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32)~(35)]

영국신사77 2009. 3. 11. 23:36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32)] 십자군⑴

 4세기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직후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황제의 어머니 성(聖) 헬레나는 곧 성지 순례의 길에 올랐다.

 

 황제의 어머니라고 해도 당시에 성지 이스라엘을 찾아가는 것은 멀고도 힘든 일이었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헬레나가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성지 이스라엘 땅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성지 순례는 누구나 다녀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비가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많은 날을 배 안에서 시달려야 했고 때로는 위험한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성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옷에 성지순례의 표지를 달고 다녔고 사람들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630년대 이후 성지는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모슬렘)들의 땅이 되고 말았다. 무슬림 아랍인들이 성지를 정복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성지의 새 주인이 된 무슬림 아랍인들은 대체로 유럽으로부터 오는 기독교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지를 관할하던 무슬림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상황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무슬림 아랍인들이 성지를 차지한지 400년이 지난 서기 1030년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시고 부활한지 꼭 1000년이 되는 때였다. 유럽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때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지 소식은 유럽인들을 분노케 하였다.

 당시 성지 이스라엘은 애굽의 관할하에 있었고 애굽을 통치하던 칼리프 하킴(Caliph Hakim)은 극도의 반(反)기독교적 인물이었다. 그는 성지순례자들의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위에 세운 ‘성묘교회’까지도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성묘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의 상징이었고 성지 순례의 최종 목적지가 되는 곳이었다. 칼리프 하킴의 반기독교적 행태는 유럽 기독교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s)족의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또 다른 존재가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s)족으로서 원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으나 900년대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 이슬람 세계권으로 이동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대단히 호전적인 이들은 서진(西進)을 계속하여 아르메니아 지역을 정복하고 소아시아 지역(오늘날 터키)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중심무대였고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자기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셀주크투르크족을 좌시할 수 없었다. 서기 1071년 두 세력은 마침내 충돌했고 그 결과는 셀주크투르크의 일방적 승리였다.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했다.

                                                              십자군 운동’의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당시 로마교회의 교황인 우르반 2세(UrbanⅡ)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우르반 2세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막고 기독교도가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은 ‘십자군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럽세계는 교황의 호소에 ‘하나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구호로 적극 호응했다. 이렇게 해서 1096년 십자군(Crusades)이 결성되었고, 장장 200년간 계속된 8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은 중세 유럽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운동 
 1096년 가을 제1차 십자군이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병력의 규모는 기사(Knight) 2000명 내외, 보병 1만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유럽을 떠난 십자군이 육로로 예루살렘까지 도달하는 데는 거의 3년의 시간이 걸렸다. 1099년 6월 예루살렘 성문에 다다른 십자군은 5주간에 걸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마침내 한 무리의 십자군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가 예루살렘 성문을 열었다. 성밖에 진을 치고 있던 십자군들은 밀물처럼 예루살렘 성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때가 1099년 7월이었다. 이로써 무슬림이 성지를 정복한지 460년만에 크리스천 군대인 십자군이 이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였다.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의 대학살
  그런데 승리에 도취한 십자군은 한 가지 큰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이 그곳에 살고 있던 무슬림 아랍인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한 것이다.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십자군의 대학살은 십자군 운동에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슬람 교도들에게 기독교는 관용과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잔인한 종교로 각인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랍세계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을 세웠고 첫번째 왕으로는 십자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프랑스 귀족 고드프리(Godfrey)가 선출되었다. 그는 왕의 호칭을 사양하고 ‘성묘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로 만족했다.

 1년 뒤 고드프리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볼드윈(Baldwin) 1세는 베들레헴의 ‘예수님탄생교회’에서 대관식을 갖고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성지 이스라엘에 기독교 왕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은 100년의 역사도 지속하지 못한 채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슬람 세계의 걸출한 군사적 지도자인 살라딘(Saladin)이 등장한 것이다.

 

                                                                                                         <국민일보>

                                                                                                                    박준서(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

 

 

 

                [포연속의 성지(33)―십자군 ②] 살라딘의 참패…‘예루살렘 왕국’막 내려

 서기 11세기가 끝날 무렵 십자군 운동은 분명한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날로 확대되어가는 이슬람 종교 세력을 막고 성지 이스라엘을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탈환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초기의 십자군 운동은 성공적이었다.

 1099년 십자군은 성지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기까지 했다. 역사상 최초로 이스라엘 땅에 ‘기독교 왕국’이 세워진 것이었다.

