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건륭제(乾隆帝) (1)

영국신사77 2007. 1. 21. 00:10
 

    85. 청(淸)의 발전(發展)(9)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1)

 

가. 행운의 별. 건륭제(乾隆帝/1711. 9. 25 ~ 1799.2. 7 /

                         재위 1735∼95, 재위 60년)                                

 

  (1)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린 자금성의 건청궁 내부  청은 4대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로부터 5대 세종(世宗) 옹정제(擁正帝)를 지나 6대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 1711. 9. 25 ~ 1799. 2. 7)까지 3대 130 여 년 간을 전성시기라 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강희제가 만주인 데릴사위로서 눈치껏 살았다면, 옹정제는 만주인이라는 자격지심에서 독재권력을 세웠고, 이런 유산을 물려받은 건륭제는 천자(天子)로서 너그러운 금도(襟度)와 아량으로 황제 업을 유유히 구사하였다고 한다.

 

  옹정 13년(1735년) 8월, 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弘曆)이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청나라 6대황제로 즉위하고 이듬해 연호를 “하늘의 영광”이라는 뜻이 담긴 건륭(乾隆)이라 개원했다.

 

  빈틈없이 매사를 처리했던 옹정제가, 자신의 즉위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고, 이런 것을 없애기 위해서 고심하여 만들어 낸 것이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라는 제위계승 법이다.

 

  앞서 여러 차례 이야기 했듯이,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황태자를 책봉했다가 황제가 죽고 나면 내각수보가 작성한 유조(遺詔)가 발표되고, 이에 따라 황위를 계승하는 명(明)대의 중국제도를 옹정제는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영웅 칭호를 가졌거나 우러러 볼만한 인물을 추대하여 선거로서 칸(Khan)을 뽑는 것이 만주의 유습이다.

 

  옹정제는 이런 만주 전래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의 상속제도를 혼합해서 밀건법이라 걸 만들어 황위를 계승케 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황후와 여러 후비(后妃)의 몸에서 황자(皇子/아고)가 태어나면, 우선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내서방(內書房)이라는 황자들의 글방에 보내어 교육시키고, 이들간에 학문과 무예의 성적을 매겨 경쟁시켰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 됨됨이를 보고 가장 황제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황자가 눈에 띄면 그 이름을 비밀히 적어 작은 상자에 넣고 밀봉(密封)한 후, 순치제의 친필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건청궁의 편액 뒤에 놓아 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후 대신들이 이를 꺼내 후계자를 발표하게 하였다.

 

  옹정제가 죽은 5일 후, 이런 밀건법의 유서가 발표되고, 이에 따라 25세의 혈기 왕성한 보친왕(寶親王) 홍력(弘曆)이 즉위하여 건륭제가 되었다. 건륭제의 이런 행운은 그의 탄생부터 조금은 이색적이다.

 

  그의 어머니는 열하(熱河)에 주둔하고 있던 보잘 것 없는 만주 기인(旗人)의 딸이었다. 그녀의 나이 열 세 살 때 우연히 베이징에 들렸다가, 공교롭게도 수녀(秀女)를 뽑는 시기와 맞물렸다.

 

  곱게 차려 입은 한 무리의 12세 소녀들이 조잘 대며 궁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이 시골 소녀에게, 궁성 문지기가 그녀도 수녀지망생 인줄 잘못 알고 궁성 안으로 불러들임으로서, 황실 어른들을 알현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수수한 옷 차림과 총명한 눈빛, 단아한 용모가 황실 어른들의 눈에 들어 수녀로 뽑히고, 후일 옹정제가 되는 옹친왕 처소에 배치됐다. 이가 곧 건륭제의 모후가 되는 유호록(뉴 祜祿 : 弘毅公額亦都)의 증손녀(曾孫女)다.

 

  그러던 어느날 옹친왕이 전염병으로 심하게 앓게 되자, 남들이 꺼리는 병구완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펴 기적적으로 옹친왕은 살아났고, 이 어린 소녀를 옹친왕은 사랑하고 아끼면서 듬뿍 정을 주어 건륭제가 탄생하였다.

 

  옹정제가 건륭제를 태자로 지명한 것은, 건륭제 본인의 자질도 황제로서 손색이 없었지만, 이 만주출신의 소박한 여인을 아끼고 사랑하였고, 그 몸에서 태어난 황자가 더욱 미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후일의 중론(衆論)이다.

 

 

                        (2) 신강(新疆/신장) 정복(征服)

 

  건륭제의 재위기간 60년(1735 ~95)은 청나라가 중원에 진출한지 1세기를 지나는 시기다. 중국은 혁명의 나라라 할만큼 단명왕조가 많고 1세기 이상을 지탱한 왕조는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다.

 

  쿠빌라이가 중원(中原)에서 세운 원(元 / 1271 ~ 1368)나라가 백년을 체 넘기지 못하고 황망히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한 것은, 중국에 대한 역(逆)차별에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몽골을 오랑캐라고 우습게 보았듯이, 원나라 역시 중국을 우습게 보고 기름을 짜듯 철저히 긁어 냈다. 특히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던 강남인들에 대한 수탈은, 그 도가 지나쳐 홍건적 활동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단명왕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인, 한인(漢人), 몽고인의 3족 협화의 평등주의와 상호주의에서 출발한 청나라는 그 사정이 원나라와는 달랐다. 강희제의 성천자라는 이상적인 꿈과 옹정제의 냉엄한 현실적 금욕주의에 이어,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10만수가 넘는 자작시를 남길 정도의 여유 속에서, 다시 위구르(Uighur)와 티베트(Tibet)를 정복하고 5족 협화의 세계제국으로 올라섰다.

