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舊約]강해/◆ 다니엘서

다니엘 3장 신앙의 자유와 진정한 -불타는 풀무-

영국신사77 2006. 8. 15. 15:44

                                                                                            

 

 

 

 

 

        다니엘 3장 신앙의 자유와 진정한 예배 

 

                                           -불타는 풀무- 

시작하는 말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 최초로 이르러 온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창 3:5)는 사단의 속삭임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중심(自重心)과 자신의 품위와 인격을 지키려는 자존심(自尊心)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능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被造物)임을 인정하고 기억할 때는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관건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표현인 예배를 부인하고 거절할 때는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은 자기숭배(崇拜)로 변질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게 됨으로써 자신이 거짓 신인 우상(優像)이 되고 만다. 

그것이 곧 사단의 정신이요, 사단의 종교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된다. 

그것은 모든 무신론적인 독재자들과 세속적인 위인들의 자기 신격화(神格化) 현상이다. 

느부갓네 살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금 신상의 제막식

 
1.느부갓네 살왕은 어떤 신상을 세우도록 했는가?

  
"느부갓네 살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단 3:1).

  
[설명] 다니엘서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 살에게 세상의 장래를 나타내 보이신 두려운 신상을 보았다. 그 결과로 느부갓네 살은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런데 3장에서 우리는 반대로 느부갓네 살왕이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에 경배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본다. 3장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의 자유와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배우게 된다. 2장의 사건이 있은 후 여러 해가 지나 왕권(王權)이 확고해진 때 느부갓네 살은 유프라케스 강 유역의 두라(지금의 나르 두라) 평지에 받침대를 포함하여 높이 60규빗(103피트), 폭이 6규빗(10피트)이나 되는 거대한 신상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국립 관현악단을 초청한 가운데 화려한 제막식(際幕式)을 올리고 있었다.

 
2.제막식에는 누가 참석했는가?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 살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 살왕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단 3:3).

  
[설명] 참석 범위와 의식의 규모로 볼 때 금 신상은 국교(國敎)의 대상인 국신(國神)의 위치에 있었으며 제막식에는 도지사였던 유다의 세 젊은이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왕의 수석 고문이었던 다니엘은 왕이 허락한 어떤 사유로 불참했다.

 
3.금 신상을 세운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에 어긋날 때 어떠한 형벌이 선언되었는가?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 살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단 3:5, 6).

  
[설명] 금 신상은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라 사단이 그 배후 세력인 바벨론의 신들을 경배하게 할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었고 제막식은 이러한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의식이었다.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풀무불에 던져 넣는 극형에 처해졌다. 느부갓네 살은 왜 이처럼 엄청난 일을 계획했을까? 다니엘이 왕의 꿈에 나타났던 2장의 신상을 해석할 때,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라고 선언했었다. 머리 부분에서 그의 나라가 끝난다는 해석을 그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이 해석을 바꾸어 바벨론을 만세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발끝까지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 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절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신격화했다. 제막식은 바벨론의 흉몽을 길몽으로 바꾸기 위한 화려한 푸닥거리였다. 그것은 과거 로마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여 황제예배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을 원형극장에 던져 사자밥이 되게 한 것이나 일본의 천황숭배인 신사참배와 같은 목적으로 인간의 신앙 양심을 짓밟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 참 신앙의 용사들

 
4.누가 감히 왕명을 어기고 금 신상에 경배하기를 거절했는가?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단 3:12).

  
[설명] 신상 참배를 알리는 국립 관현악단의 장엄한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참석한 모든 군주들과 고관들이 일제히 엎드려 경배했으나 도지사의 신분으로 참석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장승처럼 태연하게 서 있었다. 이 사실은 즉시 시기심에 가득 찬 바벨론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해 왕에게 보고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왕의 꿈을 찾아 해석하지 못함으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다니엘의 호소로 간신히 목슴을 건진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그 은혜를 왕에 대한 중성을 빙자하여 이렇게 배신으로 갚은 것이다. 사단이 조종하는 인종과 종교와 명예에 대한 살인적인 편견과 시기가 발동된 것이다.

 
5.세 젊은이의 뜻밖의 행동에 대한 왕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느부갓네 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4, 15).

  
[설명]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바벨론의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가장 불경(不敬)한 행위인 동시에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중죄(重罪)임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평소에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왕은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어 그들을 설득하는 한편 거절할 경우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하겠다는 왕의 결단을 통고했다.



                     
▶ 하나님과 바벨론 신의 대결

 
6.왕의 선언과 세 젊은이의 신앙 고백 가운데 나타난 이 사건의 핵심이 되는 주제는 무엇인가?

  
느부갓네 살 :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5).

  세 젊은이 :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 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6, 17).

  
[설명] 금 신상의 제막식에서 엎드려 절하는 문제는 단순한 의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느부갓네 살이 섬기는 바벨론의 신과 유다의 세 젊은이가 섬기는 하나님과의 대결임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인가를 확중해야 하는 최고의 주제와 사람이 어느 신에게 최선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판가름해야 하는 인간의 가장 엄숙한 선택이었다.

 
7.느부갓네 살이 죽음으로 위협하며 경배를 강요한 바벨론의 신은 누구인가?

  
[해답] 바벨론의 주신(主神)의 칭호는 "벨"(Bel)로서 이름은 마르둑(Marduk)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의 주신 "바알"(Baal)과 같은 "주"(主 · lord)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의 전설에 의하면 마르둑은 사람과 동물을 창조하여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 게 한 창조의 신으로 자신의 보좌는 북극 하늘 높은 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내쫓겨 마침내 사단이 된 성경의 악한 천사 루스벨(Lucifer)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8.다니엘과 세 친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해답]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니님이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운신 참 하나님이시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켜 추방당한 사단의 유혹에 빠져, 범죄함으로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분이 바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리하여 유다의 세 젊은이와 바벨론의 느부갓네 살로 대표된 극한의 예배 논쟁은 하나님과 사단과의 대결, 선과 악의 대쟁투임이 확실해졌다.

