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제1차 유대전쟁 (3)

영국신사77 2007. 1. 31. 20:38


  예루살렘 서쪽 구 성벽

  유대인들이 수시로 밖으로 나와, 공격과  보급을 위해 기습과 약탈을 감행하자, 티투스는 이들을 십자가에 메달았으며, 그 숫자는 거의 매일 500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의 목적은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로마동맹국 왕의 아들이, 마케도니아식으로 훈련된 사춘기 갓넘은 군사들을 이끌고 도착합니다. 아르매니아 북부에 위치한 콤마게네 출신들로, 알렉산더대왕의 제국의 잔재가 상당히 오래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6월16일 각 군단들은 각기 4개의 토성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밑에 굴을 파서 이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고, 거의 자살적인 용기로 로마군의 진지와 공성기에 불을 놓습니다. 이렇게 광신적인 돌진으로, 로마군은 전쟁초기부터 번번히 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티투스는 직접 지휘하여 또 이 일을 진압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티투스는 장군들과 신속히 성을 공격할 것이냐 말 것 것이냐로 논의를 합니다.  티투스의 주장에 의해, 보급부족으로 아사할 자들에 목숨을 걸고 공격하는 것보다,  포위를 유지하고 군사들을 놀려두지 않고 또 도시의 포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굴곡이 다르고 복잡한 현 포위선을 완전히 토성으로 연결시키도록 장군들을 설득시킵니다. 이것이 로마군의 그 유명한, 특히 케사르의 갈리아원정을 위기에서 승리로 바꾸어준 공성 포위성인 것입니다.

  불과 3일만에, 로마군은 전 예루살렘을 완전히 봉쇄한 토성을 완성합니다. 이 토성은 북쪽의 제2성벽내에서, 도시의 남쪽과 동쪽의 가파른 절벽 맞은편을 완전히 둘러버렸습니다.

  그러자 성의 기근은 더더욱 심해져 아사자가 넘쳐났으며, 강도단(열심당원과 시카리들)은 이들을 죽이거나 더 고통받게 그냥 버려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체는 성벽 밖의 절벽으로 내던져졌습니다.
<티투스가 순찰을 하면서, 계곡에는 시체들이 가득하고, 시체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보고 그는 신음소리를 내었고, 하늘로 손을 들면서 신을 불러 이모든 것은 자기가 한일이 아니라고 소리쳣다. 유대전쟁사 5권12장 4절>

  기근이 극에 달해가고, 유대인끼리의 내분도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고있을 때, 탈주자들이 절벽을 내려가 로마군의 포로수용소로 들어갔습니다.  너무 먹어서 내장이 터졌다고 할 정도였다고 기록되는데…………………..
한 탈주자가 자기의 배설물을 뒤지다가, 시리아와 아랍인들(로마군에 협력하는)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남이 안볼 때 해야지 눈에 너무 띠는 행동이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삼킨 금화를 찼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부유하여 아테네보다 금의 가치가 반도 안되었던 것입니다.  (25드라크마에 12드라크마)

  탈주자들이 금화를 삼킨다는 소문이 전 진지에 퍼져, 특히 시리아와 아랍인 그리고 일부 로마군단병들에 의해 탈주자 내장 수색작전이 비공식적으로 일어납니다.  그 밤 동안 2,000명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티투스는 이에 매우 진노하여, 해당자를 모두 사형시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희생자보다 더 많아져,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자들을 모아, 재발시에는 해당자도  수색 당할 것이라고 협박을 놓습니다. (누가 처벌 받았다는 기록은 없음) 이일로 많은 탈주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탈주하였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더 경악할 것은 요세푸스의 내용으로, 이런 행동들을 비난해야 함에도(물론 그럴 배짱이 있을지…)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며 글을 써놓았습니다.

