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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1)~(16)]

영국신사77 2009. 3. 11. 23:25
                  [포연속의 성지 ⑾ ‘요단강 서안지역’] 중동평화 열쇠 쥔 ‘갈등 진원지’
                                                                                        [국민일보 2002-07-14 16:51]
 지난 3월29일부터 8일간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 이스라엘군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예닌에서 100여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닌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감행한 것은 2002년 3월에 발생한 수십 건의 자살 테러의 테러범들이 대부분 바로 이곳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예닌이 속해 있는 지역이 바로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이다.

 

 요단강과 사해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요단강 서안지역은 그 면적이 5860㎢정도이며 현재 210여만명의 아랍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 반환의 핵심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계획되고 감행되는 지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테러범 소탕작전을 벌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벧엘 헤브론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순례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단강 서안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 행사 등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평화회담의 핵심 사안인 요단강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는 다른 중동평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강제 점령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후 요르단에 의하여 감행되었다. 요르단은 요단강 서쪽 지역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이라고 불리는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요단강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런데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면서 1952년 이 요단강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고,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동예루살렘은 자국에 합병시켰으나, ‘요단강 서안지역’은 합병하지 않고 단지 군사적 점령지역으로 남겨두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베긴 총리 정부가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스라엘 주택성장관은 현 총리인 샤론이었다.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한 결과 ,요단강 서안지역에는 140여곳의 정착촌이 건설돼 2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 1978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도 요단강 서안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보를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 이스라엘 무장 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이다. 레바논 전쟁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가 기폭점이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에 군사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특히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때 요단강 서안지역은 인티파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는 듯하였다.이 평화협정에 의하면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단계적으로 요단강 서안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998년까지 철수하고,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어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평화협정문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여리고로부터 철수하는 시점부터 5년간의 과도기간을 가지며, 과도기간 3년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최종협상을 하되 그 협상에서 예루살렘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정착촌 문제, 국경문제 등을 다룬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자치정부가 테러와 그밖의 모든 폭력행위를 배격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해서 팔레스타인내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안보 후반환’을 주장한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선반환 후협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6년에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자살테러가 감행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팔레스타인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선안보를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측에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최종 협상에서 양측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하자 ,같은해 9월 ‘요단강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000년 10월22일 중동평화회담의 전면 중단을 선언하였다.

 

 2001년 2월 강경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집권하였고,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하여 그 동안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 있었던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재점령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예닌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을 공감하기보다 국내 정세에 따라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평화는 요원하다. 진정한 평화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양측간의 상호 신뢰회복이 선결과제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

 

 

 

 

                      [포연속의 성지⑿] 이스라엘 독립과 중동분쟁의 시작
                                                                                       [국민일보 2002-07-21 16:47]

 “하나님 아버지! 오늘까지 생명을 보전해주셔서 이 기쁜 날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역경과 수난으로 점철된 긴 역사를 살아온 유대인들이 기쁘고 경사스런 일을 맞으면 으레 암송하는 기도문이다.

 

 1948년 5월14일. 이 날은 전세계 유대인들의 입에서 이 감사의 기도가 끊이지 않은 날이다. 그 날 오후 4시, 이스라엘 텔 아비브(Tel Aviv)의 박물관에서 이스라엘 초대 수상 ‘벤 구리온(Ben Gurion)’은 전세계를 향해 흥분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다.

 

  “유대인 국가가 다른 나라들처럼 독립된 주권국가로 살아가는 것은 천부의 권리이다.

    이에,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국가인 이스라엘의 수립을 선언한다”

 

 40분동안 계속된 이스라엘 독립 선언식은 구약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구약 아모스 9:14∼15)

      

 숨을 죽이고 방송을 듣던 유대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기원전 6세기(주전 587년) 유다 왕국이 바벨론 군대에게 짓밟혀 나라가 멸망한 이래,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세계에 흩어져 살아왔다. 온갖 핍박과 차별의 수모를 당하며, 때로는 추방과 학살의 위기를 넘기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존해 온 그들이었다.

