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제1차 유대전쟁 (1) <요세푸스>

영국신사77 2007. 1. 31. 16:07

  전쟁사일반 | 고대전쟁사 | 근대전쟁사 | 1차대전 | 2차대전 | 현대전사 | 한국전사 | 월남전

                                                                                                   joe10, defence.co.kr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 시작의 본론은, 폼페이가 예류살렘으로 진군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의 정치적 권리가 자신들의 혼란에 의해, 로마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완전히 패배하는 순간까지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총8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3권부터 서기 66년의 반란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책 이외에도 유대고대사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의 백미는 유대전쟁사입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철저히 로마군에게 패배했으며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갔는가를, 그대로 참가자이며 관찰자의 눈으로, 그리고 로마의 관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와 유대간의 전쟁 뿐아니라, 유대의 정치적인 혼란과, 헤롯 그리고 로마의 정치상황에 맞물린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폼페이의 예루살렘 점령


 

 당시 유대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아리스토불루스파가 장악한 유대를 정벌하기 위해, 폼페이는 다마스커스에서부터 이동하여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본성은 높은 고지에 위치했으며, 동쪽은 아주 가파른 절벽이고, 서쪽은 서북에 제2성벽과 서남에 제1성벽으로 나누어, 완만한 경사지를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폼페이는 성전이 포함된 고지를 완전한 로마식 공성진지로 포위하고, 서쪽에 두개의 군단 진지를 건설했습니다.


 

  폼페이는 주변 참호와 골짜기를 메우도록 하고, 이 힘든 작업을 방해하는 유대인이 안식일(7일째)에는 어떤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이용하여 공성기를 운반하고 지탱할 곳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성벽은 매우 견고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약 3개월이 지나서야 망대 하나를 파괴하고 성전으로 진입합니다. 실라의 아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가 먼저 성벽을 넘고, 백부장 푸리우스와 파비우스가 성전에 부대를 이끌고 진입하여 유대인을 도륙합니다. 이날 12,000의 유대인이 죽고, 로마군의 희생은 적었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가족들은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탈출, 다시 전투를 감행합니다. 그러나 폼페이의 부하 가비니우스와 마르크스 안토니우스 라는 젊은 지휘관에게 패해, 포로 3,000,  3,000 전사라는 피해를 당합니다.


 

 이후 반란은 줄어들지 않고, 양쪽 다 치열한 싸움을 벌립니다. 재미있는 기록은,  크랏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성전을 완전 약탈했다는 기록으로, 성전 성막에 함부로 들어간 폼페이도 하지 않은 이짓으로, 그결과는 전멸이었습니다.  그리고 폼페이도 결국은 부하에 의해 목이 달아났습니다. 

 바루스(게르마니아에사 횡사한 그사람)의 예루사렘 진군과 본디오 빌리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다가, 시카리파라는 암살단이 네로 치세 때 생깁니다. 시카리파는 단검을 몸에 품고 다니는 자들로써,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마사다에서 최후를 맞이한 자들이죠.


 

 마사다의 참극으로 끝난 전쟁의 시작은, 유대 전체가 로마에 대항하여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헤롯대왕의 아들인 아그립파2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그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단지 로마는 클리엔테스라는 관계, 풀이하자면 상호보완적인 정치적 상부상조의 관계로, 한쪽이 필요한 것을 다른쪽은 서로 도와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헤롯의 집안은 유대내에서  인기가 없었으므로, 반란의 불길은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서기66년의 일입니다.

 마사다의 무기고를 습격하는것까지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항복한  로마군 수비대를 학살하면서 문제는 틀어집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에 대해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 사건이 민족의 파멸이 시작되는 전주곡이 된 불행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2권17장 10절 중에서>


 

 이후 사건은, 시리아지역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이 시리아인들과 그리스인들과 사이에 일어난 살육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전쟁은 본격적인 전쟁보다, 이런 민족간의 갈등에 의한 전쟁이었습니다. 꼭 레바논이나 보스니아 처럼...


 요새푸스는 이 책에서 자기에 대해 3인칭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그는 부대지휘를 맡아 그지역의 방어를 강화시키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로마와 상대하기 위해서서는 명령체계를 바꾸어, 로마군 처럼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만들고 신호방법,  나팔에 의한 진군 퇴각, 양익확장,선회, 한 날개가 승리하면 돌아가는 것, 패배한 곳에 지원하는 것, 습격에 대응하는 것들을 가르칩니다.  그의 병사들은 거의10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행동한 병력은 보병6천,기병 350에 용병이 4,500이라고 다시 기록했더군요)


                                    베스파시안의 등장


 

 네로가 유대의 반란이 불길처럼 번져가자, 영국 원정에서 동생 사비누스와 아들 티투스로 더불어 영웅적인 활동을 벌인 베스파시아누스라는 군인을 이곳으로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귀족 계급이 아닌, 기사 계급의 군인으로 그의 집안에서 그가 가장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베스파시안을 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유대전쟁사3권1장중에서>

