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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Proverbs) 23장: 물질, 자녀 징계, 술-31장 르무엘 왕의 잠언 [현자들의 잠언, 아굴, 르우엘]◆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21:25


잠언 강해(51 - 55) 

◆ 밤중소리 02-03 | VIEW : 742


잠언 강해 51

하나님 백성의 생활 철학

본문 : (잠언 24 : 1 - 12)


오늘 잠언 강해는 ‘하나님 백성의 생활 철학’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양식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새로워져야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엡4: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옷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우리의 생활이 새롭게 변화해야 할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철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 생활

1절과 2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언 말씀을 공부하면서 이런 말씀을 많이 배웠습니다. 잠3:31절 말씀을 보면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23:17절 말씀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업에 가정에 건강에 형통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포악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일들이 잘 되고 있는 사실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으로 원해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어려움을 겪을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헛된 일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이란 선지자는 이 같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 해답을 달라고 조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1:3절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심으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의인이 형통하는 일을 하나님이 방관하시며 악인이 의인을 못살게 굴되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박국은 어찌하여 그리하시는지 궁굼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은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니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박국에게 해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의 고생도 잠깐이요 악인의 번영도 잠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이 하박국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한 인물에 대하여 잠깐 잠깐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의인이나 악인에 대한 인생의 결국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인물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걸어간 발걸음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그 사람의 전체 생애를 통해서 그의 인생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로 요셉이란 인물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가 살아온 생애 중, 어렸을 때 형들에게 핍박을 당하여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 간 것만을 본다면 요셉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생애를 살아간 인물이요 그에게 악을 행한 그의 형들의 처지가 얼마나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은 급기야 애굽의 총리의 높은 자리에게까지 오르게 되었고 그 형들은 동생의 발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요셉의 모습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그토록 처절한 운명 속에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시련의 기간은 그리 길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런 시험에서 건져내시어 영광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연단 중에 있는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해 하늘에 간직해 두신 아름다운 면류관이나 상급을 생각지 않고 다만 그가 잠깐동안 당하는 고난만을 바라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욥이란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받지 않아도 될 시험을 혹독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시험을 잘 참고 견뎌 냈습니다. 결국 이런 일로 인하여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더욱 두텁게 받았으며 아직까지 누렸던 그 놀라운 축복의 갑절을 더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욥의 인내를 본 받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과 모르두개의 경우를 보면 의인의 고생도 잠깐이요 악인의 형통도 잠깐이라고 하는 말씀의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모르두개를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이 잘 진행되어 갔습니다. 하만은 그 나라에서 왕 다음 가는 영광을 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반면에 모르두개는 왕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승산은 하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끝에 가 보면 하만은 모르두개를 매달아 죽이려는 자기 집 마당의 장대에 자신의 목을 달아매 죽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두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하만이 누렸던 그 영광의 자리에 올라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서 고난의 생애를 살아가도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지혜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혜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강한 자냐? 지혜 있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습니다. 누가 힘이 있는 자냐? 지식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혜와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 지혜와 지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한 인간을 집으로 비유해서 어떻게 자기 인생을 건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지혜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격을 세워나간다면 우리는 강하고 힘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장래를 보면서 살아가지만 미련한 인생은 현재일에만 마음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미련한 인생은 지금 자기 앞에 보이는 육신적인 일에만 마음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왜 지혜를 얻은 자는 장래가 있고 그 인생에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우리의 장래에 관한 것들입니다. 구원에 관한 것이요 천국에 관한 것이요 하나님께로서 오는 축복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 같은 소망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 중, 가장 위대하고 결정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후사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 소망이 바로 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지혜로 그의 인격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로 자신의 인생을 꾸리고 지혜로 자기 인생의 향로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혜는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잠23:19절 말씀에 ‘내 아들이 너는 듣고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잠8:33절에서는 ‘훈계를 듣는 자는 지혜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훈계란 경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달콤한 소리는 솔깃하게 들어도 책망하는 말씀은 멀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경계와 책망과 심판을 외칠 때에는 모두 외면하고 머리를 돌려도 평안과 축복과 형통을 외칠 때에는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지혜는 책망에서 나옵니다. 내 죄를 지적하여 책망하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우릴 수 있는 사람은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내 마음을 찌르는 경계의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장래가 있으려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찰라주의적인 인생을 살고 현세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지혜고 지식이고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장래를 바라보고 내 인생의 소망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3.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은 환난 날에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은 아직도 하나의 결실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50:15절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우리의 환난 날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은 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환난인 것입니다.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낙담해야 할 환난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여화롭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환난은 이처럼 값진 소망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간 인생의 발자취를 보면 그들은 모두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당하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환난을 지나는 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환난을 두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결론 : 여러분은 악인의 형통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에 귀를 기우리시고 장래가 있는 인생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의 지금 그 고난의 인생 길이 얼마나 값진 인생 길인지 아시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42:5절에는 우리가 낙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생애에서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잊지 말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복된 삶의 길을 걸으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52

의인과 악인의 결국

본문 : (잠언 24 : 15 - 22)

오늘밤에는 의인과 악인의 결국에 대한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16절에 나온 말씀을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아멘.

인생들에게는 그의 생애 동안에 넘어지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날 수 있는 넘어짐이 있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이 아주 넘어져 버리는 넘어짐이 있습니다.

1. 의인의 넘어짐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에는 의인에게도 넘어짐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칠전팔기란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넘어진다는 말은 말할 수 없는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시험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큰 시련이 와서 위기에 처한 상태를 의미해 주기도 합니다.

시34:19절에는 의미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악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판단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의인들이 그의 인생 길에서 많은 고난을 당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의인으로 등장하는 아벨의 경우는 참으로 비참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믿음의 제사를 드린 연고로 형 아벨로부터 고난을 받았는데 그 고난이 결국 아벨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그가 받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의 죽음은 소망이 없는 것이었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그렇게 보기가 쉽겠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잠14:32절 말씀을 보면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의인에게는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인생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이 그 사람의 종말이 결코 아니란 사실을 보여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아벨의 마지막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가인을 죽이시고 아벨을 살리셨을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당한 고난의 축복이 아벨이 죽은 후에도 아벨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고난을 귀중히 보신 것입니다.

다윗이란 위대한 임금은 그의 생애에 말할 수 없는 환난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찬란했던 만치 그가 당한 고난도 컸습니다. 그가 시편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한 기도를 들으면 그가 당한 고난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시편18편에서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손에서 몇 번인가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피난 길에 오른 일도 있었습니다.

야곱이나 요셉의 생애도 결코 평탄치 아니했습니다. 가도가도 환난의 연속이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1) 그러면 의인에겐 왜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한가지 중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인의 고난이나 환난을 당하는 일은 당연하거니와 복을 받아야 할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나 환난이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오는 그의 고난은 그에게 멸망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의인이 받는 고난이란 고난을 받는 그 사람의 생애에 큰 유익을 줄뿐 아니라 그가 받을 수 있는 축복의 밑거름이 된다고 사실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주실 축복의 길을 평평대로와 같이 만들어 놓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줄로 얽어 메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고난의 과정이 없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거나 축복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행14:22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로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지만 그 고난에서 이기게 해 주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여 나중에는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손에서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같은 연단을 하나님은 고난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6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은과 같이 연단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의 단련은 은으로부터 찌끼를 없애는 작업입니다. 은을 단련하려면 은을 뜨거운 불에 녹여 납 위에 뜨는 찌끼를 제거하는 것인데 이처럼 하나님의 불의 연단의 손에서 우리를 시련 하여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찌끼를 걸러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시험의 그물에 들게 하실 때 아무도 그 그물에서 빠져나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시험과 시련으로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시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곳에서 끌어내 사 풍부한 곳에 들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고난과 환난의 불과 물을 통과한 후에 찾아오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셨습니다. 사48: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를 연단 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 불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귀하고 요긴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시편119:71절에서 이르시기를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롬8:18절에서는 이 일에 대하여 놀라운 격려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성도들을 가장 귀하고 값지게 여기시는 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를 귀히 보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축복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도망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주님의 그늘 아래 앉아서 단 열매만을 따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빌1:2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시는 모든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환난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으로 여기시고 참고 견디시기만 하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축복이 하늘에도 쌓이고 땅위에도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불의 연단을 통해서 우리로 부족함이 없는 성도로 만드십니다. 벧전 1:6-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의 시련으로 오는 시험이나 고난은 금보다 더욱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입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만 이생만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고생을 해도 하늘에 쌓아 둔 상급을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받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그의 앞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위해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주님은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징계를 통해서 우리들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히12:9-11절에서 이르시기를 징계는 우리들로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얻은 맞는 일을 억울한 일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얻어 맞아도 그것이 복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복이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련이 올 때 결코 낙심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시34:19절 말씀을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건지세요? 하나님이 건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이나 고난에서 우리를 능히 건지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내 뜻을 네게 이루기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다 함께)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메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다.’ 그러므로 의인은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악인의 결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엎드러진다고 하셨습니다. 엎드러진다는 말은 그의 인생이 그 재앙으로 마감한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은 자비나 사랑이나 긍휼인 것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재앙이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의미합니다. 사40:10절에서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상급이 따르고 악인에게는 보응이 따르는 것입니다. 렘17:10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이 하나님의 심판의 보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율법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인으로 판정하시거나 율법을 잘 못 지키는 사람을 악인으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표준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악인이 당하는 보응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주시는 의인의 시련과 환난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론 :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하시는 고난이나 환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재앙을 만나게 하신 일도 아니며 엎드려지게 하신 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한 역사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곱 번 넘어져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어떤 고난 중에도 소망을 잃지 마시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53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

본문 : (잠언 24 : 30 - 34)

30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34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오늘밤에는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 왕이 어느 날 나라안을 시찰했을 때, 어느 농촌 포도원에서 게으른 농부에 의해 버려진 포도원을 보고 경계를 삼은 교훈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솔로몬 왕은 그 밭의 임자가 게으른 자요 지혜 없는 자라고 말하고 그 이유로써 그 밭의 형편을 예로 들었습니다. 31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밭에 가시덤불이 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으며 돌담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솔로몬 왕은 생각이 깊었고 훈계를 받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이 말씀에 나타난 두 가지 교훈

이 교훈에는 두 가지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게으름에서 오는 결과를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결론으로 33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손을 모으고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이 포도원에 대한 말씀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영적으로 풀이하여 우리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에 교훈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이 포도원은 영적으로 교회로 비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이나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는 신구약 성경에 참으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포도원이라고 할 때는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포도나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5장에는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가 나옵니다. 1절과 2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 대한 관리를 잘못한 탓으로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들포도 열매를 맺음으로 이에 진노하신 포도원 주인의 심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1절과 2절에는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가꾸시는 정성과 깊은 사랑이 나옵니다. 교회란 우리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곳이기 때문에 기름진 땅이며 아름다운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포도원인 교회를 가리켜 ‘나의 사랑하는 포도원이라’고 노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인 교회를 위하여 그 아들을 회생 제물로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주셨으며 사도들을 보내셨고 많은 종들을 보내시어 그 포도원을 살펴 보시면서 좋은 열매 맺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열매는 참 포도 열매인 것이 아니라 들 포도 열매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뜻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대하여 더 하실 수 없을 정도로 사랑으로 은혜로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포도원에 대하여 실망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사5:4절 말씀에서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찜인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포도 열매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으로 비유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들포도를 맺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많은 포도원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에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과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좋은 포도를 맺고 있느냐고 물을 때,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를 맺고 있다는 책망을 들을 정도로 열매 없는 포도원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좋은 포도 열매인 것이 아니라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여 성도들로 음행하게 하였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인즉 죽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좋은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라도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침을 당할 것이라는 경종을 내리셨습니다. 이 같은 교회에서 주님이 바라시는 좋은 포도나무의 결실을 어떻게 바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리하여 주님이 재림하실 즈음에 이르면 온 교회가 음녀화되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되며 진리에서 멀리 떠나게 될 것입니다.

