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거듭난 대왕의 조서(詔書)
[느브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 지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權柄)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3:1-3).
가.이방 왕이 기록한 성경
다니엘서 4장은 성경 전체에서 특이한 장(章)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선지자나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방인 그것도 대제국의 이교도 왕에 의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4장은 느브갓네살 대왕의 자서전적인 기록이다. 그는 자신이 회심(回心)한 경험을 조서 형식으로 만방에 알림으로써, 구원받은
사람이면 자연적으로 하게 마련인 신앙고백을 대신하고 있다(롬 10:9, 1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시 66:16, 17).
처음 부분(4:2-18)은 "나"라는 일인칭으로 계속되다가, 다시 "왕"이라는 삼인칭으로
돌아갔다가(4:19-27), 마지막 부분(4:28-37)에서 다시 일인칭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를 볼 때, 이 조서는 다니엘이 왕의 명령으로 이 조서를 썼거나, 왕의 공식 조서를 다니엘이
인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본문을 정리한것으로 볼 수 있다.
[4장은 정식 조서로, 기록에 있어서 가장 오랜 것 가운데 하나이며, 의심할 바 없이 바벨론
국가 문서로부터 베낀 것이다. 다니엘은 그 조서를 본래의 말(아람어)로 보존한 것이다.] Smith, 79.
무서운 귀신 들렸던 거라사의 광인(狂人)이 예수님에 의해 온전하게 된 후에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고하라 하신대로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음 같이(막 5:19,20), 느브갓네살도 일종의 정신병에서 회복된 후 같은 일을 한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권세와 영광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이다.
나. 최대의 기적 - 느브갓네살의 회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하에
거하는 나라들과 백성들과 각 방언하는 자"(4:1) 모두에게 제한이 없다.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에, 하나님을 꿈에라도 불러 본
적이 없는 이교도 제왕(帝王)인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그토록 기이한 방법으로 구원받아 거듭난 경험(重生)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찬송으로 벅차게 했다. 느브갓네살은
그것을 "크도다 그 이적(Sign)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Wonders)여!"라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두 낱말 모두 하나님의 이적을
가리키는데 쓰이고 있다(출 7:3, 신4:34, 13:1, 34:11, 사 8:8, 렘 32:20). Leon Wood, A Commentary
on Daniel.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3), 102.하나님께서
베푸실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병들고 불구된 육신을 고치는 이적이 아니라, 죄로 망쳐진 인간의 훼손된 영혼에 일어나는
신생(新生)의 경험 곧 성품의 변화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새로운 마음, 곧 고상한 생애, 더욱
거룩한 열심을 가진 인간의 창조에 드러난다.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겔 36:26). 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행해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적이 아닌가] (9T, 152).
이 놀라운 구속(救贖)의 계획을 깨닫는 모든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같은 간증을 할
수 밖에 없다.
기이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방인도 함께 구원하시는 섭리를 깨달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르
짖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2. 큰 나무 느브갓네살의 꿈
가.두려움과 번민으로 떠는 거목(巨木)
[나 느브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 하였으니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노라] (4:4,
5).
1.[편히 있으며 평강할 때]
느브갓네살은 위대한 정복자(conqueror)요, 전제 군주(autocrat)요,
건축자(builder)였다.
43년 간의 재위 기간(605-562 BC)의 대부분을 이국의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본국에 돌아와서는 건축현장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마침내 "내 집에
편히 있으며"(at rest in mine house), "편히 있으며"란 말은 "근심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Sheleh)에서 온 말이다.
"내 궁에서 평강할 때"(flourishing in my place)의
"평강할 때"란 말은 "한창인 푸르름"을 뜻하는 말로, 시 52:8의 번창하는 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ra'enan이다. Wood, 103.
맞이한 것이다. 그는 왕이 되던 해 숙적 앗시리아를 영원히 끝장냈으며 그의 재위
19년에 말썽 많던 유다에 종지부를 찍었고 아라비아도 정복했으며
상업 왕국이며 바다의 왕자인 두로를 13년 간의 포위 끝에 기원전 573년 기어이 함락시키고 말았다(겔
29:18-22).. 두로가 570 BC 까지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았음을 보여 주는 상업문서가 발견되었다.
아마시스(Amasis)가 다스리던 이집트도 정복했음이
느브갓네살 재위 37년 즉 기원전 568년으로 연대가 적힌 점토문서에서 발견되어 이제 그는 참으로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는 평화롭고 안전한 만년(晩年)을 맞게 되었다.. Thiele, 43.
게다가 그는 대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만들어 놓았다. 현대의 발굴을 통하여 밝혀진 바에 의하면(지도 참조),
바벨론의 내성가(內城街; Inner City)는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 싸였는데, 안쪽 성은 그 두께가 13
피트(3.6 미터)였고 바깥 성은 22 피트(6.7미터)였다. 그리고 성 외곽으로는 해자(垓字)를 파서 또 하나의 방어가 되게 했다.
