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 밤중소리 11-06 | VIEW : 3,313
지혜로운 아들의 열매
( 본문 : 잠언 10 : 1 - 10)
잠언을 쓴 사람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인 솔로몬입니다. 열상4:32절 말씀을보면 솔로몬은 삼천 잠언을 썼다고 했습니다. 잠언서에는 지극히 적은 한 부분만 기록한 것이지만 그 전체적인 내용을관찰하면 이 땅에서 의인이 받을 상급과 악인이 받을 악의 형벌이 계속 반복되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는 교훈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중요한 요지는 미련한 아들과 지혜로운 아들의 두 경우를 보여 주시면서 이들이 그 부모에게 미치는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즐거움과 슬픔은 그 자식들의 지혜로움과 미련함을 따라 좌우된다고 말씀해 줍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지혜로움을따라 기뻐하고 그 자식의 미련함을 따라 슬퍼한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출발하고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솔로몬의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 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부모님께효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크게 효도하는 방법은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 일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곧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방법은 그 부모에게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데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 사상 때문에 부모를 섬기며 효하는 일을유교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 유교 사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부모님께 대한 제사와 외식적인 허례허식에 뿌리를둔 사상이 바로 유교 사상입니다. 유교 사상에서 나온 부모님께 대한 공경은 결코 올바른 인간 윤리에서 나온 사상이아닙니다.
윤리란 말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 유교에도 어느 정도의 윤리적 요소는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교 사상이곧 윤리가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들이 지켜야 할 참 도리는 십계명의 도덕율에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를 잘 이해하지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라고 매도하고 교회에 나가면 가정 윤리가 당장에 무너져 버리는 것으로 잘못인식하고 있지만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그리고 사람과 사람간의 진실한 윤리적인도덕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전래한 한국인의 윤리관이 '삼강오륜'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이 삼강오륜은대단히 봉건적이고 왕정 시대하의 비민주적 윤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삼강오륜이 무너진 것은 기독교의 문화 때문이아닙니다. 민주주의 시대가 봉건주의 시대 아래에서의 낡은 비민주적 도덕의 틀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이야기지만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삼강오륜'이 무엇이냐는 설문을 쓰게 한 적이 있었는데그 대답이 너무 희극적이라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삼강은 한국의 가장 큰 강 셋을 말하는데 한강, 압록강, 낙동강이라고썼고 오륜은 올림픽의 약자라고 답안을 썼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도덕 생활의 규범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명을 빼면 그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했습니다. 엡6:1절에 서는 '자녀들아 너의 부모를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 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 뿐 아니라, 공경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공경한다는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부모님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최대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 그리고그분께 순종과 공경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 의 말씀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으며또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부모를 이처럼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복된 삶과 장수의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 어떤 종교나 도덕을 중시하 는 어떤 단체보다도훨씬 우월한 부모님께 대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 지혜로운 아들에게 주시는 재물의 축복
오늘 본문 2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구분하면 2-6절까지는 지혜로운 아들이 받을 재물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고 7-10절까지는지혜로운 아들에게 돌아올 명예와 미련한 아들에게 돌아갈 부끄러움이 쓰여 있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불의한 재물을 물리치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아들은 불의로 얻는 재물을 탐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그런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속이는 방법으로 재물을모아도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자기가 가로챈 사람이 부자가 된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주일날 장
사하거나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일도 불의한 재물을 쌓는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마땅히 드린다는 일처럼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마땅히 드린다는 말은 온전히
드린다는 뜻입니다.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친척이나 이웃이나형제들로부터 입원비 명목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그
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뗀다는 일은 어렵습니다. 갑자기 난데없이 떼돈이 수중에 들어 왔습니다. 수천
만원에서 수억대에 해당되는 거금입니다. 거기서 감사한 마음으로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드린다는 일은 어지간히 어
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없어서가 아닙니다. 돈에 대한 탐심이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
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자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 사람의믿음대로 그럭저럭 먹고 입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만 하늘 문을 여시고 창고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축복된 생활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는데 이 재물을 하나님은그 사람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시고 자기에게
차례 갈 몫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그 손에서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시127편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수고가 헛되며 여호 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리 아등바등 애써도 헛된 수고로 끝나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말1: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눈독을 드려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불의한 재물과 의로운 재물을 구별하지 못하며 자기의 것과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자꾸 쌓아도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헐리고 마는 것입니다. 재물은 내 손에만 들어오고 내 품에만 안
기면 내 것이 되는 줄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잠23:5절말씀을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재물은 날개를 내
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돈이머물러 있을 집이 못되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빼앗아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들은 주리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히 변치 않는 법칙입
니다. 시34:9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를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
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법칙에 대하여 주님은 이처럼 말씀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더하시리라.' 그런데 이런 법칙에 예외인 두 종류의 사
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스스로 가난과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장
차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그 보상으로 받을것입니다. 다른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 그 사람을 귀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연단 중에 있는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
다. 연단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기까지 고난의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탐심이나 불의의 재물로 말미암아 그런 생활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아닌데도 어려움을 겪는다면 불의한 재물로 인한 욕심때문에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
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재물을 쌓는 생활을 한 것으로알고 올바른 믿음의 생활로 방향을 바르게 잡아야 할
것 입니다.
2. 의인의 명예와 악인의 수욕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에는 의인이 얻을 명예와 악인이 얻을 수욕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고 그의 걸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시1:6절에 나오는 말씀에는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나오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인의 머리에 복이 임하는 이유와 악인에게 패망과 썩음이 오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명령을 받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모든 축복의 근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이 없이는 복 받는 생애를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 성들에게 신30:15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으로받으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길은 평안하고 그에게는 항상 칭찬이 오게 되고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아들은 그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미련한 아들이 패망하고그 이름이 썩는 이유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악독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 '악인의 입은 독을머금었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한다'고 했습니다. 입에 악독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진실이 없는 입술을말합니다. 하나님께 값진 입술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없는 입은 모두 가증한 입입니다. 입이 악독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모해하는 혀를 가리킵니다. 남을 모함하려고 그 사람을 중상하거나 참소하면 그 보응이 자신에게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축복을 해 주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해준 축복이 그 사람에게 머무를 수 없을 경우에는그 축복이 내게로 되돌아와 자기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라고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109:17절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명심하고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자기에게 임하고 축복 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입과 생명과는 밀접한 상호 관계를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21:23절에서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141편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지혜로운 아들은 육신의 부모에게 대한 효도의 극치요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면류관
이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로운 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걸어 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의 축
복과 의인의머리에 내리시는 영광의 복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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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21 - 25
◆ 밤중소리 02-02 | VIEW : 1,039
잠언 강해 21
미련한 자와 지혜자의 차이
( 본문 : 잠언 10 : 11 - 21)
오늘 봉독한 잠10:11-21절 말씀은 크게 세 가지 교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지혜로운 자의 입과 미련한 자의 입에 대한 교훈이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의 사랑과 미련한 자의 미움이요 다른 하나는 훈계를 지키는 지혜로운 자와 훈계를 버리는 미련한 자에 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1. 말에 대한 교훈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요4장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샘이란 바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의인의 입은 왜 생명의 샘물이라고 한 것입니까? 의인의 입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이 흘러나오므로 듣는 자로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을 토하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자의 생명을 해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원흉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아담을 타락시켰고 그로 인하여 온 인류로 죄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흔히들 사람은 말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그 입의 말로 자기 의 사상, 자기의 마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속담이 있드시 세상에서 말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과 교통하십니다.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신 것도 아마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1:1절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입술이 있고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지만 이 입술의 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입의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정말로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서에서는 이런 언어 사용에 대하여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 많은 말 중에서 자신의 실수를 많이 드러내 놓게 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의 부패한 더러운 것들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말로 나올 때, 그 사람의 거짓된 것이 드러나게 되며 가증한 것이 밖으로 나오며 그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찌끼가 되어 뒤로 배설해 버리지만 사람의 말은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입을 통해서 모두 토해내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올바른 도덕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사람이 죄악된 마음의 생각을 억제하거나 근신하므로 억누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도덕 생활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인간 사회가 하나의 이성 없는 동물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제어가 입의 말의 제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인품이나 인격을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짓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인품은 그의 인격 자체가 거짓된 인물인 것입니다. 입으로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그의 마음이 선량하거나 그의 인격이 고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욕설을 퍼붓고 말을 가리지 않고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지극히 야비한 인품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그 곁에 함께 서 있는 것 조차도 사실인즉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에대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기성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말을 거룩한척 위장하지만 그의 행함에서 그들의 열매가 드러날 때, 사기꾼이나 외식자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진실한 것이 아니면 입에서 말로 표현하지 않으며 그 입을 아껴 말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잠17:28절 말씀에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르면서 아는척하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망신은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느 날 한쌍의 남녀가 팬팔로 오랜 기간 교제하다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약속한 장소에서 반갑게 만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간 문학에 관한 대화를 하다가 남자쪽에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로미오와 쥬리오’란 책을 읽었습니까? 처녀는 부끄로운 듯이 살짝 웃더니 ‘로미오는 진즉 읽었지만 아직 쥬리오는 읽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면 차라리 웃음으로 넘겨버렸으면 애교로 보아주었겠지만 아는척 하다가 그만 무식이 드러나 그 시로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다음에 성경은 우리에게 말에 실수를 하지 말도록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약3:2절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물과 같습이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쏟아진 물처럼 다시 줏어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한 것입니다.
첫째로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을 앞뒤 가림이 없이 다 쏟아 놓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말에 조급한 자를 보느냐 이에서 더 미련한 자에게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하튼 말을 다른 사람에게 빨리 전달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면 자기의 허물이 신속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은 말하기 전에 그 말의 영향력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교훈입니다.
다음에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한 말에 얼마만큼 책임을 느끼며 그 책임을 지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진실성과 인간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약속을 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도 신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형제들이나 이웃이나 모든 사람에게 하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지혜로운 입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입술이 지혜로운 입술입니까? 잠15:7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 그 입에서 지식이 나오는 사람의 입은 보배로운 입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씀하는 지식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생명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잠20:15절 말씀을 보면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입을 열때마다 귀한 보배같은 생명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듣는 이에게 생멸을 주며 그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미련한 자의 입술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잠18장에서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멸망이 되는 입술은 무엇입니까? 거짓을 토해내는 입술이요 남의 흉과 허물을 드러내는 입술이요 남을 저주하고 축복하기를 싫어하는 입술이며 거짓 증인이 되는 일에 두려워 하지 않는 입술입니다. 이런 입술을 소유한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며 자기가 자신을 사망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입술에 거짓이 있는 사람을 신실한 일꾼으로 쓰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계20:5절에서 144.000명의 자격에 대해서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잠1:22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자는 지식을 미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으로 들어차 있고 입에도 지식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의 모임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잠20:3절에서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말은 화해를 깨고 진리를 거스리며 사랑을 따르지 않으므로 자연히 다툼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4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순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이처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조심스럽게 합니까? 하기 좋다고 함부로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마12:36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랑과 미움
다음에 우리들이 살펴 볼 일은 지혜로운 자가 구하는 것과 미련한 자가 구하는 것이 나무나도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랑을 구하고 미련 자는 미움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으 보시기 바랍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운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교훈하는 말씀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새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팔복 중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은 지혜로운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다툼은 미련한 자를 통해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첫째로 하나님과 나와의 화평이 있고 또 나와 내 형제와의 화평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의 특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가리워주는 일을 합니다. 잠17장에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같은 주님의 사랑으로 내 형제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허물을 덮어 준다는 말은 이처럼 먼저 그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허물을 비밀로 간직해 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이 혹 그 허물을 들추어 내어도 그것을 가리워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허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아니하고 이전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바라 볼 때 모든 허물은 감추어지고 좋은 점만 보이고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스런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서로 사랑하는 교제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과연 지혜로운자의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내 형제를 대하고 있습니까? 이 어려운 세대에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생활로 마지막 이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단장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22
악인과 의인의 소득
( 본문 : 잠언 10 : 22 - 32)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법칙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악을 심으면 재앙으로 거두고 의인이 의를 심으면 의인의 소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그런 의미로 우리 생활의 크나큰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을 보면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이 말씀을 주제로 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의인과 악인의 구별
잠언서에 보면 의인이라는 말도 많이 나오고 악인이란 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의인이나 악인이란 어떤 대상을 말하며 의를 행한다, 악을 행한다는 말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의미는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해 줍니다.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의 소유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롬1:17절에서 이르시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할 때 다른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의인만이 의를 행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이 의를 행할 때 그 의가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라고 말할 때 이 악인은 그의 사상이나 그의 마음이나 그의 생활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 악인입니다. 물론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의로운 행실이 없지만 도덕적인 선행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말은 악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아닌 악인이 악을 행할 때 그 악에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언에 나오는 의인이나 악인에 대한 교훈을 들을 때는 의인이란 의인 중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 악이란 악인 중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28절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분깃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그 마음에는 화평이 있습니다. 슬픔 중에도 주님의 위로가 있으므로 그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원하는 소망은 자기 인생의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가진 소망이란 것 자체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악인의 등불은 꺼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악한 자의 형통함을 부러워 말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형통이 결코 그들의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없으며 결국은 다 함께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잠11:3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항상 성실하므로 자기 인생을 경영합니다. 의인의 성실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때문에 그의 길이 형통합니다. 그의 손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시128:1,2절 말씀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잠11:5-8절 말씀을 보면 의인과 악인의 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볼 때 의인과 악인이 그의 살아가는 생애에서 받는 소득은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는 이런 말씀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악인이 형통의 길을 걷고 악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이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시73편을 보면 아삽이란 사람이 그런 경우를 많이 당하고는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삽은 현세에서 악인들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힘이 건강하며 그의 생애에 다른 사람과 같은 고난이 없고 재앙도 임하지 않으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오히려 더 많고 그들의 생애는 평안하고 재물은 더 많이 쌓이는 사실을 바라보고는 하나님께 항의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삽은 이 일을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그들의 결국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형통케 하신 것도 패역한 자들에게 재물을 많이 주시는 것도 그것은 축복인 것이 아니라 그들로 미끄러운 곳에 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치 쥐가 쥐약이 든 음식 인줄 모르고 그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는 일과 같습니다. 그 음식은 쥐를 대접하는 진찬이 아닙니다. 쥐를 잡아죽이려는 미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결국에 대해서 시73:18절에서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그들의 결국을 이처럼 아삽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십니다. 비를 내리실 때에도 악인의 밭에도 의인의 밭에도 함께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악인에게도 골고루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며 계속,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활을 살아간다면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패망이 찾아 올 것입니다.
2. 악인과 선인에게 임하는 것
(1) 먼저 악인에게 임하는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서 악인에게는 그 두려워하는 것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늘 그의 머리에 자신이 행하는 악한 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악은 언제나 마음의 양심을 괴롭히며 양심의 괴로움은 우리의 생애에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악에 대한 보응을 마음에서 뗠쳐 버리지 못하며 그 그림자에 쫓기며 살아가는데 그 두려워하는 일이 그대로 임한다고 한 것입니다. 악인은 그 마음에 죄악이 들어 차 있고 그것을 처리할 곳이 없기 때문에 그 두려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에는 두려움이 그의 생애를 억압하기 때문에 하루도 평안하고 즐거운 날을 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마음에 근심이나 염려나 두려움이 없는 가운데 누려야 행복의 참 가치가 있는데 두려움이 그의 생애를 억누른다면 비록 돈이 많아도 그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28: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악인에게는 왜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는 것입니까? 시141: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자기 그물이란 자기가 행하는 죄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말하는데 자기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잡기 위해 쳐 놓으신 하나님의 그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물에 죄가 잡히면 그 죄에 해당하는 죄의 보응을 내리시기 때문에 누구든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잠3:33절 말씀을 보면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라든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든가 죄를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죄를 행하는 사람을 감시하고 그 죄를 반드시 기억하고 그 죄를 찾아내시고 그 곳에 저주를 머물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셨는데 의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인이 원하는 것은 악인이 원하는 것과는 판이합니다. 의인은 자기 생애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사업을 경영하는 일에도 그 사업이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으로 발전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많은 손실이 나도 그 일을 그만 둡니다. (김인득 장로님의 경우, 단성사 주일 운영, 한국스레트 시작 벽산 그릅을 형성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좀 잘못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이 사업에 복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는데 그런 기도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수 있도록 그 사업을 운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 복 내려 주옵소서 하는 기도 역시 기도만으로는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실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복 신앙이라고 해서 복을 달라고 비는 신앙, 복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 이런 신앙은 그 생명이 첫째 순결하지 못하고 둘째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셋째 하나님을 시험하는 신앙으로 빠지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며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그의 생애에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질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네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기 않게 하시리라.>
다음에 의인은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내려지기 때문에 그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두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간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처럼 고상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격려해 주십니다.
잠24:16절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 지라고 다시 일으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생애나 사업이나 가정에도 넘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일으켜 주신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잠3:33절 말씀에서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복은 언제인가는 복으로써 그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에 두신 이 복을 옮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잠4:18절 말씀에서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돋는 햇볕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생애와 그의 가정은 점점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광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34:19절 말씀에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생애에도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고난 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건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오늘 본문 27절 말씀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손들이 잘 되고 평안하며 기쁜 생애를 오래 살아야 축복이지 저주스러운 생애는 오래 살수록 고역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장수의 복은 감사와 기쁨과 생애의 즐거움에서 오는 장수이기 때문에 모두 이런 장수의 축복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 여러분 ! 이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의인 중에 의인이 있고 의인 중에 악인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류에 속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살펴보고 의인의 길을 걸으시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소원을 이루시는 복 받은 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순종을 배우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법도를 배우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배우셔서 언약한 귀한 복을 받는 성도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23
징직한 자와 악한 자의 비교
( 본문 : 잠언 11 : 1 - 12)
이 세상은 지구라고 하는 한 울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인종과 여러 형태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외형적인 생활은 별다른 차이점이 없이 똑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같고 먹고 살아가는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종내는 죽어서 무덤에 가는 것도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나의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생애가 더 훌륭하게 보이고 더 형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보면 악한 자의 얻는 결실과 선한 자가 얻는 결실이 다르며 정직한 자가 얻을 분깃과 불의한 자가 얻을 분깃이 다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정직한 자의 행실과 악한 자의 행실을 비교하면서 그들의 결과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악한 자와 그의 결실
악한 자란 말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인생을 경영하는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가 비록 세상에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 악한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죄의 종으로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악한 자란 이름이 붙는 보다 큰 이유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하나님 앞에 더 패역한 죄악은 없는 것입니다.
