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리뷰] `강희제` `옹정제`
[기획 리뷰] `강희제` `옹정제` [조인스]
황제가 발설한 `권력승계`…淸代 황실·역사 이야기
동시 출간된 신간 『강희제』와 『옹정제』를 내쳐 읽고 책장을 덮으며 어느 광고의 카피를 떠올렸다. "훔쳐서라도 읽으라. " 그렇다. 미국과 일본의 축적된 동양사학의 정점에 있는 고전이면서 흥미만점의 책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두 책은 서술방식이 딱딱한 역사서류(類)와는 천양지차다.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한 위대한 군주가 남긴 자투리 자료 3백47개를 정교하게 짜깁기해 '황제가 들려주는 자서전' 으로 꾸몄다.
황제와 독대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반면 『옹정제』는 구수한 옛날얘기 스타일에 엄청난 역사정보를 녹여낸 탁월한 역사전기물이다. '행복한 책읽기' 도 두 책의 리뷰를 강희제 - 옹정제 부자(父子)사이의 가상 대담의 방식으로 했다.
▶ 강희제 = 짐은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를 읽고 매우 놀랐다는 소회부터 밝여야겠네. 단 한곳도 내 목소리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지. 미국에서는 1971년에 출판됐으나 한국어로 30년 만에 번역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네.
자서전에 써있듯, 본디 짐은 나의 치세 시절부터 베이징에 머물던 예수회 신부들과 그들이 전하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나, 세월이 바뀌어 미국학계의 중국사 연구 스칼라십이 이토록 높다는 점은 미처 예상치 못했네.
▶ 옹정제 = 선제(先帝)께서도 놀라셨다지만, 일본의 역사학자 미야자키의 『옹정제』도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는 61년간 재위하셨던 선제와 건륭제 사이에서 13년간 통치를 했고, 따라서 막간 간주곡 정도로 취급받아왔습니다.
미야자키의 이 책은 저를 중국 인민의 스타로 만든 계기였고, 일본의 이른바 옹정학(學)의 서곡에 해당하는 저술이기도 하답니다.
▶ 강희제 = 농담이네만, 나 역시 강희학이라는 말은 들어본 바 없지만, 옹정학은 들어본 바 있어 유감이네. 천자(天子)인 내 아들에게 축하를 보내야 할까?
▶ 옹정제 =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옹정학은 선제께서 통치를 위한 기본 수단으로 시작했고, 제가 본격적으로 시행했던 지방관료와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비밀문서인 주접(奏摺)에 대한 연구로 출발했습니다.
▶ 강희제 = 옹정학은 청나라뿐 아니라, 근세 중국의 풍속에서 관료제에 대한 이해의 관건으로 등장했다는 점도 재미있지.
2년전 중국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린 사극이 옹정제였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라고 판단되네.
▶ 옹정제 = 아마도 그것은 선제와 저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자 고유의 임무일 것입니다. 『옹정제』를 옮긴 한국의 소장 역사학도가 던진 말은 인상적이죠. "우리에게 친숙한 역사적 인물이란 ,후세의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내 기억을 상기시켜줬기 때문이다. "
▶ 강희제 =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봄세.
즉, 짐에 이어 내 아들이 펼쳤던 통치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점,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느냐는 점 등 말일세.
▶ 옹정제 = 좋습니다. 우선 저는 약간 다른 얘기, 즉 두 책에 자세히 언급된 권력승계 문제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선제께서 황태자로 책봉했던 저의 둘째 형 이아거(二阿哥)를 폐위시키고, 임종 직전 넷째 아들인 저를 지목하신 이유가 지금도 궁금합니다.
실은 저의 즉위 직전 중국에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본래 선제께서는 손바닥에 '十四' 라고 썼다는 것, 그러나 제 측근의 농간이 글자를 변조해 '于四' , 즉 '넷째아들 에게(于)' 로 했다는 악소문까지 있었습니다.
▶ 강희제 = 그랬던가? 모두 헛된 말이네. 내가 『강희제』 마지막의 상유(上諭, 유언)에서 '오장육부를 보여주는 것처럼 밝힌다' 고 한 대로, 짐은 천하의 존귀함과 부유함을 다 누렸으나, 이아거를 두차례에 걸쳐 폐위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번민을 가져보았네.
