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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베트남의 '언더우드' 장요나 선교사 (11)-(20)

영국신사77 2020. 3. 31. 00:13

[역경의 열매] 장요나 (11) 10개월 만에 마비에서 풀려 입 떼자마자 “감림산…”

가족들 내가 움직이자 마지막 몸부림으로 생각… 깨어난 순간 “감림산기도원 가라” 들려

입력 : 2020-03-16 00:06
장요나 선교사가 1988년 경남 양산 감림산기도원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다.

나는 10개월 만에 다시 깨어났다. 내가 깨어났으리라고 상상도 못 한 가족은 죽기 전에 몸이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건 줄 알고 황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응급실에서 내가 마비에서 풀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회복에 속도가 붙었다. 산소호흡기와 유동식 투입용 호스를 떼고 이틀 만에 목구멍에 미음을 흘려 넣었다. 입가가 실룩거려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처음 입을 떼자마자 나는 “감림산, 감림산”이라고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감림산이 아니라 감림산기도원이었다. 몸이 깨어나면서부터 내 안에 ‘감림산기도원에 가라’는 음성이 들렸다.

경남 양산에 있는 기도원이었다.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깨어난 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10개월 동안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면서 온몸은 흐느적거렸고, 아직 힘을 받지 못한 다리를 세워놓으면 곧 허물어졌다. 한쪽 눈은 실명이 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6년 봄 나는 부산에 사는 이모님께 연락했다. 택시를 불러 이모님과 함께 감림산기도원으로 향했다.

1년 만에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 뼈에 가죽만 남았다. 이모와 몇 사람이 38㎏밖에 안 되는 나를 가뿐히 부축해 산비탈에 있는 기도원의 예배당으로 향했다. 이옥란 감림산기도원 원장님은 이모님의 등에 업혀 가는 나를 보고, 누가 감림산에 시체를 묻으려고 떠메고 온 줄 알았다고 했다.

이모와 사람들이 부축해 가는 동안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다. 후회와 자책의 눈물이 옷 앞자락을 흠뻑 적셨다. 

‘아 나는 탕자구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그것이 내 것인 줄 알고 자랑하며 살았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생명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둘 중 한 곳에 가야 한다. 전신이 마비된 나를 보고 사람들은 죽었다 했지만, 내 영은 살아서 하늘나라를 자유롭게 오갔다.

천국은 그야말로 생명의 세계였다. 솜사탕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깔로 살아 움직이며 오케스트라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무것도 해할 게 없고 오직 찬양과 감사만으로 충만한 세계,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의 보좌 옆에는 지옥이 있었다. 지옥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찬양도 기쁨도 감사도 없었다. 고통과 아픔, 절규만이 가득했다. 소멸하지 않는 뜨거운 불이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했다. 그 불길 안에서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목말라했고 증오와 갈등으로 적의를 불태웠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만 남아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었다.

지금도 지옥의 그 처참한 모습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든다. 절대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철저히 경험한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2) 기도 중 야자수 숲 보이고 “네가 갔던 곳이다” 주 음성이…

열대 지방 누비며 연설하고 집 짓고… 식물인간일 때 꿈 꿨던 장면과 같아

입력 : 2020-03-17 00:07
장요나 선교사는 경남 양산 감림산기도원에 수시로 초청받아 구국철야 집회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다. 2016년 장 선교사(오른쪽)가 이옥란 감림산기도원장(가운데)과 기념촬영을 했다.

기도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혼자 일어서기도 힘든 내가 숙소에서부터 산비탈 위에 있는 예배당까지 가는 건 엄청난 고행이었다. 감사하게도 사람들이 내 방에 줄을 매달아 줘서 그 줄을 잡고 겨우 일어나 한발씩 떼며 사람들의 등에 업혀 예배당에 올라갔다.

