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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Roman Empire] (1)

영국신사77 2007. 1. 30. 15:47

                    로마제국 [Roman Empire]

 

    요약
  로마시()로부터 흥륭하여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

가르니신전 /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외곽지역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을 당시 로마인들이 세운 신전.

  로마는 BC 8세기 무렵부터 전설적 왕정기()에 속하며, BC 510년부터 공화정기()로 옥타비아누스 이후는 제정기()로 들어간다. 그러나 395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로마가 이룩한 지중해 세계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초기
본문

  로마는 인도 유럽계의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에 의하여 BC 7세기 무렵 티베리스강(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 땅에 건설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건국자인 로물루스(BC 753 즉위) 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고, 마지막 3대의 왕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로마가 왕제()를 채택하고, 그 말기에 에트루리아인이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은 군사 ·정치 ·제사()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 강력한 임페리움[]을 가졌으나, 사실은 원로원 ·민회()가 이것을 제약하여 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시민은 세 개의 트리부스로 나뉘고, 각 트리부스는 다시 10 클리어로 나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초기 로마의 근본을 이루며, 민회도 클리어회()의 형태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중장보병제()가 보급되자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종군권() ·참정권을 계급화한 재산정치적인 병원회(:켄투리아회)는 더욱 중요한 민회가 되었다.

 

  시민에게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구별이 있어, 파트리키의 여러 씨족은 많은 클리엔테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구별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역사가 분명해진 시대에는 파트리키란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영직()에 있더라도 파트리키가 될 수 없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주체도 바로 이들 파트리키였다.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 로마의 정치조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제폐지에 이어 정원 2명, 임기 1년의 콘술이 선출되어 국가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비상사태에는 임기 반 년, 정원 1명의 딕타토르[]를 두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와 같은 상태는 BC 4세기 전반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공화제의 초기는 로마의 정치제도가 앞으로 서서히 형성되어가려는,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기간에 지금까지 왕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이고도 무제한적인 ‘명령권’에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지게 된 것이다. 즉 명령권 보유자를 민회에서 뽑아 그 정원을 복수로 하여 서로 간섭 ·견제하도록 하고, 또 임기도 1년으로 한정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 등 명령권의 운용에 대한 제한체계가 공화제의 조직으로서 완성되어 갔다.

 

                             로마제국의 신분투쟁
본문

  로마 공화제 초기에 갖가지 제도들이 어떻게 되었든 국가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파트리키였으며, 플레브스는 정권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플레브스의 대다수는 파트리키의 억압하에 있었다. 즉 플레브스는 해마다 종군하게 되어 있어 생업인 농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고, 또 외적의 침입으로 소유지는 황폐화되었으며, 더구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파트리키에게 빚을 지게 되고, 그 이자때문에 드디어는 채권자인 파트리키에 의하여 몸을 구속당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플레브스는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하여 파트리키에 대하여 격렬한 신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생겨나 그 주역으로 활약한 것이 호민관()이었다. 호민관은 BC 494년의 ‘성산사건()’ 때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마침내 파트리키에게도 승인을 받아 그 ‘신성불가침’의 권력에 의하여 플레브스의 자위()와 투쟁을 지도하였다. 또 플레브스 자신들도 성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평민단()으로서의 기구를 형성하고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릴 만큼 독자성을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호민관에게 통솔된 플레브스의 첫번째 뛰어난 투쟁성과는 ‘12표법()’이라고 불리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의 성립 ·공개이다(BC 450?). 이에 따라 종래 귀족에 의한 법률지식의 독점이 깨어져 일단 귀족과 평민에게 균등하게 법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법에는 귀족과 평민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심한 반대에 부닥쳐 BC 445년에는 호민관 카누레이우스의 제안에 따라 이 금지는 해지()되었다. 이에 따라 평민 가운데 유력한 자는 로마의 파트리키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어 차차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노빌리타스지배
본문

  로마제국의 신분투쟁 과정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BC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에 의하여 플레브스파트리키와 동등하게 콘술에 취임할 수 있게 되어 플레브스의 정권참여가 확정된 일이다. 이후 수십년 사이에 다른 주요관직도 플레브스에게 개방되어갔다.

