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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3) -야후-

영국신사77 2007. 1. 30. 20:37

                                      로마 제국

요약

  이탈리아반도의 중앙부, 지금의 이탈리아 테베레강에서 도시국가로서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웠던 고대국가의 역사. 2세기 초 최대 판도에 달했을 때는 오늘날의 동·서유럽대륙 대부분 및 중근동(中近東), 북아프리카와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아조프해 주변과 지중해의 여러 섬, 모로코, 알제리(북부),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의 대부분과 이란 북부, 소련령 카프카스 등 광대하였다.

설명

  이탈리아반도의 중앙부, 지금의 이탈리아 테베레강에서 도시국가로서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웠던 고대국가의 역사. 2세기 초 최대 판도에 달했을 때는 오늘날의 동·서유럽대륙 대부분 및 중근동(中近東), 북아프리카와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아조프해 주변과 지중해의 여러 섬, 모로코, 알제리(북부),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의 대부분과 이란 북부, 소련령 카프카스 등 광대하였다.
 
  로마는 이들 지방과 여러 민족을 단순히 그 지배 아래 두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교역권으로 통합하여, 오랜 세월 동안 지중해세계라고 불리는 역사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역사

                               선사시대와 왕정기(王政期)
 
  로마가 모습을 나타내기 이전부터 이탈리아반도에는 테라마레·아펜니노라고 불리는 청동기문화가 있었는데, 이들을 흡수하여 빌라노바라는 철기문화가 생겨났다. BC 8세기 무렵에는 남부에 그리스인의 지중해 식민이 시작되고, 같은 무렵 중북부에 에트루리아인이 이주해 왔다. 그 뒤부터 이주해 온 인도·유럽어계(語系) 여러 민족으로는, 움브리아인·사베리인 등의 무리와 라틴인의 2파가 있었다.
 
  라틴인이 모여 살던 장소 가운데 하나가 로마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알바롱가의 라틴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로마가 차지한 땅이 바다 및 이탈리아 중부에 가까운 지리적 조건 때문에 <소금의 길>을 제압하는 등 로마는 차츰 강해져, BC 6세기 초엽까지 인근의 7개 언덕(로마 7언덕)이 합해져 도시(우르프스·폴리스)를 형성했다.
 
  로마인은 민족적 자부심에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그리스의 신(神)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강하여, 트로야의 기원설과 아에네아스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아에네아스의 자손 로물루스가 초대 왕이 된 이래, 6명의 왕이 즉위했다고 한다. 왕정기의 국제(國制)는 왕을 보좌하는 원로원(元老院)이 있었고, 그것은 유력한 씨족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다. 왕의 권력은 독재적이 아니고, <평등자 중의 제1인자>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백성은 씨족을 기초로 하여 티티에스·람네스·루케레스의 3트리부스(tribus;部族)로 나누어지고, 각 트리부스는 10쿠리아(curia)로 이루어져 있다· 1쿠리아는 100명의 보병과 10명의 기병을 제공하였으며, 각 트리부스의 보병대장과 기병대장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중요한 나랏일이나 각 씨족의 재량을 넘는 문제는 쿠리아 민회(民會)에서 결정되었다

 
                               공화정기(共和政期)

                           제1기(BC 509∼BC 264)
 
  마지막 왕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자, 로마인은 BC 510년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시작했다. 처음 250년 동안은 귀족(파트리키)과 평민(플레브스) 두 신분 사이의 다툼과 로마 인근 여러 종족과의 전쟁으로 특징 지워진다. 평민 중의 유력자는 귀족과의 동권화(同權化)를 원하고, 빈민은 귀족 정무관(政務官;magistratus)의 횡포를 피해서 로마시를 떠나 가까운 성산(聖山;몬스사케르)에 거주하였다. 그 결과 귀족의 양보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호민관(護民官)과 시장관리관(市長管理官;aediles)의 두 관리와 평민회(平民會;conciliumplebis)가 설치되었다.
 
