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옷, 누명의 옷
입력 : 2020-05-11 00:06
본문 : 창세기 39장 13~18절
말씀 :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했던 방 한편에 서 있었던 신상(神像)에 자기 겉옷을 벗어 걸치며 “이제 신은 우리를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말하며 끝까지 거절했다고 합니다. 여인은 보는 사람만 없으면 괜찮다고 여겼지만,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괜찮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17살 이전에 받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이 요셉으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게 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요셉의 단호한 거절은 여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만들어 아마 이런 말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종 나부랭이 주제에!” 그러나 진짜 종은 여인이었습니다. ‘성적 쾌락’의 종이었던 여인은 이제 증오의 종으로 돌변합니다. 성적 욕구로 가득했던 여인은 이제 복수심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집요하게 요셉을 유혹하던 여인은 이제 집요하게 요셉을 몰아세웁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끗발 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상황입니다. 여인은 먼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과 ‘우리’라는 대조를 통해 인종적 동질감, 민족 감정에 호소하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남편 보디발이 다른 민족 사람에게 집안의 모든 권한을 맡김으로써 “우리 민족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집안에서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기심을 이용해 선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동침하고자’라는 억지 누명을 뒤집어씌워 요셉을 도덕적으로 몹쓸 인간으로 몰아세웁니다. 요셉을 신뢰하는 남편에게는 민족 감정에 대한 언급이나 경쟁심, 시기심을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었다’라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표현을 사용할 뿐입니다. 여인이 교활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옷’이라는 단어는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주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주인이 입혀줬던 은혜의 옷을 벗어 던져버린 대가가 이렇게 억울한 누명으로 돌아왔습니다. 벗겨진 채색옷이 형들의 손에 남았었던 것처럼 그 옷이 아버지를 속인 증거물이 된 것처럼 의리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벗어 던진 그 옷이 이제 여자의 손에서 범죄의 물증이 돼버렸습니다. 달콤한 죄악의 유혹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 비열한 누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기도 : 하나님,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잃게 되더라도 믿음의 바른길을 걷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억울한 자리에서도 복수를 꿈꾸기 전에 하나님 앞에 올바로 반응하며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 (서울 혜성교회)
죄수의 옷, 형통의 옷
입력 : 2020-05-12 00:07
본문 : 창세기 39장 19~23절
말씀 : 요셉이 갇힌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훗날 요셉이 바로의 술 맡은 관원 장에게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 40:15)라고 말할 때 사용된 ‘감옥’이라는 단어는 형들이 요셉을 던져 넣었던 ‘구덩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요셉은 다시 한번 의도하지 않게 억울하게 구덩이에 던져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의 총리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감옥에서의 삶을 버텨낸 게 아닙니다. 감옥이라는 구덩이에서 억울함을 뒤집어쓰고도 살아갑니다. 요셉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보다는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살아갑니다.
감옥에서 죄수로 살아가는 요셉에 대한 묘사(창 39:21~23)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요셉에 대한 묘사(창 39:2~6)의 반복입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됩니다. 요셉이 사람들을 섬깁니다. 사람들이 요셉에게 일을 위임하고 맡기고 임명합니다. 사람들이 요셉에게 맡긴 것은 무엇이든 간섭하거나 돌아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요셉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일’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피해 숨어다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억울한 감옥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요셉에게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상에서는 너무나 온순하던 사람이 험한 일을 당하고 난 뒤 거칠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지만,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의 성품이나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함께하심을 붙잡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실은 내게 정말 좋은 것을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서의 삶은 이집트의 궁중 생활을 들여다볼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왕의 죄수들 이야기를 통해 요셉은 이집트 왕궁에서 돌아가는 역학관계를 이미 다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억울한 감옥살이는 나중에 왕의 곁에서 총리로 살아갈 지혜를 준비하는 훈련 장소였습니다. 내려가는 길, 즉 감옥의 삶이 요셉에게 주신 꿈을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지름길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바닥 생활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삶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길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좋은 길을 예비하셔서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어디를 가든지, 무슨 옷을 입고 있든지, 무슨 역할을 맡았든지, 믿음의 바른 태도를 잃지 않게 하옵소서.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형통케 하심이 드러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처벌의 구덩이, 신뢰의 옷
입력 : 2020-05-13 00:08
본문 : 창세기 40장 1~4절
말씀 : 요셉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죄목이 붙었지만, 사형 선고를 받지 않고 감옥에만 갇히게 된 것은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갖고 계신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였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은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감옥에서 요셉의 삶’도 붙들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돌보고 살피던 바로 그 감옥에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죄인으로 들어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이집트 왕에게 범죄’하여 갇히게 된 것입니다. 왕의 식음료를 담당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겠지만 당시는 독살이 횡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왕의 생사를 좌우하며 비서관 역할도 하는 그 자리엔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람만 세웠을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 역사 문헌에서도 이 직책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매 순간 왕의 면전에서 살아가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감옥 간수장들도 두 관원장들을 돌보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죄수지만 그들이 언제 다시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왕의 친위대장은 요셉을 시켜 그들을 ‘섬기게’ 합니다. 요셉은 이렇게 감옥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었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웁니다. 왕궁 ‘밖의’ 사람이던 요셉은 그렇게 왕궁 ‘안의’ 생활과 분위기를 익히게 됐습니다.
