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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2)~(28)

영국신사77 2009. 3. 11. 23:32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2)] 예루살렘 성전


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의 관심은 다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도 이제는 좀더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팔 문제 해결없이는 중동평화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쌓이고 쌓인 구원(舊怨)과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갈등의 뿌리들을 하나씩 파헤쳐보기로 한다. 이런 작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제가 예루살렘의 성전산(聖殿山) 문제이다. 성전산 문제는 가장 뿌리가 깊고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산 문제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인 다윗 왕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구약시대 유다지파에 속하는 무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냈다.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으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까지 오른 다윗 왕이었다. 다윗은 천부적인 군사지도자였다. 양을 치던 목동 시절에 이미 블레셋족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매 돌 하나로 거꾸러뜨린 무용담을 남기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이 블레셋족과 싸우다 전사한 후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무장으로서 재능을 십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윗 왕이었으나 한 가지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성전 건축은 그의 뒤를 이을 다음 왕의 몫이었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다 맡기지 않으셨다. 또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지도 않으셨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그토록 소망했으나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모세는 요단강 동편 느보 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만보고 지상의 삶을 마쳐야 했다.

다윗 왕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진지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대신 다윗 왕은 그가 할 수 있는 성전 건설의 준비는 모두 해놓았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했고 사재(私財)도 내놓았다. 건축에 필요한 설계도까지 준비했고 성전을 건축할 땅도 마련해 놓았다. 다윗 왕이 남긴 마지막 기도 역시 성전 건축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역대상 29:19)

다윗 왕이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솔로몬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성전 건축은 그의 최대의 과업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해 목재로 쓸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솔로몬 왕은 좋은 목재로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해서 정성을 다해 성전을 건축했다. 솔로몬 왕의 성전 건축 과정을 구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돌은 채석장에서 다듬어 준비했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때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연장을 다루는 소리도 성전에서 들리지 않았다”(열왕기상 6:7·공동번역)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성전 건축은 진행되었고 7년만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되었다(주전 950년대).

성전이 건축된 장소는 다윗 왕이 마련한 땅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진 곳을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 역대기는 성전산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역대하 3:1).

성전산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도시로 확고히 자리매김되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성전의 모습을 정확히 재현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성전은 정동(正東) 방향이었고 삼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성전 입구에는 2개의 큰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서 있었다. 성전으로 들어가 현관(낭실)을 지나면 본전(성소)이 있었고 제일 끝 부분에 지성소(至聖所)가 위치했다. 지성소는 이스라엘 신앙의 상징인 법궤가 안치된 곳으로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다.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은 100평 남짓한 크기로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여호와의 집’으로 불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었고 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성전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더 낫다고 노래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은 약 400년동안 이스라엘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주전 580년대 예루살렘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쳤다. 당시 중동지역을 제패했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초토화시켰다. 이때 성전산 위의 성전도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유다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로 유대인들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전산 위에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염원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3)] 예루살렘 두번째 성전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이사야 45:1)

역사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승승장구하는 페르샤의 ‘고레스’(Cyrus) 왕에 관해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페르샤의 ‘고레스’를 왕으로 기름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왕 이외에 다른 나라 왕에 대해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은 ‘고레스’ 왕밖에 없다.

  둘째는 고레스 왕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잡고 모든 나라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씀이다.

‘고레스’ 왕은 먼저 페르샤 지역(오늘날 이란)을 통일하고,여세를 몰아 바벨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벨론을 공략했다.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의 중심수도였으나,바벨론은 고레스 왕의 공격 앞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써 바벨로니아 제국시대는 끝이 나고 페르샤 제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때가 주전 539년이었다.