 

  1898년 시온주의(Zionism)의 아버지 테어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이 독립할 것이다”라는 놀라온 선언을 했을 때, 아무도 그 꿈이 실현될 줄을 몰랐다. 그러나 1948년, 헤르츨의 예언은 기적과도 같이 그대로 적중하여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날이야말로 ‘중동문제’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었던 아랍인들이나, 주변의 아랍국가들에게 있어서 이 날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버려야 할 날이었다.

 

 서기 630년대 이슬람교도들인 모슬렘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한 이래, 아랍인들은 그동안 그 땅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온주의 운동의 결과,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1300년 이상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들과,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일치단합해서 이스라엘 독립에 반기를 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솔로몬 왕 때 한 아기를 놓고 두 여인이 자기 아이라고 싸웠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하나의 땅에 주인이 둘이 되었기 때문이다.

 

 벤 구리온의 독립 선언서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대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들려왔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결사 반대해온 주변의 아랍 국가들, 이집트,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등이 연합해서 신생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이렇게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앞으로 계속될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사이의 피나는 혈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서구 제국들은 큰 딜레마에 봉착했다. 아랍권은 일치단결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극력 반대했고, 서방세계는 산유국 아랍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주도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2차대전 당시 나치스들이 만든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을 때, 서방 제국들은 이들의 독립의 열망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든 나라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서 제일 먼저 승인해준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즉각 신생 이스라엘을 승인하는데 앞장섰다. 미국의 뒤를 이어 다른 나라들도 이스라엘 승인 대열에 동참했고, 그 결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오늘도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이스라엘에서 건국의 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아랍권의 미국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반미감정은 이때부터 그 씨앗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선언과 함께 시작된 아랍권과의 전쟁을 제1차 중동전쟁이라 부른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측으로서도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국가의 구성 요소로서 국토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새로 탄생한 이스라엘로서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국토를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공격해 오는 아랍권에 비해 군비나 병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열세였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UN의 중재로 1949년 1월 휴전이 되었을 때, 전쟁의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랍측의 월등한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이스라엘측으로 돌아간 것이다. 종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중동문제의 핵심이 되어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요단간 서안지역’(West Bank)과 ‘가자지구’(Gaza Strip), 이 두 곳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한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와 함께 생겨난 골치 아픈 난제 중의 하나가 ‘팔레스타인 난민’(Palestinian refugees) 문제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자하면서,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첫째 부류는 이스라엘의 통치 밑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주변의 아랍국가로 피난한 아랍인들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약 35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망향의 한을 달래며 난민촌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오고 잇다.

 

 두번째 부류는 난민이 되기보다는 이스라엘 통치 밑에서 그대로 살기로 선택한 아랍인들이다.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주었다. 이들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은 오늘날 약 120만명에 이르러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으며,이스라엘 국회에는 이들을 대표하는 아랍계 국회의원도 12명이나 된다.

 

                                                                              제2차 중동전쟁

 1956년 이집트가 주동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세 나라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측은 아랍측이 군사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했다. 제2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UN은 곧 중재에 나섰고 치열했던 전투는 9일만에 서둘러 종식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두자, 팔레스타인 아랍인 과격파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규 전쟁으로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랍인 과격파들은 대 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아라파트(Arafat)가 이끄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출범하게 되었다.

 

 PLO는 테러라는 폭력수단을 사용해서 이스라엘과 대항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괴멸시키겠다는 목표로 출현한 테러조직이었다. PLO가 저지른 테러사건 중 세계를 가장 경악케 했던 것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에게 가해진 테러였다. 복면을 한 PLO 테러범들이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미국은 1980년 후반까지, PLO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협상을 거부했다.

