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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26-(32·끝) |

영국신사77 2016. 4. 13. 19:37
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명성·부 뒤로 하고 목회길로
빌리 선데이 부흥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명성·부 뒤로 하고 목회길로

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명성·부 뒤로 하고 목회길로
빌리 선데이 부흥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명성·부 뒤로 하고 목회길로


빌리 선데이로 더 잘 알려진 윌리엄 애슐리 선데이(1862∼1935)는 메이저 리거 야구 선수 출신의 부흥사였다. 야구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1887년 어느 주일 오후 선데이는 해리 먼로가 인도하는 시카고 퍼시픽 가든 미션 집회에 참석했다가 주님을 만났다.

1891년 선데이는 전국적인 명성과 연봉 5000달러로 뒤로 하고 월 75달러의 YMCA 전도사로 목회 전선에 뛰어들었다. 1893년부터 1895년까지 윌버 체프먼과 협력하면서 목회를 배운 그는 1896년부터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영혼을 잠에서 깨웠다. 빌리 선데이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1907년부터 1918년까지 그가 이룩한 결실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그가 방문한 3만명 미만의 도시에서는 전체 인구의 22%가 빌리 선데이를 통해 회심했고 3만∼5만명 도시는 전체의 15%,5만∼10만명 도시는 13%,10만∼50만명의 도시는 9%,50만명 이상의 도시에서는 전체 인구의 4%가 그를 통해 주님을 만났다.

필라델피아 집회 3만9331명,보스턴 집회 6만3484명,뉴욕 집회 9만8264명,그리고 시카고 집회 4만9163명은 그 중의 일부다. 1893년부터 1935년까지 그를 통해 90여만명이 주님을 만났다.

 

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1917년 빌리 선데이 부흥
빌리 선데이 부흥의 현장 보스턴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1917년 빌리 선데이 부흥


1910∼920년대,미국이 1차세계대전과 대공황,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으로 전에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인물이 빌리 선데이였다. 그가 제시한 희망은 단순히 종교적 희망의 차원을 넘어 미국의 희망으로 자리잡았고 미국인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이 기간에 공식적인 집회만 548회가 열렸고 87만75명이 회심했다.

1917∼18년 빌리 선데이 부흥은 절정에 달했고 그 중심 무대는 보스턴 시카고 뉴욕이었다. 그 중에서도 보스턴의 반응은 대단했다. 10주간 열린 빌리 선데이 보스턴 집회에는 150만명이 참석했고 그 중 6만3484명이 회심했다. 이 수치가 신뢰할 수 있는 통계인 것을 감안할 때 그 같은 결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과 공황의 시대였지만 성령께서는 여전히 이 땅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보스턴은 하버드대 보스턴대 MIT를 비롯한 동부 명문대의 본고장이면서도 수세기 동안 동부 지역은 물론 미 전역의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해왔다. 보스턴은 청교도 전통,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지,1857년 정오기도회 부흥,19세기 후반 무디 집회,20세기초 빌리 선데이 집회,그리고 20세기 중엽 이후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미국 영적 각성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보스턴 컴먼은 오랫동안 보스턴 영적 각성의 상징이었다. 디엘 무디 집회와 빌리 그레이엄 집회가 열렸던 이곳은 보스턴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녔다. 보스턴 중심가에 위치한 데다 시청,거대한 공원,보스턴의 역사적 명소들이 모여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푸른 하늘,그 위에 떠 있는 몇 점의 하얀 뭉게구름이 조각 같은 빌딩들과 멋지게 어우러져 있는 보스턴 컴먼의 경관은 이국에서 온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1800년 이후 미국 영적 각성 운동을 견인한 파크 스트리트 교회도 그곳에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19세기 고딕 스타일의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보스턴 컴먼이 끝나는 코너,파크 스트리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2차 대각성 운동이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될 때 설립된 이 교회는 근대 해외선교를 선도한 미국 해외선교회,20세기초에 등장한 라디오 선교,새로운 교회 갱신 운동과 사회개혁을 선도한 미국 근대 복음주의 운동,현대 미국 복음주의 신학을 선도하는 고든 콘웰 신학교가 시작된 곳이다.