 
9.유대인 세 젊은이는 왜 금 신상에게 절하는 일을 거부했으며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작정했는가?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하더라" (계 14:7).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

  
[설명] 부모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을 주고받은 특별한 관계로서 자식을 낳아서 사랑과 희생(犧牲)으로 기른 사람만이 부모이며 부모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모만이 자녀들로부터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인 것이다. 그처럼 아무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세상을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창조하신 창조주만이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하나님만이 인간으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효도가 자식의 본분(本分)이듯 합당한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본분이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우상이란 창조주가 아니면서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존경과 예배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거짓 신이며 그런 행위가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것이 우상을 내세워 경배를 강요하는 거짓 종교의 진상이며 그 배후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을 이끌어 온 사단인 것이다.

 
10.강요된 우상숭배를 단호하게 거절한 세 젊은이의 위대한 신앙 고백은 무엇이었는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 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6~18).

  
[설명] 세 젊은이는 우상숭배는 고려할 여지도 없는 요구이며 그들이 섬겨온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그들이 섬기는 사람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자신들을 풀무불로부터 능히 구원하실수 있는 분이심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이 있으셔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만을 경배하려는 그들의 결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11.풀무불에서 건져내지「아니 하실지라도(if not)」하나님만을 경배 하겠다는 세 젊은이의 신앙은 도대체어디에 근거한 신앙인가?

  
[해답] 세상의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는 거래(去來) 관계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고받은 특별한 사이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은 그렇지 않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오히려 자식이 어려울수록, 부모가 손해볼수록 더욱 강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관계이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깨달은 자식은 자신이 불행하게 되거나, 부모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베풀 수 없는 때에라도 조건 없는 효도를 계속하는 효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생명을 주고받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반응인 것이다. 무슨 혜택이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유산(遺産)을 받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은 거래 행위이지 진정한예배가 아닌 것이다. 풀무불에서 건져내지 아니하실지라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세 친구의 고백은 진정한 예배가 무엇임을 천명한 것이다.

 
12.금 신상에 절하기를 끝내 거절한 세 젊은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느부갓네 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 3:19, 20).

  
[설명] 자신의 호의마저 거절한 세 젊은이에 대해 격분한 왕은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에 그들을 던져 넣게 했다. 이 풀무는 요즈음도 볼 수 있는 바벨론의 벽돌 굽는 가마인데 원유와 짚을 섞은 인화성(引火性) 연료를 썼으므로 7배나 뜨럽게 하기 위해 갑자기 양을 늘이자 좁은 입구로 불길이 솟아 나와 던져 넣던 군사들을 태워 죽게 했다.

 
13.풀무불 속에 던져진 세 젊은이에게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가?

  
"때에 느부갓네 살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느부갓네 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 3:24~26).

  
[설명] 입구를 통해 풀무 속을 응시하던 왕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풀무불 속에 결박이 풀린 세 젊은이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 같은 또 다른 존재가 함께 거니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신들의 아들"과 같은 넷째 존재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기 위해 죽음을 불사(不辭)한 이 충성스럽고 기특한 아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풀무불 속까지 동행하신 것이다.



                                 
▶ 종교 자유의 원칙

 
14.이 엄청난 기적에 대한 왕의 반응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합당한 조치였는가?

  
"느부갓네 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 3:28, 29).

  
[설명] 머리카락 하나도 그슬리지 아니하고 살아 나온 세 젊은이를 목도한 왕은 즉시 그들이 목숨을 바쳐 섬긴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했다. 그리고 이러한 참 하나님에게 합당한 존경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몸을 쪼개어 죽이라는 끔찍한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져야 한다.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강요하는 조서를 내린 것 모두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범죄 행위인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강제된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자유 선택에 의한 진정한 예배만을 인정하신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천부(天賦)의 권리이다.



                                   
▶ 참다운 예배의 요청

 
15.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람이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요청하는 어떠한 기별이 주어졌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6, 7).

[설명] 우주와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시므로 자식이 부모에게 마당히 그래야 하듯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 부모의 출산(出産)이 효도의 근거가 되듯 하나님의 창조(創造)는 참된 예배의 합당한 근거가 된다.

 
16.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합당한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 11).

  
[설명] 창조는 예배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날로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져야 하는 성일(聖日)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십계명 가운데 넷째 계명에 명시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법적인 예배일인 것이다.



                                    
▶ 참다운 예배와 핍박

 
17.마지막 때에 또다시 십계명에 명시된 합당한 예배를 고수하는 소수의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다수의 박해가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5~17).

  
[설명] 고대 바벨론 당시에 그랬듯이 마지막 때에도 영적인 바벨론으로 표상(表象)된 정치와 종교의 연합된 세력에 의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를 고수하는 소수가 또다시 핍박을 당할 것으로 예언되었다. 그것이 특별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불들의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예배하는 제칠일 안식일 준수와 연관된 사실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表徵)" (출 31:13)이라고 선언되어 있어 장차 강요될 "짐승의 표"와 상반(相反)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는 요한계시록 연구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8.세상 역사의 마지막까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를 끝까지 고수할 특별한 백성이 있을 것임에 대해 어떠한 언급과 약속이 있는가?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 마치는 말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의 존재와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효도이다. 그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道理)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기원과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는 인격적인 행위이다. 효도할 때 자식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 확립되는 것이다.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자신의 피조성(被造性)을 인정할 때 비로서 인간성(人間性)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다워진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의 속성(屬性)인사랑에 반응하고, 그 분에게 합당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worship]는 가치(價値 · worth)에서 나온 말이다. 예배는 인간이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다. 거기에 인간의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지 않는 인간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가치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예배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절대적이기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거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인 예배인 것이다.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가치 있지 않은가. 그러한 예배가 참으로 시급하지 않은가. 내가 바로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할 사람이 아닌가.