 십자군의 진격 앞에 팔레스틴 땅과 예루살렘을 고스란히 내어준 이슬람권은 이상하게도 즉각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당시 팔레스틴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이집트,셀주크 투르크 등)은 자기들의 내부적 상황 때문에 십자군과 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또한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던 이슬람 제국의 ‘압바스’ 왕조는 십자군 운동을 이슬람 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이나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이스라엘 땅을 십자군이 장악한지 70년이 지난 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 걸출한 인물 살라딘(Saladin)이 등장한 것이다. 살라딘은 26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던 ‘파티마 왕조’를 끝장내고 새로운 ‘아유브 왕조’를 시작한 당대를 풍미하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장악했으나 그의 고향은 오늘날 이라크의 ‘티크리트’(Tikrit) 지역이었다. 티크리트는 최근 이라크 전쟁 때 언론에 자주 보도된 사담 후세인의 고향이다. 사담 후세인이 자기 고향출신인 살라딘을 그의 모델인물로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최고 지도자인 술탄(Sultan)의 지위를 공고히 한 후, 곧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천부적인 군사 전략가였던 살라딘은 먼저 북부 아프리카 전역과 시리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지는 십자군에게 빼앗긴 팔레스틴 땅이었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팔레스틴 탈환 공략에 나섰다. 우선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세워진 요새 도성 디베리야(Tiberia)를 공격했다. 당시 십자군은 디베리야로부터 50㎞쯤 떨어진 세포리스(Sepphoris)에 주둔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당시 십자군 왕 가이(Guy)는 살라딘의 디베리야 공격이 십자군 군대를 끌어내기 위한 계략이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공격당하는 디베리야를 구출하기 위해 2만 병력을 출동시켰다.

 7월의 이스라엘 땅은 온 땅이 불볕더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무더운 계절이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십자군 병사들은 더위와 싸우며 행진하던 중 디베리야에 조금 못 미쳐 ‘하틴’(Hattin 또는 Hittin) 산 기슭에 도달했다. 이들은 더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매복하고 있던 살라딘의 군대는 십자군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건조한 날씨에 산불은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더위와 기갈로 지쳐있던 십자군을 엄습했다. 날센 검을 갖고 날렵하게 공격해오는 살라딘의 군대 앞에서 십자군은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한 채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살라딘의 아들 알리(Ali)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나는 승리에 기뻐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다! 그러나 아버지(살라딘)는 나에게 말씀했다. ‘조용히 해라. 십자군의 붉은 천막이 무너지기까지는 아직 적들을 다 무찌른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을 할 때 십자군의 붉은 천막이 무너져 내렸다.”

 여기서 붉은 천막이란 십자군 ‘가이’ 왕의 천막을 말한다. 발빠른 살라딘의 병사들은 붉은 천막을 무너뜨렸고 십자군 왕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하틴 전투’로 불리는 이 역사적 전투에서 십자군은 참패를 당했고 이 참패는 십자군들에게 만회할 수 없는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하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살라딘은 최종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다. 왕이 포로로 잡힌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살라딘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승리로 성지에 세웠던 ‘예루살렘 왕국’은 꼭 88년간 존속하고 짧은 역사의 막을 내렸다. 이때가 1187년 10월이었다. 이 해는 십자군 역사에서 치욕의 해였다. 그후 1세기동안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로 끝이 났다. ‘하틴 전투’의 패배 이후 십자군의 영광의 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살라딘은 십자군에 치명적 패배를 안겨주었고 십자군 운동을 실패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패자에게 관대하고 관용을 베푼 도량이 큰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십자군 시대의 인물 중 가장 많은 일화(逸話)를 남기었다.

 살라딘이 오늘날 요르단 ‘케락’(Kerak)에 남아 있는 십자군 성채를 공격할 때 성채 안에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다는 전령의 말을 듣고 공격을 며칠간 멈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특히 살라딘과 제3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서로가 상대방이 큰 인물임을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꽃피웠던 ‘기사도’ 정신은 지금도 미담으로 전해진다. 리처드 왕이 십자군 원정 중 열병에 걸렸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살라딘은 부하들을 시켜 ‘헐몬산’의 눈을 퍼서 녹지 않게 정성껏 가져다가 리처드 왕에게 전했다고 한다. 살라딘은 십자군의 최대의 적이었으나 인간미 있는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국민일보>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34)] 천혜의 요새 ‘악고’ 서 100년간 항쟁

 

1187년 십자군이 ‘하틴 전투’에서 참패하고 예루살렘을 무슬림(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소식은 유럽에 급히 전해졌다.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유럽세계는 다시 한번 새로운 십자군을 결성하였다. 이것이 제3차 십자군으로 십자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또한 십자군을 이끌기 위해 나선 지도자들도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당시 유럽의 최강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드릭 1세를 필두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 등이었다.

