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연속의 성지 ⑾ ‘요단강 서안지역’] 중동평화 열쇠 쥔 ‘갈등 진원지’ | |
[국민일보 2002-07-14 16:51] | |
요단강과 사해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요단강 서안지역은 그 면적이 5860㎢정도이며 현재 210여만명의 아랍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 반환의 핵심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계획되고 감행되는 지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테러범 소탕작전을 벌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벧엘 헤브론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순례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단강 서안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 행사 등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평화회담의 핵심 사안인 요단강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는 다른 중동평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강제 점령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후 요르단에 의하여 감행되었다. 요르단은 요단강 서쪽 지역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이라고 불리는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요단강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런데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면서 1952년 이 요단강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고,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동예루살렘은 자국에 합병시켰으나, ‘요단강 서안지역’은 합병하지 않고 단지 군사적 점령지역으로 남겨두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베긴 총리 정부가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스라엘 주택성장관은 현 총리인 샤론이었다.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한 결과 ,요단강 서안지역에는 140여곳의 정착촌이 건설돼 2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 1978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도 요단강 서안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보를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 이스라엘 무장 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이다. 레바논 전쟁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가 기폭점이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에 군사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특히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때 요단강 서안지역은 인티파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는 듯하였다.이 평화협정에 의하면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단계적으로 요단강 서안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998년까지 철수하고,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어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평화협정문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여리고로부터 철수하는 시점부터 5년간의 과도기간을 가지며, 과도기간 3년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최종협상을 하되 그 협상에서 예루살렘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정착촌 문제, 국경문제 등을 다룬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자치정부가 테러와 그밖의 모든 폭력행위를 배격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해서 팔레스타인내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안보 후반환’을 주장한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선반환 후협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6년에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자살테러가 감행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팔레스타인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선안보를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측에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최종 협상에서 양측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하자 ,같은해 9월 ‘요단강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000년 10월22일 중동평화회담의 전면 중단을 선언하였다.
2001년 2월 강경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집권하였고,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하여 그 동안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 있었던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재점령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예닌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을 공감하기보다 국내 정세에 따라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평화는 요원하다. 진정한 평화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양측간의 상호 신뢰회복이 선결과제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장) |
|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⒁] 이―팔 유혈갈등의 해법을 찾아서 | |
[국민일보 2003-03-13 14:25] | |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 후 이스라엘에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4차례 큰 전쟁이 있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해서 50년대, 60년대, 7 0년대 평균 10년 주기로 4번에 걸친 전쟁이 일어났고 성지 이스라엘 산천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포연 속의 성지에도 한때 평화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1993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서 팔레스타인측을 대표하는 아라파트 PLO 의장과 이스라엘 라빈 총리, 그리고 외무부 장관 ‘페레스’는 전 세계인의 박수를 받으며 ‘원칙선언’에 서명했다. 그 내용의 골자는 앞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상대방이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고, 향후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자치지역 범위를 확대해 나간다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전쟁과 테러로 쉴 날이 없었던 이스라엘 땅에 ‘평화공존’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노벨상위원회는 이 선언문에 서명한 아라파트 의장, 라빈 총리, 페레스 외무장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이스라엘 땅에 도래할 평화를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공존을 향한 행진은 곧 좌초되고 말았다. 1995년 11월 텔아비브에서 라빈 총리의 평화정책을 지지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하여 열변을 마치고 퇴장하는 라빈 총리에게 이스라엘의 극우파 청년 아밀이 3발의 총탄을 퍼부었다. 라빈 총리의 암살 소식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서 80개국 정상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이스라엘내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 공존 정책을 추진했던 라빈의 비전과 용기를 추모하였다.
라빈 총리를 쓰러뜨린 극우파 청년의 총탄은 평화 공존의 꿈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라빈 총리의 사망과 함께 이스라엘에서는 대팔레스타인 강경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내에서도 하마스,이슬람 성전(聖戰) 조직 등 과격한 테러조직들이 발호하게 되었다. 결국 평화 공존을 위해 애썼던 라빈 총리의 노력은 수포가 됐고,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폭력의 악순환이 재연되었다.
2000년 9월말 이스라엘 야당 당수 샤론은 일찍이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던 성전산을 방문했다. 일견 별 문제가 아닐 것 같았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아랍인들을 자극했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인티파다)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아랍인들의 항거운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어 이스라엘 땅을 다시 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다.