보스턴 컴먼에서 나는 작은 영적 서광을 발견했다. 한 중년 남자가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건네받은 전도지에는 ‘불타는 지옥’(Burning Hell)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매주 두 차례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마음,보스턴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직업을 갖고 있는 평범한 평신도가 20년을 한결같이 그곳에서 복음을 외쳐온 것이다.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주님을 영접했는지,주님을 영접한 그들을 통해 다시 복음이 얼마나 놀랍게 확산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년을 한결같이 그리스도는 참된 구주이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오실 것이며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문득 90년 전 빌리 선데이가 보스턴에서 복음을 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1916∼17년 겨울,10주간 보스턴 집회가 열렸을 때 연인원 150만명이 선데이 집회에 참석했다. 보스턴시의 요구에 따라 헌딩턴 애비뉴에 4만5000달러를 들여 세워진,1만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천막은 집회 때마다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때로는 5만5000명이 몰려드는 바람에 1만5000명은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직 야구 선수라는 지명도,수많은 집회를 통해 얻어진 전국적인 명성,게다가 집회마다 동원되는 거대한 찬양대와 밴드,악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빌리 선데이가 등단하기 전 음악 담당 호머 로디히버(Homer Rodeheaver)는 마치 무디 집회 때 생키가 그랬던 것처럼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란 찬양을 부르며 청중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어주었다.

빌리 선데이의 메시지는 미국의 희망과 너무나 잘 어우러졌다. 이민 증가,도시 성장과 산업화로 인한 급속한 사회 변화와 세속화의 물결로 미국인들의 영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을 때 그는 보수적인 빅토리안 사회 가치로의 회귀를 촉구했다. 그 중에서도 술 문제는 빌리 선데이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위스키와 맥주가 그곳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지옥입니다. 술집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 금주에 동참하시지 않겠습니까? 보스턴 주민 여러분,매사추세츠주와 국민 여러분,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운동에 동참하시겠다고 약속하시겠습니까? 일어서십시오.”

그는 계속했다. “술집은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술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을 가져다줍니다. 번영을 약속하지만 역경을 낳습니다. 행복을 약속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술의 해악에 대한 빌리 선데이의 입장은 너무나 확고했다. 심지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저주가 술집에 임할 것” “기독교와 애국이 동의어이듯 지옥과 술집도 동의어다”는 말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술 문제만큼 시급한 문제는 없었다. 미 전역에는 21만8000개의 술집이 있었다. 이는 150m마다 술집이 하나씩 있는 셈이었다. 이것을 거리로 환산하면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의 거리였다. 매일 500만명의 남자와 여자,젊은이들이 술집에 드나들며 술에 빠졌다. 정신장애아 75%가 술 중독 부모에게서 태어왔고 극빈자 80%,범죄의 82%가 술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성인 범죄의 90%가 술에 의해 발생했다.

매년 5만3438건의 살인사건이 술집에서 발생했다. 1912년 미국 정부와 주정부의 주세 수입은 1억3400만달러였지만 빈민·고아·범죄문제로 인해 정부가 지출한 돈은 6억달러나 되었다. 주세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술로 인한 사회 문제에 투입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희망을 꿈꾸던 미국인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보스턴 시민들은 놀랍게 반응했고 실제로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19년 금주법이 미국에서 통과되었다. 빌리 선데이 부흥 집회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찰스 어드만마저 “주님이 그를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증거”가 분명하다며 빌리 선데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공개적으로 표했을 정도였다.



박용규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7) 애즈베리 대학 부흥
20세기 캠퍼스 부흥의 진원지 애즈베리 대학교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7) 애즈베리 대학 부흥




1970년 2월3일 오전 10시,예배 인도를 맡은 애즈베리 신학교 학감 커스터 레이널즈는 설교 대신 간증한 후 학생들에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으면 강단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한 학생이 그의 요구에 응했고 이어 다른 학생이,그리고 또 다른 학생이 연이어 강단에 올랐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 경험을 털어놓는 순간 성령께서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예기치 않게 회중을 찾아오셔서 온 회중을 압도하신 것이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거룩한 임재 앞에 하나가 되어 조용히 울면서 기도하고 찬양했다. 그 당시 학생이었던 루이빌의 한 의사 데이비드 헌트의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그곳에 임하셨던 것이다. 학생들은 무언가 놀라운 일을 놓치고 싶지 않아 채플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수업을 파했다. 부흥의 불길은 곧 건너편 애즈베리 신학교로 번져나갔다.

애즈베리 대학과 신학교에 임한 부흥의 소식은 ‘인디애나폴리스 스타’ ‘시카고트리뷴’ ‘시애틀 타임스’ 등지역 신문을 통해 요원의 불길처럼 순식간에 미 전역에 전해졌다. 영적 각성을 사모하는 여러 대학이 애즈베리 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초청했고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혜를 허락하셨다. 1970년 여름까지 130개 이상의 대학과 신학교 및 성경학교,그리고 교회에 부흥이 임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심지어 남미에까지 부흥의 소식이 전해졌다.

