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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영염(永琰)이었으나, 후에 옹염(顒 琰)으로 고쳤다. 묘호(廟號)는 인종(仁宗).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이다.
건륭제 생존 중인 1796년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였으나,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1799년 태상황제의 사망으로 친정(親政)을 폈다. 친정 즉시 권세를 부리던 건륭제의 총신(寵臣) 화신(和珅 )을 자살하게 하고, 후베이[湖北] ·쓰촨[四川] ·산시[陝西]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백련교(白蓮敎)의 난에 직접 대처하였다.
가경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의 시대였다. |
가경제 [嘉慶帝, Chiach'ing]
1760. 11. 13 중국 베이징~1820. 9. 2
후베이 성[湖北省]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
중국 청조(淸朝) 7대 황제(1796~1820 재위).
이름은 옹염(雍琰). 시호는 예제(睿帝). 묘호는 인종(仁宗). 쇠퇴하고 있던 청제국을 부분적이나마 되살리려 노력했다.
1796년에 아버지 건륭제(乾隆帝:1735~96 재위)가 퇴위하자 즉위하여 가경이라는 연호를 썼다. 그러나 1799년까지는 아버지와 부패한 관리 화신(和)이 권력을 계속 장악했고, 가경제 자신은 의식행사(儀式行事)를 이끄는 정도의 일만을 했다.
그동안 중국 중부와 서부에서 백련교도의 난(1796~1804)이 일어났으며, 화신과 그 측근들이 군비를 횡령하려 한 탓에 반란진압이 늦어졌다.
1799년 건륭제가 죽자, 가경제는 즉각 화신을 잡아들여 자살하도록 했으며, 난을 진압하기 위해 능력있는 장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힘이 고갈된 청군(淸軍)이 난을 수습하는 데는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또 남해안에는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하여 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으나, 10여 년(1800~10)이 지난 뒤에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건륭제가 죽고 화신이 체포된 뒤에, 가경제는 황실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통치자가 못되어서, 만연한 관리들의 부패를 없애기보다는 궁중의 경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이런 조치는 황족들을 언짢게 했다. 이 정책은 국가재정을 복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조정이 갈수록 무력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부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높은 관직을 팔았던 것 때문에, 실제로 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여전히 과중한 상태였다.
1803년 폭도들이 길에서 가경제를 습격했으며, 1813년에는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궁전을 급습하려 했다. 그는 청조의 가장 인기없는 황제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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