                                                                                              출처 블로그 > 천성 가는 길목 쉼터
                                                                                              원본 http://blog.naver.com/kbs021/20013138342

 

 

 

 

 

 

 

              다니엘서 제3장 신앙의 자유와 불시련
                       1.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
 

  앞서의 다니엘서 2장은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두려운 신상이 그 주제였다. 그런데 3장에서 이번에는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3:1)다는 또 하나의 신상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또 하나의 신상이 세워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금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게 하는 의도의 배후는 무엇이며 그 영향과 결과는 어떠했는가.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세워지고 경배하도록 명령되는 금 신상의 제막(除幕)사건은 그 배후를 이루고 있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선악의 대전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가지 목적으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조각상(彫刻像)이 만들어지고 세워져 왔다. 예술적인 목적, 정치적, 역사적인 목적, 종교적인 목적 등 여러 경우 가운데 경배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것일 때, 그것은 우상(偶像) 곧 신상(神像)이 되는 것이다.


   1. 신상의 크기

 

  고대 세계에서는 거대한 신상들이 흔히 세워졌다. 이집트 제4왕조 카프르(Kh- afre)왕의 모습인 스핑크스는 밑에서 머리 끝까지 70피트(약 21미터)였고 아멘 호텝 3세(Amenhotep Ⅲ)의 거대한 멤논(Memnon)의 조각상들도 그 높이가 69피트였다. 이것들은 천 톤씩이나 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누비아(Nubia)의 아부심벨(Abu Simbel)에 있는 신전에는 람세스 2세(Ramses Ⅱ)의 거상들도 그 높이가 65피트나 된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은 그 높이가 육십 큐빗(약 103피트) 폭이 6 큐빗(약 10피트)로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미국의 뉴욕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女神像)의 총 높이가 305피트이지만 받침대(台座)의 높이를 빼면 실제 높이는 발뒷꿈치에서 머리 끝까지 111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금 신상의 실제 높이와 폭도 30 큐빗(52 피트) : 6 큐빗(10 피트)의 비례가 될 것이다.


  신상의 이를 60 큐빗 폭을  6 큐빗으로 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6이라는 숫자와 그 배수(倍數)는 고대 바벨론의 종교와 연결되어 흔히 쓰던 숫자이다. 주신 마르둑 신의 고유 숫자가 60이었는데 이는 그 이전의 바벨론의 주신이었던 아누(Anu)신의 숫자가 60이었던 것을 마르둑이 들어서면서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짐승의 숫자를 600-60-6으로 하여 666이라고 한 것에는 심상치 않은 배후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7을 그 분 자신이 택하신 숫자로 삼은 반면에, 사단은 6을 그가 택산 숫자로 삼았음을 보게 된다. 동시에 고대 바벨론에서는 십진법(十進法)이 아니라 60을 기초로 한 60 진법(六十進法)을 썼음을 알게 된다.



   2. 신장의 자료-금

 

  참으로 그렇게 엄청난 금이 어떻게 쓰였을까. 기원전 5세기의 희랍(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터스(Herodotus)는 바벨론 신들의 예배에 엄청난 금이 쓰였음을 바벨론에 있던 한 신전을 예로 들면서 증언하고 있다.



  [바벨론 성에 있는 두번째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제우스(Zeus)신의 좌상(座像)이 있다. 그 신상이 자리잡고 있는 앞에는 금으로 만든 큰 테이블과 신상이 좌정한 보좌와 그 보좌가 놓여진 받침이 있는데 모두가 금이었다. 갈대아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 금을 모두 합치면 800 달란트(30톤 이상)가 된다고 했다. 그 신전 밖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속까지 금으로 된 것이었다. (페르샤 왕)고레스 당시 이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높이 18 피트의 사람 모양의 상(像)이 있었다. 나는 직접 이 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갈대아 사람들이 그 것에 관해 알려 준 것을 말한다.]



  느브갓네살은 비록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였지만 자기의 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종교를 번영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쳤다. 그는 엄청나게 큰 신상을 제작했고 그 막대한 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말씀하신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과 그 분을 예배하는 전(殿)인 교회의 유지와 건축을 위해 바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인색함과 이기심은 느브갓네살에 의해 견책을 받는다.



   3. 장소-두라 평지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이 세워진 곳은 "바벨론 도(道)의 두라(Dura) 평지"라고 했다(3:1). 그런데 이 지명은 지금의 힐라(Hilla) 아래 약 4 마일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支流)에 연한 "나르 두라"(Nahr Dura)라는 평지에서 발견된다. 그 이웃에 있는 언덕들도 두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2. 금 신상을 만든 목적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기원전 594/593년 경이 아닌가 한다. 그 까닭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에 바벨론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렘 51:59), 이는 느브갓네살이 "각 도 모든 관원"(단 3:2)들로 와서 자기의 금 신상에게 경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당시 바벨론의 봉신(封臣)이었던 시드기야가 이를 계기로 바벨론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2장의 꿈에 본 신상의 사건 후에 있었음에 틀림 없으며 4장의 정신 이상이 된 사건보다는 먼저 있었음이 확실하다.


  3장의 금 신상을 만든 때 쯤에 느브갓네살은 대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승승장구의 기록을 자랑하며 자신감(自信感)에 넘쳐 있었음에 틀림 없다. 다니엘 2장의 사건에서 받은 인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위대함과 그의 왕국의 확고부동함을 과시하고 공인받기를 바란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기초로 그가 금 신상을 세운 몇가지 가능한 이유를 들어 본다.



     가. 만세(萬歲) 왕국을 위한 몸부림


     1. 그가 만든 금 신상은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각종 쇠붙이로 이루어진 신상에 대한 불만을 충족시키고 해석이 가져다 준 불안을 일소하려는 보완(補完)이요, 대안(代案)일 수가 있다. 금으로 확인된 그의 나라가 목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선언은 불쾌하고 불만스러운 것이다. 그는 이제 머리 뿐만 아니라, 전신을 금으로 함으로써 앞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의 뇌리를 맴도는 흉몽(凶夢)을 길몽(吉夢)으로 바꾸고 화액(禍厄)을 제해 보려는 화려한 푸닥거리를 벌인 것이다.