고레스 왕은 곧 바벨로니아 제국 내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선포했다. 유명한 ‘고레스 왕의 칙령’이었다. 그 내용은 유다 포로민들의 해방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다 포로민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기쁜 소식이었다.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자,포로민 중에서 제1진이 예루살렘을 향한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민들의 지도자는 유다의 왕족 ‘세스바살’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곧 예루살렘 성전 재건작업에 착수했다.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솔로몬 성전을 불태워 파괴한 후 약 50년간 성전이 세워졌던 성전산 구역은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순조롭지 않았다. 가장 큰 장애는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성전 건축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큰 역사(役事)였다.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귀향민들로서는 자기들이 살아가야 할 집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전 건축은 감내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처음의 열의와는 달리,성전 재건은 기초공사만 마친 채 별 진전없이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때 귀향민 제2진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일찍이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 왕의 손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다. 이 두 지도자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독려해줄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내주셨다. 이들은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였다. 이들 예언자들은 성전 건축을 뒤로 한 채 자기들이 살 집 마련에 분주했던 귀향민들을 무섭게 책망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하나님)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내 집(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리고 예언자는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선언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개 1:8-9)

예언자들의 무서운 책망의 말씀과 스룹바벨의 지도력이 합해져서,성전 재건사업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바로 그 때 한 가지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도 성전 재건사업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북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앗시리아 제국의 피정복민들의 인구교환 정책에 따라 대부분 혼혈이 된 사람들이었다. 남쪽 유다 백성들은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혼혈된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멸시하고 천대해왔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을 때,예루살렘의 지도층은 이들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들과 함께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내민 선의의 손길을 유대인들이 뿌리쳐 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는 증오심으로 바뀌게 되었고,이후 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들의 독자적인 ‘사마리아인 성전’을 세겜 근처 그리심산 위에 건축했다. 이로써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다시는 화해할 수 없이 결별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진행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산 위에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때가 주전 515년이었다. 두 번째 성전은 유다의 왕족 스룹바벨의 지도력으로 건축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부른다. 두 번째 성전(Second Temple)은 서기 70년 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파괴당할 때까지 약 600년 동안 유대인들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주전 330년대,중동 지역의 역사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를 쳤다. 페르샤 제국의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를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남단 이수스(Issus) 평원에서 벌어진 역사적 전투에서 페르샤의 주력 대군은 23세의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페르샤의 다리우스 왕은 혼비백산 도주했고,그의 왕비와 왕족들은 알렉산더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200년간 역사의 중앙무대를 차지했던 페르샤 제국은 퇴장하고 알렉산더가 문을 연 희랍 시대가 개막되었다. 희랍 시대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은 크나큰 수난을 겪는 일이 일어났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4)] 유대인 목숨건 저항…마카비 혁명



주전 323년은 중동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해였다. 역사의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젊은 나이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오늘날 이라크의 바벨론에서 알렉산더가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을 때 그가 남겨놓은 거대한 제국은 어느 누구도 홀로 통치할 수 없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자연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 통치 영역이 분할되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 돌아갔고 그는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루었다. 또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장군에게 할당되었고 안디옥(안티오크)을 수도로 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이루었다.

이들 희랍의 통치세력 사이에 위치한 것이 유대인들의 땅 팔레스타인이었다. 약 100년 이상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관용주의 정책으로 정복민들을 다스렸고 이들의 통치기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주전 200년께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양대 세력이 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는 셀레우코스 왕가의 승리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셀에우코스 왕가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의 통치 정책은 정복지 내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희랍문명(헬레니즘)으로 통일시키는 ‘희랍문명 통일화’ 정책이었다. 특히 주전 170년대 안티오쿠스 4세는 강력한 희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정책의 추진은 곧 종교적 탄압의 형태로 나타났다.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행해온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되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모세5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발견된 성경책은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유대인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을 격분시킨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희랍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유대인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유대인 하스몬(Hasmon) 가문에 속한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다. 이들이 항거의 기치를 내걸자 많은 유대인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었고 결국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혁명의 지도자는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 중에 ‘유다’였다. 그의 별명은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비’(Maccabee)였다. 사람들은 그를 ‘유다 마카비’라고 불렀고 그가 주도하는 혁명은 ‘마카비 혁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카비 혁명군은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지형과 지리에 익숙하다는 강점을 살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잡아나갔다.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 성전산 위에 세워진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여 정화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전을 새롭게 봉헌했다. 이 날이 구약시대 월력으로 키슬렙(Kislev)월 25일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이날을 ‘하누카’(Hanukkah) 절기로 지켜오고 있다. 성전을 ‘봉헌’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달력으로 12월 중순쯤이 되는 하누카 절기에는 유대인 가정이나 회당에서는 ‘하누카 촛불’을 켠다. 8개 촛대에 매일 저녁 하나씩 촛불을 켜 나가서 마지막 여덟째 날은 8개 촛불이 모두 켜진다. 이러한 촛불의식에는 유래가 있다. ‘유다 마카비’가 혁명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성전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이 하루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성유를 만들려면 여러 날이 걸리는데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하루치 기름은 기적적으로 8일간이나 성전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하누카 절기에 촛불을 켜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하누카를 일명 ‘빛의 축제’(Feast of Lights)라고도 부른다.

