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옷, 두려움의 구덩이 ①
입력 : 2020-05-20 00:07
본문 : 창세기 42장 18~25절
말씀 : 요셉은 사흘이 지나 형들을 감옥에서 끌어냅니다. 형들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길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 남아 있다고 말한 그 동생을 데려와 이집트 총리의 눈앞에 세우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 한 명을 데려올 때까지 열 명의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의 인질이 이집트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20여년 전에는 요셉 자신이 그렇게 형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을 당했습니다. 이제 감옥에 남은 한 사람, 시므온은 그 옛날 요셉이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고 꺼내어 줄 때까지 감옥이라는 구덩이에 던져져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13년 세월 속에서 팔려가고, 종살이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견뎌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꿈을 이루실 수 있도록 준비됐던 것처럼 형들도 자신들의 허물을 기억하고 뉘우치며 요셉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됩니다.
형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점으로 그 옛날 요셉의 일을 기억합니다. 형들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만약 이 일이 아니라면 형들은 요셉을 팔아버린 사건을 영원히 마음속에 묻어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형들이 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그들의 죄를 모르고 언급조차 하지 않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형들은 양심 앞에,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살다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 아닌 것으로 여겼던 일들을 죄로 알게 합니다. 잊고 있었던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요셉 역시 이 과정에서 형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두고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게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고백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가게 했습니다. 형들은 요셉인 줄도 모르고 서로 나눈 이 작은 고백이 훗날 관계의 회복, 죄의 용서,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만들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겪는 ‘뼈가 마르는 고통’ ‘짓눌림의 고통’ ‘진액이 빠지는 고통’ ‘삶의 메마름의 고통’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많은 시간이 흐르고 누구 하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도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되는 우리 안에 살아서 우리를 속박합니다. 용서와 화해, 속죄와 구원 외에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기도 : 하나님, 죄는 우리를 속박하고 두렵게 하고 매여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를 깨달아 잘못이나 허물이 있을 때 숨기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드러내어 처벌받고 용서받음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죄의 옷, 두려움의 구덩이 ②
입력 : 2020-05-21 00:03
본문 : 창세기 42장 26~28절
말씀 : 결박당해 감옥이라는 구덩이에 던져진 시므온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 형들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를 열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신들이 곡식의 대가로 지불했던 돈주머니가 그대로 자루에 담겨 있었습니다. 첩자로 의심을 받으며 시므온까지 감옥에 갇힌 상황인데 이제는 도둑으로 몰릴 지경입니다. 형들은 곡식 자루의 돈주머니를 보며 마음이 철렁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한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요셉을 은전 스무 개에 팔았던 일 말입니다. 그러나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은 요셉이 형들에게 베푼 ‘은혜’였습니다. 죄를 범한 그들에게는 은혜가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형들이 자루의 돈을 보고 “그들이 혼이 나서 떨었다”(28절)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혼이 나서’는 혼(魂)이 나간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음을 묘사합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한 번의 죄가 한 번의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먹칠하는 게 ‘죄’입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죄의 유혹이라는 옷을 벗어버렸던 것처럼, 우리도 합당치 않은 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 잘못된 방법으로 죄의 욕망을 채우려는 유혹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은혜가 되고 축복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형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들에게 이뤄지는 이상한 사건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형들 나름의 계획과 능력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그들 삶에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땅을 침범하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형들의 주변에서 진행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들은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입니까, 아니면 소망이고 희망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기다려집니까, 아니면 이 또한 두려울 뿐입니까.
