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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1) -(10) : 채색옷, 질투의 구덩이 - 벗기려는 옷, 벗어버린 옷 /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영국신사77 2020. 5. 22. 23:58

채색옷, 질투의 구덩이

입력 : 2020-05-01 00:07


본문 : 창세기 37장 1~4절


말씀 :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네 명의 아내 가운데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라헬이 지은 요셉이란 이름에는 초자연적 계시나 대단한 신앙의 열망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하나 더 주십시오!” 네 명의 여인이 한 남편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자식 경쟁이 치열했던 이 가정의 복잡한 배경 속에서 자식 없던 한 여인의 한이 서린 이름이었습니다. 혹시 대단한 가정 배경 가운데 태어나지 못했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 때문에 자꾸만 누군가를 탓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요셉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과 함께 양을 돌보는 일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의 잘잘못을 시시콜콜 말했던 모양입니다. 요셉이 고자질쟁이 성격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맡겨진 일에 대해 고지식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형들로서는 이런 동생이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형들은 요셉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해 다른 아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채색옷까지 지어 입혀줬습니다. 채색옷은 머리 넣는 구멍만 빼고 나면 자루처럼 뒤집어쓰고 허리띠로 묶는 당대 일반인들의 옷과는 다른 옷이었습니다. 소매가 따로 만들어진 옷, 길이에 있어서 일반인의 옷보다 긴 옷, 밝은 색깔의 줄무늬가 있는 옷 등으로 번역하는 자료들을 통해 ‘아무나 입을 수 없었던 고귀한 옷’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채색옷이 보여주는 가장 큰 의미는 그 모양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옷이 형제 가운데 다른 누구도 누리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였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형들에게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됐습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만 편애하는 것을 보고 요셉을 미워해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4절). 이 표현의 의미는 “그들이 요셉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우리나라 정서에 맞춰 이렇게 번역합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말 한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형들은 요셉에게 평범한 ‘안녕’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말과 행동마다 적개심의 가시가 돋쳐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 때문에 가정 안에서 왕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형들이 보기에 아버지에게 남다른 사랑을 받는 요셉은 한마디로 ‘밉상’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자리는 질투의 구덩이였습니다.

기도 : 하나님. 남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거나 특별히 잘난 것 없어도 실수와 미운 점이 있는데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여라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동안 세상의 미움을 받더라도 잘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약력=현 한국성경적상담학회 이사장 기독대안학교 이야기학교 설립이사장

 

꿈의 옷, 미움의 구덩이

입력 : 2020-05-01 16:57


본문 : 창세기 37장 5~11절


말씀 : 열일곱 살이 된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꿉니다. 형제들이 밭일을 함께하며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곡식 단이 일어서자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이상한 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까지 꿨습니다.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형들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돼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는 말이냐.” 아버지 야곱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습니다. “나와 네 어머니와 형들까지 너한테 절하게 된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아도 채색옷을 입고 다니는 요셉이 꼴 보기 싫었는데 꿈 이야기로 인해 요셉을 미워하는 형들의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열일곱 살이라면 사회 관계성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 어린 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줄 알면서도 이런 꿈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요셉은 참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꿈 이야기를 통해 형들이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기를, 이전보다 조금 더 잘 대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일까요. 요셉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므로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지혜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형들 가운데 어느 사람도 이 꿈을 신적 계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셉이 미워서라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겨둡니다. 야곱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꿈을 통해 계시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이나 반복된 요셉의 꿈이 일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살다보면 성격과 성향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괜히 미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분이라면 저런 사람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같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일하고 계시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감정과 판단에 따라서만 사람을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성격이나 성향이 내게 잘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내 성격과 성향이 하나님의 선택과 일하심을 거부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보혈의 옷, 세상의 시험

입력 : 2020-05-03 00:01


본문 :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 :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과 자신의 지혜롭지 못한 행실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 미움의 구덩이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요셉으로서는 아버지가 입혀준 채색옷을 벗어두고 다닐 수도 없고 잠잘 때 꾸는 꿈을 조절하고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하지 않았다면, 꿈을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아쉬운 점이 있는 요셉의 모습 그대로를 선택하셨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이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덕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보혈의 채색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형들의 관점에서 요셉이 얄미웠던 것처럼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잘난 게 뭐 있습니까. 남다른 게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도 구원받았답니다. 온갖 좋은 말은 다 하면서도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흠잡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드러낼수록 세상은 우리를 향해 더욱 더 거부감을 나타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이 강조되는 곳일수록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사모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 하기보다 시기하거나 증오하는 일이 많습니다.

