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역사적
배경
다니엘서의 기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본 총론에서는, 우선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기원전 701년에는
히스기야왕과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남방 유다를 거의 넘어 뜨릴 뻔 했으며, 바로 다니엘 당시의 국제 정세를 초래케 한 앗시리아와, 다니엘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의 역사적 배경을, 왕조 중심으로 약술하고, 이를 다니엘서의 상황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 밖에 메디아(메대), 페르샤(바사), 그리스(헬라), 로마등은 그 상황이 나타날 때마다
약술하고자 한다.
가.앗시리아(Assyria)
성경에는 앗수르(Asshur)로 불리운 앗시리아는, 노아의 아들 셈의 한 아들인
앗수르(Asshur)를 조상으로 하고 있다(창 10:22). 창세기 10장 11,12절에는 이들 앗시리아의 도시들이, 함의 손자인 니므롯의 영향
아래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미 5:6).
지리학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하면서, 기원전 19세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과 세계
제패(制覇)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여, 사르곤 1세(SargonⅠ c.1780 BC)와 삼시-아다드 1세(Shamshi-AdadⅠ
c.1749-1717BC) 때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까지 세력을 뻗었다.
그 후 호리족(the Hurrians)의 나라인 미타니(Mitanni) 와 헷족속의 나라인
히타이트(the Hittites) 제국과 생존을 위해 각축하면서, 마침내 아다드-니라리
1세(Adad-nirari Ⅰ. c.1306-1274 BC), 투쿨티-니누르타 1세
(Tukulti-NinurtaⅠ c.1244-1207 BC)등의 위세로, 대제국의 기틀이 놓였다.
아래에 대표적인 왕들을 열거하고, 성경의 역사와 연관시키고자
한다.
▷티글랏-필레셀 1세(Tiglath-PileserⅠ 1113-1074 BC): 페르샤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한 위대한 전사(戰士)로, 앗시리아를 중동(中東)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티그랏필레셀이 죽은 뒤, 몇 명의 허약한
왕들이 뒤를 이었으나, 약 150년 이후부터는 고대 세계의 최강국이 되어, 거의 3세기 동안(933-612 BC) 세계역사를 주름
잡았다. 전성기의 앗시리아 영토는,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소아시아의 대부분, 시리아와 팔레스틴 일대, 때로는 이집트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히브리인들과도 접촉되어 성경의 여러 왕들, 즉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호세야등 북방 이스라엘의 왕들과 접촉했고, 아사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등 남방 유다의 왕들과도 맞서게 된 것이다.
▷아수르-단 2세(Ashur-dan Ⅱ 993-910 BC): 전성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전사로, 거의 매년 정복에 나서 피를 강 같이 흘렸고 시체를 산 같이 쌓았다고
전한다.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 859-824 BC): 북방 이스라엘의 아합과 예후의
동시대 왕으로, 서부 원정시인 기원전 853년에는 시리아의 연합군들과도 접전했는데, 이 때 아합은 병거 2천승과 보병 1만으로 연합군을 도와,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2년 후에는 예후가 싸움을 포기하고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디어 있는 모습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첨비(方尖碑)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 810-782 BC): 서부 원정에 나서
히타이트, 페니키아, 다메섹등을 복종시켰고, 북방 이스라엘의 요아스(798-78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에 요나 선지자가 요나서의 기별을
가지고 수도 니느웨에 가서 경고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그 후 국세가 전만 못하여 어느 정도 기울고 있었는데, 이 틈에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793-753 BC)는 강력한 국방 정책과 경제 부흥을 꾀하여 국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티글랏필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745-727 BC): 구약성경에
불(Pul)로 불리우는 앗시리아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므나헴(752-74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왕하 15:19), 베가(742-740 BC)때에는 북방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북방 영토를 점유한 후, 앗시리아의 므깃도
도(道)에 예속시켜 버리고 백성들을 이산(離散)시켰다(대상 5:26).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 요청으로, 기원전 732년 다메섹을 치고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으며(왕하
16:7-9), 북방 이스라엘의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732-722 BC)를 왕으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6절과 8장 4절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다.
▷살만에셀 5세 (Shalmaneser Ⅴ·727-722 BC): 이
때 이집트는 북방 이스라엘의 호세아를 꼬득여서 앗시리아에 반역하도록 조장하자,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기원전 722년 그가 죽기 직전 이를 함락하여 이스라엘을 멸망 시켰다(왕하 17:1-6).
