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옹정제 [雍正帝](2)...감춰진 名君 옹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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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雍正帝, 1678.12.13~1735.10.8] |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13년간)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胤禛). 묘호 세종(世宗). 시호 헌제(憲帝).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硃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칭하이[淸海] ·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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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雍正帝, Yongcheng]
1678. 12. 13 베이징[北京]~1735. 10. 8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5대 황제(1722~35 재위, 13년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윤진(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었던 옹정제는 제위를 계승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황태자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자 제위를 계승할 기회를 노려 다른 형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다룬 일부 연대기에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나와 있다.
어쨌든 아버지인 강희제가 죽자, 베이징에 있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여, 자기 형제들 중 일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가 만든 첩자조직은 아주 치밀해서, 관리들의 모든 행동이 그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강희제 말년부터 자신의 재위 초년까지의 황실 기록조차 변조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적들에게 유리한 기록이 있으면 모두 없애도록 했다.
황제 권력의 강화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조치는, 친왕(親王:皇族)들이 청조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8기 가운데 3기는 황제 직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친왕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를 때처럼 친왕들이 이와 같은 군사력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야심을 채울까 우려하여, 모든 친왕들을 궁정내 특별학교에 다니게 하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시켰다. 그결과 팔기군은 청조 내내 황실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
1729년 옹정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최고 행정기구였던 내각(內閣)을 없애고, 이전의 비공식 기구였던 군기처(軍機處)를 두었다. 5, 6명의 군기처 대신들이 황제와 함께 일했으며, 황제는 매일 이들을 만나 정사를 논했다. 그들의 일은 신속하고도 비밀리에 처리되었으므로, 황제는 모든 중요한 정사(政事)에 대해 친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렸다.
정사(正史)의 기록으로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일생 동안 적을 많이 만들었으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 처형된 어떤 사람의 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관료의 부정을 감찰할 관료기구를 만들어 후세에 남겨주었으며, 제국의 법률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또한 재정을 재정비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세속적인 업적 외에도 종교연구를 꾸준히 해서 선(禪)불교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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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명군 옹정제
madante ( 2004-05-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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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의 이력
헌데 강희제의 치적과 뒤를 이은 옹정제의 선정에 힘입어 건륭제에 이르러 중국인구는 3억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강희제가 잡아놓은 기반을 옹정제가 얼마나 확고히 다져놨는지 알 수 있죠.
또한 건륭제의 방만한 통치로 인해 부패와 몰락이 이미 시작됐음에도, 20세기초까지 청나라가 버틸 수 있던 것도 옹정제가 닦아놓은 튼튼한 제도적 기반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형제들간에 태자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발생하는데 8째 윤이와 14째 윤제가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국 4째 윤진이 제위를 잇게 되죠. 이런 반전때문에 제위계승을 둘러싼 여러가지 풍문이 생겨났습니다.
임종전 강희제는 대신 융과다에게 후계자를 지명해줬는데, 이 때 그의 손바닥에 4자를 써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은 14를 써서 당시 대장군으로 출병해 공을 세우고 있던 14째 황자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옹정제와 결탁한 융과다가 유지를 왜곡시켰다는 소문이 그 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옹정제가 강희제를 죽이고 후계자를 자신으로 고쳤다는 야사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고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옹정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근면한 황제였습니다. 고생을 자초하기위해 존속살해의 죄를 저질렀다는 추측은 납득하기 힙듭니다.
옹정제는 기존의 보고와 달리 형식을 생략하는 대신 지방관이 펼친 실제 정치의 내용이나 지방의 상세한 사정을 지방관이 주접을 올려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황제 자신이 직접 비답을 내려 평가와 질책, 조언과 독려를 했으며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보고의 내용과 실제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료조직은 기존왕조에 비해 훨씬 청렴해지고 효과적인 통치가 실시됩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맡던 일까지 챙기게 된 황제의 업무는 크게 늘어, 주간에도 각종 정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던 옹정제는 밤늦은 시간마저 각지의 지방관들이 보내온 주접의 내용을 검토하고 일일히 주비유지를 다는데 할애해야 했으며 밤을 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실제 옹정제를 폄하하려는 사대부들의 노력은 대단해서 거의 모든 황실문서에서 꼬투리를 찾았으며 그들이 장기로 삼는 글을 이용한 모략은 기발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관료들이 책임을 다하게 하고 부패를 줄이려면 너무 비현실적인 녹봉을 올려줘야 한다는 것을 옹정제도 깨닫고 양렴은제도를 만드는 등 봉급인상을 실시하지만, 막대한 특권을 누려왔던 관료들과 사대부 및 지주계층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옹정제에 대한 평가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강희제나 건륭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험한 야심가나 냉혈한 권력찬탈자에 불과한 오랑캐 황제로 그려진 야사따위에 의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어 후세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그나마 근대에 들어 주비유지등의 고문서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진전되고, 발전을 서두르는 개방된 중국에서 청나라의 기반을 다진 세 황제의 업적을 참고하려는 붐이 일면서, 옹정제의 실제 업적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런 상황이 어느정도 개선되고 있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
라는 자신의 각오대로, 권력은 나라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코피를 쏟고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정무를 봤습니다. 반면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한 노력과 지출에는 너무나 인색했습니다.
옹정제야말로 모든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하지만, 가장 지켜지지 않는 기본적인 지도자의 덕목 즉, 리더쉽을 보여준 황제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60여년간 집권한데 반해 13년밖에 황제자리에 있지 못한 옹정제를 보면, 지위의 높음에 비례하는 책임성에도 불구하고, 편안함과 장수를 누리는 것은 지도자에게 부끄러운 사치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기타 관련사건들이나 평가.
옹정제의 능묘 참배 때 수행한 거물 환관이 소란을 피우자 이를 잡아 태형으로 다스린 현령이 태수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또 건륭제는 궁중에서 조정 관리와 조우하면, 환관이 먼저 길을 양보하도록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이러한 환관 규제정책으로, 청나라 때는 환관을 둘러싼 각종 부정과 권력 남용이 거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옹정제 자신은 자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하고 쭉 편애했던 홍력에게 황위를 이어주는 실수를 범해, 자신이 낸 아이디어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
목표인 사냥물에만 집중한 넷째 왕자, 옹정제
강희제가 왕자들과 사냥을 하고 돌아 와서, 네 명의 왕자들에게 차례로 금번 사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물어보았다. 첫째 왕자는 “저는 초원, 밀림, 푸른 하늘, 흰 구름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왕자는 “저는 여러 형제들과 군마들을 보았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셋째 왕자는 “저는 형제들의 날렵한 사냥 솜씨와 씩씩하고 늠름한 자태를 보았습니다. 장차 대청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넷째 왕자는 “저는 오로지 제가 목표로 하는 사냥물만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강희제는 한껏 소리 내어 웃으면서 “하하하! 아주 좋아. 너는 일에 전념할 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구나!”라고 넷째 왕자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넷째 왕자가 바로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였다.
나의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성취를 위한 아름다운 덕목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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