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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1>- <5>/1주일 밤낮 회개한 구국기도회… 3일 후 기적 같은 인천상륙작전

영국신사77 2020. 4. 18. 11:35

북한 남침 속 대한민국 구한 세 번의 기적, 우연이 아니다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1>

입력 : 2020-03-20 00:05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50년 6월 27일 유엔주재 소련대사가 불참한 가운데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3’을 7대 1(기권 2)로 가결했다. 결의안의 내용은 회원국에 북한의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국민일보DB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영적으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주 6·25전쟁 격전지를 탐방하고 전쟁 생존자를 만나 인터뷰한다. 이 전쟁에 관심을 갖는 것은 6·25전쟁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분이 피 흘리며 싸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 공격으로 시작됐다. 지상군 약 18만명, 대포 400문, 소련제 탱크 242대 등의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국군은 4일 만에 절반가량인 4만4000여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서울도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누가 봐도 패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원인은 뭘까. 그 배경에는 몇 가지 기적 같은 일들이 있었다.

첫째,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신속하게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당시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반도를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된 뒤였다. 자국이 공격받은 것도 아닌데 트루먼이 그렇게 빨리 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한 것은 기적이다.

둘째, 유엔 상임이사국 회의에서 유엔이 참전을 결의할 때 소련 대표가 불참했다. 6·25전쟁을 둘러싼 미스터리 중 하나는 50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이다. 만약 회의에 참석해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 참전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지원 39개국, 전후복구 7개국 등 67개국의 지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 전쟁사에 한 국가를 위해 67개국이 참전한 역사는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북한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약 1주일간 서울에서 지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김일성은 “인민군이 남으로 침공해 서울을 점령하기만 하면 남한 내 각처에서 북에 동조하는 인민들의 대대적 봉기가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싸우지 않아도 남반부는 스스로 무너진다”는 박헌영의 말을 믿고, 서울에서 1주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1주일이 결국 미군과 유엔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는 시간을 만들어 줬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우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분명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기도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전차. 국민일보DB

결정적으로 6·25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피 흘리며 싸운 국군과 UN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은 한국을 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미군은 50년 7월 1일 스미스대대 장병 540명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3년 1개월 동안 178만명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 전투, 장진호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전사 5만4246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만3284명 등 17만2847명이 희생됐다.

세계 최강국 국민이 약자를 위해 바친 희생은 값지고 숭고했다. 특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장군 등 최고위층 아들 142명이 참전해 그중 35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육군 중위는 52년 미 3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워커 8군 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해 부자가 모두 한국전 참전 가족이 됐다. 워커 장군은 도봉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지니 밴 플리트 2세도 B-52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52년 4월 새벽 평남 순천 지역으로 야간출격을 나갔다가 전사했다. 미 해병 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버드대학의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2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은 용사 수십 명이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했다. 2009년 미국의 국방정보센터(CDI)는 6·25전쟁 당시 미국이 부담한 전쟁비용이 총 670억 달러라고 산출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910억 달러(약 767조 원)에 달한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 물자만 지원한 게 아니다. 한국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리며 싸웠고 고귀한 생명까지 바쳤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한국은 그때 없어졌을 것이다. 살아남았다고 해도 아프리카처럼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김재동 목사
약력=성균관대 전자공학과 및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경인여대 강사 역임. 현 대한역사문화원 원장, 6·25 역사탐방 코디네이터, 서울 하늘교회 담임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남침 허가 받으려 매달린 김일성… 스탈린, 1950년 4월에 허락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2>

입력 : 2020-03-27 00:01
김일성이 1949년 3월 박헌영 부수상 등 6명의 각료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군사 원조와 무기·장비 지원을 요청하고 ‘남침 전쟁’ 허가를 간청했다. 국민일보DB

6·25전쟁 발발 원인을 놓고 한때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4년 6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넘겨받은 6·25전쟁 관련 216점, 548쪽의 문건과 미국 공문서보관소에 소장된 160만쪽의 문서에서 6·25전쟁이 남침임이 드러났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3일부터 20일까지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 등 6명의 각료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3월 7일에는 스탈린을 찾아가 무기와 장비 지원 등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남침 허가를 간청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인민군대가 남한 군대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지 않으며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거부했다.

당시의 스탈린-김일성 회담 기록은 94년 일부 공개된 ‘구소련 비밀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1949년 3월 7일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 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 동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군대는 남한 군대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한의 인민 대중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하다.”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남침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둘째,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있다. 적대관계가 일어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한 미·소 협정이 아직 유효하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협정이 우리 측에 의해 파기된다면 그것은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하는 대신 북한과 경제·문화 협정 등을 체결했다. 이는 명목상의 협정일 뿐, 중요한 것은 3월 17일 체결된 조·소 군사비밀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의해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20명의 특별군사고문단을 1949년 5월 20일까지 파견하기로 했다.