동성애의 추잡함을 즐기고, 못된 패거리들의 꼬드김 때문에, 황태자가 정치보스가 되어 농간을 부리게 되는 권력 자체가 무섭더구먼.
▶ 옹정제 = 그러면 저를 선택하신 것은, 권력의 주변에서 쓴맛. 단맛을 본 저의 40년 경험을 높이 산 때문이었을까요?
▶ 강희제 = 미야자키는 그렇게 썼더구먼….
▶ 옹정제 = 미야자키는 저를 '역사상 가장 유능한 선의의 독재군주' 라고 평가했습니다. 공정사회 건설이라는 종교적 신념을, 만주인 특유의 인내심으로 관철시켰으나, 결정적으로 1인 치하의 한계를 가졌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강희제 = 그건 20세기 서양 민주주의 이념의 잣대로 우리를 재단한 것뿐이야. 짐도 이민족을 오랑캐 문화로 보는 한족(漢族)문화의 편협함을 견제하고, 만주족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강조했네. 내 치세에 천하의 태평을 가져왔다는 스펜스 교수의 말이 고맙구먼.
▶ 강희제.옹정제 = 제갈량의 말대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정성으로 나랏일을 돌보았던 황제였다고 자부해도 될까? 판단은 역시 후세의 몫이네만.
〈강희제〉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이산/ 1만1천원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이산/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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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옹정제를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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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Ⅱ. 옹정제의 즉위--개와 돼지가 되거라
Ⅱ. 옹정제의 치세---천명을 받들어
ⅲ.결―독재정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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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강희제의 아들로 견륭제의 아버지로만 알려진, 별로 유명하지 않은 황제 옹정제는 독재정치로 알려진 황제이기도하고, 황위계승 싸움의 마지막 승자로서 야사 등에서 묘사된 냉혹하고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라고 알려진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옹정제라는 인물은 자신의 권력, 통치에 반감이나 위협이 되는 인물에는 너무나도 냉철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이 책은 옹정제의 황위 계승후 참담한 형제들의 숙청 작업으로 냉엄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묘사된 초반과, 지방관들이 보내온 주접을 자정까지 일고 답장인 유지를 쓰는 한편, 부패관료들을 처단하는 국민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황제의 모습인 중반, 옹정제의 사망과 그의 독재정치의 한계를 나타내는 후반부로 나뉜다.
아래서는 옹정제의 황위 계승 전후와 중반의 치세, 황제말년의 정치적 한계로 설명해 보려한다.
Ⅱ. 옹정제의 즉위--개와 돼지가 되거라 옹정제는 사아거로 누구도 그의 황제등극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강희제는 사후 황제자리를 놓고 형제끼리의 내분을 막기 위해 황태자 제도를 만들었다. 청조에서는 1대 태조와 2대 태종이 결국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타계하였고, 태종의 아들 순치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임종 시에 후계자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식 군주제 개념이 차츰 만주족에 침투되어 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강희제 때에 이르자 완전히 중국식을 따라 천자 생전에 황태자를 확실히 정해 두려고 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35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황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자인 두 번째 아거에게 두 살 때 황태자로 지명하였고, 훗날 너무 일렀던 황태자 책봉으로 인하여 후회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너무 일찍 황태자로 책봉된 이아거는, 학문이나 수양에 힘쓰지 않고 관료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황태자는 두 번이나 폐위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다. 그 후 강희제 임종 시 새롭게 떠오른 십사아거를 제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아거 즉, 옹정제가 강희제의 뒤를 잇게 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본인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옹정제 주위에는 그의 세력이 없었고, 옹정제는 자신의 황제자리를 굳건히 하기위해, 자신에게 위협되는 아거들이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관료들을 숙청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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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미야자키는 「주비유지」라는 자료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간다. 이 책은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하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이다."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하는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풍속을 탐구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역사서이다.