  왕을 추방한 뒤의 공화정은 민회와 민회에서 선출된 임기 1년인 2명의 귀족 정무관과 원로원의 세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정무관은 민회에서 명령권(imperium)을 부여받은 국가 전체의 관리였으므로, 호민관 및 시장관리관은 정무관보다 열세였지만 평민도 차츰 국정에 발언권이 강해졌다. 2명의 정무관은 그 후 집정관(執政官;consul)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평민은 BC 287년 홀텐시우스법에 의해 평민회를 국가 전체를 구속하는 결의기관으로 만들었다. 이 법률로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투쟁은 끝났으며, 그 때까지 12표법(十二表法)의 제정 등 여러 법률에 의해 평민의 입장은 차츰 향상되어 갔다. 특히 BC 367년의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에 의해, 두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은 반드시 평민에서 뽑아, 평민에게도 최고 정무관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집정관에 취임한 것은 평민 최상층 가문에 한정되어, 집정관을 내는 평민 최상층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명문(노빌리스)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공화정 말기까지 정치를 지배했다. BC 366년에는 플라에토르(법무관)라는 새로운 정무관이 설치되었으며, 평민은 BC 337년에 이 관직에의 취임이 허용되었다. 이렇듯 신분투쟁에서 귀족이 계속 양보한 것은, 이 시기에 벌어진 이웃 여러 종족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BC 5세기에는 북방의 에트루리아의 압박이 계속되고, 라틴 여러 도시와의 전쟁도 있었으며, 사비니인·아에쿠이족·볼스키족 등 동방의 산악지대에 사는 여러 종족의 라티움 평원지대로의 진출에 맞서 싸워야만 되었다. BC 5세기말에 이들을 누르고, BC 396년에는 에트루리아 최강의 도시 베이이를 공략했다.
 
  BC 387년에는 북쪽에서 켈트인이 이탈리아로 침입, 카피토르 언덕을 뺀 로마시(市)를 방화하고 약탈했다. 이러한 참사로 생겨난 국내의 대립을 BC 367년의 법률로 해결한 뒤, 로마는 라틴 여러 도시와의 전면 전쟁에 들어가, BC 338년에 이를 억누르고 라티움을 세력 아래 두었다. 그
 
   평정 방법으로 라틴 여러 도시에 로마 민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고, 비(非)라틴계 도시에는 투표권은 없으나 로마인과 대등하게 통혼(通婚)·통상권(通商權)을 가지는 불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었으며, 그 밖의 도시는 동맹시(同盟市)로 했으므로, 이렇게 등급지어진 시민권 부여와 동맹관계의 <그물코> 같은 통합은, 뒷날 <제국> 지배구조의 원형을 이루었다.
 
  로마는 BC 275년경까지 북부의 갈리아 키살피나를 뺀 이탈리아를 제패하고, BC 273년 프톨레마이오스왕국과 우호조약을 맺는 등 그리스 세계와 직접 관계를 갖게 되었다.

 
                                제2기(BC 264∼BC 133)
 
  서(西)지중해를 지배한 로마는 카르타고, 동부의 헬레니즘 여러 왕국, 에스파냐 등과의 충돌로 전쟁의 시대로 들어간다. 카르타고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BC 264∼BC 241, BC 218∼BC 201, BC 149∼BC 146)에서 로마는 처음으로 해외에 속주(屬州)를 획득했다. 한편 이탈리아 북부에 대해서도 갈리아 키살피나를 확보하고, 마실리아(지금의 마르세유)에서 발칸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일대를 세력 아래 두었다. 동부 지중해쪽에 대해서는 일리리쿰 해안을 손에 넣고,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동맹자(同盟者) 마케도니아왕과 3차에 걸친 마케도니아전쟁(BC 214∼BC 205, BC 200∼BC 196, BC 171∼BC 167)에서 모두 승리하여, BC 147년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았다. 그 후 로마는 동(東)지중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BC 133년 페르가몬왕 악타로스 3세는 죽음에 이르러 왕국을 로마에 유증하여 BC 129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해외 영토의 획득과 지배는 로마 자체의 사회를 변질시켰다. 해외령에서의 정세를 청부 맡은 기사 신분의 부자와, 속주 총독이 된 원로원 의원 신분은 점점 부유해졌다. 오랫동안 싸움터에 나가 있던 농민은 농지경영이 어려워지자, 그들의 토지를 원로원 의원과 기사가 사들였다.
 
  이렇게 생겨난 대토지 소유에서는, 대량의 노예를 부려 올리브·포도 등의 상품 작물을 생산해 내고 목축이 확대되었다. 가정에도 노예는 늘어나 노예제가 최성기를 맞았다. 토지를 잃은 빈민은 대도시, 특히 로마로 모여들어 국가의 부양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재산 있는 이들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여성이 자유로워지고 헬레니즘 문화가 흘러들어, 지난날의 소박한 농민적 기풍은 흐려져 갔다.
 