 

  지금도 중국은 한족(漢族)을 주축으로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多民族) 1국가 형태의 나라다. 따라서 중국인 학자들 중에는 청나라가 정복왕조라는 말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만주족 출신이 천자가 되었을 뿐, 누가 정복하고 정복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륭제(乾隆帝)는 풍류 천자 답게 그의 치세기간 남쪽 순행(巡行) 길에 오른 것이 강희제와 같은 여섯 번, 그 외 다른 곳에도 여러 차례 순행하였는데, 그 비용은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열 배가 넘었고, 그의 아버지 옹정제가 정무에 골몰하여 궁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건륭제가 탕아적인 군주가 아니라 선제(先帝)들 못지 않게 정무(政務)에 몰두했고, 그러면서도 시(詩)를 썼는가 하면, 널리 고전(古典)을 읽고 교양을 쌓았으며, 수 많은 시(詩)를 남길 만큼 굉장한 어학력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嘉?關/자위꽌)을 지나 더 서쪽으로 나가면 감숙성(甘肅省/간슈)의 돈황(敦煌/툰황)에 이르고, 조금 더 나가면 감숙· 신강의 경계지점 옥문관(玉門關/위먼관)에 다다른다.

 

  당의 수도였던 장안(현재 西安)에서 이곳 옥문관(玉門關/위먼관)까지는 2,400㎞,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텐산 남·북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곳이다.

 

  서역(西域)이라고 불렀던 이곳에는 당나라 중기 이래 중국이 이곳에서 물러난 후, 이른바 호마(胡馬)가 구슬피 우는 오랑캐의 땅으로 피가 피를 부르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 이곳에 청나라 군대가 들어갔고, 오늘날까지 중국의 영토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건륭제가 이곳을 새로이 얻은 땅이라 하여 신강(新疆:위구르)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우루무치를 주도(州都)로 하는 이 신강성은 천산산맥(天山山脈/텐산산맥)을 기준으로 그 남과 북은 전혀 형편이 달랐다.

 

  텐산 북쪽에는 중가르 초원지대가 있고 그 서쪽에는 이리분지(伊犁盆地)가 있다. 이곳에는 중가르·티베트 세계제국을 염원했던 갈단과 그 후손들의 중가르부족이 세력을 떨쳤으나, 강희·옹정년간 청의 공격을 받고 그세력이 현저히 약화된 가운데 내분까지 겹쳐, 건륭 19년(1754)과 건륭 22년(1757)두 차례의 출병으로 쉽게 청나라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텐산 북쪽이 라마교의 세계라면, 그 남쪽은 이슬람의 세계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유목생활에서 정착농경으로 생활을 바꾼 투르크계 위구르(Uighur/ 回紇)·회골(回골)족들이 부족단위로 성곽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나, 역시 종교적인 분열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건륭제는 중가르 정복의 여세를 몰아 건륭 23년(1758)군대를 출병하여, 그 이듬해 까지 이곳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렇게 반갑지 않는 황사(黃砂)의 진원지 신강성 전체가 청나라의 세력 판도에 들어왔다.

 

                                   (3) 티베트(Tibet) 정복

 

티베트 일대  북쪽으로는 쿤륜산맥이 남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티베트고원은 지구상 최대이자 최고(最高)의 고원지대다.

 

  건륭 55년(1790)과 57년, 청은 두 차례의 원정으로 티베트가 완전 복속됨으로써, 사상 유례없는 1,150만 ㎢의 방대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지금의 중국 영토가 대략 960만 ㎢라고 하는데, 이와 비교해도 건륭제 때의 영토가 이 보다는 훨씬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가 티베트를 정복한 것은 라마교와 다라이 라마(Dalai-Lama/(達賴喇?/달뢰라마)라는 종교적 분쟁을 교묘히 이용하였고, 이로써 중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전생(轉生)과 활불(活佛)이라는 특이한 티베트식 불교가 지금도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어서 그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대단하다.

 

  청조의 쇠퇴와 함께, 중국은 건륭제 때의 영토를 많이 잃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 공산당 정권은 어느 왕조보다도 세력이 강하다. 이런 가운데 티베트와 다라이 라마, 중국 정부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노출되고, 여기에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사회가 이를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과거를 잠시 더듬어 보고자 한다.(이하 글 내용이 조금은 따분합니다. 필요하신 분들만 읽어 주세요)

 

파미르고원과 더불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이곳 대부분 지역은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다. 따라서 위도상으로는 북위 27∼37°사이에 해당하나 고도에 따른 기후변화가 매우 심하여 대체적으로 겨울은 춥고 여름은 서늘하며 바람이 몹시 강하게 부는 곳이다.

 

분지 안에는 나무호(納木湖)를 비롯한 많은 함수호(鹹水湖/鹽湖)가 형성되어 있고, 짱난 곡지에 해당하는 동부에는 연평균 강수량이 1,000 mm가 넘고 있으나, 그 외 지역은 200 mm 이하의 건조지대에 해당한다.

 

이런 자연환경은 초원을 만들었고 이 초원을 따라 일찍부터 유목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漢)나라에서부터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오호(五胡)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저(底)·강(羌)이라 불리었던 유목민들이 이들 티베트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유목사회에 7세기 초 중앙 티베트를 중심으로 손챈 감포왕(Srong btsan sgam po / 643 ∼ 49)이라는 걸물이 등장하여 티베트족을 통합하고 통일국가를 이루었는데, 이를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토번(吐蕃)이라 불렀다.