시간이 흘러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됐을 때, 요셉 내면에도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동생을 팔아먹음’으로 시기와 질투와 증오를 표출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구원함’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킵니다. 우리는 그때가 돼서야 왜 하나님께서 열두 명의 형제들 가운데 요셉을 선택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 내다 보시고 적임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자기 소망이나 내면적 잠재의식의 투사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예언적이고 계시적인 꿈이었습니다. 소망은 내 맘대로 품을 수 있지만,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비전은 내 뜻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관계의 채색옷’을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랑받아 ‘비전이라는 꿈의 옷’을 입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지만, 언젠가 왜 우리에게 이 옷을 입혀주셨는지를 온 세상이 알 수 있도록 멋지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기도 : 하나님, 부족하고 연약하나 우리로 하여금 예수 보혈의 옷을 입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내 꿈만 꾸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으로 옷 입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찢어진 채색옷, 깨어진 샬롬

입력 : 2020-05-04 00:02


본문 : 창세기 37장 12~20절

말씀 :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겜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여자 형제가 없던 외동딸 디나는 또래 여자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인근 촌락으로 구경을 나갔다가 세겜이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맙니다.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은 결혼 허락을 핑계로 그 성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의 설득으로 그 부족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은 후 거동이 가장 불편할 때, 디나의 친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그 성읍의 남자들을 몰살하고 노략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아들들의 거짓말에 속은 야곱은 세겜과 동맹관계에 있는 족속들의 공격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이 말씀을 듣고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그 지역을 떠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주변 족속들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야곱 일행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주셨습니다.

본문은 그 사건 이후 2년 정도 시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때의 위기는 넘어설 수 있었지만, 세겜은 야곱이 여전히 염려할 수밖에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아들 열 명이 양을 먹이기 위해 바로 그 세겜 지역에 나가 있습니다. 혹시나 예전 그 일로 인해 무슨 변고나 당하지 않을까 해서 아버지 야곱의 걱정이 태산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요셉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형들은 그동안 시기심과 미움 때문에 요셉에게 샬롬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과 양들이 샬롬 안에 있는지 살펴보고 보고하도록 보냄을 받고는 그 위험한 길을 순순히 나섭니다. 야곱이 거주하던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약 80㎞, 세겜에서 도단까지 약 20여㎞, 세겜에서 방황하던 거리를 빼고도 총 100㎞가 넘는 길을 걸어서 형들을 만나러 갑니다. 무엇을 위해 가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샬롬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형들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채색옷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반가움보다 미움이 컸던 형들 가운데 누군가가 “저기 꿈꾸는 놈이 오는구나. 이 기회에 저놈을 죽여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샬롬을 묻기 위해 그 먼 길을 찾아온 동생에게 샬롬을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샬롬을 묻기 위해’ 찾아온 동생의 ‘샬롬을 깨뜨리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꼴 보기 싫었던 채색옷은 찢어 벗겨버리고, 듣기 싫었던 꿈 이야기는 요셉을 죽임으로써 사라지게 만들고자 합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악한 짐승이 잡아먹었다’라며 거짓말을 하자고 모의합니다. 이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표현대로 요셉의 삶을 찢고 잡아먹는 ‘악한 짐승’이었습니다.

기도 : 하나님, 미움으로 샬롬을 깨뜨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샬롬을 세워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피 묻은 채색옷, 던져진 구덩이

입력 : 2020-05-05 00:08


본문 : 창세기 37장 21~28절


말씀 :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구덩이’입니다. 희한하게도 요셉이 향하는 목적지인 ‘도단’이라는 지명이 가진 의미는 ‘두 개의 구덩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에서부터 요셉이 지금 구덩이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구덩이에 빠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시작되고 결국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아버지가 입혀준 사랑의 채색옷과 하나님이 입혀준 꿈의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희망과 소망이 사라지는 상황의 구덩이, 요셉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덩이, 마침 물이 없어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누군가가 꺼내어 주지 않으면 말라 죽어갈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 때도 이미 형들의 미움과 시기의 구덩이에 빠진 삶이었습니다. 형들 가운데 누구도 그에게 편안히 말하지 않는 ‘관계성의 샬롬이 사라진’ 구덩이였습니다. 그런 형들이 이제는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동생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집니다.

