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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5)]유월절 테러,성전산,예루살렘

영국신사77 2009. 3. 11. 23:20

    

                    [인터뷰] ‘포연속의 성지’ 연재하는 연세대 박준서 교수

                                             [국민일보 2002-05-03 10:23]

“현재 일어나고 있는 중동문제의 뿌리를 캐어보면 결국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포연 속의 성지’ 연재를 담당할 연세대 박준서 교수(61)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리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역사의 근본 원인을 구약에서부터 찾고 있다. 국내 구약학분야의 최고권위자인 박교수는 따라서 ‘포연 속의 성지’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의 뿌리에서부터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역사 정치 문화 종교 성서지리 등을 모두 아우르는 분석스펙트럼을 통해 풀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현재의 상황을 표면적으로만 보아서는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구약시대부터 시작해서 로마제국,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정복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죽 둘러보고 그 관점에서 오늘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박교수는 특히 1983년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연구 교환교수를 지내면서 1년간 폭탄테러의 현장을 보기도 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을 피부로 느끼면서 중동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박교수는 매년 적어도 한차례 이스라엘을 방문, 이 문제를 집중 연구해왔으며 이번 연재물 ‘포연 속의 성지’는 20년 연구 성과물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박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문제 해결 열쇠는 신뢰 구축에 있다고 주장했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적으로 생각하고 ‘제로섬’ 게임을 하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합니다.1993년 체결된 ‘오슬로 협약’대로만 역사가 진행됐더라면 오늘날 중동에는 평화가 정착됐을 겁니다”

 

그는 “그러나 마음속에 불신과 증오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회담은 시간 낭비가 되었고 협정은 휴지가 되고 말았다”면서 “양측이 함께 ‘공존’해야 할 상대라고 생각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특히 지난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9·11 미테러참사의 원인도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갈등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중동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테러’와의 전쟁도 해결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시편 122편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는 말씀처럼 모든 기독인들이 성지 이스라엘의 평화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박교수는 성경을 보면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기도의 힘으로 움직여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서 오늘날 지구촌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중동문제와 관련, 기독인이라면 깊은 이해와 함께 구체적으로 중보기도를 드려야 할 당위성과 필연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교수는 서울대 법대 및 연세대 신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와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각각 신학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연세대 교학부총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현재 한국구약학회장 한국기독교학회장을 맡고 있다.

 

박교수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해-히브리의 하나님’‘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서적 이해’‘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운동’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 ‘구약개론’‘성지순례’ 등을 통해, 구약학 및 성서지리학의 이해를 증진시킨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한국기독교 학술원이 제정한 ‘제1회 한국 기독교학술상’을 수상했다.또 지난해 ‘십계명 새로 보기’‘구약세계의 이해’‘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를 한꺼번에 출판,왕성한 집필 의욕을 보여주기도 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포연속의 성지 ⑴] 유월절 테러…핏빛 어룩진 출애굽 기념 식탁

                                                                                                                                [국민일보 2002-05-06 10:14]

  지난 2002년 3월27일은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 ‘유월절’이었다.유월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의 날인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일몰시간에 맞추어 시작되는 ‘유월절 식사’이다. 이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자리가 아니다. 엄숙하고 의미있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자리요,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현장이다. 유월절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고, 어린 자녀의 질문으로 유월절 식사의식은 시작된다. 

 

 “오늘의 이 식사는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집안의 어른이 대답한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종이 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해 내셨느니라”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새롭게 되살아난다.

 

 그런데 유월절 식탁의 음식은 성찬이 아니라 의외로 소박하다. 구약 출애굽기의 말씀에 따라서, 식탁에는 반드시 ‘무교병(無酵餠)’이 오른다. 히브리어로 ‘마짜(matza)’라고 불리는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투박하고 딱딱한 빵으로, 출애굽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상기시켜준다. 또 하나 유월절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은 ‘쓴 나물’이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고난의 쓴 경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서 쓴 나물을 먹는 것이다.

 

 유월절 식사는 구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중히 여기는 귀한 전통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도 유월절 식사였다. 