내가 감림산기도원에 올라갔을 때 여름 성회가 한창이었다. 알고 보니 감림산기도원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표 기도원으로 성회가 열리는 여름이면 문전성시를 이뤘다. 내가 붙박이로 있던 큰 성전에선 종일 말씀 강의와 찬양 기도 일정이 빽빽하게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하나님과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기도원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을 찾아보니 새벽 3시였다. 그 시간이라면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결심한 그 날부터 캄캄한 새벽에 산을 올랐다. 기도의 장소로 정한 곳은 구국 제단이었다. 이옥란 원장님이 구국을 위해 세운 제단인데 많은 사람의 눈물 기도가 쌓인 기도터였다. 그 자리에서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내 죄과를 회개케 하시고 심령을 새롭게 하셨다.

그날도 죄 고백의 눈물로 제단을 흠뻑 적시고 기도하고 있었다. 눈을 떴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면서 기도원 지붕 위로 올라갔다. 놀랍게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건 기도원이 아니라 야자수가 우거진 열대 지방 숲이었다. 야자수 사이로 내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모습과 많은 건물을 건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식물인간일 때 꿨던 꿈과 같은 장면이었다.

10개월 동안 누워있을 때 참 많은 꿈을 꿨다. 특히 열대 지방을 누비고 다니며 연설하고 집을 짓는 꿈을 연달아 꾸곤 했다. 그때는 예지몽이라 생각했다. 건강이 회복되면 아마 열대 지방에 가서 건설업을 크게 일으켜 정계까지 진출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꿈이라 생각해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그 꿈의 장면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한참 후 눈을 떠보니 나는 여전히 구국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 그런데 너무 뚜렷해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원 부흥강사인 최요한 목사님에게 그날 본 환상과 식물인간에서 깨어날 당시 들은 음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기도하시더니 “집을 지은 건 교회와 병원 같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연설한 것은 아마 주의 종이 되는 걸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다.

야자수 숲을 보여주신 걸 보면 선교사가 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내 귀에 “네가 갔던 곳”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가본 곳 중 야자수 숲이 우거진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베트남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니느웨가 베트남이란 말인가
?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3) 나로 인해 실족한 두 여인 위해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

환상 통해 베트남 선교사 비전 받고 신학 공부 시작하려 했지만 이들에 회개부터 하란 주님 말씀에…

입력 : 2020-03-18 00:01/수정 : 2020-03-18 14:37

장요나 선교사(화살표)가 1991년 한국복음선교신학원 동기들과 수련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환상을 통해 베트남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받았을 때 나는 당장 서울로 올라가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내 안에 가득했던 불순물을 깨끗하게 비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 시작은 회개였다. 그중엔 알고 지은 죄도 있었지만, 모르고 지은 죄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두 여자였다. 기도 중에 눈앞에 대형 화면이 나타나면서 두 명의 여자가 나란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청주 23육군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간호장교였고, 다른 한 명은 입대하기 전 교사할 때 여고에서 가르쳤던 여학생이었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두 사람이 왜 같이 나타난 것일까
?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이들은 너로 인해 이 땅에서 실족한 자들이다. 이들의 핏값을 너에게서 찾을 것이다.”

결혼해 함께 살자고 끈덕지게 졸라대던 간호장교를 피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지만, 그녀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냈다. 전쟁보다 간호장교의 편지가 더 두려울 때쯤 나와 같이 근무했던 감찰관 임모 중령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이 책임지고 간호장교의 마음을 돌려놓겠다고 했다. 임 중령이 한국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장교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간호장교가 쉽사리 마음을 접지 않자 내가 베트남 여자와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으니 그만 잊으라고 임 중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간호장교는 낙심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가르쳤던 여고생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유서를 남겨놓고 약을 먹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내 물음에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답하셨다. 사역을 감당하기 전, 먼저 나로 인해 실족한 이들의 영혼을 위해 아파하며 회개하라고 하셨다.

간호장교와 여학생의 극단적 선택이 가슴 아팠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들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다. 죄를 보여주셨지만 회개하기는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금식하며 회개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했다. 에스겔 33장 6절 말씀이 떠올랐다.