 

당(唐) 태종(太宗/626 ~ 49)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감포왕에게 시집 보냈고, 이 문성공주가 석가모니 불상(佛像)을 가져가 라싸에 사원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게 된 것이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주가 데리고 간 기술자에 의해서 주조(酒造)와 제지(製紙)등의 중국문화가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사회에서도 여니 유목사회와 같이 원시적 정령(精靈)을 숭배하는 주술신앙(呪術信仰)을 믿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교(Bon)라고 한다.

 

그 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불교가 이들 토착신앙과 밀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티베트불교가 토착신앙인 본교와 경쟁하면서 현교(顯敎)보다는 밀교(密敎)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신비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포된 밀교(密敎)가 이들에게는 친근했기 때문이다.

 

9세기 전반 랄파첸 왕(Ral pa can / 티죽데첸, Khrigtsug lde brtsan, 재위 815∼838)은 지나치게 불교를 옹호하여 사원건립과 불사에 많은 돈을 뿌렸고, 불교신자라면 병역 면제의 특전까지 부여하여 국가의 경제기반과 군사력에 일대 위기로 불러 일으켰다.

 

이 틈을 노려 왕의 형인 랑 다르 마(glang dar ma/ 티두둠첸, Khri bdu dum brtsan, 809∼842)는 본(Bon)교의 지지자들과 공모하여 랄파첸왕을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뒤 모든 사원들을 허물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 철저하게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그가 842년 한 승려에 의해 살해되므로써 티베트의 정통 왕조는 사라지고 이후 약 400년간 몽골군대가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티베트고원은 군웅할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랑 다르 마 왕의 법난(法難)이 있었던 80년후, 다시 티베트에서는 불교 재건의 기운이 높아지고, 인도 사호르왕국의 왕자 출신 아티샤(Atisa / 982 ~ 1054) 스님을 초빙하여 불교 쇄신운동을 펼쳤다.

 

이렇게 해서 티베트에는 다시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 아티샤 직계 제자들을 카담파(bka’-gdams-pa)라고 불렀고 이들이 전교를 위해 황색모자를 썻기 때문에 후일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렀다. 여기에 반해서 불교 탄압 이전에 티베트에 있었던 기존의 불교계열을 닝마파(rnying-ma-pa)라 했다.

 

이런 카담파니 닝마파니 하는 외에 카규파(bka’-brgyud-pa)와 사캬파(Sakyapa)라는 종파가 생겨 크게 4파로 갈라 겼는데, 이런 새로운 종파들은 닝마파의 성격을 반쯤 유지하면서 인도로부터 새로 전해진 밀교의 성격을 혼합한 가르침을 펴고 수행했다. 현재 가장 교세가 강한 겔룩파(dge-lugs-pa)는 카담파의정신을 이어 받아 14세기 후반에 새로 생긴 종파라고 한다.

 

이런 유목사회에 칭기즈칸이 등장하여 사방을 누빌 때, 티베트에도 1253년 후일 원(元)나라 헌종(憲宗)이 된 몬케가 군대를 보내어 티베트전역을 장악하고 이곳에 선위사(宣慰使)를 두었으며, 원(元)을 세운 세조(世祖) 쿠빌라이는1253년 사캬파의 고승 파스파를 모셔와 중용하고 그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1578년 티베트의 소남 걈초(1543∼1588)가 저 유명한 몽골의 알탄 칸의 초청을 받고 칭하이(靑海)에 갔을 때 알탄 칸은 소남 걈초를 다라이라마라고 불렀고, 이 후 다라이 라마는 티베트 사회에서 정(政)·교(敎) 일치의 종교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라이 라마가 세속권력까지 장악하게 되자 그 계승법(繼承法)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원나라 때 까지는 라마가 아내를 거느리는 것을 인정하고 교주(敎主)의 세습이 허락되었다. 이들을 카르마파에서 분파된 홍모파(紅帽派/시바 마르파)라고 한다.

 

이런 홍모파가 타락하자 황모파(黃帽派 / Shva serpa)에서는 새로운 계율을 정하고 홍모파를 몰아냈다. 청대 초기에는 황모파(黃帽派)가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청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그 지배자에게 다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들은 라마가 아내를 두는 것을 금하고 법왕격인 다라이 라마의 계승은 전생활불(轉生活佛)이라는 특이한 방법을 채택했는데, 전생(轉生)이란 육신(肉身)의 죽음과 동시에 정신은 다른 육체에 옮겨가서 거듭 사는 것을 말하고, 활불(活佛)이란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라마라는 사람의 육신을 빌려서 이 세상에 오는데, 다라이 라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고, 판첸라마(Panchen Lama)는 아미타부처님의 화신이라는 것이며, 다시 이들 육신이 사라지면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영혼이 옮겨 간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관음보살의 화신인 다라이 라마를 티베트사회에서 성(聖)·속(俗) 최고의 지배자로 삼았고, 아미타불의 화신인 판쳰 라마(판첸 고르드니/ 淸 太宗이 내린 칭호)를 그 다음의 지배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2대 활불(活佛)에게 종교와 속세를 모두 지배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다라이 라마는 법왕, 판첸라마는 부법왕으로 삼고 이들에게 그 지역의 지배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라이 라마가 활불로서 이들 유목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자 중가르부족들을 위시해서 많은 유목사회가 이를 이용하여 칭기즈칸 이래의 유목국가 형성에 꿈을 키웠고, 그때 마다 청나라는 집요하게 이를 방해하였다.