  한 탈주자가 증언하기를  그가 맡은 성문 밖으로 그날까지 115.880명의 시체가 밖으로 운반되어졌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그리고 다른 자들은 성밖으로 내던져진 시체가 거의 600.000였으며, 이에 힘이 부치면 가장 큰집에 시체를 쌓아 문을 잠갔고, 곡물  한되가 한 달란트로 팔렸으며, 잡초와 하수구, 소똥까지 식량을 구하는 자들이 뒤졌다고 전합니다.  
  요세푸스는 그럼에도 열심당의 요한이 성전의 금은 식기들을 약탈하고, 성전내의 포도주와 기름을 내어 마시고 몸에 발랐다고 기록하며, 로마인이 아니라면 소돔과 같은 벌을 받았을 것이라며 분개합니다.  성전에 바쳐진 것을 먹은 유대인은 다윗 뿐이었습니다.

  로마군들은 토성을 강화하고 보강했는데, 유대인들도 수시로 인해전술로 인한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유대인의 숫자는 항상 많았기 때문에, 방어를 하기란 참으로 곤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포위망을 돌파할 능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로마군 진지에 불을 놓는 시도를 주로 하였습니다. 로마군들은 토성 축성작업에 사용하느라 예루살렘의 주변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 예루살렘 주변은 완전한 황무지로 변해버렸습니다.

  7월22일
  로마군이 판 굴이 안토니아 성벽밑으로 들어가, 안토니아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티투스는 지친 로마군들을 독려합니다.  군단병 중에 시리아 출신의 까무잡잡하고 빈약한 체구에 쇠약해보이지만 용감한 것으로 알려진 사비누스라는 병사가 일어나 지원합니다.

<………………폐하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사비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왼손으로 방패를 잡아 머리위로 쳐들고는 오른손에 칼을 뽑아 들고 성벽쪽으로 달려나갔다. 시간은 거의 6시였다. 그의 용기에 본받아, 그를 따라 다른 11명이 나섰고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사비누스는 다른 11명보다 먼저 달려갔는데,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벽에서는 수비병들이 돌진해 오는 사비누스 일행을 향해 창을 던졌고, 사방에서 활을 비오듯 쏘아대는가 하면, 커다란 돌을 아래로 굴려서 사비누스를 따르는 11명중 몇 명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활과 창을 잘 피하면서 결코 발을 멈추지 않고 돌격하여, 성벽의 위에 도달하여 유대인들을 패주시켰다. 유대인들은 사비누스의 힘과 용기에 두려움을 느꼈고, 더 많은 로마인들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운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운이 용기 있는 공훈을 시기하여, 영광스런 업적의 성취를 방해 했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사비누스는 목적을 덜성하기 직전에, 그만 미끄러져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위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도망가던 유대인들은 되돌아와, 사비누스가 혼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사방에서 그에게 화살과 창을 던졌다. 사비누스는 얼마간 무릅을 일으키고 방패로 몸을 가려 적이 다가 오지 못하게 방어했으며, 다가 오는 유대인을 찔러 몇몇을 상처를 주엇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심한 부상으로 인해 곧 칼을 떨어뜨리고 유대인이 던지는 창과 활에 만신창이가 되어 숨을 거두었다.

  사비누스의 경우 그의 용맹성에 더 나은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비참한 운명을 맞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비누스의 죽음은 그의 공적과 함께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1명의 그의 동료들 가운데 8명은 부상을 입고 로마군에게 구출되었고, 3명은 성벽 정상에 오른후 돌에 맞아 죽었다. 사비누스의 이사건은 파네무스의 3일에 일어났다.(유대 달력)

  7. 이틀 후 토성외곽을 수비하던 20명의 로마 수비병들은, 5군단의 기수와 기병대에서 2명의 기수와 나팔수1명의 도움을 얻어, 밤 9시에 안토니아 망대 쪽으로 무너진 성벽을 통해 조심스럽게 소리내지 않고 접근햇다.  그들은 안토니아 망대로 들어가면서 마주친 제일선의 잠자고 있는 보초들을 죽였고, 성벽을 장악하고 나서 나팔수에게 나팔을 불라고 지시 했다.