  2. 느브갓네살은 그가 꿈꾸고 있는 통일된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함에 있어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려 했으며 이 일을 위해 하나로 통일된 강력한 종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 후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통일된 대제국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황제예배(emperor worship)를 강요하고 그리스도교를 끈질기게 핍박한 것과도 일치한다. 또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가 분열된 동서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키기 위해 533년 로마 교회의 감독을 세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여 교황이 되게 한 것이라든지 신성 로마제국의 촬스 5세가 사분오열된 유럽의 통일된 대제국을 재건하려는 일념으로 방금 일어나고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압하고 교황권을 뒷받침한 까닭도 그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시도가 강행되어 국교(國敎) 이외의 신앙을 일체 용납지 않은 것이며, 프랑스가 개혁파를 핍박한 것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한 것등은 모두 같은 조치였다. 이른 바 현명한 듯한 통치자들이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를 이상으로 하여 종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정교(政敎)일치의 정책을 취할 때는 언제나 유혈의 핍박이 뒤따랐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짓밟혔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13:14,15)에 예언된 세상의 마지막 파멸을 가져 올 요인이며 그 결과가 짐승의 표, 곧 일요일 휴업령인 것이다. 레바논에서 발견된 느브갓네살의 고대 기념 비명(碑銘)에는 이런 인상깊은 문귀가 적혀있다.


  「이전의 어느 왕도 성취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다) 아무도 혼란을 일으키지못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나의 왕다운 상(像)을 영원하도록 세웠노라.」


   3. 사람은 사람 스스로를 여러가지 양상으로 신격화(神格化)하려는 심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사단의 유혹에 따라 범죄가 시작되었다.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은 자아 숭배의 전형이다. 사람 모양의 금 신상을 경배하려는 경향은 범죄한 인간의 빗나간 신앙심을 심리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대용물이 되어 왔다.


  이러한 의도는 정치가는 물론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교육자, 빗나간 다수의 종교인들에게 매력있는 일이 되어왔다. 황제 숭배, 위인(偉人) 숭배, 소련의 레닌 숭배,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로마 카톨릭의 성자(聖者)숭배, 스포츠계와 연예계의 스타 숭배, 이 모든 것들이 사람 스스로가 사람을 신격화하려는 타락한 본성의 노골적인 발로(發露)인 것이다. 하나님을 첫째로 삼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람 자신이 신이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눅 14:25-27, 마 10:37, 38).



   4. 금 신상이 세워진 것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단의 시도였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뜨리는데 성공하는 한편 자신의 지상 대리자인 느브갓네살과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그 백성을 포로로 함으로써 승리가 확정된 듯한 순간에 앞서 2장의 사건으로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공연히 그분 앞에 굴복함으로써 일대 위기를 겪는다. 특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히브리 포로들을 그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그의 왕국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이리하여 이들을 우상숭배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금 신상 제막식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저의(底意)는 제막식 벽두에 들어났다(3:7-12).


  이 의식에 왜 다니엘은 참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몇 가지 가능한 추측은 있을 수 있다. 즉, 왕 자신이 앞서 2장의 사건을 통해,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한 우상숭배를 다시 공식화하고 확실함을 고백한 꿈의 진상과 해석에 역행하는 처사를 단행함에 있어, 거북스러운 입장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다니엘을 어떠한 구실을 주어 불참시킬 수 있음직하다. 국사를 위한 먼 여행, 혹은 와병, 또는 궁전 당직(當職) 근무 등도 있을 수 있는 여건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참석했더라면 그의 세 친구와 같은 길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 고고학의 새로운


  근년에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점토판 가운데서 발견되어 출판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年代記)는, 다니엘서 3장의 배경 이해에 새로운 빛으로 풀이되고 있다.



   1. 이 연대기가 알려지기까지는, 그토록 유능한 전제군주였던 느브갓네살의 통치는 평탄했던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근년에 판독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아카드(註: 신바빌로니아를 가리킴)왕 제10년 그의 땅에서, 제9월로부터제10월까지 아카드의 반역이 있었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그 자신의 군대 가운데 다수를 죽였다. 그 자신의 손으로 그의 원수를 사로 잡았다.」



  이토록 너무나 긴박하여 대왕 자신이 무기를 들고 백병전을 해야했던 이 반역은 느브갓네살의 재위 10년 제9월과 제10월이라 했는데, 이는 기원전 595년 12월과 594년 1월 쯤에 해당된다.



   2. 그런데 예레미야 51장 59-64절을 보면,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 째에 바벨론을 방문한 사건이 나온다. 방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봉신왕(封臣王)이었던 그는 종주국에 어떤 형식이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갔음은 있음직하다. 유다가 최후로 망한 것은 시드기야 11년째였으므로, 아직은 그가 바벨론을 반역하지 않은 때였다. 가을부터 시작되는 유대의 민력으로 계산하면, 시드기야 4년은 기원전 594년 가을에 시작된다.



   3. 그렇다면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방문한 것은 느브갓네살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지 1년이 채 못되는 때로, 그의 바벨론 방문이 느브갓네살 재위 10년째에 일어난 반역과 필경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본국에서 일어난 반역에 자극을 받아, 다른 종속국들이 덩달아 반역하지 못하도록 충성을 재다짐시키려 했을 것이다.


   4.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때, 이때 일어난 반역을 계기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왕위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하고 그의 제국을 영구히 보존하게 함으로써, 그렇잖아도 불안을 주는 다니엘서 2 장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각 계급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기 위해, 3장의 금 신상을 세우고 그 제막식에 그들을 참석시켜,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단 3:2).