 

이들과 연결되면 무서운 종교적인 힘이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라이 라마를 청나라는 교묘히 이용하여 옹정제는 티베트 주재대신인 주장대신(駐藏大臣)을 라싸에 두고 이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직접 지배하거나 내정을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건륭제에 이르러 이런 티베트에서 5대 다라이라마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다. 각 파벌을 배경으로 소위 자신이 전생(轉生) 활불(活佛)이라고 제가끔 주장하는 다라이 라마 후보가 세명이나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진짜와 가짜를 두고 서로간에 공방이 오고갔다.

 

여기에 음모가 등장하고 외세까지 동원하여 혼란이 가중되자, 이런 내분을 틈타 네팔에서는 판첸라마가 있는 타실룬포(bKra-sis lhun-po)사원을 침입하여 티베트의 내정(內政)에 끼여 들었다.

 

건륭 55년(1790) 청나라 군대는 다시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들어갔고, 2년 후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Katmandu)까지 육박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건륭제는 내정 불간섭이 결국 이런 분쟁을 더욱 조장시키는 것으로 보고, 주장대신에게 티베트의 행정·외교·군사상의 지배권을 부여하고, 다라이라마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지방정부)조직을 정하고, 그 계승법을 확립하여 전횡을 막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다라이 라마의 계승은 전생했다고 하는 활불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서 황금함에 넣고 라마승이 7일간 독경한 후에 주장대신의 입회 아래 제비를 뽑아 그 진부(眞否)를 가리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무사공평을 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라이 라마와 티베트는 주권을 상실하고 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하고 1차대전 후 외몽골과 함께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는 주권을 찾고 독립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에서는1930년부터 관리를 파견 하였고 34년에는 라싸에 몽장(蒙藏) 위원회 주(駐) 티베트사무소를 설치하여 몽고와 함께 중국의 종주권을 유지코자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킨 티베트는 종전 이후에도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1950년 10월, 중국 공산당 정부는 티베트를 침공, 51년 5월 중공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항의 평화협정을 다시 체결했다. 국제 사회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으나 이때는 한국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이를 간섭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런 티베트사회에 중국인들이 몰려 들고, 중국인들과의 차별이 심하게 되자 이에 반발한 티베트인들이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중국에 대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다라이 라마와 그 추종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주의가 도입되었다.

 

그 후 중국은 새로이 판첸 라마를 세우고, 수 많은 불교 사찰 가운데 일부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라마승에게 탄압을 가하자 승려들의 대부분은 피신하거나 투옥되었다. 1961년과 62년에는 티베트에 기근이 닥치자 다시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판첸 라마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가 중국을 비난하자 1965년 중국정부는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어 민족자치를 인정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 동서해빙의 기운을 타고 중국의 통치도 완화되었다. 그리고 1989년 스웨덴의 한림원에서는 망명 중인 14대 다라이 라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는데, 그 수상 공적은 비 폭력이라고 한다. 이 14대 다라이 라마의 망명정권은 지금도 중국 당국을 긴장시킨다.


출처 :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

 

 

 

 

 

      87. 청(淸)의 발전(發展)(10)

                       - 십전노인(十全老人)-건륭제(乾隆帝)(2)

                나. 십전 노인(十全老人)                                              

                 (1) 건륭제와 대외 원정

 

  열하이궁의 부분25세에 청나라 황제가 되었던 건륭제는, 그의 말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하고, 이를 도장(圖章)에 새겨 즐겨 사용하면서 자신만이 세계제국의 완성자임을 은근히 자랑했다.

 

  십전(十全)이란, 열 번의 대외 원정에서 고루 갖추고 완전히 승리하여 결함이 없다는 뜻으로, 중국 뿐만 아니라 주변지역도 자신의 위엄(威嚴)과 덕화(德化)가 완전하게 펴졌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정해서 평정 되었다는 열 번이란, 중가르(2회/ 1754·57)·위구르(1759)·대금천(大金川 / 1749), 대·소금천(大小金川 / 1776), 타이완(臺灣 / 1788)·미얀마(1778)·베트남(1789)·네팔(2회 / 1790, 92) 등을 말한다.

 

 이런 열 번의 무공(武功)을 십전기(十全記)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직접 쓰고, 이를 돌에 새겨,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전 언덕에 있던 조부 강희제의 평정서장비(平定西藏碑) 옆에 나란히 세웠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들여다 보면, 강희·옹정 부조(父祖) 2대에 걸쳐 피와 땀으로 땅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가꾼 것을, 건륭제는 거두는데 지나지 않았으나, 그나마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기에, 얻는 것에 비해서 잃는 것도 많았다.

 

 

  건륭제의 첫 번째 원정은 건륭 12년(1747), 금천(金川/진촨)의 토벌로 부터 시작되는데, 사천(四川/쓰촨)의 서쪽에 위치한 이 작은 땅덩이 하나를 얻기 위해, 3년간 무려 당시 청나라 국고 수입의 2 년 분에 해당하는 은화(銀貨) 7천만 냥을 썼다.

 

  그렇지만 완전히 정복하기까지는 무려 30년의 세월이 더 소요(所要)되었고, 수많은 장졸과 막대한 전비(戰費)를 대가로 지불한 후에야, 겨우 이 작은 땅덩이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즘 경제논리대로 말한다면, 투자에 비해서 소득이 형편없는 밑진 장사였다는 것이다.

 

  중가르와 티베트를 지키기 위해, 텐산과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그 멀고 험한 곳까지 군대를 보낸 것은 매우 장한 일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이미 부조(父祖) 2대에 걸쳐 이룬 업적을 여차하면 잃을 뻔했으나, 행운이 그를 도와 주었다. 실전에서는 번번이 패하면서도, 상대방의 내부사정이나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이들을 정복하게 된 것은 건륭제의 행운이라 할 수밖에 없다.