유프라데스강 동쪽 편에는 이 내성가를 두른 또 하나의 외성각(Eastern New Quarter)을 쌓았는데, 그것은 이중 성벽으로 안쪽 성은
24 피트(7.3 미터), 바깥 성은 7.9 미터나 되었다.. Horn, 40.
이렇게 견고한 네 다섯 겹의 성벽으로 둘러 싸인 궁전에서 세계 최강의 무적(無敵)의 대군으로 보호받는 그에게 무슨 두려움이나 불안이 있겠는가(바벨론성 지도
참조).
게다가 고대 세계의 칠대 경이(The Seven Wonders of the World) 가운데
하나인 가공원(架公園)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 955개의 성소(聖所), 384개의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와 그의 나라의 태평을 빌었다. 바벨론은 명실공히 "무역과 산업과 상업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Werner Keller, The Bible as a History, 297.
이제야 말로 그는 아무 아쉬울 것 없이 "내 궁에서 평강할 때"였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밭의 소출이 풍성했던 어리석은 부자처럼(눅 12:16-21), 느브갓네살은 모든 것을
자신의 계획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에 빠졌다.
2.한 꿈을 꾸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런데 그러한 그가 지금 무서워하고 급기야는 번민하게 된 것이다(3:5).
무엇이 그를 무섭게 했는가. 그가 꾼 꿈이었다.. "I saw a dream which made me
afraid, and the thoughts upon my bed and the visions of my head troubled me,"
(KJV).
그를 무섭게 한 것은 전쟁도, 재난도, 물도, 불도 아니었다. 이런 것은 막을 수가 있고 피할
수도 있지만, 어느 누가 꿈을 막을 성벽을 쌓을 수 있는가. 오늘 날의 발달된 과학을 가지고도 인간은 아직 꿈을 막아내는 방편을 찾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가장 안전하다고 여길 때, 꿈을 통하여 쉽사리 이 안전을 무너뜨리실 수가 있으시며, 다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어떠한 인간이라도 꿈을 통하여 신속히 그에게
접근하실 수가 있으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지키시기 위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경고하심으로써 신속히 위기를 타개하셨으며(창
20:1-7), 바로에게 꿈을 주심으로써 옥중의 요셉이 구출되어 총리의 자리에 앉게 하셨다(창 41장).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막강한 미디안
군대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꿈에 의해 혼비백산(魂飛魄散)했으며(신 7:13-15),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는 그의 아내가 꾼 꿈으로 경고를
받았다.
나. 느브갓네살의 나무 꿈
꿈을 꾸고 두려워하며 번민하던 왕은 자신이 꾼 꿈이지만 스스로 해답을 찾아낼 수 없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번민만 깊어 가자, 늘 하던대로
또 다시 바벨론의 지성들(知性; wise men) 곧 박수(magicians)와
술객(astrologers) 과 갈대아 술사(the Chaldeans)와 점장이(soothsayers)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문제의 해석과 해결을
의뢰했다(4:6, 7).
1.무능한 인간의 지성과 종교
전번의 2장의 사건과는 달리, 꿈의 상세한 내용까지 진술했어도 바벨론의 석학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이번에도 또
다시 그들의 무능과 무지와 무기력을 드러냈다. 꿈의 내용은 누가 들어 보아도 불길한 것이므로 이 때문에 왕도 번민하고 있었다.
그들도 어렴풋이는 짐작했을지라도 감히 그들의 견해를 발설하기를 꺼렸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저들은 알게 하지 아니하였다"(they did not make known) 함과 동시에 "저들은 알게 하지 못하였다"(they could
not make known).. SDABC. vol. 4, 788, 789.
또 다시 바벨론의 학문과 종교의 한계점이 드러났으며,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4:8) 다니엘이 불리워 왔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와 종교와 학문이
무가치하고 무능함을 깨달은 후에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돌아서는 것이다.
2.거대한 나무 느브갓네살
거대한 나무와도 같은 대군주(大君主) 느브갓네살은 두려움과 초조가 역력한 표정으로 다니엘에게
자신의 꿈을 진술했다(4:10-18). 무성하고 커다란 어떤 나무 이야기였다.
성경에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감람나무, 겨자나무, 가시나무, 백향목, 떨기나무,
사과나무, 호도나무, 야자나무, 아카시아 나무,버드나무, 상수리나무, 포도나무 등 다양하다.. SDABC. vol. 8,
359-361.
이 나무들은 자주 자주 그 특성에 따라 영적인 실물교훈으로
쓰여졌으며,
개인과 나라를 표상한 경우가 많다. 감람나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하기도 했으며. 롬 11:16-25,
호 14:6, 시 52:8, 렘 11:16.
에스겔은(겔31:3-18) 앗시리아를 힘센 백향목이라고 비유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확대될
그분의 나라를 겨자 나무에 비유하셨다. 느브갓네살은
특별히 백향목을 좋아하여 그것으로 마르둑 신전과 자신의 궁을 짓는데 사용했으며, 그 까닭으로 백향목의
주산지인 레바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J. B.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307.
