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7)]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 ⑴ | |
[국민일보 2003-04-03 15:21] | |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하고 기름진 천혜의 땅이다. 에덴동산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할 정도로 좋은 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고, 이집트 인도 중국과 함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도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있었다. 우르는 오늘날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바스라와 나시리아 근처에 있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이 고대 문명도시 우르를 떠나 황무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막이 오른다. 그러나 당시 고대 역사의 중심무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고, 가나안은 변방에 불과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들이 등장했다.
먼저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서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이 일어났다. 티그리스 강변의 ‘앗수르’‘카르나’‘니느웨’ 등 (이들 도시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근처에 있었다)을 중심으로 했던 아시리아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던 무적의 정복자였다.
아시리아 제국의 위력 앞에서 변방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전회에 언급한 대로 아시리아 제국의 ‘살만에셀’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했고 이를 함락시켰다. 주전 720년대말이었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끝이 났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살만에셀’ 왕의 뒤를 이은 ‘사르곤’ 왕은 북이스라엘을 아시리아 제국 영토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역 전체를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그 곳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 곧, ‘사마리아인’들이 되었다. 피정복민들로서 사마리아인들의 수난의 역사는 이어졌다. ‘사르곤’ 왕은 사마리아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아시리아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옮겨오게 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피정복민 정책의 일환이었던 ‘인구교환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었고, 이로써 ‘잃어버린 이스라엘 10지파’ 전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유입으로 자연히 혼혈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줄곧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불우한 운명을 살아가야만 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땅에는 ‘세겜’근처에 약 600명 남짓한 ‘사마리아인’들이 남아 있다. 이들은 지금도 유월절 의식을 비롯해서 자기들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전 701년 ‘사르곤’ 왕의 뒤를 이은 ‘산헤립’은 20만이 넘는 아시리아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해왔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천하무적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사색이 되었다. 산헤립은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전승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히스기야왕을 새장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예언자 이사야가 있었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가(산헤립 왕) 이 성에(예루살렘) 이르지 못하며 한 화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가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이사야 37:33∼3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 아시리아 군대에는 갑자기 괴질이 퍼졌고 20만 대군이 몰살하고 말았다. 군대를 잃은 산헤립 왕은 황급히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늘의 새도 떨어뜨리는 위세를 떨치던 아시리아 제국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다.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기 때문이다. 주전 612년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성 ‘바벨론’을 중심으로 한 바벨론 세력은 ‘메대’와 손을 잡고 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 니느웨를 공략했다.
바벨론-메대 연합군은 화공(火攻) 전법을 사용해서 불화살을 니느웨 성 안으로 쏘아댔다. 니느웨 성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고,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은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성벽 길이만 해도 13㎞에 이르고, 성벽 높이가 6m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도성 니느웨가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시대는 끝이 나고, 바벨론 제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주전 612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박준서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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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9)] 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 ⑶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 시대를 풍미하던 중심 인물이 있다. 주전 6세기 전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인공은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이었다. 그는 재위기간 43년동안 바빌로니아를 어떤 세력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까지 쳐들어가 이를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초토화시켰다. 이로써 다윗 왕 이래로 400년 이상 이어온 유다왕국은 끝이 나고 많은 유다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때가 주전 580년대였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 왕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성 ‘바벨론’에 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웅대한 궁전들을 건축했다. 그의 왕비는 ‘메대’ 왕국의 공주였다. ‘메대’는 산악지대였고 왕비는 떠나온 고향의 산을 그리워했다. ‘바벨론’ 주위 지역은 평야라서 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기발한 생각을 했다. 큰 궁전을 짓고 그 지붕 위에 계단식으로 작은 산을 만들어 각종 꽃들과 진기한 나무들을 심게 하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아름다운 동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벨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이다.
한편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들은 발에 차꼬를 차고 채찍질을 당하는 노예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의 지도층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나,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생활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았다(에스겔 1:1). 그발 강가는 바벨론 남쪽의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성경에는 포로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포로민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레미야 29장에 수록된 편지의 1절을 읽어보자.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田園)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예레미야 29:5∼6)
포로지에서 절망과 낙심하지 말고 집도 짓고, 과수원도 가꾸고 , 결혼도 해서 자녀도 낳고, 쇠잔하지 말고 번성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것으로 비추어보면 포로들은 그발 강가의 땅을 배정받고 어느 정도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더구나 당시 바벨론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그들은 상당히 활발한 상업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포로지에서도 살 길을 찾아야 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장사였던 것이다.