또 한 종류의 악한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에 있어서 악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 사람이 되지 못하고 육적 사람으로 육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욕심에 끌려 세상을 쫓아갑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애도 악인들의 생애와 같이 형통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의 인생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함정과 시험과 고난 속에 집어넣어 고통 가운데서 그의 생애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매로 그의 인생에 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1) 그러면 이들 악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거짓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1절에서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속이는 저울이란 진실성이 없는 거짓된 마음의 표현입니다. 상거래에 있어서 속이는 일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왜 이처럼 기막힌 어려운 경제적인 난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까?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IMF라고 하는 사태를 맞아 2백만에 가까운 실업자를 양산하고 기업체가 도산하고 국민의 경제 생활이 그 밑바탕부터 뒤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해 진 거짓 때문인 것입니다. 기업주들은 거짓된 방법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납세 신고도 거짓으로 했고 많은 회사 자본을 해외로 빼 돌렸습니다. 수많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면서 불의한 정치가들과 짜고 같은 악한 일을 해 왔습니다. 이 일이 어느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습니다. 말하자면 다 도둑놈이 된 격입니다. 은행이나 종금사들도 청탁을 받고 돈을 빌려주면서 자기 실속을 단단히 차린 것입니다. 그러니 경제는 거들이 나게 되었고 나라 살림이 붕괴 직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막바지 백척간두에까지 이르게 되어 오늘의 IMF라고 하는 오늘의 사태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2) 2절 말씀을 보면 악한 자는 교만합니다. 교만은 그 종류가 어떤 형태이든 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한 자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그 자를 대적하시어 그 자를 낮추시고 그 자를 패망케 하십니다. 교만한 자가 끝까지 형통하고 끝가지 권세를 누리며 끝까지 행복한 생애를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의 인생의 끝은 결국 욕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폴레온의 교만은 독배를 마시게 했고 이승만의 교만은 권좌에서 쫓겨나게 했으며 박정희의 교만은 부하의 총부리에 시살을 당하게 했습니다.
사람이 권세가 있다고 명예가 있다고 재물이 있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낮아지고 싶으면 교만해야 합니다. 패망의 인생을 맛보려면 교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높임을 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비록 미련한 성품의 소유자라해도 지혜로운 자로 인정을 받지만 교만하면 악인의 누명을 벗지 못합니다.
(3) 3절과 6절에서 사특한 자에 대해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사특하다는 말은 몹시 간사스럽고 못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간사스러운 인간은 강한 자에게는 무한히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무한히 강합니다. 간한 자나 부자에게는 아부하고 약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는 무자비합니다. 사람이 이 같은 사특한 자를 가까이 두면 욕을 당하게 됩니다. 언제인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권세나 명예나 돈이 떨어질 때 그런 자는 늑대의 모습으로 돌변해 나에게 반격해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사특한 자와는 먼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 자의 패역은 결국 자기를 망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특한 자는 자신의 악에 잡힌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특한 자들은 자신이 친 악의 그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악은 자신의 생애를 파멸로 이끄는 그물로 자기 생애를 이끌어 갑니다. 자신이 행하는 사특한 행실은 이 악에게 잡혀 이 그물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4) 악인의 소망은 죽을 때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진다’고 한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으며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으므로 그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국한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소망을 삼습니다. 무엇이 가장 귀한 것입니까? 그것은 돈입니다. 그리고 명예와 권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그 시간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있을 리 없으며 불의한 자의 불의한 소망은 결국 없어지는 것입니다.
(5) 악한 자들은 그 입으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들의 입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존재를 부인하며 심지어는 그 입으로 권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그들의 입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게 되며 더 나아가 성읍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2. 정직한 자와 그의 결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한 자란 늘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정직의 반대말은 거짓입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말하고 거짓은 사탄의 궤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제일 먼저 우리가 맺는 열매는 이 정직입니다. 아직까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했던 모든 생각이나 말이 정직한 생각과 정직한 말로 변화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시고 정직함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1)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성실함이 있습니다. 그 행동이나 생활이나 사업이나 그의 모든 활동에 성실함이 없다면 그런 사람의 인생은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따르는데 이 성실이 자신의 인생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하므로 자기 인생을 경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성실이 그의 인생을 인도하여 풍성하고 부요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6절에서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정직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진실이 아닌 다른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의는 정직한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우리의 생활에 정직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환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이런 환난에 예외가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 쇠하고 병들고 죽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환난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손길이 임하여 그 환난에서 건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애에 닥쳐오는 환난에 손을 들고 굴복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환난을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비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한 믿음으로 그 환난을 통과하면 환난이 우리에게 길을 피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자기에게 오는 환난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환난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한 연단의 역할을 하다가 물러가 버리지만 악인의 경우는 그를 패망시키고 그에게 멸망을 주기 위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결정적인 환난을 만나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환난의 자리에 이들 악한 자들을 데려다가 그 자리를 메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4) 9절 말씀을 보면 ‘의인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의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악인들의 지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의인의 지식은 악인들이 싫어하고 멀리하려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악인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식만큼 귀하고 보배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지혜나 지식에는 어리석고 둔하고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의 지혜나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여김을 받지만 자신에게 없는 세상 지식 그까짓것 부러워하지 마시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으로 충만히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구원이 그런 하나님의 지식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10절 말씀을 보면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세상에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정직하고 의롭고 아름답기 때문에 좋은 소문으로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패망해야 성읍에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6) 다음에 11절 말씀을 보면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한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자의 입에서는 저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입은 항상 축복을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축복해 주는 인심이 되면 복이 강처럼 흐르는 사회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경우처럼 복을 축원하지 않고 저주를 좋아하는 사회는 저주가 그 사회에 임하여 살벌하고 심판 받아 저주받을 사회를 이룰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원하는 입술은 참으로 복이 있는 입술입니다. 축복을 빌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건 좋은 사람이건 친한 사람이건 혹 악한 사람이나 원수와 같은 징글맞은 사람의 경우일지라도 결코 저주하지 마시고 복을 축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악이란 존재는 참으로 묘하고 이상한 존재입니다. 악에는 그 자체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사람을 미혹하여 악한 길로 잡아끌고는 악의 그물 속에 들어간 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인생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이 따르고 그 결과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코 악에 물들거나 악한 길을 걷는 자가 되어 악에 걸려 넘어지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의 길을 걸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강해 24
악인의 삯과 의인의 상
( 본문 : 잠언 11 : 13 - 18)
오늘 잠언 강해는 내용이 여러 가지로 나와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한담하는 자에 대한 경계요 두 번째는 보증자의 어리석음이요 세 번째는 의를 뿌린 자의 상입니다.
1. 한담하는 자의 죄
13절 말씀을 보면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했습니다. 한담하는 자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남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70인 역에는 두 개의 혀를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한담하는 자는 두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특색은 두루 돌아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한가하여 남의 집에 두루 돌아다니는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책망하고 있습니다.
한담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에 대하여 게으른 사람들이 남의 말을 하며 돌아다닌다고 했습니다. 딤전5:13절에서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폄론이란 한담과 비슷한말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중상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관한 험담을 들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화가 없는 옛날에는 재빠르게 이 집 저 집을 뛰어다니며 뉴스를 전했지만 지금은 전화통이 부리나케 거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 이 입에서 저 입으로 저 입에서 또 다른 입으로 전달되다 보면 바늘 훔친 일이 황소 도둑으로 둔갑하고 미꾸라지가 뱀장어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오락관이란 TV 프로를 보면 귀를 막고 고함 지르면서 말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서너 사람 건너가면 멸치가 잉어로 나오고 장미꽃이 호박꽃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에는 사람을 가려야 합니다. 아무에게나 말을 했다가 그 말이 덧이 되어 자기 발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교회에서 심심치 않게 분쟁이 일어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야고보 사도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말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12:36절에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마지막 날에 심문을 받으리라’고 경종 하셨습니다.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첫째로 말을 조심하는데 있어서 성령을 거역하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마12:32절 말씀에서 사람이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은 끝까지 성령의 감동하심을 거역하여 주의 이름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성령이 하시는 일 인줄 알면서 고의적으로 훼방하는 일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비췸을 받은 후에 타락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일도 이런 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잘 지키고 보배처럼 간직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을 자기 인생의 신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다음에 형제들을 모함하고 비판하려는 생각으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을 비판했지만 자기가 한 그 비판으로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이웃간이나 형제들 간에 이간질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형제간에 이간질하는 사람입니까? 잠17:9절에서 그 사람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서로 친한 친구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로의 허물을 거듭 말하면 그 일로 이간이 되는 것입니다. 잠16:28절에서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시키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장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는 가까이 해서는 안되며 될 수 있는 대로 만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4) 다음에 우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 증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계21장에 나온 말씀을 보면 거짓말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일에 제함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서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고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 증거함으로 무죄한 나봇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피값으로 이세벨은 결국 죽었으며 개들이 그의 죽은 시체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을 조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시141:3절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왜 파숫군을 세워 달라고 한 것입니까? 입에서 나오는 말을 참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약3장에서 야고보 사도는 ‘혀는 능히 길 드릴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말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5) 다음에 15절 말씀에서 교훈 하시는 바는 다른 사람의 보증인이 되는 일에 대한 경계입니다. ‘타인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증은 무모한 보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많은 가족과 친척들과 교제하면서 살아갑니다. 한 교회에서 많은 형제들과 사랑의 교통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하다못해 자그마한 회사에 들어가려도 신원 보증이나 재정 보증이 필요합니다. 이런 부탁이 나에게 왔을 때에 대단히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 책임감이 없는 사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이런 보증을 서 주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보증을 서 주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질 것을 감수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6) 16절 말씀을 보면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자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덕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늘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생활은 여자들에게 있어서 첫째 가는 덕입니다. 잠12:4절 말씀을 보면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어질다는 말은 여자가 구비해야 할 덕목입니다.
남자는 근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게으른 여자는 봐줄 수 있지만 게으른 남자는 정말로 봐줄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합니다. 자기 생애의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게으른 사람의 장래는 오직 자기 파멸과 가정의 파탄을 가져올 뿐입니다. 여자들이 시집가려고 남편을 고르려면 첫째 조건을 부지런함에 두어야 합니다 게으른 남편하고 평생 살아가는 일은 고생과 가난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악인의 삯과 의인의 상
다음에 고찰해 보려는 문제가 악인의 삯과 의인이 받을 상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교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어찌 보면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이라고 하는 날을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 힘겨운 삶은 장래의 수확을 위한 씨 뿌리는 생활인 것입니다. 고되고 힘들드래도 정직하고 바르게 살며 의롭게 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 내일이라고 하는 우리의 장래에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심은 인생의 씨앗의 결실을 내 손으로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우리의 말도 씨를 뿌리는 일 인줄 알아야 합니다. 잠12:14절에서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느 한 가지도 헛된대로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말까지도 내 입에서 나간 저주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면 그것이 내 머리에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못 쓰거나 함부로 쓰기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몸으로 행하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행위를 했든 지간에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달든지 쓰든지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쁜 씨앗을 뿌린 사람이 먹기 좋은 열매를 바라면 안됩니다. 눈물과 고난과 질고를 짊어지는 생애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3:10절에서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다고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입의 말이나 몸의 행동이든 간에 우리의 행위에는 열매가 맺혀 우리의 생애에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측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에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은 무심은 자리에 당근의 열매가 날 수 없고 수수 심은 곳에서 벼를 수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씨앗을 심었다고 곧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씨앗은 몇 달만에 거둘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좋은 인삼을 수확하려면 5년, 6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씨앗을 뿌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애에 악을 뿌리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즐거움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런 씨앗의 열매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허무한 것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야곱이란 인물을 보게 됩니다. 그는 형과 아버지를 속인 간교한 인물이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에게 있는 장자의 명분을 사기 쳤습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 기도를 가로챘습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뿌린 자기 인생의 씨앗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가 그곳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외삼촌의 손에 의해 무려 20여 년간의 고역을 통해서 당한 것입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란 자는 모루두게를 죽이려고 음모했다가 실현되기도 전에 그 열매가 자신에게로 돌아와 남을 죽이려든 장대에 자기 몸이 매어 달리는 비참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고 했습니다. 잠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는 일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데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해 당하는 모든 고난에도 그 열매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5:11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 땅에서가 아니면 하늘에서 맺는 열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6:9절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씨를 심는 생활은 얼마 안가 축복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이 땅위에서 거두지 못한다 해도 염려하지 말 것은 하늘에서 맺는 결실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아니 오늘 여러분은 무슨 씨앗을 뿌리며 이 시간까지 살아오신 것입니까? 거짓말하는 씨앗을 뿌렸습니까? 게으른 씨앗을 뿌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에 따라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내일의 아름다운 결실을 원하십니까? 보다 귀한 내일의 축복된 생애를 원하십니까? 시126:5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로 축복의 씨를 뿌리십시오, 순종하는 일로 약속의 씨를 뿌리십시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내일이라고 하는 장래에 여러분에게 건강으로, 축복으로, 성공으로, 기쁨의 귀한 열매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 결실함이 더디드래도 낙심하지 말고 의를 뿌려 확실한 상급을 기다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잠언 강해 25
훈계를 좋아하는 자의 축복
( 본문 : 잠언 12 : 1 - 3)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보면 1절에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잠언 강해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훈계를 좋아하는 자의 축복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
죄인에게는 두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은 훈계를 싫어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잠언 12장에는 악과 악인에 대한 경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서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정죄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악은 인생을 세우지 못합니다. 악으로 자기 인생을 세우려는 사람은 그 악으로 인하여 자기 인생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악의 성질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악으로는 무엇을 하든지 기둥처럼 반석처럼 자기 의뢰가 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의 밑거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이나 악인은 왜 굳게 설 수 없으며 악인은 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5절 끝에서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이 도모하는 일은 궤휼입니다. 궤휼이란 말은 간사스러운 속임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악인들은 이처럼 간사스러운 속임으로 자기가 일어서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말은 사람의 생명이나 인격을 존중시 아니하고 고의적으로 그것을 파괴하고 손상을 주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잘된다면 이 세상은 악인의 소굴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한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의롭지 못한 일을 의로운 일 인양 공공연하게 행하며 의롭지 못한 사업에서 얻는 이익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이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그들의 결국은 자기들이 쳐 놓은 악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고 말게 됩니다. 그들이 쌓은 악의 담은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결국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시84편에는 두 장막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의 장막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인생이 혹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도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혀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힘에 힘을 얻는 생애를 살아가며 결국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장막에 거하는 사람은 슬프고 어려운 인생 길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의 은택이 그의 생애 중에 나타나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84: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장막이란 악한 일로 그의 생애를 살아가는 악인들의 인생을 말합니다. 그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는 인생은 그 자체가 허수아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번 입김으로 바람을 불면 당장에 불려 날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인생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을 말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기 인생을 쌓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리시며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심으로 결과적으로 복된 삶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시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141:10절 말씀에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영원히 변경될 수 없습니다.
시146:9절에서 하나님께서 악인의 길은 다 굽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인생들이 곧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3:3절에는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잠15:33절에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은 심판하시려고 끝까지 감찰하시고 선인은 복을 주시려고 끝까지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20:5절에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깐 뿐이라 했으며 시145:20절에서는 악인은 다 멸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잠24: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2. 훈계를 좋아하는 자의 축복
그러면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 시간에는 훈계를 좋아하는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훈계란 단어는 징계란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로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나 훈계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악인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나 훈계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경종을 주시고 그 후에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은 징계나 훈계가 아닙니다. 악인에게 내리는 재앙에는 마음이 더욱 강퍅해 짐으로 악인들은 재앙을 만날수록 더욱 패역한 길을 걷게 되며 결국은 멸망으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징계나 훈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는 생활을 할 때 순종하는 생활로 돌이키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나 훈계에는 반드시 결실이 따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히12:7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이와 비슷한 말씀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잠3:11-12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느니라.’
