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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제 (嘉慶制)

영국신사77 2007. 1. 21. 15:31
                       가경제 [, 1760~1820]
   중국 청()나라 제7대 황제(재위 1796~1820). 즉위후에도 태상황제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태상황제의 사망 후에야 친정을 폈다. 백련교의 난을 평정하였으나, 천리교의 난, 회족() ·먀오족[] 등의 반란으로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름은 영염()이었으나, 후에 옹염(顒  )으로 고쳤다. 묘호()는 인종(). 건륭제()의 열다섯째 아들이다.

 

  건륭제 생존 중인 1796년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으나, 태상황제()가 된 건륭제가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1799년 태상황제의 사망으로 친정()을 폈다. 친정 즉시 권세를 부리던 건륭제의 총신() 화신(珅  )을 자살하게 하고, 후베이[] ·쓰촨[] ·산시[西] 지방을 소란하게 하던 백련교()의 난에 직접 대처하였다.

  1802년경 난이 평정되었으나, 광둥[] ·푸젠[] ·저장[] 등 남동해안에서 채견()을 중심으로 한 난이 일어났고, 1813년
천리교()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중 1부대가 북경의 궁성에 난입하였다. 또 회족() ·먀오족[] 등의 반란이 일어났고, 한편 외국세력도 아편을 들여오는 등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경제의 치세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전환의 시대였다.

 

 

 

 

                    가경제 [嘉慶帝, Chiach'ing]

 
  (병)Jiaqing (웨)Chiach'ing.

  1760. 11. 13 중국 베이징~1820. 9. 2

                         후베이 성[湖北省]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

  중국 청조(淸朝) 7대 황제(1796~1820 재위).

  이름은 옹염(雍琰). 시호는 예제(睿帝). 묘호는 인종(仁宗). 쇠퇴하고 있던 청제국을 부분적이나마 되살리려 노력했다.

 

  1796년에 아버지 건륭제(乾隆帝:1735~96 재위)가 퇴위하자 즉위하여 가경이라는 연호를 썼다. 그러나 1799년까지는 아버지와 부패한 관리 화신(和)이 권력을 계속 장악했고, 가경제 자신은 의식행사(儀式行事)를 이끄는 정도의 일만을 했다.

 

  그동안 중국 중부와 서부에서 백련교도의 난(1796~1804)이 일어났으며, 화신과 그 측근들이 군비를 횡령하려 한 탓에 반란진압이 늦어졌다.

 

  1799년 건륭제가 죽자, 가경제는 즉각 화신을 잡아들여 자살하도록 했으며, 난을 진압하기 위해 능력있는 장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힘이 고갈된 청군(淸軍)이 난을 수습하는 데는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또 남해안에는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하여 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으나, 10여 년(1800~10)이 지난 뒤에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건륭제가 죽고 화신이 체포된 뒤에, 가경제는 황실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통치자가 못되어서, 만연한 관리들의 부패를 없애기보다는 궁중의 경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이런 조치는 황족들을 언짢게 했다. 이 정책은 국가재정을 복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조정이 갈수록 무력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부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높은 관직을 팔았던 것 때문에, 실제로 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여전히 과중한 상태였다.

 

  1803년 폭도들이 길에서 가경제를 습격했으며, 1813년에는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궁전을 급습하려 했다. 그는 청조의 가장 인기없는 황제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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