 초기의 성공으로 우쭐해진 유대인들은, 아스글론에 있는 안토니우스라는 지휘관의 1개보병대와 1개 기병대를 공격했으나 패퇴합니다.
<이것은 고참 대 신참, 기병대 보병, 잘 정열된 부대와 넝마 같은 무질서한 부대가 싸우는 것이었고, 한쪽은 잘 훈련된 병사들이어서 사령관의 최소한의 신호에도 절도 있게 행동했지만, 다른 한쪽은 어떤 전술이라기 보다 개개인의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었다.," 3권2장 >

 훈련된 소수 정예와, 훈련이 뭐지 모르는 어중이 떠중이 수만과의 전투의 결과는, 유대인은 만 명 전사에 지휘관 3인 중 2명이 전사하였으나, 로마군의 피해는 아주 적었다고 합니다. 유대전쟁사에서 한가지 기억해둘 것은, 유대인들의 훈련상태는 거의 산적 수준이지만, 정신상태 만큼은 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꼭 일본의 반자이 어택과 같은 전법을 만들어 내었고, 때로는 효과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을 압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유대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다시 공격했으나, 8,000이 죽고 지휘관 니게르는 간신히 살아남게 됩니다. 베스파시안은 아그립바왕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제3의 도시 안디옥에 이동합니다.
베스파시안은 플라키두스에게 1천기병과 6천보병으로 갈릴리(세포리스)로 보냈으며, 요세푸스는 이를 슬쩍 공격했다가, 도리어 엄청난 보복을 당하므로써 그 일대 요세푸스가 요새화 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집이든 사람이든 거의 초토화 시킵니다.

 한편 프톨리마이오스에서 티투스가 15군단을 베스파시안의 5군단과 10군단에 합류시키는데, 1개기병대와 5개보병대가 더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 보조병으로 안티오쿠스, 아그립파, 소아이무스가 각각 2천 보병궁수,1천기병,아랍말쿠스 1천기병, 5천궁수,합하여 총 6만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기록하기를, 종들을 이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하며, 종들도 훈련에 참가하고 전투에 이용될 수 있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3권 6장에 베스파시안 프톨리마이스를 떠나는 장면을 묘사하기를,
적의 기습을 격퇴하고 매복이 가능한 은밀한 숲을 정탐하기 위한 것으로,
경무장한 원군들과 궁수들은 앞서 나가고 그 뒤에 중무장한 보병과 기병이 뒤따랐고, 그 뒤에 100인대마다 각각 뽑은 10명의 분대가 자신들의 배낭과 진영표시를 위한 필수 장비들을 가지고 다녔으며( 이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되는데 아마도 일반 행군이 아닌 전쟁지역 행군이라 그런 것인지…)


 

  그 다음에 따르는 자들은, 행군하는데 구불구불한 길을  평평하게 하고 거친 곳을 다지고 방해되는 나무들을 잘라서 병사들이 지치고 피곤하지 않게 했고, 그 뒤에 잘 적재된 베스파시안의 짐과 그의 부관들의 짐을 실은 병사들이 그 짐을 잘 호위하며 뒤따랐으며, 베스파시안은 선별한 보병, 기병과 호위하는 창병과 같이 그뒤를 따랐다고 적고있습니다.


 

  그 다음에 기병대가 군단별로  따라왔고  각 군단은 120의 기병이 부속되어있으며 (각 군단에 120명의 기병이 있다라는 여러 기록의 출처가 바로 여기입니다.) 다음은 망대에 공격할 무기와 기계를 실은 노새들이, 다음은 정예 군단 사령관들과 보병대의 사령관과 부관들. 다음은 독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앞세우고 각 군단이 뒤를 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이고 가장 용감하여 제국의 상징이고 나팔수들은 이 신성한 군기의 뒤를 따랏고, 그 뒤를 주력대가 따랐는데, 종대가 나란히(요세푸스의 다른 부분에는 6열종대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행군했으며,  보병 뒤에 노예들이 노새와 다른 짐승에 병사들의 짐을 싣고 각 군단을 따랐으며, 종대의 맨 끝에는 용병과  후방 안전을 위해 맨 뒤에는 각각 무장한 보병과 상당한 기병들 순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안은 갈랄리 근처에 진을 치는데, 이것의 의미는 적에게 위협을 주기 위함으로, 이를 보고 유대인들은 요세푸스와 일부만 남기고 다른 유대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으며, 베스파시안은 갈릴리 근처의 가바라와 그주변을 완전히 초토화합니다.