잠5:11-14절까지에 나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는 생활을 하다가 노년에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후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퇴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악인에게 왜 징계나 훈계가 적용될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잠9:7절과 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씀하고 반면에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잠언서에는 징계란 단어가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발음은 ‘무사르’인데 이 말의 뜻은 과실을 범한 자에 대한 처리를 의미하는 말로 결코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가끔 들을 수 있는 말인데 그릇 행했던 자신의 행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한방 얻어맞은 후에야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경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약5장에서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징계를 맞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믿음이 성장한 목회자가 될 수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덧 나이 들어 은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련한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사람이 같이 신앙 생활을 해도 미련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과는 천양지차의 차이를 들어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훈계를 듣거나 징계를 맞을 때에 곧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의 생활은 그 일을 거울로 삼아 열매를 맺는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얻어 맞은 후에 얼마 안가 또 그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짐승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잠26: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중에도 이런 미련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맞을 때면 고칠 듯 하다가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돼지가 제 자리에 돌아가 눕는 것처럼,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거듭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징계를 맞게 되는데 이런 일이 그의 생애 동안에 반복되므로 인하여 한번도 속 평안히 살아보지 못하고 병들고 어렵고 힘들고 역겨운 생애를 살아가다 부끄러운 구원으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징계란 우리가 즐겨할만치 기분 좋게 맞이할 일은 아닙니다. 징계가 오래 계속될 때면 ‘아유, 이젠 좀 속 평안히 살아보았으면’하는 한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입니까? 징계에는 당장에 우리 육신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고통인 것입니다. 그 징계가 사업의 실패로 올 때는 가난이나 어려움에 시달려야 합니다. 질병으로 올 때는 병에서 오는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환난으로 올 때는 그 기간이 지나기까지 참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가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오던 이 징계를 어떤 자세로 받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는 그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징계하심을 경이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평범하게 넘겨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 같은 징계가 자기에게 찾아 왔느냐에 대한 해답을 신앙적으로 찾아 철저하게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결한다는 말은 회개해야 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일이 있으면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징계를 맞을 때는 참아야 합니다. 그 징계는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징계가 내게 왔다가 내가 회개했다고 곧 물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복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징계는 대개의 경우, 불순종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순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 징계를 통해서 연달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달이란 그 버릇이 고쳐지기까지 계속적으로 얻어맞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버릇은 이런 방법에 의해 차차 바르게 고쳐 잡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때때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 하시되 은같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66: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같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은은 은 도가니에 넣어 그 찌끼가 밑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강한 불로 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쓰실 때, 반드시 그난을 먼저 주심으로 은처럼 연단하시고 그 고난의 풀무에서 건져내사 주의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결론 : 징계가 이렇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시련이나 시험이 우리의 생애에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생애를 살아오시는 가운데 어떤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리고 그런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생활로 방향을 잡은 일이 있습니까? 미련한 사람이 되어 징계를 맞아도 징계인지조차 모르고 그릇된 길로 계속 달려가다가 악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는 생애 중에 혹 하나님의 징계로 시련을 받는 일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면 이 모든 일이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믿음에 슬기로운 성도가 되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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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26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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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26
거짓된 혀의 해독
( 본문 : 잠언 12 : 15 - 22)
오늘 삼일 밤 장언 강해는 18절 말씀을 중심으로 ‘거짓된 혀의 해독’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잠언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사람이 지혜로우면 그 지혜로움이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비롯되고 사람이 미련하면 그 미련함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로 말미암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지혜의 기준이 되는 사람의 입
입술의 말이 미련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없고 입술의 말이 지혜로우면서 미련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의 말과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마15: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눔 하는 인격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는 출구가 바로 사람의 입입니다 그러므로 입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말은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는 엉뚱한 곳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수사 기관에서 범인을 잡을 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이면 마음에 없는 것을 머리로 꾸미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이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상태가 사람의 맥박이나 다른 신체적 반응을 일으켜 거짓말 탐지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은 그 말씀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그의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도 말로 나타냈습니다. 뱀의 몸을 빌려 그 뱀의 입으로 자신의 말을 하와에게 속삭이는 것으로 하와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에게 나타날 때 우리의 마음에 간사하게 속삭이는 방법으로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말이 자신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특징이 거짓말이며 속이는 말이요 진리를 대적하는 말이며 훼방하는 말이요 중상하고 모함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사탄이 이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까이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진리를 떠나게 하고 생명에서 떨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0장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진실을 가장하고 하나님의 종을 가장하고 진리를 가장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와도 절대로 그 자신을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거짓은 진리 앞에 그 정체가 드러나며 어두움은 빛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미련한 자의 입술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미련한 자의 입술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미련한 자는 그 입에서 분노를 쉬 낸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그 입에서 분노가 쉬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분노하는 사람을 보시면 먼저 무섭다고 떨지 말고 미련한 사람이구나 측은히 여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좀 화가 나면 참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에 분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련한 사람은 자기에게 오는 수욕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한신이라고 하는 중국 한나라의 유명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언제인가 시장 건달패들에게 수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건달패들의 가랑이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은 그런 일을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하더니 그는 장차 한나라의 위대한 재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욕을 어떻게 참으신 것입니까? 대제사장의 뜰에서 노비들이 눈을 가리우고 손바닥으로 주님의 얼굴을 치면서 누가 때렸는가 알아맞히면 선지자로 인정해 주겠노라고 놀려댔습니다. 온몸을 벗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욕을 끝까지 참으시면서 그들의 용서를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하시더니 어떻게 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히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빌2:9절에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쉬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잠15:18절에서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과 잘 다투는 사람들처럼 미련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참고 분노하는 말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분을 잘 내면 죄를 짓게 되고 마귀가 틈을 탄다고 했습니다. 엡4:26절 말씀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미련한 자는 거짓 증인이 되어 궤휼을 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17절에서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말이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줄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 증인입니다. 거짓 증인은 거짓말로 증거 하기 때문에 죽일 사람을 살리고 마땅히 살림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9계명은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든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하여 죽일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나봇을 죽이고 그의 소유물인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거짓 증거는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증거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자는 그 보응을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받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할 때, 그들은 참 증거를 찾지 못하자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 하는 무리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3) 다음에 미련한 자의 혀는 마치 사람을 죽이는 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말과 지혜로운 자의 말의 차이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생각나는 대로 그 입에서 말이 함부로 나옵니다. 앞뒤를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자기의 말이 듣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전혀 생각에 두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시59:7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악인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의 입술에는 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과 궤휼과 간사함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게 됨으로 그 입의 혀가 곧 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왜 양약이 되는 것입니까?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 사람으로 옳은 길을 가게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온 일화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에는 ‘쿠르디아디알게쥬라’는 인구 만 여명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는 지금부터 약 460여년전 건축한 훌륭한 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이 교회 건물을 짓는 데 그 건축 설계에 하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워 놓으면 또 붕괴되고 다시 세우면 또 넘어지곤 했습니다. 이 교회의 사제가 이런 일은 분명 신의 노여움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자인 밧사라부공에게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칠 것을 권유해서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던 교회의 건축사인 마노오레는 그것이 자신의 설계 실수에서 온 것임을 해명하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크게 책망 듣고 쫓겨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누구를 제물로 들여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교회 언덕을 올라가는 여자를 잡아 제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건축사인 마노오레의 아내는 아침 일찍 남편의 식사를 위해 교회 건축 현장으로 식사를 가지고 올라갔다가 그만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회 건물을 다 짓고 준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교회 준공식 때 이 건축사는 큰 표창을 받게 되었는데 웬일인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소식이 전해져 왔는데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이처럼 엄청나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입의 말은 다른 사람을 선하게 경책 하므로 그의 말이 그 듣는 사람에게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전7:5절에서 ‘사람이 지혜자의 말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와 교제하는 일은 금을 얻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잠16:16절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귀면 손해 볼 사람이 있습니다. 잠20: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크게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누구와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4) 그런데 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죄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진실이 없을 때만 주인 구실을 하다가 진실이 나타나면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따르는 사람은 그 거짓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모든 거짓은 그 근원이 바로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죄악 중에서도 이 거짓된 죄악을 제일 미워하십니다.
잠30장을 기록한 야게의 아들 아굴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일을 구했는데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같은 기도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기 쉬운 악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마귀는 그 마음을 발동시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2절 말씀에서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지 왜 미움을 받는 것입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일도 기분 나쁜 일인데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사람의 복록이 사람의 혀의 움직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혀는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기 평생 자신의 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가 나쁘면 다 뽑아 버리고 의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혀를 바꾸는 기술은 없습니다. 혀를 바꾼다 해도 마음까지 바꿔야 복 받는 혀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혀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의 혀를 길들이는 일은 먼저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잠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그 마음속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마음에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다음에 입술에 재갈을 먹이는 일입니다. 웬만한 일에는 입을 열지 말자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해도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거짓된 혀를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의 올무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생애, 이 방법이 가장 축복 받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임을 아시고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말로 여러분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27
의인의 빛과 악인의 등불
( 본문 : 잠언 13 : 1 - 10)
잠언 13장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시는 많은 교훈이 있지만 오늘은 본문 9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강해 하려고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빛인데 반하여 악인은 등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가졌다고 하는 빛은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리스도는 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은 이 빛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빛은 꺼지지 않는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 빛은 진리로 비취는 빛이기 때문에 꺼지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 빛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널리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가진 것은 빛이 아니라 등불이라고 한 것입니다. 등불은 사람이 불을 붙여서 켜는 불이기 때문에 약한 바람에도 흔들리며 좀 심하게 불면 꺼지는 것입니다. 돈과 함께 세력과 함께 꺼지는 것이 등불이요 인생의 생명이 마쳐질 때 누구의 것이건 그의 등불은 꺼지는 것입니다.
1. 의인의 빛
우리는 먼저 의인이 가지고 있는 빛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난다’고 했습니다. 잠언에 나오는 의인의 이 빛을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빛과 연결 시킬 때 바른 해석이 나올 줄로 압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참 복을 말씀하시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시면서 이 빛은 곧 너희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에 대하여 엡5:8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잔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빛이지만 이전에는 어둠이었습니다. 어두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두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9:39절에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소경된 사람은 눈을 뜨게 하여 빛을 보게 하고 세상에 눈을 뜬 사람은 그대로 눈을 감겨 보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어둠은 사탄을 말하고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이나 죽음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어둠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둠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그 빛 가운데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이전까지는 이 같은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둠에서 헤메이었으며 사망을 찾아갔습니다. 성경에는 어두움에도 열매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맺는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갈5:19절에서 이 어둠의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장황하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움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신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은 그리스도시요 빛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만이 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에 열매가 있는 것처럼 빛에도 열매가 있습니다. 어두움의 열매는 사망의 열매지만 빛의 열매는 생명의 열매인 것입니다. 빛에 열매에 대하여 엡5장에서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을 말합니다. 엡5:10절에서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착한 일입니다. 착한 일이란 도덕적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이 즐겨 행하는 인도적 견해에서의 선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행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행실에 열매를 맺는 것은 빛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이름으로 이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면’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의로움에 있다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는 의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로움은 나의 소유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도 아닙니다. 어둠에 속한 의는 의의 빛이 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로 그칠 뿐 하나님의 의에 미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바탕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빛에는 반드시 진실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는 그 진실성에 있습니다. 빛을 소유한 사람은 그 빛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거짓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실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진실이 없는 사람이라면 빛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그 속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참으로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시51:6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렘18: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얼굴을 보시는 일도 없고 부자라고 두둔하거나 가난하다고 옹호하거나 그런 편파적인 판단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 그가 누구이든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방패가 되시어 보호해 주시지만 거짓된 사람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진실하지 않으면 가증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시145:18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장성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잠13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빛을 점점 환하게 하는 비결이 나옵니다. 첫째로 1절 말씀을 보면 ‘자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훈계를 듣는 사람은 신앙이 장성하여 그 빛을 환하게 비취게 됩니다. 훈계는 책망을 말합니다. 누구나 칭찬은 듣기를 좋아하지만 책망을 듣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했을 때, 주의 말씀으로 책망을 듣는 일은 얼마나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는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여 몹시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의 훈계를 듣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그 후에 시편에서 말하기를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종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을 때 과연 다윗처럼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까? 시험에나 들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훈계와 견책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키며 회개하는 것입니까? 렘6:10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아니하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듣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귀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귀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견책이나 훈계를 도리어 욕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받아 드리는 일과 그 말씀을 욕으로 생각하는 일은 그 마음의 상태가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받아 드리지 못하고 욕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그 귀가 무엇을 받지 못했어요? (할례). 하나님의 백성의 귀가 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 그대로의 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이나 책망을 무시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2절 말씀을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빛을 환하게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그 입의 열매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입술에 거짓이 없으며 입으로 남을 정죄치 아니하며 입으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아니하며 입으로 참소치 아니하며 때를 얻던지 얻지 못하던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의 말의 온유하므로 어느 곳에서나 화평을 심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빛이 들어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복록을 누리는 입술의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말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마지막 날에 그 말로 인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아름다운 말이 맑은 샘처럼 솟구쳐 나온다면 입의 말로서도 그는 이미 빛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악인의 등불
다음에 악인의 등불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인의 등불이란 악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랑거리를 말합니다. 악인이 자랑하는 자랑거리 중에 가장 으뜸되는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은 자랑하게 되고 스스로 교만하게 되고 남을 없으이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가장 위험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난한 때인 줄로 아십니까? 아니면 병들어 있을 때인 줄로 아십니까? 재물이 늘어날 때인 것입니다. 돈이 생길 때, 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마음에 들어오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돈뿐입니다. 그래서 시62:10절에서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재물에 마음마저 빼앗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딤전6:17절에서 ‘소망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돈을 자기 인생의 전부 인줄로 여기는 사람은 돈이 그 사람 인생의 등불인 것입니다. 그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소망의 불까지 꺼집니다. 이 같은 악인의 등불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등불을 재앙의 바람으로 불어 끄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권세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권세가 그들의 등불입니다. 지난날 권세를 잡았던 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권세가 떠나가자 그들의 인생의 등불마저 꺼져 버리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권세도 일시적으로는 아무리 그 빛이 환하게 보여도 그 불은 바람에 매우 약한 등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의 기운으로 한번 부시면 꺼져 버리되 캄캄하게 그 흔적도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도덕적 선행이나 인간적인 의로움을 등불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는 이 같은 위선적인 인간의 등불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등불을 가지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등불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힘없이 꺼져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어떤 빛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의인의 빛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악인의 등불과 같은 빛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인의 빛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빛만이 세상에서 환하게 비취게 되고 이 빛을 가지고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을 소유했다고 하면 이 빛을 환하게 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이런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이런 생활을 이룰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28
말씀을 멸시하는 자와 두려워하는 자
( 본문 : 잠언 13 : 10 - 14)
오늘 저녁 잠언 강해는 13절에 나오는 말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는 말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순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8장을 축복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장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으신 분이시지만 그 반면에 조금도 자비가 없으신 저주도 내리시는 엄위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축복을 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서 어느 곳을 찾아보거나 동일하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 생활에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에서 나온 정확한 원인은 말씀에 대하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더 자세하고 두려운 내용이 시28:58-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28:58-67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60절 → 67절’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생애에 잡아 끌어 드리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스스로 자기 가정과 사업에 자기 생애에 이끌어 들여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경우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그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순종했을 때 축복을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5:17절 이하에서 바울이 증거 하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한 문제에 있어서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비극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왔으며 의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을 유업으로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불순종한 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거든 그곳에서 탈취한 물건 중,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성안에 있는 은금과 강철로 만든 기구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솔 아래 여리고성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복할 목표는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적은 성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살펴보았더니 보고하기를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주 적은 성이라 많은 군대를 올려 보낼 필요가 없고 약 2,3천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면 문제없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약 3천명의 군사들을 그 성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병들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고 티끝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이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도적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참패한 원인이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 세겔과 50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몰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간을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아간을 잡고 그가 훔친 물건들과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아이성을 다시 공격케 하시어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때로는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죄악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요3:36절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는 결국에는 망합니다. 지금 일본이란 나라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고 지난날 한국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일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할 것이며 이 땅에 임할 인류의 무서운 환난 중에서 후회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위정자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며 돈을 축재하려고 위해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얼마 안가 정말로 패가 망신하고 영영히 구제 받을 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김으로 그를 위대하게 하고 그 나라를 번창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복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
한편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욥23:11-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는 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자는 영의 주림으로 그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의 맛이 그의 입에 꿀보다 더 하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축복의 열매가 따르고 언약한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됨으로 그 말씀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인즉 무엇보다 더 달아요? ( ).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달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따르지 않으니 그의 생활에 말씀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 생활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말씀을 따라 그의 생활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길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삼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 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의지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지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상식이나 경험이나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말씀에서 떠나거나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나 이적을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어제 밤에 그곳에도 여러 번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습니다’고 말하면서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많은 고기가 그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치적으로는 합리성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자세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결론 :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상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생명의 상입니다. 하늘에서 받는 면류관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되는 축복의 상입니다. 이 모든 상을 준비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가 찾으시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상을 얻는 길로 다니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련스럽게도 패망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성공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 길입니다. 이 생활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이 생활에는 상이 따릅니다. 이 세상의 상으로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놀라운 상이 높이 쌓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더욱더욱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29
선한 보응
( 본문 : 잠언 13 : 20 - 25)
오늘 잠언 강해는 21절 말씀을 주제로 하여 ‘선한 보응’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재앙과 죄인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는 재앙이 깔려 있고 재앙은 죄인을 찾아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축복과 선행 역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행하는 사람들의 길에는 축복이 깔려 있고 축복은 선행하는 사람을 찾아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축복이나 재앙은 제각기 자신들이 들어가 자리 잡아야 할 거처가 정해져 있습니다. 재앙이 거처할 집은 악인의 집이요 축복이 머물 집은 선한 사람의 집입니다. 고전3: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3:14절 말씀에도 기록되기를 ‘만약 누구든지 그 위에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0:41절 말씀에는 ‘선지자의 상이 있고 의인의 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행
그런데 이 선행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일은 선행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나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인정받는 선행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정해 주시는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는 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선행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상으로 약속된 선행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마5:11절 말씀을 보면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일이 가장 귀한 선행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벧전4:13-16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광의 영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계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잠11:1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했습니다. 갈6:7절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평소에 서로 나누는 대화나 일상 생활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대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 우리의 생애에 열매로 나타나 우리가 그것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누리는 행, 불행은 오늘 당장에 나에게 나타나서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란 내 생애에서 내 말과 내 행실로 심은 씨앗이 열매로 나타나 오늘 내가 이같은 열매를 먹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영생이란 우리의 생명도 알고 보면 사람이 자기가 뿌린 씨앗으로 거두어드린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까? 성령으로 심는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란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심는다는 말은 영적인 일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그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없이는 믿음을 마음에 심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벧전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생명을 거두는 씨앗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순종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떨어진 생명의 씨앗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순종의 씨앗으로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씨앗이 점점 자라나면 그것이 생명의 열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무를 보고 과실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그의 생활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의를 뿌렸다는 말은 하나의 축복의 씨앗을 뿌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를 뿌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이 의는 여러 가지로 뿌릴 수 있습니다.