   5. 3장의 금 신상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고고학적 사실이 바벨론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 각주(角柱) 기념비가 읽혀짐으로써 나타났다. 이 점토 각주 (角柱) 기념비의 다섯 면 위에는 다섯 단(段)으로 된 기록이 쓰여 있는데, 마지막 두 단에는 느브갓네살이 친히 임명하는 50명 이상의 각계 각층의 공무원들의 이름과 직위가 또박 또박 적혀 있다(상당 부분은 훼손됨).


  "나는 (다음)의 궁중 관리들을 나의 공식적인 수행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여 (그들의) 의무를수행하도록 임명한다"는 서언을 시작으로 관직과 명단이 쓰여 있다.


  그 가운데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불태웠던 시위대 장관 느브사라단에 해당하는 이름이 맨 먼저 나오고(왕하 28:8, 렘 39:13), 역시 이 때 참전했던 고위 방백인 네르갈사레셀에 해당되는 이름도 나타난다(렘 39:13).



   6. 만약 느브갓네살이 이렇게 많은 고위 관리를 한꺼번에 새로이 임명한 것이 그의 재위 10년째에 있었던 반역의 결과로 불충성한 자들을 숙청(肅淸)한 까닭이라면, 다니엘 3장의 사건으로 오히려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아"진 히브리의 세 젊은이의 이름들도 나올 법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단 3:30).



   7. 이러한 관심을 두고 이 명단을 살펴 보면, 제일단 맨 마지막에 수석 상무관(商務官; chief trader)의 직책을 가진 "하누누"(Hanunu)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이름은 바벨론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서방 즉 페니키아나 이스라엘 계통의 이름인 것이다. 이 이름은 세 젊은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냐"(Hannaniah; 단 3:30)의 이름과 어학적으로 밀접히 일치하고 있다.



   8. 또 다른 이름은 아벳느고(Abed-Nego)의 이름인데, "아벳"(abed)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종"(servant)을 뜻하는데, 이 말이 고대 아카드어(Akkadian)로는 "바르둠"(wardum)이었고 신바빌로니아 당시에는 앞의 글자가 떨어져나가 "아르두"(ardu)가 되었다. 그래서 "아벳-느고"를 바벨론식으로 부르면 "아르디-나부"(Ardi-Nabu)가 되는데, 바로 이 이름이 바벨론의 왕 세자(世子)인 아멜-마르둑(Amel-Marduk)의 비서관의 이름으로 점토 각주에 쓰여 있다.



   9. 만약 이 비서관이 참으로 다니엘서 3장의 그 아벳느고라면, 열왕기하 25장 27, 28절의 기사가 새로운 이해를 받게 된다. 즉 아버지 느브갓네살을 이어 왕위에 오른 아멜-마르둑(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불리움)이 "즉위한 원년

12월 27일에 (포로되어 온) 유다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한 후대(厚待)가, 아마도 그의 비서관이었던 다니엘의 친구 아벳느고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나머지 한 사람인 "메삭"(Meshak) 혹은 "미사엘"(Mishael)의 이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이 "미사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떼어버리고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의 이름을 대신 넣었을 경우, 그 점토 각주의 제일단에 나와 있는 궁전의 여자 노예들의 감독자 이름인 무샬림-마르둑(Mushallim-Marduk)에 가깝게도 여겨진다.

 



                              3. 강요되는 예배- 우상 숭배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전성기의 느브갓네살이 반포한 명령에 따라, 바벨론 전역으로부터 각계 각층의 지도자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신상 앞에서"게 되었다(3:3). 그 가운데 2장의 사건 후에 지방 행정의 고관이 된 세 친구도 참석했다(2:49).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고, 돈으로 고용된 관인(官認) 반포자에 의해 예배가 명령된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들에게 명하시나니,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 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 3:4-6).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 요청은 얼마나 판이한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 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예배는 성질상 명령될 수 없고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믿음을 명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배는 의지의 최고 결정으로 심령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자유 의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도 참된 예배도 있을 수 없다. 금 신상의 예배에는 왕권(王權)과 관권(官權)이 뒷받침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악의 악용(惡用)이다.


  음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천사들에 의해 불리운 것이요(욥 38:7),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 있는 방편이다(시 150편). 이토록 숭고하고 유력한 음악이 타락과 함께 퇴폐적인 오락의 방편으로, 전쟁의 수단으로, 거짓 신앙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악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을 때, 그것은 쉽사리 사단의 점유물이 되고 만다.


  이제 이 금 신상에게 예배하라는 명령은 이미 종교와 양심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거절한다면 그것은 왕의 명령에 대한 항명(抗命)이요, 국가의 권위에 대한 반역(反逆)이 되는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되어 법적으로 응징될 것이었다. 또한 바벨론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바벨론의 종교와 바벨론의 신에 대한 모독(冒瀆)으로 간주되어 가장 혹독한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바벨론 신민(臣民)의 번영과 국익(國益)을 증진시키기 위해 의도된 이러한 범국민적인 염원을 저버리는 것은 곧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낙인 찍혀져 대중의 분노를 면치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4. 풀무 불의    시련과   승리


  가. 촛점이 된 세 젊은이

 

  이러한 분위기와 상황에서 감히 신상을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벨론 국립 관현악단의 장엄한 음악에 맞춰 느브갓네살 자신을 비롯하여 참집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격식을 갖추어 엎드렸으나, 오직 히브리의 세 젊은이만이 그 대로 우뚝 서 있었다. 이들의 반역적인 행위가 이러한 일이 있을 줄로 예기했던 바벨론의 지배 계급인 갈대아인 몇 명에 의해 즉시 왕에게 고소되었다(3:8-13).


