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 ·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全帝國)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屬州)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가 생겨나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체제의 영속화(永續化) 문제는 원수가 되는 기본적 원리와는 반대로 세습의 원리, 즉 왕조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猜疑心)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皇帝禮拜)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帝國)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 ·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妃)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帝位)는 티투스(재위 79∼81)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