(1)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로 뿌릴 수 있습니다. 잠28:27절 말씀을 보면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잘 하는 사람의 형편과 과도히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도 그 비교가 잠11장에 나와 있습니다. 24-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흩어 구제하는데도 더욱 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같은 일은 하나님의 보상이 따르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음에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과도히 아낀다는 말은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이웃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마음으로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인색한 생각이 그런 마음을 막는 것입니다. 쓸 일이 있는데도 안 쓰고 아끼고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11:1절을 찾아보십시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씨를 심을 때는 수확할 때가 되어야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이에게 선한 일을 한 일의 보상도 때가 되어야 열매로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날 후에 찾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나 그 자리에서 당장에 뿌리를 뽑으려는 생각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조급하게 복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참 축복과 보상은 우리의 생활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날에 환난의 날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많이 나와 있습니다. 부자들을 칭찬하거나 부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말씀은 많습니다. 시69:33절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들으신다는 말은 그들의 기도을 들으시고 그들의 요구대로 응답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 또 기도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 그런데 가난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난한 이유에 대하여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데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래저래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가난하다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고 남에게 없수히 여김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113:7절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거름 덤이 위에서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거름 덤이에서 드러내서 나로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그러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있는 사람 편에 붙어서 아부하고 아첨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 편에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그를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시82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시며 곤난한 자와 빙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하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은 사람의 도움을 바라보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에서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2. 보응이 따르는 주의 일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주의 일에는 반드시 그 보응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고전15:58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헛되지 않는다는 말은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입니다. 주의 일에는 그 일이 어떤 일이건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이 보상은 사람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일을 나타내려고 바리새인들처럼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일하는 것도 없으면서 교회를 위해서 암만 일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맥이 빠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곧 낙심하여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행동의 출발부터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상해 주실 분이 주님이시고 상을 주실 분이 주님이시며 축복을 내려 주실 분이 주님이시라면 다른 것 기대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에게 발견되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주님만을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는 일을 함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견고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굳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하는척 해보다가 기분이 언짢으면 집어치우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번 정한 마음을 견고히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환경을 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를 위해서 일을 좀 해보려면 난 데 없는 시험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듣는 경우도 있고 안 듣던 모함도 날아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항상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일에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늘 해야 할 일이 주의 일입니다. 항상 하되 더욱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더욱 힘쓰라는 말은 이제까지 한 일보다 더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지혜를 짜내고 있는 능력과 자신의 소유와 힘을 다 기우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권면하시는 이유에는 이같은 우리의 일은 주안에서 결코 그 상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이라고 모두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에만 연결시키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보다 더 중요한 축복은 하늘에서 받는 축복입니다. 이 땅의 복은 제한적이며 한정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만 소용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받는 축복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는 축복입니다. 이 땅의 축복은 썩어질 것이지만 하늘의 축복은 영광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하늘의 축복을 더 소중히 여기며 소망으로 삼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엡1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지금 받는 축복에 대하여 3절에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속죄의 은총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을 소망으로 삼은 것처럼 신령한 성도들은 하늘에서 받을 상급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보응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롬2: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하든 일도 내동댕이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런 행동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11:9절에 나오는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보응을 받으실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따른 보응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령으로 심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으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시면서 묵묵히 심으시기 바랍니다. 땅위의 축복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으시고 헛됨이 없는 주의 일에 여러분의 생애를 바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30
지혜로운 여인과 미련한 여인
( 본문 : 잠언 14 : 1 - 5)
오늘 잠언 강해는 지혜로운 여인과 미련한 여인에 대한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1절 말씀을 중심으로 강해 하려고 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여인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여인이요 다른 하나는 미련한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는 여인이요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 집을 헐어 버리는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여인과 사는 남자는 여인의 은공으로 자기 집이 흥왕 하는 축복을 받게 되지만 미련한 여인과 사는 남자는 자기 아내로 말미암아 자기 집이 망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자기 가정과 그 가족과 사업 등, 그 집과 연관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을 보면 한 가정을 세우는 일이나 한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나 이 일이 남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집안에 들어가 보면 그 집이 과연 잘 세워진 집인가? 아닌가? 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의 주부가 되는 아내가 어떤 인품의 여자이며 어떤 자세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의 평가를 받는 사람은 남자인 것이 아니라 여자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중, 나는 우리 집안에 있어서 과연 어떤 위치에 있는 여인인가? 지혜로운 여자인가? 아니면 미련한 여자인가? 나는 과연 우리 집을 잘 세워 나가는 여인인가? 아니면 내 손으로 우리 집을 무너뜨리는 여인인가? 를 슬기롭게 판별하셔서 지혜로운 여인이 되어 여러분들의 가정을 복된 가정으로 잘 세워 나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자기 집을 망친 여인들
성경에는 자기 집안을 망하게 한 여인상이 여러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을 추려 내어 살펴보도록 하므로 우리의 경계로 삼으려고 합니다.
(1) 아담의 아내 하와는 자기 집을 헐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온 인류의 가정에 불행의 씨를 잉태케 한 여인입니다. 하와가 미련했던 사실은 그의 남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고 불순종했다는데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이 사실을 그의 아내 하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날이면 정년 죽으리라고 선언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과 남편의 부탁을 무시하고 뱀의 유혹에 따랐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제치고 자기가 자기 집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자기가 먹은 과실을 억지로 먹게 하여 공범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와는 자기 가정에 죽음을 불려 드린 것입니다. 아담의 가정을 망친 것은 아담이 아니라 그의 아내 하와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의 행복한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큰아들이 그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지르게 했습니다. 여자가 남편의 말을 무시할 때 그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남편이 신앙적으로 바로 서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여자가 그 같은 남편의 의도를 꺾는다면 그 가정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2) 다음에 우리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밧세바는 자신의 정조를 허술히 간직하는 일로 남편도 죽이고 가정도 파멸시킨 대표적인 미련한 여인입니다. 그의 남편 우리아가 싸움터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옆에 왕의 거처가 있는데도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왕이 요구한다고 쉽게 자기 몸을 왕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의 씨앗을 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다윗왕은 밧세바의 남편을 최전방에 배치하여 그곳에서 적군에 의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왕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이 미련한 여인은 자기의 실수와 경솔히 여긴 정조로 인하여 자기 남편을 죽게 만들었고 그 집안을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 했습니다. 음란한 여인은 반드시 자기 집안을 헐어 버립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 중 가정적으로 가장 불운했던 선지자는 호세아였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드렸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호멜이었는데 이 여자는 창녀였다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딸 삼형제를 낳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자기 자식으로 여길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 버린 아내 호멜을 찾으려고 돈과 곡식을 가지고 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호멜이라고 하는 한 여인으로 호세아의 가정은 평생 비극적인 불행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쓰라린 가정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3) 성경에 나오는 미련한 여인으로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집을 팔아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해 놓고는 그 후 인색한 마음이 들어 사도들 몰래 그 돈 중에 얼마를 땅에 묻어 숨겨 두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을 제안한 자가 누구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남편인 아나니아라기 보다 그의 아내인 삽비라 쪽일 것입니다. 롯의 아내의 경우도 소돔성에 비축해 둔 재산이 아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곰 기둥이 된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나발의 아내는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미련한 남편의 경망스러운 소치로 온 집안이 쑥밭이 될 뻔한 위기에서 기지를 내어 집안도 구해 냈을 뿐 아니라 남편의 생명까지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가지 아니하는 여인은 미련한 여인입니다. 잠11:22절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금고리는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나 그 금고리가 귀부인의 귀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돼지 새끼의 코에 걸려 있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일 것입니까? 이런 일이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아 삼가지 아니하면 마치 금고리를 돼지 코에 채운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여인은 외모로 단장하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입니다. 요즘 어떤 귀부인들은 밤에는 나이트 크림으로 마사지를 하고 아침에는 고급 콜드 크림으로 닦아 내고 그 위에 38가지 화장품을 바르는데 그 일에 들어가는 시간만도 서너너덧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들은 용모를 아름답게 다듬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화장도 해야 하고 머리도 손질해야 하며 몸매에도 신경을 써서 자기 몸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너무 지나치면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가 되어버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벧전 1:1 이하에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 ·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마음의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 것입니까? 언제나 겉 사람은 속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 잘하고 얼굴을 예쁘게 단장한 여인이 마음에 시기가 꽉차서 속에 분을 품어 보세요. 그 얼굴에 서린 매서운 독기가 더 무섭게 그 얼굴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 마음에 평안이 꽉차고 언제나 웃음과 사랑을 담고 있으면 비록 화장을 하지 않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 있어도 그 고상하고 우아한 인격이 아름답게 그 얼굴과 몸에 베어 사람들에게 인상 좋게 나타날 것입니다.
요는 우리 인간의 겉사람은 늙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고후 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인네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애쓰며 몸단장에 신경을 써도 자신의 늙어 가는 인생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여자가 서른이 넘으면 슬금슬금 얼굴에 잔주름이 생깁니다. 사십 줄에 들어가면 얼굴에 패인 주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진 여자라도 쉰이 넘고 육십 고개에 올라서면 노쇠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비록 주름이 패이고 몸은 늙어 가도 그 사람의 마음에 온유함과 사랑의 아름다움이 가득 차면 더 고상한 인상을 풍기는 것입니다.
다음에 욕을 끼치는 여인은 미련한 여인입니다. 잠 12:4절 말씀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어진 여인이란 그 인간성이 인자스러워 이해심이 많고 사랑이 깊은 여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욕을 끼치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런 여인은 그의 남편으로 뼈를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화는 목구멍까지 치밀어도 아내 입에서 욕설이 나오고 시끄러울 것을 생각하고 꾹 참습니다. 그러려니 그 남편의 애간장이 얼마나 썩을 것입니까?
이런 여인은 동네에서도 덕을 세우지 못하므로 남편에게 걱정을 끼칩니다. 부인 잘 얻으면 평생의 복이지만 어쩌다가 장가 한번 잘못 가서 미련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면 그 남편 한평생을 두고 뼈가 썩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남편이 보였다 하면 웃음으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남편을 들볶고 쥐어뜯는 여인도 있습니다. 잠19:13절 말씀을 보면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이르시기를 ‘다투는 여인과 사느니 차라리 움막에서 혼자 사는 편이 낫다’고도 했습니다.
여자가 집안에서 너무 자기 남편을 무시하고 겁을 주면 그 남자 밖에 나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낙심하면 격려해 주어야 하며 실패하면 사기를 돋구어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은 밖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욕을 당하는 일은 견뎌 낼 수 있어도 집에서 자기 부인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했을 때는 병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을 영웅으로 만드는 사람도 아내요 자기 남편을 병신으로 만드는 사람도 자기 아내인 것입니다. 내려오는 말에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자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여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아내는 누구인가?
점언서에서는 지혜로운 아내의 가치를 상당히 높여 주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잠31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의 남편의 산업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가정에 끼치는 일이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모든 여인네들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복을 받는 원인이 여인에게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실패하는 원인도 여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운 물을 잘 마시는 사람은 처복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말은 미신이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남자는 지혜로운 아내를 선물로 얻을 것이란 말씀은 성경적인 말입니다. 잠언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은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복된 여자라고 한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가 그런 여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인은 하나님의 복을 그 가정에 운반해 드리는 복의 사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된 아내를 가진 남자는 지혜로운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고 살아가는 남자들입니다.
결론 : 우리 신생교회에 나오는 여인들은 모두 이런 지혜로운 여인이 되기 위해 힘쓰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여인은 자기 집에 들어올 재앙을 막고 죄를 멀리하므로 죄로 인한 보응을 막으며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그 집의 떡반죽 그릇에까지 복을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인의 위치가 남자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남자를 성공시키는 역할도 여자의 손에 있고 집을 흥왕케 하는 역할도 여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여인이 되시어 여러분의 가정을 믿음 위에 세워 복을 받는 가정을 이루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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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31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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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31
어떤 길과 사망의 길
( 본문 : 잠언 14 : 6 - 16)
오늘 잠언 강해는 12절 말씀을 주제로 하여 어떤 길과 사망의 길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보는 인생의 판단과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의 판단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인데 사람들이 인생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길을 찾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1. 어떤 길이란 무슨 길인가?
여기서 말씀해 주는 어떤 길이란 사람들이 계획하고 추구하고 걸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을 따라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종착점에 이르는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이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에 대하여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자기 자신의 인생이 어찌 될 것인지, 전혀 생각함이 없이 인생을 자기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은 다만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을 자신의 육신적인 성공을 위하는 데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 수효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일, 성공하는 일, 명예를 얻는 일, 권세를 얻는 일에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 사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국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나라와 민족은 그들의 입에 붙은 말 뿐이요 자신들의 권세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싸움질을 하고 있으며 대통령이건 장관이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이런 목적 때문에 우리 주변을 더럽히고 국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사업을 크게 이루어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도 학문에 여러 가지 큰 공헌을 한 사람들도 사실 이런 사람들의 인생 야망에 의해 달성되어 왔습니다. 악착같이 노력하고 연구하므로 비행기도 발명하고 잠수함도 발명하고 원자탄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이들은 자신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인생 길은 사회적인 공헌에 기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이 바라는 어떤 야망을 성공시키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결국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 인생의 끝에 가서 죽음이 있을 뿐임을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종말이 자기 인생의 끝인 줄 알고 살아왔을 뿐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며 관심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다가 죽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신들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이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그가 걸어온 인생에 대하여 어떤 감회를 가질 것입니까? 전도서 1장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했습니다.
이같은 인생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아온 동안에 그가 어떤 유익한 일을 많이 해 놓았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한 민족의 운명을 구하기도 하고 한 나라를 다른 나라의 권세로부터 건져내기도 하는 공헌을 이룩해 놓았다고 해도 그의 인생 길은 가장 비참한 결과를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애써 걸어온 그의 인생 길은 결국 멸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49:20절 말씀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도 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존귀한 자리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인생 길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무엇과 같아요? (멸망하는 짐승과).
한 나라의 황제나 수상이나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존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러나 그 신분이 아무리 존귀해도 자신의 인생 길을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뜻대로 살아가다가 죽는다면 이는 마치 멸망하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다 함께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만 생각한다면 인간들이 짐승보다 낳은 것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생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들의 삶은 결국 멸망하는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끝에 가서 인생의 깊은 비밀에 대하여 증거 하기를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래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절대로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전도서 끝에 가서 이르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일정한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목적에 위반하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면 인생의 창조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12:13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따르지 않는 인생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건 어떤 존귀한 지위에 앉아 있건 어떤 위대한 공헌을 했건 이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오직 인생으로서의 그 본분을 지키지 못한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가 누구이건 이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인생을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2) 다른 또 하나는 인생의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걸어가기는 하지만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허무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일이란 사실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어떤 길이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인가에 대해 깊이 연구도 하고 살펴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그 해답으로 나온 것이 이 세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이방 종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 종교의 교주로 올려 놓고 인생이 가야 할 길을 강론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난날에 존재했던 위대한 인물을 숭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종교를 만들어 포교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과연 길을 잃고 제 길을 걸어가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며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방황하는 인생들의 길을 잘못 인도하므로 사람들로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종교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모두 진리를 외치고 영생의 길을 보여 준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결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그들 종교의 주장하는 교리는 도덕적으로 올바를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선한 보응을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인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도 그럴 듯 하게 받아 드려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같은 교리나 주장은 인생의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큰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고 진리가 아닌 미혹의 길로 오도되어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인생의 참 길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참 길은 어디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 길이 두 길 뿐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멸망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이란 영생을 말하고 천국을 의미하지만 멸망의 길이란 사망을 말하고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여러 곳에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두 곳에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뿐, 다른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누구든지 하늘 아래 머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가야 할 인생의 종착역이 이 두 곳 뿐 다른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이며 누구라도 받아 드려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갈 때까지는 그 길을 자기 생각에 따라 이 길로도 갈 수 있고 저 길로도 갈 수 있지만 일단 우리의 인생을 끝내는 날이면 어느 곳이건 자신이 걸어간 그 길의 종착역에서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착역은 어떤 또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가 도착한 그 곳이 그 사람의 인생이 걸어간 완전한 끝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인생의 종착역에 대하여 계20장과 21장에서는 두 가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계20:13절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을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고 했습니다. 불 못이라고 하는 둘째 사망이란 곳이 인생의 길을 잘못 걸어온 사람들의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계21:1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7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길로 걸어간 사람들의 종착역으로 영원한 천국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이런 인생 길은 사람들이 닦아 놓은 길이 아닙니다. 성현들이 닦아 놓은 길도 아니며 교육가들이 닦아놓은 길도 아니며 정치가들이 만들어 놓은 길도 아닙니다. 이런 인생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길을 누가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인도하십니다. 이 생명의 길로 인생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신 것입니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일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 있다면 이 선택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미 짐승의 수준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우리들의 자유의지에 의해 무엇이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결과는 선택한 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택의 자유를 가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어도 좋고 먹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습니다. 아담은 드디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악과를 먹는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기 원하는 자유를 선택한 아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시고 그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 인생들에게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선택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으면 멸망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거역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면 자신이 선택한 자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에 의해 믿는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생명의 길에 대하여 사람들은 미련스럽게 여깁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고전1:21절에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여러분은 어떤 인생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로 계속 가시면 영생에 이르게 되고 천국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나 몸만 교회에 나온다고 모두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가라지들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어려운 시험이 올 때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받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32
자기 행위의 보응
( 본문 : 잠언 14 : 14 - 15)
오늘 잠언 강해는 ‘자기 행위의 보응’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자기 보응이 따릅니다. 롬2:6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1. 두 가지 보응
하나님의 보응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선한 일에 보응이며 다른 하나는 악한 일에 보응입니다. 선한 일에도 보응이 있고 악한 일에도 보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일을 행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보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져야 할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 중 하나는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눅23:39-4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4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보응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전11:9절 말씀을 보면 청년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본 사람이 없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알리바이가 완전하다고 하여 완전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서나 우리의 모든 행위를 보고 계시며 하나님은 인간의 알리바이를 무효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다윗의 경우,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와 우리아의 아내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나단 선지자에 의해 다윗 왕이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보응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까지 밝혀 주셨습니다. 삼하12:10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의 자식들끼리 칼로 죽이는 무서운 살상이 일어났고 아들이 아버지를 왕의 자리에서 내쫓기 위해 칼로 아버지를 대적했으며 다윗 왕의 후실들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아들이 궁중 높은 누각에서 백주에 동침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보응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보응은 어떤 기준에 의해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보응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의한 것입니다. 롬2:12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율법 있는 자는 율법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며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 자기를 정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가장 공평하십니다. 세상에서 범죄자를 재판하는 재판관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지혜와 공의로우신 판단에 의해 보응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가 잘못되어 자기에게 덤으로 오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잘못 판단되어 억울한 보응을 받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적은 죄를 범하고도 큰 형벌을 받거나 큰 죄를 범했는데도 슬쩍 넘어가거나 적은 죄로 둔갑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결에 따라 지옥에 가도 하나님 앞에서 변명 한 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보응의 방법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보응하시는 것입니까?