  그 날 그 행사의 촛점은 금 신상이었으며, 허다한 참배자들 가운데 유야무야한 이들 세 히브리인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들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갑자기 이들 세 젊은이가 이날 행사의 실제적인 표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 그리고 이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적대자들이 최고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금 신상이 아니었으며, 다수의 일반 참배자도 아니었고, 바로 참 하나님을 대표하는 히브리 청년들, 특히 그들의 의지가 표현되는 무릎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신에게도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롬 11:3,4), 어떠한 환경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하늘의 영웅들이기 때문이다(삿 7:5-7). 이토록 장엄한 자리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감히 왕의 직접적인 명령을 어긴 자들에 대한 왕의 분노는 격발되었으나, 히브리 포로들에 관해 이전에 받았던 인상과(1:19-21), 인연 때문에(2:48, 49)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바야흐로 제막식의 촛점은 눈을 어리게 하는 치솟은 금 신상으로부터,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벧전 1:7) 신앙으로 새겨진 하나님 형상의 세 젊은이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나. 진정한 신앙고백

 

  「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3:16, 17).



    1. 뜻을 정한 젊은이들

 

  풀무처럼 달아 오른 분노를 억누르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 앞에서, 세 친구가 말한 침착한 대답이다.


  "왕이시여, 이 문제에 대하여는 저희가 달리 드릴 말씀도 없고 달리 취할 행동도 없습니다. 지금 취한 이 처신이 확고하고도 최종적인 것입니다. 왕이시여, 왕의 명령을 좇아 우상에게 경배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는 토론이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을 빌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내용이 될 것이다. 왕 앞에서 이토록 담담하게 최후의 진술을 하고 있는 세 젊은이의 심중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뿌리 깊은 감회가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시여, 우리가 이 어린 나이들에 부모님 곁 정든 고국에 살지 못하고 이처럼 타향 만리 이국 땅에 포로가 되어 와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며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나라의 속담에도 있듯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슬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렘 31:29).


  젊은 꿈이 한껏 부푼 나이에 정든 고향, 그리운 부모님과 가족의 곁을 떠나 이 곳으로 잡혀 오던 그 괴롭고 가장 길었던 여름, 우리 몇 사람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결심을 했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더욱 떳떳하고 후회가 없는 길임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와 우리 어른들의 경험에서 충분히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 뼈 아픈 민족의 비극을 다시는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이 비극은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극의 막을 내려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첫번째 계명입니다(출 20:3). 우리의 패역한 조상들처럼 또 다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계명입니다(출 20:4, 5).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뿐만 아니라 극렬히 타는 풀무불을 내세우며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3:15)고 고함치는 왕에게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내시리이다"(3:17). 히브리 젊은이들은 100여년전 이러한 때를 위한 이사야 선지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구속자임이라] (이사야 43:1-3).



       2. 영원한 신앙 고백

 

  풀무불이면 모든 것을 끝장내리라고 생각했던 왕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왕보다, 바벨론의 신보다, 더 높고 능력이 더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선언함으로써 바벨론의 권위는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것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잇는 세 젊은이의 다음 번 선언은 참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의 극치였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아옵소서"(But if not, be it known to you, O king).


  이 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왕에게서나 풀무불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서 그냥 죽게 되더라도, 풀무불에서 사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길이어서, 설사 우리가 죽게 된다 해도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조건 없는 절대 순종의 고상한 모본으로 결과를 묻지 않고 부르심에 응한 아브라함의 신앙(히 11:8)을 방불하게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일 을 해 주시면"(If , then ) "내가 을 하겠나이다"라는 팥죽 장사하던 야곱의 실리주의(實利主義)적인 조건부 신앙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처럼(수 24:14, 15),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시 57:7, 시 108편)라고 부르짖어야 하겠다. 그리고 에스라의 고백처럼(라 7:10),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 10:10) 신앙 경험이 절실하다.


  동방 교회 최대의 설교자로 불리우는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 407)은 젊었을 때 황제 앞에 서서 그의 신앙을 취소하라는 심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때에 이러한 문답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고집한다면, 나는 너를 네 조국으로부터 좇아 내고 말겠다."

"황제 폐하,그러실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내 아버지(하나님)의 땅이 올시다."

"그렇다면 나는 네 재산을 몰수해 버리겠다."

"그렇게도 못하십니다. 제 재산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럴진대, 내 너를 말조차 나눌 친구 하나 없는 곳으로 쫓아 보내겠다."

"그것도 안 되십니다. 제게는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나의 형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모실 것입니다."

 

  황제는 분통이 나서 소리쳤다.

"네 생명을 끊어 버리겠다." 

"그것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제 생명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 어있습니다."

 

   세 젊은이의 모본에서 우리는 장차 같은 경험을 가지게 될 남은 백성의 특성을 본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일찌기 패해 본 적이 없고 정복하지 못한 나라가 없으며 굴복시키지 못한 왕이 없는 느브갓네살은 이제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용사들을 대한 것이다. 일찌기 세 젊은이들의 이름을 우상숭배에 맞춰 고칠 수는 있었어도 그들의 신앙은 바꿀 수가 없었다.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 불도 왕의 분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세 젊은이는 옷을 입은 채 결박되어 급히 불 속에 던져졌는데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세 사람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3:22, 23).



   다. 불 속의 하나님

                  

  가시지 않는 분으로 씨근거리던 왕은 차라리 감탄해야 마땅한 용기로 최후까지 그토록 당돌하던 세 젊은이의 결말을 확인하기 위해 멀찌감치서 풀무의 아구를 통해 내부를 드려다 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갑자기 왕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며 보좌관들을 불렀다. 분명히 세 사람을 결박해서 던졌는데 어찌된 일인가. 왕은 부르짖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 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단 3:25).



  우선 결박된 채 던져진 세 젊은이가 불 속에서 자유롭게 활보를 하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기적 외에 더욱 경악할만한 기적은 신의 아들로 보이는 거룩한 존재 곧 네째가 거기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불이시다(히 12:29, 신 4:24). 하나님께서는 불꽃 속, 죽음을 불사하고 불 속으로 뛰어든 그분의 사랑스러운 종들과 함께 그 분의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불 속의 현현(顯現; theophany)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주자주 불로서 그 분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신다.