2. 포도원의 폐허

그러면 어떤 포도원이 이처럼 처참한 자리에 빠지며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이 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친 풀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돌담이 무너졌다고 한 것입니다.

(1) 가시덤불이 퍼졌다고 했는데 그러면 가시덤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에 가시덤불이 퍼진 것입니까? 예수님은 마13:22절에서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에 대한 비유의 말씀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가시 떨기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모든 교회의 형편을 살펴볼 때 점점 말씀에서 떠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멀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세속화된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있을 교회에 대하여 그들의 생활이 세속화될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었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모습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생활, 세속화된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에 속한 축복입니다. 성도들은 귀가 얄팍하고 가려워서 교훈과 심판을 경종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세속화된 달콤한 세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며 그런 말씀을 사모하며 듣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순수하고 순결한 포도주인 것이 아니라 물에 탄 값싼 포도주요 세상 기복에 취한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며 즐겨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는 가시덤불이 퍼진 것입니다. 이 가시덤불을 제하지 않고서는 좋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포도원에 거친 풀이 덮였다고 했습니다. 풀이란 양떼들을 먹이는 꼴로써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시편 23편에는 유명한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양떼들은 언제나 목자가 이끄는 손길에 의하여 푸른 초장으로 인도 받아 꼴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풀은 언제나 순결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독초가 섞여 있거나 먹어서는 안될 풀이 섞여 있으면 해로운 것입니다. 이런 풀이 무성한 포도원에서는 양떼들이 살아갈 수 없으며 젖을 짜 낼 수 없습니다.

(3) 다음에 돌담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돌담은 양의 우리를 말합니다. 요10장에서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대하여 의미 있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원에는 울타리가 있어야 합니다. 양을 잡아먹으려는 못된 짐승들이 양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든든히 잘 쳐져 있지 않으면 양의 생명이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의 우리란 진리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구원의 도리를 올바로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법을 가르치며 믿음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의 울타리를 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우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안에 그 누구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의 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절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 이외에는 생명의 주가 없으십니다. 교회에는 악한 세력이 양들의 생명을 노략질 하기 위해 넘나 보고 있는데 그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인 것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들로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절도요 강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 양의 생명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양의 우리를 든든히 쳐야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그 문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우리 한국 교회에 만해도 많은 이단들이 발호하며 이상한 복음을 가지고 양의 우리를 넘어오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이단들이 넘나들며 많은 양 무리들을 유혹하여 생명을 노략질하며 죽이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은 말하기를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게으르면 그 포도원이 이 꼴이 되는 것입니다. 롬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게으르면 양떼들의 생명이 위협받습니다. 장로나 권사들이 게으르면 교회의 울타리가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가시덤불이 나게 되고 거친 풀이 돋게 되고 돌담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생교회 성도들은 지혜로운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한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상도는 어떤 성도들입니까? 예수님은 마25장에서 미련한 처녀와 슬기 있는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처녀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처녀들은 왜 등과 기름을 준비했습니까? 신랑을 기다리려고 그리 한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포도원의 일꾼들입니다. 포도원의 일꾼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생활에는 마음이 없고 세상 일에만 분주하며 육신의 생활에만 마음을 쓴다면 결국 미련한 처녀가 되어 그 포도원은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이 되어 결국 버린바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을 한번 깊이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내 마음속에 이 같은 가시덤불은 없는지? 거친 풀은 없는지? 돌담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살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생교회를 아름다운 포도원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퍼진 가시 넝쿨을 뽑아 냅시다. 거친 풀을 돋굽시다. 무너진 돌담을 다시 일으켜 세웁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어 제때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교회로 만듭시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이루시려고 신생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힘을 합하여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드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54

지혜로운 삶의 방법

본문 : (잠언 25 : 3 - 15)

오늘밤 잠언 강해는 지혜로운 삶의 방법에 대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8장에는 지혜의 가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느니라.’ 지혜의 가치를 왜 진주에 비교하며 그보다 더 낫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인간의 삶의 승패가 바로 지혜에 있기 때문입니다.

1. 지혜의 귀중함

이 지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합니다. 은금을 주고서도 이 지혜를 살 수 없고 진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지혜인데 이처럼 귀중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다윗 왕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축복할 때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너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지혜의 가치는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지혜를 인간에게 어떤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시119편에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99절에서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함으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묵상이란 말은 생각이란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합니다. 읽은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머리 속에 새깁니다. 이런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비에 새개는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속에 간직된 말씀은 적절한 시기에 내게 응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말씀을 따라 나의 행동을 삼가며 말씀의 인도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말씀이 나의 길을 인도하는 말씀이 되었다면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친히 내 길을 인도하시는 손길인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은 항상 성도들에게 신앙적인 생활의 지침을 가르쳐 주기도 하며 지도하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지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지도라면 그 지도는 곧 하나님의 지도인 것입니다. 다음에 시110:100절 말씀을 보면 ‘주의 법도를 지킴으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때 놀라운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의 지혜는 바라보는 지혜요, 말씀을 지키는 자의 지혜는 체험적인 지혜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하늘과 땅과의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지키는 일이 없는 지혜는 지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종이 호랑이처럼 실제적인 가치가 없으며 자신의 생애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을 숨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 (영화). 하나님은 일을 숨기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을 숨긴다는 말은 하나님은 그의 계획이나 인생에 관한 그의 섭리를 미리 알려주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잠16: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인도하시고 그 걸음을 지키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숨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일을 미리 나에게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너는 어떤 계책을 써야 한다는 등의 예언적인 말씀을 주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기 앞길이나 장래 일에 있어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비밀을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아들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내가 계획하는 사업은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 알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궁금한 일을 알려준다고 현혹하는 무리들이 소위 예언이란 가면을 쓰고 우리들 앞에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이 당할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도 요나서는 성경에 기록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이 결과적으로 나무에 목을 달아 배창자가 터져 나와 죽을 줄 알았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은 삼십에 팔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예언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하시는 일을 숨기시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1) 우리들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장래사에 대하여 모르고 있을 때 내 앞날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를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이 당할 장래의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있다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해결점을 찾으며 노력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의뢰하는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렘17: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3:5절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애에 있을 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라도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뢰하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날을 친히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소상히 알려 주실 수 있지만 그렇게 아니하시는 이유는 우리들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비밀에 부쳐 두시는 것은 우리들로 하나님의 언약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롬8:24절에서 이르시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랄진대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고 애태우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며 그 언약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지혜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법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쓸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쓸 만한 그릇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많은 그릇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딤후2:20절에서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큰집이란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말합니다. 금, 은, 나무, 질그릇 등은 직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많은 그릇 중 누구를 쓰신다고 하신 것입니까?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깨끗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들로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연단과 시련의 짐을 지게 하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당하는 시련이나 연단은 우리들로 좀더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실 때 우리는 속히 내 속에 있는 찌끼를 걸러내 깨끗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찌기를 제한 은처럼 귀한 그릇으로 쓸만하게 연단 받은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다 고난의 풀무에서 택한 사람들입니다. 고난을 당하되 낙심치 말고 자신을 은에서 찌끼를 제하듯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다듬으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지혜롭게 살려면 높은 채 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과 7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높은 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손실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언제나 영광을 얻지만 스스로 높은 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다 망신살 뻗쳐 패가 망신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하수에르 나라의 총리란 높은 지위에 있었던 하만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왕궁의 문지기인 모루두개를 높은 장대에 목을 매달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만은 어느 날 모루두개를 죽이려는 왕의 허락을 받으려고 새벽같이 왕의 뜰 안에 들어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 아무도 없느냐’고 부르는 왕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하만은 제빨리 왕께로 나갔습니다. 왕은 하만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왕이 가장 존귀하게 하려는 자에게 왕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하만은 왕이 높이려는 그 대상이 자신인 줄로 착각하고 그 사람을 왕처럼 최상으로 대접해 주어야 할 것을 건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명령은 하만에게 엉뚱하게 내려졌습니다.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두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높임을 받으려 든 하만은 자신이 죽이려든 모루두개를 왕의 말에 태워 자신은 일개 말잡이로 전락되어 온 성중 안으로 하루 종일 끌고 다니면서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외치면서 돌아다닌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는 일은 영광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도 스스로 높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교만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꺾으셔서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의 생활은 언제나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낮추는 것입니다.

(3) 사람이 지혜롭게 살려면 남과 다툴 때에 급거히 나아가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의 전후좌우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다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에게 반드시 수모를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잠18:1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재판의 경우도 반드시 원고와 피고의 증언을 듣는 것처럼 급한 마음으로 다투는 일이나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일은 나중에 큰 망신을 당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에 지혜를 가지고 사람을 대해야지 무조건 급거히 나아가 남과 다투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의 주장이나 말에 합리성이 없다면 남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합당한 말로 대처하면 그의 인생이 언제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다음에 사람이 지혜로운 생활을 하려면 슬기로운 자의 책망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책망을 듣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사람이 겸손하고 훌륭할수록 다른 사람의 견책을 기꺼이 받아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많으며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진실한 생애를 보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지혜로운 생활을 못하고 세상을 따라 산다면 그의 생활에는 축복도 없고 향상도 없고 하늘의 상급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따라 순종하는 생활을 하므로 자기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55

환난 날에 의뢰할 자

본문 : (잠언 25 : 19)

오늘밤은 환난 날에 의뢰할 자란 말씀으로 잠언 강해를 듣겠습니다. 19절 말씀을 다 함께 따라 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에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쳐올 때 ‘아, 나는 이제 큰 일 났구나’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환난이 찾아오는 일은 인생에 있어 결코 좋은 일도 아니며 바랄 만한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환난은 불청객으로 이따금 찾아와서는 우리의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1. 환난 날에 누구를 의뢰해야 하는가?

모든 인생은 그의 생애 중에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도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는 하지만 평안한 생애 중에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환난이란 것이 슬며시 찾아와서 내 생애를 사로잡고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곤 하는 것입니다.

욥5:7절 말씀에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 어는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된 곳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살 동안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14:22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 세상 사람들보다 한가지 더 고난을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빌1:29절에서 이르시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난을 우리가 마다 아니하고 기쁘게 받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롬8:17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을 받기 위함이니 이런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고난이나 환난의 날이 그의 생애에 올 때에 우리는 무엇엔가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자의 고난은 더욱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며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의 의뢰는 그의 환난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란 뜻입니다.

