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건륭제(乾隆帝) (2)

영국신사77 2007. 1. 21. 08:41

               건륭제 [, 1711.9.25~1799.2.7]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95). 조부 강희제에 이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이 때에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름 홍력(). 시호 순황제(). 묘호 고종().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鈕祿: )이고 황후는 부찰(: 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 ·한인()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 평정(1749), 대 ·소금천()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 6회, 동순() 5회, 서순(西)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과 내순(), 천수연()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珅)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가 편집되고 《명사()》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도 활발하였다.

 

 

 

 

                           건륭제 [乾隆帝, Ch'ienlung]

 
  (병)Qianlong (웨)Ch'ienlung.

  1711. 9. 25 중국~1799. 2. 7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6대 황제.

 

                                                          개요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4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홍력(弘曆), 연호는 건륭,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순제(純帝).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치세(1735~96)를 자랑한다. 1755~60년 사이에 여러 번 군사원정을 펼쳐 중국 북동부 지방에 대한 투르크족과 몽골족의 위협을 제거했다. 새로운 성(지금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을 창설하여 제국의 영토를 넓혔고, 중국의 남·동부 지역에서 청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유년시절과 교육

  1735년 10월 7일 옹정제(雍正帝:1723~35 재위)가 죽기 직전, 건륭제는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옹정제는 제위에 오르면서 다섯째 아들인 홍력을 은밀하게 후계자로 내정해두었다. 이것은 선제(先帝)인 강희제(康熙帝:1661~1722 재위)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홍력이 실제 황태자로 지명되었을 때, 위의 네 왕자들은 모두 죽고 없던 상태였다. 강희제는 손자인 홍력의 뛰어난 자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황제로 점찍어두고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홍력은 철저하게 계획된 교육을 받은 뒤,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1733년에는 왕자들 가운데 으뜸인 화석보친왕(和碩寶親王)에 책봉되었다. 1735년 10월 18일, 24세(중국식으로는 25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건륭이라는 연호를 쓰면서 60년이 넘게 통치했다.

 

                                                   용모와 인품

  큰 키에 준수한 몸매로 단정한 자세를 늙을 때까지 잃지 않았으며 강건한 체력과 활동적인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다.

건륭제는 베이징에 있든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청의 근거지)에 있든, 또는 베이징 근처의 원명원(圓明園)에 있든, 정해진 의식절차에 따라 규칙적인 하루 일과를 보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혼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대신들이 가지고 온 보고서와 비망록을 결재하고, 관계 신하들을 접견하여 지시사항을 내렸다. 오후 2시에는 황실 주방에서 만든 몇 가지 음식을 골라 약 15분에 걸쳐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한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거나, 시를 쓰거나, 학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가끔 황후나 가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다과류의 간단한 음식을 먹을 뿐 저녁은 먹지 않았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다.

 

  건륭제는 검소하고 조직적인 사람이었지만, 흥취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품은 온화했고, 궁중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 설날에는 황궁 주변 길을 행상들에게 개방했고, 또 축제 분위기에 젖어 황궁 주변을 거닐기도 했다.

 

  사생활을 살펴보면, 1727년에 결혼한 첫째 아내 효선(孝善)황후를 지극히 사랑했다. 1730년에 이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738년에 죽고 말았다. 둘째 아내인 울라나라는 1750년에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건륭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1765년에 궁중생활을 포기하고 여승이 되었다.

 

  건륭제는 후궁들로부터 17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얻었다. 후궁들 가운데 한 사람인 향비(香妃)는 속설에 따르면, 건륭제가 매우 총애했던 애첩이었다고 한다. 향비는 중앙아시아의 야르칸드(지금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족장의 미망인으로 1759년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건륭제는 향비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그녀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작은 모스크와 터키식 목욕탕, 그리고 이슬람교식 시장을 만들어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향비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황제를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정조를 지켰다고 한다. 2년 뒤,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건륭제의 어머니 효성헌(孝聖憲)황후가 향비에게 명하여 자결하게 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건륭제의 효심은 변함이 없었고, 어머니가 1777년 죽을 때까지 자주 찾아가 경의를 표했다.

 

                                                    치세와 업적

  은 18세기에 들어와 경작지의 증대, 매우 빠른 인구증가, 황제의 선정에 힘입어 국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건륭제 때 청조는 영토가 가장 넓게 확장되었다. 몇 차례에 걸친 북동부 지역 군사원정(1755~60)에 힘입어 이 지역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또한 늘 소요를 일으키던 투르크족과 몽골족을 제압하여 중국제국에 늘 위협을 주던 외침의 위험을 없앴고, 새로운 성을 창설했다. 이로써 제국의 영토가 약 160만㎢ 정도 늘어나게 되었다.