기근과 흉년은 삶의 기반을 흔드는 위기였지만 그 속에서 요셉은 총리가 됐고 요셉과 형들이 만나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대로 야곱의 모든 후손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온 세상이 힘들어하는 고통과 혼란의 때에도 하나님의 꿈과 섭리는 성취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굴곡진 삶을 통과하고 있다 해도 믿음을 갖고 바른 태도로 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기도 : 하나님,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누구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지,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지, 나의 주변에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볼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죄의 옷, 두려움의 구덩이 ③
입력 : 2020-05-22 00:02
본문 : 창세기 43장 15~34절
말씀 : 형들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에 도착해 요셉 앞에 섭니다. 그들이 선 그 자리는 열일곱 살 소년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 서른에 이집트 총리가 되고, 7년 풍년을 지나, 약 2년의 흉년이 지속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어림잡아 22년 만에 열두 명의 형제가 한자리에 모이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총리 요셉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형들을 집으로 초대해 융숭히 대접합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개 곡식을 구하러 온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총리 저택에서 식사를 대접받는 환대가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은혜가 베풀어질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처벌과 형벌과 종의 자리’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이 의심도 많은 법입니다.
형들이 염려하는 그런 억울한 일은 사실 22년 전 자신들로 인해 요셉에게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베푸는 은혜의 자리가 형들에게는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형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그 옛날 요셉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했던 형들이 지금 이런 호소를 하게 될 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겸손히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다른 길을 통해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요셉의 청지기가 형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의 곡식 값은 내가 이미 다 받았다. 샬롬하라(평안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형들은 ‘샬롬’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의 불안함 때문입니다. 요셉의 환대, 은혜의 역사가 그들에게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진실하고 당당하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켕기는 게 많은 인생은 은혜와 환대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이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피해 나무 뒤에 숨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안과 도피는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집트 총리와의 식사에 참여한 형들은 형제의 나이 순서대로 자리가 놓인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며 두려워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말한 적도 없는데 출생 순서로 자리가 배치돼 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닌 이 식사 자리는 형들에게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자리였고, 요셉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친동생을 마주한, 감격의 자리였습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식사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기도 : 하나님, 하나님의 일하심을 두려워하여 떠는 자가 되지 않고 기쁨으로 하나님 역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삶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불신의 구덩이, 체념의 옷
입력 : 2020-05-22 18:44
본문 : 창세기 42장 29절~43장 14절
말씀 :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갔던 아들들이 긴 여행에서 돌아와 그간 일들을 아버지에게 들려주자 야곱은 맥이 풀렸습니다. 시므온이 이집트에 볼모로 사로잡혀 있다는 이야기 외에는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구덩이에 던져진 시므온을 구하려면 막내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려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 야곱은 분노하고 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자식을 잃을 수 없다.” 그런데 야곱의 이 말에서 우리는 이상한 뉘앙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냐민을 ‘내 아들’이라 칭하면서 다른 아들들을 ‘너희’라고 표현함으로써 마치 아들이 베냐민 하나뿐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로 향했던 야곱의 왜곡된 편애는 요셉을 잃고 난 이후 베냐민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자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지난날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과 대면했던’ 믿음의 사람 야곱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 앞에서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습니다. 제단을 쌓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은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에게 ‘해가 미쳤다’는 관점으로만 상황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섭리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눈앞에 닥친 고난만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아들들을 다시 이집트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들이 말합니다. “동생을 데려가야 또 다른 동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야곱은 난감한 현실 앞에서 아들들을 꾸짖습니다. “너희는 어쩌자고 또 다른 동생이 있다고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 버렸느냐. 거짓말로 둘러댔어야지!” 이 순간 야곱은 자신이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거짓의 사람이라는 천성을 드러냅니다. 본문의 배경은 야곱(속이는 자)의 이름이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스라엘’로 바뀌고 난 이후였지만 야곱의 본성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보내면서 이집트 총리에게 줄 선물도 함께 보냅니다. 옛날 자신이 형 에서라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용했던 그 방식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야곱은 이를 반복하며 하나님께 그 어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이 모습은 하나님보다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연약한 인간의 처세술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보낸 선물은 요셉에게 협상 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부와 회피, 책임 전가, 협상과 타협, 체념. 야곱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도 : 하나님, 내게 찾아오는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시험의 옷, 변화의 옷 ①
입력 : 2020-05-24 00:00
본문 : 창세기 44장 1~13절