(1) 많은 사람은 그의 환난 날에 재물을 의뢰합니다. 자신의 재물이 자신이 당하는 환난에서 건져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재물을 제일로 여기며 재물을 모으는 일에 온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의 생각하는 대로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그가 모은 그 돈이 그를 구원해 주고 그에게 참다운 피난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렘49: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의뢰하려는 자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로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오리오 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쫓겨서 바로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재물을 의뢰하는 자는 언제나 교만하여 그의 몸가짐이 오만하여 이르기를 내게 어떤 어려움이 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오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재물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언제나 복을 내리는 것이나 화를 내리는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수완이나 운명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사화복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재물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하나님이 주심으로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받은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종말에 있을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떠나 재물을 의뢰하는 자들이 받을 재앙에 대해 하나님께서 경종하시기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경종하기를 이 땅에 임할 마지막 날에는 은을 거리에 던지며 금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그런 날이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소망이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환난의 날에 혈육을 의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혈육을 의뢰하는 사람의 결국에 대하여 렘17:5절에서 이르시기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혈육이나 권력이나 사람으로 그의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은 마치 사망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146편에서 이르시기를 사람을 의뢰하는 사람의 허무함을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홁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생명은 단지 그 코의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인생의 호흡을 하나님이 순간에 취해 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도모하려는 일들이 당일에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뢰하는 바를 끊으시겠다는 경종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사람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의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능력을 의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더욱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그 지혜를 그 사람의 올무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의 그 의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정죄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자기를 비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한 성전에서 같은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언제나 자기는 죄인이며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뢰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도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11조를 드리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세리에게 의롭다는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뢰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에 여러 가지 시련의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우리들로 우리의 미약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어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고후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권능의 하나님을 의뢰하면 그 어떤 환난에서도 건져내실 수 있으며 살려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생활 중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세상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의뢰한다는 말은 세상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우리가 당하는 우리 생애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려고 애굽에 대신을 보냈습니다. 애굽에 조공을 드리며 그들의 도움의 손길을 청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맞았습니다. 애굽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을 말합니다. 사36:6절에서 애굽을 의뢰하는 자들이 받을 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엄중한 경종을 내리셨습니다.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며 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 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의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법도를 따라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거나 환난 날에 세상으로 도움을 구하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손에 가시를 찔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게 되면 세상에서도 발 부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에 대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도 도움을 얻기는 고사하고 세상에서도 밟힌 존재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짓된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거짓된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의 마음으로는 이미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면서도 그의 입술로는 가까이하여 부르짖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런 기도를 주님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기도요, 주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예언을 해 놓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예언을 믿고 의뢰하는 일은 거짓말을 의뢰하는 일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는 이런 예언에 대하여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여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신 분, 우리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환난 날에 우리의 산성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삽을 통해서 이르시기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많은 환난을 겪은 다윗은 시118편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두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나를 어찌 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여러분의 인생의 도우실 분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 분만이 진실하신 우리의 의뢰하실 분입니다. 그 분만을 여러분의 참된 도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려분의 생애는 새롭게 되며 여러분의 도움이 되시는 그 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26장(56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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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56

(56)미련한 자의 생애

본문 : (잠언 26 : 1 - 12)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여기서 얻는 삶의 지혜는 우리의 생활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1장에서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 할 것이요 명철한 자에게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미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에 대하여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은 달라서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생각하기보다는 미련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미련한 사람인가? 잠언의 말씀을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잠언1: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의 경우를 보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들려주려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 자신의 지혜를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지혜를 받아 드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이나 행동에 결국은 미련한 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훈계도 늘 자기가 다른 사람을 훈계해 줄 입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훈계를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하고 훈계를 들을 만한 입장에 있다면 이미 미련한 사람의 자리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보겠습니다.

(2) 잠언 12:16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사귀다 보면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렇지 이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구나’고 생각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에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곰처럼 우직하고 양보를 모르고 고집만 세우는 사람을 보고 미련하다고 판단하지만 모든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과는 결코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미련한 일이 자기에게 해로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사람은 수욕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은 밸도 없나? 그럴 때 한번 따끔하게 대들지 않구, 그런 창피를 당하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어? 자리를 걷어차고 나올 일이지, 그러나 이렇게 자기 감정을 당장에 나타내는 사람보다 수욕이나 자신에게 오는 창피를 참는 사람이 슬기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에서는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슬기로운 사람이란 말을 들으려면 수욕을 당할 때 상대방과 싸우지 말고 그 수욕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욕하고 그 사람과 싸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참는 일은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분내는 일이 미련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분은 좌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시 4:4절에서 ‘너희는 분 내어 범죄치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딛 1:7절에서도 ‘급히 분내는 사람은 감독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3) 세 번째로 미련한 자의 특성이 잠18:2절에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여러 층의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 교제하지 않아도 누가 미련한 사람인지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곧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쉴새 없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다른 사람이 말을 하려고 하면 중간에 그 말을 가로채서 자기 견해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거든 아, 저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좌중에 앉아 있다면 이런 사람과 말다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입을 봉하고 가만히 있어야 망신을 당하지 않습니다. 함께 입을 열면 똑같이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잠 23:9절에서 교훈해 주시기를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4) 다음에 잠 20:3절에서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했습니다. 다툼은 언제나 미련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어떤 모임에서도 다툼을 일으키고 분쟁을 야기시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툼을 멀리하고 언제나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툼을 쉬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인 것입니다.

(5) 잠 28:26절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일인 것입니다. 고전 3: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백 배나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6) 잠언 29:20절 말씀에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더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을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발설하는 사람에 대하여 경종하신 말씀입니다. 말을 참지 못하고 들은 말을 빨리 옮기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한마디 실수라도 하면 그 사람은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이 조급하다는 말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이런 버릇 가진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당신만 알라는 식으로 비밀한 말을 했다 간 몇 시간이 안되어 그 소문이 확 퍼지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좀 언짢은 말을 들으면 당장에 그 사람을 찾아가 따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을 성경에서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미련한 사람은 그 미련함을 고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 27:22절에서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나온 본문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에게는 ? 나귀에게는 ? 미련한 자의 등에는 ? 막대기라고 했습니다. 왜 미련한 자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미련한 자의 특징은 지혜를 싫어하고 훈계를 멀리하기 때문에 고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자는 어떤 소유를 가질 것입니까? 잠14: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 미련한 자에게 있는 일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예란 영광스러운 직책이나 명예 또는 권세나 권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미련한 자들이 그들이 가져서는 안될 명예나 권력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련한 자가 한 나라의 권력을 잡거나 명예로운 자리에 앉는다면 그 불행이 사회 전반에 미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세계 평화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여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도조 같은 자는 참으로 미련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이 자의 미련한 생각과 행동이 전 세계에 전쟁을 가져 왔고 이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하여 그가 주거라고 해 논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되어 자신에게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자가 세상에 가장 비극적인 미련한 일을 행하는 일이 계9장에 계시되어 있는데 이 자에 의해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고 세계가 폐허화되는 유브라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는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주님을 대적하는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켜 그 결과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산채로 붙잡혀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들이 하는 일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일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남에게 까닭 없는 저주를 잘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에게 축복을 해 주면 자기가 복을 받고 남에게 저주를 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미련한 사람들과 상대할 때 우리는 그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지혜로운 사람들만 상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련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불가피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적당할 때에 침묵하고 적당할 때에 말을 해야지 이런 일에 지혜를 쓰지 못하면 그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가까이하는 사람들과 사귈 때 미련한 사람이 말을 건너와도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질문에 지혜로운 답변을 해도 그 답변 역시 어리석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답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으로 자기가 지혜자로 잘못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대답할 말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별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사람에게 일이나 심부름을 시키는 일에 사용하지 말라는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다윗을 뒤쫓아 죽이려던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이 소문을 어느 아멜렉 소년에게서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사울 왕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왕이 자기를 죽이라고 명하기로 그가 살아날 것 같지 않으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머리에 씌어 있던 왕의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 왕에게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에게 가장 좋은 소식인 줄로 알아 왕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보상을 받을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멜렉 소년은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식은 결국 자기의 생명을 죽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마치 자기의 발을 배어 버리는 것 같은 해를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과연 이 미련한 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들어서 바른 행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그 지혜로 지혜로운 삶을 살아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57

게으른 자의 생활

본문 : (잠언 26 : 13 - 16)

오늘 밤 잠언 강해는 게으른 자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게으름에 대하여 언제나 정죄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은 하나의 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가난과 그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 게으름이 원인이 되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교훈을 몇 가지 살펴보면 잠19:15절에서 이르기를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게으름은 살아 있는 사람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게으름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의 영혼의 활동을 정지시키므로 심령을 허약하게 합니다. 잠10:4절에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사람은 가난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잠20:4절에서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게으른 자의 특징

오늘 말씀을 보면 게으른 자의 특징을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게으른 자는 핑계를 잘 된다고 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시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길과 거리는 사람들이 일하는 일터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사자가 있다면 그런 곳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밀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겁을 집어먹고 자신이 없을 때 핑계를 대는 구실입니다. 산길을 걸어갈 때는 물론 사자가 있을 때도 있겠지만 사자는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고 했습니다. 문짝은 그의 활동 범위가 국한되어 있습니다. 돌쩌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잠자리를 맴돈다는 말은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잠13:21절 말씀을 보면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을 피곤하게 한 사람이 깊은 잠에 드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게으른 나머지 침상에서 뒹구는 일은 가난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게으른 자의 다른 한가지 특징에 대하여 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건 일을 싫어하는 것이 게으른 사람의 특색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일 하기를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치고 자신을 미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의 일도 트집 잡고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은 언제나 일은 하지 않고 뒤에서 말썽만 부리는 사람 중에 있습니다. 손이 게으른 사람의 특징은 반면에 입은 대단히 부지런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입으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2. 주의 일에 게으르지 말자

우리는 오늘 말씀을 다만 육신의 일에 게으른 것에 국한시키지 말고 영적인 교훈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12:11절 말씀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의 일에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름을 핀 사람이 주님 앞에 설 때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치 장사를 하는 일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받은 세 사람의 종들이 주인이 오기까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로 장사한 일은 우리의 생활에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즉시 바로 가서 그 돈을 가지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장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얼마 안가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의 놀라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렸습니다. 그는 주의 일에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게으름을 부린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인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할 터인즉 굳이 내가 애써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은혜 받은 사람인데 그 일을 내가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왔다는 변명인 것입니다.

주의 일에도 게으른 사람은 변명이 많은 것입니다. 저 사람은 건강한 사람인데 나처럼 약골이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그런 사람에게 시켜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인데 나처럼 가난한 사람이 돈을 드려 그런 일을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니 내가 서툴리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 아니냐는 변명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은 이 게으른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데서 뫃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같은 책망으로 나무라시고 그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낙인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종은 그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왜 주의 일에 게으른가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께 게으른 사람은 첫째로 주님께 드리는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면 이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을 하느라 교회에 앉아 있거나 교회에서 활동하는 일은 자기 생각에 당장에 어떤 이익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힘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그의 생각이 육신의 일에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롬8장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은 영의 가치에 대하여 알지 못하므로 영의 일을 육신의 일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고전15:5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은 교회의 일이 있으면 자신의 육신의 일을 미루고 혹 집어치우고서라도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을 보람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영의 일을 별 볼일이 없는 일로 여기기 때문에 육신의 일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시간까지 도적질하여 자신의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 그 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도적질한 음식이 맛이 있다는 격으로 살금살금 하나님의 시간을 도적질하는 재미를 꿀맛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예배 시간까지 자신의 시간으로 도적질하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까지 자기가 슬쩍 써 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 앞에 설 때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이처럼 말할 것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교인들은 그 한 달란트마저 자기 것인 양 다 까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의 일에 게으르지 아니한 일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에보소 교회에게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주님을 아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벧후1:8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 같은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성경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곳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연구하는 사람은 예수를 깨닫게 되고 성경을 잘 연구한 목회자의 설교를 잘 듣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그리스도를 깨닫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열심을 품고 주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소망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하는 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 길에는 시련도 있고 환난도 있으며 어려움도 따릅니다. 우리의 앞날에는 고난의 사자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실패의 사자도 기회를 넘보고 있습니다. 질병의 사자도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설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존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위험과 시련을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열심이 있어야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드리는 열심이 있어야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문은 축복의 문이요 치료의 문이요 승리의 문인 것입니다. 두드리는 열심도 없이 어떻게 문이 열리며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찾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찾는 일도 없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며 주님을 만남이 없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면 그 약속을 내 생활에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그릇 속에 손은 담가 두고도 그 그릇의 음식을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사람은 마치 순종이 괴루워서 배를 주리면서 그 약속을 바라만 보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이 시간에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얼마만치 주의 일을 위해 힘써 왔느냐? 내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했느냐?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과연 열심을 냈으며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의뢰하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렸던가? 부지런하므로 주님을 섬기지도 못하고 열심을 품어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했으면서도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의 약속을 의심한 일은 없었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얻을 것이라곤 헤어진 옷과 가난 뿐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축복도 아니며 성공도 아니며 부요도 아닙니다. 가난이요 실패요 어려움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인 것이 아니라 원망입니다. 게으른 그리스도인에게 결과적으로 차례 오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책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느냐에 대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요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예수를 믿건 그런 것은 여러분의 축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급과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나만은 예수를 믿되 부지런함으로 열심을 품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소망을 이루게 하시며 여러분의 생활에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잠언 강해 58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본문 : (잠언 27 : 1)

