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제1차 유대전쟁 (2)

영국신사77 2007. 1. 31. 16:10

         가말라

  가말라는 갈릴리호수 동쪽에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름은 카멜이라는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이름과 같이 낙타등과 같은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변이 절벽으로 된 접근하기가 곤란한 지형에, 요타파타와 같이 방어가 강화된 지역이었습니다.

 

 

                        
                                                      정상의 망대유적

  베스파시안은 15군단으로 가랄라를 관제할 고지를 선점하여 진지를 만들고, 10군단으로 도랑과 계곡을 메우게 하고, 5군단으로 맞은편 도시를 수비하도록 합니다.


 

  파성추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로 진입한 로마군은 적을 한곳으로 밀어 붙였으며, 좁은 지역으로 많은 병사들이 진입하자, 일부 병사들이 주변 가옥의 낡은 집 지붕으로 올라갔다가, 전체 집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로마군에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단지 수명의 부하들과 적진에 순식간에 고립되어버렸으나, 직접 방패와 검으로 싸워 무사히 철수합니다. 

 
   4권1장에 나온 흥미로운 기록은, 이떄 적진의 작은 집에 군단 백부장 갈루스와 그의 부하10명이 고립됐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시리아 인이라고 기록입니다. 베스파시안은 그의 부하들을 위로하고, 포위에 의한 아사작전으로 들어가자, 일부 주민들은 비밀동굴로 탈출하기도 하지만, 들어가는 보금품은 없었습니다.

 

  67년11월10일, 가말라가 외지에 파견 갔다온 티투스에 의해 점령 당하고, 4000명이 죽고 5000명이 도망하다가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살하고, 단지 3명만이 살아남아, 이곳의 전투를 끝을 맺습니다 

  티투스는 기스탈라에서 선동자인 요한을 놓치게 되는데, 이 자는 전 유대 반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류살렘으로 들어가, 그로 인해 도시내에서 선동을 당한 매파와 온건파간에 분쟁이 발생하고, 약탈과 살인이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요세푸스가 도둑떼라고 칭한 자들이 예류살렘으로 들어오면서(열심당원, 시카리) 정치적 반대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제사장을 임의로 선출하는 문제 등으로 이번에는 폭동이 발생합니다.  로마군단들이 반란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나가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스러운 도시 안에서 그들끼리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망해가는 집이 다 그런 것처럼...

  이 상황에서 베스파시안은, 만일 이 때 공격한다면 오히려 예루살렘을 단결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더 많은 피해를 입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오히려 로마군에게 항복하여  살길을 찾으려고 탈출하는 자들까지 있지만,  탈출하다가 잡히면 죽음을 당했기에 돈을 주고 빠져나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죽음을 당한 동족들을  광야에 그냥 내버린 채, 매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사다를 점령한 시카리(암살자들)와 예루살렘의 열심당원들이 서로 전쟁을 치루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합니다.

  68년 베스파시아누스는 헤로디움과 마카이루스, 마사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거의모든 유대를 점령하게 된다.  이제 남은 공격목표는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탈출한 자들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도움을 구하였기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하고 천천히 주변 지역을 제압함과 동시에, 초토화하여 여리고 근처까지 확보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들려온 소식은, 네로의 사망에 뒤이어 나온 갈바의 즉위와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내전으로, 유대에서의 전쟁은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비텔리우스의 황제등극은, 많은 동부전선의 병사들과 베스파시안의 분노를 삽니다. 병사들은 음탕한 비텔리우스보다, 순수한 베스파시아누스를 원하며, 게르마니아 군단들보다 자기 들이 더 고생하였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야 하는 이유를 들며, 베스파시안에게 황제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 그래서 그가 황제의 자리를 거절하자, 지휘관들은 더 열렬하게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자고 주장했다. 심지어 병사들은 떼를지어 칼을 뽑아 들고 둘러서서 황제를 수락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유대전쟁사4권11장중에서>


  69년 12월21일 무키아누스가 로마로 들어감으로써, 로마의 내전은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성스러운 도시 예류살렘은 시카리파의 시몬. 열심당의 요한, 엘르아살의 파벌이 서로 한귀퉁이씩 차지하여 내전을 벌였습니다.   로마군단의칼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겨누어진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기근과 살육이 난무하는 비참함으로 가득찼습니다.