말씀 : 22년여 만에 열두 형제가 한자리에 모인 식사 자리가 끝났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길을 떠나기 전날 밤, 형제들의 곡식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워주고 곡식 대금도 넣게 합니다. 심지어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까지 넣어두도록 지시합니다. 형들에 대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졌던 열한 명 형제들은 이 일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 형제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집트를 떠납니다. 그동안 조마조마했던 일들이 이제 평안히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성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요셉의 청지기들이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뒤쫓아 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총리의 은잔을 훔쳤다고 다그칩니다. 형들은 생각지도 못한 추궁에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형들은 실제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각 사람의 자루를 뒤졌을 때 돈주머니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냇동생 베냐민의 자루에서는 총리의 은잔이 발견됐습니다. 베냐민을 질타하기에는 자신들의 자루에서도 돈이 발견된 것이 이상했던 형들은 어이없는 이 상황 앞에서 탄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 옛날 무고한 요셉의 옷을 찢었던 그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 앞에서 자기 옷을 찢습니다. 은전 스무 개에 동생을 팔아넘겼던 형들은 이제 요셉에 의해 끊임없이 돈과 은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형들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과 공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시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를 훔치려 했다는 누명을 입고 구덩이로 끌려갔던 것처럼 형들은 총리의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입고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요셉이 여인의 손에 던져버렸던 옷이 증거물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요셉이 던져 넣은 은잔이 증거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증거 앞에서 끌려가며 형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절망과 두려움의 구덩이로 끌려가고 있지만, 이 길을 통해 용서와 생명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으로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총리의 옷을 입게 됐듯이 말입니다. 만약 형들이 자기들만 살겠다고 동생 베냐민을 버렸다면 그들은 구덩이에는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눈물로 탄식하며 베냐민과 함께 끌려갑니다. 내 잘못이 아닌 누군가의 잘못과 처벌 앞에서도 은혜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따를 때, 형들에게도 살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희생의 길입니다.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기도 : 하나님, 억울한 길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자리일지라도 삶에서 의연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시험의 옷, 변화의 옷 ②
입력 : 2020-05-25 00:08
본문 : 창세기 44장 14~34절
말씀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해 큰소리치던 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증거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시 마주한 이집트 총리를 향해 형들은 무릎을 꿇고 빌며 은혜와 선처만을 바랄 뿐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감당치 못할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들의 죄를 기억해냈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형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의 탄원에서 주목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이전에는 열 명의 형들이 요셉을 포기하고 버렸던 것과 달리 이제 형들은 죽게 된 동생 베냐민과 함께 노예의 옷을 같이 입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총리 요셉은 죄가 없는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형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픔을 헤아리며 막내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애원하고 동생의 징벌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총리의 은잔을 훔친 베냐민을 포기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이 모든 일은 베냐민이 도둑질해서 생긴 일이라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예가 될 위기 앞에서조차 형들은 자신의 안일보다는 베냐민과의 동행을 선택했습니다. 아버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베냐민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고 그를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옛날 요셉을 팔아넘길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한때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했던 유다가 지금은 먼저 나서며 요셉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이 일을 통해 요셉은 형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변할까요. 요셉의 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단의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면서부터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돈이나 관계, 건강의 문제가 끊임없이 찾아올 때, 그 문제들에 반응하는 태도가 이전과 동일하다면 아마도 그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고난,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함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어쩌면 우리가 변화할 기회, 혹은 우리의 변화를 검증할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가오는 반복적 문제에 어떻게 이전과 다른 대응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까. 반복되는 문제와 시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시험을 변화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려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것처럼, 나 혼자 사는 길을 찾는 삶이 되지 않고 남을 살릴 길을 찾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통과 시험을 변화의 기회로 삼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시간의 구덩이, 성숙의 옷
입력 : 2020-05-26 00:01
본문 : 창세기 45장 1~28절
말씀 : 요셉이 이집트 땅으로 온 형들을 만나고 난 후 그들의 긍정적 변화를 미리 확신했거나, 이전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형들의 속내를 알고 싶어 여러 모양으로 시험하기는 했지만, 미리 형들의 반응을 알았을 것이라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형들은 이전에 요셉이 알던 형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어떻게든 살리려는 형들의 마음에 감동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앞의 총리가 동생인 요셉인 줄 알지 못했던 형들은 ‘이 사람이 우리 앞에서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하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이집트 언어만 사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들의 말인 히브리어로 말하는 게 아닙니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아마 형들은 까무러칠 뻔했을 것입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쩍 벌리고는 할 말을 잊은 형들의 모습, 상상이 가십니까.