(1) 먼저 불의하게 그 재물을 모은 자들에 대한 보응을 보시겠습니다. 렘17:11절 말씀에서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 사람은 결국에는 그 재물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재물에는 날개가 붙어 있어서 그 재물이 있지 못할 집에서 반드시 날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사람은 종국에는 다 망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악담하고 남을 저주하는 사람은 어떤 보응을 받게 되는지 아십니까? 시109: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저주를 좋아하는 자는 그 저주가 자기 품에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고 다시 자기 머리 위로 되돌아와서 자신에게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3) 다음에 부모를 만홀히 여기는 자에 대한 보응은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성경에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면 많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부모를 만홀히 여기는 자의 보응은 무섭도록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엡6:1절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님 공경은 그 자손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선한 보응을 받는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식은 이와 정반대의 보응을 받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잠30:17절 말씀을 보면 ‘아비를 조롱하여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보응인 것입니다. (숭실대학교 학장으로 김형남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며느리가 참으로 효부였습니다. 생선국을 끓이거나 고기국을 끓일 때는 고기는 시아버님을 드리고 자기는 국물만 먹었습니다. 그런 일을 알게 된 장로님은 며느리에게 아가야 그러면 못쓴다고 말렸지만 며느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기도 시간에 살짝 국을 며느리 것과 바꾸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국그릇에는 국물만 넣고 자기 국그릇에는 고기만 넣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바꾸시니 고기는 시아버지에게만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 가정이 늘 화목하고 행복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중국의 순임금의 효는 유명합니다. 어려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밑에서 부모님의 미움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조금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죽도록 맞았습니다. 하루는 계모가 순을 물이 없는 우물 속에 들여보내 놓고는 우물이 위험하니 묻어 버리자고 하여 남편과 아들과 함께 흙을 우물에 부었습니다. 어느 날은 창고에 곡식을 가져오라고 들여보내 놓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겨우 살아 나온 순은 그래도 부모님을 끔찍히 공경하며 효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요 임금은 이 순을 자기의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왕위를 효도하는 순에게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산악간에 보응을 내리십니다. 그 선악의 기준이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보응은 반드시 있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응 역시 반드시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28정에서 이르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면 · · ·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3. 현세와 내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응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보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나타내시는 보응이 있습니다. 시 91:8절 말씀에서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보응은 현세에서 우리의 눈에 나타내 보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보응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보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영적인 보응과 영육간의 보응이 따릅니다. 영적인 보응은 육신이 죽어 그 영이 하나님 앞에 가서 받는 보응입니다. 이 보응은 자색 옷을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우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살아생전에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그의 영이 음부라는 곳에 들어가 고통을 당하는 데 그곳에서 당하는 고통으로 그의 혀가 바싹 말라 견딜 수 없어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를 향하여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자기 혀에 발라 줄 것을 호소한 것입니다.
다음에 영육간에 받는 보응이 있습니다. 이 보응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 때에 받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결정 납니다. 천년왕국이 지난 후, 살아 있는 사람들의 변화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게 됩니다. 그 때 죽은 자들은 두 종류로 구분되어 부활하게 됩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5장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25장에서 생생하게 이런 보응을 밝혀 주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선언을 내리시는 그 장소가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보응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시 139편에서 자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행위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없는 양심이나 도덕이나 선행이나 그 무엇이라도 인정치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의 길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최종적인 악인의 심판의 장소인 지옥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참으로 값있는 이 땅의 모든 선한 보응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것뿐입니다. 순종의 보응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과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놀라운 보응으로 천국이 보장되어 있으며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육신으로 심는 자는 반드시 썩어질 것으로 가두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성령으로 심는 생활을 통해서 생명과 축복으로 거두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33
수고에서 오는 이익
( 본문 : 잠언 14 : 22 - 27)
오늘 잠언 강해는 ‘수고에서 오는 이익’이란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23절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인간의 노동이나 수고의 존귀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입술의 말의 무익함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은 일을 하는 사람의 입은 조용하지만 입술의 말이 많은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실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1. 게으르지 말라는 교훈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그의 생애를 살아갈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게으른 사람을 미워하며 여러 가지로 견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살후 3: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8절에서 이르기를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한 그 수고의 열매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엡4:28절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잠6:6절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도 게으른 자들에 대해 정죄하고 있습니다. 마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롬 12:1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일에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주를 섬기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 하라고 했습니다. 그 위에 열심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한번 기도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의 일에 게으르지 않고 얼마나 부지런했는가? 얼마나 열심을 품고 주의 일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해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부지런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으면 이런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도 부지런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서 봉사도 잘하고 헌신도 하며 구제하는 일에도 손을 걷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성이 게을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게으르다고 정평이 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일에도 역시 게으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한 가지 부지런한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 입이 손대신 부지런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직분을 맡아도 게으르고 하다못해 예배에 출석하는 일에도 게을러 언제나 예배 시간이 시작한 후에 헐레벌떡 교회 문턱을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잠20: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밭을 갈지 않는 사람은 그 밭에서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많은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가득 쌓아 배불리 먹을 때에 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
일에 있어서건 믿음에 있어서건 열매는 수고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수고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25장에서 칭찬하신 충성된 자들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나타난 수고의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그 대상이 주님 자신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고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생활 중, 우리의 이웃들에게 행한 수고의 대가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빛의 열매에 대하여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5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빛의 열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일을 시키시려고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있어서 엿새 되는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고 그 다음 날인 이레 되는 날은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안식이란 일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았습니다. 창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불로 수득은 죄악시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겠습니다. 시128:1-2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다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런 그루터기도 없이 갑자기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는 축복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정상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형통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열심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그 수고함의 보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아 그의 인생이 잘되고 형통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는 반대로 이런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을 것입니까? 학 1:6절 말씀을 보면 ‘많이 뿌려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일 한대로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를 많이 뿌려도 수입이 적다는 말씀은 황충이들이 날아와 쪼아먹고 가라지들이 알곡의 결실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배불리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다고 했으니 포도를 재배하지만 결실이 나빠 포도즙 틀에서 마실 것이 짜지지 않는 것입니다.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니 따뜻하게 걸칠 옷이 없는 것입니다. 일꾼이 삯을 받아도 전대에 넣음이 된다고 했으니 돈이 들어와도 쓸 일이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도적을 맞아 없어지기도 하고 병으로 약값으로 들어가기도 하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마 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산상 보훈의 말씀 중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이 자칫 오해를 초래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의식주 문제에 걱정하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새들이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공중을 힘겹게 날면서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새처럼 일하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수고도 아니하고 길삼도 아니하지만 아름답게 자랍니다. 그러나 그 백합화가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 자기 생명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바람을 맞아 가며 자라야 합니다. 땅에서 적당한 수분을 흡수하여 부지런히 온몸에 공급해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란 말은 가만히 놀고먹는 건달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부지런히 일을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우리의 손으로 부지런히 활동하여 우리가 거둔 수고의 결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욱 풍성히 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 6:19-20절 말씀의 내용도 이 말씀과 같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등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모로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일하는 자들이 받는 축복
그러면 일하는 자들은 어떤 축복을 받는 것입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받습니다. 시127:1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집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을 지키시는 일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골3: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신성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속임수로 눈가림하거나 적당히 엄버무리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큰 손실을 끼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2) 일하는 사람은 그 일하는 중에 귀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문의 지식도 일에서 오는 것입니다. 학문으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보다 일에 숙달하여 좋은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더 존귀한 것입니다. 교육에도 실제 교육이라든가 실물 교육이 병행해야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귀로 들으면 25%, 눈으로 보면 45%, 암기하면 65%, 손으로 작업을 하면 85%를 안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기만 하는 신앙은 무엇만 무성하다고요? 알고 있는 것을 순종할 때 우리의 신앙은 실질적으로 놀랍도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일하는 자는 건강의 축복을 받습니다. 병의 원인 중에 일하지 않아 얻는 병이 많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노인들이나 쇠약한 사람들에게 운동을 시킵니다. 소위 조깅이나 보행 등이 건강에 좋은 이유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손을 주셨습니까?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나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도적질이나 하고 도박이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주셨습니다. 손을 붕대에 감고 몇달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 보세요. 그 손은 병신이 되어 버립니다.
일을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도의적인 생활에도 유익을 줍니다. 사람이 한가하다 보면 사고가 납니다. 한가한 교수 부인 중에서 자유 부인이 생겼고 한가한 유한 마담들이 춤바람이 나서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다윗 왕이 한가했을 때 달밤에 성루를 거닐다가 옷을 벗고 목욕하는 우리아의 아내를 발견하고 죄를 범했습니다.
결론 : 여러분,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내립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직장에서 하는 일이나 사업을 경영하는 일이나 노동이나 기술직이나 상업이나 아무일 이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듯 바르고 정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실 줄 믿고 일에 게으르지 마시고 맡은 일에 부지런하여 여러분의 생애에 큰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34
생명의 샘
( 본문 : 잠언 14 : 26 - 27)
오늘 잠언 강해는 27절 말씀을 주제로 생명의 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샘이란 물의 근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샘이란 생명을 주는 근원이란 뜻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이 생명의 물이 필요합니다. 인생들은 물에 목말라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은 만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처음 창조함을 받았을 때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한 후, 하나님의 선하신 것이 모두 죄로 더러워졌고 저주 아래 놓여졌습니다. 저주 아래 놓였다는 말은 언제인가 그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1. 인생의 목마름 (세 가지)
인생에 목마름을 주는 요소는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1) 하나는 인생에게 주어진 저주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축복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이 창3:16절에 와서 잉태로 인한 고통, 종신토록 고생하며 이마에 땀을 흘리는 일로 변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로 인하여 살아가도 살아가도 고달픈 생애를 살아갈 뿐 안식이나 평안이 없는 피곤한 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좀 낳아지는가 하면 또 다른 목마름이 우리 앞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전2:2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사실을 너무나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평생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대통령을 지냈지만 그의 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의미 없게 끝마친 것입니다. 그 후, 박정회 대통령의 경우 역시 그런 비극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역시 너무나도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 왔고 김영삼 대통령도 저토록 참담한 비극적인 인생을 맞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 김대중 대통령 역시 그 사람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너무나도 허무한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인생들의 목마름의 또하나는 언제나 그 몸에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는 죄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죄는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 매력을 가지고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과 명예욕과 음란한 마음을 유혹하여 잡아끕니다. 죄는 우리에게 일시적인 만족과 쾌락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죄란 마치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존재입니다. 자꾸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같이 자자는 것입니다. 아주 달콤한 매력으로 쉬지 않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죄악을 물리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이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범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범하기 이전까지는 달콤하게 다가 오지만 일단 범한 후에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변합니다. 내 양심을 통하여 나를 찌릅니다. 내 마음의 평안을 빼앗고 생에 두려움을 안겨 줍니다. 왜 죄가 그 일을 저지른 후에 이처럼 우리를 위협하고 공포감을 심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렘14: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에서 우리의 죄가 떠나가지 않는 한, 인생의 목마름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다음 인생의 목마름의 다른 하나는 인생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일의 끝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습니다. 왜? 인간의 죄값은 사망이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이같은 세 가지 문제, 인생에게 언도된 하나님의 저주가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양심을 찔러 괴로움을 주는 죄라는 존재가 그대로 있거나 죄값으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사망이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한,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을 데리고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성을 지나가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시내로 음식을 사러 갔고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하시어 우물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때 어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왔습니다. = 그 여인과의 대화 =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 인줄 알았다면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 여인이 필요로 하여 길러 온 이 물은 먹어도 곧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생명의 생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이 물을 마셨습니까? 어떻게 마셨습니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에 마음이 찔려 회개하게 되었으며 참생명의 샘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나옴을 알고 그를 믿음으로 마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한 사람의 목말랐던 사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도 받고 돈이 많았던 부자 청년이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생명의 구원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사망이라고 하는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들으려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의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간절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런 질문은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며 누구에겐가 올바른 답변을 들었으면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계명을 지키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그러면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논아 주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이같은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생명의 샘에서 넘쳐흐르는 생수를 마시지 못하고 여전히 목마른 인생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2. 생명의 샘
사람들은 태고적부터 이 생명의 샘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써 왔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잡다한 모든 종교들이 다 이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의 샘은 오직 한곳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언 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55:1-3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한 언약으로 나와 있으며 다윗에게 허락한 언약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언약에 가입한 자가 되어 이 생명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자가 되려면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없이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새로운 법도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요12: 44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5:23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6:40절에서도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생명의 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강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2)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성령을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7:37절에서 ‘명절 끝날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성령을 받지 않고는 생명의 샘에서 생수를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으로 이 생수를 마시게 하여 이 물을 마신 자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함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3)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이치에 대하여 요15장에서 과실을 맺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시며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시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오 죽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의 심령이 다시 소성 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의 밭에 떨어지기만 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로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게 되고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어 믿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제대로 떨어지면 먼저 말씀이 내 심령의 죄를 찌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사람의 심혼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오순절 날, 그 많은 유대인의 무리들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그들의 심령을 찔러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회개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심령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새 생명의 능력을 줍니다. 그 능력은 우리도 죄악과 거짓된 길을 떠나 새 생명의 길로 향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이 생명의 샘에서 생수를 마신 것입니까?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가라 치우며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마리아 여인도 이 생명의 샘에서 나는 생수를 마시므로 영생을 얻었으며 소망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 이 생수를 마시므로 새로운 인생 길을 걸어갔습니다. 간음 중에 붙잡힌 불행한 여인도 이 물을 마시므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오라고 하셨습니다. 와서 값없이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생수의 샘이 되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강처럼 흐르는 생수의 강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이 생명의 샘을 여러분의 가정에 흐르게 하고 이웃에 흐르게 하고 내 민족의 마음속에 흐르게 하므로 생수의 공급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35
감찰하시는 눈
( 본문 : 잠언 15 : 1 - 3)
오늘 잠언 강해는 3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알 것은 하나님께는 눈이 있으시다 는 사실입니다. 시94:9절 말씀을 보면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 들아 너희는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며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 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잃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우준하고 무지한 자들이라고 책망하면서 너희는 언제나 지혜롭겠느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며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의식하는 사람 중에 세 가지 형이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양심의 눈으로 자기를 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은 점점 무뎌져서 자기 행동을 제어할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를 위장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자기를 속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1. 만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
우리는 창세기에서 요셉이란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기를 지키시고 자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으로 팔려 갔을 때,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그의 인물의 준수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요셉을 유인하여 눈짓으로 유혹하며 같이 잠자기를 청하곤 했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자기 집에서 부리는 종과 잠을 자자고 하니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하루는 요셉이 주인의 집에 볼일이 있어 들어갔을 때 마침 주인은 없고 그 여인만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요셉을 붙들고 동침하자고 매달렸습니다.
요셉이 이 때 이 여인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면서 그 여인과 동침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 여인의 음란한 교태에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그러나 자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자기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눈에서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왕궁에서 은밀한 가운데 음란한 범를 범했습니다. 아마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 행위의 전부가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 하나님의 눈에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시51편에서 이 일에 대해 회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 기도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고 자백했습니다. 누구의 목전에서요?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슨 죄를 범하든지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런 이후, 하나님의 눈을 늘 의식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시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 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했습니다.