                                  요타파타 공성포위전


 요세푸스가 요타파타에 들어간 것을 안 베스파시안은, 보병과 기병 일개부개 씩보내, 길 평탄작업을 시킵니다.  4일 후 작업이 완료되고, 배신자로 인해 요세푸스의 정보가 전해져서, 그를 잡기 위해. 플라키두스와 아이부티우스라는 요세푸스와 안면이 있는 십부장(로마인인지는 모름)에게, 천명의 기병으로 이 주변을 포위토록합니다.  이로써 벌판에서 대회전 같은 전투가 한번도 일어남 없이 ,처절한 공성전만으로 대부분의 전투를 벌인  유대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요타파타를 3중으로 포위 완료하고는, 다음날 공격을 시작합니다. 첫날의 공격(총47일간)은 양편간의 치열한 접전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절망으로 대담해졌다고 합니다.

 요터파타는 3면이 아주 깊은 골짜기로 에워싸인 절벽 위에 있으며, 북쪽에서만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이곳에 요새푸스가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로마군은 성벽과 마주하도록 포위방벽을 만들기로 하고, 그 주변 산림을 거의 벌채하고  많은 돌을 모아작업을 시작합니다. 또, 한 부대는 화살과 돌을 막기위해 벼랑위에 울타리를 만들어, 이것으로 토성 구축자들의 무기에서  방어했으며, 다른 병사들은 작은 언덕을 허물어 흙을 공급했습니다. 이순간에도 유대인은 발사무기로 방해하려고 애썼습니다.


 

  160개(베게티우스는 한군단에 55대의 노포가 있다고 했음, 55곱하기 3개군단은 165대) 의 공성기가 엄청난 소리로 창과 100파운드가 넘는(현대기준,한 탈란트로 표시됨) 돌을 날려서 유대인들은 성벽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또 한 무리의 아랍궁수들과 투창수, 투석수들도 합세하여 공격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유격대로 로마군이 구축한 진지를 기습하여, 로마군을 죽이고 토성에 불을 질러버려습니다. 이로써 베스파시안은 여러 진지를 한번에 통합합니다. 포위방책들의 높이가 높아지자, 요세푸스는 젖은 소가죽으로 방책을 삼아 불화살과 돌을 막고 석공들에게 성을 높이게 합니다.

 
 유대인 유격대의 게릴라식 공격으로 막사가 불타고, 위와 같은 유대인의 노력은 베스파시안으로 하여금 도시를 아사시키기는 작전을 하게 만듭니다. 저항이 심했던 것입니다. 요타파타는 샘이 없었고 이 계절에는 비도 오지 않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식수를 배급했는데, 멀리서 물을 받는 유대인이 보이면 이곳에 발사무기들을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옷에 물을 적혀 주변에 걸어놓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고, 이에 속은 베스파시안은 다시 공격으로 전환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작전들은 요세푸스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것을 기록한 사람이 요세푸스의 자신이므로 그 신빙성에 의심을 더할수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현재까지 조사된 것이 없고 그럴만한 기록이나 증거도 없으므로 그 진의를 따질수는 없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절망에 의하여 매우 사나워지자, 베스파시안은 병사들에게 이들과 접전을 피하라고 명령하고는 발사 무기만으로 공격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로마군 앞으로 돌격합니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로마군은 파성추를 가지고와 성벽 공격을 시도합니다. 요세푸스는 왕겨를 자루에 담아 줄에 매달아 파성추가 때리는 지점에 내려놓았고, 그러면 충격이 반감되었습니다.


 이를 로마군이 제거하자 역청과 유황 수지들을 썩은 불소시계를 공성무기와 무기고 방책에 던져 불을 질렸습니다. 엘리아살이라는 자는 파성추에 돌로 부수려다가 화살 5발에 죽고, 네티라스와 빌립이라는 자들이 10군단전열을 부수어  다른 자들이 5.10군단 진영에 불을 질렸습니다. 이날 밤 유대인 하나가 베스파시안에게 화살로 상처를  입히기까지 합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멀리있어서 보이지 않는 투창 투석장비들을 피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기계들에서 쏟아져나온 창과 무수히 많은 돌들은 전열을 쓰러트리고 성벽에 날아와 망대의 모서리들을 부수었다. 참으로 돌들이 얼마나 강하게 쏟아지는지 아무리 강한 군대라고 견딜수없을 것이다.
그 날밤에 있었던 일들은 이 장비가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는 잘 보여준다.
성벽에서 요세푸스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은 돌에 맞아 3펄롱이나 날아 갔고 또 낮에 임신한 여인이 집에서 나오다 그 돌에 맞아 자궁안의 아이가 반 펄롱(과장일것임) 날아갔다.  이와 같은 투석기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이 장비들은 대단한 소리를 내서 더욱 놀라게 했고 창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벽에서 연달아 떨어지는 소리도 있었다.성안에서 죽어가는 희생자들의 신음소리와 합하여 여인들의 공포에 질려 찟어지는 괴성들이 흘러나왔다..유대전쟁사3권23장>

