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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6)~(10)]

영국신사77 2009. 3. 11. 23:22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⑹]

                             실패로 끝난 평화회담
                                          ‘예루살렘 분할’ 충격 카드

 

 캠프 데이비드는 격무에 시달리는 미국 대통령의 공식 휴양지이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의 영예를 안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도 휴식 공간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워싱턴에서 100㎞ 떨어진 애팔래치아산맥 자락에 대통령의 쉼터를 마련했다. 그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별히 사랑했던 손자 데이비드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캠프 데이비드’라고 명명했다.

 본래 대통령의 휴식 장소로 마련된 ‘캠프 데이비드’는 곧 세계 역사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산실’이 되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세계 정상들을 그곳에 초청했고, 까다로운 의전과 격식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인간적 교감을 나누며 세계사를 논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루스벨트와 처칠이 연합군 승리의 전략을 짜낸 곳도 그곳이었고, 닉슨과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군비축소의 원칙에 합의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이곳에 불러 끈질긴 설득과 중재 끝에 두 나라 사이 30년간의 구원(舊怨)을 청산하고 평화협정을 이끌어냈고, 이로써 캠프 데이비드는 세계 정치의 명소로 그 성가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2000년 7월, 8년동안의 대통령 임기를 6개월 남짓 남겨놓고 클린턴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의 신화를 다시 한번 재현해보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 에후드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했다. 7월10일부터 시작된 캠프 데이비드 평화회담은 7월25일까지 장장 2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마라톤 회담에서 클린턴은 중동문제를 해결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자 회담의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도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회담에 임했다. 그는 자신을 라빈 총리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자임했다. 그리고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과격파 청년의 총탄에 맞아 쓰러짐으로써 이루지 못했던 정치적 유업을 이루는 것이 자기의 소임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적 공존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편 아라파트 PLO 의장은 1964년 PLO가 결성된 이후 그때까지 36년동안 중동정치의 소용돌이속에서도 권력의 자리를 지켜왔고 협상에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노련한 인물이었다.

 바라크 총리는 장군 출신으로 전쟁 영웅이었고 이스라엘에서 그의 명석한 두뇌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치 협상에 있어서는 경험이 부족했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클린턴과 바라크 총리는 회담을 성공시키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회한 아라파트는 그럴수록 여유를 부리며 바라크가 총리가 제시하는 조건에 부정적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조급해진 바라카 총리는 너무 성급히 그의 마지막 카드를 아라파트에게 내밀고 말았다. 바라크의 제안은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아라파트에게 전달되었다. 바라크 총리의 회고담에 따르면, 클린턴 대통령은 아라파트가 분명히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메모지에 적은 것을 또박또박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 내용 중 하이라이트는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다.

 “동(東)예루살렘을 앞으로 수립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로 인정한다.
 또한 동예루살렘내의 아랍인 밀집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의 주권(主權)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구(舊)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지역과 크리스천 거주지역에도 팔레스타인 국가의 주권을 인정한다.
 다만 ‘성전산’지역은 계속 팔레스타인 ‘관할권’ 밑에 둔다”

 이 제안을 들었을 때 아라파트는 그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금기 사항으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 분할안’을 바라크 총리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측 제안으로서는 실로 파천황(破天荒)적인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1980년 이스라엘은 서(西)예루살렘(이스라엘측)과 동(東)예루살렘(아랍측)을 합한 전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국가의 ‘영원한 수도’라고 선언했고, 예루살렘 땅은 동·서예루살렘을 불문하고 한 치도 아랍측에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 확고부동한 이스라엘측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라크 총리는 팔레스타인과 평화공존을 위해서라면 예루살렘까지도 분할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양보안을 제안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아라파트가 바라크 총리가 정치 생명을 내걸고 제안한 예루살렘 분할안에 “노”하고 거부해버린 것이다. 아라파트가 왜 이스라엘측의 파격적인 양보안을 수락하지 않았는지, 그 진의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그로서는 성전산 지역을 포함해서 동(東)예루살렘 전체를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토로 삼기 원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2주동안의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아무런 성과없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만일 이 회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어떠한 작은 합의라도 이루어졌더라면, 그래서 평화공존을 향한 행보가 시작되었더라면 중동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오늘과 같이 혼란의 극으로 치닫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계속 “노”만을 반복했던 아라파트는 귀국하자 열광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환영인파에 파묻혔다. 사실 그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빈 손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대통령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영웅’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아라파트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절묘한 통치 기술이다.