 

 

                                                                                 박준서<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⒀] 테러로 가족잃은 유태인 비더씨
                                                                                            [국민일보 2003-02-27 14:35]
 지난해 독자들의 큰 관심속에 연재됐던 박준서 박사의 ‘포연 속의 성지’가 이번 주부터 다시 선보입니다. 최근 필자가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해 모은 귀중한 자료와 현지 표정들을 생생하게 전해줄 것입니다. ‘포연 속의 성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경의 사실성을 거듭 확인시켜줄 것입니다. <편집자>

 

 1950년대 영국의 고고학자 캐서린 켄욘은 예리코(여리고)에서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역사적 유적을 발굴했다. 무려 지금부터 1만년전에 세워진 높은 성벽과 망대를 발굴한 것이다. 인간들이 오랜 동굴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생활로 전환하던 그 오랜 옛날 그때부터, 이미 성벽을 쌓고 망대를 세웠던 것이다. 인류 최고(最古)의 도시로 알려진 예리코의 성벽과 망대는 인류의 역사가 어떤 역사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는 폭력과 대결, 살육과 전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불행한 일이다.

 

 오늘도 이스라엘 땅에서는 가슴 아픈 불행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하루 평균 20건에 달하는 테러와 이에 대한 이스라엘측의 군사적 대응은 성지 이스라엘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공포의 땅으로 만들고 있다.

 

                                       예리코 근처 ‘길갈’에 살고 있는 제하바 비더 부인

 

 그러나 광야의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거센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한줄기 작은 불꽃이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을 밝혀주는 한가닥 희망의 빛이다. 필자는 그 작은 빛을 찾아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예리코 근처 ‘길갈’에 살고 있는 제하바 비더 부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리코와 길갈은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지명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후 40년동안 시나이(시내) 광야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여호수아의 영도로 요르단(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기념물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 요르단강에서 큰 돌을 하나씩 가져다 12개 돌을 쌓아놓은 것이다. 그곳이 바로 길갈이다. 그리고 곧 이어 근처에 있던 거대한 성읍을 정복했다. 그곳이 예리코였다.

 

 오늘날 예리코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관할하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속해 있다. 이스라엘 자동차를 타고 아랍인 지역을 지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해서 예리코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도로를 택했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의 자동차 번호판 색깔이 달라 쉽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예리코를 지나 약 10분쯤 달려 길갈에 세워진 키부츠에 도착했다. 키부츠를 중심으로 요르단강 계곡의 황무지는 푸른 녹지대로 변해 있었다. 키부츠에서 비더 부인에 대해 물으니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는 키부츠 옆에 있는 농업시험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황무지를 푸르게 변화시키는 농업시험장이었다.

비더 부인은 일손을 멈추고 필자를 맞아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어려움을 극복한 역경의 연륜이 깃들어 있었다.

 

  “저와 남편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나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했습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후손입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의해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된 역사적 비극을 말한다.

 

 “그래도 저와 남편,두 딸,이렇게 네 식구는 매우 행복한 가족이었습니다. 남편 ‘제에브’는 농업전문가로 나이지리아에서 농업기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보니 훤칠하게 잘 생긴 모습이다.

 

 “큰딸 시반은 군복무중이었고 약혼자가 있어서 두달 뒤 제대하면 곧 결혼할 예정이었습니다. 작은딸 길리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고 졸업하는 대로 군대에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도 18세가 되면 20개월동안 군복무를 해야 한다.

 