 

  미얀마나 베트남 원정은 사정이 더욱 나빠서, 하마터면 완전한 실패로 끝날 번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운 좋게 상대편에서 먼저 화평(和平)을 요구했고,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독립을 인정하고 조공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여, 겨우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생쥐와 코끼리의 싸움에서, 작은 생쥐가 덩치 큰 코끼리에게 겁먹지 않고, 오히려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끈질기게 골탕을 먹이고, 지치고 화나게는 만들었지만, 피해 다니던 생쥐로서도 제풀에 피로해서 서둘러 화평을 요청하자 이를 선 듯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건륭제 때 중국 영토는 일찍이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최대로 넓어졌다. 원래 중국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나라로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만 구분했을 뿐(華夷觀), 지리적 국경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정복이라는 것도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따라서 신하의 예와 조공만 바치면 그것으로 만족했는데, 이를 종주권(宗主權)이라 한다.

 

  이런 사상이 청 대에 이르러, 러시아인(人)들이 밀려오자, 서양인들과의 문화적인 장벽을 세울 필요에서 선을 긋게 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서구적인 국경선이 되고 말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서양인들의 출입을 청으로서는 일종의 국경무역인 마시(馬市)거나 조공(朝貢) 정도로 간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 사절이 베이징에 들어올 때도, "영이조공(英夷朝貢)"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게 했는데. 이는 영국 오랑캐가 조공을 바치러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 이나 캬흐타 조약(1727) 등도, 분별 없이 러시아 인들이 밀려들자 이들의 출입을 어느 한 곳으로 제한하고, 조공을 바친다는 전제하에서 마시(馬市)를 허용한 것 쯤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떻던, 외국과 대등한 일대 일 개념의 배타적인 국경선이 생겼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많은 영토를 중국지도에 편입시킨 황제였다.

 

  그러나 주로 종주권(宗主權)를 지키거나, 뺏기 위해 치렀던 이런 대외 원정에 쏟은 전비(戰費)는 가히 천문학적 숫자였다. 그러면서도 재정에 큰 무리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청나라의 경제가 도약했음을 의미한다. 사회는 안정되고 대량 생산은 이루어 졌으며, 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얻어, 멕시코산 은화가 유럽을 거쳐 마구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런 변화에 잘 대처하지 못했던 청나라,는 건륭말기부터 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서세동점(西勢東漸)과 거대한 제국주의 물줄기 앞에 서게되자, 얼음판 위에 돼지처럼 방향을 잃고 전락하고 말았다.

 

  19세기 중반을 고비로, 청(淸)제국은 거대한 몸집에 팔 다리가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숨을 고르기도 힘들게 되었다. 다시 만하면, 열강의 식민 혹은 반(半)식민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2)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말을 타고 있는 건륭제  중국에서 황제가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통치 못지 않게 조칙(詔勅)을 잘 써야 한다.

 

비록 행위 자체는 보잘것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라도 기가 막히게 명문장(名文章)을 만들어 발표하면, 줄줄이 백성들이 따르는 요술 같은 위력이 일어난다.

 

명의 영락제가 난징을 점령하고 자신의 즉위교서를방효유라는 당시의 대가에게 부탁했으나, 오히려 방효유는 영락제를 역적(纂敵燕王)이라 하여 이를 완강이 거절했다.

 

이래서 애가 탄 영락제는 얼레고 달래기를 수없이 반복했으나, 결국 그의 문장을 얻어 즉위교서를 발표하는데는 실패했다.

 

영락제가 방효유의 가족은 물론 그의 일가 친척 및 스승, 친지, 친구들을 포함한 8백 수십 명을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면서 까지 달래고 겁을 주었으나, 끝내 방효유는 영락제에게 즉위교서를 써주지 않았고, 자신도 처형 당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동창(東廠)이라는 비밀 정보기관을 만들어, 이런 불손한 선비들을 색출하고 가차없이 목을 잘랐는가 하면. 그런 한편 영락대전의 편찬을 명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자신의 정권에 동참을 유도하고 이들을 회유(懷柔)하였다.

 

  만주에서 들어온 청나라 역시 자신들을 욕하는 한인(漢人)들은 철저히 탄압했다(문자의 옥) 그러나 중국은 이들 지식인들의 협조 없이는 통치자체가 불가능하다.

 

순치제가 중국인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유학에 정진한 것이나, 강희제가 남서방을 열고 중국인 학자들을 우대한 것, 그리고 옹정제 역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대규모 편찬 사업을 한인(漢人) 지식인들 손을 빌려 마무리 지었던 것도, 이런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건륭제 역시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대규모 문화사업을 펼쳤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중국사상 최대 규모의 편찬사업이다.

 

사고(四庫)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부류 서적을 일컫는 것인데, 경(經)이란 사서오경(四書五經)등 유학의 모든 경전(經典)을 말하고, 사(史)는 역사, 자(子)는 공자 맹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 집(集)은 개인들의 문학을 포함한 문집(文集)을 말한다.

 

건륭 6년(1741), 건륭제는 천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책들, 이를테면 이미 출판된 것(旣刊)과 아직 출판되지 못한 것(未刊) 구분 없이 모든 서적을 수집한다는 조칙(詔勅)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모이게 되었다.