 그러나 바라크 총리는 각료 외에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이 쓸쓸히 귀국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야 했다. 이스라엘 내 우파는 바라크 총리를 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측에 분할해 넘겨주려고 했던 ‘배신적’ 지도자라고 집중 공격했고, 결국 그는 벗어나기 어려운 정치적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⑺]
        예루살렘 분할안 파문 양보없는 암흑의 터널 속으로…

 

  시편 137편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 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주전 500년대 중반 이역의 땅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뼈에 사무치는 망향(望鄕)의 한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로부터 2,500년동안 이 애절한 ‘예루살렘 사모곡(思慕曲)’은 나라 없이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입술에서 한시도 떠난 일이 없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최대 종교절기의 하나인 유월절은 언제나 똑같은 기도로 끝을 맺었다.“바샤나 하바아 예루샬라임”(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긴 역사의 수난 중에도 유대인들이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예루살렘. 그곳은 오늘날 지리적으로 구(舊)예루살렘(Old Jerusalem)이라 불린다. ‘구예루살렘’은 다윗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 3000년동안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도성이다.

 그런데 ‘구예루살렘’은 그 명성과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서, 면적은 고작 30만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곳이다. ‘구예루살렘’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성밖 동쪽지역으로 거주지가 확장되어 나갔고, 이곳이 오늘날 아랍인들의 거주지역이 되는 ‘동(東)예루살렘’이 되었다.

 한편 19세기말부터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핍박과 학대를 피해서 이스라엘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구예루살렘’ 서쪽 외곽지역에 정착했고, 이로부터 유대인 신도시 ‘서(西)예루살렘’이 발전되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동서로 크게 확장되었으나 ,역사적 중요성이나 종교적 상징성에 있어서 ‘구예루살렘’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동서로 나뉜 예루살렘에서, ‘구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동예루살렘’편에 속하며, 1967년 ‘6일전쟁(3차 중동전쟁)’까지는 아랍인들의 관할권 밑에 있었다. ‘6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역(West Bank) 전체를 점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천년간 꿈에도 그리던 ‘구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0년 이스라엘 의회는 동·서예루살렘을 합한 예루살렘 전체가 이스라엘 국가의 ‘영원한 그리고 분할되지 않은 수도(eternal and undivided capital)’라고 결의했고, 이를 전세계에 공포했다.

 이에 맞서 팔레스타인측은 ‘동예루살렘’을 장차 수립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라고 선언했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적 방법으로 ‘예루살렘 분할안’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2000년 7월에 열렸던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회담에서 이스라엘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팔레스타인측에 제시한 제안이었다. 즉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하는 한편, 그곳을 팔레스타인측과 이스라엘측 사이에 분할한다는 제안이었다.

 바라크 총리의 예루살렘 분할안이 언론에 보도되자, 그는 이스라엘에서 빗발치는 비난 여론의 표적이 되었다. 사실 바라크 총리도 예루살렘 분할안이 정치적 모험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만이 중동문제 해결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었고,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측이 어느 정도 양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다. 그가 캠프 데이비드에서 용기있는 결단을 내렸을 때, 그에게 보내는 작은 박수소리는 이스라엘 전국을 뒤흔든 비난의 함성에 파묻혀버렸다. 바라크 총리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 용기는 있었으나, 이스라엘 국민들을 설득하고 의견을 결집시키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론이 악화되자 이스라엘의 제1야당 ‘리쿠드’ 당은 바라크 총리 공격에 호재를 만났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당시 리쿠드당의 당수는 ‘아리엘 샤론’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초강경파로 잘 알려진 인물인 샤론은 리쿠드당 내에서 정치 기반이 단단하지 못했다. 1999년 총리선거에서 패배한 ‘네타냐후’ 전 총리가 재기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타냐후는 총리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리쿠드당의 당수직에서 물러났지만, 당내에서는 아직도 든든한 기반을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 보수우파 사이에서는 여전히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샤론당수는 네타냐후의 도전을 물리치고, 앞으로 있을 총리선거에서 야당후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극적인 국면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론이 치밀한 계산 끝에 내디딘 정치적 행보가, 2000년 9월28일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산 등정이었다.


