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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교수의 라이즈업 코리아 Ⅰ/부흥현장 탐방21-25 |

영국신사77 2016. 4. 13. 19:37

 

국민일보-라이즈업 코리아-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21)예일대학
2007년 01월 27일 (토) 17:02:34박용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1) 예일대학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 얼마 후 1800년부터 1830년까지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2차 대각성 운동으로 알려진 이 신앙운동은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강력한 성령 역사 가운데 하나였다. 부흥의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전에는 결코 그토록 많은 곳에서 성령이 한꺼번에 쏟아부어진 적이 없었다. 전에는 결코 주 예수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그토록 많이 같은 시간대에 자신의 교회에 모으신 적이 없었다. 이런 신적 은혜의 현현이 계속 증가하여 마침내 하나의 보편적인 부흥이 지구 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에 두루 퍼질 것이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다.”

얼마나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는가를 말해준다. 대단한 성령의 역사였다. 디모디 드와이트,리먼 비처,찰스 피니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고 부흥이 일어난 지역도 광범위했다.

그 중에서도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 주에는 2차 대각성 운동의 영적 물줄기가 2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면면히 흘러내리고 있다. 지금도 과거 뉴잉글랜드에 주셨던 부흥을 다시 달라고 기도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9?11 테러 이후 국가적 위기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듯했다.

예일대는 2차 대각성 운동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였다. 대부분이 3,4층 정도의 붉은 벽돌 건물로 이루어진 대학 캠퍼스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듯 학구적인 분위기가 곳곳에 가득 배어 있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나 옥스퍼드대에서 느꼈던 고풍스런 모습과 달리 현대적인 감각과 어우러져 친근하게 다가왔다. 처음인데도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거대한 캠퍼스에서 필자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예일대 신학대학원이었다. 신학대학원은 예일대 캠퍼스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 뒤쪽에 교회당이 우뚝 서 있어 한눈에 신학대학원임을 알 수 있었다. 대학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본 도서관에는 고서들이 가득해 오랜 역사와 전통을 묵묵히 전해주고 있었다.

2차 영적 대각성 운동은 1740년 이후 거의 50년간 영적으로 침체됐던 동부지역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영적 각성 운동은 주로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됐다. 구파나 신파를 막론하고 동부에서 사역하고 있던 목회자들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각성시킨다’는 모토 아래 교파를 초월하여 선교?부흥?출판 사역을 통해 주민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코네티컷선교회를 결성했다.

거의 같은 시간 켄터키에서도 강력한 각성운동이 일어났고 그 포문을 연 사람은 제임스 맥그레디(1758∼1817)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켄터키에서 목회하고 있던 맥그레디가 수백 명의 회중을 데리고 레드 리버에서 사경회를 갖고 세례식을 거행할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사경회 마지막 날 청중들이 회개와 눈물을 흘리면서 영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 1803년 맥그레디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회중을 흔드는 듯했다. 설교가 끝날 무렵 괴로운 심령들의 통회 소리가 거의 그의 설교만큼이나 커졌다…영적 각성과 회심의 역사가 수많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깊이 통회하기 시작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코네티컷과 켄터키 주를 넘어 테네시와 오하이오 주로 확산되었다.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해외선교운동,절제운동,성경 보급과 문서선교,교회학교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미국해외선교회(1810) 미국교육협회(1815) 미국성서공회(1816) 미국문서선교회(1825) 미국내지선교회(1826) 미국교회학교연합회(1829)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동부에서 교육 받고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서부로 가서 교회 개척 사역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성경 발송,신앙서적 보급,교회학교 조직,교회 설립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돼 갔다. 2차 대각성 운동으로 미국은 명실상부 세계 기독교를 주도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1) 19세기초 종교상황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1) 19세기초 종교상황


예일대에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1789년 버지니아의 두 작은 대학 햄프턴 시드니 대학과 워싱턴 앤 리 대학에서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난 뒤 얼마 후 코네티컷 뉴헤이븐의 예일대학에서도 놀라운 각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주역은 조너선 에드워즈의 손자 디모티 드와이트(1752∼1817)였다. 1795년 예일대 학장에 취임한 드와이트는 메마른 예일대생들의 심령에 각성의 불을 지펴주었다.

