 전념하는

이름 모를 수도자의 치열한 삶이

안일에 빠진 나를 자책하게 했다.

그 후 유다광야 수도원에 대하여 쓴 고고학자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히브리대의 이츠하르 히르쉬펠트 교수가 쓴

‘The Judean Desert Monasteries in the Byzantine Period’였다.

이 책을 들고 시간만 나면 답사를 다녔다.

여리고 근처 와디 켈트에 있는 성 조지 수도원(주후 525)에도 가고,

기드론 계곡 끝자락에 있는 마르 사바 수도원(주후 478)에도 갔다.

히르쉬펠트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 유다광야에는

확인된 수도원만 73개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수도원은 두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하나는 와디 켈트 지역(25개)이요,

다른 하나는 기드온 골짜기(20개) 지역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이곳에 생존에 필요한 물이 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 성지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보지 못 한 수도원이 있었다.

그것은 주후 330년 이스라엘에 최초로 세워진 채리톤 수도원이었다. 

작년 여름, 큰마음 먹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예루살렘 북쪽을 빠져나와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다가

차에서 내려 성 조지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거기서 골짜기를 타고 서북쪽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길은 험하고 날씨는 더웠다.

길 양쪽에는 이스라엘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리는 와디 켈트 협곡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버티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좁고 험한 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독거형 수도원을 부르는 ‘라우라’란 말은

본래 ‘좁은 길’ ‘벼랑’이란 뜻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물이 흐른다는 것이었다.

이 물은 골짜기의 정상 부근,

곧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에서 가까운 파라 샘에서 나온 것이다.

5시간은 족히 올랐다.

샘의 근원에 거의 도착했을 때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

더운 여름에 파라 샘을 오아시스 삼아 피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갔다.

뼛속까지 시원했다.

드디어 파라 샘 근처에 도착했다.

파라 샘은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렘 1:1)의 옛 자리에 위치한

유대인 정착촌 알몬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바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자 채리톤이 세운 채리톤 수도원이다.

주후 330년 이스라엘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

채리톤 수도원은 동굴이었고

러시아정교회가 그 동굴을 포함한 교회를 세웠다.

절벽을 끼고 돌아 동굴로 갔을 때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주후 330년,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초대 교회 성도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채리톤이 이곳에 정착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아시아 이고니온에서 태어난 그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주후 270∼275) 때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황제가 죽자 꿈에도 그리던 성지순례를 떠났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에서 행복한 성지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무더위 피할 곳을 찾았다.

그때 한 동굴이 눈에 띄었다.

동굴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았다.

그때 강도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돈과 귀중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체를 한쪽으로 밀어 넣더니

포도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동굴 깊은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채리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강도들이 나간 후 어디선가 뱀 한 마리가 나오더니

포도주병 속에 독을 뿜고 사라졌다.

한참 후에 다시 들어온 강도들은

남겨 놓고 간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들은 곧 죽었고 채리톤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동굴을 정결케 한 후

광야의 나무를 꺾어 십자가를 세웠다.

이것이 채리톤이 세운 수도원의 시작이었다.

채리톤이 시작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은 강도의 굴혈이었던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나 오늘이나 수도자들의 삶은 가난하기 짝이 없다.

정교회 수도사는 전기 없이 촛불만 밝히고 산다고 했다.

세탁도 흐르는 파라 샘에 쓱쓱 비벼 빨면 된다고 씩 웃었다.

많은 문헌의 증거에 의하면 유다광야 수도자들은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대부분 수도자들은 하루 두 끼만 먹었고

그나마도 광야에서 난 야생풀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침대나 이불이 없는 맨바닥(돌 위)에 누워 잤고,

소금에 절인 빵을 빗물에 받아먹었다.

하루를 삼등분하여 8시간 기도, 8시간 노동, 8시간 쉬는 생활을 규칙화했다.

유다광야 수도자들, 기도 뿐 아니라 사회공헌

수도원의 형태는 독거형(라우라)과 공동체형(시노비움)이 있었으며

유다광야 수도원은 대부분 절충형이었다.

이들의 생활은 주중에는 주로 동굴에서 침묵으로 기도하고

주말에는 공동체에 내려와 함께 예배했다.

이미 이때 수도원의 질서가 생겨나 수도원장(아바)이 있었고

수도자들은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수도원장(연장자)에 대해 복종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그들은 기도만 하고 산 것이 아니었다.

노동도 중요시했다.

노동은 주로 대추야자 잎사귀로 바구니를 만들거나

진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었고

이것을 여리고 등지에서 판매하여 생활에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이웃의 어려움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마르 사바 수도원의 사바는 어느 해

베들레헴 지역 사람들이 심한 가뭄으로 고생하자

직접 로마 황제를 찾아가 물질의 후원을 받아오기도 했다.

유티미유스는 사라센(아랍) 부족장의 아들을 전도해

최초의 아랍인 감독이 되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선교의 한 장을 열었다.

5세기초 칼케톤에서 교회 회의가 열렸을 때

유다광야 수도자들은 ‘단성론’(예수의 신성만 인정)에 반대하고 ‘

양성론’을 주장하여 교회사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닮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자원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기도와 가난,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산 그들이 마지막 남긴 것은

성경 한 권과 지팡이 하나 그리고 치열한 백색 순교자의 삶이었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 수도원 정신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강도의 굴혈이었던 채리톤 수도원

채리톤 수도자, 성지순례 중 무더위 피해서 동굴로….

그 때 강도 두명이 들어오더니 시체에서 돈과 귀중품을 뒤지고

포도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뱀이 나타나 포도주병 속에 독을 뿜고 사라졌다.

다시 들어온 강도들은 남겨 놓고 간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채리톤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묻고

피로 얼룩진 동굴을 정결케 한 후

광야의 나무를 꺾어 십자가 세웠다.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