 

 성전산은 ‘구예루살렘’의 일부로 솔로몬 성전이 서있던 자리며, 지금은 이슬람교 대사원이 들어서 있어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에게 성지 중의 성지가 되는 곳이다. 샤론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성전산에 오른 것은 이스라엘인들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바라크 총리는 예루살렘을 분할하여 팔레스타인측에 넘겨주려고 했지만, 샤론 자신은 예루살렘 분할안에 절대 반대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루살렘 전체를 사수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즉 샤론의 성전산 등정은 이스라엘 대내용 정치적 행위였다. 이러한 그의 성전산 방문은 팔레스타인측의 거부 반응을 불러오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측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샤론의 의도가 한 치의 예루살렘땅도 팔레스타인측에 양보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독점하겠다는 것임을 알아차린 팔레스타인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대대적인 이스라엘 항거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중동사태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최대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폭력과 대결의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포연속의 성지 ⑻] 팔레스타인 항거운동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헤브라이대학이 있다. 철학자 마틴 부버도 오랫동안 교수로 있었던 이 명문대학에 바로 인접해서 ‘프렌치 힐(French Hill)’이라는 구역이 있다. 지대가 높아 구(舊) 예루살렘이 한눈에 들어오고, 전망이 좋아 예루살렘에서 인기있는 주거지역이다.

 지난 2002년 6월19일 오후 7시경 ‘프렌치 힐’의 버스 정류장은 여느 날과 같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 한 대가 버스 정류장 가까이 미끄러지듯 멈추어섰다. 차에서 내린 청년은 빠른 걸음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 곳을 지키던 경찰은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고 청년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막을 터치는 굉음과 함께 일순간에 그곳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손자의 고사리 손을 붙잡고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 대학 졸업을 앞두고 졸업 축하 저녁식사에 가려던 여자 대학생을 포함해서 7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50여명이 피를 흘리며 길에 쓰러졌다.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수없이 계속되어온 팔레스타인 자살 테러 일지(日誌)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추가된 것이다.

 이보다 하루 전날 6월18일 오전 8시, 예루살렘 시내를 달리는 버스 안에 자살테러범 아랍 청년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이 되었을 때, 테러범은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장치에 버튼을 눌렀다. 버스의 지붕은 하늘로 치솟았고 버스 안은 피바다로 변했다. 19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고, 50명의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에는 등교하던 십여명의 학생들이 포함돼 있어 사람들의 슬픔과 충격은 더욱 컸다. 테러 현장으로 달려온 예루살렘의 에후드 올메르트 시장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들은 전쟁 중에 있습니다. 이 전쟁은 어제도 계속되었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분명히 내일도 계속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시장이 말하는 ‘전쟁’은 지금부터 21개월 전 2000년 9월28일 발발되었다. 그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좌절감과 끓어오르는 분노로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해 9월13일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선언일’로 정해 놓고 가슴졸이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두달 전에 있었던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은 아무런 결론없이 실패로 끝났고, 그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측은 독립을 선언할 수 없었다. 9월13일을 그냥 지나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그들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에 몸부림쳤고, 좌절감은 곧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민감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요,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초강성 인물로 잘 알려진 ‘샤론(Sharon)’이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등정한 것이다. 삼엄한 경호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루어진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예루살렘 문제에 대해 그의 확고한 입장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산 지역을 포함해서 한 치의 땅도 양보하거나 절대 분할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억제하고 있던 분노는 일시에 폭발했고, 곧 이스라엘 항거운동, 인티파다(Intifada)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인티파다란 민중봉기 항거운동이라는 아랍어다.

 그런데 지난 1년 9개월동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항거운동과는 전혀 다른 과격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자살폭탄테러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동원되고 있는 점이다. 더욱 가공할 것은 테러의 공격목표가 군사시설이나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팔레스타인측의 주장이 나름의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해도, 민간인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으로도 그 방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가 없다.

 2000년 9월이래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목표로 90회에 달하는 테러를 자행했고, 거의 5백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귀한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아랍측에서는 이러한 폭력적 행위가 ‘테러’가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땅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정당한 저항행위, ‘레지스탕스’라고 주장한다. 지난 3월말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개최된 22개국 아랍국가연맹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그곳에 모인 아랍국가 정상들의 공통된 의견은 팔레스타인측의 행위는 ‘테러’가 아니라 ‘레지스탕스’라는 것이었다.