그런데 이제 느브갓네살 자신이, 땅의 중앙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로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풍성하여 그 나무 가지와 그늘 아래 새들과 짐승이 서식(棲息)하는 참으로 기대되고 쓸만한 나무로 비유되었다(4:10-12). 그러나 이
나무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게 자라고 땅 끝에서도 보일만큼 울창해진 때, 한 감시자(순찰자; Watcher)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거목을
그루터기만 남기고 모두 자를 것을 명하고, 그 그루터기도 쇠와 놋줄로 단단히 묶어서 일곱 때 즉 7년 동안 방치해 두라는 지시가 주어진다.
그동안 이 나무로 표상된 그 사람은, 사람 노릇을 못하고 짐승처럼 되어, 짐승 노릇을 하다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줄을 깨달은 후에야, 다시 사람 노릇을 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4:13-17).
꿈 이야기를 듣고 난 다니엘은, 꿈의 주인인 왕보다 더 깊은 번민과 두려움으로 충격을 받아,
"얼마 동안 놀라 어리벙벙"하자 오히려 왕의 격려를 받기에 이른다(4:19). 다니엘의 이러한 반응은, 그 다음의 말과 함께, 그가 이방인이요
이교도 왕인 느브갓네살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의 번영을 기원했음을 드러낸다. 동족을 사로 잡고 조국을 유린한 느브갓네살을 미워하는 대신, 그토록
진정한 개인적 충성심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이해한데서 기인한, 차원 높은 역사철학
때문인 것이다.
3.위대한 사자(使者) 다니엘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여 마음이 번민"(4:19)하던 다니엘은 언제까지나 그런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그 불길한 내용 때문에 자칫하면 왕의 분노를 사서 분풀이를 당할지도 모르는 그 난처한 자리에서,
다니엘이 보인 진심은 왕의 충분한 이해와 관용을 획득하기에 넉넉했다.
다니엘은 참으로 까다롭고 어려움이 많아 살기가 쉽지 아니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터득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마 10:16)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니엘은 왕의 손에 잡혀온 포로나 왕의 손에 죽고
사는 것이 달린 신하로서가 아니라, 하늘의 기별을 전달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자(messenger)로 서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선언, 즉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4:22)는 운명의 선고를 해야 했다.. 흠정역(KJV)에는 "It is thou, O king"으로
보다 강력한 표현이다. "그것이 곧 당신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지자나 설교자가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과 말은 곧 다른 사람 특히 신분이
높거나 자기 보다 유력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죄악을 지적해 주는 일이요, "당신이 죄인이요"라는 말이다. 가장 하기 싫은 말은"내가
잘못했다"(I am wrong)는 죄의 고백이며,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I love you)라는
사랑의 고백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죄 특히 왕으로, 그가 잘못했고 범죄했음을 인정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더욱 어려운
일인가. 선지자 나단은 자신의 범죄를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 다윗왕의 면전에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선언했다. 스데반은 증오와
시기로 살기등등(殺氣騰騰)한 산헤드린 앞에서 "너희가 그 사람이라"(행 7:51)고 선언함으로써 목숨을 잃었다.
다니엘은 그 꿈의 진상 곧 두려운 심판의 기별을 낱낱이 전한 후에, 요청받지 아니한 다른
일까지 부연했다. 그것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 심판을 면하라는 열렬한 호소였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단
4:27).
다니엘은 지금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 곧 구속의 경륜을 왕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속하고"는 "죄를 끊어버리고", 혹은 "죄 짓기를 중지하고"(break off thy sins)를 뜻한다.. 히브리어 paraq에 해당하는
말로 출 32:2, 창 27:40, 출 32:3, 24, 겔 19:12 등에 그 용례가 있다.
다니엘은 지금 왕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호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악"(iniquities)을 멈추고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다.
다니엘은 죄를 막연하게 취급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억압 당하고 고통 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강조하고 있다.. Wood,
117.
무엇보다도 대 토목 공사에서, 뜨거운 폭양(暴陽) 아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혹사(酷使)당하면서 수 없이 죽어 나가는 비참한 포로들과 역군들의 모습을 다니엘은 염두에 두고 있다. 생명을 경시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일은 당장
지양되어야 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제하고, 매사를 공의롭게 다루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총독 벨릭스 앞에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설교했고(행
24:25),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에게 회심을 촉구했다(행 26:27 -29).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도 어떻게 기별을 소개하고 호소하여
회심시켜야 하는지를 보이고 있다. 즉, 기별의 내용과 배경 설명 - "이는 곧 . . ." (행 2:16-22)·기별의 주체이신
하나님(그리스도)과 대질(對質)시킴 -"그가 . . . " (행 2:23-25)·듣는 이 각자에게 직접
적용시킴...... "너희가......"(행 36:38).. Strauss, 131.
다니엘은 이 엄숙한 심판의 기별을 대왕에게 전함에 있어, 처음에는 친구로서의 염려와 이해를,
다음에는 선지자로서의 곧고 분명한 기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복음전도자로서의 열렬한 호소를 발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한 사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곧 오늘날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귀감이 아닌가(딤후 4:2).