 그러나 3차 십자군은 성지 이스라엘에 도착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불상사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붉은 수염의 황제, 그래서 ‘바바로사’라는 별명이 붙은 프레드릭 황제는 독일의 대군을 이끌고 성지를 향해 행군하던 중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하천을 건너게 되었다. 물은 깊지 않았으나 물살이 빠른 시내를 건너다 황제를 태운 말이 발을 헛디뎌 졸지에 황제가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들이 손쓸 틈도 없이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황제는 급류에 휘말려 익사하고 말았다. 참으로 어이없이 황제가 하천에 빠져죽고 만 것이다.

 망연자실한 독일 십자군들은 행군을 중단하고 기수를 돌렸다. 그 결과 성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십자군의 규모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 십자군들은 성지에 도착하였으나 영국왕과 프랑스왕의 관계는 출발 전부터 원만하지 못했다.

 영국왕과 미묘한 대립관계에 있던 프랑스왕은 예루살렘 공격을 목전에 두고 군대를 빼내어 귀국해 버렸다. 유럽을 출발할 때의 의기충천했던 기상은 모두 사라지고 적전(敵前)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혼자 남게 된 영국의 ‘사자왕’은 자신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싸움을 포기했다.그 대신 예루살렘의 새 주인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결과 리처드 왕은 유럽의 성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 정도 성과라도 거둔 데는 당시 무슬림의 영웅 살라딘과 십자군 ‘사자왕’ 사이의 ‘인간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두 사람은 대적관계였으나 서로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고 기품있는 기사도를 보여주었다.

                                 십자군 운동의 중심도시가 된 악고(Acco,Acre)
 군사적으로 제3차 십자군이 거둔 유일한 전과는 악고(Acco,Acre)를 무슬림들로부터 다시 탈환한 것이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무슬림들에게 빼앗긴 후 그들은 예루살렘을 대신할 새로운 십자군의 거점이 필요했다. 십자군이 택한 곳은 지중해 해안의 천혜의 항구도시 악고였다. 제3차 십자군이 악고를 회복한 후 100년동안 그곳은 십자군 운동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유럽으로부터 십자군을 싣고 온 배들이 닻을 내린 항구가 악고였고 먼 뱃길에 지친 십자군들이 첫 발을 내디딘 곳 또한 악고였다.

지리적으로 악고는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선에 있는 항구들 중에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북쪽의 페니키아(성경의 두로·시돈 지방,오늘날의 레바논)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사실 악고를 항구도시로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도 페니키아인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주전 2000년부터 배를 만들고 항해기술을 익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다.

 구약 사사기를 보면 악고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아셀’ 지파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그곳의 방위가 워낙 든든해서 아셀 지파가 쉽게 정복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삿 1:31). 신약 사도행전 기록에는 사도 바울이 세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페니키아 지역을 지나 ‘돌레마이’(Ptolemais)에 도착해서 하루를 머물렀다고 한다(행 21:7). 사도 바울이 하루를 지냈던 ‘돌레마이’가 바로 ‘악고’이다. 주전 2세기 희랍시대 때 악고는 돌레마이라고 불렸다. 당시 이스라엘 땅을 장악했던 희랍의 통치자 프톨레미(Ptolemy) 왕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역사적으로 악고는 나폴레옹에게 큰 실패를 안겨준 곳으로 유명하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중해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집트 정복을 마친 나폴레옹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지중해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는 해로를 포기하고 육로를 택했다. 이집트를 출발한 나폴레옹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북상했다. 악고까지 온 나폴레옹은 그곳을 지나기 위해 악고를 공격했다. 여러번 공격을 시도했으나 명장 나폴레옹으로서도 악고를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불가능은 없다”고 호언하던 나폴레옹이었으나 악고 함락에 실패하고 결국 북진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이 악고에서 실패의 쓴 잔을 마시기 꼭 500년전, 십자군들도 그곳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1291년은 십자군 역사에서 잊지 못할 비극적인 해이다. 그 해 5월5일 이집트의 술탄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는 십자군의 최후의 보루인 악고를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대형 투석기가 대거 동원된 55일간의 공격 끝에 악고의 견고한 성벽은 뚫렸고 술탄의 군대가 물밀듯 밀고들어가 악고를 함락시켰다. 악고를 점령한 무슬림들은 대항하던 십자군 기사들과 병사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부녀자들을 다마스쿠스(다메섹)의 노예시장으로 끌고 갔다.

