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명성·부 뒤로 하고 목회길로 | |||||||||||
빌리 선데이 부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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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26) 1917년 빌리 선데이 부흥 | ||||
빌리 선데이 부흥의 현장 보스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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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캠퍼스 부흥의 진원지 애즈베리 대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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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7) 美 애즈베리 대학 | ||||
20세기 미국 캠퍼스 부흥의 진원지 애즈베리 대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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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 (28) 아주사 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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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중국 부흥의 진원지 중 하나 후난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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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인도 전역 확산 세계 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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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인도 부흥의 불길 | ||||
라이즈업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0) 인도 전역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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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부흥현장을 가다(31) 아쉬움 남긴 3일간의 방문 세계 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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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 평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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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 교수, 부흥의 현장을 가다] (31) 대부흥 현장 평양을 가다
국민일보 | 입력 2006.11.15 15:58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은 선교가 시작된 후 반세기 동안 한국 교회 영적 각성의 진원지였다. 평양은 토머스 순교 이후 이 나라에 입국한 모펫과 블레어,베어드,리,스왈른,번하이젤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울부짖으셨던 것처럼 그들은 평양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말했던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증언대로 유독 순교의 피가 많이 흘렀던 평양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놀랍게 꽃피었고 강력한 부흥이 임했다. 특히 1903년부터 원산에서부터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부흥의 불길은 1907년 1월 14∼15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 받는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발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약 100년 전,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평남 전역에서 몰려든 10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장대현교회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장대현교회 사창골교회 남문외교회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 교인들은 1월6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으로 저녁집회를 가지며 사경회 참석자들과 함께 부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회마다 은혜의 역사가 점증하더니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회개와 더불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조지 매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존경하는 브라운 박사님,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그후 장대현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부흥의 진원지가 되었고 한달 후인 1907년 2월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곧 부흥의 불길은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를 넘어 평양 전역으로,다시 한반도 곳곳으로,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으로 놀랍게 번져 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대부흥 이후 교파와 교단,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금연·금주,우상숭배 퇴치,여권신장,기독교학교 설립 촉진,윤리의식 증진,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 대부흥 때문이었다. 길선주 목사의 말대로 대부흥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는 쭉정이 교회로 전락했을 것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나는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염원해왔던 평양 방문 기회가 주어져 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솔직히 내 마음 한곳에는 부흥의 현장을 찾아간다는 기대감과 그곳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낯선 곳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교차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비행기에서 바라본 평양 순안공항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작았다. 각국에서 날아든 비행기들로 가득찼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베이징공항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시골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순안공항의 정경이 꼭 싫게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모란봉에 올라가 그곳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통역관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던 27세의 토머스 선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양각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란봉은 100년 전 그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사진 모습 그대로였다. 산천은 의구했지만 평양 시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건설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변함없이 세월의 상처를 이겨낸 평양 시내의 지형을 통해 옛 평양성의 모습과 위치를 분별해낼 수 있을 뿐이다.
3일 동안의 짧은 체류 기간이지만 사상의 벽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조용히 희망의 씨를 뿌리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건축 현장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세월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70년보다 길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 혼자만의 기도는 아닐 것이다.
순안공항에서 3일 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중년의 안내원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주님! 부흥과 통일의 그날을 속히 주옵소서.
(총신대 교수)
약 100년 전,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평남 전역에서 몰려든 100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장대현교회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장대현교회 사창골교회 남문외교회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 교인들은 1월6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으로 저녁집회를 가지며 사경회 참석자들과 함께 부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회마다 은혜의 역사가 점증하더니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 회개와 더불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조지 매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존경하는 브라운 박사님,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체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그후 장대현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부흥의 진원지가 되었고 한달 후인 1907년 2월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곧 부흥의 불길은 장대현교회와 남산현교회를 넘어 평양 전역으로,다시 한반도 곳곳으로,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전역으로 놀랍게 번져 나갔다.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대부흥을 경험한 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대부흥 이후 교파와 교단,지역을 초월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으며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부흥은 교육열,금연·금주,우상숭배 퇴치,여권신장,기독교학교 설립 촉진,윤리의식 증진,세계관 정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평양 대부흥 때문이었다. 길선주 목사의 말대로 대부흥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는 쭉정이 교회로 전락했을 것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나는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염원해왔던 평양 방문 기회가 주어져 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솔직히 내 마음 한곳에는 부흥의 현장을 찾아간다는 기대감과 그곳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낯선 곳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교차되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비행기에서 바라본 평양 순안공항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작았다. 각국에서 날아든 비행기들로 가득찼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베이징공항과 너무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시골적인 분위기가 연상되는 순안공항의 정경이 꼭 싫게만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모란봉에 올라가 그곳에서 바라본 대동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통역관 자격으로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던 27세의 토머스 선교사가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양각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모란봉은 100년 전 그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남겨놓은 사진 모습 그대로였다. 산천은 의구했지만 평양 시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건설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변함없이 세월의 상처를 이겨낸 평양 시내의 지형을 통해 옛 평양성의 모습과 위치를 분별해낼 수 있을 뿐이다.
3일 동안의 짧은 체류 기간이지만 사상의 벽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조용히 희망의 씨를 뿌리는 평양과학기술대학 건축 현장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세월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70년보다 길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 혼자만의 기도는 아닐 것이다.
순안공항에서 3일 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중년의 안내원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모으고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오,주님! 부흥과 통일의 그날을 속히 주옵소서.