 

 

박용규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7) 美 애즈베리 대학
20세기 미국 캠퍼스 부흥의 진원지 애즈베리 대학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7) 美 애즈베리 대학


애즈베리 대학은 1970년과 2006년 두 차례 강력한 부흥을 경험하면서 휘튼 대학과 더불어 20세기 미국의 캠퍼스 영적 각성을 견인했다.

애즈베리 대학이 위치한 켄터키주 렉싱턴 근처 한 작은 시골 도시 윌모어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곳까지 가는 직항로가 없어 두 번이나 항공기를 갈아타고 켄터키주 루이빌 공항에서 다시 차로 2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캠퍼스 각성 운동의 선봉이었던 애즈베리 대학에서 부흥의 현장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니 주일 새벽 2시였다. 토요일 새벽 4시에 떠났릿?꼬박 20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애즈베리 대학은 외형적으로는 여느 대학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본관 강의동 도서관 채플실 기숙사가 들어선 학생 1200명의 평범한 기독교 대학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순결한 모습,부흥 이후 찾아온 삶의 변화,캠퍼스 구석구석에서 풍겨나는 영적 분위기를 통해 왜 시골의 한 작은 학교가 지난 반세기 동안 캠퍼스의 영적 각성을 선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짧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학생과 교수,직원들은 마치 오랫동안 교제한 형제자매처럼 느껴졌다. 그 대학 심리학 교수로 1970년과 2006년 두 차례의 부흥을 모두 경험한 사람,1970년 부흥 당시 졸업반 학생이었다는 도서관 직원,올해 부흥 때 3학년생으로 현장에 있었다는 한 남학생을 교정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이들의 한결같은 증언과 많은 부흥 운동의 결실을 통해 애즈베리 부흥이 참된 부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0년 애즈베리 부흥은 그후 수많은 캠퍼스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고 캠퍼스 각성을 넘어서서 미국 대중전도운동으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대회와 엑스플로74로 대변되는 1970년대 한국의 대중전도운동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1995년 하워드 페인 대학과 휘튼 대학에서 시작된 캠퍼스 영적 각성 운동도 1970년 애즈베리 부흥이 불씨가 되었다.

애즈베리 성령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2006년 2월7일 월요일 애즈베리 대학에 또다시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이날 채플을 인도하던 학생들은 성숙한 영성으로 지혜롭게 예배를 이끌었고 적절한 성경 구절을 선택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도구로 강력히 역사하셨다. 그곳에 있던 학생과 교수들은 ‘놀라운 성령의 질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월요일 오전 학생들이 인도하는 채플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화요일과 수요일,목요일에도 계속되었다. 수요일 밤에는 자정까지 수백명의 학생들이 채플에 참석했고 심지어 새벽 4시까지 그곳에 머무른 학생들도 있었다. 목요일 오전 채플 시간에 폴 래더 총장이 강단에 올라 애즈베리 캠퍼스 영적 각성과 전 세계 신앙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자 부흥은 절정에 달했다. 이날 채플을 인도한 래더 총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께서 애즈베리 캠퍼스를 계속 움직이셨습니다. 학교 채플 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혜가 임한 가운데 월요일 오전 10시 이후 학교 예배당은 학생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지난 밤 12시에는 700명이나 있었고 몇몇은 새벽 4시까지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오늘 아침 기도와 찬양을 위해 채플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첫 찬양부터 학생들이 단 앞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곧 강단은 다시 학생들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학생들의 심령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에 대한 간증을 나눌 때 성령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경외감으로 기도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목요일 채플에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던 것이다. 한 학생이 찬양하며 강단으로 나오자 이어 수많은 학생들이 따라나왔다.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성령의 감동이 회중 가운데 임하였고 참석자들은 심령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간증하며 찬양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한 학생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것이 부흥인지,아닌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내 심령이 소생하는 것을 경험했다.” 부흥의 현장에서 아내와 함께 성령의 역사를 생생하게 목도한 한 학생은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차에 들어가 시계를 보고 무려 3시간이나 지난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단지 잠깐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시간을 주님과 함께 동행했던 것이다.”