만약 이때의 친위대장이 보디발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자기 손으로 요셉을 감옥이라는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간수장이 요셉에게 죄수를 돌보는 재량권을 맡길 때, 보디발이 딴죽을 걸었다면 허락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은 이를 허락해줬습니다. 지나온 10여년 생활을 통해 요셉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감옥에 던져 넣은 것은 징벌을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아내로부터 요셉을 격리해 보호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원하는 대로의 처우를 받아야만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운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냉대를 받더라도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다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혹 넘어진 자리에서는 다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억울한 상황에서 나를 알아줄 만한 사람에게 외면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억울함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때에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섬김의 옷, 잊힘의 옷
입력 : 2020-05-14 00:01
본문 : 창세기 40장 5~23절
말씀 : 두 관원장이 감옥에서 며칠을 보내던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각각의 꿈을 꾸고는 근심에 빠집니다. 감옥 안에서 근심이 없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감옥 안에서 ‘근심의 빛’이 얼굴에 가득해야 할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근심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근심을 살피고 알아보는 자가 돼 있었습니다.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남의 상처를 살피는 사람이 됐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꾼 꿈을 요셉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몽해 줍니다. 요셉은 혹시라도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꿈을 해석해 주지 못할 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자신의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꿈 또한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머리를 들게(복직) 됐습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왕의 떡 맡은 관원장은 그의 몸에서 머리를 들어내게(사형당하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감옥에 갇혀 같은 날 꿈을 꿨고, 두 사람의 꿈도 비슷해 보였지만 결말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모든 꿈과 해석의 중심에 요셉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선악이 판별됩니다. 그를 통해 죽고 사는 문제가 예측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알려집니다.
요셉의 믿음과 고백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다는 것이 ‘해몽의 실현’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요셉이 갇혔던 감옥이라는 구덩이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누군가는 원래의 자리로, 누군가는 죽음의 자리로, 누군가는 더 높은 자리로 옮겨가게 될 잠깐의 정거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복직될 징조의 꿈을 꾼 관리에게 훗날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을 ‘기억하고 건져 달라’ 부탁했습니다. 사흘 후 자유의 몸이 되어 감옥을 나서는 술 맡은 관리는 배웅하는 요셉에게 약속하고 또 약속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러나 그는 곧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죽은 사람이라 여겨 잊혔던 그 시간에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아야 했던 요셉은, 이제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 취급받으며 ‘잊힌 사람’으로 감옥에서 2년을 더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주목받지 못하고 돌봄 받지 못하고, ‘철저하게 잊혀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고 계셨고 붙들고 계셨고 그를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기도 : 하나님, 마땅히 받아야 할 사례도 받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잊힌 존재가 되었다고 느낄 때도 나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기다림의 구덩이, 총리의 옷
입력 : 2020-05-15 00:06
본문 : 창세기 41장 37~45절
말씀 : 잊혀진 사람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오늘을 인내하며, 감옥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요셉 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2년’은 하나님 편에서는 ‘때를 기다리는 2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언제나 있을 수 있지만’ ‘이전에 없었던’, ‘언제든 있을 수 있었지만’ ‘바로 그 때에’ 어떤 사건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미 준비돼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터널을 양쪽 끝에서 뚫어 들어가듯이 하나님께서도 사건의 양쪽 끝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상상조차 못했던 억울한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그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조직을 다스릴 자질을 배우게 됩니다. 누명 때문에 감옥이라는 구덩이에 던져졌지만 그곳에서도 왕궁의 일을 감당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관원장들의 꿈 해몽을 통해 요셉의 은사와 지혜가 ‘감옥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은사와 지혜가 이집트를 위해 사용되는 환경이 준비되기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꿈이 요셉을 이집트로 이끌었다면, 바로의 꿈이 요셉을 왕궁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일곱 암소와 일곱 이삭이 등장한 바로의 꿈은 너무 께름칙하고 흉측합니다. 이 꿈이 이집트의 앞날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 바로는 꿈을 해석할 만한 나라 안의 모든 학자와 관리들을 긴급하게 불러 모읍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때, 왕의 곁에서 술잔을 받들며 왕을 모시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냅니다. 노예의 옷, 죄수의 옷을 입었던 요셉이 이제 왕을 만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왕 앞에 섰습니다. 신이라 불리던 이집트의 왕이 ‘히브리 노예’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요셉이 부탁하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이 요셉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은 꿈 해몽만이 아니라 이 문제의 해결책까지 그 자리에서 제안합니다. 이집트의 점술가들과 현인들이 해석하지 못한 문제를 요셉이 해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바로는 당장 그 자리에서 요셉에게 최고 관직을 부여합니다. 총리의 세마포 옷을 입고 왕 다음가는 자리에 앉습니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왕의 결재용 반지가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집니다. 권위를 상징하는 금 사슬 목걸이를 걸게 됩니다. 요셉의 손에 보디발의 집이 맡겨졌던 것처럼 이제는 왕의 집 즉, 한 나라가 요셉에게 맡겨졌습니다.