*에스겔 33장 6절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깊은 기도 가운데 진정 무엇이 죄인지 깨닫게 됐다. 그들의 죽음엔 직접적인 책임이 없지만, 나의 무관심으로 상대방이 실족했다면 그 책임으로 내게서 핏값을 찾으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게 죄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였다.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내 권리가 먼저였기에 
응당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 안에 없다.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흘려보낼 수 있다. 
그제야 나는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제 안에 사랑을 창조하사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실족지 않게 하시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4) 선교사로 주님 부름 받고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으로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안수… 당시 베트남에선 비즈니스 방문만 허가, 도움 받아 사업가 신분으로 들어가

입력 : 2020-03-19 00:02
장요나 선교사가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1990년 1월 하노이 라탄호텔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감림산기도원에서 서울로 올라와 바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기독교대한감리교 소속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같은 교단의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나이 제한에 걸렸다. 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예수교대한감리회 소속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도 받았다. 주님께서 베트남 선교사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하면서 부흥사로 집회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쪽 눈은 실명돼 찌그러져 있었다. 전신 마비의 흔적은 그렇게 내 몸에 남아있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기적의 손길을 경험했고, 다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1990년 1월 23일 베트남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그때는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기 전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을 방문하려면 특정 국가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허가서를 받으려면 국가공무원 두 사람이 보증을 서야 했고, 방문 목적도 뚜렷해야 했다.

나는 외교부에 특정 국가 허가서를 신청하고 그걸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베트남 대사관이 있는 태국의 방콕으로 갔다. H그룹의 베트남 지사장 자격으로 한 달짜리 비즈니스 비자를 신청했다. 당시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비즈니스 업무 외에는 갈 수 없었다. 고맙게도 지인의 도움으로 서류를 갖췄다. 목적은 시장 조사, 체류 기간은 한 달. 제한된 조건이었지만 방콕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비자를 받아 베트남 하노이로 들어갔다.

하노이는 1975년 통일되기 전 월맹의 수도였다. 민주주의를 경험한 호찌민보다 복음을 전하기 더 어려운 동토의 땅이다. 파월 장병으로 베트남 나트랑에 왔을 때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지리에 익숙했지만, 하노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첫 선교지로 하노이를 선택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했다.

국제공항 출입국 데스크를 겨우 통과해 시내에 있는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감림산기도원에서 내가 가야 할 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베트남에 미쳐 있었다. 어디선가 베트남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달려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얻었다. 그렇게 준비하고 꿈꾸던 곳에 5년 만에 왔으니 잠이 오겠는가. 마음에 설레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밖에 나가려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입구에서 바로 저지를 당했다. 여행허가서가 없으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비자를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여행허가서를 신청했지만, 발급받는 데 이틀이나 걸렸기 때문에 꼬박 48시간을 호텔에 갇혀 있었다. 호텔 문밖에 나간 것은 베트남에 도착한 지 사흘 만이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5) 배고픈 아이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다 유치장 신세

호텔 로비에 구걸하는 아이들 마음 아파 1달러 쥐어주며 눈물로 기도…허가서 없이 접촉했다는 죄로 잡혀가

입력 : 2020-03-20 00:05
장요나 선교사가 1993년 베트남 하노이 아가페탁아소에서 아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여행허가서가 나오자마자 바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호텔 입구에는 넝마를 걸친 아이들이 버글거렸다. 바짝 말라 오종종한 얼굴엔 땟물이 졸졸 흘렀고, 누런 콧물 위엔 파리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보며 ‘1달러’를 외쳤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가냘픈 손을 보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얼굴을 보니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한 것 같았다. 일단 먹이고 싶은 생각에 호텔에 들어가 식당 안에 있는 바게트를 갖다 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1달러만 외쳤다. 아이들 손에 1달러를 쥐여주는데 앙상한 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하나님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아이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기더니 팔짱을 끼었다. 눈을 떠보니 경찰이었다. 내가 접촉허가서 없이 아이의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한 게 잘못이었다. 당시 베트남에는 외국인이 현지인을 만날 때 반드시 접촉허가서를 받아야 하는 법이 있었다.

