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연속의 성지 ⑴] 유월절 테러…핏빛 어룩진 출애굽 기념 식탁 | |||||
[국민일보 2002-05-06 10:14] | |||||
지난 2002년 3월27일은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 ‘유월절’이었다.유월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의 날인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일몰시간에 맞추어 시작되는 ‘유월절 식사’이다. 이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자리가 아니다. 엄숙하고 의미있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자리요,이스라엘 신앙이 전승되는 교육의 현장이다. 유월절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고, 어린 자녀의 질문으로 유월절 식사의식은 시작된다.
“오늘의 이 식사는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집안의 어른이 대답한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종이 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해 내셨느니라”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새롭게 되살아난다.
그런데 유월절 식탁의 음식은 성찬이 아니라 의외로 소박하다. 구약 출애굽기의 말씀에 따라서, 식탁에는 반드시 ‘무교병(無酵餠)’이 오른다. 히브리어로 ‘마짜(matza)’라고 불리는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투박하고 딱딱한 빵으로, 출애굽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상기시켜준다. 또 하나 유월절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은 ‘쓴 나물’이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고난의 쓴 경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서 쓴 나물을 먹는 것이다.
유월절 식사는 구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중히 여기는 귀한 전통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도 유월절 식사였다.
올해 유월절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이스라엘 가정과 식당에서는 유월절 식사준비로 분주했다. 바로 그날, 이스라엘 지중해 해변도시 ‘네탄야’의 한 호텔의 식당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후 7시15분 유월절 식사 의식이 시작되려는 순간, 고막을 터트리는 굉음과 함께, 일순간 식당 안은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검은 긴 코트를 입어 유대인으로 가장한 아랍인 테러범이 고성능 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유월절 식탁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이날 노인과 어린이들을 포함해 26명이 사망했으며, 14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이중에 70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할말을 잃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유월절 식탁이 전부 테러당한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유월절 테러’가 있은지 며칠 후, 또 다른 테러가 이스라엘의 북부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일어났다. 테러범이 목표로 한 식당은 그 이름이 ‘마짜(무교병)’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테러당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더욱 분노했다.
일련의 ‘유월절 테러’는 2000년 9월말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 테러범들이 이스라엘을 목표로 한 테러공격의 일환이었다. 18개월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항거운동 인티파다(Intifada)를 일으켰고, 그 후로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 대응으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이제는 아무도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난 18개월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항거는 주로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됐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은 80회 이상 테러를 자행하였고, 그 결과 46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예루살렘에서만도 스무 번 이상의 대형 테러사건이 연이었으며, 그때마다 성도(聖都) 예루살렘 거리는 피로 얼룩졌다.
그런데 그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저질러온 테러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테러 공격 목표가 이스라엘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식당에서 단란하게 식사하는 가족들, 성년의식 잔치자리에 참석한 하객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노약자, 여자, 유아들을 포함하는 민간인들이 테러의 대상이 되어왔고, 이들이 테러의 희생자들이었다.
흔히 테러는 약자의 마지막 무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여 자행되는 무차별적인 테러행위는 어떠한 대의명분으로도 합리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는,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테러행위가 팔레스타인 내 일부 과격한 테러 조직의 소행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테러사건이 터질 때마다 ‘알 악사 순교자 여단(Al Aqsa Martyrs Brigade)이 테러주범 중의 하나로 자주 언론에 언급되어 왔다. ‘알 악사’조직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아라파트’의 직접 지휘권 밑에 있는 무장단체이다. 이들이 테러공격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라파트’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나, 뒤로는 테러를 전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테러공격으로 시달릴 대로 시달려온 이스라엘측은 ‘유월절 테러’를 당하자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 이상 테러를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테러범의 본거지로 밀고 들어가 테러범들을 색출 소탕하고 테러조직을 와해시키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2002년 3월29일 이스라엘 군대는 탱크를 앞세우고 요르단강 서안(West Bank) 아랍인 지역을 진격해 들어갔다.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공격 이후 최대의 군사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 국제적 여론은 비등해졌고, 중동지역의 정국은 자욱한 포연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박준서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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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연속의 성지 ⑵] 성전산①… 3차대전 예상자 비켜갈 순 없나 | |
[국민일보 2002-05-13 11:05] | |
오늘날 지구상에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스라엘이다. 전세계 19억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고향인 성지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도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더욱 위험한 곳이며, 예루살렘에서도 ‘성전산(聖殿山)’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성전산’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곳인가? 성전산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성전을 세운 데서 연유한다.
본래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지점 유다 산악지역에 위치했던 난공불락의 천연적 요새였다. 주전 1000년께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의 제일 높은 지역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聖殿)을 건축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이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그곳은 단순히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며 종교적 성도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던 솔로몬 성전은 건축된지 4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란의 와중에 소실되고 말았다.
주전 580년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도성 전체가 불에 타는 혼란 가운데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 이로써 유다왕국은 멸망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 그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결국 몰락했다. 귀향의 꿈을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을 모아 성전산 위에 새 성전을 다시 세웠다(주전 515년께). 이것이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두번째 성전은 나라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일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제2성전’은 악명 높은 헤롯왕 때 크게 확장되었다. 헤롯왕은 폭정으로 멀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2성전을 크게 증축했고, 이러한 대역사의 일환으로 성전산 지역에 거대한 축대를 쌓았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헤롯왕이 확장공사를 마친 성전이었다.