 <동이 트고 베스파시안은 기병들을 선발하여, 성벽 허술한 부분에 3분대를(또는 세길깊이)로 정열시켰다. 이들 뒤에서 보병이 지원하여 적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무너진 곳에 통로를 내게하고, 무너지지 않은 곳은 사다리를 놓았다.
요세푸스는 이를 알고는 견고한 부분에는 지치고 늙은 자들로, 적이 올 무너진 곳에는 제일 용감한 자들로 배치하였다. 로마군의 함성에 질리지 안도록 귀를 막고 화살이 날아오면 무릅을 꿇고
방패로 막고 궁수들의 화살통이 빌 때까지 기다리다가 통로가 만들어지면 나가 싸우게 했다. 또 여인들이 공포에 지려 소리를 지르자 이들을 가두었다.
모든 군단의 나팔소리가 동시에 올리고 햇빛을 가릴 만큼의 화살이 쏟아졌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열심히 싸웠으나, 교대할 수가 없어서 지쳐갔다. 그러나 로마군은 지속적으로 병사들을 교체시키고 테트투도를 만들어 방어했다.
이에 요세푸스는 끓는 기름으로 테스투도위애 기름을 부었다. 유대전쟁사 3권28장>

 이렇게 하여 로마군의 대열은 부서졌고 로마군은 화상을 입고 극심한 고통가운데 성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기름이 갑옷 안으로 흘러 들어가 화상을 입혔고 천천히 식어가는 지방으로 인해 고통은 극에 달하여 갑옷 투구는 방해만 됐습니다.  이에 로마군은 기름흘리는 자들에 달려들자 통로 위에 콩과 식물을 삶은 것을 흘려놓아 로마군이 미끄러지게 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넘어져 등뼈가 부러지거나 굴러 떨어져 죽고 유대인의 창에 찔렸으며 결국 저녁에 장군은 병사들을 후퇴시켜서 유대인의 피해는 6명전사에 300부상뿐이었다고합니다.
다시 베스파시안은  철판을 덮은 50피트 전투용 탑3개를 만들라고 지시한합니다. 불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고 안정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망대 위에 간단한 공성기와 투창수,궁수, 투석수들을 배치하여 이 높이는 유대인들을 내려다 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베스파시안은 10군단장 트라얀에게(트라야누스의 아버지) 기병1천 보병2천으로 갈릴리지역 최대의 도시(또는 마을) 야파를 포위하도록 합니다.   성밖에 로마군과 회전을 벌이다 패배하고 후퇴한 주민들은, 먼저들어간 자들이 두려워하여 성을 닫아버려 밖에서 전부 살해됐습니다. .(12,000명)
요세푸스는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쟁패배란 것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질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트라얀은 티투스로 하여금 이 성을 함락한 권리를 주고자 불려 들이고, 티투스는 500기병과 1천보병을 지원하였고, 주민들은 성를 방어하려고 했으나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됩니다. 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5군단장 케레알리우스에 의해 학살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갈릴리 주변 지역을 평정한 베스파시안은, 47일째가 되는 날, 한명의 탈주자가 성안의 사정을 알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보초교대시간에 공격하면 된다고 알려주자, 베스파시안은 속는셈치고 믿기로 합니다.
유대인들의 강함을 알기에 함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 시각에 최초로 성벽에 오른 사람은 티투스였습니다.. 그리고 도미티우스 사비누스와 15군단의 몇 명이 보초를 죽이고, 군단장 섹스투스 갈바리우스와 플라키두스의 지휘로 요새는 장악되었습니다.

 

 주민들은 그들이 점령됐다는 것 조차 몰랐습니다. 결국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많은 수가 성 외곽에 몰려가 자살을 택하게 됩니다. 로마군의 희생은 거의 없고, 백부장 안토니우스가 함정에 속아 죽었을 뿐이었으며 오히려 이런 것으로 죽은 유대인만 늘어났습니다.  유아와 여인만 살려두고 120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총4만이 죽습니다. 네로13년이었습니다

  결국 요세푸스는 자살하자는 동료들의 뜻에 반해, 자살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될꺼라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베스파시안은 욥바와 타리카이아를  함락하며 한걸음씩 다시 전진하게 됩니다. 포로 중에 노인과 무능한자 1,200사형시키고 청년6,000명은 네로와  아그립파에게 선물로 주고, 남은 30,400명은 노예로 팔았다고 기록합니다. (67.9.26)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차 유대전쟁 (3)  (0) 2007.01.31
제1차 유대전쟁 (2)  (0) 2007.01.31
로마 제국 (3) -야후-  (0) 2007.01.30
로마제국 [Roman Empire] (2)  (0) 2007.01.30
로마제국 [Roman Empire] (1)  (0) 2007.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