그 길로 붙잡혀 간 나는 정치범수용소 같은 곳에서 20일간 구류 조사를 받고 쫓겨났다.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과 접촉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20일 만에 출국당하니 억울하고 실망스러웠다. 동시에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을 실감했다.

나는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 비자를 다시 신청했다. 두 번째 비자는 발급받는 데 더 오랜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사명을 주셨으니 반드시 비자가 나올 거란 확신을 하고 기도로 선교를 준비했다.

어렵게 비자를 받아 하노이에 가도 체류 기간이 한 달을 못 넘겼다. 겨우 한 달을 지내다 방콕으로 나와야 했다. 3개월을 기다려서 비자를 받고 또다시 하노이에 들어갔다 출국당하는 생활을 1년 동안 반복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A씨였다. 그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군인이었을 때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북한말을 꽤 잘했다. 그에게 일당을 주고 베트남 말을 배웠다. 통역 삼아 그와 함께 다니며 현지 상황을 탐사하는 사역에 들어갔다.

그와 제일 먼저 간 곳이 탁아소였다. 그때만 해도 베트남은 협동농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일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은 탁아소에서 돌봐줬다. 그런데 나라가 가난하다 보니 탁아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원장은 내게 재정이 부족해 아이들에게 점심을 주는 것도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탁아소를 도우면서 공산주의 국가 시스템을 배웠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 익숙해질 때쯤 탁아소 하나를 넘겨받아 아가페 탁아소로 이름을 바꾸고 다양한 계층의 아이들을 돌봤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6) 베트남 온 지 2년 반 만에 선교의 문 활짝 열려

환우들 보면 생사 오가던 내 모습 보여… 병원 세워 무료로 치료해 주기로 결심

입력 : 2020-03-23 00:07
장요나 선교사(왼쪽)가 1990년 1월 11일 사랑의병원선교회 파송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나는 사랑의병원선교회를 통해 베트남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선교회는 초교파로 모인 의료선교단체로 의료 혜택이 필요한 곳이나 직접 선교가 어려운 곳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 사역을 통해 간접 선교를 한다. 그래서 선교사로 파송되는 부부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의사나 간호사 등 전문적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혼자 몸으로 온 데다 어떤 의료자격증도 없는 나를 하나님은 왜 이 선교회를 통해 베트남에 오게 하셨을까.

기도 중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다. 하노이를 두 번째 방문해 목격한 수많은 환우의 모습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내 모습과 겹쳤다. 과부가 과부 심정을 안다고 베트남 환우를 볼 때마다 나는 애끊는 심정이 됐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이 그들 역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손을 얹어 기도해 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와 병자들을 찾아가 빵을 주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병이 나은 이들이 많았다. 내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으니 이제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기도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확신으로 병원을 세우기로 했다. 그와 맞물려 공산당의 한 서기장이 남딩성에 아동병원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사랑의병원선교회와 베트남선교회가 자매결연을 하고 함께 추진했다.

그러다 내가 세 번째로 감옥에 붙잡혀 가는 일이 생겼다. 안수기도를 하다가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연행됐다. 하노이에서 탁아소 운영 등을 하면서 신분이 많이 노출되다 보니 조금만 다른 행동을 해도 금세 눈에 띄어 제재를 당했다.

세 번째 감옥에서 나온 후 나는 호찌민으로 내려왔다. 호찌민으로 올 때 세계친선협회(PACCOM)로부터 메콩강 빈롱성에 병원을 세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빠콤이라 불리는 협회는 베트남 외교부 산하 기관으로 외국인들을 관리 감독한다. 외국인의 의료 교육 구제 사업, 봉사 활동 등의 NGO 활동을 지원하고 동시에 사상을 변질시키는 행위를 하는지 감시한다.