형들은 그동안 이집트 총리 앞에서 요셉이라는 동생이 죽었다고 말해왔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요셉은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동안 형들은 그들이 요셉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눈앞에 요셉이 버젓이 살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22년 전 자신들의 손으로 팔아버렸던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지금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미래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한번 희극 대본을 쓴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이 대사 이후의 이야기 전개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까요. 막내 동생은 살리고 권선징악을 적용해 형들을 처벌하는 것이 상식적인 전개가 아닐까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해를 가한 사람들은 형들이지만, 그것마저도 사용해 눈에 보이지 않게 요셉의 삶을 이끌고 계셨던 분은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그것도 “먼저 보내셨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어릴 적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던 요셉은 이제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어린 요셉에게는 채색옷과 꿈이 자랑이었지만 이제는 총리직마저도 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채색옷을 벗겼던 형들에게 이집트의 좋은 옷들을 선물합니다. 돌아가는 길에도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며 상대의 옷을 벗기기 위해 서로 다투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지나온 삶에서 요셉도 변했습니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이지만, 고생과 연단의 시간들이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진리입니다.
기도 : 하나님, 삶의 시간 속에서 성숙하게 하옵소서. 믿음이 자랄수록 인격도 깊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믿음의 옷, 용서의 옷
입력 : 2020-05-27 00:02
본문 : 창세기 50장 15~21절
말씀 :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고센 땅에 정착합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 130세였습니다. 기근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비롯한 아들들을 축복하고 1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야곱 일가의 이집트 17년이 흘러갔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의 형들에게는 또다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동안은 아버지 때문에라도 참았던 요셉이 이제 드디어 우리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형들은 17년간 이집트에서 살면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복수를 염려하며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에 지은 죄 때문에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이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러나 형들에 대한 요셉의 삶과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셉의 다음 고백을 보십시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요셉의 위대한 점은 총리의 권세를 가지고 복수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와 화목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보디발의 아내를, 자신을 잊은 술 맡은 관원장을, 그리고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합니다.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귀찮아서도 아닙니다. 사람의 손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말로만 하나님 은혜와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좋고 나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권력의 옷으로 복수하고 사람을 넘어뜨리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용서하고 세워나가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믿음을 붙들고 용서하는 삶을 살면 나도 살고 그도 삽니다. 내가 믿음을 포기하고 복수하는 삶을 살면 나도 죽고 그도 죽습니다. 세상의 질긴 악연과 물고 물리는 공멸의 길을 걷지 말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붙들고 살아갑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마저도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기회로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 :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내 삶을 붙들고 있음을 믿고, 삶의 어떤 형편에서라도 믿음의 선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죽음의 구덩이, 비전의 옷
입력 : 2020-05-28 00:09
본문 : 창세기 50장 22~26절
말씀 :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깊이 생각하면서도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한 항목을 두고 ‘버킷 리스트’라 부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이후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고향 땅으로 인도하실 때 반드시 내 유골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라.”