다.집행된 집행유예
1.1년의 집행유예
하나님께서는 결코 경고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으시며, 경고한 즉시 집행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집행유예 기간을 설정하시고, 이 은혜의 기간 동안 회개함으로써, 예고된 심판을 면제받게 하려고 하신다.
홍수 전의 세상을 위해 120년 간의 집행유예 기간을 설정됐으나, 회개치 않음으로써 심판이 집행되었다.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도 넉넉한 집행유예 기간을 선고받았으나, 결국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멸망당하였다. 반면에 40일간의 유예기간을 배정받은 니느웨는, 회개함으로써
이를 모면하였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느브갓네살은 개인적으로 그의 죄악에 대해 집행을 유예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1년만에
그의 유예기간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후 6:12).
마침내 그의 집행 유예가 폐기되는 날이 왔다. "열 두 달이 지난 후" 아마도 그 유명한 가공원(hanging gardens) 옥상이 아니면, 바벨론 외성곽 북단에
있는 새로 지은 하기 별궁(Summer palace)으로 여겨지는. 다니엘서 주석, 113.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그는 자신이 건설한 바벨론성을 바라보며,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우쭐하여져서 다시 교만하게 뇌까렸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4:30).
느브갓네살은 아직도 그가 반드시 배워야 할 사실, 즉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시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4:25) 알아야 하는 표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 . . ," "나의 .
. .," "내 . . ."가 강조된 그의 자만심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정신이요, 태도였다(사 14:13). 이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하늘에서는 1년 전 다니엘을 통해 전달된 하늘 법정의 집행 유예 선고가 그대로 집행된다는 통고가 있었다(4:31).
2. 내가 건설한 이 큰 바벨론
느브갓네살로 하여금 이토록 파멸적인 교만에 빠지게 한 바벨론은, 실제로 얼마나
장엄했고 화려했는가. 이에 대한 확인은 고대의 문헌과 현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가능하다.
바벨론은 느브갓네살 이전 천여년 전인 아모리왕 하무라비가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이래, 어머니
도시(the mother city)로 높임을 받았었다. 앗시리아에 의해 지배받던 굴욕의 시대에도, 바벨론은 학문과 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아버지 나보포랏살이 재건을 시작한 이래, 느브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재건 및 확장 및 미화(美化)사업이 계속되어, 이전의 도시는 거의 잊혀졌다.
[느브갓네살은 한 세대 안으로 고대의 찬란함을 훨씬 능가하는 참으로 필설로
묘사하기가 어렵도록 장엄하게 일으켜 놓았다. 그래서 그 놀라운 매력을 지녀온 로마가 웅장하고 화려하고 집중적인 모든 것의 상징으로 전형적인 세계
도시라고 하지만, 인류의 정신과 상상력에서 바벨론을 당해낼 수가 없다.
고대 역사가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이 위대한 도시의 궁전들과 신전들, 가공원들의 웅장함을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James
Baike, "The Cradle of Civilization,"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Feb.,
1916, 158.
발굴된 당대의 한 비문에는, 느부갓네살의 업적이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이전의 어떠한 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는데, 바벨론 바깥 쪽 바벨론
동편으로 그 도시를 둘러 큰 성을 쌓았다. . . . 나는 그 머리를 산처럼 높혔다. . . . 에사길라와 바벨론의 방벽을 나는 견고하게
하였고, 나의 통치에대한 영원한 이름으로 만들었다. 오 ! 마르둑,
신들 중의 주요, 나의 거룩한 창조자요, 당신 앞에서 나의 행위가 경건해지고 그것들이 영원하게 하소서 . . .오 ! 마르둑이여, 당신은 참으로
나의 구원자요, 나의 도움이십니다.]. Ibid., 368, 369.
1899년부터 1917년에 걸쳐 로버트 콜데베이(Robert
Koldewey)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발굴을 통하여 고대 바벨론 성의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사진 참조). 발굴 결과, 느브갓네살 이전의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 동편의 내성가(Inner City) 부분 밖에 없었는데, 그 크기는
사면이 각각 1마일쯤 되는 거의 정방형이었다(지도 참조).
궁전들과 행정부 건물들은 내성가의 서부 지구에 있었고, 그 아래 남쪽으로 마르둑신을 위한 복합
대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가 있었으며, 그 중심이 되는 신전고탑(Ziggurat) 에테메난키(Etemenanki)가 300피트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 이것보다 높은 건축물은 이집트의 기자(Giza)지방에 있던 두 피라밋 뿐이므로, 이 탑은 니므롯이
쌓은 바벨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일 것이다. 이 벽돌로 된 고탑은 7층으로 되었는데, 맨 윗층은 마르둑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느브갓네살이 왕이 된 후 바벨론이 대 제국으로 뻗어감에 따라 수도 확장공사에 착수하여,
유프라테스강 서편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를 신시가(新市街; New City), 혹은 강서구(Western Quarter)라고 부른다..
Horn, 42.