구덩이에 던져질 때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마 살려달라고 애걸하였겠지요. 훗날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맹수 앞에 벌벌 떨며 처연한 눈망울로 눈물 흘리는 어린 사슴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동생을 죽이려는 형제들 앞에서 그래도 맏형 르우벤은 끝까지 요셉의 생명을 지키려고 힘씁니다. 넷째 형 유다 역시 요셉의 생명만은 건지려고 무던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형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대상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깁니다. 르우벤이나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마치 예수님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군중들에게 굴복해버린 빌라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은 스무 개로 무역상들에게 팔려가는 요셉은 은 30개에 팔려버린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거짓으로 가져온 염소 피가 묻은 채색옷을 보고 오열합니다. 그 옛날 자신이 염소 고기와 털로 아버지를 속였던 것처럼 이제는 염소 피 묻은 옷으로 아들들에게 속습니다. 혈육을 속이며 살아왔던 야곱의 인생은 노년에 이르러 혈육들로부터 속임을 당합니다. 형들의 시기심과 미움으로 인해 요셉에게도, 아버지 야곱에게도, 동생 베냐민에게도, 요셉을 팔아넘긴 그 형들에게도, 어수선한 이 가정에도, 샬롬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도 : 하나님. 순종의 길에서 인생의 구덩이에 빠지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죽음의 구덩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소망하고 인내하게 하옵소서. 샬롬이 깨어진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돌보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벗겨진 옷, 섭리의 손길

입력 : 2020-05-06 00:02


본문 : 창세기 37장 29~36절

말씀 : 야곱은 아들들의 샬롬을 묻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세겜으로 보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샬롬을 묻기 위해 순종했고 형들은 샬롬을 깨뜨리기 위해 모의하고 행동했습니다. 요셉은 샬롬을 위해 순종하는 자였고 형들은 샬롬을 깨뜨리기 위해 불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샬롬을 묻기 위해 갔던 사람을 죽여 샬롬을 대신하는 사람들, 이들은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 같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샬롬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을 때도 우리 주님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과 같은 이 세상으로 ‘세상의 샬롬을 위해’ 우리를 보내십니다.

세상은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나보다 앞서는 꼴을, 나에게도 없는 옷을 그 사람이 입고 있는 꼴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입지 못하면 그도 입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으로 그가 입은 채색옷을 찢으려 합니다. 우리는 남의 꿈을 시기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을 따라 열심히 사는 자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꿈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꿈이 이뤄지도록 서로 돕는 자가 돼야 합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막기 위해 요셉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꿈을 이뤄가십니다. 구덩이에 던져지고 무역상에게 팔려가는 일은 요셉이 원했던 삶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가나안 촌 동네의 요셉을 당대 최강국 이집트의 2인자로 세우시려는 하나님 섭리의 길이었습니다. 요셉이 만약 아버지의 채색옷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한 부족의 지도자는 될 수 있었겠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채색옷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 옷은 끝까지 입고 살았을지 몰라도 총리 옷은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입고 살았던 채색옷이 나의 의도와는 달리 남의 손에 의해 벗겨질 때, 그 옷을 내게 입히셨던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내게 허락하실 때, 아직은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더 큰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인생의 구덩이에 던져질 때, 팔려가는 일을 당할 때, 그 일마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절망하지 맙시다.

내 계획안에서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곳까지만 갈 수 있겠지만, 내 계획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이 나를 찾아올 때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곳 너머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형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입혀준 사랑의 채색옷은 벗길 수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꿈의 채색옷은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 하나님, 인생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서로 돕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절망의 옷, 형통의 옷

입력 : 2020-05-07 00:07


본문 : 창세기 39장 1~3절


말씀 :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던 요셉이 한순간에 남의 나라에 종으로 팔리는 신세가 됐습니다. 아직은 앳되고 연약해 보이는 열일곱 살 소년이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막막한 밤들이었을까요. 그 수많은 밤마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두고 얼마나 많이 곱씹어봤을까요.