오늘 밤 잠언 강해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 그 자체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모든 조건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인생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삼상 2장에는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고 하시는 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도 하나님께 낮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하게 하는 기능과 재간을 주셔서 부요하게 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이들은 참으로 은공을 모르는 악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무섭게 받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생활을 하다가 번번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1. 인생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인생이 진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자기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벧전 1:24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지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의 근본은 한줌의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향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는 마치 풀과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인생이 이 땅위에서 아무리 영광을 누리고 존귀함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풀과 같은 것으로 풀은 곧 시들고 꽃도 곧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씨가 평생에 그토록 원했던 대통령 직에 올라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권세는 풀의 꽃처럼 시들어지고 지난날 역대 대통령이 걸어간 그 비참한 길을 자신도 걷게 될는지 누가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대통령의 대접을 받는다고 즐겨워 할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생들은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토록 수고한 수고의 결실은 허망한 것으로 인생에게 주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 1:2절 말씀에서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했습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의 인생의 지혜를 다하여 인생의 일을 연구한 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을 깊이 연구한 결과 결론적으로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일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연수는 마치 한 밤 중의 한 경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 49편에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 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통용하는 말에도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인생들이 무엇을 어떻게 자랑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러면 인생이 왜 이처럼 자랑할 것이 없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죄값에서 온 것입니다. 인생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인 사망을 치루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도 이 죄 때문이요 인생에 질병이나 고난이 찾아온 것도 이 죄로 인해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존재치 않는 이유는 인간은 모두가 죄인들로 그 가운데 의인이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1.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

여러분, 인생은 내일 일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눅 12장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한 해의 농사가 풍성해지자 그 풍성함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축복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인생을 계획하기를 ‘이제 이 적은 곡간을 헐어 버리고 더 큰 창고를 지어 그 곳에 이 곡식을 가득히 쌓아 둠으로 여러 해 동한 평안히 먹고 마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이 부자의 즐거운 자기 인생 계획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 부자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 스스로의 계획을 절대로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시 146편에는 참으로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에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날 일 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소위 신비적인 신앙 생활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내일 일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미래사를 알려고 점을 치는 것처럼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운수에 대하여 예언해 주거나 그 사람이 앞으로 당할 길흉에 대하여 미리 가르쳐 준다면 그런 일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이 아닌 것입니다. 점치는 귀신이 들려 점을 쳐주는 일인 것입니다. 렘 23:23절 이하에서 몽사를 얻었다고 말하는 자들을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몽사란 자기가 꿈으로나 환상으로 무엇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거짓 예언을 해 주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른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를 학생이 합격되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아 보십시요. 그는 시험도 치기 전에 낙심하여 책도 공책도 내던져 버릴 것입니다. 사업을 경영하려는 사람이 미리 그 사업의 성사 여부를 알아보세요. 성공한다고 하면 방심해서 큰 실패를 자초할 것이요 실패한다고 하면 한평생 가야 아무 것도 못하고 세월만 보내다가 인생을 마칠 것입니다. 시집갈 처녀가 남편 될 사람의 장래에 대하여 샅샅이 알아보세요. 결혼이 성사될 경우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일 일에 대한 것을 미리 알려는 헛된 노력은 버리고 하나님만 의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에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따라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이 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랑할 것이 성경에 몇 가지 있습니다.

갈 6:14절에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일은 주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가 나를 모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유함을 주었고 내 죽을 영혼을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새롭게 하고 내 생애를 보람있게 해 준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로 자랑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고후 10:17절 말씀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일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계속 술 주정이나 하고 다닌다면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나가면서 집안에서 사흘이 마다하고 싸움판이나 벌인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 죄악의 사람은 죽었습니다. 보시요 이처럼 나는 주 안에서 새롭게 변화 받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변화 받은 나를 보시고 예수를 믿으세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12:9절 말씀에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몸에 어려운 질병이 있었습니다. 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심했기에 그는 이 병이 자기 몸에서 떠나기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병은 여전히 자기 몸을 지배하였고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바울은 기도해도 났지 아니하는 고통 속에서 자신에게 병을 그대로 두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요 주님의 능력이 바울의 약한데서 온전하게 나타내시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크게 기뻐하여 자신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약한 것들이란 자신의 못난 점을 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빌 3: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우리의 입을 벌려 예수를 자랑하는 자랑은 가장 보람있는 자랑인 것입니다. 예수의 자랑은 곧 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을 내가 믿으며 그런 분을 내게 소유하고 있으며 그런 분이 내 인생 길을 인도하시며 그런 분이 내 생애를 주장하여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예수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아직까지 어떤 자랑을 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그 무엇을 자랑한 것입니까? 자랑할 학벌이 있습니까? 비록 서울대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그 일이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벌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에게 주시기고 하시고 누리게도 하시며 풍성히 쓰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내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내 인생의 반려자이신 하나님만 의뢰하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주 안에서 새롭게 된 나와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여 참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59

친구의 면책과 원수의 입마춤

본문 : (잠언 27 : 3 - 9)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우리 신앙 생활에 참으로 유익한 교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났다’는 말씀은 누구나 마음에 깊이 새겨 둠직한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그 이유로써 통책은 충성에서 나오지만 원수의 입맞춤은 거짓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면책이란 말은 마주 대하여 상대방을 책망한다는 뜻입니다. 마주 대하여 책망한다는 것은 책망을 주는 편도 거북스러운 일이고 책망을 받는 쪽도 그렇게 기분 좋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면책을 할 수 있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요 그 면책을 받아 주는 사람은 더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진실한 우정을 오래 계속하려면 이 같은 면책을 들을 줄 알고 또 이 같은 면책을 들려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면책에 대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하나님의 종의 책망과 친구의 책망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책망

사랑에는 반드시 꾸짖음이 따릅니다. 만약 사랑에 책망이 따르지 아니하면 그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을 조장하게 하거나 생명을 잃어 버리게 하는 결과밖에 아무 것도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 3:11절 말씀에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잠 29:15절 말씀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지혜는 하나님의 채찍이나 꾸지람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반대의 경우를 보면 29: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주 책망을 들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책망을 들을 때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채찍을 맞고 곧 깨달아 그의 인생의 방향을 올바른 길로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 같은 지혜는 언제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평안이 오고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책망은 처음에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렘 23:2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잠 6:23절에서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시는 책망은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해서 혹은 일반적인 설교로 혹은 권고로 어떤 경우에는 직접적인 책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이 ‘저 설교는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준비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목사님이 나를 들으라고 고의적으로 하는 설교라고 오해하여 그만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저 설교는 나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회개하며 새로운 각오로 말씀에 따르는 생활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계의 말씀은 어느 한 사람만을 가리켜 그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은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어둠이 있는 사람, 죄를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 심령을 동일하게 찌르는 것입니다. 이 찌르는 말씀의 능력 앞에 심령이 깨어져 녹아 날 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며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나단은 다윗을 향하여 한 비유를 들려주면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나단 선지는 다윗에게 이르기를 ‘왕이여 한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가난합니다. 그런데 부자에게는 양과 염소 떼들이 많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 뿐으로 그 사람은 이 암 양을 사랑함으로 저의 품에 누으며 자기 딸처럼 키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런데 어떤 지나가는 손이 그 부자 집에 찾아 왔는데 자기에게 있는 양과 소 떼는 아까움으로 찾아온 나그네를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손님을 위하여 잡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말하는 사건 내용을 듣고 있었던 다윗 왕은 나단 앞에서 심히 노하면서 ‘그 부자를 당장에 데려다가 가난한 사람에게 양 새끼를 4배나 갚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때 나단은 왕에게 정색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그 사람이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암몬 자손의 손으로 우리아를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고 왕의 죄를 지적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이 때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엄한 책망을 듣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회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 설교할 때 저 말씀은 나를 지적하여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이구나 마음에 깊이 새겨 그 말씀을 따라 회개하며 그 말씀을 따라 자기 행위를 삼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큰복을 받고 상급이 따를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찬성을 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아 회개하기에 이르러 성령을 받아 생명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책망은 채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실 때 일차적으로는 우리에게 훈계의 말씀으로 가볍게 하시지만 그 말씀이 통하지 않을 때는 제 이차적인 책망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그 책망한 말씀의 열매가 맺혀질 때까지 그의 손길을 그냥 거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끝장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계의 말씀으로 통하지 않을 때는 그보다 강한 방법으로 책망하시는데 그 방법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채찍입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가장 효과 있게 버릇을 고치는 방법으로 채찍을 쓰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 채찍인 것입니다. 잠 22:15절에서 이르시기를 ‘징계하는 채찍이 미련한 것을 멀리하게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데 채찍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 하나님의 채찍이 죄를 멀리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참 뜻이 히 12장에 이처럼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려고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이로 말미암아 연단 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 이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채찍을 맞는 일은 지혜로운 일은 아닙니다. 말씀으로 훈계를 받을 때 돌이키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훈계나 채찍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좋게 훈계의 말씀으로 다루실 때 순종하면 결코 채찍을 맞는 일에까지 이르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훈계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킬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들려주시 것만 고의적으로 돌이키기를 거부하고 불순종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채찍이 내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내려서 듣지 않으면 또 한번 내리시고 이런 방법의 책찍으로 듣지 아니하면 저런 방법의 채찍을 자꾸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온통 만신창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잠 19:29절에서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로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고 바른 신앙 생활로 돌이키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실지언정 결코 그 등에 채찍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미련한 자의 길을 걷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첨하는 자의 입술

다음에 우리는 원수의 입맞춤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원수의 입맞춤이란 아부나 아첨하는 혀를 말합니다. 우리는 갸롯 유다의 경우에서 가증스런 입맞춤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과 짜고 예수님께 나와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 인사를 멋들어지게 하고는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잠 29장을 보면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첨에는 세 가지 독소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입니다. 아첨 치고 진실이 들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든 여러분에게 아첨하거든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생애에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입니까?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는 공인된 적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혀로 아첨하는 사람을 조심하지 않으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첨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 함정 속에 잡아넣기 위해 아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에 아첨에는 배신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아첨의 생명은 결코 길지 못합니다. 배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첨하는 일은 서로가 급속히 친숙해 지기 때문에 배신의 속도도 대단히 빠르게 오는 것입니다.

아첨하는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첨하는 입술에는 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 12:2절에서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첨하는 사람의 특징에 대하여 유 16절에서 이르기를 자기 유익을 위해 아첨한다고 했습니다. 이익이 있을 때만 아첨하고 그 이익의 소망이 멀어지면 그 아첨이 원망이나 모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시려면 아첨하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아첨을 하다보면 거짓이 나오고 두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친구를 사랑으로 면책하는 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오해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고 듣기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지만 얼마 안가 진실한 친구임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면책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그 면책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인격은 아름답게 형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강해 60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의 복

본문 : (잠언 27 : 18)

오늘 밤 잠언 강해는 18절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의 복’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보시겠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짧은 문체에 두 가지 뜻이 담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의 복은 결국 자기 주인을 시종함으로 얻는 영화를 뒷바침하는 말씀으로 한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바는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신 주님을 잘 섬기면 주님이 누리시는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창3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나무 이름보다 가장 먼저 나오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입니다. 성경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나무들이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이 나무들이 성도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는데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무화과나무에 달려 있는 잎사귀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성도들의 거짓된 신앙, 외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가지고 외식한 역사는 꽤나 오래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뒤에 숨었을 때 그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여 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옷은 그들의 부끄러운 몸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었습니다. 외식은 하나님 앞에 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통할 수 있는 길은 진실 뿐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무리 무덤을 잘 다듬고 가꾸어도 그 속에는 사람의 썩은 시체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의 거짓된 신앙을 이처럼 나무라셨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신 지라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으실 까 하여 나무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는 무화과 열매라곤 하나도 없고 잎만 무성하여 주님의 기대에 어긋나신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바로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이스라엘을 향하신 경종으로 주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에도 좋은 것이 있고 또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악한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무화과 열매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집 포도원 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주인과 함께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그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좋은 열매를 맺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증거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이 되어 죄값으로 죽게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요15장에서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좋은 무화과나무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이 분만이 좋은 무화과나무로 이 무화과나무에 접부침을 받아야 좋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좋은 무화과나무와 접부침을 받는 길은 좋은 무화과나무의 진액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엡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그 분과 접부침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로부터 참 생명의 진액을 받아 아름다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무화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스스로 가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무화과나무라 할지라도 사람의 손이 안 가서 가꾸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주님은 눅13장에서 한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밭의 주인은 이 나무를 심어 놓고 매년 이 밭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삼 년간을 참아 가며 이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얻으려고 찾아 왔지만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인이 과원직이에게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책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 과원직이는 주인에게 이르기를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를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거름도 주어야 하고 도랑도 파야 하는 것입니다. 거름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나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그 나무에서 좋은 무화과나무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도랑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늘 그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성령의 뜨거운 열의가 없는 신앙에서 무슨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까? 주님은 이런 일에 대하여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무화과나무를 지키려면 지난날의 정욕을 위해 살아온 옛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엡4:22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세상으로 쏠리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신생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밭에 무화과나무로 심겨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무화과나무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만세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여러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더럽고 추한 죄를 다 용서하시고 양털보다 더 흰 그리스도의 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부터 좋은 열매를 얻으시려고 성령을 보내시고 끊임없이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처럼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겠느냐?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네가 들포도를 맺음은 어찜이냐’ 이 말씀에 대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지키는 자가 먹을 열매