이들 신.구 시가지는, 중앙 부분에서 여덟 개의 교각을 가진 한 개의 다리로
연결되었음이 발굴에서 드러났다. 이들 두 시가는 이중 성벽으로 두른 외에 성 밖으로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인 방어용 해자(垓字.Moat)를
파서, 바벨론을 명실공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게 했다.
느브갓네살이, 이 바벨론성은 "내가 . . . 건설"하였다고 한 가장 뚜렷한 인상은 폐허에서
발견되는 벽돌에 그의 이름과 직위가, 그의 건축에 관한 기록과 함께 문각된 벽돌을 보면서 더욱 확실해진다(사진 참조).. 다니엘서 주석,
124.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장엄하게 건축된 바벨론을 바라보며 자긍했던 느브갓네살의
뇌까림(4:30)이, 입수된 고대의 바벨론 찬양시에도 나타나 있다. 느브갓네살은 또 다시 유프라테스강 동편 옛 시가지 북편 멀찌기에, 그의 여름
궁전(Summer Palace)를 새로 짓고, 이 별궁(別宮)의 방어를 위해 이중으로 된 외성을 구축하여, 이들 내성과 외성의 총 길이는 13
마일이나 되었다. 실제의 도시 둘레는 10마일로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7 마일 반이었던 것에 비해서도 컸을 뿐더러, 6마일 밖에 안된
제정시대의 로마시보다도, 기원전 5세기쯤 전성기를 맞은 그리이스의 아테네가 4 마일 밖에 안
되었음에 비추어, 바벨론이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세개의 큰 궁전은 그의 영광을 말해 주고 있는데,
하나는 내성가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남궁(南宮; Southern Palace)으로, 왕의 공적인 거처였고,
집무를 위한 공식 건물이었다. 이 남궁에서 모든 국가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그 궁전 중앙에는 보좌가 놓인
큰 홀이 있었으며, 그 길이가 173 피트, 폭이 57 피트, 높이가 66피트나 된다. 바벨론 함락 전야에 벨사살이 귀인 1000명을 위해
주연을 벌인 곳으로 생각된다(단 5:1).
이 남궁에 연접해서 고대 세계 칠대 경이 가운데 하나로, 느브갓네살이 메대의 공주인 그의 왕후
아미티스(Amytis)를 위해 만들었다는 공중정원(혹은 架公園)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공원의 바깥 길, 즉 행렬가(Procession Street) 건너 입구에는 바벨론
성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주문(主門)인 이쉬타 문(Ishtar Gate)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성문은 이중 성벽에 맞춘 이중
문으로, 길이가 170 피트나 되었고, 높이와 두께가 다른 네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사진 참조).
이 문은 파괴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폐허 위에 40피트 가량이나 높이 솟아 있다. 이 문의
윤택나는 벽돌에는 누른 빛의 황소들을 비롯하여 뱀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뒷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들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다니엘서
7장과 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사진 참조).. Wiseman, 71.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또 다른 궁전은 남궁의 머리 맡 내성가 북부 성벽 바로 밖에 있던
중앙궁(Central Palace)이다. 이 궁전은 바벨론의 찬란한 역사를 입증해 주는 사료(史料)들이 진열된 박물관도 있었다.
다른 또 하나의 궁전은 외성가(Outer City) 혹은 신강동구(新江東區; Eatern N-
ew Quarter) 북단에 세워진 여름 궁전(夏宮; Summer Palace)인데, 지금까지도 바벨론의 폐허 가운데 가장 높은
구릉(mound)으로 남아 있으며, 그 이름도 텔바빌(Tell Babil)로 전해지고 있다.. Horn, 38,
39.
건축에 사용된 벽돌들도 참으로 다양하며, 각종 건축물의 내부 구조는 굽지 않은 벽돌을 썼지만
외부, 즉 바깥 표면은 구운 벽돌, 때로는 색깔을 써서 윤택을 낸 유색 벽돌을 썼다. 도시 성벽의 표면은 누런 색의 벽돌로, 성문들은
하늘 색의 벽돌로, 궁전들은 장미색 벽돌로, 그리고 신전들은 흰색의 벽돌을 썼으니, 색상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Wiseman, 72.
[오, 바벨론이여, 너를 보는 사람마다 다 기쁨에 넘친다.바벨론에 사는 사람마다 그의 생명이
길어지고, 바벨론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마다 자기 어미를 죽이는 사람같다. 바벨론은 열매가 보기 좋은 달콤한 대추야자 나무 같다.]. E.
Ebeling, Keilschrift texte aus Assur Religiosen Inhalts, part I (Leipzig, 1915),
No. 8.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을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the beauty
of the Chaldees' excellency)라고 묘사한 것이나(사 13:19), 예레미야 선지자가 "금잔"으로 비유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렘 51:7).
라.수심(獸心)인간-"리칸드로피"
그토록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왕은 하늘의 선고를 듣는 순간(4:32), 그에게서 사람의
마음(人心)이 떠나고 짐승의 마음(獸心; beast heart)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기를 짐승으로 생각하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정신병은 세계 의학사에서도 일찌기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정신병을 의학에서는 "리칸드로피"(lycan- thropy)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두 마디의 헬라어 곧 "이리"를 뜻하는
"루코스"(lukos)와 "사람"을 뜻하는 "안드로포스"(anthropos)가 합성된 말로, "낭광"(狼狂)이라고 한다.