 

건륭 37년(1772),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라는 편찬소(編纂所)를 열고, 300 명의 학자를 등용하여 우선 책의 정본(定本)을 만들고, 다시 이를 정서(淨書)하여, 경(經)은 노랑 색, 사(史)는 빨강 색, 자(子)는 푸른 색, 집(集)은 회색으로 표지를 구분하고, 10년 고심 끝에 1781년 79,070 권을 3천 수천 책(冊)으로 우선 한 벌을 완성했다. 이런 전집류에 四庫全書(사고전서)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후 네 벌을 만들어서 열하 이궁 등 각기 다른 곳에 소장케 했으며(熱河, 圓明園, 紫禁城, 瀋陽), 민간인 열람용으로 다시 세 벌을 더 만들어 양주(楊州/양저우)와 항주(抗州/항저우) 등 강남(江南)의 문화 중심지에 서고를 세우고 일반인도 열람케 하여 모두 일곱 벌이되었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각 벌의 책 수는 동일하지 않다고 함)에 이르렀는데, 편집과정에서 청 왕조(淸 王朝)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소각하거나 판목(版木)을 부수는 등, 이른바 발금몰수(發禁沒收)가 된 것도 많았으며, 수록된 책 중에서도 부분적으로 고쳐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고전서의 학술상 가치는 능히 건륭제의 금자탑(金子塔)과 같은 문화업적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를 통해서 천하의 책을 모아 이미 반만(反滿)사상을 통제 했던 소위 "문자의 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편찬하게 되었으며, 불온 서적을 더욱 단속하는 기회로 이용했다는 의미도 된다.

 

나쁘게 말하면 대규모 편찬사업을 빙자해서 불온(?)서적이란 이름으로 많은 서적을 없앴다는 것인데, 이때 소각되거나 개작된 책이 약3 천 종에 7, 8 만 부나 되었다면 훗날 이런 이야기도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3) 향비(香妃)에 얽힌 사랑 이야기

 

건륭제가 은퇴 후 머물었다는 수연궁 벽의 용 조각  건륭제 역시 여니 황제들처럼 많은 후비(后妃)를 두었고, 이들로부터 아들 17명, 딸 10명 등 모두 2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 그에게 젊은 시절 향비라는 아릿다운 한 여인을 두고 애간장을 태웠지만, 황제의 권위와 위엄으로도 한 여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이 희대(稀代)의 대 로망스는  애처로운 추억만을 그의 가슴에 묻게 하여, 후세 사람들은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중국 신강성에 있는 타크라마칸사막(타림분지라고도함)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텐산산맥 남쪽 기슭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거쳐 서쪽으로 나가거나, 타크라마칸 사막 남쪽, 즉 쿤륜산맥 북쪽 사면을 따라 역시 오아시스국가들을 지나 서쪽으로 나가면 이 두 곳이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이른바 실크로드의 서쪽 출발이자 동쪽에서는 종착지가되는 카슈가르(Kashgar)라는 곳이다.

 

  이미 한(漢) 나라 때부터 소륵국(疏勒國)이란 이름으로 중국사서(史書)에 등장한 이곳에는, 투르크계 사람들이 대상무역을 상대로 숙영지를 제공하거나 중계무역을 통하여 번창하고 있었는데, 이슬람세력의 동진(東進)에 따라 이슬람화되었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전진기지로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화된 투르크계 사람들을, 중국에서는 위구르(Uighur)인(人)이라 불렀다. 회교(回敎), 즉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16세기경부터 이곳에는 위구르인들이 카슈가르 한국(汗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륭 년간 청나라의 군대가 여기에 이르자 이곳 주민들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은 힘에 부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 망국의 서러움 속에서 향비라는 위구르 왕족 출신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선녀처럼 아름다운 몸에서 그윽한 향기까지 풍기는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원정 사령관은 이 절세의 미인을 베이징의 건륭제에게 보냈다. 혹은 일설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건륭제는 이 여인을 얻기 위해 이곳에 출병시켰고, 이 여인을 사로잡아 보낸다는 연락을 받고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머나먼 길을 오는 도중 행여 향기라도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고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향비 본인은 베이징에 도착해서도 아무런 표정 없이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황제가 접근하자 싹 돌아 앉고 말았다. 애가 타는 건륭제는 말 잘하는 궁녀를 보내 달래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가 접근하면 칼로 찌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매정하게 잘라 버렸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향비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던 황제는 향비의 주변만 서성일 뿐 번번이 헛걸음만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처소 앞에 이슬람 풍의 거리를 만들고 향수를 달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등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런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한 황제의 어머니(母后)는 단념하라고 충고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이 절세의 미인을 결코 잊을 수도, 포기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아들인 황제의 대답이었다. 답답하기는 어머니인 모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후는 결단을 내렸다.

 

  어느 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자금성을 나간 사이, 모후는 향비의 소원대로 자결을 허용했고, 이래서 향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모후가 궁녀를 시켜 향비를 목 졸라 죽였다고도 한다.

 

  여하튼 향비의 죽음을 접하고, 허둥지둥 달려온 건륭제가 향비의 시신을 바라보았을 때,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에서는 향기를 내 뿜고, 살갗은 더욱 싱싱했으며, 앵두같은 붉은 입술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한다.