  이러한 사회적 변질은 로마군의 약체화로 나타나, 특히 에스파냐 전선에서 심각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오랫동안 켈트-이베리아(켈티베리아)족과 루사타니아족의 반항에 참패를 거듭하다가, BC 133년 누만티아의 공략으로 겨우 종지부를 찍었다. 리그리아족·아로브로게스족·일베르니족의 제압(BC 125∼BC 121) 이후 남갈리아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말기·내란기(BC 133∼BC 31)
 
  해외령 지배에 의한 로마 사회 그 자체의 변질과, 로마군의 약체화라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형제는 호민관이 되어 토지재분배정책을 내걸고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반대파에게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는 북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의 왕 유굴타와의 전쟁(BC 112∼BC 105)에 고전하고, 게르만인인 테우토니족·킴브리족의 침입에도 잇따라 패하고, 이어서 BC 105년 아라우시오전투에서 킴브리군에 전멸당했다.
 
  명문 출신이 아닌 마리우스는, 장군이 되어 유굴타를 항복시키고, 빈민에서 지원병을 모집하는 등 병제(兵制)를 개혁하여 게르만인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는 지중해 지방 각지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나, BC 130년대에는 아테네·델로스·페르가몬·시칠리아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탈리아반도에서도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봉기(BC 73∼BC 71)가 ,한 때 4만의 군세를 끌어모았으나 모두 로마 정규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해외령 지배의 결과였으며, 로마의 정복전쟁에 힘을 빌려 주었던 이탈리아반도 내의 여러 동맹시는, BC 91년 로마의 이기적 정책에 분노하여 봉기했다. 이 동맹시 전쟁은 포강(江) 이남 전 이탈리아에 로마 시민권의 부여로 가라앉았다. 이리하여 그 뒤 이탈리아인은 모두 로마 시민이 되어, 도시국가로서의 로마는 형태상 종말을 고했다.
 
  이즈음은 로마의 국가구조와 지배의 일대 변혁기였다. 이 변혁기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의 지배층은 민회를 바탕으로 정치를 움직여 보려는 민중파(民衆派;포플라레스)와, 원로원의 권위를 배경으로 일을 진척시키려는 벌족파(閥族派;오프티마테스)로 나누어져, 권력투쟁을 되풀이했다. 이리하여 벌족파 스라, 민중파 킨나, 폼페이우스·크라수스·카이사르 등이 나타났다. 그들은 권력투쟁에 이기기 위해, 권력 기반을 외정(外征)에서도 구했으므로, 이 시기에는 오히려 로마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다.
 
  카이사르는 BC 60년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맺고, BC 58∼BC 50년까지 갈리아에 머물며 그 곳의 켈트인 여러 부족을 진압해 속주로 만들고, 라인강·영국해협까지 로마의 지배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크라수스가 팔티아 원정에 실패하여 BC 53년 카라에에서 전사하자, 벌족파에 기울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파르살로스의 전투 뒤 이집트로 달아난 폼페이우스는 그곳에서 살해되고, 그를 뒤쫓던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왕국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보호아래 두어, 이집트도 로마의 세력 아래 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로 남았으나, BC 44년 3월 15일 카시우스·브루투스 등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에서 살해되었다.
 
  BC 43년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자(養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레피두스는 공적으로 국가재건 3인위원, 이른바 제2차 삼두정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실각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제국의 동쪽 반을 자기 것으로 했으므로, 옥타비아누스는 서쪽 반의 군세를 이끌고,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패주시켰다. BC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내란은 끝나고, 옥타비아누스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는 라틴문학 번성기이기도 해, BC 63년의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를 비롯하여 루크레티우스·카투루스·카이사르·바로·살루스티우스 등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다

 
                                    제정기(帝政期)

                               제1기(BC 27∼AD 68)
 
  옥타비아누스는 사실상의 1인 지배를 확립했으나, 카이사르의 경우를 고려하여 1인 지배를 정착시키는 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쓴 방법은, 황제나 왕위에 오르는 게 아니라, 관직에 취임하지 않으면서 많은 직권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한 직권으로서 권력의 법적 기초로 중요시된 것은, 호민관 직권·집정관 대명령권 등이었다.
 
  BC 27년의 원로원 회의에서, 제국의 전 속주(全屬州)가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로 나뉘어 관장되도록 결정되었다. 같은 해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존칭을 부여하였으며, 이 체제는 원수정치(元首政治;principatus)라 불리었다. 이로써 로마는 제정기로 접어들었다.
 