옹정제는 1678년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 - 강희제가 61년, 건륭제가 61년이었다 - 에 견주면 형편없이 짧아 보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는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앞뒤의 두 시대를 연결하는 다리나 간주곡 정도로 과소평가되었다. 옹정제 개인에 대해서도 폭군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략가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기존의 평가를 거부한다. 그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고, 옹정제 사후 한 세기 반 이상을 더 지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무... [예스24 제공] |
작가 소개 |
저자 | 미야자키 이치사다 |
1901년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나 1995년 타계했다. 교토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생을 교토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1960년과 1965년 사이에는 파리·하버드·함부르크 대학에 객원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중국사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사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모닝365 제공] |
목차 |
-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 참고연표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알라딘 제공] |
네티즌 리뷰 | 총 7건(좋은 리뷰를 우선 노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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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책(Treason by the book) - 옹정제와 사상통제
블로그 > [疑行無名 꿈을 심는 농부 疑事無功]
http://blog.naver.com/tcasuk/40004453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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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너선 D. 스펜스 (Jonathan D. Sp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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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의 역사학과 석좌교수이자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1959년 예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5년에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겐하임 펠로우쉽, 맥아더 펠로우쉽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예술과학원과 미국철학협회 회원이다. 지은책으로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2>,<천안문>,<마테오 리치,기억의 궁전>,<칸의 제국>,<강희제> 등이 있다. |
淸 전성기 ‘역모통제 노하우’ |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 2004-07-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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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최고통치자인 황제들의 역량이란 측면에선 가장 우수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무제나 당 태종과 같이 왕조마다 특출난 임금은 있었지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세 황제의 133년동안의 재위기간(1662~1795)만큼 번영과 국운상승이 장기간 유지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세 황제 가운데서도 각각 60년간 황제의 자리를 지켰던 강희제(재위 1662~1722)와 그의 손자인 건륭제(재위 1735~1795)에 비하면 중간에 위치한 옹정제(재위 1722~1735)는 재위기간도 13년밖에 안되는데다 두 황제의 화려한 업적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못받곤 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전기를 쓴 전후 일본 동양사학계의 대표적인 석학인 미야자키 이치사다에 따르면 옹정제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로 강희제 말년의 방만함을 수습하고 건륭제의 치세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황제 중의 황제였다.
책은 바로 옹정제 때 일어났던 쩡징(曾靜) 역모사건을 다룬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 후난(湖南)성 융싱(永興)현 산골마을 출신 하급 지식인이었던 쩡징이 저명한 사상가 뤼류양(呂留良)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이 겪는 고통에 분개해 쓰촨(四川)성과 산시(陝西)성을 다스리는 촨산(川陝)총독 웨중치(岳鐘璂)에게 제자를 통해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비롯됐다.
한족의 민족영웅인 남송 웨페이(岳飛) 장군의 피를 물려받은 웨중치가 언젠가는 복수를 단행해 중국의 옛 영광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한 행동이었으나 정작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제자를 투옥해 심문하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제위 찬탈자와 형제들을 죽인 살인마, 황음을 일삼는 색광, 술고래 등의 노골적인 비난과,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華夷論)으로 가득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것이 쩡징뿐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역모 관련자들을 색출해 가차없이 처벌하면서도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면해준 뒤 중국의 잘못된 화이관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자신과 쩡징의 서면질의응답으로 구성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책을 저술해 전국에 배포한 것이다.
밀정과 관료들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주접(奏摺)제도 등을 통해 중국 전역을 손바닥보듯 감시하고 있었던 옹정제가 신묘막측함(술)이란 법가의 술(術)을 최대한 구사해 쩡징을 집요하게 설득,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변화시킨 과정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대의각미록’이다. 예일대 교수로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저자는 옹정제가 쩡징 역모사건을 계기로 ‘대의각미록’을 통해 사상통제를 시도한 역사적 사건을 추리소설처럼 재구성했다. 대가의 작품답게 한 사건에 대한 분석에만 그치지 않고 옹정제가 다스린 18세기 초반 중국사회의 전체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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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징은 웨중치 장군이 감히 옹정제의 면전에서 "폐하! 등용해서 쓰는 사람을 의심하지 마시고, 의심스러운 자는 아예 등용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담하게 직언했다는 소문을 듣는 순간 반역을 꿈꾸었다.