 

  그러자 다른 보초병들은 로마군이 몇이나 올라 왔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황급히 도망갔다. 왜냐하면 당황한데다가, 나팔소리까지 들리자  로마군의 많은 병력이 올라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나팔 신호를 듣자, 급히 병사들을 불러 무장시키고, 지휘관들과 정예부대와 함께 제일먼저 성벽에 올라갔다. 유대인들은 성전으로 도망갔으며, 로마군 역시 요한이 로마 진지까지 파놓은 지하터널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갔다.

 

  요한과 시몬에게 속한 두강도떼들은 두패로  나뉘어 로마군의 집입을 막으러 노력했고, 온힘과 정신으로 성전에 못들어오게 막았다. 왜냐하면 강도떼들은 로마군이 모든 게 끝나고 포로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로마군은 성전으로 진입하는 것을 승리의 서곡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로마군은 성전을 장악하려하고,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안토니아 망대로 몰아내기 위해, 양쪽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창과 화살은 양쪽의 병사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칼을 뽑아 들고 접전을 했으며, 이러한 난투극 속에서 어느쪽이 어디서 싸우는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적과 아군의 소리는 모두 뒤섞여 있었고, 한정된 좁은 장소에서 뒤범벅이 된 채,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그들의 고함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양편 모두에게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시체와 죽은 자들의 무기는 밟히고 짓눌렸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승리하는 쪽은 추격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도망가는 쪽은 애통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워낙 좁은 장소이기에, 도망갈 곳도 추적할 곳도 없었다. 다시 말하면, 몸과 몸이 부딪히는 육박전이었으므로, 싸우는 위치가 바뀔 뿐이었다. 앞에 있는자들은, 양편 모두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든가 죽든가 였다. 왜냐하면, 모두 뒤에 있던 자들이 자기편 앞쪽으로 계속 동료들을 밀어내므로, 싸우다가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결국에 유대인의 사생결단적인 저항이 로마군의 기술을 이기게 되자, 로마군의 전체 대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 제7시부터 낮7시까지 계속 싸웠는데, 유대인들은 포로가 된다는 부담 때문에 더욱 용기를 내어 온 힘을 다해 싸운 반면, 로마군들은 병력의 일부만 싸웠고, 지금 참가한 일부 병사들 부대의 나머지 병사들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군이 몰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으로는, 안토니아 망대를 차지한 것으로 로마군은 만족해야 했다.

  8. 그런데 비디니아(기록에 따라 이디니아) 부대의 백부장 율리안(율리아누스)가 있었는데, 그는 휼륭한 전투기술과 강인한 신체와 용감한 정신력을 갖춘 사람으로 알려졌고, 이 전쟁기간 내가 알았던 그 누구보다 탁월한 인물이었다.

 

  율리안은 안토니라 망대의 티투스 옆에 서있었는데, 로마군이 몰리기 시작하고 방어를 하지 못하자, 앞으로 달려나가 이미 승리를 거두어 의기양양해진 유대인들을 혼자서 성전안뜰의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유대인들은 율리아누스의 강인함과 용기를 초인적으로 생각하고 떼를 지어 달아났다. 이에 율리아누스는 흩어지는 유대인의 대열중앙을 뚫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였다.

 

  가이사 티투스가 보았던 전투장면 중에서, 지금까지 율리안이 보여준 것보다 더 멋지고 휼륭한 장면은 없었으나, 유대인들에게 그 광경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율링스도 인간이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도리가 없었다. 율리아누스는 다른 병사들과 같은 복장을 갖추었는데, 못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있엇지만 포장된 길을 건너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질 때 난 갑옷의 육중한 소리가 들리자, 도망치던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왔다.  넘어진 율리안을 걱정하는 함성이 안토니아 망대의 로마군에게 터져 나왔고, 유대인들은 율리안 주위를 둘러싸 창과 칼로 사방에서 그를 찔렸다. 율리안은 방패로 무수히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면서 일어나러 노력했으나, 이후 다시 넘어졌다. 율리안은 비록 넘어졌으나, 많은 유대인을 칼로 찔러죽였다.