 

  그 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절대군주의 이런 사랑이야기가 건륭제 때 나타났다는 것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서양선교사들에 대해서 그 지식과 기술만 빌렸을 뿐, 카톨릭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서 건륭제의 신임을 받고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던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G?useppe / 郞世寧/ 1688 ~ 1766)에게 명하여, 향비의 요염한 자태와 조용한 슬픔, 그리고 군장(軍裝)을 한 반신상, 건륭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기는 그림들을 그리게 하여, 만년에 이를 추억으로 간직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전하는 이야기일 뿐, 향비가 언제 어떤 경로로 얼마나 베이징에 머물렀는가는 확실하게 기록된 것이 없다. 다만 건륭제가 위구르를 정복한 것은 1759년으로 때에 건륭제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리고 베이징의 동릉에는 건륭제와 비빈들의 무덤이 있고 그 가운데 용비(容妃)라는 이름의 무덤이 있는데 이것이 향비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카슈가르에는 향비의 무덤이라 해서 인도의 타지마할보다는 작은 규모의 묘당(廟堂)이 있고, 이곳 사람들은 향비를 그들의 성녀(聖女)로 모시고 지금도 제사를 올리고 수많은 참배 객들이 줄을 잇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두 곳 중 어느 한 곳은 빈 무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 청조(淸朝)에서 이름을 떨친 한인(韓人)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인종과 언어학의 입장에서 분류하면 우리들과 가장 유사한 집단이 만주족이라고 한다. 일례로 고구려를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사의 한 분야로 잡고 있지만 중국에서도 고대사의 범주에서 자국의 변방 여러 곳 중 하나로 고구려史를 엮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의 강역은 대동강 남쪽에 머물렀고, 고려태조의 북진정책으로 청천강 유역까지 북상했다가, 거란의 침입 후 서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의 함경도 지방은 전과 다름 없이 여진족들이 부족단위로 살고 있었고, 이것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그의 5대조가 함경도로 이주한 후 대대로 그곳에서 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막하(幕下)에는 퉁두란(李之蘭)을 비롯한 많은 여진인들이 군사적인 힘을 보태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저런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과 여진의 혼혈(混血)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후, 중국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받아들인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정묘(丁卯)·병자(丙子) 호란(胡亂)을 당하여 그들의 지배하에 들게 되자, 사상적으로 더욱 단단히 무장하고, 오기(傲氣)까지 발동하여 지배를 받으면서도 더욱 얕잡아 보는 자기 모순에 빠져 들게 되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1737 ~ 1805)은 건륭 45년 (정조4년/1780) 6월, 그의 종형(從兄) 박명원(朴明源 / 英祖 3女 和平翁主 駙馬錦城尉)이 건륭제의 칠순(七旬) 축하사절로 베이징에 갔을 때, 따라 갔다가 돌아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상세한 견문기를 남겼다.

 

  그의 열하일기 심세편(審勢編)에 따르면, 당시의 연행(燕行)사신과 그 일행은 조공을 바치러 가는 형편에서도 만주인들을 오랑캐로 얕잡아 보았다고 하며, 연암(燕巖)은 이런 것을 오망(五妄), 육불가(六不可)라 하여 경계 하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망(五妄)이란, 자신의 지체나 벼슬, 신분 또는 학식, 재력을 자만하여 외국에 가서도 그를 뽐내고 과시하는 것이 일망(一妄)이요, 붉은 모자, 이상한 옷소매 등 우리와 다른 풍속이나 문물을 깔보고 비웃는 것이 이망(二妄)이며, 비록 대국을 지배하고 있을 망정 오랑캐라 하여 교만하게 그들의 문물을 거들떠 보지도않고 고고한 체하는 것을 삼망(三妄)이다.

 

  배운 글 대부분이 중국 글이기에 글을 조금 안다 하여 상대편의 시문(詩文)을 얕보고 헐뜯는 것이 사망(四妄)이고, 한족(漢族)이면서 오랑캐 황제의 은택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 춘추(春秋)의 의리를 망각했다고 의분하는 따위가 오망(五妄)이라 했다.

 

  이어서 육불가(六不可)라 하여, 남의 나라에 들어가 길 가는 행인을 붙들고 나라 정세를 알아보는 것이 일불가(一不可)요, 말이 통하지 않아 글을 써 통하는데 의견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이불가(二不可)며, 외국인이라 형적이 바로 드러나 경원 받는 것이 삼불가(三不可)다.

 

  슬쩍 물어서는 실정을 알 수 없고 깊이 물으면 기휘(忌諱)에 저촉됨이 사불가(四不可)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으면 다른 뜻이라도 있는지 오해를 받으니 이것이 오불가(五不可)요, 그 나라 금령이나 법도. 예의를 몰라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이니 이것이 육불가(六不可)다.

 

  어쨌거나 청(淸)나라의 멸망으로, 만주족은 소리 없이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말았다.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중에는 19세기 말에서20세기 초, 가난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여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신천지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거나, 그 후예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두 지역간 인적 교류는 빈번히 있었고, 청나라의 공식 기록에도 조선 인으로서 청조에 귀화한 성씨가 42개나 된다. 이들 조선 인들을 청나라는 만주 8기에 배속 시켰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떨친 성씨로 김씨, 한씨, 박씨, 안씨 등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의 거부(巨富) 중에는 소금 전매업자가 많았다. 조선 출신 안기(安岐 / 1683 ~ ?)라는 사람도 소금 전매권(專賣權)을 얻어 큰 재산을 모으고, 가난한 문인들과 불우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골동서화를 수집하여 감식가로서 당대 제일인자였다.