48개 주 11개 나라에서 공부하러 온 1200명의 애즈베리 학생들은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한 후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다짐했다. 부흥을 경험한 애즈베리 학생들은 성령께서 자신들 가운데 임하신 것처럼 전 세계에 그 같은 역사가 임하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2006년 애즈베리 대학 부흥 소식은 곧 주변 지역 고등학교와 대학들로 급속하게 전해졌다. 그 놀라운 역사를 접한 어떤 사람은 애즈베리 대학 부흥이 “아마도 앞으로 일어날 영적 지진 해일의 징표인 듯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사람은 오는 세대에 일어날 부흥에 대한 전조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켄터키주의 한 시골,윌모어에 있는 작은 대학이 또다시 21세기 캠퍼스 부흥을 견인할 것이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유에스 뉴스 월드 리포트’가 남부 인문대학 가운데 네번째에 랭크시킨 애즈베리 대학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확실히 참된 부흥이었다. 강력한 회개의 역사,지속적인 중보기도와 삶의 변화,그리고 주변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부흥의 불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같은 부흥이 이 땅의 캠퍼스마다 훨훨 불타올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오 주님,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이때 메말라가는 이 땅의 대학 캠퍼스에도 그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8) 아주사 부흥운동
20세기 오순절 부흥의 진원지 아주사 스트리트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8) 아주사 부흥운동


1906년 4월9일,무명의 한 흑인 목사 시무어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아주사 거리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죄용서,성화,성령세례,그리고 신유를 갈구하는 구도자들을 위해 강단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단상으로 몰려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선포되었고 성령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여 사람들이 고꾸라졌다.

이것이 아주사 부흥의 한 모습이었다. 한 목격자의 증언대로 “집회장에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꾸라졌고 전 도시가 요동쳤다.”

아주사 부흥은 근대 오순절 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오순절 운동은 오늘날처럼 수많은 나라로 확산되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뉴잉글랜드가 1·2차 대각성 운동의 무대였고 시카고가 무디 부흥운동의 무대였다면 캘리포니아는 아주사 부흥의 진원지였다. 주께서 다민족이 모여사는 캘리포니아에 성령을 놀랍게 부으신 것이다. 처음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성령의 역사가 임했던 보니브래가 214 가정집은 그대로 보존돼 오순절 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오순절 운동의 진원지 아주사 거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얼마 전 100주년 기념식 때 전 세계 오순절 지도자들은 보니브래가에서 아주사 거리까지 행진하며 100년 전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다시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기도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주사 거리는 100년 전 모습과 달랐다. 옛날의 창고형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고 주변은 온통 일본인 상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만 그 건물이 위치했던 바닥에 새겨진 기념 동판이 그곳이 오순절 운동의 진원지였음을 묵묵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오순절 운동은 오순절 교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신앙운동으로 발전했다.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고 연구하고 논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아주사 부흥 현장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들 모두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제단 앞에 굴복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후에 오순절 운동에 영향력 있는 지도가가 된 프랭크 바틀맨,글렌 쿡,윌리엄 더햄,A G 카,C H 메이슨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사 부흥은 체험적 신앙,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영적으로 굶주린 수많은 영혼들에게 대단한 자극을 주었다. 1906년 9월에 행해진 ‘값진 구속’이라는 설교가 보여주듯 시무어의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우리는 첫째,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죄 용서를 받았고 둘째,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성화됐으며 셋째,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구속을 통해 육체의 치유를 받았고 넷째,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메시지는 놀라운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오순절 지도자 로스웰 플라워가 증언한 대로 오순절 운동은 ‘영적 폭탄’과 같았다. 짧은 시간에 인근 인디애나폴리스는 물론 미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체험하였다. 노르웨이 감리교 목사 바렛을 통해 아주사 부흥은 노르웨이에 전파돼 유럽에도 오순절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06년 4월9일 시작된 아주사 부흥은 전광석화처럼 주변으로,다시 미 전역으로,그리고 미국을 넘어 유럽과 남미,아프리카,아시아로 확산되었다.

아주사 부흥은 부흥 운동과 성령의 역동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과거의 신앙적 유산과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 속에서 구현된 부흥 운동이었으며 이 때문에 이전에 구축된 토대 위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아주사 부흥은 감리교 웨슬리의 제2의 축복,성결운동,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방언 현상을 그대로 수용하여 역사적으로 웨슬리-성결운동의 전통에서 기원된 강력한 성령 운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시무어는 방언의 은사를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로 확신했고 방언 은사를 전 세계 구원받지 못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려는 언어적 은사,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부흥은 곧 백인 흑인 인디언 황인 등 인종을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돼 나갔다. 인종적 장벽이 결코 오순절 운동의 세계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는 다민족의 통일성,백인 흑인 황인을 넘어 모든 민족이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야말로 시대적 요청이며 그것은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근대 오순절 운동은 지금도 여전히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오순절 운동은 지난 1세기 동안 이 땅에 잠자는 수많은 교회들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지나친 은사주의,정통 교리에서의 이탈,지나친 열광주의와 주관주의 현상 등 극복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듯 말씀의 객관성을 잃어버린 성령의 역사,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부흥은 언제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박용규 교수,부흥의 현장을 가다] (29) 만주와 중국의 부흥
1908년 중국 부흥의 진원지 중 하나 후난성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부흥의 현장을 가다] (29) 만주와 중국의 부흥