확실히 19세기 미국의 종교적 상황은 칼뱅주의가 지배했던 18세기와 달랐다. 19세기 전반에 나타난 자유주의적인 계몽주의 영향과 서부 대이동,잭슨의 낙관주의 세계관,이단과 신흥종교의 발흥,청교도 신앙의 쇠퇴로 미국 기독교는 전에 없던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청교도 신앙은 영향력을 상실하고 종교적 관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대학의 젊은이들은 물론 사회 지도층 지성인들 사이에 이신론과 인본주의적 낙관주의,심지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안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존 애덤스,토머스 제퍼슨,존 퀸시 애덤스를 비롯하여 초기 미국 대통령 6명 가운데 3명이 유니테리안이었다. 1785년 보스턴의 킹스 채플이 최초의 유니테리안 교회였고 1805년 헨리 웨어가 하버드 대학의 신학부 교수가 되면서 명문 하버드가 이단 신앙을 가진 이들을 대거 양성하는 유니테리안 신학의 온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당시 예일대생들 사이에도 불신앙이 팽배하고 있었다. 이런 때 예일대 학장이 된 드와이트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계몽주의 불신앙에 젖은 젊은 대학생들을 신앙으로 돌이켰다. 1802년 예일대 캠퍼스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이 부흥의 영향으로 예일대생 3분의 1이 회심하였다. 이것은 이후 30년간 계속된 2차 대각성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2차 대각성 운동의 결실은 대단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를 비롯하여 미국 교회는 각성 운동 이후 놀랍게 성장했다. 1800년초 불과 2801명이던 감리교 교세는 10년후인 1812년에는 3만741명으로 10배가 넘게 부흥했다. 침례교도 1790년 3105명이던 교세가 1820년에는 3만1689명으로 급증했다. 장로교 역시 1800년초 1만3470명이던 세례교인이 1820년에는 7만2096,1837년에는 22만6557명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대부분의 교회가 놀랍게 성장을 이루었다. 그 결과 1830년대 미국에는 외형적으로는 교회와 관계없는 사람들은 불과 6%에 지나지 않았고 총인구 1286만6020명 중 1213만6953명이 크리스천이었다.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2) 찰스 피니의 사역현장


2차 대각성 운동은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기독교를 특징 짓는 대표적인 신앙운동이었다. 그 주인공은 찰스 피니(1792∼1876)다. 그의 부흥관에 동의하든,동의하지 않든 피니의 부흥 운동이 미국 종교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830년대 그를 통해 한창 부흥 운동 일어나고 있을 때 뉴욕의 서부는 ‘불타는 지역’(The Burned-over District)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이 지역 주민이 모두 주님께 돌아오는 바람에 더 이상 비신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회자됐을 만큼 강력했다.


찰스 피니는 29세 때 강력한 회심을 경험했다. 뉴욕 애덤스에 있는 벤저민 라이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습훈련을 받던 피니는 1821년 10월10일 화요일 마을 북쪽의 숲속에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기도하던 중 그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적인 환희’를 경험했다. 이 성령 체험은 단순히 환상이 아니라 성령의 실제적 현시였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한 피니는 바니 집사가 자신의 재판이 오늘 아침 10시인 것을 기억하느냐고 묻자 “바니 집사님,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을 맡았으므로 귀하의 소송을 맡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생애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피니는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인 게일 밑에서 목회 후보생으로 실습을 시작해 1823년 12월30일 세인트 로렌스 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얻고 1824년 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피니는 1824년 3월17일 제퍼슨 상부 지역 여성선교회의 부탁을 받고 뉴욕 서부지역 제퍼슨 에번스 밀스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피니의 열정적인 설교는 교회 교인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학교나 교회,혹은 회심한 저명 인사의 집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은혜를 받았다. 에번스 밀스로부터 21㎞쯤 떨어진 앤트워프 근처 교회가 없는 곳에서 열린 집회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한 번도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던 곳에서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한 회중이 설교를 듣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밑으로 나동그라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피니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동그라지더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울어댔다. 설사 양손에 검을 가지고 그들을 내리쳤다 해도 그들이 나동그라지는 것만큼 그렇게 빨리 넘어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거의 온 회중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소리 높여 부르짖는 소리에 피니의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날 집회는 다음 날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1824년 10월5일. 게일이 담임하는 교회의 신실한 자매 리디아와 결혼한 피니는 뉴욕 서부 일대에 부흥회를 인도하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부흥의 불길은 그가 집회를 인도한 퍼치 강,브라운스빌,래이빌,구버넬 지역으로 번져갔다.