마카비 혁명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셀레우코스 왕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관할권을 유대인들에게 이양해 주었고 이로써 마카비 혁명은 일단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와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서 ‘유다 마카비’는 전사하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돼 스스로 ‘대제사장’의 위치에 올랐다.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최고 지도자의 위치였다.

요나단의 뒤를 이은 지도자는 그의 형 시몬이었다. 시몬은 유능한 지도자였고 셀레우코스 왕가와 협상 끝에 유대인들이 희랍의 통치자에게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유다왕국이 멸망한지 450여년만에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주전 140년). 이로써 하스몬 가문의 세습적 통치가 시작되었고 80년간 유대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나갔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5)] ‘민심 무마용’ 성전…헤롯 성전



주전 160년대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마카비 혁명’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희랍계 ‘안티오쿠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워 성전을 더럽히고 안식일과 할례를 금지하는 등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 마카비 혁명이었다. ‘하스몬’ 가문에 속한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의 주도로 시작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승리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스몬 가문의 형제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하스몬 가문 제2세대에 와서 하스몬 가문 지도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까지 장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독립을 성취하게 되었다(주전 130년대).

하스몬 가문이 종교권과 정치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반대파들은 하스몬 가문이 정치세력화되고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권까지 모두 움켜쥐는 것은 마카비 혁명 정신을 변질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바리새’(Pharisees)파였다.

바리새파에 대항해서 하스몬 가문의 통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사두개’(Sadducees)파였다. 사두개파는 주로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 상인,제사장 계층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스몬 가문 통치 제3세대때 하스몬 왕가가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1세?주전 104년께)는 스스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유대인 공동체는 왕이 통치하는 ‘유대왕국’이 되었다.

한편 하스몬 왕가에 대한 바리새파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고 반란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통치자 ‘알렉산더 얀나이’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바리새파 대표를 불렀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바리새파 대표들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죽는 것이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스몬 왕가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권력이든 권력의 붕괴는 흔히 내분에서 시작되었다.

27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알렉산더 얀나이’가 죽었을 때(주전 78년) 그의 두 아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승자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였다. 패배한 형 ‘힐카누스’는 나바트인들의 암벽도시 페트라(Petra)로 피신하고 나바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형제가 왕의 자리를 놓고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이 로마제국의 폼페이(Pompey)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지역에 진주했다. 왕의 자리에 눈이 먼 두 형제 ‘아리스토불루스’와 ‘힐카누스’는 어리석게도 다마스쿠스(다메섹)에 머무르고 있는 폼페이 장군에게 각각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웃지 못할 일을 벌였다.

마침내 주전 63년 폼페이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함락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폼페이 장군은 ‘힐카누스’의 손을 들어주고 대제사장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스몬 왕가가 이끄는 ‘유다 왕국’은 사라진 뒤였다. 유대지역은 로마제국의 속주로 전락한 것이다. 마카비 혁명의 승리로 시작된 하스몬 가문의 통치는 이렇게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100년 남짓 계속 된 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지의 내부적 문제에 가급적 자치권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로마제국은 유대지역 통치를 위해 ‘이두매’(에돔) 지역 출신 헤롯에게 왕권을 부여해주었다(헤롯의 재위기간 주전 40∼4년). 헤롯의 부인은 하스몬 왕가에 속한 ‘마리암’이었다. 헤롯이 왕이 되자 그는 무자비하게 하스몬 가문을 제거하였다. 혹시 있을지 모를 하스몬 왕가 복권운동을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서 헤롯왕은 하스몬 왕가 출신인 자기 부인까지 죽이는 잔인성을 보였다.