 

 올해 유월절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이스라엘 가정과 식당에서는 유월절 식사준비로 분주했다. 바로 그날, 이스라엘 지중해 해변도시 ‘네탄야’의 한 호텔의 식당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후 7시15분 유월절 식사 의식이 시작되려는 순간, 고막을 터트리는 굉음과 함께, 일순간 식당 안은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검은 긴 코트를 입어 유대인으로 가장한 아랍인 테러범이 고성능 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유월절 식탁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이날 노인과 어린이들을 포함해 26명이 사망했으며, 14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이중에 70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할말을 잃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유월절 식탁이 전부 테러당한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유월절 테러’가 있은지 며칠 후, 또 다른 테러가 이스라엘의 북부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일어났다. 테러범이 목표로 한 식당은 그 이름이 ‘마짜(무교병)’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테러당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더욱 분노했다.

 

 일련의 ‘유월절 테러’는 2000년 9월말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 테러범들이 이스라엘을 목표로 한 테러공격의 일환이었다. 18개월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항거운동 인티파다(Intifada)를 일으켰고, 그 후로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 대응으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이제는 아무도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난 18개월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항거는 주로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됐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은 80회 이상 테러를 자행하였고, 그 결과 46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루살렘에서만도 스무 번 이상의 대형 테러사건이 연이었으며, 그때마다 성도(聖都) 예루살렘 거리는 피로 얼룩졌다.

 

 그런데 그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저질러온 테러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테러 공격 목표가 이스라엘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식당에서 단란하게 식사하는 가족들, 성년의식 잔치자리에 참석한 하객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노약자, 여자, 유아들을 포함하는 민간인들이 테러의 대상이 되어왔고, 이들이 테러의 희생자들이었다.

 

 흔히 테러는 약자의 마지막 무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여 자행되는 무차별적인 테러행위는 어떠한 대의명분으로도 합리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테러행위가 팔레스타인 내 일부 과격한 테러 조직의 소행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테러사건이 터질 때마다 ‘알 악사 순교자 여단(Al Aqsa Martyrs Brigade)이 테러주범 중의 하나로 자주 언론에 언급되어 왔다. ‘알 악사’조직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아라파트’의 직접 지휘권 밑에 있는 무장단체이다. 이들이 테러공격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라파트’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나, 뒤로는 테러를 전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테러공격으로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이스라엘측은 ‘유월절 테러’를 당하자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 이상 테러를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테러범의 본거지로 밀고 들어가 테러범들을 색출 소탕하고 테러조직을 와해시키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2002년 3월29일 이스라엘 군대는 탱크를 앞세우고 요르단강 서안(West Bank) 아랍인 지역을 진격해 들어갔다.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공격 이후 최대의 군사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 국제적 여론은 비등해졌고, 중동지역의 정국은 자욱한 포연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박준서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포연속의 성지 ⑵] 성전산①… 3차대전 예상자 비켜갈 순 없나
                                                                                    [국민일보 2002-05-13 11:05]

  오늘날 지구상에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스라엘이다. 전세계 19억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고향인 성지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도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더욱 위험한 곳이며, 예루살렘에서도 ‘성전산(聖殿山)’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성전산’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곳인가? 성전산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성전을 세운 데서 연유한다.

 

 본래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지점 유다 산악지역에 위치했던 난공불락의 천연적 요새였다. 주전 1000년께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의 제일 높은 지역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聖殿)을 건축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이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그곳은 단순히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며 종교적 성도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던 솔로몬 성전은 건축된지 4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란의 와중에 소실되고 말았다.

 

 주전 580년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도성 전체가 불에 타는 혼란 가운데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 이로써 유다왕국은 멸망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 그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결국 몰락했다. 귀향의 꿈을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을 모아 성전산 위에 새 성전을 다시 세웠다(주전 515년께). 이것이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두번째 성전은 나라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일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제2성전’은 악명 높은 헤롯왕 때 크게 확장되었다. 헤롯왕은 폭정으로 멀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2성전을 크게 증축했고, 이러한 대역사의 일환으로 성전산 지역에 거대한 축대를 쌓았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헤롯왕이 확장공사를 마친 성전이었다.