1825년 8월 피니가 인도한 뉴욕주 중부 오네이다 카운티 웨스턴에서의 집회,이어 열린 로마 집회에서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히 로마 저녁 집회 때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다. 회개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게 나타나 회중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피니의 집회로 인해 로마의 모든 주민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로마는 성령 충만한 도시로 변했다. 성령의 역사가 이 지역에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던지 유티카의 한 보안관은 공무차 로마를 방문했다가 주민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압도된 나머지 거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보안관은 유티카로 돌아오자마자 회심했다.


부흥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웠다. 회심한 보안관이 유티카의 어느 호텔에 묵고 있을 때 호텔 주인과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자 곧 그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유티카에서 가장 큰 이 호텔에서는 하룻밤 묵고 가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강하게 의식하고 도시를 떠나기 전 회심하는 역사가 이어졌다.


부흥의 불길은 곧 뉴욕 동부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830년 피니는 리딩 랭커스터 컬럼비아를 거쳐 다시 뉴욕시로 향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임했다. 어번,뉴욕주의 버펄로,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보스턴,뉴욕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부흥의 영향으로 로체스터의 경우 인구는 3배나 증가했으나 범죄율은 3분의 1로 줄었으며 악의 요람이었던 극장이 문을 닫았고 다시 극장이 세워지기까지 7년이 걸렸다. 부흥 운동 시기에 회심했던 이들이 도시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노예 해방 운동을 촉진하고 여성의 지위를 고양시켜 기독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여성과 흑인을 남성이나 백인과 함께 대학 강의실에 수용하기 시작한 것도 피니였다.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2) 유티카·오네이다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의 현장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2) 유티카·오네이다


9월10일,나는 가장 부흥의 불길이 가장 강렬히 타올랐던 뉴욕주 서부에 위치한 ‘불타는 지역’을 찾아나섰다. 뉴 헤이븐에서 5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91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스프링필드에서 다시 90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다보면 유티카(Utica) 로마(Rome) 오네이다(Oneida)를 만난다.

바로 이곳이 피니의 부흥 불길이 강력하게 타올랐던 진원지였다. 이들 지역은 이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부흥의 진원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흥분케 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2세기를 거슬러올라가 훤칠한 키에 금발의 미남이었던 찰스 피니를 만나고 싶었다. 이들 지역에서 나는 피니가 남긴 영적 각성의 발자취를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기쁨이었다.

유티카와 로마,오네이다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휩쓸었던 지역답게 인구에 비해 큰 교회가 매우 많았다. 이들 교회들은 아직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네이다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는 주일에 2부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로마의 성공회 교회는 주중에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는 주중에 어린이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듯 ‘불타는 지역’에는 아직도 곳곳에 교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3) 존 칼뱅의 제네바
존 칼뱅의 제네바 부흥
2007년 01월 27일 (토) 17:15:02박용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3) 존 칼뱅의 제네바


한 인물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칼뱅이다. 그는 가장 심오한 주석가,가장 위대한 조직신학자,그리고 가장 심오한 기독교 사상가였다. 그의 가르침은 성경 중심이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오직 그리스도,오직 하나님을 위하여로 집약할 수 있다. 종교개혁 사상을 그처럼 명료하고 힘 있게 통합시킨 인물도 드물다.