부흥의 불길이 웨일스 호주 인도 미국 한국에서 거세게 타오르던 그즈음 만주와 중국에서도 강력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1908년 중국에서 일어난 이 성령의 역사는 평양 대부흥 운동에서 연원되었다. 마치 초대 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과 유다,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확산된 것처럼 1907년 부흥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더니 급기야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산둥성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곧 만주를 넘어 푸젠성 장시성 산시성 섬서성 후난성 등 중국 각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돼나갔다. 이들 지역의 몇몇 기독교 유산들은 현재 그 혹독한 문화혁명의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
 
 
남았다. 내가 관심을 갖고 찾아간 곳은 후난성이었다. 요즘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는 천혜의 관광 명소로 널리 알려진 후난성 장가계에 1908년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1906년 설립되어 얼마 전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장가계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 부흥운동의 산물이었다.

중국 택시기사의 친절한 도움을 받아 찾아간 장가계 교회는 제법 규모가 크고 대단했다. 교회당 입구에 새겨진 ‘기독교 복음당’이라는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담임 목사는 그 교회에 수천 명의 성도들이 주일에 모이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는 얼마 전 설립 100주년 기념식 때 촬영한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사진은 많은 성도가 넓은 교회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는 모습이었다. 성도들은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 부인들이 대부분이었고 표정도 밝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서 나는 중국의 또 다른 희망을 보는 듯했다. 그의 배려로 몇 장의 100주년 기념예배 사진을 건네받을 수 있었고 교회 외부와 내부 모습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시대만큼 중국인들이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던 때도 없었다. 부흥운동이 일면서 도시뿐 아니라 시골 지역에까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것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였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는 영적 각성 운동과 관련된 보고들이 계속 답지했다.

1909년에 접어들어서도 부흥의 불길은 계속되었다. 그해 4월 산둥기독대학교 문과대학과 웨이셴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헨리 루스 목사에 따르면 이 부흥은 그 대학을 졸업한 딩 리 메이 목사가 그해 5월30일 인도한 특별예배 때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이같은 영적 각성 현상은 산둥성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푸젠성 장시성 산시성 후난성 등 중국 각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선교사들보다 현지 중국인 설교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1908년 부흥으로 인해 중국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뤘고 교회의 영적 삶이 풍요로워졌다. 놀라운 역사를 목도한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와 선교회 관계자 75명은 “우리가 오랫동안 노력하면서 기도해왔던 그 시간이 우리의 믿음을 능가하는 규모와 추진력을 동반하고 드디어 찾아온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 일고 있는 중국의 변화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았다.

케넷 라토렛의 지적대로 놀라운 만주 지역의 부흥은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중국 교회는 부흥뿐 아니라 선교에서도 한국 교회에 큰 빚을 졌다. 1907년 부흥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평양을 방문한 한 중국인은 1000여명의 한국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내 마음은 기뻤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여러분의 조국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교지 중국이 놓여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 조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복음을 전해줄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의 간절한 호소는 1912년 장로교 총회가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등 3명의 선교사를 산둥성에 파송하기로 결정,불과 5년 만에 구현되었다. 선교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부흥의 골이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놀라운 선교 운동이 펼쳐졌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100년 전 만주와 중국 곳곳을 불태웠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아는 중국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1908년 부흥의 현장 후난성 장가계 교회 중국인 담임 목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00년전 그 땅을 불태웠던 성령의 불길,부흥의 불길이 중국 전역에 다시 불타오르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카시 마이랑의 오늘
20세기 인도 카시부흥운동의 진원지 마이랑교회
[라이즈업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카시 마이랑의 오늘


1905∼1906년 인도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큰소리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다. 오전 6시에 시작된 주일 집회가 자정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인도 부흥의 진원지는 아삼 주 카시 제인티아 힐이었다. 이곳은 여러 모로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전형적인 몽골리안의 외모,구릉지대,구불구불한 도로와 숲,그리고 신앙의 정서와 부흥을 사모하는 열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닮은 데가 많았다.