헤롯왕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유다의 남부 ‘이두매’ 지역 출신이었고 특히 하스몬 왕가에 대한 그의 잔인한 처사는 유대인들의 등을 돌리게 했다. 아무리 고대사회라고 해도 힘만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고 어느 정도 피통치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 궁리를 했고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재건축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었다.

우선 헤롯 왕은 성전이 서 있는 성전산 구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사방에 높이 20m에 달하는 축대를 쌓아 성전산 구역을 확장해서 4만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넓은 대지 위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 헤롯은 폭군이었으나 세심한 면도 있었다. 성전을 재건축하는 과정에 인부와 석공들이 성전산의 성역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1000명에 달하는 제사장들을 석공으로 훈련시켜 제사장들을 성전 건축공사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성전공사가 끝났을 때 성전산 위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다. 예수님께서도 “큰 건물들”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대성전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헤롯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은 웅대하고 장엄한 성전이었으나 폭군 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서기 70년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박준서(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6)] 두번째 성전 파괴 

 



 주전 63년은 유대인들의 기나긴 역사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해였다. 당시 유대인들을 통치하던 하스몬 왕가에 내분이 일어나 권력 투쟁에 영일이 없는 사이 로마 제국의 폼페이 장군이 유대지역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로써 마카비 혁명 이후 약 100년간 지속돼왔던 하스몬 왕가의 유대인 독립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예속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통치 초기에는 헤롯이라는 인물을 유대인의 왕의 자리에 앉히고 내정문제에 대해서는 헤롯 왕가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서기 6년부터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바로 이때 유대 땅에서는 인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전파,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그리고 교회의 발생과 기독교 선교 역사의 시작이었다.


 로마 제국이 총독을 파견하여 유대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에 유대인들과 총독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더욱이 로마 주둔군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충돌이 잦았다. 이런 와중에 유대인들의 로마 통치자들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정이 누적되었고 과격한 반로마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로마 운동의 주축은 ‘열심당원(Zealots)’들이었다. 또한 단검을 몸에 품고 다니면서 로마제국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던 ‘단검자객단’(Sicarii)까지 생겨났다.

 


                               ‘제1차 유대인 반란’
 서기 66년 이런 상황에서 플로루스(Flours)라는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했다. 그는 어리석게도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에서 큰 돈을 빼내려고 했다. 물론 구실은 공용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로마제국 통치자들에 대한 항거운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항거는 곧 대규모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제1차 유대인 반란’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로서는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유대인의 반란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서기 67년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실전 경험이 많은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그의 아들 티투스(Titus)를 반란 진압에 동참시켰다. 부자가 이끄는 로마 군단은 6만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노련한 베스파시안 장군은 북부지역인 갈릴리 지역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면서 서서히 예루살렘 방향으로 남진했다.

 유대인 반란이 진압돼가는 과정에서 로마에서는 폭군 네로가 자결하는 일이 일어났고 1년 사이에 로마 황제가 무려 4명이 교체되는 ‘4황제의 해(The Year of Four Emperors)’가 뒤따랐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나 곧 살해되거나 자결하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유대인 반란 진압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었고 69년 그는 로마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인 반란 진압의 책임을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맡겼다. 당시 티투스는 29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능력 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예루살렘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스코푸스 산(현재 히브리대가 위치해 있음)과 감람산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예루살렘 공격을 개시했다.

 

 예루살렘 공격 작전이 시작된지 5개월만에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로마군대가 밀물처럼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저항하던 유대인 반란군은 투항을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들어가 끝까지 항거했다. 로마 군사들은 성전에 횃불을 던지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성전은 화염에 휩싸였다. 사실 티투스 장군은 성전 파괴까지는 계획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반란군을 진압한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라가 폐허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 재건된 ‘두번째 성전(헤롯왕이 증축한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서기 70년). 기묘하게도 바벨론 군대에게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날(주전 587년)과 70년 로마 군대가 두번째 성전을 파괴시킨 날이 거의 일치한다. 유대인 달력으로 아브달(서양력으로 8월) 9일쯤이다. 오늘날도 ‘티샤 베아브(Tisha beAv?아브달 9일이라는 뜻)’ 날이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금식하며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면서 성전이 파괴된 날을 기억한다.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파괴되었으나, 축대 부분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이를 ‘통곡의 벽’이라 부른다.