  그는 투구와 갑옷 때문에 생명에 치명적인 급소가 보호되었고, 목을 집어넣고 몸을 움추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빨리 처치하기 힘들었다.  결국 율리안은 사지가 잘렸고, 아무도 그를 도우러 오는 자가 없었으므로 죽게 되었다.

 

  가이사 티투스는 이렇게 용감하게 율리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학살당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티투스는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고, 율리안을 도울 수 있는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이리하여 율리안은 죽음과의 힘든 싸움 끝에 죽었다. 그는 자기를 죽인 유대인들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로마군과 케사르(티투스)와 유대인들에게 마저도 최고의 명성을 남겼다. 유대인들은 율리안을 죽인 뒤, 다시 로마군을 격퇴하여, 그들을 안토니아 망대로 몰아넣었다. 유대전쟁사 6권1장6~8 중에서>


  8월이 시작하자,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이용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항복을 종용하지만, 일부가 탈출하는데 그칩니다.  
각 백인대에 30명씩 선발하고 각군단장에게 천명을 할당하고는 5군단장 케레알리우스에게 지휘권을 이양하여, 밤 9시에 야간전투를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야밤의 전투로 유대인끼리 싸우는 등 혼란에 빠지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이것에 배치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상황을 더 이상 확대하지 못합니다. 결국 날이 밝자, 전투는 아무 전과를 내지 못하고 끝납니다.

  이후 7일간 다른 군단병들은 유대인들이 포위성을 공격하는 동안, 고대성벽에 접근하는 성을 만들었으며, 12일에 유대인들은 안토니아 망대에서 성전에 이르는 통로인 성전이 회랑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이 사이 로마군은 기병 페다니우스가 보여준; 달아나는 유대인을 말로 추적하여 발목을 잡아 끌고온 뛰어난 승마술을 보여줬으며, 요나단과 푸덴스의 일대일 결투가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푸덴스는 달려가다가 넘어져 요나단에게 죽고, 요나단은 백부장 푸리쿠스의 활에 죽습니다.  

 

  8월15일,
 유대인의 유인책에 말려든 일단의 로마군들이, 회랑 위로 유대인들을 추적하다가, 함정에 걸려 불에 타 전멸당합니다. 이중 롱구스라는 병사는 포로로 살아날 수 있었으나 자결하고 ,루키우스라는 병사는 동료인 아르토리우스가 회랑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받아주다가 깔려 사망합니다.  로마군과 유대인의 전투는 너무 소모적이었습니다

  8월16일
남은 성전의 회랑들이 유대인과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타버립니다.

  8월21일,
구성벽(고대성벽)에 접근하는 토성이 완성되자, 성전의 서쪽으로 파성추(공성 망치, 또는 공성추, 파성퇴라고도 불리는)로 직접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8월27일, 성벽이 파성추에 무너지지 않고, 벽의 토대 밑을 파도 무너지지 않자, 사다리로 병력을 올려보내지만 오히려 역습을 당하여 많은 사상자와 군기까지(아마도 코르호트기) 탈취 당하자, 성문에 불을 지릅니다. 이 불길은 성전의 일부를 태워버립니다.

  8월28일,
  티투스는 6명의 각 지휘관들과 성전 보존에 관해 논의합니다.  결과는 점령의 상징으로 남기기로 합니다.

  6명의 이름
  총사령관: 티베리우스 알렉산더(유대계 이집트인, 파르티아전에서 협상주도)
  5군단장: 섹스투스 케레알리우스
  10군단장 라르키우스 레피두스
  15군단장:티투스 피르기우스
  알렉산드리아 군사령관: 프론토 하테리우스
  유대총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율리아누스