 

 서기 60년대말 유대인들은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항거해서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군대는 무력으로 유대인 반란을 진압했고, 궁지에 몰린 반란군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피해 들어갔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군은 끝까지 대항하는 유대인을 소탕하기 위해 성전을 향해 횃불을 던졌고, 마침내 성전은 화염에 휩싸여 소멸되고 말았다(서기 70년). 이렇게 두번째 성전도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산은 일찍이 ‘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이 서있던 거룩한 곳으로, 오늘날에도 전세계 유대인들에게는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이 없는 이스라엘 땅은 생각할 수가 없고, 성전산이 없는 예루살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늘날 성전산 위에 성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으나, 2000년전 헤롯왕 때 쌓았던 성전산 축대 부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높이 18m, 길이 60m에 이르는 이곳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지난 긴 세월동안 나라 없는 유대인들이 눈물로 망국의 한을 달래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곳으로 성전산과 함께 유대인들의 성지중 성지이다.

 

 서기 638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변혁이 일어난 해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이 성지를 정복한 것이다. 이때부터 성지 이스라엘 땅의 주인은 서서히 아랍인들로 바뀌게 되었다.

 

 아랍인들이 성지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그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성전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성전산이 이슬람교의 성지로 탐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승천하기 전 백마를 타고 밤에 성전산까지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비한 백마를 타고 승천했다는 것이다. 성전산은 마호메트가 승천한 장소로서 이슬람교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

 

 

                 성전산 위에 이슬람교 대사원인 ‘바위의 돔'과 '알 아크사 사원 '을 건립

 

 아랍인들은 그들의 성지인 성전산 위에 2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다. 그중 하나는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마지막 밟았다는 큰 바위를 중심으로 세운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 중심 돔 부분을 순금으로 씌워 금빛 찬란한 이 사원은 이슬람 건축 예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성전산 위의 두번째 사원은 마호메트가 밤에 백마를 타고 왔다는 지점에 세운 '알 아크사 사원 (Al Aqsa Mosque)'이다. 이 사원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이슬람교 사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사원이다. 전세계 이슬람 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두 사원이 서있는 성전산은 메카·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가 된다.

 

 이렇게 성전산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지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 전세계인들이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동사태’도, 그 발단은 20개월 전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성전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계속)

 

 

 

        [포연속의 성지 ⑶] 성전산 ② 운명의 날 2000년 9월 28일
                                                                     [국민일보 2002-05-20 10:04]
 예루살렘의 이른 아침은 깊은 인상을 마음속에 안겨 준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눈부신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사이프러스 나무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다윗왕도 솔로몬왕도 맛보았을 예루살렘의 향취에 가슴은 감격으로 가득 찬다.

 

 지금부터 20개월전, 2000년 9월28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에 아침이 밝았다. 그 날 아침 7시30분 당시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당의 당수 ‘아리엘 샤론’이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랐다. 그는 그 곳에 약 15분간 머물렀다. 이른 아침 잠깐동안 이루어진 그의 성전산 방문이 이스라엘 정치에 태풍을 몰아오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래로 최악의 중동사태를 불러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마치 시한폭탄 뇌관에 불을 붙인 듯,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흥분한 그들은 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총을 쏘며 저지하는 이스라엘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의 대규모 항거운동(인티파다)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티파다’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측 쌍방에 약 2,000여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 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동안 사태는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스라엘 야당 당수의 성전산 방문이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 문제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에게 성전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성전산’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던 자리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오늘날도 그 곳 위로는 비행기조차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게 여긴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산은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에게도 3대 성지가 된다. 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가 지상의 삶을 끝내고, 백마를 타고 승천한 장소가 바로 그 곳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았던 마지막 발자욱의 흔적까지 그 곳의 바위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고, 그 곳을 ‘하람 에스 샤리프’라고 불러왔다.‘ 고귀한 성역(聖域)’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랍인들이 그 곳을 성지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각각 다르고, 부르는 이름조차 같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지역이 서로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 중의 성지라는 점이다.

 

 그러면 성전산은 누구의 땅이라고 해야 옳은가? 이것은 3000년의 긴 역사와 뒤엉켜져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원주민으로부터 훗날 성전 건축의 대지가 될 땅을 매입했다. 다윗왕이 지불한 땅 값이 구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하권에는 은 50세겔이라고 되어 있다(삼하 24:24). 그런데 역대기에는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인 금 600세겔로 기록되어 있어 값의 차이가 엄청나다(대상 21:25).