지금까지 30개월동안 계속되고 있는 인티파다로 75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스라엘측은 아랍 과격파들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군대를 동원해서 강경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19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과거 팔레스타인측의 항거운동은 청년들이 이스라엘 병사와 탱크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에 폭약을 휘감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폭발시켜 수많은 희생자를 내는 ‘자살폭탄’ 테러 형태로 격화되었다. 게다가 어린이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초부터는 젊은 여성들까지 자살테러범의 대열에 가담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그곳에 그 이름에 걸맞은 조화로운 평화는 없고 격렬한 투쟁과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가? 트루먼 대통령 이래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어떻게든 이스라엘에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큰 성과는 없고 오히려 대결 양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이스라엘 문제’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나의 땅을 사이에 놓고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이 싸운다면 그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양측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방법은 정녕 없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재의 상황만을 보아서는 안된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성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오늘날 엉켜버린 실타래같은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이제부터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시간을 뒤로 돌려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은 무려 4000년이라는 시간을 소급해 올라가야 하는 머나먼 과거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문제는 4000년이라는 시간이 축적된 뿌리깊은 문제다. 시계바늘을 4000년전으로 돌려 까마득한 과거로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박준서(연세대 교수·한미기독교학회 회장) |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6)]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⑵ | |
[국민일보 2003-03-27 15:32] | |
또한 걸프전의 패배를 거울삼아(사담 후세인은 이라크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전쟁이라고 자국민들을 세뇌시켰다) 현재 새로운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이라크 사람들은 이번 전쟁을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지하드’(성전)라고 확신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볼때 이번 전투는 단기간에 쉽게 끝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금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있는 이라크는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역사의 중요한 무대 중의 하나이다. 이라크는 한반도 면적의 배나 된다. 국토의 70% 정도는 메마른 사막이나 험한 산악지대여서 사람이 살기 어렵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1은 대단히 비옥하다. 이 지역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땅 곧 ‘메소포타미아’다.
기름진 땅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이 일어났다. 구약성경에서 ‘시날 평지’(창세기 11장 2절)라고 부르는 이 지역에서 인간들은 나무 열매를 따먹고 강의 물고기를 잡는 수렵단계를 벗어나 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농업단계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시날 평지는 비옥한 토양과 수량이 풍부한 두 강이 흐르고 있어 농업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두 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관개사업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등장했고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주전 3000년대에는 시날 평지에 수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고 왕실 행정을 기록할 필요에 따라 문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쐐기문자(설형문자)’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자의 사용은 인류 문명을 선사시대에서 기록을 남기는 역사시대로 전환시켜 주었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남부 시날 평지에서 일어난 고대문명을 수메르 문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수메르 문명의 중심에 ‘우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르’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이다. 며칠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나시리아’ 근처에 ‘우르’가 위치했었다.
주전 2000년께 수메르 문명은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중심은 ‘우르’였다. 당시 우르의 왕 ‘우르남무’는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법률 조항을 제정했다. ‘우르남무 법전’으로 불리는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최고의 법전이다.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적어도 200년 이상 앞선다.
우르남무 왕의 업적으로 지금까지 우르에 남아 있는 유적은 그가 세운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달의 신(月神)에게 바쳐진 이 거대한 탑은 현재 21m 높이 부분까지 남아 있어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진흙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고 벽돌 사이에 사용한 역청은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의 모습을 추정케 하고 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 가족이 그곳을 떠나 문화적으로 낙후되고 지형적으로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막이 오른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메마른 가나안 땅에서 비옥한 문명도시 ‘우르’로 이주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정반대이다. 인간의 타산적 계산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찬란했던 수메르 문명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못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은 ‘바벨론(바빌로니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바벨론 제1왕조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함무라비 왕(주전 18세기)으로 대표되는 바벨론 제1왕조는 비교적 단명하게 끝나고, 새로운 패권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앗수르(아시리아) 제국이다. 약 800년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절대적 세력으로 군림했던 앗수르 제국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굴종해야 하는 한낱 봉신국가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의 예후가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후, 많은 조공품을 갖고 앗수르 왕에게 가서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이 돌에 부조로 남아 있다. 앗수르 왕궁에서 발굴된 이 역사적 자료는 이스라엘의 41명의 왕들 중에 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며, 이스라엘과 앗수르 제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주전 8세기말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 왕은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했다. 3년에 걸친 포위작전 끝에 사마리아는 함락되었고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제국 세력과 이스라엘간 악연의 역사는 계속된다.
박준서교수(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
'◈◈ 海外 聖地순례 > ★聖地성화歷史[종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22)~(28) (0) | 2009.03.11 |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7)~(21)] (0) | 2009.03.11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6)~(10)] (0) | 2009.03.11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5)]유월절 테러,성전산,예루살렘 (0) | 2009.03.11 |
★[박준서 교수가 본 포연속의 성지 (17)~(21)] (0) | 2009.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