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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옹정제 [雍正帝](2)...감춰진 名君 옹정제

영국신사77 2007. 1. 20. 23:58
  청 옹정제 [雍正帝](2)...감춰진 名君 옹정제
 
 
                       옹정제 [, 1678.12.13~1735.10.8]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13년간)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禛). 묘호 세종(). 시호 헌제().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 ·윤당(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 ·융과다()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이라는 친전장()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로 주비(硃: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 ·구이저우[] ·광시[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칭하이[] ·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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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정제 [雍正帝, Yongcheng]

 
 
 (병)Yongzheng (웨)Yungcheng.

 1678. 12. 13 베이징[北京]~1735. 10. 8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5대 황제(1722~35 재위, 13년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윤진(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었던 옹정제는 제위를 계승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황태자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자 제위를 계승할 기회를 노려 다른 형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다룬 일부 연대기에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나와 있다.

  어쨌든 아버지인 강희제가 죽자, 베이징에 있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여, 자기 형제들 중 일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가 만든 첩자조직은 아주 치밀해서, 관리들의 모든 행동이 그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강희제 말년부터 자신의 재위 초년까지의 황실 기록조차 변조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적들에게 유리한 기록이 있으면 모두 없애도록 했다.

  황제 권력의 강화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조치는, 친왕(親王:皇族)들이 청조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8기 가운데 3기는 황제 직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친왕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를 때처럼 친왕들이 이와 같은 군사력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야심을 채울까 우려하여, 모든 친왕들을 궁정내 특별학교에 다니게 하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시켰다. 그결과 팔기군은 청조 내내 황실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

 1729년 옹정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최고 행정기구였던 내각(內閣)을 없애고, 이전의 비공식 기구였던 군기처(軍機處)를 두었다. 5, 6명의 군기처 대신들이 황제와 함께 일했으며, 황제는 매일 이들을 만나 정사를 논했다. 그들의 일은 신속하고도 비밀리에 처리되었으므로, 황제는 모든 중요한 정사(政事)에 대해 친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렸다.

  정사(正史)의 기록으로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일생 동안 적을 많이 만들었으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 처형된 어떤 사람의 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관료의 부정을 감찰할 관료기구를 만들어 후세에 남겨주었으며, 제국의 법률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또한 재정을 재정비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세속적인 업적 외에도 종교연구를 꾸준히 해서 선(禪)불교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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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춰진 명군 옹정제

 

 

                                                                                                     madante ( 2004-05-16 )

옹정제의 이력

본명 : 애신각라 윤진
별칭 : 묘호 세종, 시호 헌제
황후 : 효경헌황후

1678년 강희제의 4째아들로 출생.
1708년 둘째형인 황태자 폐위됨.
1709년 둘째형 황태자에 다시 복위됨.
1712년 둘째형 다시 폐위됨.
1718년 14째 동복동생이 대장군에 임명되어 서역원정.
1722년 강희제 11월 사망, 옹정제 즉위.
1723년 14째를 소환 강희제의 릉을 지키게 함, 황제의 훈유를 지방관에게 하달.
1724년 전문경을 허난성 순무로 임명, 폐태자사망, 연갱요가 청해반란 진압.
1725년 연갱요를 좌천시킨 후 자살토록 함, 오르타이,이위등을 총독, 순무에 임명.
1726년 8째,9째동생 사망, 묘족에 대한 개토귀류 단행.
1727년 융과다가 탄핵되어 감금됨.
1729년 푸르단을 대장군에 임명 준가르부 정벌시작.
1730년 13째동생 이친왕 사망.
1731년 푸르단이 대패, 책릉친왕이 준가르부 격파.
1732년 전문경사직.
1735년 옹정제 사망, 건륭제 즉위.



                            ◈옹정제의 업적및 개인사.

  옹정제는 강희제와 건륭제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명군입니다. 그의 업적은 수치로도 명확히 입증됩니다. 후한말 중국의 인구가 5천만명 정도였고, 당 현종때도 5천만명에 못 미쳤으며, 강희제가 제위에 오를 때 중국인구가 6천만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헌데 강희제의 치적과 뒤를 이은 옹정제의 선정에 힘입어 건륭제에 이르러 중국인구는 3억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강희제가 잡아놓은 기반을 옹정제가 얼마나 확고히 다져놨는지 알 수 있죠.