인도 부흥의 진원지 카시아 마이랑까지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델리로,델리에서 아삼 주의 전 주도 구와하티로,다시 구와하티에서 메갈라야 주의 주도 실롱까지,그리고 실롱에서 목적지 마이랑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길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참으로 놀라웠다.



성경이 가르치고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부흥이 그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100년전이 아닌 바로 지금,인도 부흥 100주년을 맞은 2006년 4월 마이랑 장로교회에서 처음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마이랑 교회를 넘어 마이랑 전역으로,다시 메갈라야 수도 실롱으로,그리고 카시 전역으로 확산됐다.

매일 저녁 교회마다 기도회가 열리고 과거 소수만 모여 기도하던 것이 이제는 교회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신앙을 등지고 교회를 떠난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있고 주일예배에 사람들이 차고 넘치게 참석하고 있으며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인격적인 변화가 개인과 교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31일 저녁 실롱의 한 장로교회에 도착했을 때 목사와 장로,남자와 여자,어린이와 장년 등 모든 성도가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있었다.

인도 부흥은 인도장로교 총회 관계자뿐 아니라 목사와 장로,평신도들이 증언하고 있고 심지어 비신자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세계 30여곳의 부흥의 현장을 돌아보았지만 인도 카시 지역처럼 부흥이 과거가 아닌,바로 지금 우리 가운데 놀랍게 임하고 있는 것을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주시려는 깊은 섭리처럼 느껴졌다.

카시에서는 1841년부터 웨일스 칼뱅주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입국해 복음을 전파했다. 1903년 중앙 아삼주 모플랑의 한 교회는 카시 및 인도 전역에 성령이 임하시도록 매주 월요일 저녁 기도회를 개최하고 인도 부흥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영국과 미국,호주에 보냈다. 서신을 받은 호주 멜버른 목회자와 평신도,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와 무디교회 케직사경회 참석자들은 인도와 전 세계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 접어들면서 기도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고 카시족 그리스도인들은 웨일스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 소식에 크게 고무되었다. 카시에서도 그처럼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부흥을 허락하실 때까지 매일 저녁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는 보통 밤 10시나 돼야 끝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특히 젊은 남녀들이 열심이었다.

이후 18개월 동안 카시 지역 교인들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1906년 3월 첫째주 주일예배 때 ‘성령 세례’에 관한 설교가 있을 때 청중 가운데 통회와 찬양 등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났다. 같은 날 파리옹에서 열린 노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3월 둘째주 주일 저녁예배 때도 온 회중이 울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2명의 카시 설교자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던 청중에게 성령의 역사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예배가 끝난 후 담임목사가 축도하려고 하자 회중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이렇게 외쳤다. “오 하나님,지금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소서. 웨일스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많은 축복을 하시면서 우리를 공수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그 직후 마치 뇌관에 불이 붙듯 온 회중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큰소리로 우는 사람도 있었고 개중에는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도 잊은 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드디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카시에서 타올랐다. 사모하는 곳에 부흥이 임한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그대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온 회중 가운데 눈에 띄게 역사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거리가 한산했다. 밀림지대의 어느 마을에서는 모든 주민이 옥외집회에 참석,큰 시장이 텅 비기도 했다. 참된 부흥이 그렇듯이 카시 부흥 역시 개인의 각성이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다. 밀림에서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술에 취해 살아가던 이들이 주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다. 술을 팔던 여인이,또 늘 술에 취해 살던 한 노인이 은혜를 경험하고 옛 생활을 청산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아편에 중독된 주민들이 집단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피부병에 시달려오던 한 여인이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깨끗하게 치료 받는 역사도 나타났다.

부흥 이후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으로 결속되었고 빚을 지지 않으려고 했으며 빚을 진 사람들은 속히 그 빚을 갚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강한 소원과 헌금에 대한 열의가 이전보다 월등하게 높아졌다. 특히 인도의 낮은 카스트 계급의 사람들이 부흥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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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인도 전역 확산| 세계 부흥사
쉐키나 조회 23 | 08.07.25 14:28 http://cafe.daum.net/Shekinahministry/KXvp/15

 

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인도 전역 확산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인도 부흥의 불길
                     라이즈업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인도 전역 확산