불 속에 임재하심(presence) 출 3:1-4

불로 갈 길을 나타내심(pathway) 출 13:21

불 속에서 교훈하심(percepts) 출 19:16-18

불로 징벌하심(punishment) 창 19:23, 24 레 10:2

불로 능력을 드러내심(power) 왕상 18:24

가운데서 보호하심(protection) 단 3:25

불로 이루어질 예언(prophecy) 살후 1:6-10, 벧후 3:10, 눅 17:29



  느브갓네살은 바로 불 속에 나타나셔서(3:25), 불 속에서 그 종들을 보호하시고(3:25), 불로 징벌하시며(3:22), 불로 능력을 나타내신(3:27) 하나님을 체험했으며 그 하나님을 서슴치 않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3:26)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세 젊은이의 고백대로 그것이 그분의 섭리일진대 그들을 능히 불 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심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함을 실증했다(히 11:33). 본 교단의 고고학의 권위자인 시그프리드 호온(Siegfried H. Horn) 박사는 당시의 풀무를 상기시켜 주는 생생한 배경을 아래와 같이 들려 주고 있다.



  [바벨론 근방에는 벽돌 가마들이 있다. 최근에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벽돌 가마들이 뿜어내는 연기로 검게 뒤덮인 하늘을 보았다. 나와 동행한 친구 하나가 나를 그 중 한 벽돌가마로 안내하여 주어서 나는 그런 벽돌 가마의 구조와 불태우는 방법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들 벽돌 가마가 벽돌로 지은 원추형(쇠뿔모양)의 구조임을 발견하였는데 안쪽에는 굽지 않은 벽돌들을 굽기 위해 줄줄히 쌓아 놓은 것을 보았다. 벽 한 쪽에는 아구가 있었는데 나는 한 사람이 맨 손으로 불꽃을 계속 돋우기 위해 원유(原油)와 겨를 섞은 것을 퍼 넣는 모습을 보았다. 때때로 그 사람은 앞 이마의 땀을 씻기 위해 쉬는 때 에 우리는 이 아구를 통해 벽돌 가마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강렬한 불꽃이 벽돌을 달구어 백열광을 내게 하는 것과 실제로는 어떤 곳에서는 진흙이 녹아내려 흐르게 하기까지 했다.


  나는 느브갓네살이 이러한 벽돌 가마를 써서 신실한 세 히브리인을 벌하려 했었음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이락에서 벽돌 가마를 달구는 방법을 보고난 뒤 나는 어떻게 벽돌 가마를 평시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메소포타미아의 노천(露天) 유전(油田)들에서 언제나 넉넉히 공급되는 원유를 좀 더 퍼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절할 것인가 불탈 것인가"(bow or burn)의 갈림길에서 세 젊은이가 내린 결정은 하나님과 신앙과 순종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優先)임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영국 성공회의 목사로 1차 대전 당시 군목으로 종군한 스튜데르트케네디 목사는 프랑스의 참호에서 그의 아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나는 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기도 드림에 있어 배우기를 바라는 첫번째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안전히 지켜 주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용감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가 해야 할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를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드리기를 바란다. 사는가 죽는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다. 죽은 아버지도 여전히 아버지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떳떳지 못한 아버지는 말하기조차 꺼려지는 두려운 것이다. 나는 너나 네 엄마가 나의 안전을 어느 정도라도 포함시키기를 원하는 줄로 안다. 좋다, 그렇게 하려므나. 그렇더라도 그 문제는 나중에 항상 나중에 두거라. 왜냐하면 그건 정말로 그토록 절실한게 아니거든.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누구든지 기도에 있어서 평화시에나 전쟁시에라도 먼저 것을 먼저 두기를 배워야 한다. 내가 믿기로는 그 점이 바로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점이거든.]



  이 어려운 교훈을 히브리 세 젊은이는 행동으로 옮겼으며 그 결과는 느브갓네살의 고백으로 나타났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 3:28).


   4. 교훈과 의의


   가. 역전(逆轉)된 사람의 노(怒)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시 76:10-12).


  느살의 금 신상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부질없고 어리석은 분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역사의 엄연한 교훈이다.


  중세기 동안 교황권의 발판이 되었고 혁명을 전후하여 그토록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영적으로 애굽"이(계 11:8) 됐던 프랑스가 계획에도 없었던 이집트를 원정하여 1799년 그 유명한 로제타석을 발견해냄으로써 성서 고고학을 탄생시켜 성서의 권위를 드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도 그 실례 가운데 하나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혼란한 세상에 살면서 만사가 사람의 의지와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듯하여 신자들마저도 하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 우리는 3장의 풀무불 사건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선명한 대답이 "메시야 시편"(Messianic Psalms) 가운데 하나인 시편 2편이다. 금 신상을 만들고 야단법석하는 3장의 느브갓네살처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통치를 대적하기 위해 소동하는 세상을 향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시 2:1)로 시작되는 이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대응 태세를 본다.



  보좌에 앉으셔서, 잠잠히 주시하시는 하나님 (2:1-3)

  인간의 부질 없는 처사를 보시고, 어이 없어 웃으시는 하나님 (2:4)

  마침내 입을 열어 결의를 밝히시는 하나님 (1:5)

  세우신 뜻을 강력히 집행하시고, 적대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2:6-9)

  마침내 땅에 임하셔서 통치권을 장악하시는 하나님 (2:6-9)

  잠잠하여 지혜롭게 그 분의 뜻과 교훈을 좇아 살라고 권고하시는

      하나님 (2:10-11)

  행한 바에 따라 구원과 파멸을 공의롭게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 (2:12)



  느브갓네살은 금 신상과 풀무불의 경험에서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알현(謁見)했으며 그 교훈을 터득했다.



   나. 진정한 종교자유의 원칙

 

  신앙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기능이기 때문에 결코 강제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까닭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고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는 하와를 힘으로 저지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느브갓네살은 그들이 가진 통치권을 남용하여 종교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해 온 고금(古今)의 수많은 국가와 위정자들을 대표하고 있다.