  이날까지의 로마군이 확보한 예루살렘은, 3성벽 북쪽 대부분과 제2성벽의 북쪽부분, 그리고 안토니아 망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의 남쪽구역의 구시가지와 아직 점령되지 않는 신시가지 일부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8월30일
  로마군은 그 전날부터 시작된 밀고 밀리는 공방전에서 주도권을 잡고, 유대인들을 밀어붙여 성전에 직접 접근하게 됩니다.  이 요세푸스는 이 날이, 수백년전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내살 왕의 부하에 의해,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불에 탄 날이라고 기록합니다. ( 현재의 조사로는 실제 같은 날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마도 달력의 차이가 아닐까 싶은데, 유대의 달력과 시리아의 달력이 차이가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날 군단병 중의 하나가, 전투 중에 금으로 치장된 성전 문 너머로, 작은 불쏘시개를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불이 번졌습니다. 성전은 이제 불을 끄려고 달려 나오는 유대인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에 더하여, 성전 안의 금을 본 병사들의 소유욕, 그리고 이들간의 치열한 전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티투스는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화재 진압을 명령하고, 더 이상의 파괴행위를 막으려고 매질까지 명령하지만, 그 혼란 속에 명령은 들어 먹히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은 승리가 눈앞에 급속히 닥아오고, 눈앞에 성전의 보화가 보이는 순간, 광포하여 져서 보이는 모든 유대인들을 베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한 귀퉁이에 거짓 예언자의 말에 속아 구원의 표를 받으려고 모인 6000명의 주민들도 그대로 살해되었습니다. 로마군은 남은 거의 모든 성전의 귀속물과 주변건물까지도 불을 질렸습니다.

  아직 성전이 붙타고 있을 때에, 병사들은 군기에 제물을 바치고( 예루살렘 성전 안이라는 사실을 주목) 티투스를 임페라토르라 칭합니다.
(이때 황제는 베스파시안이지만 임페라토르란 원뜻이 승장군을 나타내며 티투스는 그의 아들이었스므로 차기 황제의 지위가 내정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병사들에게 티투스는 공동황제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부 도시전투
  9월에 들어서자, 강도라고 불린 자들이(열심당원) 상부도시의 헤롯궁을 약탈하면서, 약8000천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로마군 2명을 포로로 잡아 이중의 한명을 살해합니다. 나머지 한명은 다른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될 때에 탈출하지만, 티투스는 명예의 이유를 들어 그를 해고시켜버립니다.

  하부도시 마저 로마군에 의해 불에 타고, 도망치는 주민들을 오히려 강도 떼들이 살해 했다고 합니다.  도시는 기근과 강도에게 죽은 자들로 가득 채워 졌습니다.  기록대로라면, 로마군이 죽인 자들보다 동족에게 죽은 자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로마군은 포로가 필요했습니다.  포로는 노예로 팔아, 병사들의 근무 외 수당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일종의 자산이었던 것입니다. 티투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비자들에게 이들의 목숨을 구하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기도 하지만 인정에 의해서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9월8일,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남쪽, 상부도시의 점령을 위해서 또 다른 방벽을 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4군단에 의해 헤롯궁 건너편에 작업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두매인들이 탈출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시에 많은 주민들이 열심당의 살인에도 불구하고 도망갔습니다.  티투스는 혼자 탈주하는 자는 그냥 두지 않았으나, 너무 많은 수가 탈주하였고, 승리를 재촉하고 노예로 팔 숫자가 너무 많아 노예 가격폭락, 그리고 로마병사들의 더 이상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해져 노예로 팔린 자들 이외에도 4만명을 그대로 석방합니다.

  9월25일
  상부도시를 포위하는 방벽이 완성되자, 마지막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를 저지할 수비대들이 지하굴로 피신함으로써, 마지막 보루였던 상부도시의 3개 망대가 무혈 점령됩니다.