북한은 소련과 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한 다음 날인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당국의 주재 아래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측은 여하한 성질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 방위를 한다.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국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전쟁에 있어 공동행동을 취한다.”

이는 타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중공이 개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북한이 남침 전쟁을 도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협정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스탈린을 재차 찾아가 남침을 허가해 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 국제국이 작성한 ‘1950년 3월 30일~4월 25일 김일성의 소련 방문 건’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4월 10일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것으로 당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는 모습. 스탈린은 50년 4월 10일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국민일보DB

이때 스탈린이 김일성의 간청을 수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민군대 군사력이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육성됐다. 남한의 군사력 즉 무기, 장비가 미약하고 전투병력은 전투 경험이 없다. 둘째,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변했다. 중공군이 중국을 공산화하고 1949년 10월 1일 공산국가를 수립했다. 이제 중공이 북조선의 남침 전쟁을 도울 수 있게 됐다. 미군이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하고 1950년 1월 12일에는 애치슨라인을 통해 남한을 극동 방위권에서 제외했다.

남침을 허가한 스탈린은 바실리에프 장군에게 남침 전쟁 작전 계획을 작성토록 지시했다. 바실리에프 중장에 의해 작성된 김일성의 남침 전쟁 계획은 3단계 작전으로 만들었다.

“제1단계 작전은 38선을 돌파해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 원주 삼척을 잇는 선까지 5일 안에 진격하고, 제2단계 작전은 그로부터 14일 안에 군산 전주 대구 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다. 제3단계는 그 후 10여일 안에 목포 여수 사천 마산 부산을 잇는 남해 일대를 점령해 전쟁을 종결한다.”

이상 여러 자료를 통해 6·25전쟁은 양쪽의 과실에 의해 벌어진 단순한 민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스탈린과 김일성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명백한 남침 전쟁임을 알 수 있다.

북한과 소련, 중공의 의도를 꿰뚫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1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 전쟁은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 사이의 대결입니다.”

김재동 목사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북한, 남침 1시간 전 옹진반도 집중 포격… ‘북침’ 유도했다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3>

입력 : 2020-04-03 00:06
6·25전쟁 개전 초기 옹진반도를 지키던 육군 제17독립연대 참전용사들이 2017년 8월 보은행사에 함께했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쪽 옹진반도부터 공격을 시작해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으로 확대됐다. 옹진반도는 국군 제17독립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 4시가 되자 북한은 30분간 옹진반도를 향해 엄청난 양의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아직 조용했다. 새벽 5시가 돼서야 38선 전역에서 포사격이 이뤄졌고 30분이 지나서야 일제히 38선 전 지역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북위 38도선 부근 옹진반도에 첫 포격을 시작으로 남침을 시작했다.

옹진반도는 왜 다른 지역보다 한 시간 먼저 공격이 이뤄졌을까. 이는 북침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6·25전쟁의 남침시각이 새벽 4시냐 또는 5시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에 북한의 기막힌 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배영복 장군은 ‘전쟁과 역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전면 남침 시각을 6월 25일 새벽 4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새벽 4시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공격개시 시간이 ‘6월 25일 5시’라는 근거는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포로를 통해 획득한 기밀문서들 속에서 공격시간은 ‘5시’라고 기록한 메모 수첩이 여럿 발견된 것이다.

적 2사단의 경우 공격 개시 시간을 ‘05:00’로 기록했고, 전투유공자 표창을 올리는 문서에도 5시로 돼 있다. 적 2사단 자주포대대 3중대 1소대장 박영희의 공적서는 ‘1950년 6월 25일 5시부터 상부의 명령에 따라 38도선 전투에서 성과는…’으로 시작된다.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있다. 이날 KBS라디오는 북한의 남침 소식을 알리는 첫 방송(7시 뉴스)에서 ‘6월 25일 새벽 5시’라고 발표했고, 12시 뉴스에서는 ‘아침 5시부터 8시 사이에 남침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육군본부 상황실의 통보를 받고 국방부 정훈국장(이선근 대령)이 직접 보도 문안을 작성한 뉴스였다.”

이렇게 볼 때 전면 남침 시각은 4시가 아니라 5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전면 남침 시각으로 새벽 4시가 정설이 된 것은 옹진반도 포격시간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진반도는 다른 지역보다 1시간 먼저 공격을 받았을 뿐이다.