2. 악인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눈은 두면으로 감찰하시는 데 먼저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감찰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 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눈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속은 볼 수 없는 게 사람의 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겉을 보지 아니하시고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는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사울 왕을 폐하시고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시려는 뜻에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머리에 부을 기름을 가지고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정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습니다. 처음에 사무엘 앞에 나타난 아들이 큰아들 엘리압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외모가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겉보기에 왕이 될 만한 재목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나 여호와는 무엇을 보신다고 하셨어요 ?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법정에서 하는 사람들의 재판에는 잘못된 판결이 많이 나옵니다. 알리바이만으로 증거로 삼고 여러 가지 물적 증거를 잡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죄인인 자를 무죄한 자로 판결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왜 이런 판결이 나오는 것입니까? 사람의 눈은 나타난 것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외모 이상 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은밀한 것이라도 그의 눈앞에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의 모든 일이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자신의 모든 죄악을 자기 마음속에 다 숨길 수 있습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법망을 빠져 나올 수도 있으며 남을 궤휼로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하나님은 이런 일을 분명히 보시고 계시고 아실 터인데 그냥 놔두시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날벼락이라도 쳐서 벌을 주실 만도 한데 방관하시는 듯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 까요?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모두 기억해 두시며 그 사람의 최종적 심판의 자리인 백보좌 심판대에서 일일이 찾으시고 그에 합당한 지옥의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계20:12절에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일보다 오히려 그 동기를 보시고 외형보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시편 51:6절 말씀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진실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통과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이듯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 것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면서 인색한 마음이 생겨 양이나 염소나 소를 제물로 드릴 때 눈먼 것으로 드리고 병든 것으로 그리고 절뚝거리는 병신으로 드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뢰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같은 기도에 응답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말1:10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받을 자가 있으면 좋겠노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외식적이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 ·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기도도 오히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의 내용이나 자세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고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시는 것입니다. 회개에도 거짓된 회개가 있습니다. 간첩이 위장하여 거짓 자수하는 것처럼 거짓된 회개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회개했지만 마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마음의 통회이기 때문에 마음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는 반드시 그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짓으로 회개하는 척 하는 사람의 기도에 결코 속지 아니하십니다.
시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가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일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를 찾기에 간절해야 합니다. 몸만 보이려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용서도 진실한 용서라야 하나님께 통과됩니다. 베드로는 이 용서에 대해 형제가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나타내는 사랑 역시 진실한 사랑이라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롬12:9절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버리고 선에 속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도 진실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입에서만 주여주여하면서 그 주님께 대한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장된 믿음에 결코 속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먼저 악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심은 비디오 카메라에 비취는 필름보다 더 정확하고 자세합니다. 그들이 악을 행한 일이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놓인 행위 책에 낱낱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악인의 악을 감찰하시고 그 악을 반드시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적당히 사용하시지만 그렇지만 그의 날은 오래지 아니하며 형통하는 날이 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머리통을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은 그의 한평생 동안 그 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심으로 악인은 결국 하나님의 그물에 걸려 땅에 엎드려지고 화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잠24:19절에서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또한 선인을 감찰하십니다. 선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시101:6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누구를 살핀다고 하셨어요? 살피시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애를 같이 살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의 장래는 소망이 있어요? 없어요? 그 집은 복을 받아요? 받지 못해요?
시34:15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 의인을 향하십니까? 상을 주시려고 그리하십니다. ‘냉수 한 그릇도 결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잠24:16절 말씀을 보세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일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일곱 번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그 재앙으로 엎드려진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아무 곳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습니까? 죄를 숨기고 있습니까? 빨리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살 길이 열립니다. 악한 행위를 숨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차례대로 우리 앞에 드러내 놓고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시기 전에 그 악한 행위를 자백하여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진실을 원하십니다. 진실은 기뻐 받으시고 거짓은 미워 버리십니다.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여러분에게 임하시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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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36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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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36
혀의 권세
( 본문 : 잠언 15 : 1 - 6)
오늘 잠언 강해는 4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4절에 나오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할렐루야 !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사람이 가지고 사용하는 혀에 대해서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혀의 사용에 대해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혀라고 하는 신체의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 하는 일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혀는 온량한 혀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패려한 혀로 나옵니다. 이 두 혀는 혀라는 이름은 같은 것이지만 그 각기 하는 일은 엄청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량한 혀는 생명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1. 혀는 마음의 문이다.
온량한 혀란 그 혀의 역할이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풀이하면 부드럽고 온화한 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패려하다는 말은 거짓되고 해롭다는 뜻입니다. 그런 혀에서는 거짓말이 나오고 남의 생명을 죽이고 해를 주는 독소가 풍겨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혀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 끊임없이 활동합니다. 그 활동을 막을 존재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처럼 활동하는 혀는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구실도 하고 때로는 죽이는 구실도 합니다. 그 혀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 혀는 온량한 혀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혀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 혀는 패려한 혀인 것입니다.
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입입니다. 혀는 지극히 적지만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요 그 사람의 마음의 나타냄이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자기 혀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 보이는 마음의 입이란 사실을 알고 그 혀를 사용하는 일에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낼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좋은 마음에서 나쁜 말이 나올 수 없고 나쁜 마음에서 좋은 혀의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것을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립힌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말에 대한 심판으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말로 인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도 말로 말미암고 다투는 일도 말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일이나 살인이나 모두 말로 인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상에 우리가 하는 말, 우리의 혀의 움직임은 참으로 두려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에 대해 큰 경종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 온량한 혀와 패역한 혀
(1) 우리는 먼저 온량한 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란 말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혀란 도대체 어떤 혀입니까? 여러분은 값있는 입술, 축복 받을 입술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을 전하는 입술이야말로 정말로 복된 입술, 축복 받을 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롬10:13절 말씀에 기록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삶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에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일이 구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런 복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란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복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생애 중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우리의 혀를 움직여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입에서 황금을 강처럼 쏟아 내는 일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입이요 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값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혀의 말에 상급이 따르기도 하며 잘못 쓰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우리의 혀를 다만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만 사용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만 사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는 일에만 사용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노라면 일상 생활 가운데서 필요치 않는 많은 말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같은 말에 대해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①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5: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잠10:14절에서 우매자의 특징을 말했는데 우매자는 말이 많은 것이 그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저 사람하고는 큰 일을 도모하거나 어떤 비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안되겠구나, 직감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② 잠5:2절에서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에 조급한 자를 보느냐 이에서 더 미련한 자에게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하다 미련하다 말에 너무 조급하여 조금도 참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 대는 사람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리학을 배우지 못하고 독심술을 몰라도 그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듣고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을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생각까지 꿰뚫어 알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계22장에는 천국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의 해독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몇 가지 거짓말에 대하여 칭찬해 주는 듯한 내용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산파의 경우입니다. 바로 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여자가 아기를 낳았을 때, 계집애를 낳으면 그냥 살려 두고 만약 남자아이를 낳으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 아니하고 남자들을 살려 두었는데 왜 죽이지 않고 살렸느냐는 왕의 질문에 그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였다고 했습니다
라합의 거짓말이 있는데 이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도망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두고 이들을 잡으러 온 왕의 군사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해 준 일로 그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잘 살펴, 우리들의 신앙적인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6.25 사변 당시 어느 교인 집 가정으로 목사님이 피신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의 집사님은 목사님을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곧 인민 군대들이 들이닥쳐 이곳에 반동 목사가 숨어 있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 집사님은 거짓말을 해서 그 목숨을 살려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거짓말이 죄라고 여겨 숨겨 둔 곳을 가리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럴 경우, 라합의 경우를 거울삼아 지혜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어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히브리 산파의 경우를 생각하여 지혜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가지고 죄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악한 자들의 손에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지혜는 비록 거짓말이라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말은 때에 맞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잠15:23절에서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기쁨을 주는 말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위로할 자에게는 먼저 그 사람을 위로해 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당한 자에게 위로해 주는 일은 기쁨을 주는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2) 다음에 우리는 패역한 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패역한 혀는 남을 속이는 혀를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혀는 가장 악한 혀입니다. 그런 혀는 그 혀의 근원이 거짓말의 아비가 되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로부터 났으니 어찌 참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패역한 혀는 간사한 혀입니다. 간사한 혀는 그 시발점이 뱀이 되겠습니다. 창 3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간사한 뱀은 결국 사탄의 도구가 되어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저주를 받아 평생 땅을 기어다니는 저주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대개 그 혀가 간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범죄의 길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혀의 처신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제일 길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우리의 혀라고 했습니다. 약3: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재갈로 입에 물려 온몸을 어거하며 길들입니다. 소는 그 코에 구멍을 뚫고 고삐를 꿰어 길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길들일 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의 혀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혀는 사람의 지체 중에서 가장 적은 것이지만 온몸을 더럽히는 일을 하고 있는 존재가 되며 심지어는 우리의 생의 바퀴조차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혀를 지키려면 먼저 혀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이 하나님의 말씀의 뿌리만 견고히 심겨졌으면 어떤 파도에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어떤 유혹에도 견고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마음을 지키려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더러운 것들을 청소해 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죄를 소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소멸하는 길은 하나님께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는 길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 두어야 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입을 지키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의 무서운 혀를 지키고 제어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파숫군을 세워주셔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입에 재갈을 먹이고 채찍질하여 조심하며 그 입으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혀는 축복 받는 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 축복된 입과 혀를 가지시고 복음 전파의 아름다운 전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37
마음의 즐거움
( 본문 : 잠언 15 : 13 - 18)
오늘 잠언 강해는 ‘마음의 즐거움’이란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3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 ).
성경은 사람을 두 가지로 크게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몸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사람에 비중을 두지만 그러나 성경은 마음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영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과 영은 어느 면으로 보면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신과 마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말씀을 찾아보면 마10:28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요6:63절 말씀에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장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갈6:8절을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육체만으로 살려는 사람은 짐승과 다른 점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장차 아무런 소망이 없고 썩어질 육체와 함께 얻을 유업은 썩어질 것인데 이 썩어질 것이란 곧 영원한 파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이냐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육체의 소욕대로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잡혀 먹기 위해 태어난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마음의 비중
이에 비하여 마음은 그 비중이 굉장히 크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신11장에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너희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잠23:7절 말씀을 보면 사람의 인격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은 그 마음의 생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5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는 눈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마음에서 나오지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벧전1:22절에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마음이라도 사람의 마음은 그 누구도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잠4장에서는 마음은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지켜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1) 우리는 우리의 눈을 잘 지켜야 합니다. 눈병이 생기거나 눈이 상할 염려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허탄한 곳을 잘 보며 하와의 눈처럼 먹지 말라는 것에 오히려 그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은 시장에 가서도 사치스러운 물건에 눈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남의 집에 가서도 비싼 가구나 살림살이에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의 마음이 상합니다. 아마 그 날 밤에 남편과 토닥토닥 싸움질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다윗 왕이 남의 집 울타리 넘어 우리아의 아내가 옷을 벗고 몸을 씻는 모습을 보고 그만 그 무서운 살인죄와 간통죄를 한꺼번에 저지른 것입니다. 그럴 때 눈을 즉각 돌려야 하는 데 어디 그렇게 됩니까? 그러나 그 때 마음을 지켰더라면 죄를 저지르지 아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의 눈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한 가지 곳, 오직 한곳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히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 · 를 바라 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으면 망령된 것으로부터 눈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을 지킨다는 말은 곧 마음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2)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혀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의 혀는 무서운 존재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혀를 지킬 줄 모르면 평생 화를 못 면하는 것입니다. 야보고서를 보면 사람의 혀가 그 사람의 인생을 굴레 씌운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자기의 혀의 권세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구원도 그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애를 굴레 씌우는 무서운 혀를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거짓말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거짓은 그 출발점이 마귀로 온 것입니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들어간다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혀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삶을 보세요. 그 저주를 자기가 뒤집어쓰고 살아가기 때문에 저주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삶을 보세요. 그 축복이 자기 머리 위로 돌아오기 때문에 축복의 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거짓말을 멀리하기를 힘쓰고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미련한 자가 말에 조급하고 어리석은 자가 말이 많다고 했으니 말을 많이 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우리들의 발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발은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운 길로는 가기를 싫어하고 죄악된 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발을 삼가 악으로 달려가지 말라고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간 다고 했습니다. 발뿐 아니라 무엇이나 급한 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잠21장에서 이르시기를 ‘무엇이든지 조급한 자는 궁핍함을 이룰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업이나 장사나 직장이나 무엇에나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처신해야 부자가 되거나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발을 어떻게 지키는 것입니까? 엡6:15절 말씀을 보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이 신을 우리 발에 신으면 우리의 발은 어떤 발이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 된다고 했습니다. 롬10:15절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하려고 기도를 하고 자기 집 문을 나서는 여자들의 발걸음, 교회 출석에 빠진 성도들의 집을 심방하여 주의 이름으로 권면하며 위로해 주는 구역장의 발걸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입니까?
(4) 다음에 또 한 가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입니다. 우리의 손을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게으름에서 지켜야 합니다. 잠10장에서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잠12장에는 ‘게으른 손을 가진 사람은 항상 남에게 다스림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들 몸의 각부위에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조심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할 곳이 우리의 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근원이 그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2. 마음의 상태
13절 말씀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두 형태의 모양이 있는데 하나는 즐거움의 상태요 다른 하나는 근심의 상태가 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한 후, 인간의 마음에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근심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참 즐거움은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한데서 나오며 죄가 없는데서 나오는 데 인간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창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악함을 이처럼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악한 인간의 마음에서 참 즐거움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2:22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고 얻는 것이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 사람들이 웃고 즐기고 기뻐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슬픔이 감추어져 있고 근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잠14:1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영국의 챠프린이란 사람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희극 배우입니다. 그가 죽을 때 무엇이라 유언을 남긴지 아십니까? ‘나는 일평생 많은 사람들을 웃기는 배우 노릇을 해 와서 사람들은 나야말로 웃는 인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하겠지만 실상 나 자신은 하루도 정말 기뻐서 마음속으로 웃어 본 일이 없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까? 영국 속담에 행복한 마음은 아름다운 얼굴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 . 마음의 즐거움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가치 있는 축복입니다. 이 즐거움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누가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은 그까짓 것 돈만 있으면 마음의 즐거움은 절로 생긴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명예를 가진 사람, 권세를 가진 사람, 돈이 많아 재벌이 된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의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줄 아십니까? 이승만, 이기붕,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씨 등 그 사람들이 즐거운 생애를 보냈습니까? 지금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 모르면 몰라도 여러분의 신세만 못할 것입니다.
(1) 여러분, 예수님께서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가 우리의 마음에 참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55:1-2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여 순종하면 자기 생애에 좋은 것을 먹는 축복을 받게 되며 그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2) 다음에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할 때 인생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욥22:21절 말씀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므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주님의 평안이 그 심령 속에 머물러 그 사람의 생애에 즐거움으로 넘치게 할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잠1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의 즐가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리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즐거움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와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생수를 마시면 그 마음에서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강처럼 흐르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잠언 강해 38
인생의 번뇌와 희락
( 본문 : 잠언 15 : 16)
오늘 잠언 강해는 ‘인생의 번뇌와 희락’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사막을 끝없이 걸어가는 나그네는 매우 고달픕니다. 지금은 교통 수단이 좋아서 사막 길도 편히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지 순례로 애굽에 갔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간 사막의 길을 따라 이스라엘까지 갔지만 뻐스를 타고 달렸기 때문에 하루도 안 걸렸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위에서 내려 쬐는 뜨거운 햇살과 목마름과 행로에 지침으로 사막을 가다가 물이라도 만나면 그곳을 오아시스라고 하여 인생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을 만났을 때 이같은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스스로 속으며 살아가는 인생들
애굽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간 길이 이같은 사막 길이었습니다. 한없이 넓은 광야,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장, 그 위를 한없이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사흘길을 행했지만 물을 찾지못했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하루 종일 걸어가면서 어린아이들도 목마르다고 울부짖고 노인들도 목이 마르다고 애타하고 사막의 길은 아직 요원한데 어느 한곳도 물이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급기야 불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라란 곳에 이르렀지만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막에서 흔히 나그네들이 속고 있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소위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나그네들이 이 신기루를 만날 때 그것이 오아시스인 줄 알고 정신없이 좇아가다가 그만 힘에 지쳐 쓰러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신기루란 하나의 환상이지 실상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길은 마치 사막의 나그네 길과도 같고 그 인생이 제가끔 찾아 헤매는 행복이란 실상인즉 신기루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가끔 행복이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회락과 행복의 환상은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큰 명예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좇다 보면 그 손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이 그의 인생의 막이 내려집니다.
사람들이 행복이다 희락이다 하는 것들을 쫓아가 보면 그 손에 아무것도 쥐는 것이 없고 결국은 하나의 인생의 신기루로서 가도 가도 자꾸 멀어질 뿐 손에 잡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인생 길에 지쳐 쓰러지고 목적지에 당도하고 보니 탄식과 슬픔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2:22절에서 이같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신기루를 쫓아가다가 그의 생애를 비극적으로 마친 대표적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2. 인생의 번뇌는 어디서 오는가?
사람의 행복은 어디서 오며 인생의 번뇌는 어디서 오는지 그 출처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인생을 실패한 모든 사람의 전철을 밟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고민과 불행과 어려움이 물질적인 가난에서 온 것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패와 패망과 모든 멸망의 원인은 가난에서 온 것이 아니라 부요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하려는 자들에 대하여 많은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딤전 6:9절에서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침륜이란 말은 추악한 행실과 도덕적인 타락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주머니에 돈이 두둑해 보세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람 피우는 일입니다. 투전판에 가는 일입니다. 공처가라고 바람 피우지 못하는 줄로 알다간 큰코 다칩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려면 진실이라든가 인정 따위는 없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도 이 돈 때문에 그날 밤 하나님에 의하여 그 영혼이 데려감을 당했습니다. 자색 옷 입은 부자도 그 돈 때문에 음부에 들어가 크나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돈 간수를 잘못하면 그것이 그 주인을 물고 찢고 박살내 급기야는 인생 파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활이 가장 아름다운 생활이 될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딤전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음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굴이란 사람은 잠 30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어떻게 되기가 쉽다고 했지요?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에 한 눈을 팔지 않고 하나님만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 돈을 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그 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그 증거를 요구하세요. 무엇? ).