칼뱅의 도시 스위스 제네바에는 칼뱅의 개혁과 부흥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 노용에서 칼뱅의 생가를 둘러본 나는 칼뱅과 그의 제네바 부흥의 발자취를 찾아 제네바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가 주일 강단을 맡아 개혁의 봉화를 높이 치켜들었던 성 베드로 교회,사도 시대 이후 가장 훌륭한 학교로 평가 받았던 제네바 아카데미,그를 기념하는 석조물이 그 옛날의 영광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역사의 유산들이 유난히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있는 제네바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그곳에서 칼뱅이 남긴 개혁과 부흥의 발자취를 눈으로 확인하고,만지고,밟으며,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칼뱅에 의해 비로소 종교개혁의 이상과 신학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적 각성의 역사에 칼뱅이 남긴 가장 큰 공헌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선명하게 밝힌 일이다. 그는 ‘성령이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신다’는 신학적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했다. 성령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과 참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1538년부터 41년까지 제네바로 돌아오기 전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크 생활은 칼뱅의 신학과 개혁을 다듬어주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라스부르크 없는 칼뱅은 존재할 수 없다. 칼뱅은 이 기간에 프랑스의 망명객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면서 목회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우며 진정한 개혁자,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로마서 주석은 이곳 설교의 결정체였다. 153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기독교 강요 두번째 판이 출간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학자들은 칼뱅이 신학적 틀을 이때 구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곳에서 칼뱅은 부처로부터 예배 모범을 배우고,권징을 도입했으며,근대교육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존 스트롬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교육의 이상을 제네바에 구현하려는 꿈을 꾸었고,그 꿈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의 설립을 통해 구현되었다.

1541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3년간의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계속해서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은 예배 개혁이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유럽과 미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꾼 제네바 부흥은 예배 개혁에서 출발했다. 칼뱅은 라틴어 형식의 보는 예배에서 말씀 선포가 중심이 된 듣는 예배로 전환했다. 당시 예배는 라틴어로 드려져 성도들은 설교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며 그저 예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칼뱅은 라틴어 예배에서 프랑스어 예배로 예배를 개혁했다. 감격과 감동이 결여된 성례에서 말씀과 성령의 영적 임재가 동반된 예전을 정립했다. 칼뱅의 예배 개혁이 제네바 부흥의 원동력이 됐다면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부흥의 결정판이었다.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는 가장 경건한 훈련이 구현된 곳이었다. 성경 암송과 새벽기도가 필수였고 늘 바른 신앙훈련이 삶 속에 용해되었다. 1559년 이후 기독교 대학으로 자리잡은 제네바 아카데미는 수천 명의 학생들과 난민들에게 피난처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곳에서 훈련 받은 개혁자 존 낙스가 예찬한 것처럼 제네바 아카데미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 학교였다. 사실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혁주의 신학의 모판이었고 근대교육을 기독교 방향에서 구현한 구체적 모범이었으며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의 모델이 되었다.

제네바 개혁은 훗날 이른바 대각성 운동으로 알려진 부흥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제네바 개혁은 제네바에서 놀라운 국가적 회개 운동이 발흥하고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정립하여 후세에 말씀을 통한 부흥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근대 칼뱅주의 부흥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말씀이 선포되자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신자들의 심령과 제네바 공동체에 역사하신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칼뱅의 신앙과 사상을 따르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제네바 개혁과 부흥은 제네바를 넘어 영국 프랑스뿐 아니라 많은 지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 청교도 공동체,네덜란드 개혁주의 공동체,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미국의 청교도 공동체 가운데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낙스의 개혁과 부흥은 칼뱅의 제네바 부흥의 결과였다. 지난 수세기의 부흥의 역사가 보여주듯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놀라운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국민일보-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4) 美 맨해튼 풀턴가
1857년 정오기도회부흥 그 현장
2007년 01월 27일 (토) 17:21:31박용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4) 美 맨해튼 풀턴가


1857년 미국에서 연합기도회를 통해 놀라운 부흥이 임했다. 이것은 과거 부흥 운동 지도자들을 통해 일어났던 부흥과 달리 평신도들이 시작하고 평신도들이 주도한,밑바닥(grass root)에서부터 일어난 부흥이었다. 그 부흥의 불길은 뉴욕 맨해튼 풀턴가(街)에서 처음 타올랐다.