<강희제>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의 최신작
역사와 문학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새로운 역사서술방법으로 우리를 매료시켜온, <강희제> <천안문>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의 최신작 <반역의 책>. 이 책에서 스펜스는 다시 한번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반추하는 흥미진진한 과거로의 여행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
이 여행의 주요 무대는 18세기 중국의 후난 성과 베이징. 주인공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자신의 뜻대로 신하들을 능수능란하게 통제하는 옹정제, 황제를 탄핵하기 위해 무모한 반역을 꾸민 고지식하고 나약한 지식인 쩡징, 우직하지만 속임수에 넘어가 대사를 그르친 어리석은 장시, 옹정제의 눈치를 살피며 보신(保身)에 급급하지만 끝내는 신임을 잃고 몰락하는 총독 웨중치, 옹정제의 의중을 옹정제 자신보다 더 잘 읽어내는 심복 오르타이, 쩡징을 극형에 처하라며 누차 상주문을 올리는 등 충성심을 과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기회주의적인 관료들, 억울한 희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뤼류량의 후손들, 희대의 사기꾼 왕수, 계란으로 바위 치듯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며 만용을 부리는 막빈(幕賓) 탕순가오. 이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의 대로를 따라 거닐다 보면 딱딱한 역사전문서가 아니라 한여름밤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후난 성 융싱 현의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황제를 탄핵하려는 역모사건
저명한 사상가 뤼류량의 저작을 우연히 보게 된 융싱 현의 하급 지식인 쩡징은 그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여 촨산총독(川陝總督)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제자 장시를 통해 보낸다. 웨중치는 비록 지금은 만주족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남송의 민족적 영웅 웨페이(岳飛) 장군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언젠가는 복수를 단행하여 중국의 옛 영광을 부활시킬 것으로 한인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장시를 투옥해 심문하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제위 찬탈자, 형제들을 죽인 살인마, 황음을 일삼는 색광, 술고래 따위의 노골적인 비난과 이적(夷狄)은 중화를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으로 가득 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는 쩡징뿐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역모 관련자를 색출하여 가차 없이 처벌했지만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사면하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관용'을 베풀었다. 나아가 옹정제는 이 사건을 철저히 파헤쳐서 자기와 관련된 모든 소문을 일거에 잠재우고 아울러 중국의 사상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잘못된 화이관을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간행하여 쩡징과 비슷한 생각을 품은 다수의 한인을 설복하고 교화하려 했다.
반역자와 황제의 공저 <대의각미록 [大義覺迷錄]>
[ 청나라 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 여유량(呂留良)이 주장한 화이사상(華夷思想:중화사상) 등의 영향을 받은 증정(曾靜)이 배만(排滿)을 위한 거병을 하도록 천섬총독(川陝總督) 악종기(岳鍾琪)를 종용하다가 붙잡힌 사건을 계기로 편찬되었다. 옹정제는 청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논설에, 증정 등의 신문(訊問)에서 있었던 문답과, 그들이 전향하기에 이른 경과 등의 기술을 곁들여 간행했으며, 관료나 독서인들의 필독서적으로 삼게 하였다. ]
이 역모사건에서 최대 미스터리는 옹정제가 역모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면서도 정작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관용을 베풀어 사면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잃게 된 한족은 언제나 화이론(華夷論)을 들먹이며 만주족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옹정제는 아예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한족의 화이론을 변형시키고자 신묘막측술을 펼친다. 술(術)이란 자유자재로 바람과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그 속에 몸을 숨기는 용처럼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들을 은밀히 제어하는 것이다. 옹정제는 밀정이나 주접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신묘막측술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 나갔다.
역모자는 자기의 타도대상이었던 그 황제의 집요한 설득과 훈육에 감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맹세했을 뿐 아니라 옹정제는 쩡징을 역모자에서 충성스런 백성으로 변화시킨 과정을 책으로 엮어낸다. 이 책이 바로 <대의각미록>이다. <대의각미록>은 주로 옹정제와 쩡징이 주고받은 서면질의응답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옹정제와 쩡징의 공저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옹정제는 청조의 관료들과 행정조직을 총동원하여 이 책을 전국에 배포하고 그를 괴롭혀온 온갖 유언비어와 반청사상을 불식시키려 했다. 그래서 단순히 배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각급 학교의 필독서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강독하게 하고 중앙에서 관료들을 파견하여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기까지 했다.
소문과 진실
그러나 황제의 절대 권력, 청조의 관료조직과 방대한 정보망을 총동원한 대대적인 수사와 사상통제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쩡징이나 왕수를 흉내내는 모방범죄가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쩡징과 뤼류량에 대한 옹정제의 판결에 대해 대놓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올 정도로 사회적 동요가 심각해졌다.