 

  남방지역에서는 원정이 그리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이 원정에 힘입어 청의 권위가 더 튼튼하게 되었다. 티베트의 라싸에서 일어난 반청(反淸)반란(1752)은 쉽게 진압되었고 달라이 라마의 손에서 실권을 빼앗아 2명의 중국 고위 총독에게 넘겨주어 티베트에 대한 지배를 굳건히 했다. 이로 인해 네팔의 구르카족이 티베트 변경을 더 이상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고(1790~92), 이때부터 구르카족은 청에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조공). 윈난[雲南:중국 남서부 지역] 서부에서 일어난 현지 부족의 반란에 대한 진압작전(1748)과 버마 부족들에 대한 원정(1769)은 실패로 끝났지만, 1776년에 새로운 토벌군을 보내어 윈난 지역의 반란을 마침내 진압했다. 버마도 내부의 갈등과 이웃나라 샴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마침내 1788년 청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동의해왔다. 적대적인 파당들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던 안남(安南:지금은 베트남의 일부)에 1788~89년에 걸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도 하노이의 새 통치자는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동부지방인 타이완 섬에서 거세게 일어난 반란도 1787년에 진압했다. 그러나 이같은 군사적 원정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한때 튼튼했던 국가재정을 심각하게 고갈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건륭제의 통치기간 가운데 마지막 20년 동안에 벌어졌던 부실한 재정관리·사치·부패 등이었다. 이 때문에 청조는 그뒤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건륭제는 65세 되던 해에 젊은 관리 화신(和)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화신은 중책을 맡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건륭제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건륭제는 화신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어, 제국 내의 실권자가 되게 했다. 화신은 똑똑한 사람이긴 했지만 재산과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화신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 특히 건륭제의 말년에는 정실(情實)과 부패가 너무 심해져, 청의 기풍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건륭제의 화신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嘉慶帝)는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화신을 제거할 수 있었다. 가경제는 화신을 체포하여 모든 중책에서 해임시키고 재산을 몰수한 뒤, 그가 황실의 인척임을 감안하여 스스로 자결하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예술에 대한 애호

  건륭제는 예술과 문학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문학). 이때는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황제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건륭제 자신의 작품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시와 산문을 쓰고, 서예를 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 고전의 편찬사업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1772년 중국의 전통적인 4개 학문 분야인 고전·역사·철학·문학(經史子集)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만을 선정·편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고전서 四庫全書〉는 황실과 개인의 서고를 모두 섭렵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학자 기윤(紀)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10년 동안 편찬되었고, 건륭제 자신도 자료선정에 몇 번 참가하기도 했다. 총 3만 6,275권으로 구성된 〈사고전서〉의 필사본 7부가 1782~87년 사이에 베이징·러허·펑톈[奉天:만주어로는 무크덴]·원명원 등에 있는 주요 황궁들과 그밖에 학자들 전용 도서관에 배부되었다. 〈사고전서〉의 목록인 〈사고전서총목제요 四庫全書總目堤要〉는 중국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도서목록 안내서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중국문학에 이같이 극적으로 기여한 반면, 가혹한 검열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774년 건륭제는 반만사상(反滿思想)을 직접·간접으로 담은 모든 불온서적을 삭제하거나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온서적 검열을 위해 목록이 작성되었고, 1774~88년 사이에 집행관들에게 관내의 공공 및 개인도서관을 일제 조사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때, 약 2,600종이나 되는 책들이 분서(焚書) 조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 또는 일부 유력한 만주족 인사의 도서관에 사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완간된 뒤에도 〈사고전서〉는 여러 군데 수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건륭제가 불온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저서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희·옹정 연간에 활짝 피었던 예술의 개화(開花)는 건륭연간에도 지속되었다. 건축·회화·도자기가 발달했으며, 특히 비취·상아 세공이 매우 발달하여 후에는 수출용으로만 생산되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건륭제는 예술가들을 애호했다. 카스티글리오네나 장 드니 아티레 같은 유럽 선교사들의 화가적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각별히 아꼈다. 여러 가지 기계류와 기계장치들을 만들어낸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과 기술을 칭찬했으나, 선교사들을 지적 만족의 원천이며 흥미있는 물건의 창조자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베이징 부근의 원명원을 꾸미는 데 많은 신경을 썼고, 점점 더 자주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수많은 건축물·호수·정원으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원명원이 황궁으로는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대지를 넓히고 새로운 건물들을 세웠다. 건륭제의 요청에 따라, 여러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양식의 분수대 주변에 개조된 이탈리아식의 궁전과 정원을 지었다. 이는 서구의 17~18세기 건축물과 비슷한 바로크와 로코코식 건물이었으나, 지붕은 중국식이었다.