 

 땅값으로 지불한 돈의 정확한 액수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여하튼 다윗왕은 원주민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했고,  그 장소 위에 다윗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왕은 성전을 건축했다. 그곳이 바로 ‘성전산’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다윗왕이 성전산 지역을 돈을 주고 샀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윗왕의 후손이 되는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산의 소유권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기록이 오늘날 소유권 분쟁 해결에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고, 아랍인들은 그런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

 

 서기 7세기 중엽,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그 후로 줄곧 십자군 시대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성전산 지역의 주인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 지금부터 35년전인 1967년 소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측은 이 전쟁에서 성전산 지역 ‘탈환’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가 예루살렘 전투에 투입되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성전산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이 때 이스라엘 병사들의 얼굴은 땀과 감격의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장장 1300년만에 유대인들이 성전산을 다시 차지한 것이다. 이스라엘측은 즉시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국토에 합병(合倂)시킨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측의 일방적인 선언일 뿐, 지금까지도 성전산 지역은 여전히 아랍인들의 관할권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극단적인 과격파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성전산 위에 있는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폭파시키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22개 아랍동맹국가들은 물론이요, 이슬람국가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57개 국가들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에 보복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이스라엘측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가상의 시나리오만은 아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랍측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야당 당수 ‘샤론’은 경호원과 세계 언론에 둘러싸여 방문한 것이다. 그의 ‘전시용’ 행적은 그동안 비교적 잠잠했던 중동 사태에 불을 붙였고, 혼란의 극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나 이 일은 ‘샤론’이 이스라엘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전산 방문은 정치인 ‘샤론’의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행보였던 것이다. 

 

                                                                                                                                       (계속)

 

 

                                                                                                박준서<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포연속의 성지 ⑷]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평화―독립 위해 절실했던 악수

                                                                                                      [국민일보 2002-05-26 16:47]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역사에 오래 남을 업적을 이루기를 원한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민주당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8년간 백악관의 주인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임기 후반부에는 대통령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탄핵 일보 직전까지 갔고, 그런 일들로 그의 업적은 거의 가려지게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를 반년 남짓 남겨놓고 세계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추락한 그의 명예를 일으켜 세우는 길이었고 역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는 길이기도 했다.

 

 원래 중동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클린턴 대통령은 그의 선임자 카터 대통령의 업적을 머리에 떠올렸다. 카터는 대통령으로서 별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더구나 임기 말년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을 구해내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남긴 채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카터는 한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 공로로 역사에 빛난 인물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은 당시 이스라엘 베긴 총리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워싱턴 근교의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모았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숙적관계였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정상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다. 카터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면서 끈질긴 중재와 설득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협정을 맺기로 합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22개 아랍국 중에서 첫번째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나라가 됐다.

 

 카터 대통령이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 사이에 서서 특유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도 역사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으며, 카터는 현대사에 빛나는 평화의 대통령으로 세계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불명예를 씻고 역사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크게 기록되기를 염원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7월11일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들였다. 22년전 카터 대통령이 그곳에서 이루었던 외교적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시작된 ‘캠프 데이비드 평화회담’은 7월25일까지 장장 2주간이나 계속되었다.

 

 회담에 참석하면서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각기 나름대로 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는 그보다 1년 전에 있었던 총선에서 이스라엘 국민에게 총리가 되면 1년안에 팔레스타인과 평화관계를 이뤄내겠다고 공언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정략적인 발언이 아니라 바라크 자신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바라크는 17세에 군에 입대하여 평생 군인으로서 수많은 무용담을 남기면서 이스라엘군의 최고위직까지 오른 가히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는 전쟁이나 폭력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확신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만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직에 오른 후 1년이 지났지만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라크 총리로선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라파트 수반에게도 그 회담은 중요했다. 팔레스타인들의 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일이다. 아라파트 의장은 2000년 9월13일을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로 정해놓고, 그 날 독립을 선언할 것이라고 공포함으로써 팔레스타인들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켰다. 역사적인 9월13일을 두달가량 남겨놓은 시점에서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아라파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측과 어떤 형태로든지 평화 정착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바라크 수상은 한 가지 큰 오산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측의 양보를 토대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아라파트 수반은 고맙게 생각하고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라파트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결정적인 실수였다.