(총신대 교수)
[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부흥현장을 가다] (32·끝) 연재를 마치며
국민일보 | 입력 2006.11.22 17:36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집필한 '부흥의 현장을 가다'가 지난주 31회 '북한 기독교편'을 끝으로 7개월여에 걸친 연재가 막을 내렸다. 세계 기독교 역사의 부흥 현장을 발로 뛰며 오늘의 변화된 모습과 역사적 배경,부흥의 원인,그 성과를 밀도 깊게 취재했던 박 교수의 연재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세계부흥운동의 역사를 알기 쉽게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세계부흥운동의 흐름과 부흥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의 사명을 살펴본다. 박 교수는 현재 미국 예일대에 머무르며 세계교회사를 연구 중이다.
"제가 이번 '부흥의 현장'을 연재하며 얻은 가장 값진 결실은 성령의 역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흥을 목마르게 사모하고 기도해온 결과임을 발견했습니다. 사모하는 곳에 주의 영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학교수로서 부흥 현장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살아 있는 신학을 몸으로 배운 것이 큰 소득이었습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세계부흥운동에 대해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연구는 진행되었지만 성령의 놀라운 역사적 흔적을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을 확인하고 추적한 것은 처음"이라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사명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부흥의 현장을 돌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아일랜드 울스터,휘튼대,애즈버리대,인도 카시였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지역에는 지금도 영성이 살아 있고 영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휘튼대와 애즈버리대 두 학교는 캠퍼스 부흥을 주도한 대학답게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 미국의 캠퍼스 각성 운동을 견인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대학이 위치한 도시 휘튼과 윌모어는 영적 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술집을 찾아볼 수 없었고 성령께서 도시를 압도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증명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또 그는 "인도 카시 지역 교회들은 지난 수년간 100년전 인도 대부흥 사건을 상기하면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부활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다"면서 "100년전 일어난 부흥이 다시 그곳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이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 1906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을 통해 인도 부흥 소식이 전해지면서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이 촉발된 것처럼 현재 일고 있는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은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한국 교회에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과거가 아닌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부흥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더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박 교수는 31회에 걸친 연재가 인도와 중국,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국과 독일,미국 부흥운동에 집중된 것은 기독교 역사를 주도한 지역에 부흥이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감리교와 웨일스 부흥 운동의 신화를 갖고 있는 영국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부흥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슬람이 확산되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고 밝혔다. 거대한 교회가 술집으로 변한 것도 목도했고 그토록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 사그라진 것에 대한 실망과 충격이 컸다고 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연구할수록 진정 건강하고 참된 부흥이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평양 부흥 운동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개인과 교회,민족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 모든 역사를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1907년 대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같은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는 5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때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민족과 교회를 살린 평양 대부흥 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며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 역사하실지 모르지만 하나가 되어 간절히 사모할 때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사회적,민족적 책임을 깊이 자각하고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성적·도덕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고 피력했다.
"무엇보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본산지 평양의 회복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어둠의 도시 평양이 다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회복되고 중국과 인도,일본을 가슴에 품고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날이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1907년과 같은 강력한 부흥을 우리 가운데 베풀어 달라고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면 과거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뛰어넘어 민족 복음화와 남북통일의 꿈을 가지고 사회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품고 부흥과 일치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김무정 기자 kmj@kmib.co.kr
박 교수는 "지금까지 세계부흥운동에 대해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연구는 진행되었지만 성령의 놀라운 역사적 흔적을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을 확인하고 추적한 것은 처음"이라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사명을 깨닫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부흥의 현장을 돌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아일랜드 울스터,휘튼대,애즈버리대,인도 카시였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지역에는 지금도 영성이 살아 있고 영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휘튼대와 애즈버리대 두 학교는 캠퍼스 부흥을 주도한 대학답게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 미국의 캠퍼스 각성 운동을 견인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대학이 위치한 도시 휘튼과 윌모어는 영적 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술집을 찾아볼 수 없었고 성령께서 도시를 압도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증명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또 그는 "인도 카시 지역 교회들은 지난 수년간 100년전 인도 대부흥 사건을 상기하면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부활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었다"면서 "100년전 일어난 부흥이 다시 그곳에서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이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앞둔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 1906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존스톤을 통해 인도 부흥 소식이 전해지면서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이 촉발된 것처럼 현재 일고 있는 인도 카시 부흥 소식은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눈앞에 둔 한국 교회에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과거가 아닌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부흥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더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박 교수는 31회에 걸친 연재가 인도와 중국,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영국과 독일,미국 부흥운동에 집중된 것은 기독교 역사를 주도한 지역에 부흥이 집중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감리교와 웨일스 부흥 운동의 신화를 갖고 있는 영국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부흥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슬람이 확산되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고 밝혔다. 거대한 교회가 술집으로 변한 것도 목도했고 그토록 강력한 영적 각성 운동이 사그라진 것에 대한 실망과 충격이 컸다고 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연구할수록 진정 건강하고 참된 부흥이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평양 부흥 운동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개인과 교회,민족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 모든 역사를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1907년 대부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같은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는 5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때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민족과 교회를 살린 평양 대부흥 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며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 역사하실지 모르지만 하나가 되어 간절히 사모할 때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사회적,민족적 책임을 깊이 자각하고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심각한 변화,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성적·도덕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고 피력했다.
"무엇보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본산지 평양의 회복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어둠의 도시 평양이 다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회복되고 중국과 인도,일본을 가슴에 품고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날이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1907년과 같은 강력한 부흥을 우리 가운데 베풀어 달라고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면 과거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던 옛날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를 뛰어넘어 민족 복음화와 남북통일의 꿈을 가지고 사회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품고 부흥과 일치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김무정 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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