‘내가 잘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란 자책도 했을 것이고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마저도 원망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요셉은 생각지 못한 시기와 배신의 구덩이, 팔려감과 종 됨의 구덩이에 빠진 것보다, 답도 없는 생각의 구덩이에 빠진 것이 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의 모든 전개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요셉의 굴곡진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가는 현실에 직면한 요셉 입장에서는 ‘절망’ 외엔 다른 어떤 단어로도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길은 원해서 가는 길, 계획해서 가는 길, 미래가 기대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상상치도 못한 구덩이에 던져졌던 것처럼 준비된 것 하나 없이 이집트 땅에 던져졌습니다.

그동안 요셉에게 두 번이나 꿈으로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한 번쯤 더 꿈으로 앞으로의 일을 알려주시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요셉의 삶은 억울한 인생, 던져진 인생, 끌려가는 인생,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렇게 팔려간 이집트에서 이제 요셉은 종의 옷, 노예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아버지 집이 아닌 주인의 집에서, 아들이 아닌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의 채색옷이 찢어지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종으로 팔려가고, 종의 옷을 입고 살 때에도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요셉의 처지는 바뀌었지만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계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요셉에게서 채색옷을 벗길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비전의 옷은 벗길 수 없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삶의 결과는 형통이었습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성공’ 또는 ‘번영’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관점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요셉은 이집트에서 종의 옷을 입고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통함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 하나님, 생각지 못한 구덩이에 던져진 것 같은 삶, 답도 없는 생각의 구덩이에 빠진 삶,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삶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옵소서. 고난 중에라도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노예의 옷, 신뢰의 옷

입력 : 2020-05-08 00:02


본문 : 창세기 39장 4~6절

말씀 : 요셉은 여전히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요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 일하심과 형통케 하심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보디발은 돈을 주고 산 어린 노예이자 출신 배경도 알지 못하는 요셉에게 자신의 전 재산과 가정 제반 업무를 다 관할하게 합니다.

보디발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요셉의 사람 됨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심을 말입니다. 요셉에게 가정 총무의 권한을 맡기면 자신의 삶도 형통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종을 동역자로 삼은 것입니다. 종을 신임하고 있었습니다. 종을 의지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을 통한 은혜의 옷도 입혀집니다. 미움의 옷, 팔림의 옷, 종의 옷을 입고 살던 요셉이 이제 신임의 옷, 권한의 옷, 총무의 옷을 입고 삽니다. 미움과 시기의 넝마를 걸치고 살았던 요셉이 신뢰와 인정, 위탁과 권위의 옷을 입고 삽니다. 그것도 단순히 총무의 직책이 가지는 고유 권한에 국한된 게 아니라 개인적인 신뢰와 신임, 위탁과 위임에 이르는 전폭적인 신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셉의 손안에 보디발의 살림이 쥐어지자 보디발의 모든 소유가 더욱 풍성하고 번성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데서 옵니다. 요셉에 대한 신뢰와 환대는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안에 더 큰 복을 주시는 이유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을 통해 주어집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가 떠난 곳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사라진 허전함이 남아야 합니다. 참된 복은 자신이 받아 누리는 게 아니라 남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어떤 섭리 때문에 세상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입혀진 하나님 은혜의 옷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형통한 노예, 주인이 믿고 의지하는 종, 주인의 집을 번영하게 만드는 종,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비록 말단 직원으로 입사했어도 소유주가 여러분을 경영자로 삼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막일을 시킬 일꾼으로 보았는데 나중에는 자신의 삶을 여러분 손에 맡길 수 있는 형통한 자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요셉처럼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복되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형통의 옷, 유혹의 구덩이

입력 : 2020-05-08 18:43

본문 : 창세기 39장 6~7절

말씀 : 요셉은 죽음이 뭔지도 모를 만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죽음 너머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품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애처로운 마음에 남달리 아껴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배다른 형들의 질투, 미움이라는 갈등 속에 자랐습니다. 그러던 중 열일곱 나이에 형들에 의해 남의 나라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으로 취급받는 사람, 그것은 이집트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릴 적 형들에게 편안한 인사 한번 받아본 일 없었듯, 노예가 된 지금도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노예는 아무리 열심히 잘살아 봐야 노예일 뿐입니다.