 

                                              서방과의 관계

  건륭제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태도를 취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은 친분관계를 유지했으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황실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18세기초에 강희제와 교황 특사간에 벌어졌던 '전례문제'(조상제사와 로마 가톨릭교의 양립문제에 대한 논쟁) 이후 로마 가톨릭교의 가르침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비록 각 성에서의 선교활동은 계속 허용되었지만 지방관청은 그들의 선교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고, 전체 신도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뒤 영국 정부는 중국과 교역을 넓히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중국과의 교역은 광저우 항[廣州港]으로 제한되었다. 1793년 9월에는 매카트니 경이 인솔한 특별사절단을 접견했으나, 그들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거절했다.

 

                                                       양위

  60년을 통치한 뒤 할아버지 강희제의 치세가 61년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1795년 10월 15일 다섯째 아들인 옹염(琰)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위를 물려주었다. 1796년 2월 9일(중국 책력으로는 신정) 가경(嘉慶)이라는 새로운 연호가 제정되었으나,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건륭이라는 연호를 그대로 썼다. 건륭제는 죽을 때까지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실제로 따지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에 있었던 황제이다.

 

                                                          평가

  20세기까지 건륭제는 예술과 문학의 애호가로, 외부세계의 새로운 사상들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진 위대한 건설자로, 제국을 놀라울 정도로 번영시키고 잘 다스린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베이징의 궁중에서 살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철학자의 모습을 지닌 황제라는 인상을 서방에 전파했고, 18세기의 서구 철학자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계몽군주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더 크게 키워나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중국과 서방에서 발표된 역사연구는 건륭제의 치적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대신 여러 번에 걸친 군사원정이 가져온 재정부담, 궁중 안의 과다한 사치와 낭비, 18세기말에 제국의 행정을 좀먹은 부정부패, 파괴적으로 진행된 검열제도를 허용한 전제정치 등을 강조하고 있다.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군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후계자에게 물려준 청제국은 너무나 허약하고 미비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에 서방에 의한 충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R. Pélissier 글 | 趙允卿 옮김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기타 > 그 외 여러 인물

 

 

 

 

                           건륭제와 푸차황후  2005.12.21 17:49

퍼스나콘 호소카와(ekstla33)

 

 

 

http://cafe.naver.com/royal2848/29

건륭제 홀리크(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

 

효현순황후 푸차 오르치(1712년 3월 28일 - 1748년 4월 8일)

 

장남 : 단혜태자 , 오를렌(1730 - 1738)

 

차남 : 철친왕 , 오르소(1746 - 1748)

 

장녀  / 일찍 죽음

 

차녀 : 고륜화경공주(1731 - 1792)<과이심친왕 , 소보트 바르수드>

 

  중국 역사상 가장 금슬 좋았던 황제와 황후를 뽑으라면 , 건륭제와 푸차황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건륭제가 보친왕(寶親王)시절 맞아들인 정비인 효현순황후는 ,

 소년 건륭의 첫사랑이기도 합니다. 단아한 아름다움을 소유했을뿐만 아니라 , 소박하고 사치를 모르며 , 질투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에 현명하기까지 해서 , 건륭제는 황후를 끔찍하게도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 황후가 좋아하는 야생화를 직접 꺾어 매일같이 황후에게 가져다 주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전해집니다.

 

  황후가 맏아들 오를렌[永璉]을 낳자 ,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 안타깝게도 오를렌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둘째 아들 오르소 역시 태어나자마자 철친왕[哲親王]에 책봉되는 등 건륭제의사랑이 대단했으나 , 역시 세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네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둘째 딸인화경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원체 몸이 좋지 못했던 푸차황후는 둘째 아들 오르소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심한 나머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 그때겨우 나이서른 여섯이었습니다. 크게 슬퍼한 건륭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황후를 애도했습니다.