                                  <3권5장 의 로마군들에 대한 묘사


  1.특히 로마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일하는데 뿐아니라, 전쟁에 대비하여 노예를 유용하게 부리는 점은 모두가 감탄할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전체적으로 로마의 군대조직을 연구해본다면, 그들의 광대한 제국이 행운의 산물이 아니라 용감함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로마는 무기를 들고 첫 수업을 쌓기 위해 전쟁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나라가 아니다.  또한 그들은 평화시에는 팔장을 끼고 앉아 있고, 필요시에만 거동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훈련을 쉰 적이 없었으며, 비상사태가 터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 시에도 그들의 기동훈련은, 실전보도다 더 격렬하였다. 각 병사들은 매일 훈련에서, 마치 실제에서처럼 그들의 온 힘을 쏟는다. 그래서 전쟁의 충격에 견디는 대담한 담력을 가질 수 있었다.아무리 혼란해도, 그들이 평상시의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혼란도 없고 지칠 줄도 모른다. 그들의 적들은 이런 로마군에 대항할 수 도 없었고, 승리는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로마군에 뒤따랐다. 실로 그들의 훈련은 무혈의 전투와 같으며, 그들의 전투는 피나는 훈련과 같다고 묘사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로마군은 갑작스런 공격도 방어할만큼 준비하였다. 그들이 어떤 진지를 침입하더라고, 그들이 진영을 요새화하여야만 공격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진영은 아무렇게나 세우지 않았다. 땅이 평평하지 않으면 처음에 고르게 했으며, 진영을 만들 부지는 정방형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목적을 위해서 많은 노동자들과 축조에 필요한 도구들이 군대에 동원되었다. 

 

                                      
2.장비와 사령부 


  진영의 내부는 장막들이 열을 지어 잘 구별되었다. 외부의 둘레는 벽모양으로 띠었으며 일정한 간격으로 망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망대 속에는 노포,투석기,다양한 전투 장비 등 필요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 벽 주위에는 각면에 하나씩 성문이 4개 있었고,  짐 실은 짐승들이 어려움 없이 들어가기 충분했으며, 비상시에 군대가 출격 할만큼 충분히 넓었다.  진영은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대칭적로 나누어졌다. 중앙에는 장교들의막사가 있고 한가운데에 총지휘관의 본부가 마치 소신전처럼 위치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즉석도시가 솟아 오른 것처럼 시장공인들의 막사, 우두머리와 연대장들이 발생하는 분쟁을 판결하기 위한 재판석도 있었다.
외부벽과 내부의 모든 성은 많은 기술자들로써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었다. 또한 필요시에 진영둘레에 깊이와 넓이가 4규빗이나 되는 호를 파기도 했다.

 

                                         3.일상생활


 

  한번 참호를 파면 병사들은 그들 부대의 막사 안에서 동료과 조용히 질서를 지키면서 지냈다. 그들은 진영내의 고된 임무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훈련과 같은 비중을 두고 수행하였다. 필요시에 각 부대는 나무, 식량, 식수를 조달하는 등 할당된 일을 하였다. 아침 저녁 식사시간은 개인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함께 식사하였다.  취침 교대 기상시간은 나팔소리로 알렸고, 지휘관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각 부대들은 각각 백부장들에게 보고했으며, 백부장은 사령관에게 인사하여 가서 그때 모든 장교들과 함께 총사령관을 기다렸는데, 거기서 관례에 따라 암호와 하부 대열들에 전달 될 명령들을 주었다. 이와 같은 정밀함이 전장에서도 유지되었다. 군대는 진격하든지 퇴격하든지 필요한 방향으로 민첩하게 움직였고, 모든 행동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체로 움직였다.

                                                         4. 진영의 해체와 군대의 진격

 

  진영이 해체 될 때 나팔이 처음 울린다. 그때는 아무도 늦장 부리며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곧 이 신호를 듣고 장막을 철거하고 모든 출발 준비를 했다.


  두번째 부는 나팔소리는 진군준비를 하라는 소리였는데, 그들은 나귀나 그밖에 다른 짐승 위에 짐을 싣고, 마치 출발선에 있는 경주자들처럼 출발을 위해 도열해 있다. 그때 그들은 진영에 불을 질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그곳에 다른 진영을 쉽게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 진영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세번째 부는 나팔은 출발을 위한 신호였는데, 어떤 이유에서 지체되었건 늑장부리는 사람들을 재촉하기 위해서이고, 아무도 그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확실히 보호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떄 전령관이 장군의 오른편에 서서,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었는지 그들의 모국어로 세번 물었다. 그러면 그들은 세번 크게 준비완료라고 외쳤는데, 예상하고 있던 질문인 것처럼 대답했다.
그들은 전쟁에의 기대감으로 진군하면서 소리치며 흥분하여, 그들의 오른손을 쳐들기도 했다.