 ‘테러’와 ‘레지스탕스’의 구분이 흑백을 가리듯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적 관례는 다음의 네 가지 요건을 갖춘 폭력행위는 ‘테러’로 정의(定義)하고 있다. 첫째 미리 계획된 고의적인 폭력행위, 둘째 정치적 동기에서 유발된 폭력행위, 셋째 민간인을 공격목표로 하는 폭력행위, 넷째 국가의 정규군대가 아닌 조직이나 단체에 의해 수행되는 폭력행위이다. 이 ‘테러’의 정의는 국제적으로 널리 수용되고 있고 미국 국무성도 이 기준을 따르고 있다. 이 기준에 비춰볼 때 현재 팔레스타인 과격파들이 범하고 있는 폭력행위는 분명히 ‘테러’에 해당한다.

 현재 이스라엘 샤론 정권의 일관된 입장은 팔레스타인측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테러행위를 중단하지 않는 한, 그들과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테러행위 중단이 협상의 전제조건이다. 오늘날 세계인권단체들은 이상하리만큼 팔레스타인 테러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제적 여론은 좀더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측의 테러행위의 중단을 강력하게 촉구해야 할 것이며, 이로써 중동문제 협상의 물꼬가 트여야 할 것이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⑼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 建國위한 ‘목숨건 절규’

 

 

 2000년 후반부터 이스라엘 도시를 공포의 거리로 만드는 팔레스타인 자살 테러리스트들이다. 이들은 폭탄을 허리에 벨트처럼 두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이를 폭파시켜 자기 모습은 말할 것도 없이 수많은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귀한 생명을 빼앗고 있다.

 테러의 방법으로는 가장 극단적이고 잔인한 자살테러는 지금까지 아랍 청년들에 의해서 자행되어 왔다. 지난 1월말에도 예루살렘 중심 번화가에서 1백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대규모 자살테러가 있었다. 그런데 테러의 주범이 팔레스타인 대학에 재학 중인 여자 대학생으로 판명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엇이 팔레스타인 남녀 청년들로 하여금 자기 몸을 내던져 이스라엘 사람을 살상하는 폭탄이 되게 하는가? 인간의 본능에 역행하는 극한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날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중동문제의 핵심이 된다. 자살테러범들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들이 요구하는 바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군사점령지역’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라는 것이다. 이 요구는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과 ‘가자지구(Gaza Strip)’로부터 이스라엘이 철수하라는 것이다.

 둘째, 이 지역들로부터 이스라엘이 철수한 후 그 곳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하겠다는 것이다.

 셋째, 앞으로 세워질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는 동(東)예루살렘이 될 것이며, 국가의 수도로서 동 예루살렘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주권(主權) 밑에 있어야 한다.

 넷째, 현재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각자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향권(right of return)’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들 요구사항 중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문제는 이미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문제이다. 미국을 비롯해서 국제 여론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고 있고, 다만 그 절차와 시기의 문제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향권’ 문제는 이스라엘측이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과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 생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오늘날 약 380만명에 이른다(UN 공식 통계). 이들은 오늘날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등 여러 나라의 난민촌(refugee camp)에 분산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귀향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측이 난민들의 귀향을 반대하는 이유는 인구문제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 내의 유대인 인구는 약 5백만명이다. 한편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포함해서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땅 안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수는 약 400만명이 된다. 그런데 약 380만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난민들이 귀향하는 경우, 이스라엘 땅 안의 아랍계 인구는 현재보다 거의 갑절이 되는 780만명으로 껑충 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랍인들의 수가 유대인들보다 훨씬 많게 되며, 이러한 인구 역전현상만은 막아야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측의 입장이다.


 

 난민 문제는 그들에게 더 나은 여건의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든지, 혹은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방법들이 있어 앞으로 협상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는 두 가지가 남게 된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철수’문제요, 다른 하나는 동(東)예루살렘에 관한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 중에서 동예루살렘 문제는 누구도 쉽게 풀 수 없는 최후의 난제가 된다.