한숨과 눈물이 마를 날 없었을 10년 기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요셉은 하는 일마다 ‘형통한 자’ 되어 주인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은혜의 옷을 입히시니 주인이 신뢰의 옷을 요셉에게 입힙니다. 처음에는 가정 총무가 되고, 나중에는 주인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불행한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남다른 불행 가운데도 특별한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10대의 소년이 그새 용모가 준수한 20대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노예일 뿐이지만 권세 있는 집안에서 인정받는 일꾼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셉은 이제 능력 외모 인품 업무까지 갖춰진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그런 요셉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이 있었습니다. 주인이었던 보디발은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요셉의 준수한 용모만 보였습니다. 창세기 29장 17절은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몸매가 곱고 외모가 아리따운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머리와 어머니 라헬의 외모를 물려받았나 봅니다.

보디발과 그의 아내가 본 요셉의 모습은 둘 다 사실이었습니다. 하는 일의 형통함이나 용모의 준수함, 둘 다 요셉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었습니다. 요셉에 대해 보는 것이 서로 달랐던 두 사람은 요셉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서로 달랐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는데,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손에 요셉을 쥐고 싶어 합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과 동역의 대상으로 봤는데 여인은 요셉을 성적 욕구를 채우는 대상으로만 봤습니다.

기도 : 하나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사람을 신뢰와 동역의 대상으로 보게 하시고 나의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벗기려는 옷, 벗어버린 옷

입력 : 2020-05-10 00:00
본문 : 창세기 39장 8~12절

말씀 : 보디발의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위해 화장하는 여인이 돼 있었습니다. 외간남자, 그것도 새파란 젊은 종에게 ‘눈짓’하고, 동침하기를 청하되 ‘날마다 청하고’, 나중에는 ‘요셉의 옷을 붙들고’ 자신과 동침하자고 애걸합니다. 여인은 지금 잘못된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셉에게 유혹이었습니다.

요셉이 성공의 길을 달리며 매력이 있을 때, 외로울 때 아무도 없을 때,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채색옷은 형들이 벗겼는데 주인이 입혀준 신뢰와 은혜의 옷은 주인의 아내가 벗기려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요셉의 옷을 벗기려 하는 이 여인은 요셉의 삶에 등장한 또 다른 ‘형들’이었습니다. 형들은 숫자와 힘으로 요셉의 옷을 벗겼고, 여인은 주인이라는 권력과 육체의 정욕으로 요셉의 옷을 벗기려 합니다. 형들은 그 옷으로 아버지를 속였는데 보디발의 아내는 그 옷으로 남편을 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올바른 믿음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이자 ‘인간의 도리’라는 관점으로 “당신은 나의 여인이 아니라 주인의 여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깊이 고민하고 분명한 윤리의식에 따라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을 배신하는 것은 큰 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신앙의식으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사람에 대한 의리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 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유혹을 이겨내는 이유였고 힘이었습니다. 요셉은 자리를 즉각 피해버리는 구체적 행동으로 유혹에 대처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육신의 쾌락, 인생에 있을 수 있는 즐거움, 출세의 기회로 여길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가를 겁탈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요구해서 종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자기 옷을 붙잡은 여인의 손에 벗어 던져버린 그 옷이 어떤 옷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형통한 자 되어 보디발을 통해 입혀주신 은혜의 옷,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의 증거가 되는 옷이 아닙니까. 이국땅에 종으로 팔려와 근 10년을 살면서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너무나 귀중한 옷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입고 있어야 할 순결의 옷, 신실함의 옷, 신앙의 옷을 벗지 않으려고 안정의 옷, 출세의 옷을 벗어 던져버립니다. 세상의 옷, 일시적인 옷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옷, 영원한 옷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기도 : 하나님, 나의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할 줄 알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할 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에 대한 의리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5549&code=231115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