                                                 5.무기와 장비


 

  그들은 그때 진군하는데, 일사분란하게 행군하면서 마치 적을 대하는 것처럼 각 병사들은 대열에서 자기 위치를 지켰다.
보병은 흉배를 붙이고( 갑옷) 투구를 쓰고 양쪽에 칼을 지녔는데 왼쪽에 장검이었고 오른쪽에 찬 것은 한폄도 안되는 단검이었다.
선별한 정예 보병들은(군단근위대) 장군을 호위했는데, 창과 원형 방패를 가졌고 던지는 창과(필넘) 긴방패를 지녔으며, 보병대의 장비는 톱 바구니 곡괭이 가죽끈은 물론, 갈고리 쇠사슬과 삼일 분의 식량 등이었다. 따라서 보병 한명의 짐은 노새 한마리에 전부 실을만한 무게였다. 기병들은 오른쪽에 긴 칼을 차고, 창만큼 길고 끝이 넓은 3개 이상의 창이 든 통을 옆에 차고 있었다. 선발된 정예기병들은 장군을 호위 했는데, 일반부대와 같이 무장을 하였으며, 선봉부대는 항상 제비를 뽑았다.

                                       6.전술에 관하여

 

  로마군이 행군할떄나 진영에 머물 때의 모습과, 그들이 지닌 무기들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전투할 때, 그들은 작전없이 되는 대로 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늘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행동하였다. 따라서 로마군은 실수가 드물었고, 그들이 작전을 세워 실패했을지라도 그것은 운이 좋아 승리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승리를 하면 경솔하게 되기 쉽고, 반면에 가끔 실수가 따를지라도, 신중한 작전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는 유익한 교훈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연히 얻어진 행운은 신용할 수 없는 반면, 많은 계획을 세웠어도 그 반대로 실패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간과해서 안된다는 교훈을 최소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7. 훈련방법

 
  로마군은 전쟁 훈련을 받음으로서, 신체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도 점점 담대해졌다. 역시 훈련 중에 공포도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것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단지 근무를 태만히 하는 경우에도, 법대로 사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장군들은 법보다 가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용맹스런 병사들에게는 포상을 했으며, 범법자들에게는 심하게 처벌하였다. 이런 완벽한 훈련은 평화시에는 장식품일지 몰라도, 전시에는 전체가 한 몸처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대열은 매우 탄탄했으며, 좌우 이동하는데 아주 기민했으며, 모든 명령을 아주 빨리 수행했고 고통을 견디어내었다. 로마군에게 있어 계략이나 인원이나 지형의 어려움 때문에 패배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 운이 나빠 패배했다는것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운보다 더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심사 숙고했고, 지휘관들의 전쟁계획에 걸맞게 효율적인 작전 회의가 따랐다. 따라서 로마제국이 동쪽으로는 유브라데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대양과, 남쪽으로는 이스테르와 라인강까지 그 경계를 확장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영토는 광활하고, 여전히 아직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

  70년 로마제국의 권력이 바뀌면서, 다시 유대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진군
티투스는 기존의 5. 10. 15군단에, 케스티우스의 12군단과 동맹국들의 지원부대와 시리아 원군, 그리고 티투스가 직접 데리고 온 추가 병력 5,000으로 보강하고, 티베리우스 알렉산더를 부지휘관으로 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군합니다.