그러면 이 같은 사람들이 그 주인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과실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과실이란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가 받을 영화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에게 그들에게 주실 상급을 말씀하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누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성경에서 너무나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부활의 열매를 먹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모두 같은 부활이 아닙니다. 크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부활 가운데서도 부활의 영광이 모두 다릅니다. 해와 같은 영광의 부활이 있고 별과 같은 영광의 부활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2) 두 번째로 하늘의 영광을 얻습니다. 주님께 좋은 무화과나무 열매를 드리기 위해 애쓴 성도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그의 영광의 자리에 동일하게 앉히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지런히 주를 위해 충성하시고 부지런히 봉사하시고 열심을 다 하여 주님과 성도들을 섬기시며 여러분의 삶의 목표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면 여러분에게는 이 같은 영광의 상급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유업을 받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이 땅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일 천년간 펼쳐집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믿음을 지킨 그의 성도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천년왕국을 예비하시고 그 왕국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 곳에서 일 천년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끝으로 영원무궁한 안식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하여 주님은 계21장에서 계시로 그 나라를 확실히 보여주시면서 잠시 동안만 참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시고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오실 이가 오시리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땅에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마는 내가 하늘의 놀라운 상급으로 갚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려면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르고 재물이 없어지고 육신에 피곤이 오고 남의 비방도 받겠지만 그러나 너는 낙심하지 말고 그 싸움을 조금만 더 싸워 나가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너희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소망으로 살아간다면 내가 너에게 영원히 계속될 영원한 면류관의 위대한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신생교회라고 하는 무화과나무 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무화과나무로부터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얼마나 단단히 지키고 있습니까?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얼마나 지키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까? 세상 풍조로부터 얼마나 지키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로부터 좋은 무화과 열매를 맺기를 원했건만 네가 악한 열매를 맺음을 어찜이뇨? 하는 책망을 들으신다면 그 때 가서 여러분은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원통하여 땅을 치며 에서처럼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늦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로 여러분을 잘 다듬고 키워서 주인의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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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61 - 65

◆ 밤중소리 02-03 | VIEW : 656

잠언 강해 61

죄를 자복하는 자의 복

본문 : (잠언 28 : 1 - 13)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죄를 자복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중에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13절 말씀을 따라 읽겠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 그러나 그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어떻게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셨어요?

1.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

죄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적인 죄와 세상적인 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죄란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죄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 최초의 죄인으로 성경에는 아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아담이 지은 죄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죄가 될 것인가? 사람이 무엇을 먹었다는 것이 죄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잘못되면 기독교는 큰 타격을 입게 되며 오늘날 많은 이단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행위가 왜 죄가 되어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까?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먹은 그 행동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선악과를 먹는 일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어떤 것이라도 불순종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고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질을 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왜 죄인이냐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은 아담의 죄를 물려받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유전죄인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유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다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분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분은 아담의 피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런 사실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1) 첫째로 사람 중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구원 받을 만한 존재가 사람 중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비로소 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고백하기를 ‘모친이 죄 중에 자기를 잉태하였다’고 했습니다.

(2) 둘째로 사람은 모두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해 줄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죄인이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거나 의를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사람 중에는 그 누구도 천국이나 구원을 약속하는 어떤 종교의 교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린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도적이요 강도들이며 사람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교훈을 가르치며 훌륭한 말을 남겼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적인 교훈일 뿐 구원이나 의를 얻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원죄를 안고 태어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도 많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은 이 세상에서 죄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죄를 기독교에서는 ‘본죄’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한 나무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는 포도나무로 비유하면 들포도나무요, 감나무로 비유하면 돌감나무인 것입니다. 아담이 죄인이요 우리도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이 나무는 죄 가운데 생겨난 악한 나무요 이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는 악한 열매로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악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나무 그 자체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일1: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않았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인간이 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죄를 버려야 합니다. 이 죄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버리지 못한 인생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맹자의 경우에나 석가의 경우에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나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하여 그 죄를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선행을 하면 우리의 죄가 소멸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그 종교를 따르는 생활을 하면 죄를 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더욱 죄가 가중되고 더욱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죄를 버리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입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죄를 자복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일1:9절에 있는 말씀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자복한다는 말은 자신이 행한 자신의 불의한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했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는 일을 죄의 자복이라 하고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인 것입니다.

회개는 입으로 자기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지만 사실인즉 자신의 마음을 찢는 일을 말합니다. 욜2:13절에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회개 곧 죄의 자복은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회개여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하여 정말로 미워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죄를 계속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일은 외식적인 회개이며 거짓된 회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말은 다시는 그 같은 죄를 범하는 일을 단념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결심이 따르는 회개를 말합니다. 그래서 죄를 자복하는 일에는 통회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악을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그 죄에서 용서를 받고 죄를 버릴 수 있는데 이것은 다만 죄를 자복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용서 받는 것도 아니며 회개에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용서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흘리신 피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이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그 죄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씻을 길도 없으며 죄를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 이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에 그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아무리 죄를 자복하고 선행을 하고 선한 교훈을 따른다고 해도 자신의 죄의 처리를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죄를 자복하는 자의 축복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죄를 자복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죄를 자복한 자의 죄는 그 어떤 죄라도 깨끗하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사1:18절에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홍 같은 죄란 더 붉어질 수 없는 죄로 죄인 중의 괴수 같은 자의 죄라도 그 죄가 눈처럼 희어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에서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하여 사44:2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을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라진 구름은 다시 뫃아 드릴 수 없습니다. 사라진 안개는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회개한 우리의 죄를 이처럼 없애 버리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히9장에서 증거하시기를 ‘염소와 황소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어떤 죄이건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하는 회개를 하셨다면 그 죄가 어떤 죄이건 이미 사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고 다시는 그 죄의 길을 걷지 마시고 그 죄로 인하여 고민도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이 같은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의 방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자복한 죄에 대하여 이미 용서 받은 사실을 믿고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가지고 내가 이제부터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주님을 위한 새로운 생애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회개와 믿음의 생활을 기뻐하시고 그 같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죄를 자복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의를 주십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롬5: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죄의 용서 뿐 아니라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주심으로 나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죄를 자복한 사람의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자복한 죄에 대해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용서 받은 죄에 대해서 다시 책망을 듣거나 그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하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해서만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 받은 지난날의 죄까지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용서 받은 죄는 영원히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할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숨겨질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자복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로 하나님의 축복 받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62

복 받을 자와 재앙에 빠질 자

본문 : (잠언 28 : 14)

오늘 밤 잠언 강해는 14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하여 ‘복을 받을 자와 재앙에 빠질 자’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14절에 있는 말씀을 따라 읽으시겠습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아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늘 경외하는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자

경외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의 가장 큰 의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진실한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사랑도 있습니다. 겉으로 꾸미는 외식된 사랑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짓된 사랑은 언제 들통나나? 좋을 때는 모릅니다. 형통할 때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 때, 당장에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 자녀가 대학에 입학할 때가 되니 교회 봉사를 잘했습니다. 헌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떨어지자 그 날부터 태도가 확 달라집니다. 봉사도 집어치우고 교회 출석도 등한해지고 그러다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거나 나쁜 일이 생기다보면 사랑도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거짓된 사랑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같은 물음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님께 대한 자기 사랑이 거짓된 것임이 드러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실 일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배신해도 자기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 때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함으로 부끄러움을 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졌을 때 그 짐을 함께 집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어려움을 당할 때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은 어려운 짐을 지기 싫어 사랑이 깨어져 헤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죽음의 길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까? 요일3:16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롬5:7절에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확실한 증거가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에도 이처럼 분명한 증거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없는 경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을 외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외식하는 믿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그 하나님을 순종으로 섬기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엔 순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할 것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 법도를 배워야 합니다. 신4:10절에서 이르시기를 ‘네가 호렙산에서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듣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외치기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도 부지런함으로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 사업에도 성공하고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치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경외하는 자들이 받을 복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을 복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세워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섬길 때 이런 보상을 받을 것을 첫째의 목적으로 바라보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는 보응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보응이 복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복이 어떤 복입니까? 잠22:4절에 나오는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재물이란 물질적인 축복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받을 재물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를 잘 섬기기만 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바라는 재물의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르는 일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우리가 주목할 축복은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생명이란 구원을 의미하며 영생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께서 재물의 축복을 주시고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일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실 복에 대하여 시61:5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엡1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려고 택정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업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롬8장에서 ‘자녀이면 또한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 같은 하늘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복에 대하여 말4: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광선에 한번 쬐기만 하면 어떤 질병에서라도 치료받아서 마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여호와가 경외할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히5장에서 우리 주님이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가 들으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기도가 응답을 받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전혀 없이 자기 위주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기나 하면 눈문을 흘리며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에 응답이 있을 것입니까?

4. 강퍅한 자가 빠질 재앙

다음 우리는 제 2대지로 넘어가서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강퍅하다는 말은 그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드릴 수 없는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드려 패도 끄떡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같은 방망이로 내려쳐도 조금도 나아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길 가 같은 단단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그토록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3:13절 말씀을 보면 죄의 유혹으로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 진다고 했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면 그 마음이 강퍅해 지므로 죄 가운데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처럼 갖가지로 우리에게 엄습해 오는 죄의 유혹을 믿음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상에 얽매인 사람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에 치료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줄을 끊고 말씀의 줄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줄도 붙잡고 말씀의 줄도 붙잡는 생활을 하려 하면 말씀의 줄은 마치 썩은 새끼 줄 같이 되어 결국은 세상 줄만 붙잡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가 재앙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아니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겔34:11절에서 하나님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는 분이 있다면 그 마음이 이미 강퍅해진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속히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것이 왜 두려운 것입니까? 왜 재앙에 빠집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강퍅한 자에 대하여 간섭치 아니하심으로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시는 것입니다. 시81편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마음이 강퍅한 자들에게 그들의 강퍅한 상태로 놔 두실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롬1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능욕, 교만 등’ 이 모든 죄를 서슴없이 행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편에 서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생활을 통하여 복을 쌓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강퍅하여 재앙에 빠져 들어가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심령을 뜨겁게 하여 여러분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63

충성된 자와 악한 눈이 있는 자

본문 : (잠언 28 : 18 - 22)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충성된 자와 악한 눈이 있는 자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순서가 바뀌는 것 같지만 먼저 악한 눈이 있는 자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악한 눈이 있는 자

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악한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한평생을 스스로 속기만 하는 생활을 하다가 한번도 사람다운 생활을 누려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의 성격의 특성에 대하여 그들은 대단히 조급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급함이 착한 일을 행하는 일에 조급하다거나 남의 빚을 갚는 일에 조급하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에 조급하다면 그런 대로 복을 받을 일이지만 악한 눈이 있는 자는 그런 면에는 느긋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얻는 일에만 조급하다고 했어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조급한 생각과는 달리 무엇이 찾아온다고 했어요? 빈궁이 다시말하면 가난이 찾아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악한 눈이 있는 사람입니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눈이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면 다 같은 눈이지 악한 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눈은 마음의 눈, 다시 말하면 영적 눈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밝은 눈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눈도 있습니다. 마6:22절에서 예수님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에는 성한 눈이 있고 나쁜 눈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씀해 주는 악한 눈은 이 나쁜 눈을 가리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까?