 “작년 3월27일은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큰 종교절기 중 하나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노예의 땅을 벗어난 출애굽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날이지요. 이날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합니다.” 비더 부인은 악몽과도 같았던 기억을 잔잔한 목소리로 되살려주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유월절 식사를 위해 나타니아에 있는 호텔 식당으로 갔습니다. 큰딸의 약혼자와 작은딸의 남자친구도 데리고 갔습니다. 식당에는 손님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오후 7시가 조금 지나 모두 함께 식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습니다. 순식간에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큰딸과 약혼자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작은딸은 한쪽 눈을 잃었고, 남자친구는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남편은 중상을 입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저도 얼굴과 손처럼 노출된 부분은 화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심한 부상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온몸에 파편이 많이 박힌 남편은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비더 부인의 눈망울이 붉어지며 눈가에는 안개가 서린다. 이때 다른 병원에서는 급히 신장이식이 필요한 환자가 있었다. 50세 된 아랍여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비더 부인은 의사에게 물었다. “남편의 신장을 이식할 수 있겠습니까” 의외로 남편의 몸에서 쓸 수 있는 장기는 신장이었다고 한다. 아랍인의 테러로 죽은 남편의 신장은 아랍 여인에게 이식되었고, 그 여인은 지금 건강을 회복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의 장기를 남편을 죽인 아랍인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 내 말에 비더 부인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테러는 증오합니다. 그러나 아랍사람들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 미워하지 않고 이 땅에서 얼마든지 평화롭게 같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행복했던 가정은 테러로 인해 무참히도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유대광야 한 자락에 서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비더 부인의 모습은 외롭지만 꿋꿋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움을 용서로 바꿔주신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사랑의 작은 촛불이 동녘 하늘을 밝혀 찬란한 평화의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박준서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⒁] 이―팔 유혈갈등의 해법을 찾아서
                                                                                                [국민일보 2003-03-13 14:25]
 지난 5일 이스라엘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또다시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고성능 폭약을 몸에 두르고 버스에 오른 테러범은 번잡한 버스 안에서 이를 폭파시킨 것이다. 현장에서 10명이 죽었고 병원으로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5명이 더 죽었다. 그리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대형 테러 사건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인근에 위치한 명문 하이파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 후 이스라엘에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4차례 큰 전쟁이 있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해서 50년대, 60년대, 7 0년대 평균 10년 주기로 4번에 걸친 전쟁이 일어났고 성지 이스라엘 산천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포연 속의 성지에도 한때 평화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1993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팔레스타인측을 대표하는 아라파트 PLO 의장과 이스라엘 라빈 총리, 그리고 외무부 장관 ‘페레스’는 전 세계인의 박수를 받으며 ‘원칙선언’에 서명했다. 그 내용의 골자는 앞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상대방이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고, 향후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자치지역 범위를 확대해 나간다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테러로 쉴 날이 없었던 이스라엘 땅에 ‘평화공존’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노벨상위원회는 이 선언문에 서명한 아라파트 의장, 라빈 총리, 페레스 외무장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이스라엘 땅에 도래할 평화를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을 향한 행진은 곧 좌초되고 말았다. 1995년 11월 텔아비브에서 라빈 총리의 평화정책을 지지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하여 열변을 마치고 퇴장하는 라빈 총리에게 이스라엘의 극우파 청년 아밀이 3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라빈 총리의 암살 소식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서 80개국 정상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이스라엘내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 공존 정책을 추진했던 라빈의 비전과 용기를 추모하였다.

 

 라빈 총리를 쓰러뜨린 극우파 청년의 총탄은 평화 공존의 꿈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라빈 총리의 사망과 함께 이스라엘에서는 대팔레스타인 강경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내에서도 하마스,이슬람 성전(聖戰) 조직 등 과격한 테러조직들이 발호하게 되었다. 결국 평화 공존을 위해 애썼던 라빈 총리의 노력은 수포가 됐고,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폭력의 악순환이 재연되었다.

 

 2000년 9월말 이스라엘 야당 당수 샤론은 일찍이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던 성전산을 방문했다. 일견 별 문제가 아닐 것 같았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아랍인들을 자극했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인티파다)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아랍인들의 항거운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어 이스라엘 땅을 다시 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30개월동안 계속되고 있는 인티파다로 75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스라엘측은 아랍 과격파들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군대를 동원해서 강경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19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과거 팔레스타인측의 항거운동은 청년들이 이스라엘 병사와 탱크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에 폭약을 휘감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폭발시켜 수많은 희생자를 내는 ‘자살폭탄’ 테러 형태로 격화되었다. 게다가 어린이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초부터는 젊은 여성들까지 자살테러범의 대열에 가담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그곳에 그 이름에 걸맞은 조화로운 평화는 없고 격렬한 투쟁과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가? 트루먼 대통령 이래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어떻게든 이스라엘에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큰 성과는 없고 오히려 대결 양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이스라엘 문제’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나의 땅을 사이에 놓고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이 싸운다면 그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양측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방법은 정녕 없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재의 상황만을 보아서는 안된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성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오늘날 엉켜버린 실타래같은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이제부터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시간을 뒤로 돌려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은 무려 4000년이라는 시간을 소급해 올라가야 하는 머나먼 과거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문제는 4000년이라는 시간이 축적된 뿌리깊은 문제다. 시계바늘을 4000년전으로 돌려 까마득한 과거로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박준서(연세대 교수·한미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⒂]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1)