빠콤에서 NGO 단체로 인정받으면 3년 비자가 주어지고 활동허가서를 받을 수 있다. NGO 비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접촉허가서 없이 현지인과 만날 수 있는 활동허가서를 발급해준다.

나는 호찌민에 있는 한국식당에 짐가방 2개를 맡기고 메콩강 하류 빈롱성으로 내려왔다. 한 푼이 아쉬울 때라 숙소를 빌리는 돈도 아까웠다. 거처도 없이 빈롱성과 호찌민을 오가며 사역을 감당했다.

초라한 입성에 행색도 남루해 남들 보기에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베트남에 온 지 2년 반 만에 선교의 문이 열렸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1993년 빈롱성에 농푸 사랑의병원을 짓고 무료로 치료해주는 NGO 자격을 취득했다. 사랑의병원선교회 이름을 아가페라 짓고 빠콤에 정식 NGO로 법인 등록을 했다. 그 활동허가서로 나는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7) 병 고침 받은 자, 목격한 자 모두 하나님 믿기 시작

치료 방법 없는 환자들,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자 깨끗이 나아…핍박하던 부성장도 찾아와 기도 부탁

입력 : 2020-03-24 00:01
장요나 선교사가 1999년 2월 베트남 남동성 달랏 오지 마을에서 소수부족을 위한 의료사역을 하고 있다.

첫 선교병원이 세워진 빈롱성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생겼으니 가난한 병자들에게 그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을 것이다. 개원할 때 16명의 현지 의사들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는데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중에는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도 많았다. 하나님의 기적 아니고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환자들은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곳은 베트남이었다. 접촉허가서 없이는 누구에게도 기도해 줄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를 감시하러 온 경찰이 나를 돕게 하셨다. 빠콤은 병원을 짓고 운영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지만 치료 이외의 다른 활동을 하는 건 아닌지 철저히 감시했다. 기도해야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경찰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지금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기도하니 손 마른 자가 손을 펴고, 중풍 병자가 일어나고 피부병 환자가 깨끗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100%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

그때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병 고침을 받은 자도, 그것을 목격한 자도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농푸 사랑의 병원’을 시작으로 호찌민 슬럼가에 ‘떤빈 사랑의 병원’, 한센인 마을에 ‘쑤엔목 사랑의 병원’ 등 16개 병원을 차례로 설립했고 205명의 현지 의료인이 사역에 동참했다.

그렇게 사역을 이어가던 때였다. 자정을 넘긴 훌쩍 시각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A지역의 부성장이 보였다. 부성장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육군 대령 출신이라 그런지 선교병원을 세울 때 너무 핍박해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또 나를 잡으러 왔나 싶어 문구멍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혼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나를 만나러 왔다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뒤에 경찰이 없으니 위험할 건 없다고 생각해 들어오라고 했다. 부성장이 급하게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와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 좀 (기도)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갑상샘이 아프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난감했다. 숙소에는 약이 없고 의사들은 모두 잠들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자 부성장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해 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를 핍박하던 자가 기도해 달라니….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작지만 분명하게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의 갑상샘은 깨끗이 나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져주신 것이다. 2005년 경찰들을 위한 병원도 세웠다. 모든 병원은 내 힘으로 세운 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한국교회의 헌금으로 병원을 세워나갔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8) 낡고 부서진 화장실 바닥에 숨겨 둔 ‘하나님 말씀’

교회 재건 위해 공산화 이전 교회 찾다 홀로 남아 성경책 읽는 목사 만나 고초·외로움 위로하며 함께 기도

입력 : 2020-03-25 00:07
장요나 선교사(가운데)가 1992년 베트남 동나이성 떤힙마을에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기공식 준비를 하고 있다.