▷사르곤 2세(Sargon Ⅱ 722-705 BC): 그는 아마 찬탈자로 왕위에 올랐는데, 북방 이스라엘 민족을 멀리 국외로 추방 식민(植民)했으며, 코르사밧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 한편, 반역한 국가들은 가차없이 징벌했다(사20:1).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기원전 689년에는 바벨론성을 짓밟았다. 기원전 701년에는 서부 원정에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다의 도시들을 유린했다. 후에 재침한 산헤립은 유다를 멸망 시키려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권면으로 힘을 얻은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18만 5천의 군사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왕하 19장, 대하 32장, 사 37장).
후에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
▷에살핫돈(Esarhaddon 681-669 BC): 그는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은 산헤립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사37:38) 기원전 675년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으나,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반역으로 보전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7 BC): 앗시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최후의 위대한 왕으로, 이집트를 재차 정복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테베를 노략하는등 외정(外征)에 대성했다.
특히 고대 세계 최대의 왕립도서관을 세워, 고대의 각종 문헌을 수집하여 소장한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1853년 12월 22일밤 영국 사람 랏삼(Hormuzd Rassam)등에 의해 니느웨가 확인되고 이 도서관이 발굴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문서 가운데, 성경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흡사한 점토판들이 발견되었음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1. 아수르바니팔 대왕 이후 그의 두 아들이 몇 년동안 다스렸으나, 이미 대대적인
반역을 시작한 주변의 국가들을 제압할만한 역량을 잃은 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특히 기원전 626년 바벨론은,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영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도전했으며, 메대도
시악사레스(Cyaxares)의 영도 아래 기원전 614년 앗수르(Ashur)성을 함락시키고, 612년에는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대와
스키디아(Scythians) 연합군에 의해 3개월 간 포위된 끝에, 스바냐와(습 2:13-15)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나 3:1-3)
처절하게 함락되었으며,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버티려던 신-사르-이슈쿤(Sin-shar-ishkun . 626?-612)왕도 함께
죽었다.
2. 니느웨가 함락된 뒤 앗시리아의 유민(遺民)들은
앗시리아의 최후의 통치자인 아수르-우발릿 2세(Ashur-uballit Ⅱ 612-609? BC)의 지도
아래, 유프라테스를 건너 하란(Harran)을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재기(再起)를 꿈꾸었다. 그러나 610년 나보포랏살은,
동맹국 스키디아의 지원을 받으며 또다시 하란을 점령했다.
3. 때마침 이집트에서 삼틱 1세(PsamtikⅠ663-609 BC)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느고 2세(Necho Ⅱ, 609-594 BC)가 왕위에 오른 즉시, 앗시리아의 진군(殄軍)을 도와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북상(北上)했다(왕하
23:29, 대하 35:21).
때에 재위 31년을 맞이한 유다의 요시아 왕은, 국제정세가 신흥 바빌로니아에 유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친바벨론 정책을 취하여 느고 2세의 이집트 군사를 므깃도 평지에서 맞아 북상을 저지하다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다(왕하 23:29
이하, 대하 35:20-24).
4.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릿 2세를 부추겨 하란을
탈환하려던 느고 2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면서 시리아를 비롯한 팔레스틴 일대를 공략하였으며,
특히 하란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강변의 요충 도시인 칼케미슈에 앗시리아의 진군과 함께 기지를 구축하였다.
5. 그러나 기원전 605년 나이 많고 병약해진 나보포랏살은,
아들 느브갓네살을 보내어 칼케미슈에서 이집트와 역사적인 대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대패하여
팔레스틴에서의 기반을 잃고 본국으로 철수하여, 그 후 다시는 이전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세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렘
46:2). 그리고 앗시리아의 마지막 명맥도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상하던 느고
2세의 손에 요시아가 죽음으로써 야기된 이후의 사태가, 바로 유다의 최후의 역사였으며, 그것이 또한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다.
나. 신바빌로니아(Neo-Babylonia)
1. 세계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바빌로니아를
구분하고 있다. 즉, 기원전 1830년부터 1531년까지 3세기 동안 존속한 바벨론 제 1왕조인
구바빌로니아(the Old Babylonia)와, 그 뒤 천년 후에 같은 자리에서 1세기를 못 넘긴(605-539 BC)느브갓네살의
신(新)바빌로니아(The Neo-Babylonia)로 구분된다. 성경에는 이런 구분이 없이 바벨론(Babylon)으로 불리워져
있다.