이미 디모디 드와이트,찰스 피니와 같은 인물을 통해 부흥을 경험한 미국 교회는 19세기 중엽 산업화와 물질주의로 인한 영적 침체 기간을 거치면서 또 다시 부흥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1856년 말부터 부흥을 사모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미국 교계 일각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1856년 12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는 부흥의 필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부흥을 총회 주제로 다루었다. 참석자 중 은혜를 받은 200명이 자신들의 교회로 돌아가 1857년 1월 첫째 주일에 부흥에 관한 설교를 한 뒤 그 다음 주 목요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날로 선포하고 실천에 옮겼다. 주님은 이들의 기도에 놀랍게 응답하셨다.

이런 가운데 뉴욕 네덜란드개혁교회 선교사로 임명 받은 비즈니스맨 제레마이어 람피에르가 1857년 9월23일 뉴욕 풀턴가의 한 네덜란드개혁교회 3층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바로 이 기도회가 19세기 중반 미국 대도시를 불태운 정오기도회 부흥의 시발이었다.

1주일에 한 번씩 열린 이 기도회 첫날 람피에르 선교사는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혼자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회 첫날 6명이 동참했다. 9월30일에는 20명,10월7일에는 40명으로 참석자가 불어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회 열기도 점차 달아올랐다. 람피에르는 매일 기도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있었다.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이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기도회를 열면서 기도의 불길은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처음 비즈니스맨을 위한 기도회로 시작된 정오기도회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기도회로 발전했고 성령의 역사는 신분과 지위와 계층을 초월했다. 기도회 참석자 모두가 성령 충만을 경험한 것이다. 19세기 중엽 가치관이 흔들리던 1857년 뉴욕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시작된 기도회는 순식간에 미 전역을 강타한 신선한 충격이자 놀라운 영적 도전이었다. 1857년 9월23일 시작된 기도회는 불과 4개월 후 보스턴 볼티모어 워싱턴 리치먼드 찰스턴 사바나 모빌 뉴올리언스 세인루이스 피츠버그 신시내티 시카고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와 시골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출발에 불과했다. 기도회를 통한 부흥은 1859년까지 계속되면서 대도시는 물론 군소도시와 읍은 물론 시골 마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미 전역을 휩쓸었다. 매사추세츠주 150개 지역, 뉴욕주 200개 지역,뉴저지주 60개 지역,펜실베이니아주 65개 지역, 오하이오주 200개 지역,인디애나주 150개 지역,일리노이주 150개 지역,미주리주 50개 지역,아이오와주 60개 지역에서 매일 기도회가 열렸다.

1857년 부흥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인도한 이전의 부흥과 달리 기도회를 통한 부흥이었다. 1857년 부흥은 어떤 조직,단체 혹은 부흥사가 주도한 부흥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 아래 드려진 기도에 의해 성령께서 친히 주관하신 부흥이었다.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교파를 초월해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연합,그 파급 속도가 참으로 빠르고 강력했다.

거의 미 전역에서 매일 기도회가 열렸고 이를 통해 수많은 비신자들이 주께 돌아왔다. 기도의 불길이 미 전역을 휩쓸면서 기도회,개인의 집,작업장,들과 밭에서 수많은 사람이 회심했다. 열기 속에 성령의 임재가 계속되었다. 워싱턴에서는 매일 다섯 차례 기도회가 열렸고 음악홀에서 열린 기도회에는 무려 5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으며 필라델피아 제인홀에서 열린 기도회에는 6000명이 참석했다. 수개월 동안 수많은 교회가 매일 3∼5회 기도회를 열었고 기도회마다 참석자들이 넘쳐흘렀다.

당시 부흥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창 부흥의 불길이 뜨거울 때는 매주 5만명이 주께 돌아왔으며 부흥이 일기 시작한 2년 동안 매주 평균 1만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1857년부터 1859년까지 2년 동안 미국 전체 인구 3000만명 가운데 200만명이 회심했다.

1858년 2월 감리교인들의 기도 모임에서 1주일 만에 8000명이 회심했고 3월 3주 동안에만 1만7000명의 침례교인이 회심했으며 그해 5월까지 장로교회에서만 5만명이 회심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계속된 장로교 기도회에서 5000명이 주께 돌아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사절단을 파송했다. 필라델피아 장로교에서 일어난 부흥을 직접 현장에서 목도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그 사실을 알리면서 아일랜드 장로교에서도 영적 각성 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857년 부흥은 아일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 부흥의 모체가 되었고 얼마 후 제3차 미국 대각성 운동을 견인한 디 엘 무디의 부흥 운동의 토대가 됐다. 마치 1904년 웨일스 부흥운동이 인도 호주 미국 한국 중국을 비롯해 20세기 초 전 세계 부흥 운동을 견인했던 것처럼….