 무슬림들로부터 성지 탈환을 꿈꾸며 ‘하나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구호 아래 200년간 계속됐던 유럽세계의 십자군 운동은 악고 함락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600년 이상 성지 이스라엘은 무슬림들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국민일보>

                                                                                                                    박준서 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35) 비잔틴 제국과 동방정교회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역사는 하나님께서 활동하는 무대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역사관이다. 역사의 총감독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에 주연도 세우시고 많은 조연들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악한 세력들도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와 같이 역사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서기 4세기 초, 하나님께서 들어쓰신 역사의 주역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그는 박해받던 기독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로써 기독교 수난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교회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확장되어가는 로마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곳으로 천도를 결심했다.


 비잔티움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절묘한 지점에 세워진 도시였다. 또한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길목에 있어 해상교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주전 600년 이곳이 지리적으로 요충지임을 간파한 희랍인들은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비잔티움’이라고 이름지었다. 따라서 콘스탄틴 황제가 그곳을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을 때, 비잔티움은 이미 1000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그곳을 완전히 로마식 대도시로 개조했고 도시의 이름을 ‘신로마’(New Roma)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름보다 황제의 이름을 따라 ‘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이때가 서기 330년이었다. 이후로 장장 1100년 이상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어키의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의 천도는 로마제국을 동과 서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죽은 지 반세기 만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이를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른다)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서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보다 훨씬 단명했다. 서기 400년대에 들어와서 서로마제국은 ‘서고트족’이나 ‘반달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시달림을 받게 되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던 중 서기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가 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키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영원한 제국으로 자처하며, 한때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했던 서로마제국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은 역사의 영욕을 겪으면서 1000년 이상 장구한 역사를 계속했다.


교회사의 측면에서,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은 교회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카톨릭 교회’가 발전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해서는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가 발전되었다(오늘날 동방정교회는 그 중심국가가 희랍이기 때문에 흔히 ‘희랍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리는 그 뿌리를로마제국의 분열에서부터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두 교회가 공식적으로 완전히 결별된 것은 서기 11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당시 카톨릭 교회의 교황들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며, 동방정교회도 교황권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했다.

 

동방정교회가 이를 받아드릴 리 없었다. 게다가 두 교회 사이에 관할구역 경쟁까지 겹쳐 두 교회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교황 레오 9세는 관계개선을 위해 교황특사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그러나 교황특사는 화해에 실패했고, 교황의 이름으로 동방정교회의 대주교를 파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두 교회는 다시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로 갈라지게 되었다(서기 1054년).


두 교회가 분리된 데에는 신학적인 차이도 그 원인이 되었다. 두 교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성령에 관한 문제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령은 “성부로부터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교리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동방정교회는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나온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교회생활에있어서 동방정교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세례의식의 방법으로는 ‘침례’를 행한다. 둘째, 성인들의 유물과 같은 성물(聖物), 성화(聖畵)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이들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셋째,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를 주장하지 않는다. 수도원에서 수도에 전념하는 수도사들 외에 일반 성직자들은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인이 죽은 후 재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의 감독이나 대주교는 전통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수도사들 중에서 선출되어왔다. 넷째, 동방정교회는 ‘영성’을 강조하며, 따라서 수도원이 크게 발전했다.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수많은 수도원들 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수도원들은 거의 전부 동방정교회에 속한다. 동방정교회 수도원의 중심지는 희랍의 북부지역에 있는 아도스 산(Mt. Athos)이다. 이 산에는 무려 19개에 달하는 역사적인 수도원들이 밀집되어 있어, 오늘날 수도원 운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비잔틴 제국의 국교는 동방정교회였고, 동방정교회의 수호자는 비잔틴 제국이었다. 동방정교회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지 5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제국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수도원은 원래 시간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지만, 동방정교회의 수도원들은 오늘날도 비잔틴 제국의 깃발을 게양하고, 수도사들은 황제를 위한 기도를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박준서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