노아의 아들인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홍수 후에 중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운 도시인 바벨론(창 10:10, 11:9에는 바벨)은,
그의 권좌가 되었다고 여겨진다(창10:10).
그후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밀려온 아모리(Amorites) 족속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남하하면서,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시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제1왕조를 시작하여 약 3세기(1830-1531 BC)에 걸친 강력한 대제국을 이룩했다.
제1왕조의 11번째 왕인 하무라비(Hammurabi)는, 하무라비 법전으로도 유명하거니와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그전까지는 미미했던 바벨론시를 고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음이, 고고학 발굴에서도
확인되었다. 또한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을 여러 신 위에 뛰어나게 했으며, 그를 위한 신전 에테메난키(Etemenanki)를 고대
세계의 경이가 될 만큼 웅장하게 건립했다.
2. 제1왕조가 망한 뒤에도 바벨론은 계속 고대 세계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다가, 앗시리아 제국 당시에는 봉신(封臣)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반역으로,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기원전 689년 바벨론을 한 때 완전히 파멸시켜 끝장을 내려고까지 했으나, 그 중요성 때문에 곧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626년에 이르러 바벨론의 봉신왕인 나보포랏살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종주국(宗主國) 앗시리아와 전쟁을 시작했으며, 종내에는
메디아와 동맹을 맺고 스키디아의 지원을 얻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앗시리아를 넘어뜨리는데
성공했다.
3.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 이집트 대군과
앗시리아 잔군의 연합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명실공히 근동(近東)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같은 해 서거한
부왕 나보포랏살을 이어 느브갓네살이 등극함으로써, 대제국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의 찬란한 출범이 있게 된다.
이 신바빌로니아가 곧 다니엘서의 주요 배경인 바벨론인
것이다.
4. 성경에 이 바벨론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유다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서 회복된 후 위문사절을 보냈던 므르닥발라단(Merodach-baladan)의 경우였다(사
39:1-8, 대하 32:31, 왕하 20:12-19).
당시 바벨론에서는 갈대아(Chaldean)족의 추장인 므르닥발라단이, 바벨론의 왕으로 나서서
앗시리아에 대항하다가 곤경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팔레스틴의 강력한 반앗시리아 국가인 유다와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자 사절을 파견한
것이었다.
5. 그 후 므르닥발라단은,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와 그 아들 산헤립에게 대패하여, 독립 항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6. 기원전 626년 므르닥발라단의 자손으로, 같은 갈대아족인 나보포랏살이 또 다시 바벨론의 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고, 마침내 성공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대제국 신바빌로니아의 기초를 놓았다.
7.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의 결전에, 아들
느브갓네살을 출전시켜 승리를 거둔지 얼마 후인 그해 8월, 나보포랏살은 재위
21년(626-605 BC)만에 서거함으로써, 같은 해 9월 이집트 접경의 전역(戰役)에서 급히 돌아 온 아들 느브갓네살에 의해 왕위가
계승된다.
느브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들과 역사를 아래에 도표와 함께
요약한다.
▷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Ⅱ· 605-562 BC)
신바빌로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든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칼케미슈 전투에서 느고 2세의 이집트를
이기고, 시리아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이집트 접경까지 이른 기원전 605년 8월에, 서거한 부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한 후 43년
간을 재위했다.
기원전 605년의 팔레스틴 제1차 정복시에, 다니엘을 비롯한 세 친구들을 볼모로 잡아갔고, 기원전 597년에는 반역한 여호야긴과 에스겔 선지자 등 일만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기원전 586년에는 눈먼 시드기야와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파괴했다(왕하
25:8-11).
다니엘서 1장부터 4장까지는, 실제로 느브갓네살 치세 하의 다니엘의 선지자적 경험이 그 내용이 되고 있으며, 예레미야, 에스겔등 동시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수십번 언급되어 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나부(Nabu 신)는 경계(境界)를 지키소서"(May Nabu
protect the boundary)이다.
▷ 아멜 마르둑(Amel-Marduk 562-560 BC):
느브갓네살의 약하고 무능한 아들로, 성경에는 에윌 므로닥(Evil-Merodach)으로 나온다(왕하 25:27-30).
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후, 잡혀온 유다 왕 여호야긴을 포로생활 37년 만에 석방시켰고 후대했음을 본다(렘 52:31-34). 그러나 그의
매형 가운데 하나인 네르갈 샤르우스르에 의해, 재위 2년 만에 살해당하였다.