 로마 제국 시대 그들의 관습 중의 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과 병사들이 로마 거리에서 ‘승리의 행진’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81년 로마에 세워진 ‘티투스 장군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일곱 촛대와 나팔들을 어깨에 메고 로마 군사들이 승리의 행진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유대인들의 비극적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7)] 천혜의 요새 ‘마사다’ 



 세계에서 제일 낮은 지구의 표면이라는 사해(死海)를 따라 이스라엘 남북을 잇는 고속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유명한 ‘쿰란’을 지나 사해 해변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50㎞쯤 내려오면 오른쪽 방향에 기이하게 생긴 거대한 언덕이 시야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보면 450m 높이의 언덕이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위압적으로 높이 솟아 있다. 언덕의 경사가 무척 가파르고 더욱이 언덕 중턱부터 정상까지는 깎아지른 절벽과도 같아 감히 정상으로 올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곳이다. 바로 이 곳이 유대인들에게 비극적인 역사적 현장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마사다’이다.

 오늘날은 이곳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너무도 수월하게 마사다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마사다 정상이 엄청나게 넓다는데 우선 놀라게 된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정상은 남북의 길이가 600m나 되고 동서의 폭은 250m다. 대충 계산해도 2만평이 훨씬 넘는 넓이다. 그런데 이 넓은 땅이 잘 닦아놓은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마치 거대한 톱으로 언덕의 중간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마사다는 아래에서 정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천혜적인 요새가 될 수 있다. 이 점을 간파한 인물이 폭군 헤롯 왕이었다. 그는 유사시에 피신할 곳으로 마사다를 택했다. 그래서 마사다 정상에 요새궁전을 건축했다. 우선 마사다 정상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정상의 북쪽 끝 절벽 부분에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3층 구조의 궁전을 건축했다. 폭군의 광기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물을 얻기 어려운 그곳에 로마식 목욕탕까지 만들었고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막사도 준비했다. 헤롯 왕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사다를 요새화했으나 한번도 그 곳을 사용한 일은 없었다.

 헤롯 왕이 죽은 지 약 70년이 지난 뒤 마사다는 수난으로 점철된 유대인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처절한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서기 66년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제1차 유대인 반란’은 결국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성전산 위에 세워졌던 ‘두번째 성전’도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인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을 지도자로 하여 약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진을 치고 저항을 계속한 것이다.

 로마제국은 유대인 반란의 마지막 거점을 소탕하기 위해서 실바(Silva) 장군이 이끄는 제10군단을 마사다로 보냈다.

 그러나 명장 실바 장군도, 무적의 로마군단도 마사다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그곳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실바 장군은 묘안을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마사다 정상까지 흙으로 경사로(ramp)를 쌓는 것이었다. 마사다의 서쪽 방향은 다른 쪽보다 천연적으로 지형이 훨씬 높아 정상까지의 높이는 100m 남짓했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해서 실바 장군은 마사다 서쪽에 200m 길이의 경사로를 쌓았다.

 

 서기 73년 5월 로마군은 완성된 토담 경사로를 타고 마사다 정상에 도달,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람이 로마군 쪽으로 불어와 불길 때문에 공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로마군은 할 수 없이 일단 퇴각했다. 다음날 새벽 마사다 공격을 재개했을 때 놀랍게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요새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3년간 끈질기게 저항하던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인 전쟁기’에서 마사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로마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지도자 엘리아살은 960명의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 로마인들의 칼에 죽음이냐’ 엘리아살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먼저 남자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택했고 이들은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9명을 죽이고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너무도 비통하고 비장한 마사다의 최후를 역사가 요세푸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역사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로마군대가 마사다를 함락했을 때 동굴 속에 숨어 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 마사다에서 죽음의 길을 택한 이들은 지금도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죽음으로밖에는 항거할 길이 없었던 그들의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다짐하게 해준다. 오늘도 마사다에는 유대인들이 외치는 함성이 사방에 메아리 친다. “마사다 로 오드파암!”(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기를!)