티투스
5군단은 엠마오로, 10군단은 여리고로, 티투스는 나머지를 이끌고 사마리아를 지나 고프나로 진군합니다.
티투스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처럼,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집중당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기병만으로 길을 정탑하다가 기습을 당하였지만, 갑옷을 입지 않았음에도 상처 없이 무사히 탈출하게 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갈수록 유대인들의 패배가 신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으로 진군하여, 동쪽의 감람산 비탈에 진지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때 내전을 멈추고 이를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불안을 느끼고 밖으로 몰려나가, 작업중인 로마군을 공격했습니다. 군단병들은 아무 무장도 안한 채, 긴장을 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려나온 수 많은 유대인들을 보고, 어처구니 없게도 놀라 달아났던 것입니다.  이들은 전열을 갖추고 준비된 훈련만 했지 ,갑작스런 임기응변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군단은 케사르가 가장 신뢰했던 그 10군단이었습니다. 이를  간신히 제압한 티투스는, 다른 곳에서 또 몰려나온 유대인들의 무리로 인해 거의 모든  군단병들이 또다시 달아나 버려,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적들 사이에 고립되어 싸워야 했습니다
티투스가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끝도 없이 도망가다가, 그가 아직 그 자리에 싸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다시 우루루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티투스의 지휘에 의해, 다시 유대인들을 몰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첨이나 시기심에서가 아니라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실 가이사 티투스는 개인적으로 2번이나 위험에 처한 군단 전체를 구출해 주었으며, 로마군들이 안전하게 참호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대전쟁사 5권 2장중에서>


  불과 얼마뒤, 유대인들의 얄박한 유인책에 상당수의 군단병들이 명령을 어기고 움직이는 통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티투스는 명령 불복종에 사형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숫자가 좀 많은 편이었고, 다른 군단병들이 선처를 호소하여 적당히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근래에 군단병들이 보여준 행동은, 로마군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티투스는 추가적인 유대인들의 기습에 대비하고, 물자수송과 깉카 부대 안전을 위해, 예류살렘 4면의 성문에 3열과 7열씩의 정예병들로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전쟁사에서 예루살렘의 성벽과 그 당시 헤롯대왕이 세운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 성벽와 망대가 세워진 때와 세운 사람, 이름등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성벽은 모두 3개로 이루어져있으며, 이것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서쪽면으로 연장되어있었습니다. 동쪽면은 절벽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절부터 기초가 된 제1성벽이 성전을 포함한 채 언덕을 따라 여러구역을 형성하였고, 제2성벽은 조금 더 북쪽과 서쪽으로 연장되었으며, 아그립바1세에 의해 축조된 제3성벽은 시가지가 연장되어 이를 포함하기 위해 둘러쳐 졌는데,  북쪽과 남쪽과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집니다.  헤롯의 궁전은 언덕이 아닌 제3성벽의 서쪽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안의 병력상황
시카리의 협력자 시몬파
유대인만 만명에 이교도인 이두매인 5000명

열심당원 요한파
엘르아살이 중도에 다시 이들과 합쳐서 2,400명의 병력을 가졌다.

  티투스는 그의 친구인 호민관 니카노르가, 예루살렘으로 협상을 하러 갔다가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것을 보고, 공격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유대인이 협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주위의 나무들을 잘라내고, 토성을 축조하도록 했으며, 각종 전쟁기계들로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각 군단의 전쟁기계들은 각기 제작되어 그 성능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특히 10군단의 투석기(또는 석궁)인 스코르피오는 가장 많은 피해를 안겼다고 합니다. 이런 로마의 전쟁기계는 한 달란트, 현재 단위로 약 45~50kg의 돌을 날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그 동안 노획한 기계들을 이용했는데 사용이 서툴러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또 다른 대비책은 관측수가 날아오는 밝은 색의 돌을 보고, 돌이 날아온다~ 라고 알려서 피해를 줄였습니다.  로마군은 다시 검은색을 칠하여 돌을 날려보냅니다.

  로마의 기술자들은 줄을 납에 달고 성벽에 던져서 길이를 측정한 뒤 파성추를 사용할 공간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각 군단들은 각각의 파성추로 성벽을 때리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밖으로 달려나가 로마요새에 불을 놓거나, 파성추에 불을 지르는 등 로마군을 괴롭히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70년 5월25일,
  포위가 시작된지 15일후,  유대인들이 빅토르라고(승리) 이름을 붙인 가장 큰 파성추가 드디어 제3성벽(로마측에는 첫번째 성벽, 이 성벽은 주로 서북쪽에 넓게 되어있었음))을 붕괴시키자, 유대인들은 후퇴하게 됩니다.

  5월30일 제2성벽 점령
  티투스는 양털가게, 옷 가게 등이 있는 거리에서 시가전을 벌입니다.  시가지가 좁고 복잡한데다가, 유대인들은 지리를 잘 안다는 이점으로 인해, 로마군은 3일간 후퇴했다가 다시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북쪽지역을 모두 확보하고는, 마지막 남은 고대성벽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갑니다.