▷네르갈 샤르우스르(Nergal-sharusur 560-556 BC):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전왕 아멜마르둑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라바쉬 마르둑(Labashi-Marduk 556 BC) 전왕
네르갈 샤르우스르의 어린 아들로, 재위 2개월도 못되어 나보니더스를 추대한 모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나보니더스(Nabonidus 556-539 BC):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아들 벨사살과 함께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이다. 밝혀진 고증(考證)에 의하면,
나보니더스는 본래 하란의 영주(領主) 나부발라쑤 이크비(Nabubalatsu-iqbi)와, 그곳의 월신전(月神殿)의 여제사장
수무아담카(Shumuadamqa)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610년, 메대와 바벨론에 의해 하란이 점령당할 때, 그의 어머니가 느브갓네살의 처첩으로 잡혀 와, 왕의 사랑받는 후궁이 되자, 그의
아들인 나보니더스도 함께 느브갓네살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국사를 맡는 한편, 아마도 느브갓네살의 딸 니토크리스(Nitocris)와 결혼함으로써
사위가 되었다.
이렇다면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나보니더스의 아들인 벨사살은 느브갓네살의 외손자가 되어, 다니엘서 5장 11절의 "왕의 부친"이란 표현이 설명될 수도 있다. 즉
성경상의 히브리어 의미에서, "아버지"는 동시에, "조상" 혹은 "할아버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나보니더스의
어머니가 느브갓네살의 후궁이었으므로, 나보니더스는 의붓 아들이기도 하니까 앞서의 관계가 성립된다.
나보니더스는 기원전 553년 동부 팔레스틴의 원정에 참여하고 있던 중, 신병(身病)으로 레바논에서 요양하게 되어, 같은 해 그의 맏
아들 벨사살에게 왕권을 주어, 동위왕(同位王)이 되게 했다.
기원전 552년 바벨론성에 귀임한 벨사살은, 그의 아버지의 연호(年號)와 이름으로 본토를 다스렸지만, 맹세에 있어서는 부자(父子)의 이름을 함께 써서
그가 동위의 섭정왕(攝政王)임을 분명히 했다.
나보니더스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서북 아라비아를 원정(遠征)하여 오아시스 테마(Tema)를 빼앗아, 거기서 기원전 545년까지 여러
해를 살았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에 의해 바벨론이 함락될 때 남쪽으로 피신했던 나보니더스는, 후에 바벨론에 돌아와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하였으며, 이어 저
멀리 카르마니아(Carmania)의 봉신(封臣)으로 보내졌다고 전한다.
나보니더스는 정치와 군사에는 무관심하였으며 ,오히려 종교와 문화 특히 고고학에 깊은 흥미를 가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 왕위까지
아들에게 물리는 나약한 치세를 했다고 여겨진다.
▷벨사살(Belshazzar 553-539 BC, 14년간 재위)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으로서의 그의 신원이 어떻게 밝혀졌는지는, 전술한 바와
같다.
신병으로 요양중인 부왕의 섭정으로 기원전 553년경에 즉위하여, 14년 후인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 다니엘서 5장의 주연(酒宴) 후에, 침입한 페르샤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보다 상세한 역사적 배경은 5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다.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
1.통일 왕국 시대(1050-931
BC)
기원전 1405년경,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초대 왕으로 취임할 때까지,
약 400년 간은 무질서와 배도(背道)가 특징이 된 사사(士師)시대를 경과한다(삿 17:6, 21:25).
구약 성경에는 초대 왕인 사울이 몇 년 간 재위(在位)했는지를 확실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설교에는 약 40년 간으로 기록되었다.(행13:21)
그 후 다윗이 40년 간을 다스리면서(대상 29:27) 왕국의 확고한 기초가 놓이고, 역시 40년 간 다스린 솔로몬에 이르러(왕상 11:42)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솔로몬의 하나님께 대한 배도와,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20년 간이나 계속된 무리한 건축공사는, 마침내 하나님의 징계와 민심의 분열
,그리고 안팎의 반역을 초래하여, 통일왕국의 기초가 무너지고 만다.
솔로몬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져서, 남쪽은 솔로몬의 어리석고 지모(智謨) 없는 아들 르호보암에 의해 다윗의 혈통이 이어지는 유다 왕국이
섰으며(왕상 12:1-19), 북쪽에는 솔로몬 때에 그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이집트에 망명했던 신하 여로보암이 돌아와 왕이 된 북방 이스라엘
왕국이 섰다(왕상 11:26-40, 12:25-33).