그런 와중에 옹정제는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 달 전 갑자기 치명적인 병에 걸려 발병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옹정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옹정제의 넷째 아들 건륭제는 아버지를 괴롭힌 이 불미스럽고 의혹으로 가득 찬 사건을 하루속히 깨끗이 마무리짓고 싶었다. 즉위한 이듬해인 1736년에 그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 사건을 재심하여 옹정제가 용서해준 쩡징과 장시를 도로 잡아들여 대역죄로 다스린다.
그리고 옹정제가 간행하고 배포한 수십만 권에 달하는 <대의각미록>을 금서로 지정하고 모조리 회수하여 파기하는 조치를 내린다. 이로써 무수한 목숨을 앗아가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던 쩡징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옹정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문을 지워버리고 자기가 말하는 진실만을 남겨두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건륭제는 소문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옹정제와 관련된 소문과 진실을 모조리 역사에서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래야만 소문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사람들은 소문과 진실을 모두 망각한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소문만 기억했다. 그리고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대의각미록>에 나오는 소문과 궁중암투가 모두 진실이기 때문에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런 것
<반역의 책>은 단순히 특이한 한 사건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옹정제가 다스리던 18세기 초반 중국 사회의 전체상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주무대인 후난 성 일대의 지리, 행상들의 이동로, 농촌마을의 풍경, 지식인들의 교류 관행, 주접제도의 운용방식, 길조나 흉조를 조작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전통, 공식문건의 인쇄와 배포과정 등은 물론이고 청대의 중국이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어떤 정서와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연속적이고 완결된 내러티브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사, 더 나아가서는 역사의 본질을 보게 된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절대권력자라 하더라도.
‘옹정제’는 실패한 독재자였나 비범한 통치자였나
[경향신문 2004-07-23 20:02]
-반역의 책-조너선 스펜스/이산-
중국 청나라 5대 군주인 옹정(雍正) 황제. 일반인들에게 옹정제는 인상 깊은 황제가 못된다. 아버지 강희(康熙)제와 아들 건륭(乾隆)제는 각각 60여년씩 중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옹정의 재위기간은 12년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오삼계(吳三桂·우산구이) 반란을 진압해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완료했다. 아들은 러시아와 한판 붙는 등 전쟁을 주저하지 않아 중국의 땅덩어리를 사상 최대로 만들어 놓았다. 이와 달리 옹정은 후세에 내세울 변변한 승전보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반인에게 옹정제는 강희와 건륭을 이어주는 가교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전문가, 그 중에서도 초고수급에 이를수록 옹정에 대한 평가와 관심은 달라진다. 우선 일본. 동양사 대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라는 평전을 썼다. 그는 옹정제를 중국, 나아가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로 평가했다.
다음은 한국. 고 민두기 교수는 40년전 ‘청초의 황제통치와 사상통제의 실제-증정(曾靜)역모사건’이라는 선구적인 논문을 써서 1백만이 채 안되는 인구로 그 1백배가 넘는 한족을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훌륭하게 통치했던 만주족 황제들의 비법을 탐구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스펜스 교수의 책은 미야자키와 민교수의 업적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미야자키처럼 그도 옹정제의 군주로서의 성실함에 주목했다. 옹정은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한 군주였다. 또 스펜스는 민교수와 같이 ‘증정’, 중국어 표현으로는 ‘쩡징’이 벌인 역모사건을 통해 옹정이라는 만주인 군주의 열정과 독특한 통치방식에 주목했다.
한족인 쩡징은 그 무리들과 함께 옹정을 격렬히 비난하며 모반을 꾀하다 발각된다. 보통의 군주라면 처리방식은 간단하다. 삼족을 멸하는 것. 그러나 옹정은 달랐다. 어설픈 관련자들까지 엄히 처벌하면서 정작 주모자인 쩡징은 살려줬다. 한술 더 떠 옹정은 쩡징과 묻고 답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황제와 실패한 반역자와의 대화는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옹정은 이 책을 전국에 널리 배포했다. 몽골족이 군사력만으로 한족을 눌렀던 데 비해 옹정은 문화적 소양으로도, 백성에 대한 성실함으로도 우리 만주족은 역대 어느 한족 황제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을 만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예상을 종종 뛰어넘는 법. 백성들은 옹정의 뜻과 달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옹정의 해명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대의각미록’에 나온 쩡징의 유언비어만 기억해 버렸다. 그래서 대의각미록은 아들 건륭제 때 금서가 되고, 쩡징은 뒤늦게 처형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준갑 옮김. 1만6천원.