                                                            [국민일보 2003-03-20 15:14]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다. ‘갈대아’는 오늘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라크의 남부지역을 지칭하며 ‘우르’는 그 지역에 있던 고대도시 이름이다. 지금부터 약 4000년전 이라크의 남부지역 ‘우르’에서 아브라함 가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오늘날 전쟁의 먹구름으로 뒤덮인 이라크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나고 자란 땅인 것이다. 그곳이 걸프전 이후 또 다시 전쟁의 화염이 휩싸이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아픈 마음으로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루속히 그 땅에 이루어져서 이라크도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화평의 땅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

 

 이라크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배가량 되는 크기의 땅이다. 이 땅의 중심부에는 2개의 큰 강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다. 이 2개의 강은 이라크를 종단해 흐르다가 하류에는 합쳐져서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오른쪽의 강이 티그리스 강이고 왼쪽 것이 유프라테스 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두 강 사이의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 지명이 쓰이고 있다. ‘메소’란 그리스어로 ‘사이’라는 뜻이며 ‘포타미아’란 ‘강’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강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고대에서부터 인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이곳 남부지역에서 고대 4대 문명 중의 하나가 꽃을 피웠고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도 이 지역에 세워졌다. 또한 고대 중동지역 전역에 군림했던 아시리아(앗수르) 제국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고, 유다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 파괴했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한의 포로 생활을 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구약성경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요나 선지자가 회개를 외쳤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 그리고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 도성 ‘바벨론’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많이 있어 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 지역이다. 그러기에 12년전 걸프전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유적들을 파괴시키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다행히 유적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도 그렇게 되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필자가 몇년전 ‘우르’를 찾았을 때 4000년 전의 문화유적 주위에 이라크군이 군사시설을 설치해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전쟁 때 공격을 막기 위해서 인류의 문화유산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고 ‘성경 세계’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성경 역사기행에서 빠져서는 안될 지역이다. 그러나 이곳은 걸프전 이후 항공기 운항이 금지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이번 전쟁으로 당분간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까지 이라크를 찾아가는 유일한 길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암만을 출발해서 동쪽으로 가면 황량한 요르단 동부 사막지대가 펼쳐진다. 사막 사이로 뚫린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350㎞쯤 달리면 요르단과 이라크 국경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요르단 출국수속과 이라크 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이라크에 입국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은 친절해서 1시간 이상 기다리여 하지만 따뜻한 차까지 대접한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지만 입국수속 때 차를 대접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지루한 이라크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사담 후세인 동상이다. 이라크에서는 큰 거리나 대형건물에는 으레 후세인 동상이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바그다드대학 캠퍼스에도 그의 초상화가 여러 곳에 걸려 있어 후세인 우상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라크에 입국한 후 다시 광활한 사막에 만들어진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달린다. 몇군데 간이 주유소를 제외하고는 변변히 쉴 만한 곳도 없는 사막의 고속도로를 540㎞쯤 달리면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과 만나게 된다. 이 강을 건너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지금까지 사막지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푸른 수풀, 울창하고 우람한 대추야자 나무들. 한눈에 비옥한 땅임을 보여준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신기할 정도이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후 동쪽으로 1시간 남짓 더 달리면 티그리스 강변에 세워진 고도(古都) 바그다드에 도착하게 된다. 이 도시는 762년 사라센의 아바스 왕조가 새 수도로 정한 이래 아랍세계의 중심도시 역할을 해왔고, ‘아라비안 나이트’를 비롯해서 수많은 아랍 설화문학의 무대가 되어왔다. 현재 인구 500만의 이라크 수도로 이번 전쟁에서 태풍의 눈이 되는 곳이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6)]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⑵
                                                                                            [국민일보 2003-03-27 15:32]
 이라크의 전황이 점점 가열되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원래 이라크는 중동 아랍권에서는 군사강국이다. 더구나 이라크군은 1980년대 이란과의 8년전쟁을 통해서 상당한 실전 경험을 축적했다. 1991년 걸프전으로 군장비는 과거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고대 중동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이라크는 결코 과소평가할 상대가 아니다.