인도 북부 지역의 부흥운동으로 수많은 새 신자들이 교회로 영입되었고 카시에서만 8000명이 주께 돌아왔다. 1900년부터 1905년 사이 사역자가 배로 늘어났으며 1905∼10년 사이에는 다시 배로 성장했다. 군투르의 미국 루터교는 부흥운동으로 1만8964명의 교세가 4만198명으로 급성장했고 하이데라바드의 도르나칼 지역에서는 1년에 3000명씩 30년간 세례를 베풀어야 했을 만큼 지속적으로 교회가 성장했다. 확실히 1906년 인도부흥은 20세기 들어 나타난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 놀라운 부흥의 불길은 또다시 그곳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마치 과거 1906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존스턴에 의해 카시 부흥 소식이 소개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발흥했던 것처럼 2006년 인도 부흥 소식은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에 부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처럼 느껴졌다. 1905∼1906년 인도 카시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구릉지대인 카시와 평야 지역의 마을들로 퍼져나갔다. 1906년에 접어들자 카시의 영적 각성은 나우공 골라그하트 시브사가르 라킴푸르를 비롯하여 아삼 주의 북동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어 북부 브라마푸트라 계곡과 그 남쪽 침례교회로 확산되더니 거기서 다시 남쪽과 남동쪽 나가 구릉지대로 옮겨갔다.

부흥의 소식은 남쪽 루사이 구릉지대에 사는 미조족들에게도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 부흥을 사모하는 장로교인 7명과 침례교인 3인이 카시족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작별을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그들 가운데 임하셨다. 근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후 성령의 역사가 미조족을 휩쓸었다.

카시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아삼과 메갈라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곧 묵티와 펀자브로,다시 인도 동남부와 남동해안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동남부에서는 타밀라두 주 마드라스와 타밀라두 전역,남동해안에서는 안드라프라데시가 부흥의 중심지가 됐다.

 

 

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31) 아쉬움 남긴 3일간의 방문| 세계 부흥사
쉐키나 조회 8 | 08.07.25 14:29 http://cafe.daum.net/Shekinahministry/KXvp/16
 

 

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31) 아쉬움 남긴 3일간의 방문

1907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 평양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31) 아쉬움 남긴 3일간의 평양방문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평양 구석구석에 종소리를 울리며 한국 교회의 영적 헤드 쿼터 역할을 감당했던 곳,반세기가 넘게 한국 교회 영적 젖줄기의 원류였고 민족 복음화의 진원지였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발흥한 장대현교회였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간 장대재 언덕은 말없이 평양을 지키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100년 전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장대현교회도,교회 앞에 한국 선교를 기념하여 세워둔 이길함의 기념비도,그리고 평양 대부흥의 주역 길선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라는 소년소녀들에게 체제를 학습시키는 소년 궁전이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평양의 회복을 위해 한반도 전역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무리들,그들이 외치는 기도의 함성이 그곳까지 울려퍼지는 듯했다. 그 함성은 이 땅의 통일과 부흥을 염원하는 역사의 함성,거룩한 사명을 일깨우는 시대의 함성,분단과 체제를 넘어서는 거룩한 함성으로 들려왔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땅을 포기해서는 안될 분명한 이유다.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불과 십수년 만에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그 땅을 고치시고 은혜를 주신다면 머지않아 장대재 언덕에는 주님의 은혜를 알리는 성령의 종소리가 평양 전역으로 울려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주께서 그 땅을 회복시키시고 치료의 광선과 평화의 사신을 보내셔서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실 것이다.

부흥을 꿈꾸며 중단하지 않고 북한 교회의 회복과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북녘 땅 지하에서 생명 내걸고 신앙을 지키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그 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옛날 찬란했던 신앙의 얼이 깃들어 있는 평양의 회복을 사모하며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1) 대부흥 현장 평양을 가다

국민일보 | 입력 2006.11.15 15:58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은 선교가 시작된 후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 영적 각성의 진원지였다. 평양은 토머스 순교 이후 이 나라에 입국한 모펫과 블레어,베어드,리,스왈른,번하이젤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울부짖으셨던 것처럼 그들은 평양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말했던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대로 유독 순교의 피가 많이 흘렀던 평양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놀랍게 꽃피었고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특히 1903년부터 원산에서부터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부흥의 불길은 1907년 1월 14∼15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 받는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발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약 100년 전,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평남 전역에서 몰려든 10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장대현교회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장대현교회 사창골교회 남문외교회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 교인들은 1월6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으로 저녁집회를 가지며 사경회 참석자들과 함께 부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회마다 은혜의 역사가 점증하더니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회개와 더불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조지 매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존경하는 브라운 박사님,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그후 장대현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부흥의 진원지가 되었고 한달 후인 1907년 2월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곧 부흥의 불길은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를 넘어 평양 전역으로,다시 한반도 곳곳으로,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으로 놀랍게 번져 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대부흥 이후 교파와 교단,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금연·금주,우상숭배 퇴치,여권신장,기독교학교 설립 촉진,윤리의식 증진,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 대부흥 때문이었다. 길선주 목사의 말대로 대부흥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는 쭉정이 교회로 전락했을 것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나는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염원해왔던 평양 방문 기회가 주어져 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솔직히 내 마음 한곳에는 부흥의 현장을 찾아간다는 기대감과 그곳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낯선 곳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교차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비행기에서 바라본 평양 순안공항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작았다. 각국에서 날아든 비행기들로 가득찼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베이징공항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시골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순안공항의 정경이 꼭 싫게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모란봉에 올라가 그곳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통역관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던 27세의 토머스 선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양각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란봉은 100년 전 그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사진 모습 그대로였다. 산천은 의구했지만 평양 시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건설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변함없이 세월의 상처를 이겨낸 평양 시내의 지형을 통해 옛 평양성의 모습과 위치를 분별해낼 수 있을 뿐이다.

