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로마제국 [Roman Empire] (2)

영국신사77 2007. 1. 30. 18:27
                        로마제국의 제정 설립
본문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지배층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낡은 도시국가적 제도였다. 이를테면,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엄존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또 이 무렵부터 정치적으로 큰 세력이 된 실업가로서의 기사() 신분을 가진 자는 징세청부인() 또는 고리대금업자로서 속주민()을 착취하였다.

지중해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는 정치가는 로마의 시정()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가와 대립하여 보수적인 원로원에 반역하고 오히려 민회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지중해 세계 전체의 ‘부유한 자’를 살리려는 정치가는 공교롭게도 로마의 ‘부유한 자’의 이해를 대표하는 그룹과 충돌하였고, 그 때문에 로마 시정()에서는 민중파가 지향하는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세력이 뒤엉켜 격렬한 당파싸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이나 민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다시 사병()의 무력을 사용하여 지중해 세계의 동서에서 처참한 혈투를 전개한 것이 공화제 말기의 내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BC 80년대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의 싸움을 제1차 내란이라 부르고, BC 40년대 전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의 싸움을 제2차 내란이라고 부른다.

아뭏든 제정() 성립 전() 1세기의 로마사는 크고 작은 격렬한 정쟁()으로 일관하였으며, 이것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차 3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및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시대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의 당파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세력을 확립함으로써 제정()이 확립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의 정치를 펼치는데, 이것을 보통 제정이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제정 개막
본문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후 전개된 내전의 궁극적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었고,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 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다. 이에 대하여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고, 이렇게 하여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제를 재건하였으나 여러 가지 권한 ·권능은 아우구스투스 한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체제는 원수정치()라 불리며, 그는 호민관 직권, 프로콘술 명령권, 콘술 명령권 등 공화제적 관직에 부수하는 권한을 종신토록 보유하고 전제국()의 약 절반에 달하는 속주()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제국 최대의 부호인 동시에 사병()이나 다름없는 대규모 상비군을 거느린 원수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은 황제 이상의 것이 되었으며, 도시국가 이념과는 상반되는 개인숭배가 생겨나서 평화와 질서를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숭앙받게 되었다.

한편 체제의 영속화() 문제는 원수가 되는 기본적 원리와는 반대로 세습의 원리, 즉 왕조적인 것으로 변모하여 후계자 선택에 부심하던 아우구스투스도 결국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의 한 사람인 티베리우스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음침하고 시의심()이 강한 티베리우스(재위 14∼37) 시대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 속주 통치와 제국관료()의 기구는 정비되었다. 9년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에 토이토부르거발트전투에서 입었던 패전의 상처와 동요도 일소되고 변경의 군사정세도 호전되었다. 동쪽은 유프라테스, 북쪽은 다뉴브와 라인강이 자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제3대 칼리굴라(재위 37∼41)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 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황제예배()에의 길을 한 걸음 빠르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가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된 뒤, 황제에 추대되어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는 제국()의 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를 제도화하여 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 ·재정조직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네로(재위 54∼68)는 차차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어 모친과 비()와 처남을 죽이고, 로마시에 불을 질러 그 죄를 그리스도교인에게 씌워 많은 그리스도교도를 살해하여 일종의 공포정치를 폈다. 제국의 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각지로 침투하여 들어오고, 베드로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지칭하였으나,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지막 승리자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다. 유대 진압은 그의 아들 티투스에게 계승되어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는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원로원과의 협조 아래 거대한 관료조직을 정비하여갔다. 제위()는 티투스(재위 79∼81)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로 계승되었으나, 전제군주적인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이 왕가의 지배도 끝이 났다.

 

 

 

                           로마제국 5현제시대
본문

로마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아라비아(나바타이)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 ·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 ·제국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제() 등을 개선 ·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국 도시번영과 위기
본문

5현제시대, 즉 로마의 평화시대는 ‘도시화’ 정책이 침투하고 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속주민에게는 널리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고,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도시의 번영은 2세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다다랐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 ·바실리카 ·극장 ·원형극장 ·공공목욕탕 ·수도를 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문화의 주체를 이룬 것은 도시의 부유층이었다. 그들은 도시참사회()를 구성하고, 도시의 관리[]에 취임,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한편 제국정부는 도시 부유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정책을 취하여 제국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제국 각지의 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 ·인도 ·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이미 5현제시대의 제국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국의 번영을 노예제에 의존하여 온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생산품의 대부분을 수출하여오던 공화제 말기부터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 노예제 대농장 경영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노예는 노동력인 동시에 자본투하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공급원의 감소, 투하자본으로서의 불안정, 상품판로의 정체() 등 노예제사회를 뿌리째 뒤흔드는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예제 자체가 지니는 비능률성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순이 따라다녔다. 확대 정책에서 수세로 전환하던 제국의 정책과 더불어 이미 그 징후를 보이고 있던 노예제 농장경영에서 소작제로의 이행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다음에는 산업의 원심적() 경향, 즉 중심()의 이동과 경제권의 분립, 게다가 시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수송의 난점()과 신용의 불확실성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또 ‘고대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던 속주의 징세청부와 고리대금자본의 형성 ·발전이 두절되고, 확대재생산도 불가능하여 속주의 각 블록 경제권 번영에도 불구하고 차차 자유로운 사기업이 저지되어갔다. 더구나 시장이 한정되어 있었던 점, 즉 건전한 사회적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반시민이 구매자가 되는 사회가 이룩되지 못했던 점은 번영의 저변이 매우 취약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토지소유제의 보급은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켜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 농촌 및 사유지로 옮아갔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 도시의 노화현상이며, 나아가서는 농촌 및 사유지에서의 계층의 분화였다. 이리하여 로마제국의 세포라 할 도시들이 그 기능을 잃어가는 한편 소작인에게 가하여지는 부담도 점차 무거워져갔다.