〈김용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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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책(Treason by the book) - 옹정제와 사상통제
By Jonathon D. Spence. Viking Penguin, New York, N.Y.: 2001.
조너선 스펜스/ 이준갑 옮김/ 이산/ 2004
유명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편찬 배경과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촨산(川陝) 총독 웨이중치(岳鐘琪)의 길 앞에 불쑥 나타난 장시(張熙). 이야기는 그가 스승(호남성 浦潭 마을의 무명 서생 쩡징(曾靜))의 편지를 총독에게 전달하면서 시작된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지금 오랑캐(만주족)가 중화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당신은 송나라의 민족영웅 악비 장군(여진족으로부터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중국의 영웅)의 후예가 아니냐, 당신 같은 사람이 나서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의 중화국가를 다시금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 한마디로 반란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이었다.
총독은 반역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전후 사정을 낱낱이 황제(옹정제)에게 고했다. 조정 신하들은 흥분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반란을 꿈꾼단 말인가! 미친 놈 아닌가? 일벌백계를 외쳤다. 그러나 황제는 침착했다. 겉으로 말짱해도 속이 변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시, 청 조정이 풀어야 할 당면과제는 한족 지식인들의 반청(反淸)사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 인가? 지식인들이 겉으로는 만주족의 지배에 순응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오랑캐 주제에 까불고 있어...”
이 같은 화이론(華夷論)이 사라지지 않는 한, 청의 중국 지배는 늘 불안했다. 만주족은 총인구의 3%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약간의 허점만 있어도 그냥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수민족으로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민족(감정)을 넘어서는 합리성과 정교함이 있어야 했다.
옹정제의 통치술은 여기서 그 진수가 드러난다. 그는 환부를 감추지 않았다. 불편하더라도 아예 드러내서 치료를 확실하게 하는 길을 택했다. 청조에 불편하다고 막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이다. 불온사상(반청사상)은 막으면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심각해지는 법.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막으니까 ‘뭔가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하나의 실체처럼 여겨지는 것 아닌가! 따라서 완전히 까놓고 따져보자는 게 황제의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막연한 억측에서 벗어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될 때, 청조 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옹정제는 쩡징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수차례 편지 왕래를 통하여 시시비비를 따졌다. 쩡징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근거 위에 있음을 인정했다. 결말이 난 다음, 황제는 그간의 모든 사실을 책으로 묶어서 전국에 배포하도록 명했다. 이제부터는 쓸데없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즉, 근거없는 화이론 따위는 집어치우고 청조의 올바른 통치행위에 순응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 사태는 진정되고 모든 게 일단락된 듯 보였다. ...
옹정제가 죽고 건륭제가 등장했다. 그 동안 청조는 전성기를 누렸고, 그 지배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건륭제는 생각했다. <대의각미록>을 계속 보급할 필요가 있나? 더 이상 청조의 중국지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 책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한다는 게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비록 논박되고는 있지만, 이 책에 실려 있는 부당한 내용(예전에 청조를 비난했던 잘못된 주장들)들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또 이런 사실 자체를 모르던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불편했다.
황제는 책을 회수했다. 그리고 쩡징과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이로써 모두에게 그 책이 완전히 잊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망각을 막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있는 상황인데, 조정에서 굳이 수선을 떨며(?) 책을 회수하고, 관련자를 처형하자,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조정이 이 정도로 수선을 떨 정도라면 뭔가 있는 게 아닐까? 건륭제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역사는(사람의 일은)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놓아둘 필요가 있다. 괜히 이런저런 계산으로 손을 댔다가, 오히려 복잡하게 꼬여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질 수 있다. 때문에 적당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옹정제는 그런 점에서 뛰어난 군주였다. 무엇이든 리듬이 있게 마련인데, 옹정제는 격할 땐 격한 리듬을, 느긋할 땐 느긋한 리듬을 연주할 줄 알았다. 사람이 망신당하는 것은 대개 박자를 못 맞추기 때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