 

  이 시대 이후 로마 지배층을 형성한 것은 에퀴테스[]라고 불리는 부유한 신분이었다. 당시 고급관직은 명예직으로서 봉급이 없는 데다 많은 출비()가 요구되었으므로 적어도 에퀴테스로 꼽힐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관도()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퀴테스 가운데서도 정치가 ·장군이 되는 것은 특정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사실상 거의 세습적으로 관도에 오르고,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낸 뒤 원로원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원로원은 정치적 전문가를 망라하는 곳으로서 고대 ‘정치인’ 사이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권위에 의한 지배의 안정이 공화제의 전성기()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콘술 ·딕타도르라는 국가 최고의 관직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정된 노빌리타스라고 불리는 소수의 가문에 독점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공화제는 노빌리타스를 정점으로 하는 원로원의 권위에 이끌려 민회를 결정기관으로 하고, 정무관직()을 집행기관으로 하는 부유한 계층의 지배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정쟁()은 주로 선거전과 입법의 두 가지 형태로 행하여져 그 어느것도 민회의 투표에 의하였으므로 정치가들은 유권자인 일반시민의 지지를 구하여 그들과 사적인 은고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은고관계로 이루어지는 피호민()을 새로운 의미에서 클리엔테스라 불렀다.

 

  그 뒤 로마 정치사는 여러 당파 사이의 세력투쟁으로 충만되지만, 이들 여러 당파의 통솔자는 노빌리타스 중에서도 특히 다수의 군소 정치가를 수하에 두고 광대한 클리엔테스를 거느리는 실력자였으며, 이들은 국가의 ‘제1인자들’로 불렸다.

 

 

 

 

                   로마제국의 이탈리아 통일
본문

로마는 왕제시대에 인접국가를 제패하였고, 왕제폐지 직후의 시대에는 차차 쇠미해지는 듯했으나, 그 후에도 착실히 세력을 넓혀 BC 4세기 후반에는 라티움 통일에 성공하였다. 또한 BC 4세기 후반부터 BC 3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 중 ·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과 싸워 항복시키고, BC 3세기 전반에는 남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싸웠다. 타렌툼은 에페이로스피로스의 도움을 얻어 로마군을 크게 괴롭혔으나, 로마는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켰다.

 

  이리하여 로마는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탈리아의 각 공동체에 대해 내정면에서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 ·외교의 주권만을 쥐고 있었다. 이윽고 이탈리아반도는 전승국 로마를 맹주로 하는 일대 군사동맹체로 완성되었으나, 이 군대는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하는 데 대하여 동맹국은 별도로 편성된 보조군이 되어 로마 시민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대였다.

 

 

                    로마제국과 지중해 세계
본문
로마제국 유적지 /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관광도시 니스.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시칠리아섬에서 카르타고와 충돌, 이로부터 로마의 지중해 지배에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9세기에 세워졌고,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민족()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BC 264년부터 BC 201년에 걸친 제1 ·2차 포에니전쟁에 의하여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탈취하였다.