요셉은 자신의 삶과 추억과 업적은 이집트 땅과 역사에 남더라도, 자신이 죽어서라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원했습니다. 성경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진 요셉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요셉은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이 이뤄질 것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이치대로 하면 죽음의 자리는 꿈을 접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할 임종의 순간에서도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 꿈꾸면서 소망으로 죽어간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일생을 살면서 어려서 품었던 꿈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만 꿈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 죽으면서 품었던 꿈과 비전마저도 모두 이뤄졌다는 점에서 요셉은 진정한 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 꿈의 중심에는 세상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꿈을 주시고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붙든 그의 삶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기적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꿈을 주시고 꿈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꿈꾸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루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이루실 것을 꿈꿔야 합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면 우리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떠나더라도 꿈은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끝나지 않는 꿈, 관 뚜껑이 덮여도 사라지지 않는 꿈을 꾸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다가 이 땅에 묻히더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기도 : 하나님, 주님의 말씀 안에서 꿈꾸는 자가 되게 하시되,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소망할 수 있는 참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말씀의 옷, 비전의 옷
입력 : 2020-05-29 00:08
본문 : 창세기 50장 22~26절
말씀 : 죽음을 앞두고도 죽음 이후를 꿈꾸었던 요셉. 그의 꿈과 믿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야곱 역시 그의 조상으로부터 꿈과 믿음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야곱이나 요셉 모두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고 이 약속을 붙들고 죽어갔습니다.
요셉은 전해 받은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품는 믿음의 사람,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조상이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요셉의 꿈,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돌아가고자 했던 그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출 13:19)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수 24:32) 요셉이 남긴 꿈과 비전의 유언이 모세와 후손들을 통해 성취됐습니다.
요셉은 그가 살아왔던 삶, 그가 살아가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신 자리, 기적으로 역사하신 자리라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종으로 살든 총리로 살든, 내 꿈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믿음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하늘을 꿈꾸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우리 후손들에게 ‘썩어 없어질 세상의 성공’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도 계속될 하늘의 소망’에 관해 더 많이 말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요. 우리의 소망을 계승할 다음세대를 일으키고 세워나가기 위해 죽기까지 노력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우리가 인생의 모진 굴곡에서도 요셉처럼 믿음의 옷을 벗지 않으려고 힘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죽음 이후에라도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꿀 수 있습니다.
기도 : 하나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사역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후손들에게 믿음의 지표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조연의 옷, 주연의 옷
입력 : 2020-05-29 16:22
본문 : 창세기 44장 33절, 49장 8~12절
말씀 : 야곱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렇게 예언합니다. “당대에는 모든 형제가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지만. 훗날에는 모든 형제가 유다 앞에서 절하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구세주 메시아가 유다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증명됐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르우벤과 유다를, 요셉 후손과 유다 후손을 역전시키게 만들었을까요. 어떻게 주연이었던 요셉이 아니라 조연이었던 유다 앞에 사람들이 절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창세기 38장은 ‘나라면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차 아버지를 떠났던 유다를 보여줍니다. 뜻하지 않은 두 아들의 죽음과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운 실수를 경험하면서 유다는 깨달은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못한 인생을 경험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쉬운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며느리와 동침한 줄도 모르고 음행한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라고 말했다가 결국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된 유다였습니다. 그 사건 이후 유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고 실패라고는 모르는, 무결점의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이방 땅에서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아내를 남의 남자에게 넘겨주는 치사하기 그지없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희대의 사기꾼 야곱, 변명쟁이 모세,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성하는 부하를 죽인 다윗,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 예수쟁이를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선 바울도 쓰십니다.
나의 무결점이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며 사랑하지 못하고 교만케 하는 근거가 된다면, 오히려 단점이 있어도 겸손하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죄를 지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 실패를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안다는 점에서 무엇이 진정한 믿음의 성공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머리를 숙이지만, 훗날에는 내 후손에게 모두가 머리 숙이는 일이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능력의 사람이 아니라 이해하는 사람, 용납하는 사람, 품는 사람,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주연처럼 군림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오늘 조연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영원히 조연 인생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진정성 있게 살면서 주연마저도 품는 사람이야말로 그가 바로 하나님의 무대에서 주연입니다. 우리는 지금 조연으로 살고 있습니까. 주연으로 살고 있습니까.
기도 : 하나님, 세상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 가득한 인생이 아니라, 실패의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옵소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어주며 함께 성숙해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9153&code=23111511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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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8402&code=231115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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