  이날 로마군의 눈앞에 보이는 자들은, 거의 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집안에 누군가가 있으면 죽이거나 그대로 불을 질렸으며, 어떤 집에는 기근으로 죽은 자들만이 가득하여 그냥 밖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9월26일, 로마군들은 닥치는 대로 여기자기에 불을 질러,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은 완전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런 비극이 일어난 이유를, 강도들 때문이라고 하며 한탄합니다. 요한과 시몬은 각각 포로가 되어 종신형과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완전히 정복되었던 것입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둘러보고는, 그 견고하고 정교한 방어 시설들을 보면서 “신이 우리와 함께 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가지를 파괴하도록 합니다. 단지 상부도시의 망대 몇 개만이 남았으며, 이중 하나인 파사엘이라는 헤롯대왕의 형이 이름이 붙은 망대는 현재까지도 남아, 다윗의 망대라고 잘못알려진 채, 지금도 예류살렘에 그대로 서있다고 합니다.

  이날 잡힌 포로들은 일부는 처형을, 일부는 다른 지방에 선물로 보내어져, 원형 경기장에서 경기의 재물이 되었고, 어린자들은 노예로 팔려나갔으며, 이를 결정한 티투스의 친구 프론토가 심사하는 과정에서만 11,000명이 아사했습니다.

  예루살렘 포위전동안 잡힌 포로는 총 97,000명이며, 확인된 사망자는 1,100,000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유월절이라는 유대절기에 예루살렘에 들어왔다가, 강도들에게 억류된 타지방 주민들이었습니다.
<유월절: 페사흐, 영어로는 passover라는 뜻으로 유대인 최고의 절기, 모세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히브리인(즉 유대인)들이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것. 이때 무교절 축제(함마초트)라는 이스트가 없는 빵을 먹는 날이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년에 3번 예루살렘에 들려야했는데, 이것이 가장 먼저 하는 절기였다.  지금의 달력으로는 3~4월정도에 해당하며, 유대인의 12달은 날짜와 기간이 모두 다르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유대인의 달력과 시리아의 달력으로 기록했다.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로 인해 유대인의 절기행사가 바뀌게 되는데, 이후에는 집안끼리 행하게 되었다. >
서기 130년 일어난 바르 코흐바 반란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폐허가 되고, 하드리아누스황제에 의해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예루살렘 포위전을 승리로 이끈 티투스는 병사들에게 알맞은 포상을 한후, 군단을 재배치합니다. 10군단은 예루살렘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전에 유대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은 케스티우스의 12군단은 아르메니아와 갑바도기아의 경계지역의 멜리테니아에 주둔시키고, 5군단 마케도니아와 15군단 아폴리나리스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같이 동행했다가, 각각 모에시아와 판노니아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동생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합니다.

  요세푸스는 개선식을 바라보며,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한 수많은 보화들과 전쟁 장면을 보여주는 3층높이의 이동무대, 그리고 그것에 묶여있는 적들의 수장, 사실 요세푸스도 이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이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다는것을 예언하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황제의 주변인물이 되었습니다.  

  한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유대인이자 로마에 대한 저항군이었던 요세푸스가 성전에서 가져온 전리품, 금촛대와 율법책 사본 같은 유대인에게 귀중한 보물이 나오는 순간을 묘사한 부분에서, 어떤 모멸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세푸스가 티투스에게 많은 면죄부를 주고 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티투스라고 봅니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하나. 시카리의 시몬은 한동안 잡히지 않고 땅굴속에서 숨어, 그동안 숨겨놓은 식량을 가지고 밖으로 나갈려고 계속적으로 땅을 파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식량이 먼저 떨어지자,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일부러 하얀색 옷과 자주색 옷을 입고...
땅위는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이었는데, 순찰 돌던 로마군이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시몬을 보게 됩니다.

로마군: 헉!!!! 누……….누구세요?
시몬: 침묵
로마군: 당신 뭐…뭐 뭐야?(귀신인가???? 어디서 나왔지???)
시몬: 네 대장을 불러와라.
급히 나타난 로마군 지휘관
지휘관: 당신 누구요?
시몬: 지가 바로 시몬이걸랑요.^^
지휘관: 너 일루와봐.
퍽 퍽 퍽
시몬은 결국 개선식에서 사형 당합니다. (윗글은 유대전쟁사를 바탕으로 조금 각색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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