 

 또한 걸프전의 패배를 거울삼아(사담 후세인은 이라크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전쟁이라고 자국민들을 세뇌시켰다) 현재 새로운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이라크 사람들은 이번 전쟁을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지하드’(성전)라고 확신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볼때 이번 전투는 단기간에 쉽게 끝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금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있는 이라크는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역사의 중요한 무대 중의 하나이다. 이라크는 한반도 면적의 배나 된다. 국토의 70% 정도는 메마른 사막이나 험한 산악지대여서 사람이 살기 어렵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1은 대단히 비옥하다. 이 지역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 곧 ‘메소포타미아’다.

 

 기름진 땅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이 일어났다. 구약성경에서 ‘시날 평지’(창세기 11장 2절)라고 부르는 이 지역에서 인간들은 나무 열매를 따먹고 강의 물고기를 잡는 수렵단계를 벗어나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농업단계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시날 평지는 비옥한 토양과 수량이 풍부한 두 강이 흐르고 있어 농업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두 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관개사업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등장했고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주전 3000년대에는 시날 평지에 수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고 왕실 행정을 기록할 필요에 따라 문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쐐기문자(설형문자)’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자의 사용은 인류 문명을 선사시대에서 기록을 남기는 역사시대로 전환시켜 주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남부 시날 평지에서 일어난 고대문명을 수메르 문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메르 문명의 중심에 ‘우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이다. 며칠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나시리아’ 근처에 ‘우르’가 위치했었다.

 

 주전 2000년께 수메르 문명은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중심은 ‘우르’였다. 당시 우르의 왕 ‘우르남무’는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법률 조항을 제정했다. ‘우르남무 법전’으로 불리는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최고의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적어도 200년 이상 앞선다.

 

 우르남무 왕의 업적으로 지금까지 우르에 남아 있는 유적은 그가 세운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달의 신(月神)에게 바쳐진 이 거대한 탑은 현재 21m 높이 부분까지 남아 있어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진흙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고 벽돌 사이에 사용한 역청은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의 모습을 추정케 하고 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 가족이 그곳을 떠나 문화적으로 낙후되고 지형적으로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막이 오른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메마른 가나안 땅에서 비옥한 문명도시 ‘우르’로 이주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정반대이다. 인간의 타산적 계산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찬란했던 수메르 문명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못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은 ‘바벨론(바빌로니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바벨론 제1왕조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함무라비 왕(주전 18세기)으로 대표되는 바벨론 제1왕조는 비교적 단명하게 끝나고, 새로운 패권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앗수르(아시리아) 제국이다. 약 800년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절대적 세력으로 군림했던 앗수르 제국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굴종해야 하는 한낱 봉신국가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의 예후가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후, 많은 조공품을 갖고 앗수르 왕에게 가서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이 돌에 부조로 남아 있다. 앗수르 왕궁에서 발굴된 이 역사적 자료는 이스라엘의 41명의 왕들 중에 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며, 이스라엘과 앗수르 제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주전 8세기말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 왕은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했다. 3년에 걸친 포위작전 끝에 사마리아는 함락되었고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제국 세력과 이스라엘간 악연의 역사는 계속된다.

 

 

                                                                              박준서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