또 당시 지중해 세계의 동부에서는 여러 헬레니즘 왕국, 여러 도시가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로마는 여기에도 개입하여 마케도니아왕국 ·시리아왕국 ·아이톨리아동맹 등과 싸워 이 방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프로빙키아()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국제정치도 로마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노빌리타스의 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과두정치적()인 사고방식이 뿌리를 뻗어, 현 체제에 충실한 자는 ‘훌륭한 인사()’라 하였고, 특히 현 체제의 정상에 선 보수파 족벌집단은 ‘최량의 일족’이라 불렸다. 또 긍지 높은 지배계층에서는 ‘위엄 있는 한가()’가 존경을 받고, 위엄 없는 우민(), 한가하지 않은 빈민에게는 절대로 정치를 맡기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로마의 지중해 진출에 의하여 지중해 세계에 널리 강요되었다. 즉 로마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여 거기에 세력을 펴면 원주민 사회의 토착 지배계급에 대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를 유지시키고자 하였으며, 또 로마의 손으로 원주민 사회의 정치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하여야 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부유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부여하였다. 또한 각지의 지배계급도 지중해 세계에서의 로마의 압도적 우월 앞에 자진하여 로마와 손잡음으로써 자기 지위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층 중심 체제에 대하여 지중해 세계의 일반 민중은 반()로마적일 때가 많았다. 특히 각지에서 일반민중 사이에 용솟음치는 ‘변혁’에 대한 욕구(특히 의 말소, 토지 재분배 등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여, 로마는 그들과 결탁된 정치세력과 자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원주민 사회의 ‘제1인자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로마와 결탁하고, 둘은 로마 이외의 국가와 결탁하고, 셋은 자국의 민중과 결탁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당파()가 형성되었다. 원주민 사회의 여러 당파의 대립 ·상극()은 부유한 계급으로 이루어진 친()로마파의 우세 속에 전개되어 로마가 해외 경영을 진척시킴에 따라 로마의 ‘제1인자들’의 여러 당파는 전()지중해적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불렀으나, 이미 BC 2세기에 지중해는 거의 로마인의 바다가 되었고, 로마의 원로원이나 원로원의원은 지중해 세계의 주민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로마제국의 공화제 말기 위기
본문
아레아 사크라 / 고대 로마제국 공화정 때의 신전 유적으로 원로회의가 소집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4년 3월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에 암살된 곳이다.

로마의 지배계층이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로 웅비할 때, 로마의 대외 발전이 이탈리아에 끼친 경제사적 반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전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를 사용하여 부유한 지배계급의 대토지 소유가 날로 발전하는 한편, 새로이 로마에 굴복한 해외 각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의 농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각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은 병사로 출전한 이탈리아 소농민의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무산계급으로 떨어져 도시로 밀려들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과두정치가()는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하였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를 심화시키고 중소농의 몰락에 의한 군사력의 위기를 불러 로마는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다. 그들의 법안은 그 자체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으나 그들의 활동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가의 활동 패턴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최량의 일족’으로 불리고, 그것이 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포풀라레스(평민파)’정치가로 불렸다. 배타적인 족벌정치가 속에 포함되지 못한 혁신파 정치가는 ‘포풀라레스’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화제 말기의 ‘최량의 일족’으로는 술라 ·키케로 등이 있으며, ‘민중파’에는 마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나타났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 포풀라레스의 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다. 로마 당국은 이전부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는 병사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BC 107년에 병제개혁()을 단행,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안을 내려, 이후 이것이 종전의 징병보다도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장군과 사병을 특수한 신의관계()로 결속시켰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 아울러, 무산자()인 그들이 퇴역한 뒤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 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의 투표권에 의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공화제 말기의 ‘사병()’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무력투쟁이 많아진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세계 통일
본문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외인부대가 보조군으로서 쓰이게 되었다(로마 판도 안에 사는 자라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는 외인으로 불린다). 외인부대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적()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 짙어 갔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도시화되지 않은 지역이 넓고, 그런 지방의 왕후귀족은 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인은 이것을 그들의 클리엔테스(피보호자)라고 불렀는데, 로마의 유력자들은 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로마의 원로원의원-외지의 제1인자들-그 사회의 일반민’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여 갔다(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 도시 귀족이 된다).

더구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 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 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로마제국
초기
신분투쟁
노빌리타스지배
이탈리아 통일
로마와 지중해 세계
공화제 말기 위기
지중해세계 통합
제정 성립
제정 개막
5현제시대
도시 번영과 위기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제국 재건

게르만이동과 로마제국 멸망

                    

 

이미지
가르니신전
800*548, 139kb
에그나티아 가도
800*1013, 235kb
아피아 가도
465*600, 115kb
로마 주화
800*600, 106kb
모자이크 바닥장식
800*536, 177kb
로마극장 유적지
800*533, 11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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