기도 : 하나님,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를 높이시고 사용하실 그 날까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고 성실하며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연단의 구덩이, 영광의 옷
입력 : 2020-05-15 17:23
본문 : 창세기 41장 46절
말씀 : 한 나라의 총리가 되기에 30세라는 나이는 너무나 젊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셉의 나이를 두고 ‘겨우 서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요셉에게 있어 지나온 13년 시간은 구덩이에서 구덩이로 전전하는 고통의 시간인 동시에,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는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 기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훈련을 마쳤더니 ‘겨우 서른’에 총리가 되는 은혜를 얻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베푸실 때는 먼저 우리를 은혜 받을 만한 ‘연단의 길’ ‘검증의 길’로 이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이 ‘함량 미달’로, ‘자격 불충분’으로 판정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덩이의 때를 믿음 가운데 인내하며 잘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요셉처럼 높아짐의 은혜를 누리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의 삶은 돌고 돌아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은 꿈을 이루는 최단 거리였습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이집트로 내려가는 대상(隊商)을 만나지 않았다면, 보디발의 집에 팔리지 않았다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이 즉각 요셉을 꺼내 주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는 멀리 돌고 도는 헛고생을 하는 것 같겠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 아래 직선의 길을 걷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순종의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믿음의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바로왕 앞에 섰을 때 요셉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함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능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나 왕 앞에서 겸손히 자기 역할을 다하고 기다렸습니다. 촐싹거리지 않았습니다. 나대지 않았습니다. 유능한 척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처분에 자기 인생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 훈련된 요셉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침에는 죄수로 일어났는데 저녁에는 총리로 잠자리에 들면서 요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요셉이 죄수로 감옥에서 깨어나며 아무 기대 없이 감옥에서의 하루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지난 밤 바로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바로의 꿈 때문에 왕궁은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요셉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감옥에서의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한숨짓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요셉과 같은 이런 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 하나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갚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영광의 옷, 사명의 옷
입력 : 2020-05-17 00:01
본문 : 창세기 41장 46~49절, 53~57절
말씀 : 요셉이 입게 된 총리의 옷은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옷에는 사람들의 지켜봄의 ‘눈’과, 수군거림과 업신여김의 ‘입’과,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가차 없이 물고 뜯고 끌어내리겠다는 정치적 야심에 가득한 사람들의 ‘손’이 붙어 있는 부담스럽고 무거운 무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당장은 이집트 땅 어느 누구도 요셉 앞에서 함부로 수족을 놀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력과 지위라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욕정을 움직이고 모든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기질을 드러내고 시험한다. 힘과 권력을 소유했을 때의 인간보다 더 야만적인 동물은 없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즉시 왕의 앞을 떠나 풍년이 다가올 땅, 대흉년이 다가올 땅, 자신의 손에 맡겨진 일터인 이집트 온 땅을 살펴 순찰하기 위해 떠납니다. 이제부터는 최소 14년 동안의 삶으로 자신이 했던 말을 실현해내기 위해 총리의 옷을 입고 일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세상에 매여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주어진 사명의 땅을 순찰하며 준비하고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대기근의 때에, 민심이 흉흉해질 수 있는 고난의 때에 요셉은 무상배급을 통해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함으로서 ‘바로의 집’을 더욱 부하게, ‘바로의 통치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갑니다. 7년 대흉년은 분명 엄청난 위기이고 고통이었지만, 요셉이라는 인물로 인해 바로왕은 대외적으로 큰 기회를 얻고 영향력을 키우는 기회가 됐습니다. 바로에게는 요셉이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자신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요셉이 이제는 하나님이 바로에게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성경은 요셉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로 묘사합니다. 본문 46~57절 사이에서 ‘온’ 또는 ‘모든’이라는 단어가 열두 번이나 사용됩니다. 요셉의 영향력 아래에서 당시 얼마나 많은 나라가 도움을 얻었는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입혀준 권력을 옷을 입고 현실의 풍요에 함몰되어 멸망의 때를 준비하지 못하는 세상을 구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옷을 입고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쥐고 있든지, 사람들을 살려내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배만 채우라고 주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내 옷자락이 덮이는 영역까지는 내가 책임지고 살려내도록 섬기라고 입혀주신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여 생명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잊힘의 옷, 잊음의 옷
입력 : 2020-05-18 00:02
본문 : 창세기 41장 50~52절