  일반적으로 공화정기의 관제가 그대로 이어졌지만, 그 주위에는 황제고문회(皇帝顧問會;consilium principis)가 설치되었고, 새로이 친위대장(親衛隊長;praefectus praetorio) 등의 관직이 만들어졌다. 로마시에는 소방대·수도관리국·식량관리국이 설치되고 <평화의 제단> <아우구스투스광장> 등도 세워져, 제국의 수도에 어울리도록 바뀌어져 갔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귀족의 결혼과 출산·육아를 장려하고 풍기(風紀)를 바로 세웠으며, 고래(古來)의 국가 종교부흥을 꾀했다. 이 시기에 라틴문학도 정점에 이르러,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리비우스들은 문필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를 칭송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정복전쟁은 되도록 피했으며, 동부에서는 팔티아와 화해하고, 갈리티아·유대를 속주로 만들었으며, 에스파냐도 평정하였다. 속주통치에서는 특히 서부에서 종래의 도시동맹(코이논)을 속주회의로 이용했으며, 제국의 통일을 꾀했다.
 
  이어지는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7)·칼리굴라(재위 37∼41)·클라우디우스 1세(재위 41∼54)·네로(재위 54∼68)는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가(家)와 아내 이비아의 클라우디우스가(家)의 가계(家系)에서 제위가 올려졌기 때문에,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왕조라고 불린다.
 
  티베리우스는 정치적 밀고와 공포정치로 로마제국을 다스렸고, 칼리굴라는 독재적 경향을 강화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제국의 로마화를 진행시켰다. 네로는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곧 독재적이 되어 자신을 자살로 몰았으며, 이 동안에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제2기(69∼192)
 
  갈바·비텔리우스가 저마다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69년은 <사제년(四帝年)>이 되었으나, 결국 유대전쟁을 치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휘하 군대와 판노니아군에게 옹립되어, 정식으로 제위(재위 69~79)에 올랐다. 라인지방 키빌리스의 반란, 갈리아의 크라시쿠스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세계의 재건자(restitutor orbis)로서 권력을 확립, 자신과 2명의 아들, 티투스(재위 79~81)·도미티아누스(재위 81~96)의 제위를 확립해, 폴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전제적 경향이 심해 원로원과 대립했으며, 밀고와 반역죄 처형이 연속되는 공포정치 속에서 암살되었다.
 
  그 뒤 네르바가 원로원에 의해 제위에 올랐는데, 그는 군대의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후계 황제로 병사 출신의 트라야누스를 지명하고 양자로 삼았다. 트라야누스와 그 뒤를 이은 3명의 황제도, 아들이 없어서 후계 황제를 양자로 대신하였으므로, 네르바(재위 96~98)·트라야누스(재위 98~117)·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대까지 양자 황제시대가 이어졌다. 이것을 안토니누스왕조라고 하며, 영국의 E. 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찬양한 <오현제(五賢帝)>였다.
 
  그 능력을 증명한 인물만이 제위에 오르고, 에스파냐 출신인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같은 속주 출신이 제위에 오른 일 등이 안정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후 스토아 철학자로서 제위에 오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아들 콤모두스(재위 180~193)를 후계자로 삼아서 양자제는 막을 내렸다.
 
  안토니누스 왕조시대에는, 트라야누스 치세 때 외에는 영토의 확대가 거의 없었다. 그는 2번의 다키아 전쟁에 의해, 네케발루스 왕을 쳐부수고 다키아를 속주로 삼았다. 동부에서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은 곧 진압되었으나, 132~135년의 3년에 걸친 제2차 유대전쟁이 일어나 반란군 섬멸 뒤, 파괴된 예루살렘 뒤에 로마시민의 식민시 아에리아 카피토리나가 건설되고, 유대인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 브리튼에서는 스코틀랜드가 내버려지고, 국경에 <하드리아누스 성벽(122~127)> <안토니누스 성벽(142~143)>이 만들어졌다.
 
  한편 하드리아누스의 군제개혁은 군단(regio;로마시민으로 구성된 로마의 정규군) 주둔지에서의 징병제를 도입했으므로, 군단은 주둔지와의 연결을 긴밀히 하는 속주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친위대만은 이탈리아에서 모집했기 때문에, 라틴적 전통을 유지했다. 이 시대에 제국내의 평화와 도로망의 발달로 경제활동이 최성기를 맞고, 속주의 농업과 수공업은 이탈리아를 능가하게까지 되었다. 원격지 무역(遠隔地貿易)도 성하여, 스칸디나비아·중국·인도양을 통하여 극동 방면에까지 상품이 유통되었다. 각 도시에 학교와 도서관이 설치되고, 라틴문학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스도교는 소아시아 여러 도시 외에 이탈리아·아프리카·갈리아에도 스며들었으나, 박해받았다. 그리스·라틴의 2개 언어를 공용어로 하는 로마제국은, 이 시대에 가장 고도의 문화적 통일로 가까워졌다.