기도회의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1857년 부흥으로 미국의 영적,도덕 수준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루이빌과 켄터키의 일간 신문들은 천국왕국이 도래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이 수십년을 노력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을 성령께서는 그 짧은 기간에 이루신 것이다. 이리하여 미국은 새로운 부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국민일보-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4) 1875년 교회 불타
1857년 정오기도회 부흥 진원지 화란개혁교회
2007년 01월 27일 (토) 17:24:55박용규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4) 1875년 교회 불타


나는 1857년 부흥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1769년 설립되어 1세기 뒤에 부흥의 불을 지핀 교회는 미국 뉴욕 맨해튼 윌리엄 스트리트와 풀턴가가 맞닿는 코너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사진 자료에 의하면 교회 규모가 대단히 크고 매우 세련돼 당시 네덜란드 교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도 비록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으로 활동했지만 본래 이 교단 출신이었다.

1857년 영적 각성의 진원지 풀턴가를 찾아가는 여정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힘들 만큼 복잡했다. 어렵게 찾아낸 풀턴가는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청이 가까이에 있었고 고층 건물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풀턴가는 뉴욕 맨해튼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였고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비즈니스 1번지,왜 제레마이어 람피에르가 이곳에서 비즈니스맨을 위한 정오기도회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풀턴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다른 교회도 찾아볼 수 없었다. 1857년 부흥의 봉화를 높이 치켜들었던 그 교회는 1875년 불타 없어져 더 이상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풀턴가를 불태웠던 1857년의 그 뜨거운 기도의 함성과 부흥의 열기는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1857년 부흥의 불을 지폈던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그 주위에 세원진 네덜란드개혁교회들을 찾아나섰다. 1875년 불탄 이후 풀턴가의 네덜란드개혁교회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 3개의 지교회를 설립,현재에는 4개의 네덜란드개혁교회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풀턴가에서 그리 멀지않은 뉴욕에 산재해 있으며 현재도 매우 역동적이었다. 나는 그 중 뉴욕 181번가에 위치한 포트 워싱턴 개혁교회를 찾아가 면면히 이어져온 영적 유산을 직접 확인했다.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5) 그레이엄의 원동력
빌리 그레이엄과 20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5) 그레이엄의 원동력


50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 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갖고 있다. 다양한 접근을 할 수 있지만 너무도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변하는 세대에 변하지 않는 그의 메시지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메시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5년 빌리 그레이엄은 그가 1957년 외쳤던 그 복음,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를 지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원색적으로 외쳤다. 그것은 1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는 복음의 근간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의 오랜 협력자 크립 바로우스의 말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개개인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는 빌리 그레이엄이 일생동안 외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의 사역을 후원하는 주된 이유다. 복음에 충실하며 일생동안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깨끗한 생애를 살아온 빌리 그레이엄은 지난 수세기 동안 미국을 넘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를 통해, 그 이듬해 1974년 엑스폴로 74를 통해 그리고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대회를 통해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의 중요한 디딤돌을 놓았다. 반면 한국교회는 100만명 이상이 운집,빌리 그레이엄에게 그의 집회 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라는 새기록을 선물했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일생동안 복음전도에 충실하면서도 한번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던 빌리 그레이엄은 확실히 이 시대 복음전도자의 표상임에 틀림없다.