이리하여 사울 때로부터 솔로몬 때까지 계속된 통일 왕국시대는 120년 만에 무너지고, 기원전
931년 남북왕조로 나뉘게 된 것이다.
2. 북방 이스라엘 (931-722
BC)
그 후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에 의해 망하기까지 약 209년 간 20명의 왕이
재위했으나, 한결 같이 모두 악한 왕이었다.
북방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은 계속되어, 엘리야, 엘리사, 요나, 아모스,
호세아등 쟁쟁한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받아, 회개와 개혁의 기별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의 진정한 부흥이나 개혁도 없이, 결국 인내와 자비의
선지자 호세야의 부르짖음을 마지막으로, 그 패역은 죄악의 잔을 채워, 결국 기원전 722년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 3년 만에 앗시리아 군에
함락되고, 백성들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 당하거나 포로되어 감으로써, 북방 이스라엘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왕하
17:3-18)
[북방 왕조에게 내린 멸망은 직접 하늘에서 내린 형벌이었다. 앗수르 사람은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하였다.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예언하기 시작한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대군을 '나의 진노의 막대기 '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사 10:5)고
하셨다.](선지자와 왕, 277)
3. 남방유다(931-586
BC)
남방 유다도 345년 동안
20여명의 왕이 뒤를 이으면서, 패역할 때마다 개혁과 부흥의 기별을 가진 선지자들, 즉 미가, 이사야,
나훔, 하박국, 스바냐, 요엘, 예레미야 등이 때 맞춰 보내졌고, 이따금 아사, 여호사밧,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등 비교적 선한
왕들도 나왔으나, 결국은 패역과 불순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눈물의 선지자 예례미야의 호소도 아랑곳 없이,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나 포로된
끝에, 기원전 586년 8월 마침내 예루살렘이 느브갓네살에게 함락됨으로써, 폐허가 된 채 예언한 대로 70년의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렘
25:11).
바로 이러한 막바지에
접어든 남방 유다의 역사가, 곧 다니엘서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 때문에, 이를 다음의 남북 왕조의
일람과 함께 약술하여, 다니엘서 이해에 도움을 삼고자 한다.
1. 기원전 722년 머리맡의 형제국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는 끔찍한 사실을 목도한 유다는, 이제 앗시리아 침략의 다음
차례가 될 것임을 깨닫고 위기가 감돌았으며, 각성의 기운이 놓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패역한 아버지 아하스를 도와, 왕위에 오르기 전 14년 동안 섭정했던 경험많고 경건하고 현명한 히스기야가, 715년 경
정식으로 즉위한 것이다.
그는 국가의 번영과 독립은
오로지 전국민의 헌신과 신앙개혁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의 통치 초기에 성전을 개축하여 정결하게 하고,
가나안의 잡다한 퇴폐 종교의 의식과 우상을 말끔히 쓸어버렸다(왕하 18:3-6).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까지 포함한 거국적인 대유월절을 지켜,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했다(대하 29:1-31:21).
2. 이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으로 국력이 신장되어 블레셋 평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왕하 18:8), 산업이 크게 부흥되었으며,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했다. 특별히 예루살렘의 포위를 예상하고, 서둘러 굴착한 비상 급수로(給水路)인 실로암 터널의
대수로(大水路)공사는 너무나 유명하다(대하 32:4,30, 왕하 20:20).
3. 드디어 기원전 701년 사르곤왕 2세의 아들
산헤립은, 특별히 유다의 반역을 다스리고 팔레스틴의 여러 다른 나라들의 탈선을 징치(懲治)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쳐내려 와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거의 전국을 유린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급해진 히스기야는, 상당한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왕하 18:13-19:8, 사 36:1-37:8).
산헤립의 1차 원정에 따른 앗시리아의 위협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은, 이사야 선지자의 격려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룻 밤 사이에 18만
5천명의 앗시리아 군사가 진멸됨으로써, 극적인 구원이 이르러 파멸에서 벗어났다(왕하 19:9-36, 대하 32:21, 사
37:9-37).
4. 이렇듯 히스기야의 철두철미한 신앙과 성실로 파멸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남방 유다는, 오히려 숙적 앗시리아가 먼저 망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행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 이후의 왕들인 므낫세(696-641 BC)와 아몬(641-639 BC)은, 또 다시 퇴폐한 우상숭배에 깊숙히
되돌아감으로써, 될성싶던 나라의 운명은 파국(破局)을 향해 치달았다.