 

 아라파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으로서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중동의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 후 오늘날까지 무려 38년동안 수많은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술수와 노회함, 그리고 위기상황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려놓는 절묘한 그의 위기관리기술은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PLO 의장으로 건재했던 38년동안, 이스라엘에는 무려 11명의 총리가 교체되었고 미국은 8명의 대통령이 백악관을 드나들었다. 바라크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고 정치에는 초년생이었다. 수많은 이스라엘 총리와 미국 대통령을 상대해온 아라파트의 맞수가 될 수 없었다.

 

 이 회담에서 바라크는 이스라엘에서는 논의가 금기시돼 있는 민감한 문제를 아라파트에게 제시하고 말았다. 그것은 ‘예루살렘 분할안’이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분할해서 공유하자는 안이었다. 바라크가 이 안을 제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총리직은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캠프 데이비드 협상 뒤인 그해 9월28일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라가 ‘예루살렘 분할 절대 불가(不可)’를 온몸으로 항변했던 샤론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돼있다.

 

 

                                                                                           박준서<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⑸]

                      예루살렘...3000년 이어지는 수난의 역사

 

 세계의 수많은 도시 가운데 종교적으로 가장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곳은 예루살렘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지구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15∼16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보면 으레 지구의 중심에 예루살렘을 그려놓았다.

 오늘날도 전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지상의 어느 곳보다 가장 거룩하고 특별한 곳으로 생각한다. 19억이 넘는 기독교인들, 12억에 달하는 모슬렘(이슬람교 교도)들, 그리고 1,60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한결같이 예루살렘을 그들 종교에 있어서 성도(聖都) 중의 특별한 성도로 여긴다.

 주전 6세기초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1년반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정복자들은 불을 질러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400년동안 계속되었던 유다왕국은 막을 내렸다(주전 587년께).

 이렇게 유다왕국이 몰락하는 와중에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의 시작일 뿐이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제국들과 군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희랍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십자군 마멜루크 오스만튀르크 영국 등 세계를 주름잡던 세력들은 예루살렘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의 족적은 지금도 예루살렘 도처에 남아 있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거를 지나온 것처럼, 지리적으로도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다.

 우선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쪽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이다. 면적으로는 동예루살렘이 약 70㎢이며, 서예루살렘은 이보다 작은 45㎢ 정도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일어났던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동예루살렘은 아랍 사람들이,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할하는 구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동예루살렘은 소위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의 일부가 되었고,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동서로 확연히 분할되고 서로 왕래조차 금지된 상태가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 예루살렘이며,

                                성전산이 있는 예루살렘 전체의 핵심이 되는 '구 예루살렘’


 동과 서로 구분된 예루살렘에는, 제3의 구역이 되는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이 있다. 구 예루살렘이야말로 예루살렘 전체에서 그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오랜 역사의 묵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이다.

 구 예루살렘은 높이가 14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도(古都) 예루살렘의 풍모를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벽은 3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서는,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성벽은 지금으로부터 약 460년전이 되는 1540년 오스만튀르크의 술레이만 황제 때 축성된 것으로, 성의 총 길이는 4㎞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예루살렘의 면적은 1㎢밖에 되지 않아, 오늘날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 예루살렘으로, 그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졌던 역사의 무대이다. 20개월전 지금은 이스라엘 총리가 된 샤론의 방문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성전산도 구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구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동 예루살렘에 속해 있어, 오늘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지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왜 예루살렘이 오늘날 중동문제 태풍의 핵이 되는지를 살펴보겠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동과 서로 분리되어 있어, 이스라엘의 주권은 서예루살렘 지역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염원은 동서 예루살렘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1967년 ‘6일전쟁’(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측의 제일 목표는 동예루살렘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6일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승으로 끝났고, 이스라엘측은 즉시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국토에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동예루살렘에 ‘길로’‘라못’과 같은 대규모 단위의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예루살렘에 들어가 살게 했다.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 갈등의 요인이 되었고, 결국 1980년 유엔 총회는 이스라엘에 6일전쟁에서 점령한 지역으로부터 모두 철수하라고 결의했다. 이 유엔결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그곳으로부터 철수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스라엘 의회는 즉각 동서 예루살렘을 합한 전체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포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측의 입장은 지금도 변함없이 고수되고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인들의 꿈은 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요, 나아가 앞으로 수립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는 동예루살렘이라고 확정해놓고 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입장도 확고부동하다.


 예루살렘 문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화합과 평화공존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