 현재 팔레스타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부터 무조건 완전히 철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단 이스라엘의 철수가 끝난 후에야 협상에 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부터 철수하라는 요구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측이 ‘6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두 지역을 점령하고,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측은 두 지역의 요소 요소에 140개소 이상의 ‘유대인 정착촌(Jewish Settlements)’을 건설하고, 현재 2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주력한 것은 그들이 두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두 지역으로부터 철수하는 경우에도 정착촌을 유대인들의 교두보로 남겨두어, 언젠가는 그 지역을 다시 차지하겠다는 야욕이 숨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측의 숨은 의도를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다. 역대 이스라엘정권은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주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을 비롯한 국제여론의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정착촌 건설을 감행해 왔다. 더욱이 현재 이스라엘 총리 ‘샤론’은 정착촌 건설의 기수로서 대단히 강경한 태도로 정착촌을 옹호하고 있는 인물이다.

 앞으로 팔레스타인측과 이스라엘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는 경우, 정착촌 문제가 큰 논쟁점이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의 일반적인 여론은 140개소 이상의 정착촌을 모두 이스라엘측이 고수하기는 어렵고, 어느 정도의 양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 35년간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측은 요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역의 점령 상태가 영구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과, 언젠가는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들 지역을 이스라엘 국토의 일부라고 주장한 일도 없고, 합병(合倂)시키려고 시도한 바도 없다.

 이들 지역 중 이스라엘이 그들의 국토로 합병시킨 유일한 땅은 동(東) 예루살렘뿐이다. 1967년 7월 ‘6일 전쟁’ 직후 이스라엘측은 동예루살렘 합병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스라엘 측이 동예루살렘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선언적 의미가 강할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계속되는 갈등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92년 ‘라빈’이 이스라엘에 총리로 선출되면서부터였다. 라빈은 예루살렘 출생으로 이스라엘 군에서 잔뼈가 굵었고, ‘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의 영웅이었으나, 라빈은 팔레스타인과의 문제는 군사적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평화적 공존만이 문제 해결의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했고, 그가 총리직에 오르자 그의 확신을 실천에 옮겼다. 이스라엘 군대를 ‘군사 점령 지구’로부터 철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라빈 총리가 확신을 가지고 주도해 온 ‘오슬로 협정(Oslo Accord)’의 결과였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이 협정안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오슬로 협정’으로 불려지는 이 중동평화안은, 1993년 9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아라파트 의장 사이에 서명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45년 동안 숙적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음으로 평화공존의 당위성에 합의한 것이다. 라빈 총리의 중동 평화에 대한 의지와 결단에 세계는 찬사를 보냈고, 라빈과 외무장관 페레스 그리고 아라파트의장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중동문제 해결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고, 이 협정에 따라 요단강 서안 지역의 ‘여리고’로부터 이스라엘 군대는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중동의 ‘평화절차(Peace Process)’라는 역사는 그 닻을 올리고 출항하였다.

 그러나 ‘평화절차’의 항진은 곧 험난한 폭풍을 만나 난파의 위기를 겪게 된다. 1995년 11월 ‘평화절차’의 산파역을 감당했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라빈 총리의 서거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라빈이 없는 ‘평화절차’는 방향을 잃고 거친 난항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포연속의 성지―(10)역사의 수수께끼] 아라파트는 왜 파국을 선택했나
                                                                                                                                   [국민일보 2002-07-07 17:24]

 

 오늘날 중동사태가 혼미를 거듭할수록 이스라엘 라빈(Rabin) 수상의 서거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진다. 만일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에 저격당해 쓰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날 중동사태는 이렇게 절망적인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빈은 포연의 전쟁터에서 젊은날을 보낸 군인출신 정치인이었다. 그는 전쟁의 영웅이었으나, 전쟁의 한계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전쟁이나 무력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적 공존의 문제는 몇 번의 협상이나 몇 장의 평화협정 문서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누적된 구원(舊怨)과 풀어야 할 난제들이 산적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이다. 평화공존이라는 목적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으로 하나씩 문제를 풀어나가는 ‘평화과정’(Peace Process)의 긴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라빈 총리는 누구보다도 평화공존에 굳은 확신을 갖고 평화과정을 출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 1993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아라파트 사이에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Oslo Accord)이었다. 이 평화협정은 양측이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 궁극적으로 평화공존의 목적지에 도달하자고 하는데 쌍방이 합의한 것이다. 즉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평화과정의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평화과정의 출발점으로서 오슬로 평화협정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이전까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더욱이 존재할 수 있는 권리(right to exist)를 인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측을 대표하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의 궤멸(annihilation)을 그들의 목표로 삼았다. 한편 이스라엘측은 PLO를 테러리스트 조직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오슬로 평화협정을 통해서 처음으로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와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쌍방이 인정하는데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서 팔레스타인측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e Authority)를 세우고, 요르단강 서안지역의 도시, 여리고로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철군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의 영역을 넓혀나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라빈 총리가 소신을 갖고 추진하던 평화과정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안에는 평화공존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요, 팔레스타인측이 평화과정에 동의하는 것은 위장된 전술적 차원에 불과하다고 극도의 불신감을 표출하는 적지 않은 극우파들이 있다.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 의해서 피격 사망한 것은 한 정치인의 비극적 최후만이 아니었다. 그가 확신을 갖고 추진해 온 평화과정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한 것이었다. 라빈 총리의 서거 후 실시된 총리 선거에서 평화과정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리쿠드당의 네탄야후가 당선되었고, 그 후 평화과정은 난항을 계속했다.