말씀 :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새 이름이 생겼습니다. ‘낫(nath)’이라는 음절은 여신(Neith) 이름을 표현한 것인데 요셉에게 주어진 이름은 ‘신이 말하며 살아있다’ 혹은 ‘살아있는 신이 그에게 말했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요셉이 선택한 게 아니라 요셉에 대한 이집트 왕 바로의 평가가 담긴 이름입니다. 바로는 자기가 섬기는 이집트 신을 염두에 뒀겠지만 우리는 요셉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요셉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13년 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요셉에게 아내가 생기고 자녀가 생깁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요셉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히브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이 여전히 믿음의 가치를 지키며 살려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요셉은 첫째 아들을 낳아 ‘잊음’이라는 의미의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요셉이 당해왔던 ‘잊어짐’의 원통함을 ‘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높이 들어 세움으로, 요셉이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면서부터 시작돼 감옥에서 나오기까지 이어진 13년의 수고를 잊게 하십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삶의 자리,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지금 이집트에서의 삶을 더 기대하고 안정되게 만드셔서 한이 서린 아버지의 집을 잊게 하십니다.
둘째 아들을 낳은 요셉은 아이의 이름을 ‘두 배의 축복’이라는 의미인 ‘에브라임’이라고 짓습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안 풀렸던 요셉의 삶을 하나님께서 두 배의 결실을 얻은 것처럼 번성케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종의 신분, 빈손으로 시작한 이집트 땅에서의 삶인데 그런 삶에 가정과 자녀, 제국의 2인자라는 존귀까지 얻게 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번성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은 ‘므낫세(잊음)’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에브라임(번성함)’으로 현재를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결혼과 후손, 정착 이야기가 중요하게 기록되는 것은 요셉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집트 땅에 살아가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증조부였던 아브라함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이것을 예언하셨습니다.(창 15:13)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나의 선택이든 혹은 타의에 의한 것이든, 이 삶은 내가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기도 : 하나님, 순종하는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에게 잊힌 존재가 되어 원통하고 억울할 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내 삶이 나도 몰랐던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심음의 옷, 거둠의 옷
입력 : 2020-05-19 00:03
본문 : 창세기 42장 1~17절
말씀 :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몽 이후 7년이 흘렀습니다. 풍년에 뒤이어 찾아온 7년 대흉년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야곱과 그 자손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양식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아들들, 요셉의 형들을 다그칩니다. 살길이 막막한 처지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형들의 모습은 심각한 문제 앞에서 분명한 대책을 세워 나라를 구하는 요셉과 대조됩니다.
형들은 사랑받는 자의 채색옷을 시기하여 찢어 벗길 줄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막으실 때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질투로 가득 차 꿈꾸는 자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질 줄은 알았지만,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을 구덩이에서 건져낼 힘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채근에 못 이긴 열 명의 아들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동복(同腹)동생 베냐민을 형제들의 일행으로 함께 보내지 않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들은 곡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 이집트의 권력자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합니다. 순간 요셉은 이들이 자신의 형들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봤지만, 형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었던 요셉이 청년이 되어 이집트인의 복장을 하고 이집트 언어를 사용하면서 권력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형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종으로 팔려간 사람이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엎드려 절하는 형들을 보면서 20여년 전에 자신이 꾸었던 꿈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즉각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엄한 목소리로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워 심문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심문을 당할 때 형들은 그저 가족 내력을 말하며 자신들의 무죄함을 증명하느라고 애씁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권력자는 이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간곡한 호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치 20년 전 요셉이 형들에게 애걸했을 때 외면당했던 것처럼, 그리고는 열 명 모두를 사흘 동안 감옥이라는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과거 요셉의 애걸을 듣지 않았던 형들은 이제 자신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는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잠언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기도 : 하나님, 우리는 은혜 없이는 어떤 열매도 거둘 수 없고 오늘의 삶조차 불가능합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존재가 살아갈 힘은 오직 은혜입니다. 성령과 화평으로 심고, 의의 열매와 영생을 거두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6946&code=231115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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