하노이에서 호찌민으로 내려올 때 가졌던 기대 중 하나는 남쪽에는 교회가 더 많이 남아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나는 숨어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목사와 신자들을 찾아 교회를 재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도하며 호찌민 시내 땅 밟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디선가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결혼식에서 한 남자가 축하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찌르며 “당신 크리스천이냐”고 물으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트랑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로, 아코디언 연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식장에서 성가를 연주하며 믿음을 지키고자 애썼다. 그는 공산화되기 전 교회들의 자료들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동역자가 되어 자료에 나온 주소지를 가지고 샅샅이 찾기 시작했다.

호찌민의 B교회도 그렇게 발품을 팔다 발견했다. 교회는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입구 쪽에 붙어 있는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보니 섬뜩했다. 그간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뒤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그 사람은 내 뒤에 바짝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도를 하셨나요” 하고 물었다.

체념하고 뒤돌아서는데 그 남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어 믿기지 않는 말을 들려줬다. 자신은 공산화되기 전 이 교회를 담임했던 C목사인데 홀로 남아 교회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C목사가 아무 말 없이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화장실 역시 낡고 부서졌으나 벽은 온전히 세워져 있어 바깥과 단절돼 있었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열더니 땅을 파고 그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성경책이었다. 그는 성경책을 교회 화장실 바닥에 묻어놓고 매일 와서 꺼내본다고 했다. 썩은 내가 진동하고 벌레가 우글거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C목사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C목사는 25년 이상 이런 고초를 겪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때부터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교회에서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C목사가 화장실에서 성경을 읽다가 경찰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교회 울타리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베트남으로 관광 온 한국인들이었다. 관광 가이드로 두 사람과 함께 호찌민의 명소를 돌고 함께 식사했다. 그분들은 나를 처음 만난 곳이 너무 황폐한 게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곳이 원래 교회였다는 것과 목사님이 교회를 어떻게 지켰는지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들은 선뜻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나섰다. 마음에 어려움이 있어 베트남 여행을 왔는데 교회를 지음으로써 하늘의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호찌민에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19) ‘복음의 뿌리’ 살아있으면 언제든 소생… 오지 돌며 체험

공산체제에서도 꾸준히 복음 전해온 목사님과 동행하며 소수부족들 만나 그들의 언어로 말씀과 은혜 전해

입력 : 2020-03-26 00:03
장요나 선교사가 1997년 베트남 꽝치성 케산읍과 라오스 국경의 몽족 마을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대도시가 복음을 전하기 더 좋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찰의 감시와 다른 선교사들의 견제 속에서 운신의 폭은 더 좁아졌다. 하노이와 비교해 윤택한 호찌민 사람들은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해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점차 외곽으로 움직이다 중부 고원지방의 럼동성 바오록에서 A목사를 만났다. A목사는 나트랑 신학교 출신으로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는 분이었다. 덕분에 화장실 들락거리듯 감옥에 갔다고 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언제든 소생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A목사와 함께 오지 소수부족들을 만나며 생생하게 체험했다.

호찌민에서 바오록까지 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당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라 아침에 출발해도 저녁나절이 돼야 A목사 집에 도착했다. A목사는 항상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식사를 빨리 마치고 다락에 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A목사 집에 들어가는 게 발각되면 바로 고발당했다. 친인척을 방문할 때도 허가서가 필요했고 자신의 집 외에 다른 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거주자가 아닌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보는 즉시 경찰에 알렸다. 게다가 외국인은 호텔 외에서는 잘 수 없었다.

나는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 다락에 들어가 한숨 잤고 밤이 깊어지면 나왔다. 그리고 A목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럼동성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부족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험했다. 산을 넘지 못한 구름이 능선 자락에 걸려 있어 희뿌옇게 시야를 막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적도 있고 느닷없이 원숭이가 공격해 다치기도 했다.