 
                                     제3기(193∼284)
 
  원로원과 대립하던 콤모두스(193)의 살해로, 제국의 양상은 일변했다. 원로원이 세운 황제 페르티낙스(재위 193)는 친위대에게 살해되고, 각지의 군대는 69년의 <사제년> 때처럼 잇따라 황제를 옹립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가 로마를 점령하여, 여러 명의 경쟁자를 쓰러뜨리고 세루스 왕조를 열었다. 그의 통치(193∼211)는 군대에만 기초를 둔 군사정권으로, 원로원은 거의 무시했다. 그리고 종래의 이탈리아인으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출신지인 판노니아의 병사로 된 새로운 친위대를 창설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쥐었다. 한편 국경 수비를 굳건히 하고, 속주 통치는 보다 세밀하고 엄격하게해 나갔으며, 스코틀랜드에서 모든 군사를 철수했다. 그의 아들 카라칼라(재위 211∼217)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212년 제국의 전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내려, 종래의 이탈리아인과 속주인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없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재위 222∼235)는 원로원에 접근하여 잠시 동안의 평화를 누렸으나, 결국 그도 병사에게 살해되어 황제가 계속 바뀌었다. 모두 군대에 의해 옹립된 군인이었으므로, 284년까지의 이 혼란기를 <군인황제시대>라고 부른다. 트라키아인 막시미누스(재위 222∼235)·고르디아누스3세(재위 238∼244)·필리푸스 아랍스(재위 244∼249)·데키우스(재위 249∼251)·갈루스(재위 251∼253)·아에밀리아누스(재위 253)와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로 계속 이어졌다.
 
  이 동안에 국경은 각 방면에서 위기를 맞았다. 동부에서는 아르사케스왕조, 파르티아로 바뀐 사산왕조가 260년 공세에 나서서, 시리아를 석권하고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하여 소아시아에 쳐들어 갔다. 이것을 저지한 것은 대상(隊商) 도시 팔미라였다.
 
  서부에서는 로마의 장군 포스툼스가 독립된 <갈리아인 제국>을 만들어, 브리튼과 에스파냐를 휘하에 두었다.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재위 253∼268)의 치세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며, 고트족을 물리친 클라우디우스 2세(재위 268∼270)에 이어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는 다키아를 내버렸으나, 273년 팔미라를 파괴하고 여왕 제노비아를 포로로 하고 갈리아를 회복했으며, 로마에 <아우렐리아누스성벽>을 쌓았다. 타키투스(재위 275∼276)는 소아시아에서 고트족을 내몰았고, 프로부스(재위 276∼282)는 북부의 국경 수비를 굳혔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21년간)의 즉위로, 혼란된 군인황제시대는 끝났다.

 
                                    제4기(284∼395)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치와 방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제국을 넷으로 분할하여, 자신과 막시미아누스(재위 286∼305) 두 사람을 정제(正帝)로 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를 부제(副帝)로 하는 4분할통치(테트라르키아)를 실시했다. 305년 그의 자발적 퇴위 때 다시 일어난 내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승리하여 남고, 2번째 내전(313, 314) 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단독 황제로서 남았다(재위 306∼337).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수도를 니코메디아로 옮기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 비잔티움 땅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건설해 ,제국의 중심을 동쪽으로 옮겼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고대 로마의 전통으로 되돌아가 <유피테르의 지상 대표자>라 칭하고, 고대 로마 종교에 찬성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303년 전국적인 대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도의 신의 지상대표자로서 그리스도 교회를 보호하여,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교적 로마에 대항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출발했다.
 
  종교적 성화(聖化) 덕분으로, 황제는 프린켑스(元首)가 아닌 도미누스(專制君主)가 되었다. 제정은 프린키파투스에서 전제적인 도미나투스로 완전히 변질되었다. 궁정 내 의례에도 황제를 신성(神性)으로 강조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황제고문회는 황제 앞에서 전원이 기립하는 성기립 회의(聖起立會議;sacrum consistorium)가 되었다. 로마원로원은 명목적인 위신만 가진 도시참사회와 다를 바 없게 되고,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이 이에 맞서게 되었다.
 
  속주 통치는 점점 세밀화되어 그 수가 116에 이르도록 증가했으며, 제국은 3∼4도로 나뉘어, 각 도의 담당으로서 재정을 주로 맡는 문관이 된 친위대장이 한 사람씩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문관 경력과 무관 경력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군대는 국경을 지키는 국경방위군(limitanei)과, 황제에 직속된 기병 기동군(comitatenses)으로 나뉘었다.
 