 

  또한 건륭제의 방만한 통치로 인해 부패와 몰락이 이미 시작됐음에도, 20세기초까지 청나라가 버틸 수 있던 것도 옹정제가 닦아놓은 튼튼한 제도적 기반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는 업적면에서는 덜 알려진 반면, 황위계승을 둘러싼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 대한 야사로써 유명합니다. 강희제는 정실부인이 남긴 유일한 자식인 둘째 윤내를 일찌감치 황태자에 봉하지만, 그는 황태자로 성장하면서 자연히 부패에 휘말려 그들 붕당의 우두머리화 되어 부적격자임을 드러냅니다. 윤내를 편애한 강희제는 다시 기회를 주지만, 결국 재차 폐태자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그는 감금되고 맙니다.

 

  이 기회를 틈타 형제들간에 태자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발생하는데 8째 윤이와 14째 윤제가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국 4째 윤진이 제위를 잇게 되죠. 이런 반전때문에 제위계승을 둘러싼 여러가지 풍문이 생겨났습니다.

 

  임종전 강희제는 대신 융과다에게 후계자를 지명해줬는데, 이 때 그의 손바닥에 4자를 써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은 14를 써서 당시 대장군으로 출병해 공을 세우고 있던 14째 황자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옹정제와 결탁한 융과다가 유지를 왜곡시켰다는 소문이 그 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옹정제가 강희제를 죽이고 후계자를 자신으로 고쳤다는 야사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고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옹정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근면한 황제였습니다. 고생을 자초하기위해 존속살해의 죄를 저질렀다는 추측은 납득하기 힙듭니다.

  장년에 이르러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송대 이후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한 관료들이 특권층을 형성하여 어떻게 국정을 농단하고 부패를 일삼고 있는지, 조용하고 냉철한 관찰자로 보내야 했던 황자시절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은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과거로 선출되는 관료들이었습니다. 추천과 인맥을 통해 채용되던 방식의 폐단을 없애고, 공평하게 능력있는 인재들을 등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거시험이었지만, 실제로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완전한 주관식 시험이었던 과거의 채점방식은 객관성이 부족했고 따라서 채점을 맡은 조정 대관의 재량에 크게 좌우됐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합격자와 그를 선발한 조정대관 사이에 특수한 인간관계가 형성됐고 이는 자연히 붕당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관계는 당연히 부패의 사슬로 작용해 백성들을 갈취하거나 뇌물을 받아 이득을 나누어 가지는 조직으로 활용됐고, 실책을 덮어주고 뒤를 봐주는 배경으로 작용했으며, 출세의 루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관료의 출신계층인 사대부나 지주들과 관료들이 결탁하는 매개체제이기도 해서 조세부담이 평민과 하류층에 집중되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옹정제는 다양한 노력을 했는데, 그 한 예가 주비유지입니다. 옹정제는 붕당으로 연결된 관료체계를 통해 정리되고 간추려져 올라오는 지방관들의 보고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방관은 자신의 실정을 감추고 공적만 보고하려 했고,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인맥으로 그들과 연결된 정부고관들이 당연히 감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옹정제는 중국대륙의 수많은 지방관들과 문서로써 직접 대화하려 했고, 이런 노력의 산물이 주비유지입니다.

 

  옹정제는 기존의 보고와 달리 형식을 생략하는 대신 지방관이 펼친 실제 정치의 내용이나 지방의 상세한 사정을 지방관이 주접을 올려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황제 자신이 직접 비답을 내려 평가와 질책, 조언과 독려를 했으며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보고의 내용과 실제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료조직은 기존왕조에 비해 훨씬 청렴해지고 효과적인 통치가 실시됩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맡던 일까지 챙기게 된 황제의 업무는 크게 늘어, 주간에도 각종 정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던 옹정제는 밤늦은 시간마저 각지의 지방관들이 보내온 주접의 내용을 검토하고 일일히 주비유지를 다는데 할애해야 했으며 밤을 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며 정치를 하는 황제의 모습을 알 수 없었던 백성들에게 옹정제는 상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원칙주의자에 근면하기까지한 깐깐하고 고지식한 황제덕분에 비리로 한몫 챙길 여지는 줄어든 반면, 할일은 더 많아져 여러모로 고달프게 된 관료들과, 지정은제(地丁銀制)를 비롯해 평민이하의 계층에 집중된 조세부담을 상류층에 분담시키려고 노력한 옹정제의 정책을 달가와 하지 않은 사대부나 지주계층은 당연히 황제에게 불만을 품게 됐고, 옹정제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고 반청복명사상까지 이용해 정부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실제 옹정제를 폄하하려는 사대부들의 노력은 대단해서 거의 모든 황실문서에서 꼬투리를 찾았으며 그들이 장기로 삼는 글을 이용한 모략은 기발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관료들이 책임을 다하게 하고 부패를 줄이려면 너무 비현실적인 녹봉을 올려줘야 한다는 것을 옹정제도 깨닫고 양렴은제도를 만드는 등 봉급인상을 실시하지만, 막대한 특권을 누려왔던 관료들과 사대부 및 지주계층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옹정제에 대한 평가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강희제나 건륭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음험한 야심가나 냉혈한 권력찬탈자에 불과한 오랑캐 황제로 그려진 야사따위에 의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어 후세까지 전해지게 됩니다. 그나마 근대에 들어 주비유지등의 고문서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진전되고, 발전을 서두르는 개방된 중국에서 청나라의 기반을 다진 세 황제의 업적을 참고하려는 붐이 일면서, 옹정제의 실제 업적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런 상황이 어느정도 개선되고 있습니다.