새벽 4시에 38선 모든 지역이 아닌 옹진반도에만 30분에 걸쳐 포사격이 시작된 것은 옹진을 지키는 국군 17연대로 하여금 해주로 북침하도록 미끼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17연대가 조금이라도 북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그를 빌미로 38선 전역에서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시나리오가 설정돼 있었다.

제17독립연대가 1950년 6월 25일 옹진반도에서 철수할 때 타고 온 LST-801함.

그러나 17연대는 초전에 와해돼 반격은커녕 사상자 추스르기에 급급했다. 결국, 2719명 중 750명의 사상자를 내고 25일 저녁 육군본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17연대는 해군수송선을 타고 26일 아침 인천으로 철수했다. 17연대가 해주를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불발됐다.

그로 인해 김일성은 새벽 5시를 기해 38선 전역에 걸쳐 30분간 포사격을 감행했고 5시 30분부터 전면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보병으로 참가한 인민군 병사 중에 시인이 있었다. 그가 지닌 수첩에서 여러 편의 ‘전쟁 시’가 발견됐는데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몹시도 기나긴 38선의 밤 빗발이 쏘다지는 속에서 하룻밤을 새는구나 때는 엄숙한 시간이 찾아왔다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 우리들은 전 인민과 함께 적의 포연탄우 속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는 아침 하늘’이란 새벽 5시 30분 이후의 시간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측근에게도 남침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6월 25일 새벽 3시에 비상내각 회의를 소집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동지들, 매국 역적 이승만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화국에 1~2㎞를 무력침공 해왔습니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대에게 반격명령을 내렸습니다. 승인하는 결정을 채택하여야 합니다”라고 제안했고, 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됐다.(전 내무성 차관 강상호의 증언) 그 후 새벽 4시에 옹진반도에 대한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각료들까지 속인 참으로 기막힌 계략과 연출이다.

북한이 남침 사실을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증거가 많다. 총사령부가 사단에 내린 정찰 명령 1호(1950.6.18)와 전투명령 1호(1950.6.22)가 있다.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남침 사실이 밝혀졌고, 1992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러시아 교과서는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고 명시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 유성철 이상조의 증언 등 많은 증거가 있다.


김재동 목사

남침 직후 대한해협 해전·춘천전투,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4>

입력 : 2020-04-10 00:13
1950년 6·25전쟁 당시 국내 유일의 전투함이었던 백두산함(위), 아래는 대한해협 전투 1개월 전 경남 진해 제2부두에서 찍은 백두산함 승조원 기념사진. 국민일보DB


6·25전쟁 중에는 절체절명의 대한민국을 구한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그중 개전 초기에 해상과 육상에서 최초로 적을 물리친 대한해협 해전과 춘천 전투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첫 번째 전투는 대한해협 해전이었다. 6·25전쟁 발발 후 북한군은 가장 먼저 동해안의 정동진과 옥계 지역에 해상을 통해 상륙했다. 이에 적 상륙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진해항에 있던 당시 국내 유일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긴급출동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무장특수부대 600여명을 태운 1000t급 무장 수송선이 38선을 넘어 부산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부산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군은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적함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옥계 지역으로 출동 명령을 받고 북상하던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에서 6월 25일 저녁 8시 12분 우연히 괴선박을 발견했다. 자정이 되도록 교신을 시도했으나 상대방에서 아무런 답변이 없자 적함으로 확신한 최용남 중령은 승조원 60여명의 장병을 향해 “김일성 공산당은 우리의 적이다.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라는 말을 하고 6월 26일 새벽 12시 30분 적함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시각부터 적함과의 치열한 교전이 오갔다. 새벽 1시 10분이 됐을 때 적함이 침몰하기 시작하더니 새벽 1시 38분 북한군 600여명을 태운 무장 수송선은 부산 앞바다에 완전히 침몰했다. 이것이 바로 6·25전쟁 최초의 승전인 대한해협 해전이다.

이 빛나는 승전의 과정에는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전병익 중사는 적탄에 의한 흉부 관통으로, 김창학 하사는 파편상으로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전 중사와 김 하사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적함은 어찌 됐습니까?”라고 외쳤다.

그리고 적함이 침몰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둘 다 ‘대한민국… ’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백두산함이 적함을 침몰시키지 못했다면 부산항은 적의 수중에 점령당해 유엔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공산화됐을 것이다.