이 정신병은, [사람이 자신의 본체(신분)를 완전히 상실하고 스스로 하등동물 가운데 하나로 둔갑했다는 확신이 드는 병으로 . . . 인간이 드러낸 심리학사에서의 가장
괄목할만한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Dictionary of Psychological Medicine, cited by R. D.
Willson, Studies of the Book of Daniel, 286, 287.
참으로 무서운 병이다. 유사한 정신병으로 자신을 새(鳥)라고 착각하는 "조광"(鳥狂;
avianthropy)도 있고, 자신을 소라고 생각하는 "우광"(牛狂; boanthropy)도 있다.
왕이 이렇게 미치는 예가 과거 역사에서도 드문 일은 아니다.
프랑스의 찰스 4세(Charles IV), 덴마크의 크리스챤 7세(Christian VII), 영국의 죠지
3세(George III)등 여러 예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느브갓네살로, 그는 7년을 뜻하는 "일곱 때". 이 곳의 "때"는 아람어로
"이단"(iddan)인데, "해"를 뜻하고 있다(4:23, 25, 32, 7:25, 12:7). 70인역(LXX)에는 7년으로
번역됨.
7년동안 이렇게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게
된것이다(4:33).
느브갓네살의 경우는 이토록 심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와
비슷하게 사람답지 않은 금수(禽獸)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소처럼 미련하고 지각없는 마음, 여우나 이리처럼 교활하고
약삭빠른 마음, 맹수처럼 난폭하고 무자비한 마음, 돼지처럼 욕심 많고 이기적인 마음, 개처럼 염치 없고 부도덕한
마음, 염소처럼 시기심 많고 저열한 마음, 공작처럼 허영으로 가득찬 마음, 고양이 처럼 앙칼지고 몸을 사리는 마음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낮고 천한 죗된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되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의 모습을 지녔다
해도 느브갓네살이 짐승 노릇을 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곧 로마서 1장에 지적된 타락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찬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무자비한 자라] (롬 1:21-23, 28-31).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짐승의 마음이요, 사람의 본심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참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죄라는 가장 무서운 정신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멸망당할
수심인간(獸心人間)이 되고 말 것이다.
마.정신 이상에
대한 고고학의 새로운 빛
과거에도 여러 왕들이 미친 경우가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중에 하나가 느브갓네살일
수가 있을까 하는 문제는 의심의
소지(素地)가 되어왔다.
그러나 왕 자신과 나라에 불명예스러운 이러한 사실을 정사(正史)에 남기려 하는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를 깨뜨리고 느브갓네살의 정신이상(精神異常)을 암시하는 바벨론 당시의 점토문서가, 근년인 1975년 그레이슨(A. K. Grayson)교수에 의해 출판되었다.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이 문서(NO. BM 34113)는 불행하게도 많이
훼손되어 단편(斷片)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왕의 비정상적인 질병을 알리는 흥미진진(興味津津)한 것이다.. A. K. Grayson, Babylonian
Historical-Literature Texts, "Toronto Semitic Texts and Studies," No.3(Toronto :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5), 87-92.
(줄 앞의 숫자는 원문의 몇째 줄임을 표시함).
2. (느브갓네살은 생각했다)
3. 그의 생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게 . . .)
5. 그리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에윌-마르둑(Evil-Merodach) (※註: 느브갓네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의 장자로 그 뒤를 이어
왕이 됨(왕하 25:27-30, 렘 52:31-34)에게 나쁜 권면(bad counsel)을 했다. (. . .)
6.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 . .)
7.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주의하지 않았다. 조신(朝臣)이 (. . .)
11. 그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 . .)
12. . . . 가족과 친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 . .)
14. 그의 주의는 에사길(Easagil; 바벨론 주신의 신전)과 (바벨론)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기울여지지 않았다. (. .
.)
16. 그는 신 중의 신에게 빌었고, 그의 (손을 탄원하면서)들었다. (. . .)
17. 그는 위(대한) 신, 마르둑을 향하여 슬피 울었다.
18. 그의 기도는 계속되고, (. . .) 향하여,
이러한 본문을 분석해 보면[S. H. Horn, "New Light Nebuchadnezzar's Madness,"
Ministry, April, 1978, 38-40],
우선 느브갓네살의 이상한 행동들[본문의 3, 6, 7, 11, 12, 14절의 내용]은,
조정의 대신들로하여금 그의 아들 에윌-마르둑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느브갓네살은 인생의 가치를 상실하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보이지 않고, 가족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가 종교와 그 주신의 신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왕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아들인 에윌-마르둑에게 상황을 알리면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는 권고를 하게 됐다고 보인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바람직한 권고였으나, 나중에 느브갓네살이 복권(復權)했기 때문에,
그저 "나쁜 권면"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에 의하면(4:33), 느브갓네살은 나중에 다시 회복되어, 다시 대신들에 의해
세움을 입었으므로(4:36), 이 기간 동안 아들이 섭정한 것으로 보인다.{{34) Ibid., 40.