 

  특히 동진시대(東晋時代/317 ~ 419) 고개지(顧愷之)가 그렸다는 여사잠도(女史箴圖)라는 족자(簇子) 그림은 원래가 안기의 소장품이 였는데, 그의 사후 건륭제에게 넘어 갔다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다시 영국인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지금은 이 귀중한 동양 최고의 신품(神品)이 엉뚱하게도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자(字)를 의주(儀周). 호를 녹촌(麓邨) 또는 송천노인(松泉老人)이라고했던 안기의 서화목록인 묵연휘관(墨緣彙觀)은 진(晉)·당(唐) 이래 서화의 최고감식 준칙으로, 중국과 미국의 동양화 연구가들에게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한국인들은 안기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의주(義州) 출신 김남해(金南海)란 사람은 병자호란 때 가족이 몰살 당했으나, 청 태종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공을 세워 내무부 3기화기 도총관의 벼슬을 얻었으며, 그의 손자 김상명(金常明)은 세종 옹정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어전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옹정제가 그와 의논 할 때는 사다리를 놓고 김상명과 함께 다락에 오른 뒤, 사다리를 치우고는 누구도 접근치 못하게 한 다음 그와 독대(獨對)할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김상명의 조카딸은 건륭제의 잠저(潛邸)시절 귀인(貴人)이 되었고, 건륭제의 즉위 후 가귀비(嘉貴妃)로 승차되고, 사후에는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그녀가 출산한 네 명의 황자 중, 11황자 성친왕은 시문·서법에 뛰어나 청의 4대가로 꼽힐 정도였다.

 

  가귀비의 오빠가 김간(金簡 / ? ~ 1794)이란 사람으로 건륭제 때 대신과 공부, 호부, 이부의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특히 인쇄·제책담당인 무영전(武英殿)의 장(長)으로 있을 때 동자(銅字) 사용을 건의하고, 6개월 동안 25만 3500자의 목활자를 완성하였다.

 

  이괄의 난(1624) 때 이괄에게 가담 했던 구성부사 한명련은 이천에서 부하에게 피살되었지만 그의 두 아들 윤(潤)과 난(?)은 청나라로  망명하여 형은 한운(韓雲)으로 동생은 한니(韓尼)로 개명하고, 1632년 송산(松山) 싸움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갔을 때, 유적(流謫) 소탕에 큰 공을 세우고 형제 모두 일등경차도위(一等輕車都尉)를 제수(除授)받았다. 한니의 셋째 아들 한걸도(韓傑都)는 호군참령(護軍參領)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청나라에서는 이를 매우 애석하게 여겨 벼슬을 높여 주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박씨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의주 출신 박동안(朴東安)이 청 태종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서 대신까지 지냈으며 그 후손들도 크게 번창했다. 이 외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로 건너가 군공(軍功)을 세운 이가 많았고, 나라에서 받드는 제사(祭祀)에 이름이 오른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 서면서 서둘러 시작했던 명사(明史)도 건륭제 때 완성을 보았다. 그런데 건륭제에 이르러 모든 왕족들이 수도 한 곳에만 오밀조밀 몰려 살다보니까, 불편함은 고사하고 서로가 서로를 헐 뜯는 등 그 폐단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왕공(王公)은 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조법(祖法)에 묶여 다른 곳으로 분산할 수도 없었다. 이에 놀란 건륭제가 도대체 이런 천하의 악법을 누가 만들었는가를 조사케 했더니, 순치제의 섭정 다이곤에게 열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내각 수보로 기용되었던 김지준이 만들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인(旗人)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 것도 그의 소치임을 알고는 이를 갈면서 분을 터뜨렸지만, 이미 만들어진 조법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분풀이로 명사의 이신전(貳臣傳)에 김지준을 포함 시켜버렸다. 이신(貳臣)이란 두 왕조를 섬긴 매국노, 즉 한간(漢奸)이란 뜻이다.

 

 

  1795년, 건륭제의 나이 85세, 제위기간 60년, 아직도 정정했다. 그러나 그의 열 다섯째 아들 영염(永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그 이듬해부터 연호를 가경(嘉慶)으로 고쳐 부르게 하여, 외견상 청의 7대 황제 인종(仁宗) 가경제(嘉慶帝/1760~1820)가 즉위했다.  조부 강희제의 치세 61년을 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는 하나, 그의 아버지 옹정제가 만든 밀건법을 스스로 어기고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후계자를 세웠다.

 

  그리하여 자신은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어 4년간 실권을 더 행사하다가, 1799년 89세로 타계했는데,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끼게 된다. 건륭제가 화신(和? / ? ~ 1799)이라는 만주기인 출신을 총애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군기처대신을 무려 20 여년간 시키면서, 그가 저지른 천문학적인 부정을 막지 못했다.

 

  건륭제의 사후, 가경제(嘉慶帝)는 그를 체포하고, 그가 저지른 큰 죄(大罪) 20 가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으며, 그의 전재산을 몰수했는데, 화신의 재산이 황제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 역시 호사스러운 생활로 많은 국고를 낭비했다.

 

  건륭제를 고비로 청조는 사양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은 그 후의 황제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추세에서 몰법자(沒法子/메이파즈)라고 스스로 목을 움츠리고 살았던 서민사회가, 역사 무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몰법자(沒法子/메이파즈)를 우리말로 풀이 할 적당한 용어는 없으나, 구태여 이야기한다면 "별 볼일 없는 서민"들, 혹은 "어쩔 수 없는 사람" 들이 근사치에 해당 한다.

 

  중국은 예부터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하여 자연현상에 순응하고 살았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강자인 지배계급이 약자인 서민들, 소위 메이파즈들을 긁어 내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법칙(順天)을 따를 뿐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이를 거부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逆天) 것으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적군에게 포위되어 모두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이들 메이파즈들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육신(肉身)은 윗 사람들의 식량으로 제공하는 것이 남은 볼 일이다. 이런 것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즉 스스로를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아니라 지배자를 위한 살신연명(殺身延命)으로, 어떻게 보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주옥같은 경구가 메이파즈들에게는 天命(천명)을 빌린 올가미였던 것이다.

 


                                                출처: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  글쓴이 : 이길상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