서기 60년대말 유대인들은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항거해서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군대는 무력으로 유대인 반란을 진압했고, 궁지에 몰린 반란군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피해 들어갔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군은 끝까지 대항하는 유대인을 소탕하기 위해 성전을 향해 횃불을 던졌고, 마침내 성전은 화염에 휩싸여 소멸되고 말았다(서기 70년). 이렇게 두번째 성전도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산은 일찍이 ‘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이 서있던 거룩한 곳으로, 오늘날에도 전세계 유대인들에게는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이 없는 이스라엘 땅은 생각할 수가 없고, 성전산이 없는 예루살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늘날 성전산 위에 성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으나, 2000년전 헤롯왕 때 쌓았던 성전산 축대 부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높이 18m, 길이 60m에 이르는 이곳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지난 긴 세월동안 나라 없는 유대인들이 눈물로 망국의 한을 달래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곳으로 성전산과 함께 유대인들의 성지중 성지이다.
서기 638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변혁이 일어난 해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이 성지를 정복한 것이다. 이때부터 성지 이스라엘 땅의 주인은 서서히 아랍인들로 바뀌게 되었다.
아랍인들이 성지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그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성전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성전산이 이슬람교의 성지로 탐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승천하기 전 백마를 타고 밤에 성전산까지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비한 백마를 타고 승천했다는 것이다. 성전산은 마호메트가 승천한 장소로서 이슬람교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
성전산 위에 이슬람교 대사원인 ‘바위의 돔'과 '알 아크사 사원 '을 건립
아랍인들은 그들의 성지인 성전산 위에 2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다. 그중 하나는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마지막 밟았다는 큰 바위를 중심으로 세운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 중심 돔 부분을 순금으로 씌워 금빛 찬란한 이 사원은 이슬람 건축 예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성전산 위의 두번째 사원은 마호메트가 밤에 백마를 타고 왔다는 지점에 세운 '알 아크사 사원 (Al Aqsa Mosque)'이다. 이 사원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이슬람교 사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사원이다. 전세계 이슬람 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두 사원이 서있는 성전산은 메카·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가 된다.
이렇게 성전산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지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 전세계인들이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동사태’도, 그 발단은 20개월 전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성전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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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연속의 성지 ⑷]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평화―독립 위해 절실했던 악수 | ||
[국민일보 2002-05-26 16:47] | ||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를 반년 남짓 남겨놓고 세계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추락한 그의 명예를 일으켜 세우는 길이었고 역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는 길이기도 했다.
원래 중동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클린턴 대통령은 그의 선임자 카터 대통령의 업적을 머리에 떠올렸다. 카터는 대통령으로서 별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더구나 임기 말년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을 구해내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남긴 채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카터는 한 가지 업적을 남겼고 그 공로로 역사에 빛난 인물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은 당시 이스라엘 베긴 총리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워싱턴 근교의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모았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숙적관계였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정상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다. 카터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면서 끈질긴 중재와 설득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협정을 맺기로 합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22개 아랍국 중에서 첫번째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나라가 됐다.
카터 대통령이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 사이에 서서 특유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도 역사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으며, 카터는 현대사에 빛나는 평화의 대통령으로 세계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불명예를 씻고 역사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크게 기록되기를 염원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7월11일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들였다. 22년전 카터 대통령이 그곳에서 이루었던 외교적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시작된 ‘캠프 데이비드 평화회담’은 7월25일까지 장장 2주간이나 계속되었다.
회담에 참석하면서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각기 나름대로 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는 그보다 1년 전에 있었던 총선에서 이스라엘 국민에게 총리가 되면 1년안에 팔레스타인과 평화관계를 이뤄내겠다고 공언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정략적인 발언이 아니라 바라크 자신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바라크는 17세에 군에 입대하여 평생 군인으로서 수많은 무용담을 남기면서 이스라엘군의 최고위직까지 오른 가히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는 전쟁이나 폭력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확신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만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직에 오른 후 1년이 지났지만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라크 총리로선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라파트 수반에게도 그 회담은 중요했다. 팔레스타인들의 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일이다. 아라파트 의장은 2000년 9월13일을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로 정해놓고, 그 날 독립을 선언할 것이라고 공포함으로써 팔레스타인들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켰다. 역사적인 9월13일을 두달가량 남겨놓은 시점에서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아라파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측과 어떤 형태로든지 평화 정착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바라크 수상은 한 가지 큰 오산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측의 양보를 토대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아라파트 수반은 고맙게 생각하고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라파트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결정적인 실수였다.
아라파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으로서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중동의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그 후 오늘날까지 무려 38년동안 수많은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술수와 노회함, 그리고 위기상황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려놓는 절묘한 그의 위기관리기술은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PLO 의장으로 건재했던 38년동안, 이스라엘에는 무려 11명의 총리가 교체되었고 미국은 8명의 대통령이 백악관을 드나들었다. 바라크는 군인으로 평생을 살았고 정치에는 초년생이었다. 수많은 이스라엘 총리와 미국 대통령을 상대해온 아라파트의 맞수가 될 수 없었다.
이 회담에서 바라크는 이스라엘에서는 논의가 금기시돼 있는 민감한 문제를 아라파트에게 제시하고 말았다. 그것은 ‘예루살렘 분할안’이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분할해서 공유하자는 안이었다. 바라크가 이 안을 제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총리직은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캠프 데이비드 협상 뒤인 그해 9월28일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라가 ‘예루살렘 분할 절대 불가(不可)’를 온몸으로 항변했던 샤론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돼있다.
박준서<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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