그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있다. 주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2005년 흘러싱 메도우스 팍 집회 전 한 인터뷰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일어나 그 연단을 만질 때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오셔서 나를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3일 집회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온전히 주님과 그 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의지합니다.” 그의 고백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그를 도우셨고, 모인 수많은 청중들은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는 그의 메시지에 놀랍게 반응했다.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5) 美 매디슨 스퀘어 가든
빌리 그레이엄 부흥의 진원지 메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즈업 코리아― 박용규교수의 부흥현장을 가다] (25) 美 매디슨 스퀘어 가든


1957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빌리 그레이엄이 16주간의 집회를 개최했다. 37세의 젊은이가 인도한 그 집회가 “뉴욕과 어떤 의미에서 미국 전역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 복음주의 르네상스의 출발”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대단했다. 그 집회를 통해 빌리 그레이엄은 미 전역을 대변하는 부흥사로 부상했고,집회는 미국과 전 세계 복음주의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뉴욕 맨해튼 7번 애비뉴와 29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둥근 돔형의 스타디움과 그보다도 높고 거대한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맨해튼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입구에 세워진 전광판에서는 다양한 공연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입구 한쪽에 쓰여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The World's Famous Arena)이라는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지금도 세계적인 명사들이 꿈에 그리는 무대다. 이제 이곳은 뉴욕과 미국의 명소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세계적인 명소,역사적 장소로 만든 것이 바로 1957년 빌리 그레이엄 집회였다. 그해 빌리 그레이엄은 이곳에서 16주간의 집회를 가지며 미국 기독교 역사를 바꾸었다. 그 기간 동안 37살의 젊은 전도자는 냉전의 시대,인종차별의 시대에 가치관을 상실한 뉴욕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고,이곳을 가득 메운 수많은 뉴욕인들은 빌리 그레이엄의 메시지에 놀랍게 반응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05년 6월 빌리 그레이엄은 뉴욕 퀸스의 ‘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Flushing Meadows Corona Park)에서 50년 전에 전했던 바로 그 메시지를 다시 힘차게 외쳤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158개국 이상의 나라를 다니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86세의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일지 모를 설교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동안의 집회에 25만명이 참석했다.

이날 빌리 그레이엄은 코로나 파크에 있는 뉴욕 메츠 구단의 전용 경기장 ‘쉬 스타디움’(Shea Stadium)을 가득 메운 10만의 청중들을 향해 사랑과 애정 어린 심령으로 수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이 종교적 갈등의 세계에서, 테러리즘과 전쟁의 세계에서,미움과 분열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불확실한 시대, 절대 진리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것처럼 희망을 주는 메시지는 없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 것이다. 50년 전 뉴욕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날 청중들은 그의 메시지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참으로 놀랍게 반응했다.

3번의 그의 집회에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흑인이나 백인이나,국가적 배경이 다른 약 25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중에 1만명이 주님을 영접했다. 혹자의 말대로 뉴욕에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1957년 집회에는 백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2005년은 달랐다.

50년 전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인종주의’는 2005년에는 전혀 이슈가 되지 않았다. 1500개 교회, 81개 교단이 2005년 빌리 그레이엄 뉴욕집회를 후원했지만 50년 전과 달리 백인·흑인·라틴계, 그리고 다수의 동양인들이 참석했고 흑인 오순절주의 목회자들이 그 집회의 리더로서 활약했다. 뉴욕에 있는 300개의 한인 교회 가운데 3분의 1이 2005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 적극 동참했다.

1957년 뉴욕전도집회 때는 거대한 찬양대와 널리 알려진 솔리스트들이 집회의 열기를 북돋워 주었고 리드,피얼,그리고 폴링 같은 주류 교단 지도자들이 빌리 그레이엄 뉴욕 집회의 주요 후원자들이었다. 하지만 2005년 뉴욕집회를 후원한 사람은 주로 캐리스매틱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지난 50년간 주류 교단은 급격히 쇠락해진 반면 캐리스매틱 교회는 급부상하였다. 이들 교회는 반세기 전 주류 교단이 외쳤던 선명한 복음을 외치며 과거 주류 교단이 차지하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신학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당분간 그들이 교회 성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음을 선명하게 외치는 교회는 성장하고 그렇지 않은 교회는 쇠락하는 법이다.

그 역사적 장소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지금부터 50년 전 1957년의 그 뜨거웠던 복음의 열기,부흥을 갈망하는 복음에 대한 목마름,새로운 부흥을 달라는 그 간절한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특별히 플러싱 매도나 파크의 쉬 스타디움에 도착했을 때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2005년의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제2,제3의 빌리 그레이엄이 등장해 거룩한 신화를 계속 이어가길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