이토록 중요한 자료가 단편적이어서 유감스럽지만, 도무지 기대할 수 없던 분야에 빛을 던져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3. 느브갓네살의 회복과 신생
가. 건강과 영광의 회복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브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 . .」(4:34 상단).
「기한이 차매」
이 기한이란, 이미 선고된 일곱 때 곧 7년을 가리킴에 틀림없다(4:16). 이 기간 동안,
어떻게 그의 왕위가 보존되었을까?
미신적인 고대
사람들은, 이러한 정신병들은 악신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정신 이상된 사람을 죽이거나,
그 재산 또는 지위를 박탈하면, 그 악신에 의해 보복을 당하거나, 그 악신에 사로잡혀 버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친 사람은 인간 사회에서
격리는 되었지만, 다른 괴로움은 주지 않았다(삼상 1:12-22:1).
느브갓네살은 기원전 562년 10월에 죽었는데, 이는 그가 회복된 후 즉시에 해당되는 연대로 보인다.. Thiele,
43.
이 기간 동안 왕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박수장"(4:9, 2:48) 다니엘이, 다른 관리들과 함께 왕을 대신하여, 국사에 크게 관여했음은 있음직한
일이다.. Anderson, 73.
「우러러 보았더니…총명이…돌아온지라」
7년 간 짐승 노릇을 하던 느브갓네살이, 다시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회복되는 과정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우러러 보았을 때" 이성을 되찾았다.
헬라어로 사람을 "안드로포스"(anthropos)라고 하는데, 그 뜻을 "위를 쳐다 보는
자"(the one who looks up)이다. 어떠한 동물도 사람처럼 머리를 직각으로 위로 하여(直立) 서 있을 수가 없다. 사람만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理性)을 가졌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리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1,2).
한 때 땅에 속하여 땅엣 것만 생각하고, 땅엣 것만을 위해 살아온 왕이 "이제는. . . 이
모든 것",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 3:8- 10)가 된
것이다. 왕에게 이성이 돌아오고 회복이 분명해지자, 그 동안 국사를 맡았던 조신(朝臣)들은, 즉시 왕을 복권(復權)시키고 그 앞에 충성을
재다짐했다.
나. 거듭난 대왕의 신앙고백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 . .
그는 자기 뜻 대로 행하시나니 . . .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심으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4-37).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 분이 행하실 수 있는 최대의 이적, 즉 하나님을 전 혀 알지 못한
이교도 군주요, 포악하고 완고하며 교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자고(自高)했던 한 인간을, 이토록 양순하고 인자와 긍휼이 넘치며, 하나님을 사랑하여
높이고, 순종하며 공의를 사랑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을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새 사람이 되어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4:37)하며
감사에 젖어 평안히 일생을 마친 그가, 이제 구속 받는 성도들과 함께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속하여 하늘 유리
바닷가에서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 .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 7:9,
10)라고 소리쳐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얼마나 감명이 클 것인가!
4. 교훈과 의의
가.진정한 도움과 약물 종교
1. 진정한 도움
느브갓네살은 그가 꾼 심상치 않은 꿈 때문에 두려움과 번민에 사로잡혔으면서도, 처음부터
다니엘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를 꺼리고 자기 나라의 석학들과 종교 지도자들, 점성가들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로, 그들은 절실한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
무기력한 인간에게로 달려간다.
오늘날도 느브갓네살처럼 마음의 불안과 생활의 번민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점장이를
찾아가거나 운명상담소를 찾는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간파(看破)한대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21). 진정한 도움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하여 이르는 것이다. 인간의 도움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지만, 진정하고도 궁극적인 도움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1-31).
2. 바벨론의 약물종교
고대 바벨론은 각종 술사(術士)들의 나라였다. 특히 이들 술사들 가운데는 일종의 화학적인
약품을 써서 종교적 경험을 가지도록 해주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신비한 약품을 써서 사람들로 몽롱한 화학적인 종교적 경험을 가지게 하는
술법(術法)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파르마케이아"(pharmakeia)라 했는데, 그 본 뜻이 "마술"(magic)
혹은 "마법"(sorcery)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이 "술수"(術數; 갈 5:20),
"복술"(卜術; 계 9:21, 18:23)로 번역되어 있다.
바로 이 말에서, 오늘날의 약학(藥學) 혹은 조제술을 의미하는 영어의
"파르마시"(pharmacy)란 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이런 약물 혹은 술법을 쓰는 사람을 "파르마코스"(pharmakos) 혹은
"파르마쿠스"(pharmakeus)라고 했는데, 이 말이 성경에는 "술객"(계 21:8, 22:15)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로 이 말에서
오늘날의 약제사(藥劑士) 혹은 제약자를 의미하는 영어, "파르마시스트"(pharmacist)가 나왔다. 그리고 이런 술법에 쓰던 신비한
약품(액체)을 "파르마콘"(pharmakon)이라 했는데, 이 말을 영어에서는 "약" 특히 마취약을 의미하는 "드러그"(drug)로 번역한다..