 

                                                                                     박준서교수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회장)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8)] 제2차 유대인 반란



 서기 66년부터 4년동안 계속되었던 제1차 유대인 반란은 로마제국의 압제에 항거하여 일으켰던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서기 70년 마지막 보루였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되고 성전은 불에 타서 파괴됨으로써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로마제국은 ‘반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무자비한 응징이 뒤따랐다.


 예루살렘은 처참한 학살과 약탈로 피로 물든 도성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0년대 바벨론 군대가 파괴하였고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향해서 두번째 성전을 재건하였다(주전 515년). 그후 약 600년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예배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했었다. 서기 70년 로마군이 두번째 성전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구약 사사시대 이방 외적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보내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다시 한 번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으로 믿었다. 또한 바벨론 군대가 파괴한 솔로몬 성전이 70여년만에 재건된 것처럼 로마군이 파괴시킨 두번째 성전도 약 70년 후에 다시 재건시켜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성전산 위에는 로마인들의 최고신인 주피터의 신전을 건축하려 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했다. 그는 ‘바르 코크바’(Bar Kochba)였다. 그의 본명은 시므온 바르 코시바(Simeon Bar Kosiba)였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구약성경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된 이스라엘을 구원할 ‘별’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바르 코크바’ 즉,‘별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바르 코크바가 유대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데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도 한몫했지만 랍비 아키바(Rabbi Akiva)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두번째 유대인 반란’ 
 서기 132년 바르 코크바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해서 굳게 뭉쳤다. ‘두번째 유대인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로마제국의 시각에서 본 것이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바르 코크바는 처음부터 게릴라전으로 로마군을 공격했다. 정규 전쟁으로는 로마군의 적수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그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고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총독 루푸스(Rufus)는 휘하의 10군단과 함께 예루살렘을 버리고 가이사랴로 이동했다.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반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로써 3년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바르 코크바는 동전을 주조하고 ‘예루살렘 해방 1년’‘이스라엘 자유 2년’과 같은 연도를 표기하기도 했다.

시리아 지역의 총독 말세루스(Marcellus)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나 바르 코크바의 게릴라 전술 앞에 큰 손실을 입고 반란을 진압시키지 못했다. 로마제국의 하드리안 황제는 유대인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않자 당시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명장 율리우스 세베루스(Julius Severus)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세베루스 장군은 과거 ‘1차 유대인 반란’ 때 베스파시안 장군의 작전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차례로 저항하는 도시를 함락시키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남진했다. 명장이 지휘하는 로마군 앞에 유대인 ‘반란군’은 계속 밀렸고, 로마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바르 코크바를 위시한 반란군은 예루살렘 남서쪽 11㎞ 지점에 있는 ‘베타르’(Betar)를 마지막 보루로 삼고 그 곳에 집결했다. 그들은 경사가 가파른 베타르 정상 부분에 요새를 구축하고 저항을 계속했다.

 서기 135년 아브달 9일 베타르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밀물처럼 성안으로 밀어닥쳤다. 이때 바르 코크바도 전사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유대인 ‘반란군’들은 모두 살육됐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베타르가 함락될 때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이 흘린 피가 작은 강을 이루어 지중해까지 흘렀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다.

 이로써 ‘2차 유대인 반란’도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반란을 진압시킨 하드리안 황제는 다시는 그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일을 단행했다. 첫째,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완전히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고 이름도 아이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둘째,로마식으로 재건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셋째,유대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꿨다.

 2차 유대인 반란의 실패는 유대인 역사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후로 장장 1800여년동안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다시는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20세기 중엽 1948년에 와서 비로소 정치적 독립을 성취했다. 



                                                                                박준서교수 (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회장)

 

 

 

                                                                    출처:http://cafe.daum.net/pauljwpark/XS8/158[박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