성경은 66권의 방대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우리에게 재물도 있어야 하고 복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있어도 우리에게 돈을 많이 모아서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하신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해 지라고 권면하신 일도 없습니다.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은 죄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동록도 안 쓸고 도적 맞는 법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부자가 되어 신앙적으로 살지 못할 바엔 차라리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일이 더 보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에게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무엇이, 어디로 ’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디 한 곳도 그 같은 말씀을 하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욥기 5:16절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에도 어떤 사람에게 더 많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까? 약 2:5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마 11:5절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이 훌륭합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도 새벽기도에 잘 나오는 사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 중에 많은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돈이 많이 생겨 부자가 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장에 교만해 지기 쉬운 것입니다. 100점 자리 신앙 점수가 50점 밑으로 뚝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좋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잘해서 하늘 나라에 올라가 아름다운 면류관을 쓰시려면 아굴과 같은 진실한 기도가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
주님이 생존하셨을 때, 주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겼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생활비라고는 두렙돈의 동전밖에 없었던 가난한 과부였지만 그 돈을 전부 연보궤에 넣었던 그 여인이 정말로 주님을 섬겼던 여인입니다. 삼남 매가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언제나 기쁨으로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하기를 즐겨 했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오라비 나사로가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그 품삯으로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도시락 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던 어린 소년이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부자가 몇몇 나오기는 하지만 주님을 가끼히서 물질로나 몸으로 섬겼다는 말은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참회락과 참행복의 소재는 어디냐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때가 된 줄로 압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바는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가나 어디서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시 4:7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마음속에 기쁨이라고 하는 씨앗을 심어 주셔야 인생은 비로소 참 기쁨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 15:11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기쁨을 우리의 심령속에 넣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님의 기쁨을 받은 사람만이 우리 맘속에 기쁨이 머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기쁨을 소유한 사람만이 이런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같은 하나님의 기쁨,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렘 15장에서 에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시 119:111절에서 ‘주의 증거로 내게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속에 즐거움과 기쁨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그런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순종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네 가지 밭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밭은 하나뿐인데 그 밭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것입니다.
시 112:1절 말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의 마음에는 인생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사 11:3절 말씀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참 즐거움이 있습니다.
롬 12: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에게 없는 놀라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을 마음에 깊이 간직한 사람은 어떤 불행한 가운데 처해 있다 해도 그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크게 외쳤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결론 : 여러분은 아직도 나의 행복의 소재가 어디 있는가를 잘 모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인생을 기쁘게 해 주고 여러분의 생애에 희락을 주는 대상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물질에 있다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쁨을 가지셔야 합니다. 주님이 넣어 주시는 기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에 떨어져 열매를 맺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차원 높은 참된 인생의 회락과 기쁨과 행복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39
마음의 경영과 말의 응답
( 본문 : 잠언 16 : 1 - 9)
어떤 철학자는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아마 사람에게서 생각을 빼면 그 사람은 장승일 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의 성공 여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깊으냐, 그 사람에게 얼마만한 지혜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사실 이 말은 어느 정도 진리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은 그 생각하는 일과 경영하는 일에 있어서 비교가 될 수 없을 만치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 놓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 지혜로운 사람의 지혜가 다 성취되는 것도 아니며 지혜로운 사람이 계획하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문으로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략을 세우지만 일의 성사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1. 마음의 경영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세 가지 면에서 분석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두 번째로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다음 세 번째로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사람으로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할렐루야 !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여 크게 대성했다고 가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모든 사람들은 그런 성공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기가 이루어 놓았으며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도 없고 더군다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거나 사회적으로 명예를 얻게 되었을 때, 그들로 그렇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 인줄을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그런 일에는 개의치 아니하시고 당신의 섭리만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이런 마음에 대하여 바울은 롬1: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잠16:4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온 세상 만사를 하나도 빠짐이 없이 섭리하시는데 그 온갖 것을 쓰임에 적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필요 없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가지라도 잘못되어 시행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일이 잘 안풀리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은 일도 잘 풀리고 성공도 잘하며 병도 없이 건강하게 형통하는데 우리는 왜 이처럼 어려움만 당하고 있는 것일까? 불만을 토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시 73편을 기록한 아삽이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도 한때 그런 생각으로 고민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삽은 하나님께 불평하기를 ‘저희는 죽은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저들의 입는 옷이 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삽은 이 일이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고 환난 중에 괴로워하고 질병 중에 고통을 받는데 하나님이 없는 그들은 왜 그들의 인생이 형통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왜 이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아삽은 이 일의 해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작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소에 들어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없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생의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그들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누리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의 말씀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자기가 가진 재물로 인하여 막혀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상 저주받은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를 잡아 먹기 위해 한동안 잘 먹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삽이 기도 가운데 깨달은 것은 그들의 결국은 파멸에 던저진다는 사실입니다. 아삽은 이같은 사실을 깨달은 다음, 하나님께 회개하기를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여 하나님 앞에 마치 짐승 같았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 1:16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고전 4:7절에서 바울은 ‘네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분깃이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다고 여깁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삽이 증거한 대로 땅의 기업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의 많은 그 재물이 그들을 파멸시키는 길잡이가 되어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매일 연락하는 생애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물과 연락으로 살아간 행복은 그의 생명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 나사로를 향하여 손끝에 물을 묻혀 자기 입에 발라 서늘하게 해 달라는 호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찾아 나와 영생의 길을 호소했던 부자 청년도 재물로 인하여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세상으로 발길을 돌이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이 하늘의 보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내려 주시는 축복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축복을 받되 인간의 방법과 재간으로 벌어 드려서 부자가 되는 축복인 것이 아니라 하늘 문을 여시고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뒤탈이 없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누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잠 8:17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 84: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것을 심으면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후 9:6절에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경영하는 것이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하늘 문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그 열쇠를 가지고 열면 하늘 문이 열려 응답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다음에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 와서 벧전 5:7절에서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염려를 맡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장사를 하든, 직장에 다니든 무엇이건 간 경영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살아갈 방도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고 형통해서 평안하고 복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룬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사업이나 경영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늘 ‘주여 도와주옵소서’하는 자세로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들이 경영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건 그 경영하려는 목적이 분명하고 뚜렷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경영하는 일이 단지 자신의 호구지책이나 개인적인 욕망에 그친다면 그 사업으로 얻을 분깃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업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며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놀랍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다음에 9절 말씀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 중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20:24절에서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의 길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일 어떻게 될지, 이 일이 성공할는지 실패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자기의 인생 길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들이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대소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알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을 치러 다니고 용한 도사를 찾지만 믿는 우리들은 가부간에 하나님을 의뢰하여 주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애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길을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에 그 분을 의뢰하여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은 가장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까? 잠 3:5절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 인생 길은 복잡하고 험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인생 길은 나그네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동반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옛날 에녹도 이 동반자와 함께 그의 생애를 살아가다가 그가 데려 가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여러분의 인생 길을 주관하시고 여러분의 인생 길을 지도하시는 분 인줄 아시고 그 분을 의뢰하시고 그 분께 가까이하시면 그 분이 여러분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강해 40
말씀에 주의하는 자의 복
( 본문 : 잠언 16 : 16 - 21)
오늘 잠언 강해는 20절에 나오는 말씀을 주제로 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다 읽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잠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1. 말씀에 주의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듣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며 그 축복을 받는 길은 그 말씀을 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들으면 복을 받을 그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귀가 없는 사람도 있나? 이렇게 반문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소가 경 읽는 소리를 듣기는 들어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영어로 아무리 좋은 교훈을 주어도 그 교훈이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 3장에서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뒤끝에 가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떤 귀를 말하는 것인가? 이 귀에 대해 성경에서는 ‘할례 받은 귀’라고 했습니다. 할례 받은 귀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의 뜻을 깨닫을 수 있는 귀를 가리킵니다.
왜 귀에 할례 이야기가 붙었는가 하면 할례란 원래 성별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들은 자기 뜻에 따라 자기 주인의 집에 계속 있는 것을 기뻐하여 그 집에 평생 종으로 지내기를 원하면 주인은 그 종을 데리고 제사장 앞에 데려가 그 종의 귀를 성전 기둥에 대고 못으로 구멍을 뚫었습니다. 이처럼 귀에 구멍을 뚫은 종은 다른 주인의 말을 들으면 안 되고 오직 자기가 섬기기로 작정한 주인의 말만을 듣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귀에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자기의 기뻐하는 뜻에 따라 하나님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겨 다른 말을 듣지 않고 오직 그 분의 말씀만을 순종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귀를 말합니다.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귀가 있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귀가 그들인데 그러면 이처럼 할례 받지 못한 귀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듣는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렘6:1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견책하여 그 말씀을 듣게 하려 해도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을 여기고 그 말씀을 즐겨 하지 아니한다고 탄식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오히려 반발을 하고 그 말씀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 받은 귀는 어떤 귀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119:72편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승하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떤 보화 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귀가 할례 받은 귀인 것입니다. 33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깨닫기를 원하며 그 말씀대로 준행하기를 원하는 귀가 하례 받은 귀인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귀를 말씀에 기우려 간절한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귀를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자기에게 생명의 샘이 되며 천천 금은 보다 더 존귀한 보화처럼 여기게 되어 자기 인생의 길에 빛이 되고 소망의 길을 걸어가는 그 발의 등이 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간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친다면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귀로 듣고 들은 그 말씀을 잘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 두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좋은 밭이란 곧 할례 받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귀도 할례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 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귀로 간절히 받은 말씀이 할례 받은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제곱의 숫자로 불어나는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도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할례 받은 귀와 할례 받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경우의 사람들에게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오직 이같이 할례 받은 귀와 하례 받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드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3) 그리고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묵상이란 말은 그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까? 누가 믿음이 돈독한 성도인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일을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며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영의 양식을 부지런한 많이 섭취하면서 그것을 잘 소화시켜 영적인 건강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건강에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왜 살이 찌느냐에 대한 해설에서 사람이 음식을 먹고 적당히 활동하여 그 음식의 열량을 소모하지 않으면 현찰이 많은 사람이 은행에 저축하듯 그 남은 열량이 우리 몸에 축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축적되는 영양소가 지방질로 남자들로 배를 나오게 하고 여자들로 허리를 두껍게 하여 스타일을 구길 뿐 아니라 수명도 단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순종하는 생활로 그 말씀을 잘 활용치 않으면 영양 과잉 상태가 되어 앞배가 나오고 허리가 두터워지는 영적 기형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만 간직해 둘 것이 아니라 가끔 새김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새김질이 곧 묵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새김질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시119:97절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누가 묵상한다고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묵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될 수 있는 대로 차례로 이끌어 내어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생활화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성구를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우리에게 좀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많은 양의 말씀을 외우고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이런 일이 가능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예수를 믿은 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때문에 그들처럼 묵상하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집에서 성경을 자세히 정독한 후, 한 장을 마쳤을 때, 성경을 덮고 방금 읽은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자주 하여 습관화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4) 말씀에 주의한다는 말은 그 말씀을 내 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순종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까닭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듣고 알고 있으라고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주신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의 능력은 순종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응답도 순종의 결실인 것입니다. 나아만의 순종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침 받았고 사르밧 과부의 순종은 삼년 반 동안의 가뭄에서 기름통의 기름이 다 하지 아니하고 가루통의 가루가 다 하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3. 좋은 것을 얻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요5:24절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그 말씀에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2) 이처럼 생명을 얻으면 그 후에는 축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요한3서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이 세 가지 축복이 따릅니다. 첫째는 영혼이 잘 되는 일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 둘째는 범사에 잘 되는 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길을 형통케 하십니다. 세 번째가 건강의 축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질병을 친히 고쳐 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마8장에서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했습니다.
(3) 잠언 3장에는 말씀을 주의하는 자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인생의 승리적인 축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장수의 축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길을 지도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의 양약이 되어 우리의 골수로 윤택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를 믿으려 해도 그런 방법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이 되지 못하고 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의 태도를 바꾸어 말씀에 삼가 주의하는 생활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받을 그릇과 받을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길과 그 그릇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좋은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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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강해 41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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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41
어떤 길
( 본문 : 잠언 16 : 16 - 25)
오늘 잠언 강해는 ‘어떤 길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이 잠언14:12절에도 있습니다. 그 때에도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떤 길이란 인생이 합당하게 생각하는 인생 길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길에 대하여 일찍이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걷고 있는 인생의 길은 두 길 뿐입니다. 하나는 사망의 길이요 하나는 생명의 길입니다. 어떤 길이란 길은 사람이 보기에 아름답게 보이고 바르게 보이고 의롭게 보이고 정당하게 보이지만 그 길은 결과적으로 생명에 이르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생명의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생명의 길을 걷기를 주저하고 어떤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어떤 길을 걸어가면서도 스스로 자기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참 길을 버리고 어떤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누구며 그들은 과연 어떤 길을 걷다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떤 길을 걸어간 사람들
(1) 하와의 어떤 길 : 어떤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에 맨 먼저 손꼽을 인물은 하와입니다. 그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2장에서 하나님은 아 담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어느 날 뱀을 만나서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먹는 날이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두 길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를 망설였습니다. 그러는 중 그는 그 실과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하와는 그 실과에 매혹되어 먹음직스럽고 보암직 스럽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여진 것입니다.
이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의 길보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더 지혜롭게 보였습니다. 이 때 하와는 어떤 길을 택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와의 어떤 길은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까? 자신이 원했던 대로 선악과를 먹은 후에 과연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대로 그가 택한 길은 필경은 사망의 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요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난 ‘어떤 길’은 아무리 좋게 보여도 결국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롯이 걸어간 어떤 길 : 다음에 롯이 걸어간 ‘어떤 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요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 땅에서 떠나 올 때 그의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 나온 사람입니다. 롯은 애굽에서 나올 때 자신의 소유물과 삼촌의 소유물로 인한 다툼으로 자신이 갈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혈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삼촌의 말에 롯은 사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둘려 있는 주변의 요단 들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땅이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이 보였습니다. 롯은 물이 많고 기름진 들을 택하고 동으로 나가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그러면 롯이 택한 이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조카에게 기름진 땅을 양보하고 메마른 광야에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힁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내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롯은 비록 사람의 보기에 좋은 곳을 택하는 지혜를 썼지만 그가 걸어간 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길이었습니다. 롯은 시날 왕의 연합군에 의해 침공 당하여 그 많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처자식마저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소돔 땅이 하늘의 불로 심판을 받는 날에 뒤를 돌아본 아내는 소곰 기둥이 되었고 자신은 부끄러운 생애를 살아가면서 비참한 종말을 보낸 것입니다. 행복하리라고 여겼던 롯은 하나님의 길이 아닌 ‘어떤 길’을 걸어갔다가 그는 필경 멸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니 육신으로 심는 자는 그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그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심는 자란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인생의 계획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심는 자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벧전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인생 스스로가 그의 지혜에 따라 결정 짓는 어떤 길은 모두 그 종말이 풀과 같고 풀의 꽃처럼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은 세세토록 그 언약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롯의 길은 항상 우리의 마음과 눈을 유혹합니다. 저 길은 참으로 기름진 곳에 이를 것 같고 풍성한 복이 준비되어 있는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길을 찾아 걸어가서는 안됩니다. 그 결국은 파멸이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3) 발람의 길 : 다음에 발람이란 사람도 어떤 길을 걸어가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른 사람입니다. 발람은 이방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예언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책도 하며 바른 길을 걷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도 해 주고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도 내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온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로서의 그 사명을 잘 이루어 오던 발람이 하루는 발락 왕의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발락 왕은 출애굽 당시 그곳을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을 찾아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저해 주면 많은 보화를 주고 높은 벼슬도 줄 것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발람은 밤새도록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기도는 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발락 왕이 말하는 금은 보화와 명예에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함정에 빠져 탐심을 따르다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으니 발람은 어떤 길을 걸어가다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람의 길을 타당성 있는 길로 봅니다. 그런 길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유혹의 미끼가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 가지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잘 선택해야 우리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모두 잘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발람처럼 자기 마음속의 탐심을 위해 기도하면 결국은 발람이 걸어간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2. 고라와 요나의 어그러진 길
다음에 고라가 걸어간 어떤 길은 우리들이 반드시 명심해 두고 살펴보아야 할 길입니다.
(4) 고라의 길 : 고라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존귀한 족장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에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모세에게도 영향력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고라는 모세가 하는 일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하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명령하고 책망도 했습니다. 고라에게는 이런 모세의 행동이 독재처럼 느껴져 좋지 않게 보인 것입니다.
고라는 모세를 대적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과 자기 친척과 자기를 따르는 주변의 높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모이게 하여 모세를 대적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 때 모인 수효가 250명이나 되었습니다. 고라는 이들을 데리고 당당하게 모세 앞으로 다가가 모세를 거슬려 항의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민16장에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고 했습니다.