(1) 재물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했습니다. 물질엔 놀라운 매력이 있고 흡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히 재물이 그들의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의 몸이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재물과 겸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엄히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은 사람의 마음속에 탐심을 일으킵니다. 인간으로 정욕적으로 살게 합니다. 인간으로 물질에 얽매이게 하여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딤전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2) 다음에 무엇이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까? 죄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죄는 바로 어둠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이미 어둠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으로 악한 눈의 소유자가 되게 합니다.

(3) 그리고 교만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성경에서 교만한 자의 눈을 악하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눈의 소유자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겸손을 모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 악한 눈이 있는 자가 하는 일

악한 눈이 있는 자가 하는 일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돈 이상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어떤 일도 하며 어떤 대가도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돈을 버는 일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한 눈이 그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때문에 법망에 걸리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하기 때문에 형사상 민사상 형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방법으로 부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부지런하므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한 대가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재물을 주셔서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부자가 되려면 자연히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나 속결 주의로 일을 치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5:18-19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모든 일에 참음으로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기를 ‘하나님은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보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로 속히 부자가 되는 것을 나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으니 나로 속히 그가 망하는 것을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기다림이 없이 속히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는 일에도 마치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는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셨다면 빨리 돈을 벌어 부자로 살아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속히 이루어지는 부자는 하나님이 주신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걸려 넘어질 때 속히 패망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재앙이 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무엇이 임한다고 했어요? 빈궁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부자는 안되고 가난이 그의 생애에 찾아와서 망하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재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자기의 원하시는 뜻에 따라 재물을 주시기도 하시고 주신 재물을 취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난을 준비하시고 빈궁이 찾아오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눈이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결정적인 재앙입니다. 마13:13-16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겼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어떻게 못해요? 하나님께서 이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 두셨기 때문에 재앙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눈이 악한 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밝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하는 것입니까? 시19: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 듣기를 세상의 오락을 따르기보다 더 하며 그 말씀 순종을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묵상하신다면 여러분의 눈은 자연히 밝은 눈이 되어 온 몸이 건강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눈이 밝으면 무엇이 보이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엡1:18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안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롬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기업을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충성된 자가 받을 복

다음에 우리는 충성된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우리의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는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 것입니까?

(1)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일합니다. 요셉이 비록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일했지만 그는 충성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은 인간 보디발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 생애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복이 보디발의 집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눅16: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충성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시는 큰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에게 충성된 생활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그 모습을 가지고 교회에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려면 먼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변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충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충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성도로서의 충성이 있습니다. 마24:45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맡겨진 충성이란 주인에게 맡은 사람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맡겨 주신 일은 양떼들에게 말씀을 잘 먹이는 일입니다. 이것을 등한히 하면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충성은 달란트의 비유로 마25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고전4:2절에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충성은 거짓이 없어야 하며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상급만을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러움이 있어도, 손해가 찾아와도,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있어도 오직 하늘의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어야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된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101: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눈은 이 온 땅을 살펴 충성된 자를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살피시고 찾아내시어 복을 주시되 충만하게 넘치게 주실 것이며 하늘의 상급으로 풍성히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잠언 강해 64

의인의 득세와 악인의 득세

본문 : (잠언 29 : 1 - 2)

오늘 잠언 강해는 ‘의인의 득세와 악인의 득세’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간 잠언에서 여러 가지 지혜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잠언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일에 있어서 그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교훈으로 이 말씀을 우리 실 생활에 응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인생을 아름답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안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연구하고 살펴보면 의인이 득세하는 시대가 있었고 악인이 권세를 잡고 득세하는 시대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해도 세종대왕 같은 의인이 나라를 주관했을 때에는 나라 안팎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 세월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연산군 같은 폭군이 권세를 휘두를 때는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고 백성들이 불안하고 어려움을 겪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어찌 그 시대뿐이었습니까? 지금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국회의원들이나 정부 여러 기관 요소 요소에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정치가 썩었다고 아우성들이며 살기 힘들다고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다윗 같은 성군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말할 수 없이 나라와 백성들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아합 같은 악한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가지가지 재앙이 나라 안팎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언하기를 이 세상 마지막에는 악인이 득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세월이 흘러갈수록 의인들이 득세하여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점점 더 패역해 지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딤후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계18장에서 종말에 이 땅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 땅에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죄악이 관용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대에서, 악인이 득세하는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신부의 단장을 갖추어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들은 하늘에서 들려 온 음성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악인은 누구인가?

그러면 오늘밤은 주로 누가 악인인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죄의 유혹을 받아 이 악인 중에 들어가지 말 것과 죄악에 대하여 경계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1절 말씀에서 악인에 대하여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책망을 자주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책망을 듣는 사람이 악인이 아닙니다. 자주 책망을 듣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의 구원이나 축복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계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징계나 책망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 책망이 왔을 때, 열심을 내야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6:23절에서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는 교훈이나 경계의 말씀으로 주십니다. 이 방법은 가장 부드러운 방법이며 악인에게도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먼저 이런 부드러운 방법으로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잠3장에서 이르시기를 ‘내 아들아, 여호와의 경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자는 곧 목이 곧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경종하신 후에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회개치 못하고 하나님 앞에 계속 패역한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은 2단계 조치를 취하시게 됩니다. 그 2단계 방법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채찍입니다. 시89:32절에서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계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10:13절에는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 채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가 처음 말씀으로 내릴 때, 그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채찍으로 내리실 때 그 채찍이 하나님의 징계이심을 깨달아 속히 죄악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이 곧은 사람은 자주 책망을 받아도 돌이킬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는 일이요, 끝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목이 곧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부리는 소에서 나온 말입니다. 소가 마치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곳곳이 세우는 일에서 나왔습니다. 소는 가축으로 농가에서 기를 가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는 농사일을 돕는 일에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는 어린 새끼 때부터 소를 길들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짐을 실은 달구지를 끌게 합니다. 이 때 멍에를 소 등에 올려놓습니다. 처음에 소는 이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목을 곧게 세웁니다. 그러면 그 주인이 휘차리로 소를 내려칩니다. 또한 고삐 낀 소의 코를 비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멍에를 메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한 단계의 훈련이 끝나면 밭을 가는 더 무거운 멍에를 씌웁니다. 어때 소는 세차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채찍으로 얻어맞은 후에는 할 수 없이 멍에를 메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모습이 마치 이 소의 멍에와 같아서 사람이 목을 곧게 하여 멍에를 메기를 거절할수록 더욱 세찬 하나님의 채찍이 우리의 등을 내려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이 징계해도 그 목을 숙이지 아니하여 연속적으로 얻어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19:29절에서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 한평생 얻어맞기만 하다가 평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생애를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보다야 나을 것입니다. 기왕에 예수를 믿고 살아가야 할 바에야 채찍보다 사랑을 받으며, 책망보다 칭찬을 듣는 편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경계하실 때,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끔할 때 못된 버릇을 고쳐서 채찍을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다가 채찍을 한 두 번 맞았다면 그 이상 더 목을 곧게 하여 연속적으로 얻어맞는 미련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의인이 많아지면

우리는 여기서 의인과 악인이 우리 사회나 국가나 우리들 가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어떻게 한다고요? (즐거워한다). 여기서 말씀하신 의인이란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이었기에 그의 통치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의인은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의인입니다.

이런 지도자가 많으면 그 백성들은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그 백성들은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악인이란 권세를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자를 말합니다. 과거에 히틀러가 그러했습니다. 뭇솔리니가 그러했습니다. 스탈린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안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 백성들은 그 폭정과 탄압에 시달려 탄식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악인이란 성품이 악하여 선한 친구들의 말이나 다른 사람의 좋은 의견을 무시하며 귀를 기우리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솔로몬 왕의 아들 르로보암이 바로 이 같은 악한 자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자,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으려는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향하여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악한 친구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는 말로 폭언했습니다. 르호보암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으로 유다지파만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이란 욕심이 많아 백성들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삼키는 자를 말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다가 그를 죽임으로 그 밭을 빼앗았습니다.

다음에 악인의 생활 특징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첨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웃에게 아참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첨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아첨하는 자가 많을수록 정치나 경제나 사회 모든 부분이 썩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첨이란 속으로는 존경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 그 이상의 존경을 나타내고 칭찬을 보내는 일입니다. 이런 아첨은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아첨이란 그물에 한번 걸리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 아첨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다가 망해 버리고 맙니다.

대개의 경우, 더러운 것이 있는 곳에 쇠파리 떼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 권세를 잡았을 때 이 아첨꾼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 유명한 정치가들의 종말이 왜 그리 슬프고 참담했는지 아십니까? 아첨하는 자들의 그물에 걸려들어 최후를 비참하게 마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권자들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주변에 깔려 있는 아첨자들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주변에 아첨하는 자들의 그물에 걸려들면 교회에서 옥석을 분별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혀같이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목이 곧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누구에게나 목이 곧은 사람에게 갑자기 홀연히 임합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악을 대적하여 언제나 의로운 편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바르게 교훈하시고 우리에게 바른 경계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생 길을 걸어가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65

지혜로운 자의 생애

본문 : (잠언 29 : 17 - 27)

지혜로운 자의 생애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식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생애는 자기의 그 미련함이 자기 인생의 함정이 되어 자기 인생을 고난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밤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생애인가에 대하여 지혜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생애의 기울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자식을 주 안에서 키우라

본문에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말씀은 자식에 관한 권고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선물이란 말씀은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 사실인즉 자식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식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골치를 썩히는 것입니다. 품안에 자식이란 말이 있듯이 자식이 나이가 들고 머리가 커지면 부모를 알기를 우습게 알고 부모에게 고분고분 하는 것은 구시대의 낡은 풍습이요 이제는 반항도 하고 불순종하기를 보통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잘못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18절에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하나님의 묵시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지 못한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부모를 평안하게 하고 부모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도록 그 자녀를 키우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 자식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어요? (징계). 그리하며 그 자식이 커서 그 부모에게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평안하게 하겠고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자식에 대한 징계는 신약이나 구약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13:24절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차마 못한다는 말은 자식이 애초롭고 안타까워 손을 댈 수가 없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그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고 부모를 거역하며 죄를 범했는데도 방치하거나 못 본 채 그냥 지내 버린다면 그런 일은 결과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미워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그로 인해 그 자식의 생애가 불행해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 교도소에서 비참한 형살이 하고 있는 불량 청소년들을 보면 부모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애들이 많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잠19: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2:15절에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매를 가지고 자식을 키우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채찍을 들어 때릴 때는 때리되 그런 매질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손길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시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올바른 징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근실히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자식이 장차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 부모를 평안히 하고 부모의 마음속에 기쁨을 심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2. 언어에 조급하지 말라

다음에 지혜로운 자는 그 입의 말에 조심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진리입니다. 언어에 조급하다는 말은 말에 대한 책임이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개 하나님께 경솔히 서원하고는 곧 서원을 잊어 버리거나 감당할 수 없어 배반하는 사람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쉽사리 약속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 약속을 쉽게 파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이나 말을 참지 못하고 깊은 생각도 없이 조급하게 하는 말에는 반드시 함정이 따릅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를 담임하고 책임지고 있는 주의 종에게 약속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약속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의 일이니 17년이 넘은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엄청나게 많은 건축헌금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헌금을 내지 않은 채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 후 소식이 감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길에서 만났는데 곧 낼 듯이 약속하더니만 그 후 소식이 또 끊겼습니다. 그러다가 엊그젠가 길에서 또 만났는데 일간에 곧 찾아 뵙겠다고 또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간이란 기간이 몇 년이 지나는지는 몰라도 아직 찾아오기는 고사하고 전화 한마디 없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쏟는 사람은 그의 생애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는 징계가 따라오게 되고 사람으로부터는 신용 타락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신임과 신용은 그 사람의 양심을 보여 주는 것이요 그 사람의 인격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그 책임을 질줄 알아야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약속한 것은 그 일이 자신에게 불리하고 재산상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꼭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약속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에 조급한 것입니까? 말만 해 놓고 실행이 없는 사람이 말에 조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하는 일에는 명수입니다. 기도하라면 단 5분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흉을 꺼내 놓고 말하는 데는 한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 종일이라고 모자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 입심 가지고 기도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쏟을 수 있다면 얼마나 유익하고 보람있는 생애를 살아갈 것이며 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조급한 입술을 제어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말만 조심스럽게 할 수 있어야 입으로 말미암아 재앙을 받지 않고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다윗은 시141편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같은 기도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있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참지 못하고 방정맞기 때문에 하나님이 파수꾼을 세우셔서 지켜 주셔야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혀에서 나오는 악한 말과 거짓된 말과 속이는 말과 남을 비방하는 말 등이 어디서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까? 약3:6절 말씀에서 혀에 대하여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라고 했습니다. 혀는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지체 중에서 가장 적은 것이지만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는 것이 이 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혀에서 나오는 악한 말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어요? ‘지옥 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우리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해야 하나요, 하지 않아도 되나요?