 

황후는 죽었지만 , 건륭은 평생 황후의 그림자를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나라에는 국모가 비워질 수없다 하여 새로운 황후를 맞았지만 , 안타까운 일일지는 모르나 새 황후는 항상 푸차황후만을 그리며 살던 건륭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 결국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건륭제는 새 황후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푸차황후의 유일한 핏줄인 화경공주는 태종 홍타이지의 외손자의 아들인 호르친[科爾沈]의 보국공 소보드바르수드[色布騰巴勒珠爾]와 혼인하였습니다. 소보트 바르수드는 건륭제가 가장아낀 사위로써 ,친왕에 봉해져 과이심의친왕(科爾沈毅親王)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푸차황후의 오빠인 푸헝[傅恒]은 건륭 시대 이름을 날린 명장이자 핵심 인물이었으며 , 그의 아들푸롱안[福隆安]은 건륭제의 넷째 딸인 화가공주(和嘉公主)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는 중국어로 "샤오센춘"이라고 읽습니다..^^;;;

 

** 건륭제는 효현황후를 가장 사랑하였고, 효현황후를 끔찍히 아낀 나머지 효현황후의 장례식 때 예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고관대작을 파면시키거나, 하급관리의 목을 잘라버렸고, 심지어 장자인 영황조차 꼬투리 잡아 폭언을 퍼부었는데, "너가 황장자라고 하나, 결코 나의 후계자가 못될 것이다" 라고 하여, 이에 상심한 영황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오늘의 경제소사] 淸건륭제

 
                                                                 출처 블로그 > 1930song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1930song/40023056753



권홍우 편집위원

  ‘중국은 풍족하다.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교역도 필요없다.’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통상을 요청하는 영국왕 조지 3세의 서신에 대한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의 답이다.

 

  건륭제의 말대로 교역은 불가능했다. 영국의 비교우위가 없었기 때문. 천하의 영국도 팔아먹을 상품이 없었다. 결국 영국왕의 특사로 중국에 왔던 매카트니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1793년 10월의 일이다.

 

  영국이 이렇다 할 항변도 못하고 물러난 후,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아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청은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막강하던 청이 어쩌다 그런 지경을 맞았을까. 오만과 부패 탓이다.

 

  자만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건륭제는 치적을 쌓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태상황제 포함 63년) 동안, 10여 차례 대외 원정으로 강역을 넓히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해 고증학을 꽃피웠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병든 내부가 밝혀진 것은 1799년 1월7일, 건륭제 사망 직후. 건륭제의 사위이자 병권과 재정권을 쥐고 있던 화신의 부패에 청 조정은 경악했다. 20년간 국가 세수와 맞먹을 만큼 부정축재를 한 화신은 역사상 최악의 탐관오리로 기록되고 있다.

 

  부패와 어우러진 자만 끝에 싹튼 사회 혼란을 제국주의는 놓치지 않았다. 값 비싼 도자기며 차 수입에 은(銀)이 끝없이 유출되는 상황에서도, 청나라 시장에서 통할 만한 상품을 찾을 수 없었던 영국의 선택은 아편. 쇠락한 청은 아편과 선교사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 1912년 멸망에 이르렀다.

 

  건륭제의 자만과 청의 부패는 남의 얘기일까. 부정축재로 구속됐던 전직 대통령,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의 주인공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당당하기만 하다.

입력시간 : 2006/02/06 17:43
 
 
                             건륭제의 꿈
 
                                                                출처 블로그 > 언제나 꿈을 꾸다
                                                                 원본 http://blog.naver.com/khiehyu/130013373706
 

                                                                                                                       2006. 12. 1.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영국왕 조지 3세에게 보낸 칙서는 중화(中華)사상의 극치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에,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희극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로써 이 문서를 인용하고 있다. 옮기면 대략 이렇다.


  "그대 영국왕은 바다 건너 먼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아볼까 하여 짐에게 사신을 보내 청원서를 바쳤도다. 우리 문명을 앙모하여 배우려는 뜻은 갸륵하나, 소용없는 일일 것이로다. 그럼에도 짐이 공물을 받도록 명한 것은, 먼길을 무릅쓰고 바치는 그대의 성심을 기특히 여김일 따름이노라. 짐의 나라에는 없는 것이 없어, 그대 나라와 교역을 해야 할 이유가 없노라."


 그 뒤로 중국의 운명이 얼마나 불쌍해졌던가는 누구나 아는 바다.


 건륭제는 영국왕의 의례적인 선물도 '공물'로 여겨 받고 있다. 중국의 주변국들이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끼워넣으려는 중국 학자들이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 내지 지방정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만 공물을 받고 책봉을 행사했던 건 아니다. 서양의 중세사를 보면 교황도 각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책봉을 행사하고 있다. 교황이 관을 씌워주지 않으면 왕위의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중세 내내 그랬던 건 아니지만, 한때는 그랬다.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은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는 거나 같은 절차였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의 국가들이 교황청의 속국이나 지방정부였다고 주장하는 서양사가는 단 한 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