  이렇듯 비대화된 관료들과 확대된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재정은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솔리두스 금화 주조 개시 등 부분적으로 화폐를 개량하여 솔리두스 그 자체는 국제 신용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국내 거래 특히 세금으로서는 현물(現物)을 과하는 게 원칙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새로운 세제(稅制)는, 제국의 농지과 농민에 대하여 갖가지 현물 과세를 하였다. 이 세수(稅收)를 확보하기 위해 농민과 소작인(콜로누스)은 농지에서의 이동이 금지되고, 정세책임자인 도시참사회원도 세습신분(클리아레스)이 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에 의한 강제는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주어, 경지면적도 도시규모도 축소화되어 갔다. 세금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교회 성직자가 되고, 유력자는 징수의 손이 미치지 않는 도시 영역 밖에서 대토지를 소유하여 봉건영주 같은 자립성을 획득하였으며, 황제와 신자의 기부로 교회가 특권적인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 가운데에는 이교를 고집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이 고전문학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차츰 그리스도교 신학·성서주해(聖書註解)·설교집·성인전(聖人傳) 등의 그리스도교 문학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일어난 내란을 극복하고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24∼361) 다음의 율리아누스(재위 361∼363)는 친이교(親異敎)·반(反)그리스도교 등의 반동정책을 취했으나, 페르시아 전선에서 전사하였으며, 이 시기의 주요한 대외문제는 사산왕조였다.
 
  이어서 제국을 맡은 것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375)과 그의 아우 발렌스(재위 364∼378)로, 이 시기의 위기는 북방 국경에 있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아들 그라티아누스(재위 367∼383)를 보좌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서(西)고트족을 국경 밖으로 내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트라키아관구 북부 2주에 방위의무와의 교환으로 정주(定住)를 허락했다. 그들은 자기네의 왕을 받들고 자기들의 지휘관 아래에서 로마군에 참전했으므로, 사실상은 제국내에 정주하는 게르만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와 테오도시우스시대에는 이교 지식인과 그리스도교 성직자 사이의 최후 논쟁이 행해졌다. 전자의 대표는 로마 원로원 의원 신마쿠스이고, 후자의 대표는 밀라노의 사교 암브로시우스였다. 392년 프랑크인 출신 로마군사령관 알보가스트를 배후로 발렌티니아누스 2세(재위 375∼392)를 제거하고, 로마에서 봉기한 에우게니우스의 찬탈(재위 392∼394)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진압했다.

 
                      서로마제국과 그 멸망(395∼476)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제국의 동쪽 반은 장남 아르카디우스(재위 383∼408)가, 서쪽 반은 차남 호노리우스(재위 393∼423)가 나누어 다스렸다. 당초에는 이제까지 때때로 행해졌던 분할통치와 동일 성격의 것이었으나, 그 뒤 두 제국의 정치관계 및 침입 이민족과의 색다른 관계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비잔틴제국으로 존속했으나, 서로마제국은 476년 이후 황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어, 얼마 동안은 대체로 동제(東帝)의 권위를 인정하는 게르만인 여러 왕이 지배했다.
 
  서로마에서는 호노리우스가 죽은 뒤, 찬탈자 요하네스(재위 423∼425)를 거쳐, 호노리우스의 이복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가 제위에 올랐다. 호노리우스 치세의 전반은 반달족 출신의 로스틸리코가 정치 실권을 잡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 치세는 그의 어머니의 섭정하에 있었다.
 
  이 테오도시우스 왕조기의 서로마제국은 잇따른 게르만 여러 종족의 침입과 제국 영내에서의 건국, 제국정부 직접 통치령의 축소, 세수(稅收)의 고갈로 특정지어진다. 이 동안에 서쪽 정부는 자신의 고유한 군대를 갖지 못하게 되어, 게르만인의 동맹부족(foederati)의 힘으로 다른 침입 게르만인과 싸워야만 되었다.
 
  최초의 침입은 4세기 끝무렵부터 시작되는 서고트의 침입으로 호노리우스와 스틸리코의 불화, 408년 스틸리코의 처형(處刑)이라는 로마쪽 내분을 틈타, 410년 서고트왕 알라리크는 로마시를 점령하고 3일에 걸쳐 약탈했다. 서고트는 그 뒤 남이탈리아에 있었으나, 로마와 조약을 맺고 갈리아로 이동했다.
 