 

    다. 바벨론에 보내신 두번째 기별


   1. 둘째 천사의 기별-바벨론 종교의 붕괴

 

  1. 2장의 사건을 통하여 느브갓네살과 그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이전에 가졌던 절대적인 신뢰를 상실했다. 동시에 다니엘을 통해 그들의 신 마르둑보다 높고 위대한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2:47).


  ② 이제 이렇게 추락된 바벨론의 우상 종교의 배후 세력인 사단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금 신상을 만들어 온 세상이 경배하게 함으로 전번의 세력을 만회(挽回)하려 했으나 차제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쇄하고 철저한 개혁을 촉구하는 두번째 기별을 바벨론에 선포하는 계기로 삼으셨다.


  ③ 3장에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세계적인 영역을 대표하는 치리자들을 소집시켜 놓고 국가의 힘과 왕권을 동원하여 그들 모두를 바벨론의 우상숭배에 강제로 참여시켰다. 그러나 죽음을 불사하고 금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겠다고 버틴 히브리 세 젊은이에 의해 다시 한번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신앙과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종교는 정면으로 맞부딛혀 예배가 주체가 된 선악의 대 쟁투가 재연된다.


  ④ 그 결과는 2장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전적인 승리로 끝나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3:26)으로 높이 들리시고 "이 같이 구원할 다른 신이 없는"(3:29)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만방에 선포되었다. 동시에 우상숭배를 기초로 한 바벨론의 종교는 다시 한번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그 위신은 세상의 이목(耳目)이 집중된 가운데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장엄하고 휘황찬란한 금 신상은 사람들의 시야와 관심에서 사라지고 세 젊은이의 하나님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금 신상과 함께 바벨론의 우상종교는 붕괴된 것이다.


  ⑤ 이상의 사실이 바벨론에 보내신 하나님의 두번째 기별로 계시록에 기록된 둘째 천사의 기별의 내용이기도 하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계 14:8). 이 선언대로 열국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음행의 포도주를 먹이던 바벨론의 거짓 종교제도가 기초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그 위에 세워진 바벨론 제국 자체가 붕궤되기 시작한 것이다.



   2. 고대 바벨론과 현대 바벨론

 

  ① 우상숭배는 고대 바벨론 종교의 특징이었음 같이 현대 바벨론인 교황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② 두라 평지에 세운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이 화려장엄(華麗莊嚴)했고 그 경배의식이 지극히 인상적이어서 사람들을 위압하고 어리둥절하게 했듯이 카톨릭의 예배도 배경을 같이하고 있다.


  ③ 바벨론의 우상숭배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세계적으로 범위를 확대했듯이 교황권도 전세계를 목표로 그 영향권을 확장하고 있다.


  과연 교황권은 고대 바벨론처럼 "모든 나라를 그 음행의 포도주로 먹이"고 있다(계 14:8).


  ④ 고대 바벨론은 국가와 종교를 일치시켜 국권으로 종교를 뒷받침하고 이를 배경으로 그들의 종교를 강제하였다. 이러한 일이 교황권에 의하여 중세기 역사에서 이미 시행되었고 마지막 날에 다시 재연될 것이다(계 13:15-17).


  ⑤ 고대 바벨론이 그들의 종교에 대한 절대 복종의 표(mark)로 우상을 세워 국가의 힘을 빌어 강제로 참배하게 했듯이 교항권은 그 권위의 상징인 일요일을 "짐승의 표"(the mark of the beast)로 삼아 정권을 동원하여 일요일 준수를 법적으로 강요하는 일을 행할 것이다(계 13:15-17).


  ⑥ 바벨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세워진 금 신상을 일시에 다 함께 경배하도록 명령함과 동시에 거절하는 자는 시한부(時限附)로 죽음에 넘기웠듯이 교황권은 짐승의 표를 강요하고 이를 강행하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어 사형으로 위협할 것이다(계 13:15). 두라 평지에서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위만을 인정한 세 젊은이가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었듯이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절하고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는 남은 백성(계 12:17)은 간섭과 핍박의 초점이 될 것이다.



 


   3. 다니엘 3장과  계시록 13장의 우상

 

  ① 다니엘서 3장은 계시록 13장의 구약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도 흡사할 뿐더러 사건의 경과도 같은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다. 숫자적인 상징에 있어서도 금 신상의 높이와 폭이 각각 60 규빗, 6 규빗으로 세워졌고 이를 위해 6개의 주요 악기가 언급되어 있다(3:5). 계시록 13장에서 만들어 지는 우상의 의미와 목적이 다니엘서 3장의 우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계시록 13장에서 새끼양으로 표상된 미국이 죽게 되었다가 회복된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다니엘서 3장에서 바벨론의 거짓된 우상 종교가 국가의 힘을 빌어 백성들의 신앙과 양심을 강제하고자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이러한 과정이 교황권과 미국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재연되었음을 뜻한다.



 



  ③ 히브리 세 젊은이가 금 신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양심이나 종교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왕명을 거역함으로써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고 바벨론의 국리(國利)와 일반 백성의 민복(民福)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행동으로 몰아 붙였다. 이러한 상황이 계시록 13장에 기록된 짐승의 우상에게 굴복하기를 거절한 자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라. 구원에  능하신  나님

 

  3장의 사건을 통하여 느브갓네살 자신이 확신하고 고백한 진리는 세 젊은이가 섬기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3:26)이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신 분으로 "이 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3:29)는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그 분의 백성을 능히 구원하시는 자상하고도 능력있는 분이심이 입증되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히 2:18). 우리를 능히 보호하사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흠 없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서게 하실 분이시다(유 24).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이상을 능히 넘치도록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 3:20).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킬수 있는 분이시다(딤후 1:12). 만물을 능히 복종시킬 수 있는 분이시다(빌 3:21).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1.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 돌아서지 않겠네.


2.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사람 날 몰라 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뒤 돌아서지 않겠네.


3.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 돌아서지 않겠네.

 


 

                                                                                                 출처 블로그 > 새하늘
                                                                                                 원본 http://blog.naver.com/im1155/40015574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