참고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포로시기부터 나라 잃은 유다 왕국 사람들을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그것은 ‘유대인’(猶太人·Jew)이다.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 그곳은 ‘유다’지역이 되었고, ‘유다’ 출신이라는 뜻에서 ‘유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1600만명 정도이고, 이들은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80개국 이상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느부갓네살 왕이 죽자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불과 7년 사이에 바빌로니아 왕좌의 주인공이 3번이나 바뀌었고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제국의 말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제국의 마지막 왕은 왕위에 오를 어린 왕자를 제치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제국 내에 종교적 분쟁을 일으켜 내부적 분열을 가져왔고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때 바빌로니아 제국의 동쪽 땅(오늘날 이란)에서 새로운 영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2세(Cyrus·고레스)’ 왕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이란 지역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바빌로니아 제국의 심장부 바벨론으로 진격했다. 당시 고대 기록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었고 페르시아 군대는 무혈입성하였다고 한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은 10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허망하게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제 한 시대는 가고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주전 539년). 새 시대의 주역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였다. 그는 고대의 정복자로서는 상당히 계몽적이고 관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언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레스 황제의 칙령’이다. 이 칙령은 포로민들에게는 학수고대하던 기쁜 소식이었다.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역대하 36:23,에스라 1:2∼3)
포로민들에게 꿈과 같은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포로민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첫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실제 많은 사람이 귀향길에 올랐다.
반면 나라가 멸망한 이상 이제는 넓은 세계로 나가서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학자들은 귀향민보다도 넓은 세계로 흩어져 나간 사람의 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산한다.
흩어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시작된다.
박준서(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0)] 바그다드 ⑴
산천초목도 벌벌 떨 만큼 맹위를 떨치던 바빌로니아 제국이었으나 그 종말의 날은 너무도 빨리 왔다. 제국을 일으킨 느부갓네살 왕이 죽자(주전 562년)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제국의 운명은 급전직하로 기울어졌다. 느부갓네살이 죽은 지 23년만에 신흥세력 페르시아(바사)의 공격 앞에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바빌로니아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써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역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주전 3000년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수메르 문명이 일어난 이래 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장구한 기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무대였다.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쐐기문자)가 만들어졌고, 최초의 법전(우르남무 법전,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되었고, 오늘날에도 놀랄 만한 수준의 천문학· 수학· 건축술들을 보유했었다. 뿐만 아니라 시와 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 및 조각작품들로 문화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제국의 몰락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적 소임은 끝이 났다. 그곳을 비추던 역사무대의 조명등은 꺼지고 오랜 기간 그 지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은 그후 200년동안 역사의 주역을 감당했으나, 혜성처럼 나타난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리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그리스 시대도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이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며 ‘영원한 제국’으로 자부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는 법이다. 로마 제국도 종말의 날은 왔고, 그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막을 올린 ‘비잔틴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기라성과 같은 제국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등장과 퇴장을 거듭하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소외되고 잊혀진 땅이 되었다.
8세기 중엽 이슬람 아바스(Abbas) 왕조의 만수르(Mansur)가 제국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정함
그러나 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한 후 1300년동안 긴 동면의 시간이 지난 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다시 한번 역사의 중심무대에 등장했다. 서기 8세기 중엽 이슬람 아바스(Abbas) 왕조의 2대 칼리프 만수르(Mansur)가 제국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역사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바그다드는 현재 이라크 전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바그다드의 역사를 살피기 전에 먼저 이슬람교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출발점에서부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었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하셨고, 또 “가이사(로마 황제)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정교분리 원칙’의 기초가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도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는 없고 정교분리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종교
그러나 이슬람교는 전혀 다르다. 이슬람에서는 정교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슬람공동체는 종교적 공동체이며 동시에 종교가 사회의 모든 영역(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 사법 등)을 통제하고 관할하는 정교일체의 공동체이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는 종교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 의미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서기 632년) 후계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들을 칼리프(Caliph)라고 부른다. 칼리프는 마호메트의 후계자들로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들이었다. 마호메트의 법통을 이어받은 칼리프들은 정교일치의 원칙에 따라 종교권 뿐만 아니라, 이슬람공동체의 통치권까지 모두 장악했다. 여기서 칼리프를 수장(首長)으로 하는 ‘이슬람 제국’이 생겨나게 되었다.
첫번째 생겨난 이슬람 제국은 메카의 명문가 우마이야(Umayya) 가문의 후손이 이룩했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를 ‘우마이야 왕조’(Ummaya Dynasty)라고 부른다. ‘우마이야 왕조’는 시리아의 고도(古都) 다마스쿠스(다메섹)를 수도로 하여 약 90년간 지속되었다(서기 661∼750년).
서기 740년에 마호메트의 삼촌이었던 아바스의 후손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아바스 가문도 칼리프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믿었고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에 도전장을 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아바스 후손의 승리였다. 이로써 ‘우마이야 왕조’ 시대는 끝이 나고, 아바스의 후손이 이끄는 ‘아바스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첫번째 칼리프는 다마스쿠스에 그대로 머물러 통치했다. 그러나 2대 칼리프 만수르는 생각이 달랐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수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생각해냈다. 그는 티그리스 서안에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그곳을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 정하고 천도했다(서기 762년). 그 도시가 바로 ‘바그다드’였다. 당시로서 바그다드는 신흥도시였으나, 이슬람 종교권에서 칼리프가 군림한 도시였으므로 다른 도시들을 누르고 단시일내 당대의 으뜸도시가 되었다.