  2번째 침입은 406년∼407년 겨울,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석권한 반달·수에비·아랑 등의 여러 부족으로, 그들은 409년에는 에스파냐에 들어가고, 반달족은 429년 거기서 마우레타니아로 건너가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 442년 로마와의 조약으로 오늘날의 튀니지와 리비아 서부에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 동안에 갈리아의 알모리카에서는 농민반란인 바가우다이의 난이 진압되지 못하고, 부르군트족도 라인 하류를 건너 진출해 갈리아에 들어왔다.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훈족에게 부르군트를 토벌시켜 2만 명을 참살했다. 그 훈족도 아틸라왕 휘하에서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쳐들어 왔으므로, 아에티우스는 소수의 로마 정주의 이민족(라에티)을 총동원하여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이를 물리쳤다. 훈족은 453년 아틸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와해됐다. 아에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 의해 살해됐는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아에티우스의 부하에게 살해되어 서로마제국은 급격히 몰락되어 갔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재위 455)·아비투스(재위 455∼456)·마요리아누스(재위 457∼461)·리비우스 세베루스(재위 461∼465)로 제위가 이어졌으나, 정치의 실권은 456년 이후 수에비 출신의 군인 리키메르가 장악하여,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죽은 뒤 18개월 동안 황제 자리가 비었다. 다음의 안테미우스(재위 467∼472)는 리키메르와 대립하여 살해되고, 리키메르도 6주 뒤에 죽었다. 뒤의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재위 474∼475)도 동쪽에서 보내져 왔으나 장군 오레스테스에게 쫓겨났고, 오레스테스는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재위 475∼476)를 제위에 앉혔다. 그러나 동맹 부족과의 교섭이 결렬되어 476년 스킬인 장교 오도아케르가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이 해를 그 뒤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보고 있으며, 서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지역이 게르만 여러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
 
  반달족은 아프리카의 옛 로마령 모두와 사르데냐·코르시카·발레아레스의 여러 섬과 시칠리아를 정복하였고, 부르군트는 북은 상부 라인강, 서는 손강, 남은 듀란스강까지 확대하여 서고트령은 에스파냐의 대부분과 남서 갈리아를 포괄, 에스파냐에서는 북동부의 갈리에키아에 수에비가 잔존할 뿐이었다. 갈리아에서는 서고트왕 에우리크가 루아르와 솜·론강에 이르는 영역을 완성하고, 아를과 마실리아도 점령해, 이탈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도아케르의 영역은 이탈리아와 라에티아·노리쿰의 일부에 더하여, 연금 지불(年金支拂)을 조건으로 반달 왕 게이세리쿠스로부터 시칠리아를 넘겨 받았는데, 라에티아의 대부분은 이미 이민족에게 침략당했고, 노리쿰도 488년에 내줬다. 이것이 서로마제국 멸망이다.

 
                          로마사의 연구사(硏究史)
 
  로마사의 비판적·과학적 연구는 19세기 초엽에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이를테면 루낭 두 티르모시 등의 사료수집, N.B. 마키아벨리·J.L.R. 달랑베르 등의 통사적 서술을 받아, 페리조니우스 및 드 보폴에 의해 문헌사료의 비판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것들을 토대로 해서 베를린대학의 B.G. 니부르의 《로마사(1811∼12)》의 비판적 통사가 농제(農制)·군사·사회·정치제도·농민공동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과학적 역사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어서 독일사람인 로마법학자 T. 몸젠의 법률·제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연구가 실현되었으며, 《로마법 대전(法大全)》 간행을 비롯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는 저서를 남겼다. 이 거봉(巨峰)을 받아서 이탈리아의 파이스 데 상크티스의 비판적 통사가 실현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인구사(人口史)를 포함하는 베로호의 서술이 이루어졌다. 몸젠의 제자 중 히르슈펠트와 데사우는 제정기(帝政期), 제크는 고대말기의 연구에 거봉을 이루었다.
 
  한편 개인사연구(個人史硏究;프로소포그래피) 분야에서 뮌처·게르처, 영국의 사임이 거대한 업적을 쌓아 사회사 연구의 길을 터놓았으며, 로마인의 주요한 개념의 연구에서 가치의식을 명확히 한 독일인 하인체도 이에 가담했다. 망명 러시아인 로스토프체프의 《로마제국의 사회경제사(1926)》는 비문(碑文)·파피루스·화폐 외에 모든 고고학적 사료를 총동원한 통사로서 전인미답의 것이며, 그 후에도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미국인 프랭크는 경제사 사료를 수집하고 영역해설을 덧붙여 《고대로마의 경제적 개관(전6권)》을 편찬했다.
 
  제2차세계대전 뒤의 뚜렷한 경향으로는 고대말기의 연구가 있었으며, 슈타인·A.M.H. 존즈·포크트의 3대 저술은 그 추진역(推進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종교사 연구에는 제2차세계대전 전부터의 위소바, 전쟁 뒤에 걸쳐서의 라테·알트하임·테가가 각기 종교와 정치·사회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사학(史學) 입장에선 연구도 아직은 방대한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특히 그러한 것에 자극을 받은 노예제도의 연구는, 포크트를 중심으로 한 마인츠 아카데미의 노예제도 연구그룹을 낳게 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아날학파 가운데서 폴 벤의 《빵과 서커스》와 같이 사회사 연구가 활발하다.