  이 전쟁의 본 목적이 반란 진압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자체와 무엇보다도 성전, 그리고 도시 주민의 재산과 안전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면 요세푸스에 의한 아부일 수 도 있지만,  본래 유대는 로마에 상당히 협력적인 동맹국의 나라였으며, 왕조 역시 로마에 가장 큰 협조자인 헤롯대왕의 자손이었기에, 아그립바왕을 거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군단의 봉급일
  티투스는 전선에 일시 소강 상태로 두고는, 유대인들에게 로마군단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군의 관례대로 부대를 정열시키고는,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군단병들의 봉급을 지급합니다.
<티투스는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로 한날이 다가오자, 지휘관들에게 병력을 정열시키게 명령을 내리고, 적이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각각의 병사들에게  돈을 세어 지급했다.  군사들은 관례대로 차고 있던 칼집에서 무기를 뽑아 들고 갑옷을 입은 채 행진했다. 기병들은 번쩍이게 장식된 말을 타고 행진했다. 예루살렘 앞지역은 금과 은으로 멀리까지 반짝거렸으며, 로마군들에게는 이것보다 더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것이 없었으며, 적군인 유대인들은 이 광경보다 더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것이 없었다. 유대전쟁사 5권9장중에서>

  티투스가 군단병들의 봉급지급에 4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그는 안토니아 망대와 다른 지역에다 토성을 축조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안토니아탑은 구성벽, 즉 높은 언덕에 성전건축물에 같이 붙은 거대한 4각 구조의 탑으로 헤롯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기초가 된 언덕의 높이가 50규빗에다가 높이가 40규빗이었다 합니다.  (규빗: 아랫팔을 기준으로 나타내는 유대의 길이의 단위 ,작은 규빗 약45츠, 큰 규빗 약55cm이상, )

  그리고 작은 탑4개가 모서리를 이루며, 그중 한 개는 70규빗의 높이로 되어있어 매우 높은 망대였습니다.  그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차 성경의 사도행전 21:27~40에도 언급되어있습니다.  이곳이나 이부근 어디가 필라투스 폰티우스( 본디오 빌라도, 서기26~36년 유대총독, 1961년에 가이사랴라는 지방의 로마경기장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 석판이 발굴되었다. 내용은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경기장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의 거처였을것으로 추정되며, 그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이 바로 이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안토니아라는 이름은 헤롯이 마르크르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붙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이곳의 바닥에는 주사위 놀이판으로 보이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 예루살렘시가지가 다 보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방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로 앞에 토성을 쌓자 ,여기서 던지는 돌과 화살,  유대인들이 보유한 크고 작은 340개의 전쟁기계들에서 날아오는 물건들로 인해, 토성 건축의 시간이 매우 더디었습니다.

  한편 티투스는 유대인들이 항복할 수 있도록 요세푸스에게 권면하도록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전쟁은 신께서 로마의 손에 유대를 붙이신 것이라고 설파하면서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강팍한 열심당원과 시카리들로 인해 빠져나려고 하는 자들은 살해되었으며, 포위가 지속되면서 아사자도 넘쳐났다고 기록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아이의 입에서 음식을 빼앗는 어미와 자식을 잡아먹은 여인에 대해 기록하고, 동족을 학대하는 수성자들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과연 요세푸스의 이런 기록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는 것으로, 요타파타에서의 집단자살과 마사다의 집단자살, 예루살렘과 다른 지역에서의 유대인끼리의 살해에 대해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뢰하는 쪽도 있습니다.

  유대쪽에서 보면, 요세푸스는 어용 사학자로써 로마인에게 항복하여, 황제에게 빌붙여 호이 호식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유대의 역사를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라는 저서가 또 있습니다.) 포장했다는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가 될거라고 자신이 예언했다는 것을 자신의 저서에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로마에 꼬리 흔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타키투스 외에 다른 사람도 이것을 기록했음)

  과연 유대독립운동가들로 알려진 (또는 그렇게 유대인들로 인해 포장된) 떼강도라 불린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그렇게 동족을 살해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에 한가지 신빙성을 주는 것은, 성경으로 예수와 같이 필라투스(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바라바라 하는 자가 열심당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에는 살인자 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15:7, 눅23:18, 요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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