(3) 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실수가 없기 위해 우리의 혀에 재갈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약3:2절에서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그 입에 재갈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약1: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혀에 재갈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우리의 입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3. 분노하지 말라

다음에 지혜로운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분노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느냐, 아니면 우리를 해롭게 하느냐’ 이에 대한 해답을 22절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노하는 자는 무엇을 일으킨다고? (다툼)

여러분, 모든 다툼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사람의 분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노한다는 말은 성을 낸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성을 내면 그 대화는 싸움으로 시작되어 싸움으로 끝나 버립니다. 누구와 싸우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성을 내보세요. 당장에 싸움판이 벌어질 것입니다. 분을 품는 일은 만약 그 분이 풀어지지 아니할 때 그 분이 끝내는 범죄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을 때,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가인은 심히 분하여 했다고 했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냐’고 하셨습니다. 가인의 분은 결국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분을 내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을 내되 그 분을 하루 종일 마음에 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분을 삼가는 일은 그 분을 마음에 오래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제와 사랑으로 분을 내지 말고 슬기롭게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4. 교만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 말라

다음에 지혜로운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에 대하여 2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낮아지게). 겸소하면 무엇을 얻어요(영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단히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에 대해 성경에서는 명백하게 만인의 증거가 될 수 있도록 밝혀 놓으셨습니다. 첫째 교만한 자는 낮추신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교만한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어떻게 됩니까? 영락없이 쇠고랑 차고 유치장에 들어갑니다. 권세를 가지고 교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박정회씨는 어떻게 되었고 전두환씨는 어떻게 되었으며 노태우씨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김영삼씨 역시 자신이 누렸던 권세에 비해 너무나도 비참한 자리에 내려앉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대적자가 되면 그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으로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질 때까지 연속적으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을 두려워하면’ 무엇에 걸린다고 했습니까? (올무).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결론 :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온갖 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제일주의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지혜로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어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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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66 -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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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66

아굴의 두 가지 소원

본문 : (잠언 30 : 7 - 9)

아굴이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울 삼아야 할 내용이기에 오늘 잠언 강해는 아굴이 기도한 두 가지 소원에 대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굴은 자기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실 것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가지는 허탄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란 기도요 다른 하나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고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 이유로써 아굴은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나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했습니다.

1. 죽기 전에 주옵소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굴은 그가 하는 기도의 응답이 나의 죽기 전에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는 죽기 전에 맺어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히9:27절 말씀을 보면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죽은 후에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말씀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자신이 심은 열매를 먹게 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상급과 심판의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열매에는 반드시 상급이 따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두 가지 형태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상급을 이 땅에서 모두 얻으려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는 기복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앙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기복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는 부흥의 속도가 빠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물질에 의존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노아가 외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세속적인 생활을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경종하셨습니다. 인자의 때란 주님의 재림의 날로 인류의 종말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기복을 바라는 것까지는 좋지만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그 복이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을 바라는 사람은 어느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꼭지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얻는 복은 언제인가 무너지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장구한 축복인데 이 축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기복 신앙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소망을 바라보며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의 토대 위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신앙 생활의 태도는 이 땅에서 사는 일에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그 날에 받을 영광과 상급을 바라고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11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 땅에서 살아간 그들의 생활의 모습이 나옵니다. 7-14절 말씀을 보면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여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한 일이라던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갔으며 장막에 거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5-37절까지는 믿음의 선진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하늘의 상급을 받을 소망이 없다면 이 같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기복 신앙을 강조하는 어느 교회에서는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를 자기들 나름대로 뜯어 고쳐 기복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찬송가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란 가사가 있는데 그 가사 중에 있는 내용을 멋대로 고쳐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의 내용을 ‘멸시 천대 십자가는 주가 지고 가셨으니’라고 고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승리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며 오히려 주님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갈 때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와 자색 옷 입은 부자의 비유에서 하늘의 상급이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의 축복에 비하여 얼마나 차원이 높은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거지 생화를 해 왔지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소망을 가지고 만족스럽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으로 연락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에게는 현재의 물질만 있을 뿐,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잠시 잠깐 후에 그의 생명이 깊은 음부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가 그 곳에 갈 때 자기가 의뢰했던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몸에 걸치고 있었던 자색 옷조차도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죽기 전에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 죽은 후에 하늘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밑천을 쌓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아굴의 첫 번째 기도

아굴은 그 첫 번째 간구에서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허탄이란 자랑이나 교만이나 세속적인 풍조를 쫓는 허영을 말합니다. 자랑은 자기의 인격의 부족을 스스로 보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에는 자기가 자기의 자랑을 하는 일에 대하여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입으로 자랑하는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입을 벌리면 자신의 자랑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자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나오면 까딱없이 깎아 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하고 교제하는 일은 다른 곳에 가서 내 흉을 늘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자랑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쁜 이유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자기 입으로 자랑하면 하나님 앞에서 상급의 점수가 그만큼 깎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입을 벌이면 자기 자랑으로 시작하여 자기 자랑으로 끝내는 사람은 이 아굴의 기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남보다 높이는 일입니다. 교만이 죄가 되는 이유는 교만은 원래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따르는 사람의 특색은 교만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허영입니다. 허영은 자기의 생명을 죽이는 화살입니다. 세상풍조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이 허영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는 바로 이 허영입니다. 허탄을 좇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굴과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굴은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이란 우리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거짓의 아비는 바로 마귀이기 때문에 거짓말하는 사람은 마귀에 속하게 되고 마귀의 행실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은 거짓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명수요 더 나가서는 하나님까지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죄와는 사촌 지간입니다. 사5:18절 말씀을 보면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이끄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기젓은 죄를 끌어 당기는 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무서운 거짓말을 우리 입에서 멀리 떠나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활해야 거짓과 멀어지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거짓이 견딜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 달라는 아굴의 기도는 바로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두 번째 소원의 간구

아굴은 두 번째 간구에서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생활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가난하게 마옵시고라고 간구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이란 자신의 가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정도로 가난한 가난을 말합니다. 가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굴의 이 같은 기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받는 고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속담에 사흘 굶어 ? 아굴은 도적질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 보면 마음으로 이미 도적질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 보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아굴은 부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의 훌륭한 신앙은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가난은 싫어하지만 부자가 되는 일이야말로 무엇 때문에 싫어할 것입니까? 그러나 아굴은 부자 때문에 오는 해로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생활 지침은 하늘의 상급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배부르면 어떤 죄를 번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돈이 없을 때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의 신앙적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인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앞세우는 불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지난번 옷 로비 사건 때 증인으로 국회에 나와서 증언한 여인들을 보세요. 한결같이 교회의 권사요 집사직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는 신앙적인 태도로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산 것이 아닙니까?

돈이 없던 사람이 돈이 많이 생기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오히려 가난했을 때 좋았던 신앙이 돈이 생기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생활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굴은 어떤 생활을 원한 것입니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필요한 양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딤전6:7-8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어떤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줄로 알라 ?

결론 : 우리는 우리 신앙 생활의 바른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이 목표를 잘못 정했을 때 우리는 귀한 하늘의 상급을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굴과 같은 귀한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앙을 가지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67

미련한 인생이 걷는 길

본문 : (잠언 30 : 10 - 17)

오늘밤 잠언 강해는 미련한 인생이 걷는 길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는 그의 인생 길이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얻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지만 미련한 사람은 언제나 지혜를 버림으로 생명을 잃고 하나님의 저주를 자청하는 것입니다.

1. 미련한 자의 경우

미련한 자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므로 미련하게 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의 미련함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 미련함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미련한 형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믿지 않거나 행하지 않으므로 미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의 미련함의 껍질이 벗겨지기까지 수시로 하나님의 손길의 간섭이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미련한 인생들은 어떤 생애를 보냄으로 그의 인생 길에 어려움을 겪느냐에 대해 몇 가지로 구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10절 말씀에서 다른 사람을 훼방하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모함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일로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 줄로 알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악한 일에 대한 보응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므로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악인에 의해서 지배되고 악인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7장의 산상보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느 경우에나 누구의 경우에나 적용되는 법칙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결코 남을 헐뜯거나 남의 흉을 늘어놓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 그 사람에 대해 칭찬 해주고 그를 높여 주면 그 일로 인하여 자기에게 칭찬이 돌아오고 자신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미천한 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욕하거나 저주하거나 훼방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소문을 들으면 악담이 나가게 되고 저주가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한 모함을 받게 되거나 훼방을 받아 끝내는 죄책을 당하는 일까지 생기게 될 것임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도 이 같은 원칙에 기초를 두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다음에 11절과 17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의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자는 미련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자식은 어떤 경우에라도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 공경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의 첫 명령으로 주셨고 엡6장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신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님께 효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 공경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축복의 씨앗으로 떨어져서 자기 생애의 많은 축복의 열매를 맺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할 미련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에 보면 부모를 학대하고 불효하며 심지어 구타까지 하는 패륜아들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식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부모에 대하여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를 조롱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축복하지 아니하는 일도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미련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한 자는 언제나 자기의 더러움과 거짓됨을 모릅니다. 자기는 깨끗한 것으로 알고 정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깨끗한 것처럼 처신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양심을 속이는 더러운 것들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려 않을뿐더러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내게 대하여 모르심이 없으시며 내 마음의 생각까지 낱낱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언제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며, 거짓된 것을 포장하여 숨기려고 하며, 거짓을 진실인양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 앞에서 삼중적인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죄, 남을 속이는 죄, 다른 사람을 잘못 가르치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명심하고 외식하는 미련한 자들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눈이 심히 높은 자는 미련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높다는 말과 눈꺼풀이 높이 늘린 무리란 말은 바로 교만한 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교만한 자만큼 미련한 자도 드문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자기의 교만을 자랑하고 자기를 교만하게 만든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나 능력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법칙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그의 대적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의 대적이 되셔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싸우시나? 삼하 22:28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낮추실 때 높아질 위인이 없는 것입니다. 잠16:18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망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인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복중에 복입니다. 여러분은 교만한 자를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자를 부러워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자와 상대하실 때에는 중요한 대화를 하거나 약속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얼마 안가 곧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다음에 미련한 자에 대하여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를 삼키며 궁풉한 자를 삼키는 무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일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어 반드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늘 관대합니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시15:7-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가난한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면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늘 가난한 자를 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은 내 이웃에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로 그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제의 은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은사인 것입니다. 피차에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의 보상이 확실하며 더욱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시고 이에 대한 상급도 하늘에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이 같은 지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오히려 삼킨다고 하신 것입니다.

(6) 다음에 족한 줄을 모르는 인생을 미련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15절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족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을 마치 거머리 같은 인생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족한 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마치 음부와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나 족한 줄을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만족함을 모르고 살아가면 급기야 그의 인생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잠16:1절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간 스스로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28:20절 말씀에 ‘빨리 부자가 되려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기 때문에 반드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재물을 얻기에만 급급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빈궁이 그의 뒤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딤전6:9절 말씀을 보면 부하려는 자는 시험과 올무에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족한 줄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아굴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 ? ).