특히 히스기야와의 섭정 연수를 합하여 55년 간을 재위한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모든 개혁을 말끔히 뒤엎고, 자신의 아들까지 불에 사루어
제사하는 등, 최선(最善)의 아버지를 가진 최악(最惡)의 아들이 되고 말았다(왕하 21:1-16, 대하 33:1-10). 그가 구국(救國)의
선지자 이사야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는 전설은, 넉넉히 있음직한 일이기도 하다(히11:37).
5. 유다 운명의 최후가 다가온 즈음에, 악한 아버지 아몬왕에게서 또 다시 어리지만 선한 왕 요시아(639-608 BC)가 나타났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었다. 요시아(639-608 BC)는 6세 때, 55년 간을 사악하게 다스린 할아버지 므낫세가 죽고, 8세 때에는 역시
악으로 치닫던 아버지 아몬왕이 궁중의 신복(臣僕)들에게 재위 2년 만에 살해당한 뒤, 8세의 어린 나이로 유다의 16대 왕으로 취임했다(대하
33:21-24,34:1).
6. 재위 12년 즉 20세쯤 되던 해, 요시야는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여, 이전에 세운 모든 산당(山堂)과
우상들을 일소(一掃)했으며, 이전 북방 이스라엘의 영토까지 미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7).
7. 재위 18년째 즉 요시야의 나이 26세 때,
성전을 보수(補修)하려던 때에, 망각되었던 모세의 율법책이 성전에서 발견되어 왕의 귀에 읽혀져, 깊은
감명을 끼치면서 새로운 개혁과 부흥의 봉화가 올랐다(왕하 22:8-11,대하 34:14-19).
율법서에 기록된 엄숙한 기별을 들으며, 그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옷을 찢고 하나님의 언약을
백성들에게 강독(講讀)하여,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유월절이 거행되었고, 오랫만에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갔다(왕하 23:2, 21-23, 대하 35:1-19). 진정한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표본이라
하겠다.
8. 유다를 마지막으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의는, 대개혁이 있기 5년 전 쯤에 때 맞춰 대선지자 예레미야를 일으키셨다. 요시야왕 재위
13년째인 기원전 626년 쯤에 부름받은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 40년 간을 불붙는 열성과 애소(哀訴)와 눈물로 기별을 전했다(렘1:1-3).
동시에 기원전 626년은 바벨론의 나보포랏살이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바야흐로 세계 정세의 격변이 일게 되는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3년 후 쯤인 기원전 623년에, 다니엘이 태어난 것이다.
9. 예레미야 외에도 여선지자 훌다가 일어나 개혁을 뒷받침했으며(왕하 22:14-20), 스바냐와 나훔 선지자까지 합세하여 개혁을
불붙이고 배도를 경고했다.
10. 때에 앗시리아의 세력이 기울고, 바벨론의 세력이 욱일승천하는 것을 본 요시야는 친바벨론 정책을 취하는 한편, 북방 이스라엘의
실지(失地)회복을 꿈꾸며, 힘의 공백(空白)을 이용하여 므깃도 등 전략 요충지를 장악했다.
11. 이 때쯤, 그 전까지는 적(敵)이었으나, 신흥의 공동의 적인 신바빌로니아(바벨론)를 막기 위해 동맹국이 된 이집트의 느고 2세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이미 수도 니느웨를 뻬앗기고(612 BC) 두 번째의 천도(遷都)인 하란마저 빼앗긴 (610 BC) 앗시리아의 잔군(殘軍)을 도와, 이를
탈환하고자 기원전 609년 대군을 이끌고, 이스르엘 골짜기를 지나 북상(北上)하고 있었다(왕하 23:29,대하
35:21).
12. 때에 친바빌로니아 정책을 표방한 요시야는, 이집트의 앗시리아 지원을 저지하여, 승리와 수고의 댓가를 얻기 위해 므깃도에 나가 접전하다가, 끝내
치명상을 입고, 재위 31년 만에 값 없이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 대하 35:20-25). 개혁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 유다의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요시야왕 13년에 부름받아, 18년간 왕을 격려하며 개혁을 마무리 지으려던 예레미야는 독자를
잃은 부모처럼 슬퍼했으며, 온 백성은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며 통곡했다(대하 35:25). 이 애통이 얼마나 컸던지, 1세기 이후의 선지자
스가랴는,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요시야가 전사한 곳인 "므깃도 골짜기의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다"라고
상기(相起)하고 있다(슥 12:10-14).