 

 

 

               로마제국의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시대
본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 로마 포룸 로마눔에 있는 로마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은 203년에 그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 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였다. 동쪽에서는 강력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서는 한편, 안으로는 수많은 모순을 지닌 제국의 위기에 대처한 것이 세베루스왕조의 여러 황제였다. 먼저 북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에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공동통치자인 동생을 살해한 뒤 212년에 칙령을 공표하여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하였다. 세수()의 증가를 노린 칙령이었다고도 보이나 이 칙령에 의하여 로마 시민권은 제국 전체에 확대되고, 화폐가치의 하락, 인플레이션의 격화는 멈출 줄을 몰라 안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세베루스왕조 시대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군대와 관료가 지배하는 국가체제가 분명하게 형태를 갖추고, 통제경제와 인플레이션이 진전되어 제국의 구조가 변하여가는 시대였다.

이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에 의한 태양신의 국교화()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다.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 222∼235)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로 바뀐다.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던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의 아들 갈리에누스(재위 253∼268)는 황제 직속의 기동대와 독립기병대를 창설하여 군의 주력부대로 삼았고, 제국을 중흥시킨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기병을 한층 강화하여 외세의 압력에 대처하고 대상도시() 팔미라를 지배하에 두는 한편 서쪽 갈리아의 지방정권 독립을 취소하고 제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 통제적 강제국가체제, 더구나 이민족까지 포함한 혼성국가에서는 제권()의 절대화가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신총제이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로마제국은 3세기에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이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한편 그리스도교 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 일이었다. 이미 네로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기도 하였고,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여졌다.

또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는 민중의 선동에 의하여 자주 일어났으며, 본래는 외래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왔던 로마제국 정부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250년 데키우스황제의 포고, 즉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 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이탈자를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257년 및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 의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교회에 대하여 신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본문

내란을 수습한 로마제국에 평화를 가져온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변경 수비를 또다시 굳게 하고 통치기구를 정비, 로마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다. 286년 부제()인 막시미아누스를 정제()로 승진시켜 그에게 서방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동방의 통치를 맡았으나 293년에는 다시 부제를 각각 새로 임명하여, 사분통치제()를 확립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군대의 재건, 재정의 재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301년에는 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현물징발을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로 하는 세제()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모든 부과금()은 공평하게 토지 단위(iugum)와 인두() 단위(caput)로 할당되었다. 또 행정상의 개혁으로는 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라고 이름 붙인 12개의 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운 전제군주정체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황제 퇴위 후 내란을 수습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였다. 황제는 312년 하늘에서 십자가의 표지()를 보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 로마로 입성한 다음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 그리스도교 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황제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교의논쟁()의 해결을 꾀하였다. 이어서 330년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개설하여 제국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더욱 더 굳건히 하였다.

황제는 라인 ·다뉴브의 국경선에서 게르만인을 격퇴하는 한편, 게르만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다. 전제군주 정치하에서 로마 시민의 직업 세습()과 강제화가 크게 진전되고, 또한 세제의 강화와 함께 징세의 임무를 맡는 도시참사회원 신분의 세습화도 촉진되었다. 더구나 농촌에서는 소작인의 이동이 금지되어 ‘콜로누스’로서 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 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의 내분으로 제국은 황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어 가던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F.C.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전통적 제의()와 이교()를 부흥시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로마 고제()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 치세는 단명으로 끝났다.

 

 

 

                     게르만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본문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로마에는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란()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에게 쫓긴 서(西)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정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380),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카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부르군트족프랑크족도 갈리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476).

한편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에 비하여 경제적 ·문화적으로 활력이 있었고, 통치기구도 정비되어 있었으므로 서쪽의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800년 샤를마뉴의 대관()은 로마제국의 부흥을 의미하였고, 또 ‘로마황제’라는 호칭은 오토 2세 이후 줄곧 사용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로 알 수 있듯이 황제들은 로마적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보호자로서 그 권위를 지켜갔다.

 

 

로마제국
초기
신분투쟁
노빌리타스지배
이탈리아 통일
로마와 지중해 세계
공화제 말기 위기
지중해세계 통합
제정 성립
제정 개막
5현제시대
도시 번영과 위기
세베루스왕조와 군인황제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제국 재건

게르만이동과 로마제국 멸망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차 유대전쟁 (1) <요세푸스>  (0) 2007.01.31
로마 제국 (3) -야후-  (0) 2007.01.30
로마제국 [Roman Empire] (1)  (0) 2007.01.30
서로마 제국 [Western Roman Empire]  (0) 2007.01.30
비잔틴 제국 [Byzantine Empire]  (0) 2007.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