소수부족들은 베트남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고 고립된 장소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가난을 운명으로 살았다. 그들에게 A목사는 각 부족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셨다. A목사와 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면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믿는 자의 수가 많아져 집에서 더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을 도와 몰래 처소교회를 세웠다. 소수부족 중 몇 명은 호찌민의 센터로 데려와 성경을 가르쳤다. 소수부족 마을로 가는 길이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감사하고 보람찼다.

당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옷이 두 벌 뿐이라 어딜 가나 밤이 되면 옷을 빨기 바빴다. 밤마다 땀내 나고 후줄근한 옷을 좁은 욕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빨 때면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고 옹색해 보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울하지는 않았다. 눈물의 감사 찬양이 나왔다.

깨끗이 빤 옷을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의 날개에 걸어놓고 침대에 누워있노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개운하게 씻은 맨살에 닿는 선풍기 바람은 시원했고 선풍기와 함께 도는 바지와 셔츠는 펄럭거리며 춤을 췄다. 내 마음은 부풀어 올랐고 입에서는 찬양이 흘러나왔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요나 (20) 주님의 일꾼 돼 베트남 복음화 위해 일하는 제자들

소수부족 아이들에 베트남어 가르치고 한글과 컴퓨터 공부하며 전도자로 키워

입력 : 2020-03-27 00:03
장요나 선교사가 1995년 베트남 선교센터에서 소수부족 등 현지인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호찌민의 집은 서너 번 세를 옮겨가며 1993년부터 선교센터로 활용했다. 베트남인과 소수부족 청년 20여명을 데려다가 함께 지내며 학교에 보내고 센터에서는 공동체로 성경을 가르쳤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예배를 드렸고 한글로 성경을 쓰게 하면서 한글도 가르쳤다. 그렇게 시작한 공동체의 청년들은 나중에 전도자가 됐다

각기 다른 성향과 모양의 사람들을 질서 있고 화평하게 이끌기 위해선 어느 정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래서 리더를 세우고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책임을 맡겼다.

어떤 이는 선교센터가 군대 같다고 했다. 어떤 면에선 비슷했다. 센터에 계급은 없었지만, 역할에 따른 위치는 명확했고 무조건 순종해야 할 것도 닮았다. 다 같이 식사할 때도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첫 번째 제자나 통역을 맡았던 다오 자매가 앉았다. 그다음부터 순서대로 쭉 앉았다.

다오의 일과표를 일일이 점검해 수업이 끝나면 바로 센터로 와서 센터 사역을 돕게 했다. 소수부족 아이들을 돌보고 문서 작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한글과 컴퓨터도 공부하게 했다. 다오의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한 건 다른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후 나는 모든 감각과 욕망을 잃어버렸다.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기에 음식을 사료라 불렀다. 살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게 됐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간만 생생해졌다. 다시 깨어난 후 신생아 간 기능이 생겨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불도저 같은 성격에 신생아 간 기능이 합쳐졌으니 나와 함께 일하는 센터 식구들이 많이 버거웠을 것이다.

혹독한 훈련을 잘 버티고 견딘 제자들은 베트남 사역을 하는 데 중요한 동역자가 됐다. 다오가 그렇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그는 호찌민대학에서 영어동시통역을 전공해 그쪽 분야로 나가길 원했다. 그런데 센터에서 훈련받으며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었다. 무엇이든 이해해야만 순종했던 다오는 센터에서 내게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학업에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밤새워 공부해 진도를 맞췄고 학점도 평균 이상으로 유지했다.

그런데 센터에서 점점 맡은 일이 많아져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기가 됐다. 다오는 베트남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며 그 일을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다오 선교사는 한국으로 와 총신대에서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한국에 나올 때만 해도 학업 후 베트남에서 내 선교 사역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는 경기도 성남의 분당과 안성에서 두 개의 베트남교회를 담임하며 평택대 채플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 선교센터에서 훈련받고 한국 신학교에 유학해 사역하는 제자들, 풍남 쭉벙 홍년 껌벙 등 14명이 베트남 복음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9746&code=231115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