결론 : 여러분, 미련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생애에 큰 손해를 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복은 오지 않고 재앙이 그들의 생애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지혜를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을 삼가고 행할 바를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 인생의 축복은 순리적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인생을 실패한 미련한 자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고 언제나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로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67

동물의 지혜를 배우자

본문 : (잠언 30 : 24 - 28)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작고도 지혜로운 동물 네 종류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동물은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보잘 것이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심으로 그들을 통하여 우매한 인생들에게 많은 삶의 지혜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소개된 동물은 네 종류인데 그 이름을 보면 개미와 사반과 메뚜기와 도마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동물들로부터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미미한 동물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까? 오늘밤에는 잠언에 나오는 이들 작은 동물들에 관한 지혜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 개미의 지혜

그러면 개미의 지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개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라고 했습니다. 개미의 지혜와 그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개미란 존재는 매우 작고 또 약하기 그지없는 곤충입니다.

그런데 이 개미는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을 여름철에 예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미의 특색은 부지런함과 양식을 예비하는 지혜에 있습니다. 잠6:6절을 보면 개미에게 배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개미로부터 그 지혜를 배울 점은 부지런함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게으른 자의 특색은 자리에 눕는 일이며, 잠을 오래 자는 일이며, 모든 일에 열심을 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돌아갈 소득은 무엇입니까? “빈궁이 강도 같이 오고 곤핍이 군사같이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게으른 자들가 결국 가난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잠10:4절 말씀을 보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잠21:5절에서도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급한 사람을 부지런한 사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을 기우려 그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을 말하지만 조급한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익을 얻기 위해 되는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공사를 맡기면 부실 공사가 아니면 날림 공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로 개미와 같은 성실함과 부지함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롬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느냐는 우리의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벧후 1:8절 말씀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계2장에서 에베소 교회의 칭찬 받은 일 중에 이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힘쓰는 일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의 일에 부지런한 사람은 주님 부시기에 믿음직스럽고 심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딤전5:13절에서 경종하기를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여자들의 특색은 집집에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일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무슨 일을 하느냐? 전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다니는 목적은 망령된 폄론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신 것입니다. 폄론이란 남을 판단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돌아다니며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인들끼리 싸움질을 부추기기도 하며 오해를 사게 하여 서로 원수를 만들기도 하며 교회 안에 잡음을 일으켜 시끄럽게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른 이 무리들은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남의 비밀을 잘 퍼뜨립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일을 소문내는데 재빠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로 게으른 자가 이처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이 게으르면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개미는 서로 돕는 협동력이 대단히 강한 공충입니다. 개미들이 짐을 운반하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절로 감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개미가 짐을 나르다가 힘이 들면 다른 개미가 그것을 대신 짊어지고 나릅니다. 너무 큰짐을 물고 가노라면 이 짐을 도우려고 많은 친구 개미들이 몰려옵니다. 개미는 이처럼 서로 협력하는 협동 정신이 강하지만 떠들거나 고함을 치거나 누구를 욕하거나 잔소리치는 범이 없이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이런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야말로 이런 협동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전12:4절에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각기 받은 은사대로 협력해 나갈 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개미는 겨울 양식을 위해 여름에 일을 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개미와 베짱이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개미에게는 이처럼 예비하는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도 예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비하는 지혜를 개미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눅12:35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처럼 교훈해 주셨습니다. 35절로 4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이 띠는 진리의 띠를 말합니다. 사람의 허리에서 띠를 끄르면 힘이 빠지고 옷이 벗겨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서 진리를 벗어버리면 신앙의 허수아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등불을 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을 받은 우리는 그 빛을 발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매 맺는 성도들의 생활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다음에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서 있으라는 말씀은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신부로써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반의 지혜

다음에 우리는 사반이란 짐승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반은 우리가 잘 알고 흔히 볼 수 있는 산에서 사는 토끼를 말합니다. 이 사반의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반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다고 했습니다. 토기는 겁이 많고 약하기로 이름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토기를 키울 때 귀를 잡아야지 허리를 쥐었다간 허리뼈가 부러져 죽으리만치 아주 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토끼는 자신의 약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바위 사이에 그가 거처할 집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토끼는 자신의 집에서 다른 동물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반석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우리 인생을 피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할 바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환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줍소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 인생의 만세 반석이십니다. 이 분을 자기 인생의 반려자로 삼은 사람은 사망의 해로부터, 죄악의 물결로부터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다윗은 시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바위가 되시는 이상,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함이 없으며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내 평생 나를 따를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시41편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우리의 힘이십니다. 이 분을 여러분의 영원한 반려자로 삼으실 때 그가 여러분의 인생의 바위가 되어 주심을 믿으시고 이 토끼의 지혜를 배워 아름다운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메뚜기의 지혜

다음에 메뚜기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메뚜기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메뚜기는 인간에게 해를 주는 해충이지만 우리는 이들로부터 질서정연함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메뚜기 하나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약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큰 무리를 이룰 때 큰 군대가 되어 크나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는 메뚜기처럼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 하나의 힘이 합쳐지면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생교회를 건축할 때만 해도 우리는 힘을 합쳤습니다. 교인 한 명 한 명을 보았을 때 누가 성전을 지으며 어떻게 지을 것인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그런데 적은 수효였지만 기도로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열심으로 하나가 되니 놀라운 기적이 탄생된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이승만 박사의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 신생교회도 믿음으로, 사랑으로, 소망으로 하나로 뭉칠 때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4. 도매뱀의 지혜

끝으로 도마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손에 잡힐 만한 도마뱀이라고 했습니다. 이 도마뱀은 비록 몸집은 작지만 지혜가 있어서 날파리나 다른 곤충들을 잡아먹고 어떤 경우에는 왕궁에조차 그들의 처소를 만듭니다. 왕궁에 거처하는 도마뱀은 대적들에게 사로잡힐 염려가 없고 왕궁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비록 연약한 가운데 살아가며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지만 왕궁인 하나님의 전에서 살아가며 장차 천국에 올라가 살아갈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 길에는 여러 가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미생물이나 곤충을 통해서도 인생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익히고 배워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하여 우리의 생활이 보람이 있고 소망을 이루며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생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개미처럼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어 주님을 섬기며 토끼처럼 만세 반석 되시는 우리의 주님을 내 인생의 피난처로 삼으며 메뚜기 떼처럼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며 도마뱀처럼 왕궁에 그 거처를 삼는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68

현숙한 여인

본문 : (잠언 31 : 10 - 31)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은 그의 얼굴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못생기고 몸매가 없으면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알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탓하는 여자는 어리석은 여자들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얼굴로 평하거나 판단하는 사람들 역시 현명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자의 얼굴만 보고 아내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방법으로 평생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남성들 역시 어리석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쁜 꽃이나 풀에 독이 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얼굴의 미모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가정을 복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성경이 말하는 여인상

잠11:22절 말씀을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미모를 갖춘 여인이 교양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 같은 여인이야말로 돼지 코에 금 고리를 채워 놓은 격으로 볼쌍 사나운 일입니다.

잠12:4절을 보면 어진 여인과 욕을 끼치는 여인이 그들의 가정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욕을 끼친다는 말은 모든 일에 절제가 없고 이해심이 없으며 사납고 잘 싸우며 남편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유 분방한 길을 자기 마음대로 걸어가는 여인을 말합니다. 이런 여인을 아내로 데리고 사는 남편은 언제나 그 뼈가 썩음 같다고 했습니다.

한 집안을 세우고 한 집안을 넘어지게 함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처신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14:1절 말씀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참 인격과 그 가치에 대하여 시대는 달라도 구약에나 신약에나 똑 같은 관점에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2:9-10절 말씀을 보면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가가 참 아름다움으로 꾸며야 할 일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나 고금을 물론하고 여인이 가정이나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냐는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31장에서 솔로몬 왕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현숙함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고 했습니다. 현숙하다는 말은 어질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여자의 참 가치는 아름다움에 있는 것도 얼굴이 고은데 있는 것도 몸매가 날씬한데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현숙한데 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현숙하다면 이 같은 남편은 진주보다 귀한 아내를 소유하고 있는 복된 남자인 것입니다.

2. 어떤 여인이 현숙한 여인이냐?

그러면 어떤 여인이 현숙한 여인이냐? 이에 대하여 30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은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숙한 여자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여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경외란 말은 두려워하며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큰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여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수고하면 수고하는 대로 그 열매가 다른 곳으로 흘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런 자의 남편은 그를 믿나니 (무엇이 핍절치 아니한다고?) 산업이 핍절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산업이란 그 집에서 경영하는 생업 수단입니다. 하는 일마다 번영하고 손이 닿는 일마다 복을 받는데 신28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떡 반죽 그릇에까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127편을 보세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이 먹음이 헛되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집은 일은 부지런히 하는 데도 그 열매가 그 손에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사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다음 2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들이 일어나 사례한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이 그 어머니를 공경하며 자식들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지극히 행복스런 일은 남편의 극진한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8-30말씀을 보세요.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 난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남편의 칭찬을 들을 때, 인생의 참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현숙한 여인의 남편은 그 아내를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들 위에 뛰어 난다는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4) 또 이런 여인은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의 덕행이, 그 여인의 현숙함이 이미 온 성에 두루 펴 쳐져서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상

그러면 어떤 여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냐? 성경 찬송이나 옆에 끼고 교회에 다니는 여인인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은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순복한다고 했습니다. 이 순복이란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남편이 시키는 일이라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무조건 따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이나 타당성이 있는 일에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남편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대가 악해서 그런지 못된 남편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내와 짜 가지고 다른 남자를 유혹하여 위자료를 뜯어먹는 짐승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매치기 부부도 있고 부부 사기꾼들도 많이 있습니다. 현숙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악한 일에서 손을 떼게 하며 악행하는 길에서 올바른 인생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악한 일이나 옳지 않는 일을 따르는 일은 순복이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은 남편과 그의 온 가정을 파탄의 길로 이끄는 일이기 때문에 현숙한 여인은 이런 남편에게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벧전3장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안 믿는 남편에게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힘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 앞에서 항상 정결한 행위를 보여 줍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일을 만나도 바르고 정직하고 참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인임을 남편에게 보이므로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인은 언제인가는 그 남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부지런한 여인입니다. 13-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부지런히 손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입으로만 일하는 여인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입방아로 한목 보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게으른 여자는 어데 가나 문제점을 안고 다닙니다. 딤전5:13절 말씀을 보면 게으른 여인은 게으름을 익힌다고 했습니다. 게으름이 그의 천성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는 일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망령된 폄론을 한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일, 남의 비밀이나 털어놓고 흉보는 일을 하면서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만들어서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고 그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게 하여 불행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가 살고 있는 집안에 들어서면 벌써 집안 살림 살이를 꾸며 놓은 것으로부터 냄새가 풍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의 부지런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에서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18절에서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집사람들은 이 여인으로 인하여 놀라운 복을 받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세요. “그 집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는다”고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궁핍한 자에게 손을 내민다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들만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 민다”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어떤 것으로 옷을 삼는 것입니까?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피에르 가르뎅이 아닙니다. 밍크 코드도 아닙니다. 무엇으로 옷 입어요? (능력과 존귀)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한 행실로 영적 옷을 삼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힘으로 허리를 묶는다는 말은 진리로 그 허리띠를 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며 그 말씀으로 자기 팔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여인에게 복을 주십니다.

(5)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여인의 입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말에는 인애의 법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입과 마음을 단장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결론 :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값은 진주보다 귀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을 얻는 남편은 행복하고 이런 여인을 어머니로 가진 그 집 자녀들은 행복하고 이런 여인을 성도로 가진 교회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전도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들입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현숙한 여인이 되셔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하므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신생교회 여러분들은 이 같은 여인이 되어 여러분의 값이 값진 진주보다 더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을 만드시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취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