두 번째는 춘천 전투다. 6·25전쟁이 발발할 때 당초 북한군 계획은 북한군 1군단을 개성 문산 동두천 포천 방면에 투입해 38선을 돌파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 2군단을 화천 춘천 인제 홍천에 투입해 춘천과 홍천을 각각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과 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가,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북한군 2군단 중 춘천 방면에 대한 공격은 제2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실시한 북한군 자체 검열에서 최우수 부대로 선정될 정도로 전투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6·25 남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춘천 점령의 임무가 주어졌다.

북한군 제2사단의 작전 계획은 38선을 뚫고 모진교를 지나 하루 만에 옥산포 소양강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 이남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침 계획대로 북한군은 전쟁 발발 30분 만에 모진교를 점령하고 옥산포를 지나게 됐다.

그런데 옥산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옥산포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옥산포 전투가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꿨다. 당시 국군 6사단 7연대는 옥산포를 지나고 있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사진은 제6사단 7연대로 북한군이 춘천지역을 공격했을 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국민일보DB

거침없이 내려오던 북한군은 뜻밖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입고 하루 동안 옥산포를 넘지 못하게 되면서 하루 만에 춘천을 점령하려는 작전 계획이 실패하게 됐다. 옥산포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6사단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중령이 전쟁을 예측하고 미리 한 달 전 우두산 8부 능선에 참호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성 소령이 지휘하는 6사단 포병대대는 적 1개 연대를 괴멸시키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비록 춘천이 적에게 점령되기는 했으나 국군 6사단이 적의 침략을 3일 동안 막아주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수도권 외곽 포위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고 남한을 조기에 점령하려 했던 북한군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이처럼 대한해협 전투와 춘천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또 자유 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운 수많은 무명용사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김재동 목사



1주일 밤낮 회개한 구국기도회… 3일 후 기적 같은 인천상륙작전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5>

입력 : 2020-04-17 00:09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작된 통회자복기도회에는 250여명의 목사 장로가 모여 절체절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인 대구 부산 마산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대한민국은 낙동강 방어선만 뚫리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 한국교회는 하나가 돼 부산 초량교회 중앙교회 항서교회 광복교회, 구 경남도청, 부산 구덕운동장, 해운대 백사장 등 여러 장소에 모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1950년 9월 구국기도회가 열린 구 경남도청 건물.

특히 초량교회에는 전국에서 피난 온 250여명의 목회자와 장로들이 모였다. 이들은 한상동 박형룡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8월 말에서 9월 중순까지 2주 동안 국난 극복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설교와 기도로 이뤄진 첫째 주간의 집회 가운데 회개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다.

회개 기도는 일주일을 밤낮으로 계속 이어졌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한다. 특히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것을 회개했으며 성도들과의 간음죄, 양 떼를 버리고 먼저 도망 나온 비겁한 마음들을 회개하오니 부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이 회개기도에 참가했던 초량교회 강월남 집사는 “당시 목사와 장로들의 회개는 참으로 진지했고 그 기도회가 얼마나 간절하고 뜨거웠던지 기도회가 끝날 무렵엔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 어느 목회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초량교회 마룻바닥에서 놀라운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들이 과거 신사참배를 했던 죄부터 개인의 죄, 민족의 죄를 있는 대로 다 털어놓으니 예배당 마룻바닥이 목사님들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됐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눈물로 범벅돼 깊게 외치는데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쫘악 밀고 올라가는 것 같더랍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기도하고 울부짖은 후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겁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인천상륙이지만 영적인 발동은 기도하고 찬미하는 초량교회 마룻바닥에서 먼저 시작된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고 찬미할 때에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초량교회에서 밤낮없는 회개기도가 있은 지 3일 후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성공할 확률이 500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전쟁 역사에 길이 빛날 전투로 ‘독 안에 든 쥐’가 된 공산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혼비백산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9월 28일에는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맥아더 장군은 29일 낮 12시, 수도 서울의 환도식(還都式)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를 해방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장군은 또 이렇게 선언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영도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돌려드립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의 압제에서 해방돼 자유와 인권을 되찾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으며 “대한민국을 되찾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박윤선 목사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9·28 서울 수복이 있기 전 초량교회당에서 열렸던 피난 교역자 부흥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시간에 참석한 교역자들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했다. 그 뼈아픈 회개는, 각자가 과거 일제의 핍박 시에 신사참배를 한 그 죄로 인한 것이었다. 나도 단 한 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언제나 그 일로 인해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 그 죄를 회중 앞에 고백했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38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다.”

6·25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기도로 승리한 영적 전쟁이었다. 하나님은 6·25전쟁 발발 이후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한 교회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마침내 대한민국을 지켜주셨다.

우리는 6·25전쟁의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기습 남침한 북한 공산군들과 싸우다 전사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함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수많은 성도의 기도가 있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김재동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3365&code=231111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