 

 네탄야후의 뒤를 이어 노동당의 바락(Barak)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평화과정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바락은 자타가 인정하는 라빈 총리의 정치적 후계자였다. 그는 라빈이 이루지 못한 평화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자기의 역사적 과업이라고 확신했고, 평화를 향한 행보를 시작했다. 우선 1982년 이래 레바논 남부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를 레바논으로부터 완전히 철수시켜 평화를 향한 거보(巨步)를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과정을 본 궤도에 올려놓으려는 바락 총리의 노력에 대해서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는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바락 총리가 이스라엘 내의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팔레스타인측에 평화공존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아라파트는 차갑게 바락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것이 바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 회담에서 일어난 일이다. 바락은 회담의 성사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쟁점 중의 하나인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이스라엘 철수 문제에 관해서도 바락은 즉시 91%의 땅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넘겨주겠다는 등 상당한 양보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결국 바락은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협상의 마지막 카드가 되는 예루살렘 분할안(?)까지 내놓게 되었다. 이것은 바락 총리가 평화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고, 2주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 결렬 후, 바락 총리는 이스라엘 내 우파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것을 팔레스타인측에 양보했다고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측으로서는 바락이 제시하는 조건은 양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요르단강 서안(West Bank) 문제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측은 즉시 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락은 이스라엘 내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인물로 비난을 받아야 했고, 팔레스타인측으로서는 그가 제시하는 양보조건은 그들의 요구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결국 바락 총리는 양측 모두로부터 거부당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만일 팔레스타인측이 중동평화의 의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비록 바락 총리가 제시하는 조건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평화과정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지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협상을 결렬시킨 아라파트는 이로부터 두 달 뒤 평화과정을 완전히 포기하고, 폭력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2000년 9월말 팔레스타인들이 이스라엘에 항거하는 민중봉기운동, 인티파다를 일으킨 것이다. 인티파다를 촉발시킨 계기는 그 해 9월 28일에 있었던 현재 이스라엘 수상 샤론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Temple Mount)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인티파다의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인티파다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라파트로서는 평화과정을 파기시키고 새로운 형태로 이스라엘을 몰아붙일 기회와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없이 폭력화되어갔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내의 정치 상황은 점점 바락 총리의 유화정책으로부터 당시 야당 당수 샤론의 강경우파 쪽으로 선회하였다. 바락 총리는 급격히 악화되는 정치상황을 되돌리려는 고육책으로, 2001년 2월 조기 총리선거를 실시하기로 결단했다. 바락으로서는 국민들의 재신임을 받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인티파다는 날이 갈수록 과격하게 폭력화했고,그럴수록 이스라엘의 민심은 온건한 바락보다는 강경대응책을 주장하는 샤론 쪽으로 기울어갔다.

 

  총리선거에서 샤론은 압승했고, 바락은 실패한 총리라는 낙인과 함께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났다. 여기에 역사의 수수께끼가 있다. 샤론을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데 있어서 으뜸되는 수훈자는 다름아닌 아라파트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라파트가 바락 총리의 평화에 대한 노력에 조금이라도 협조적이었다면,  샤론이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중동의 상황은 평화과정의 진행으로 훨씬 개선된 모습으로 변해있었을 것이다.

 

 왜 아라파트가 우호적인 바락의 손길을 뿌리치고 결과적으로 강경파 샤론의 손을 들어주었는지?  왜 그가 평화과정의 길을 버리고 폭력적 인티파다의 길을 택했는지 그의 노회한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 알기 어렵다. 현대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박준서(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