The Analytical Greek Lexicon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0), 423. Alexander Souter, A Pocket Lexicon to the Greek New
Testament, 1966, 273, 274.
그리고 이러한 말들의 배경에는 바벨론의 술사들 가운데, 특히 종교적인 경험에 연관시켜
"약초"나 "주문"(呪文)이나 여러가지 "음료"를 사용한 술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이 신구약 성경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단 2:2, 출
22:18, 신 18:10, 사 47:9, 12, 렘 27:9).. Wood, 50.
느브갓네살이 소집했던 술사들 가운데도 이러한 부류가 있었다(단 2:20).. 한국어 성경에는 '점장이'로
번역되었음.
참으로 고대 바벨론의 종교는, 실제로 우상 숭배와 연관된 주술(呪術)과, 마취성이 있는 화학 약품까지 동원한 일종의 약물(藥物)종교였던
것이다.. Criswell, vol. 3, 60.
바벨론 종교가,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지도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동원하는 신접술(神接術),
즉 강신술과 각종 주술, 심지어는 마약성 약물까지 사용한 신비요법(神秘療法, occultism)을 썼다는
사실은, 계시록에 나타난 신비종교로서의 바벨론의 특징을 분명히 하고 있다(계 17:5).. Mystery, Babylon the great,
the mother of harlots and abominations of the earth.(KJV).
이러한 약물 종교의 기원은, 바로 사단으로서 하와를 유혹할 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거짓말과 함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창 3:5)리라고 설득한 후,
선악과를 먹게 한데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다.
그런데 바로 오늘날 하나님 없는 현대인의 종교가, 바로 이 약물 종교가 아닌가! 두려움과 불안과 번민에 사로잡혀 "뇌 속"이 복잡했던(단 4:5) 느브갓네살이,
이들 술사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하려 했듯이, 오늘날 마음의 평화를 상실하고 극도의 긴장과 초조와 불안에 빠져 잠 못 이루는 현대인들, 지도자와
백성들이, 바야흐로 각종 약물을 힘 입어 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진정제를 먹어야 마음이 평온해지고,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오는 등의 이른 바
"태블렛(tablet) 종교," 박가스나 활명수를 마셔야 거북한 속이 가라 앉는 "박가스 종교," 커피나 홍차를 마셔야 일이 손에 잡히고,
콜라라도 마셔야 무얼 마신 것 같은 "드링크 종교," 술잔을 기울여야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가는 "알콜 종교" 등이 만발하고 있다.
미국에서만도 어림 잡아 일년 간 소모되는 커피의 양이 1,370억 컵으로, 매일 4억 컵이
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S. A. Nagel, 건강과 행복의 길(의료 강좌초), 14.
「그대가 피로를 느낄 때, 커피(또는 차, 코카콜라, 팹시콜라등)를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나, 카페인이 신체의 피곤한 부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카페인은 뇌에 영향을 미치며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듯
"환상"을 갖게 한다 . . . 그러나 사실은 흥분한 힘이 계속 작용하고 있으며 그 영향이 그치면 더욱 더
피곤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카페인은 환각제로 취급되는 것이다. 카페인은 휴식과 쉼을 구하는 신체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다. 그대가 노곤하고
쉬고 싶을 때에 그대는 또 다시 커피를 들이킨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만성이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대는 커피를 마시는 거미줄에 얽히고
만다.」. Ibid., 14. Dr. Mervyn Hardking's statement.
600만명의 알콜중독자가 국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알콜을
위해 소비되는 금액이 일년에 130억 달라가 넘을 뿐만 아니라, 정신 병원에 들어오는 환자의 1/5이 바로
그 알콜 때문이라는 미국의 현실이다.. Ibid., 22.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에 못지 않아, 1976년도에 술값으로 지불된 돈이
2,335억원이나 된다는 것이며, 그 양은 2,323,937 킬로 리터로 약 11,618,000 드럼이나 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구제공보, 1978년 3월
1일.
바벨론을 금잔으로, 만국에게 음행의 포도주를 먹이는 자로 표상하는 것은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적절한 표상이다(계 17:4, 18:3, 렘 51:7). 더욱 파멸적인 것은 마리화나, 헤로인등 각종 환각제가 긴장과 불안에 사로잡힌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론의 종교였으며, 또한 오늘날의 종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거짓된 종교
때문에, 하룻 밤 사이에 망해버리는 바벨론의 모습을 다니엘서 5장에서 보게 된다. 그것이 또한 현대 세계의 파멸의 모습이기도 한다.
우상숭배와 약물 종교에서, 그의 두려움과 번민을 해결할 아무 도움을 얻지 못한 느브갓네살은,
이것들을 뿌리치고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옴으로 그 말씀에서 답을 찾았다. 번거로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로 인하여 초조해진 현대인들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서만 진정한 도움, 올바른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마
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