3일 동안의 짧은 체류 기간이지만 사상의 벽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조용히 희망의 씨를 뿌리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건축 현장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세월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70년보다 길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 혼자만의 기도는 아닐 것이다.

순안공항에서 3일 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중년의 안내원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주님! 부흥과 통일의 그날을 속히 주옵소서.

(총신대 교수)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32·끝) 연재를 마치며

국민일보 | 입력 2006.11.22 17:36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집필한 '부흥의 현장을 가다'가 지난주 31회 '북한 기독교편'을 끝으로 7개월여에 걸친 연재가 막을 내렸다. 세계 기독교 역사의 부흥 현장을 발로 뛰며 오늘의 변화된 모습과 역사적 배경,부흥의 원인,그 성과를 밀도 깊게 취재했던 박 교수의 연재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세계부흥운동의 역사를 알기 쉽게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세계부흥운동의 흐름과 부흥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의 사명을 살펴본다. 박 교수는 현재 미국 예일대에 머무르며 세계교회사를 연구 중이다.

"제가 이번 '부흥의 현장'을 연재하며 얻은 가장 값진 결실은 성령의 역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흥을 목마르게 사모하고 기도해온 결과임을 발견했습니다. 사모하는 곳에 주의 영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학교수로서 부흥 현장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살아 있는 신학을 몸으로 배운 것이 큰 소득이었습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세계부흥운동에 대해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연구는 진행되었지만 성령의 놀라운 역사적 흔적을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을 확인하고 추적한 것은 처음"이라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사명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부흥의 현장을 돌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아일랜드 울스터,휘튼대,애즈버리대,인도 카시였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지역에는 지금도 영성이 살아 있고 영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휘튼대와 애즈버리대 두 학교는 캠퍼스 부흥을 주도한 대학답게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 미국의 캠퍼스 각성 운동을 견인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대학이 위치한 도시 휘튼과 윌모어는 영적 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술집을 찾아볼 수 없었고 성령께서 도시를 압도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증명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또 그는 "인도 카시 지역 교회들은 지난 수년간 100년전 인도 대부흥 사건을 상기하면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부활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다"면서 "100년전 일어난 부흥이 다시 그곳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이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 1906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을 통해 인도 부흥 소식이 전해지면서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이 촉발된 것처럼 현재 일고 있는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은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한국 교회에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과거가 아닌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부흥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더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박 교수는 31회에 걸친 연재가 인도와 중국,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국과 독일,미국 부흥운동에 집중된 것은 기독교 역사를 주도한 지역에 부흥이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감리교와 웨일스 부흥 운동의 신화를 갖고 있는 영국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부흥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슬람이 확산되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고 밝혔다. 거대한 교회가 술집으로 변한 것도 목도했고 그토록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 사그라진 것에 대한 실망과 충격이 컸다고 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연구할수록 진정 건강하고 참된 부흥이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평양 부흥 운동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개인과 교회,민족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 모든 역사를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1907년 대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같은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는 5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때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민족과 교회를 살린 평양 대부흥 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며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 역사하실지 모르지만 하나가 되어 간절히 사모할 때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사회적,민족적 책임을 깊이 자각하고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성적·도덕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고 피력했다.

"무엇보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본산지 평양의 회복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어둠의 도시 평양이 다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회복되고 중국과 인도,일본을 가슴에 품고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날이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1907년과 같은 강력한 부흥을 우리 가운데 베풀어 달라고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면 과거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뛰어넘어 민족 복음화와 남북통일의 꿈을 가지고 사회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품고 부흥과 일치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김무정 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