                               ◈옹정제에게서 배울점.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탐욕과 향락을 위해 권력을 이용했으며, 이는 또한 권력을 탐하는 많은 이들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옹정제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

 

  라는 자신의 각오대로, 권력은 나라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코피를 쏟고 수명을 단축시켜가며 정무를 봤습니다. 반면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한 노력과 지출에는 너무나 인색했습니다.

 

  옹정제야말로 모든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하지만, 가장 지켜지지 않는 기본적인 지도자의 덕목 즉, 리더쉽을 보여준 황제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60여년간 집권한데 반해 13년밖에 황제자리에 있지 못한 옹정제를 보면, 지위의 높음에 비례하는 책임성에도 불구하고, 편안함과 장수를 누리는 것은 지도자에게 부끄러운 사치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옹정제의 비판점.

  건륭제는 명군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청나라의 멸망을 가져올 거의 모든 실책들을 져지르게 됩니다. 쓸데없는 전쟁을 잃으키고 순행을 일삼는등 방만한 국정운영으로 옹정제가 남겨준 막대한 국고를 탕진했고, 관료들의 부패가 다시 만연하게 했으며, 섯부른 통상정책으로 아편전쟁의 불씨를 남깁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보다는 덜하지만, 후계자 선택에서의 잘못이 얼마나 큰 실패로 이어지는가의 일례로 볼 수 있습니다.


                                       기타 관련사건들이나 평가.

                                                 ⊙환관과 옹정제.


  중국역사상 환관들은 그 폐해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의 환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고, 나이가 들면 궁에서 쫓겨나 가난과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환관들은 황제를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서 악명을 떨쳤습니다. 명나라가 '감(監:태감-환관)으로 각(閣:내각, 조정)을 제어'한 것과는 반대로, 청나라는 '외(外:관리)로 내(內:환관)를 다스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옹정제의 능묘 참배 때 수행한 거물 환관이 소란을 피우자 이를 잡아 태형으로 다스린 현령이 태수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또 건륭제는 궁중에서 조정 관리와 조우하면, 환관이 먼저 길을 양보하도록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이러한 환관 규제정책으로, 청나라 때는 환관을 둘러싼 각종 부정과 권력 남용이 거의 없게 됩니다.

                                       
⊙옹정제의 잔머리.


  건청궁의 어좌 위에는 '정대광명'이라는 큰 글씨를 쓴 편액이 결려 있습니다. 황실의 제위를 둘러싼 갈등을 몸소 경험한 옹정제는,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태자밀건법이라 하여 황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어 이 편액 뒤에 넣어 두고, 자신의 사후에 열어 보게 하는 전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존에 적어놓은 후계자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수시로 후계자를 바꿀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이후 황자들은 경쟁을 통해 훌륭한 황제감으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옹정제 자신은 자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하고 쭉 편애했던 홍력에게 황위를 이어주는 실수를 범해, 자신이 낸 아이디어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목표인 사냥물에만 집중한 넷째 왕자, 옹정제

 
                                                          출처 블로그 > 직장인/자영업자 신용대출 성공학
                                                          원본 http://blog.naver.com/016_6655891/90010650931
 
 
 
  일에 대한 집중도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청나라 옹정제(雍正帝)의 일화가 유명하다. 옹정제는 강희제(康熙帝), 옹정제, 건륭제(乾隆帝)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강희제가 왕자들과 사냥을 하고 돌아 와서, 네 명의 왕자들에게 차례로 금번 사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물어보았다. 첫째 왕자는 “저는 초원, 밀림, 푸른 하늘, 흰 구름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왕자는 “저는 여러 형제들과 군마들을 보았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셋째 왕자는 “저는 형제들의 날렵한 사냥 솜씨와  씩씩하고 늠름한 자태를 보았습니다. 장차 대청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넷째 왕자는 “저는 오로지 제가 목표로 하는 사냥물만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강희제는 한껏 소리 내어 웃으면서 “하하하! 아주 좋아. 너는 일에 전념할 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구나!”라고 넷째 왕자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넷째 왕자가 바로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였다.

 

  나의 일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성취를 위한 아름다운 덕목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