 
                                      연표
BC 753 전설상의 로마 건국
509 왕정 폐지, 공화정 수립
494 성산사건(聖山事件), 호민관직 창설
471 평민회 창설
451 12표법 제정(~BC 450년경)
396 베이 점령
367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法) 제정
343 삼니움전쟁(~BC 291)
340 라틴전쟁(~BC 338)
287 호르텐시우스법 성립
264 제 1 차포에니전쟁(~BC 241)
238 시칠리아·사르데냐·고르시카 속주로 됨.
218

제 2 차포에니전쟁(~BC 201), 칸나에싸움(~BC 216),

 

자마 싸움(BC 202)

215 마케도니아전쟁(제1~제4,~BC 148), 피드나싸움(BC 168)
192 시리아왕 안티오코스 3세와 싸움(~BC l89).
149 제 3 차 포에니전쟁(~BC 146)
146

카르타고 및 코린토스의 파괴, 마케도니아, 아프리카 속주로

 

 

 됨.

135 시칠리아섬의 노예반란(~BC 132)
133

T.S. 그라쿠스 호민관이 됨. 누만티아 함락하고, 에스파냐

 

전쟁 끝남.

129 속주 아시아 창설
123 G.S. 그라쿠스, 호민관 취임(~BC122)
111 유구르타 전쟁(~BC 105). 토지법 공포
107 마리우스, 제 1 회 집정관. 병제개혁
91 동맹시 전쟁(~BC 88)
88 미트리다테스 전쟁(~BC 63)
73 스파르타쿠스의 봉기(~BC 71)
70 폼페이우스·크라수스, 제 1 회 집정관
64 폼페이우스, 시리아 정복
63 폼페이우스의 유대 평정. 키케로의 집정관. 카틸리나의 음모
60 제 1 차 삼두정치(폼페이우스·카이사르·크라수스)
59 카이사르, 제 1 회 집정관
58 카이사르, 갈리아 정복(~BC 50)
48 카이사르, 독재관직(~BC 44)
44 카이사르 암살.
43 안토니우스·레피두스·옥타비아누스의 삼두정치(~ BC 33)
42

필리피싸움, 브루투스·카시우스의 패사(敗死). 삼두에 의한

 

속주 분할.

31 악티움해전
BC 30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죽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멸망.

27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元首政, ~AD 14)
AD 9 토이토부르크의 싸움
14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 ~68)의 황제

 

(티베리우스·가이우스·클라우디우스 1세·네로)

47 바울의 전도여행(~55)
66 유대전쟁(~70)
69

4황제의 해(갈바·오토·비텔리우스·베스파시아누스)·

 

플라비우스가(家, ~96)의 황제(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

 

도미티아누스)

79 베수비오화산 분화, 폼페이 매몰
96 오현제(五賢帝) 시대(~180)
101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106)
117 제국의 판도 최대로 됨.
193

세베루스왕조(~235)의 황제(셉티미우스 세베루스·카라칼라

 

·게타·마크리누스·엘라 가발루스·세베루스 알렉산데르)

212 카라칼라칙령
235 군인황제시대(~284)
250 데키우스황제의 그리스도교도 박해
260 발레리아누스, 페르시아인에게 잡힘.
284 디오클레티이누스 즉위, 전제군주정치 시작.
293 제국사분통치제(帝國四分統治制) 시작.
301 디오클레티아누스, 최고가격령 실시
306 콘스탄티누스 1 세(대제)의 통치(~337)
312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를 격파.
313 밀라노칙령
325 니케아공의회
330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설치
36I 율리아누스 즉위, 이교 부흥을 꾀함.
375 이 무렵 게르만민족 대이동 개시
378 아드리아노플의 싸움
392 테오도시우스 1세,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함.
394 테오도시우스 1세, 제국의 통일을 실현.
395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제국 동서로 분열
410 로마, 서(西)고트 알라리크에 점령.
429 《테오도시우스법전》 편찬 시작(~438).
451 카탈라우눔싸움
452 아틸라, 이탈리아로 침임
455 반달의 게이세리쿠스, 로마 점령
476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킴.
481 프랑크왕 클로비스 즉위
493 동(東)고트왕 테오도리크, 이탈리아에 왕국건설(~553)
527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565)
528 《로마법 대전》 편찬 시작(~534).
532 니카의 반란
867 교회, 동서로 분열
962 신성로마제국의 성립(~1806)
1204 라틴제국 건설(~1261).
1453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멸망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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