박준서 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1)]
바그다드 ②… 문명이 활짝 핀 ‘천일야화의 고향’
이번 이라크 전쟁으로 ‘바그다드’는 세계인들의 눈과 귀에 익숙한 도시가 되었다. 하루빨리 질서가 회복되고 오랜 폭정과 공포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자유의 도시로 새출발하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쓴다.
바그다드는 8세기 중엽 칼리프 만수르(Mansur)가 이슬람 제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역사의 중앙무대에 등장했다. 중동지역의 다른 고도(古都)들에 비해 바그다드는 신흥도시였으나, 이슬람 종교의 수장(首長) 칼리프가 거하는 도시였기 때문에 곧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로 발전했고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근동지역 최대의 국제적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바그다드는 육로 비단길과 해상 비단길의 종착지가 되었고,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거리는 항상 버글거렸다. 바그다드의 바자르(Bazaar·시장)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페르시아의 카펫, 인도의 각종 차와 향신료,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커피와 향료 등 세계 각지의 진기한 물건들로 가득찼고, 이들이 뿜어대는 향료의 냄새는 바그다드의 독특한 정취를 물씬 풍기게 했다.
한번 들어가면 찾아나오기 어려운 미로와 같은 바그다드의 골목길은 아랍 설화문학(說話文學)의 정수로 손꼽히는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의 배경이 되기에 적합한 곳이었고, 오늘날 현대 도시 바그다드에는 곳곳에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한 기념물들이 만들어져 있다.
바그다드는 상인들만 모여든 곳이 아니었다. 당시 아랍 세계의 중심도시로 학자 예술가 문학가 시인 장인들이 모여들었고, 칼리프들은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여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문화가 꽃을 피웠다.
바그다드의 번창하는 상업상의 필요에 따라 이들은 간편한 숫자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가 통용하는 ‘아라비아 숫자’이다. 이들은 소수점 이하까지 계산하는 법을 생각해냈다. 자연과학도 발달하여 이들이 발전시킨 천문학은 후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의학도 놀랄 만한 수준에 달해 아랍 의술인들이 만든 의학서적은 13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대학들에서 의학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 알코올(Alcohol) 알칼리(Alkali) 대수학(algebra) 화학(chemistry) 알고리즘(Algorithm) 삼각함수의 사인(Sine) 등은 모두 아랍인들이 연구한 결과이고 아랍어에서 유래된 용어들이다.
이슬람교는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따라서 이슬람 예술은 기하학적 문양이 발달했다. 이슬람의 예배장소 모스크(Mosque)와 같은 건물을 장식한 기하학적 문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교하며 보는 이들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역사의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500년동안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 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상업 등 모든 면에서 중심지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항세력이 일어났다.
13세기초 중동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몽골 평원에서 희대의 영웅 칭기즈칸이 등장했다. 그는 몽골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중앙아시아 전역을 장악하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몽골군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부대로 구성되어 기동성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맹성, 그리고 정복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포학성으로 당시 모든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칭기즈칸이 죽은 후 그의 손자 훌라구칸(Hulagu khan)은 대군을 이끌고 승승장구 서진하여 1258년 마침내 이슬람 제국의 심장부 바그다드의 문턱에 다달았다. 사기 충천한 몽골군의 공격 앞에 바그다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도시는 약탈된 후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심(al-Mustasim)은 붙잡혀 처형돼버렸다. 이로서 바그다드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몽골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바그다드는 그 후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칼리프가 없는 바그다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다.
16세기에 들어서서 오토만 제국의 힘은 중동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바그다드도 오토만 제국의 지배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500년동안 중동 전역에서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던 오토만 제국도 세계 1차대전의 패배로 몰락하고 만다.
1차대전 때 영국군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오토만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해서 싸웠다. 전쟁 패배로 오토만 제국이 몰락한 후 영국군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주둔했고, 1920년 국제연맹은 신생 이라크를 영국이 위임통치하도록 결의했다. 위임통치에 들어간 영국은 1921년 메카의 명문 출신 파이살(Faisal)을 왕으로 세우고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여 ‘이라크 왕국’을 수립했다.
1932년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이라크 왕국은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 카셈(Kassem)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로 당시의 국왕 파이살 2세(Faisal Ⅱ)는 처형당하고 이라크의 왕정은 단명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이라크에는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계속 일어났고 정치 불안은 가속되었다. 1968년 알바크르(Ahmad Hasan al-Bakr)가 쿠데타로 집권했다. 이 쿠데타의 성공은 티크리트 출신의 사담 후세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혁명세력의 핵심이 그의 동향 티크리트 출신인 점을 십분 이용해서 후세인은 ‘알바크르’ 정권에서 제2인자의 위치로 부상하게 되었다.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후세인이 이라크의 1인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박준서교수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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