13.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전사한 뒤, 백성들은 23세된 요시야의 네째 아들 여호아하스(608 BC)를 17대 왕으로 추대했다(대상 3:15).
그러나 원정(遠征)에서 돌아오던 귀국 길에, 느고 2세는 아버지 요시야의 친바빌로니아 정책을 답습하는 여호아하스를 재위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포로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 대신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을 즉위시켰다(왕하
23:29-34).
14. 이집트 왕 느고 2세에 의하여 엘리야김, 즉 "나의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의 이름에서, 여호야김 즉, "여호와가 세우신다"는 뜻의 이름으로
개명(改名)까지 한 18대왕 여호야김(608-597 BC)은, 재위 11년 간 아버지 요시야 같지 못하고, 패역과 우상숭배에 선지자까지 살해하는
중대한 악을 저질렀다(왕하 23:37, 렘 26:20-23). 또 다시 최선(最善)의 아버지에게서 최악(最惡)의 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금
1달란트(미화 27,636불)와 은 100달란트(미화 63,491불)등 엄청난 조공을 바치면서도 친이집트 정책을 고수하여, 바벨론의 미움을 크게
샀다(왕하 23:32-35).
15. 기원전 605년, 그 때까지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있던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잔군은, 바벨론왕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의 대군과 하맛 가까운
칼케미슈(갈그미스)에서 대격전을 벌여, 세계 역사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전술한 대로, 이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함으로써 앗시리아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신바빌로니아는 명실공히 근동의 최강국으로 부상(浮上)했으며, 이집트는 영원히 강대국의 위치에서 탈락(脫落)하고 만
것이다.
칼케미슈에서 대승한 느브갓네살 장군은, 패주(敗走)하는 느고
2세의 이집트군을 추격하면서 남하하여 예루살렘을 공략(攻略)한 뒤, 재위 3년째의 여호야김을 굴복시켜
바벨론의 봉신(封臣)이 될 것을 다짐받고, 이를 담보하기 위해 당시 18세 된 왕족 다니엘과 다른 세 친구를 포함한 일단의 왕족과
귀인들을 볼모로 잡아가고, 상당량의 성전의 보화와 기구를 바벨론으로 가져 갔다(단 1:1-7).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장의 배경이며, 기원전
605년에 있은 제 1차 포로였다(대하 36:6-7).
같은 해 이집트 접경까지 이르렀던 느브갓네살은, 본국에서 부왕이 서거했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서둘러 귀국하여 605년 9월 7일 왕위에 즉위한다. 그
후 여호야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토록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친이집트 정책으로 전환하고 동맹을 맺자, 느브갓네살은 군대를 파견하여
기원전 598년 12월 그를 잡아갔는데, 아마도 도중에서 거친 취급으로 객사(客死)하여,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였다(렘 22:18, 19, 36:30, 왕하 24:6, 대하 36:6).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18세 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라(598/597 BC) 3개월 동안 다스렸으나, 또 다시 서부 원정에 나서서
예루살렘에 재침(再侵)한 느브갓네살에 의해, 18세 된 왕과 왕후, 태후를 비롯하여 모든 방백, 신복 각종 장인(匠人)등을 포함한 약 1만명의
포로와 함께, 다량의 성전 금기명(金器皿)과 왕궁의 보화가 약탈 당했다. 이들 가운데 에스겔도 포함되어 잡혀갔는데, 이것이 기원전 597년 3월
16일 경에 있은 제2차 포로였다(왕하 24:10-16, 대하 36:9,10, 겔 1:1-3).
여호야긴이 잡혀간 뒤, 그의 숙부이자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597-586 BC)가 유다의 최후의 왕으로 즉위했다. 처음 몇 년 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충성하여 느브갓네살에게 사절(使節)도 파견하고(렘 29:3-7), 그 자신도 바벨론을 친히 방문하기도 했다(렘
51:59).
그러나 그는 의지가 약하여 자기의 판단에 확고하지 못하고 대중의 요구나 신하들의 주장에 좌우되어, 예레미야의 엄중한 통첩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집트와의 동맹관계에 휩쓸리고 말았다(렘 37:6-10, 38:14-28).
시드기야의 반역이 분명해지자, 느브갓네살은 유다 정복에 나서, 1세기 전에 앗시리아왕 산헤립의 전략(戰略)을 따라, 먼저 예루살렘 이외의 유다 전국을
깡그리 유린하고 도시들을 파멸시켰다(렘 3:7).
기원전 588년 1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의 포위가 시작되어(왕하 25:1) 30개월에
걸친 포위 동안, 잠시 이집트의 도움이 이르렀으나 곧 물러가고(렘37:5), 586년 7월 19일 성벽이 무너지면서 기근으로 처참해진 예루살렘
성은 분노한 바벨론 군사들에게 짓밟히고, 성전과 궁전, 가옥들은 완전히 훼파된 후 불태워져, 삼일간 (586년 8월 15-18일)이나 불꽃에
휩싸였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가고, 극빈(極貧)한 사람들은 뒤에 남도록 허용되어, 그달랴가 다스리도록 위임되었다(왕하
25:22, 대하 36:20).
한편 성벽이 무너지는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한 시드기야는 여리고 쪽으로 도주했으나, 추격해 온 바벨론 군사들에게 잡혀서 느브갓네살의
야전 사령부가 주재한 리블라에 끌려 와, 그의 목전에서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참상을 겪는다. 아마도 이 끔직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린 왕의 눈을 뜨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며, 화가 치민 느브갓네살의 명령에 따라 그의 두 눈마저 뽑혀졌다.(왕하 25:4-7, 19-21,
렘 52:10).
눈을 감은 시드기야 왕 앞에 무엇이 아른거렸을까?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렘 38:17-21). 반역을 선동한 방백들도 함께 처형되고, 시드기야왕은 눈이 뽑힌 채 죽기까지 옥살이를
했다(왕하 25:1-7, 렘 52: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기원전 626년에 부르심을 받아, 40년 간을 침몰당하는 조국과 함께 민족의 고뇌 속에서 비탄에 젖은 외로운 모습으로, 왕과 백성들에게 회개하면 살
것이라고 호소하고 애곡한 예레미야의 노력도 효혐이 없었다. 그는 바로 1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을 도와 나라와 민족을 앗시리아의
손에서 건졌음을 상기하면서, 그도 거룩한 성과 동족을 바벨론의 파멸로부터 건져 보려고 안간 힘을 다했으나, 그는 그러한 히스기야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동족과 함께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택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백성을 권면하다가, 또 다시 배역의 길로 나서 이집트로 망명한 무리들에게 끌려 이집트 땅 다바네스로 가서, 거기서도 회개의 권면을
계속하다가(렘 41:17-43:13), 전설에 의하면 거기서 동족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끝까지 저버린 유다백성에게, 남은 길이란 미리 예고된 대로(렘 29:10) 70년 간 계속될
포로살이를 위해 떠나는 길 뿐이었고, 눈동자 같이 아끼시던 예루살렘성은 잿더미가 된 채 중건(重建)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슬픔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에 쓰여진 탄식이요, 애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온은 완전히 멸망 당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속박 중에 있었다. 슬픔에 억눌린 선지자는 부르짖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애 1:1-2).···'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22).](선지자와 왕,
444, 445).
[다니엘은 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 있었다.
그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자기 고국 땅을 치기 위해 몇 차례의 전역(戰役)을 위해 떠나는 것을 보았음에
틀림 없으며, 그들이 이기고 돌아오는 것과, 포로된 유대인들이 도착하는것도 목격했음에 틀림 없다. 이들 포로들 가운데는 그의 가족을 동반한
여호야긴도 있었으며(왕하 24:10-16), 후에는 눈먼 왕 시드기야도 있었다(왕하 25:7). 이러한 시기에 다니엘은 또한 유배(流配)되어 온
유대인들 가운데, 진전된 정치적 소동의 결과로 주모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을 느브갓네살이 불태워 죽인 사실도 알았음에 틀림 없다. 예레미야로
하여금, 포로된 동족들에게 편지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라고 권면하게 한 것도, 이 소동이었다](렘
29장).
느브갓네살이 즉위하던 해(605
BC)에 포로돼 간 다니엘은, 이역 만리 바벨론 성에서 향수를 달래가며 신앙과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마침내 3년 만에 느브갓네살의 신임을 독차지한 측근(側近)의 고위 보좌관(고문)이 되어,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 힘 있게 역사했음이 틀림
없다.
아마도 다니엘의 그러한 영향력 때문에,
반역을 거듭한 유다가 처음 반역(605 BC)이후 멸망당하기까지(586 BC), 거의 20년
간이나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전제 군주에 의해서라도 그 최후가 유보(留保)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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