이들의 항변은 이러했습니다. 당신이나 우리나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데 왜 당신만이 우리 가운데서 높아지려고 하느냐? 왜 교만하여 명령하며 독재를 쓰느냐? 는 것입니다. 이 고라의 길은 사람들 보기에 바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라를 따르는 무리들도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는 일에 한 무리가 되어 모세를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라를 치시고 모세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그를 따른 무리들이 어떤 일을 당한 것입니까? 자신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어떤 길을 걷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이게 하고 고라와 고라를 따른 무리들도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말했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모세의 말이 끝나자 마자, 250명이 서 있는 땅 밑이 갈라졌습니다. 그리하여 갈라진 땅이 고라와 그 고라에게 속한 사람들을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교회를 떠날 수 없으며 교회 생활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멸망을 자초하는 어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충성과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5) 요나의 어떤 길 : 우리는 요나란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요나도 어떤 길을 걸어가다가 혼줄이 난 사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니느웨란 도성에 가서 그들이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 소돔이나 고모라 같이 멸망할 것을 알리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이런 명령을 따르기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들에게 짓밝힌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을 원수로 여겼던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죄악 중에 멸망 받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가려고 배를 타고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요나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자기의 길을 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려운 짐을 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짐을 피하고 편 한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가 아니면 안될 일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셨건만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가 생각 한대로 어떤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기 길을 가다가 어떤 일을 만난 것입니까? 그는 풍랑 중에 몸을 바다에 던져야 했으며 고래 뱃속에 들어가 사흘 동안이나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후에야 그는 다시 니느웨로 향하여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시간에 성경에서 잘못 걸어간 사람들의 여러 가지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생명의 길은 오직 한 가지 주님을 따라가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 길은 좁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만이 영생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진리의 길은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을 잡아 끄는 어떤 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이 길을 가시기에 곤비하십니까?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러나 참고 이길을 가십시요, 정녕이 여러분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며 인생의 참 보람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잠언 강해 42
화목케 하는 생활
( 본문 : 잠언 17 : 1)
오늘 잠언 강해는 ‘화목케 하는 생활’이란 주제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화평의 종교요 화목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이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롬12:18절 말씀에서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화평은 어떤 국한된 사람들끼리 만의 화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한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 네 가지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가 화평을 논할 때, 어떤 화평보다도 먼저 우선해야 할 화평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이는 우리의 운명은 비극적입니다.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관계를 풀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 방법이 곧 하나님과의 화평인 것입니다.
욥22:21절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신 것입니까? 석가로 ? 공자로 ? 그러면 누구로 ?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조건인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조건은 두 가지이며 이 두 가지 모두가 만족스럽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제부터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영원히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망의 값을 치러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를 수가 없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나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하나님 앞에 다 치르심으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의 은혜와 영원히 의로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악의 사람,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다시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8:33절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 ? ) 이 없다고 했어요?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제일 먼저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은 물론 많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돈벌이도 잘해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명예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그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면 그의 생명은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므로 사망에서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형제와 화평하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다음에 형제와의 화평이 따라야 합니다. 형제와 화평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 ? ) 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움이 있고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를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서 나온 사랑을 원치 않으시며 그런 마음의 기도는 간절함도 없고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먼저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4:1절에서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와의 화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용서해야 할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은 그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이루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에 형제와의 화목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17: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 형제와 내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들추어 내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형제간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들과 화평을 이루어 평안하게 살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화평을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싸움질을 하는 사람인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냐 아니면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냐를 판별하면 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에 형제와 화평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18: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남의 말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넓게 벌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깊이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와 함께 다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기 것입니다. 말이 적은 사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지 않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입을 벌렸다 하면 남의 이야기롤 꽃피우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꽉 다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원수와의 화평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마5:43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까닭 없이 핍박을 당하고 모함을 받으며 시련을 당해도 함께 대항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롬12:20절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생활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생활에는 하늘의 상급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잠25:21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네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면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은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4. 가정의 화목
다음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화평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가정의 화목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간의 화목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15:16절 말씀을 보세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난이 불행한 것이거나 고역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생의 축복은 가정의 화평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의 구성원들은 가정의 화목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산이 아무리 적어도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육선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부부간에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잠17: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있고 있어야 할 것도 있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이요 우리 가정의 참 행복이요 이 메마른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비결은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데서 시작이 되고 형제와 화평하고 원수와 화평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 화평을 심는 생활을 통해서 언약된 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2
화목케 하는 생활
( 본문 : 잠언 17 : 1)
오늘 잠언 강해는 ‘화목케 하는 생활’이란 주제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화평의 종교요 화목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이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롬12:18절 말씀에서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화평은 어떤 국한된 사람들끼리 만의 화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한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 네 가지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가 화평을 논할 때, 어떤 화평보다도 먼저 우선해야 할 화평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이는 우리의 운명은 비극적입니다.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관계를 풀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 방법이 곧 하나님과의 화평인 것입니다.
욥22:21절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신 것입니까? 석가로 ? 공자로 ? 그러면 누구로 ?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조건인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조건은 두 가지이며 이 두 가지 모두가 만족스럽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제부터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영원히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망의 값을 치러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를 수가 없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나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하나님 앞에 다 치르심으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의 은혜와 영원히 의로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악의 사람,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다시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8:33절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 ? ) 이 없다고 했어요?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제일 먼저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은 물론 많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돈벌이도 잘해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명예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그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면 그의 생명은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므로 사망에서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형제와 화평하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다음에 형제와의 화평이 따라야 합니다. 형제와 화평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 ? ) 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움이 있고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를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서 나온 사랑을 원치 않으시며 그런 마음의 기도는 간절함도 없고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먼저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4:1절에서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와의 화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용서해야 할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은 그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이루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에 형제와의 화목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17: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 형제와 내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들추어 내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형제간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들과 화평을 이루어 평안하게 살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화평을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싸움질을 하는 사람인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냐 아니면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냐를 판별하면 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에 형제와 화평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18: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남의 말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넓게 벌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깊이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와 함께 다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기 것입니다. 말이 적은 사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지 않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입을 벌렸다 하면 남의 이야기롤 꽃피우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꽉 다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원수와의 화평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마5:43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까닭 없이 핍박을 당하고 모함을 받으며 시련을 당해도 함께 대항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롬12:20절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생활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생활에는 하늘의 상급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잠25:21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네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면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은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4. 가정의 화목
다음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화평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가정의 화목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간의 화목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15:16절 말씀을 보세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난이 불행한 것이거나 고역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생의 축복은 가정의 화평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의 구성원들은 가정의 화목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산이 아무리 적어도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육선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부부간에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잠17: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있고 있어야 할 것도 있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이요 우리 가정의 참 행복이요 이 메마른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비결은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데서 시작이 되고 형제와 화평하고 원수와 화평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 화평을 심는 생활을 통해서 언약된 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2
화목케 하는 생활
( 본문 : 잠언 17 : 1)
오늘 잠언 강해는 ‘화목케 하는 생활’이란 주제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화평의 종교요 화목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이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롬12:18절 말씀에서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화평은 어떤 국한된 사람들끼리 만의 화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한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 네 가지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가 화평을 논할 때, 어떤 화평보다도 먼저 우선해야 할 화평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이는 우리의 운명은 비극적입니다.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관계를 풀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 방법이 곧 하나님과의 화평인 것입니다.
욥22:21절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신 것입니까? 석가로 ? 공자로 ? 그러면 누구로 ?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조건인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조건은 두 가지이며 이 두 가지 모두가 만족스럽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제부터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영원히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망의 값을 치러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를 수가 없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나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하나님 앞에 다 치르심으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의 은혜와 영원히 의로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악의 사람,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다시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8:33절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 ? ) 이 없다고 했어요?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제일 먼저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은 물론 많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돈벌이도 잘해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명예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그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면 그의 생명은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므로 사망에서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형제와 화평하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다음에 형제와의 화평이 따라야 합니다. 형제와 화평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 ? ) 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움이 있고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를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서 나온 사랑을 원치 않으시며 그런 마음의 기도는 간절함도 없고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먼저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4:1절에서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와의 화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용서해야 할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은 그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이루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에 형제와의 화목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17: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 형제와 내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들추어 내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형제간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들과 화평을 이루어 평안하게 살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화평을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싸움질을 하는 사람인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냐 아니면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냐를 판별하면 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에 형제와 화평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18: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남의 말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넓게 벌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깊이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와 함께 다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기 것입니다. 말이 적은 사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지 않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입을 벌렸다 하면 남의 이야기롤 꽃피우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꽉 다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원수와의 화평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마5:43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까닭 없이 핍박을 당하고 모함을 받으며 시련을 당해도 함께 대항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롬12:20절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생활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생활에는 하늘의 상급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잠25:21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네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면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은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4. 가정의 화목
다음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화평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가정의 화목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간의 화목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15:16절 말씀을 보세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난이 불행한 것이거나 고역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생의 축복은 가정의 화평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의 구성원들은 가정의 화목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산이 아무리 적어도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육선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부부간에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잠17: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있고 있어야 할 것도 있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이요 우리 가정의 참 행복이요 이 메마른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비결은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데서 시작이 되고 형제와 화평하고 원수와 화평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 화평을 심는 생활을 통해서 언약된 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2
화목케 하는 생활
( 본문 : 잠언 17 : 1)
오늘 잠언 강해는 ‘화목케 하는 생활’이란 주제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화평의 종교요 화목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이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화평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롬12:18절 말씀에서 “할 수만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화평은 어떤 국한된 사람들끼리 만의 화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해야 할 대상은 한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 네 가지 화평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가 화평을 논할 때, 어떤 화평보다도 먼저 우선해야 할 화평의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이는 우리의 운명은 비극적입니다.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관계를 풀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데 그 방법이 곧 하나님과의 화평인 것입니다.
욥22:21절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신 것입니까? 석가로 ? 공자로 ? 그러면 누구로 ?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평의 조건인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의 조건은 두 가지이며 이 두 가지 모두가 만족스럽게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죄값을 치르므로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제부터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영원히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사망의 값을 치러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를 수가 없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나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하나님 앞에 다 치르심으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의 은혜와 영원히 의로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악의 사람,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다시 그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8:33절에서 이처럼 외쳤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 ? ) 이 없다고 했어요?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제일 먼저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은 물론 많습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돈벌이도 잘해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명예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그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면 그의 생명은 파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므로 사망에서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들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형제와 화평하라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다음에 형제와의 화평이 따라야 합니다. 형제와 화평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한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 ? ) 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가득차 있습니다. 미움이 있고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를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에서 나온 사랑을 원치 않으시며 그런 마음의 기도는 간절함도 없고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먼저 화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4:1절에서 “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제와의 화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 용서해야 할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와의 화목은 그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이루신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에 형제와의 화목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17: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 형제와 내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바랍니다. 허물을 들추어 내면 결과는 뻔합니다. 그것은 형제간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들과 화평을 이루어 평안하게 살려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너그러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화평을 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싸움질을 하는 사람인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냐 아니면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냐를 판별하면 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에 형제와 화평하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18:6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남의 말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넓게 벌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일을 깊이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와 함께 다툼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될 것이기 것입니다. 말이 적은 사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지 않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입을 벌렸다 하면 남의 이야기롤 꽃피우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꽉 다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원수와의 화평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마5:43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까닭 없이 핍박을 당하고 모함을 받으며 시련을 당해도 함께 대항하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2) 롬12:20절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생활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3) 그리고 이런 우리의 생활에는 하늘의 상급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잠25:21절에 나온 말씀을 보면 네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면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은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4. 가정의 화목
다음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화평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가정의 화목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서는 가난 때문에 가족간의 화목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15:16절 말씀을 보세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난이 불행한 것이거나 고역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생의 축복은 가정의 화평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의 구성원들은 가정의 화목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산이 아무리 적어도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육선이 가득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부부간에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잠17:14절에서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오늘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있고 있어야 할 것도 있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것이요 우리 가정의 참 행복이요 이 메마른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비결은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데서 시작이 되고 형제와 화평하고 원수와 화평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 화평을 심는 생활을 통해서 언약된 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3
우리의 견고한 망대
( 본문 : 잠언 18 : 10)
오늘 잠언 강해는 본문을 주제로 하여 ‘우리의 견고한 망대’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0절 말씀을 다 함께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 )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의 견고한 망대라고 한 것입니다. 견고한 망대란 원수의 손에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 든든한 성벽이란 뜻입니다. 시27:1-5 말씀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다윗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누구도 두려워함이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처럼 외쳤습니다. ‘군대가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안연하리로다.’
1. 여호와의 이름
우리는 먼저 여호와의 이름이 어찌하여 견고한 망대가 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고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어떻게 우리의 견고한 망대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과연 누구를 위한 역사이신 가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106:8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인도하신 것도 그들에게 구원 받을만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이 성의 백성을 죽이시고 여리고 성의 백섣들을 죽이게 하시고 모든 이방 족속들을 이스라엘의 칼날에 망하게 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툭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패역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일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였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은 우리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일도 모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우리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고 기도한 것입니다(렘14:7). 우리는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그 죄악을 사하여 주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스스로 거룩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대개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42:8).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그의 그 크신 사랑도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도 오직 거룩하신 여호와의 이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모든 일에 대하여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선택도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하신 모든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연단과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룰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려가는 일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1)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려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일을 가리킨 말입니다. 성도들은 그의 생애 중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34:3절에서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라고 말하고 그 이유에 대하여 4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15장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였다 해도 말씀의 순종이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여호와의 이름에 달려간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에는 하나님의 두려우심이 함께 깔려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여호와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일은 우리의 입으로 나옵니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일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상급책에 기록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상급도 따르는 것입니다. 말3: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의 기념책에 기록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언제나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음에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범사에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봉헌하면서 기도하기를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그의 열조에게 주신 땅을 돌아가게 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죄를 사유하시며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잠3:6절에서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나의 범사에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받아 드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회개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겸손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이같은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5) 다음에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여호와의 견고한 망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138편에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다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알게나 모르게나 모두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그의 인다하심을 힘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이름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활기 차고 우리의 생활에 보람이 있고 우리의 생애에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케 하려면 우리의 입에서 항상 감사가 나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입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일은 마땅한 일임을 알고 감사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6)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항상 그 거룩한 이름아래 우리의 생애를 바칠 때 하나님은 내 편이 되셔서 내 원수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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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강해 46
삼가야 할 교훈
본문 : (잠언 19 : 27)
오늘 저녁 잠언 강해는 ‘삼가야 할 교훈’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2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 이 말씀은 지극히 짧은 말씀이지만 이 한 말씀 가운데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1. 교훈의 유익
이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혹은 도덕적인 생활에 유익을 주는 교훈, 혹은 우리 인생 길에 보냄을 주는 교훈 실로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세상에서 써먹은 모든 지식이나 교훈이나 가르침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었고 우리 인생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왔지만 일단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교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교훈은 양심이나 높은 도덕적 기준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교훈의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함으로 아무리 좋은 교훈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런 교훈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훈을 받아 드리는 자세가 세상사람과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금언이라 하여 즐겨 따르는 교훈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우리가 만약 그런 교훈을 따른다면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옛날 이사야 당시나 예수님의 생존시,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아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탄식하시기를 ‘이스라엘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사29:1-3).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께 질문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받아 물으셨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절대로 그런 기도를 받으려 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기도해 준다는 사람에게 기도를 받았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네가 교회에 바칠 11조는 누구를 도와주는 구제금으로 쓰면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복을 더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당신이 지은 죄를 탕감 받으려면 100만원을 헌금으로 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만약 이런 식으로 기도해 주거나 신앙적으로 지도한다면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종이나 선지자나 예언자도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분명한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다해도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나타나신 분이 정말로 예수님이시라도 그 말씀을 따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따르나 보시려고 여러분에게 나타나시어 여러분을 시험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가? 아무리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도 그런 것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제일로 삼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것인가 여부를 시험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야 합니다. 말씀이 가장 소중하다는 신앙을 가지고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도 매한가지지만 예수 믿을 때에도 처음에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에 들어가 문선명 이한테 배우면 별 수 없습니다. 모두 문선명 사상에 물들어 문선명 이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처음 들어와서 무당푸닥거리 식으로 기적이나 따라 다니고 요란스럽게 믿으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신생교회 성도들 신앙 생활이 조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옆 교회에서 아무리 유명한 부흥사가 와서 집회를 해도 끄떡 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은 참으로 좋은 신앙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사나 이적에 눈을 팔지 마시고 헛된 자만과 허영에 들뜬 신앙에 물들지 마시고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시고 진리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이루어 가는 그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13:4절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법도인 것입니다. 이 법도를 벗어나면 그 사람의 신앙은 병들게 되고 그의 인생 길은 하나님이 없는 인생 길이 되어 험한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귀와 마음
우리에게 귀와 마음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든 교훈은 일단 귀로 듣고 마음에 간직해 두기 때문입니다. 마치 귀와 마음은 물을 버리는 하수구와 같은 것입니다. 한번 구멍에 버린 물은 흘러서 하수구를 통해 배출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라고 하는 구멍에 들어간 사람의 말은 마음으로 통하는 하수구를 거쳐 마음속에 들어가 자리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내가 비록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도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면 그만큼 내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가려서 들으라는 말이 나왔고 중국에 어떤 사람은 더러운 말을 들었다하여 흐르는 냇물에 가서 자기 귀를 씻었다는 고사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구에서든 무슨 말이든지 듣는 일에 조심하고 듣기를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늘 옳은 말만 들으려고 내 귀를 바른 말에 기우려야 합니다. 언제나 더럽고 추한 말이거나 진리를 거슬리는 말은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잘하고 남의 흉을 잘 보며 다투기를 좋아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과는 교제를 삼가며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이건 그 말을 연거푸 자꾸 들으면 마음에 박히게 됩니다. 예전에 공산당에서 소위 쇠뇌교육이란 것을 시켰는데 이 쇠뇌란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을 계속적으로 반복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샌가 그 사상에 감염되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자꾸 통론을 벌리거나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다보면 어느 샌가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세포 망을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과 접촉하기를 삼갑니다. 왜냐하면 이들과 자주 만나는 일은 마치 염병 든 사람처럼 함께 물드는 것입니다. 잘못된 말에 귀를 기우리다보면 그 잘못된 것에 말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것입니까? 양들은 먼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양무리들은 자신들이 먹는 꼴이 먹어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먹으면 죽음을 갖어올지모를 독초인지 잘 분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쫓아가 목자가 먹이는 꼴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알고 그 목자를 따라 좋은 꼴을 먹어야 신앙적으로 성장하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0:1-5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 )
자기 목자가 참 목자인줄 믿고 다른 목자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고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따르는 양들은 복이 있는 양들입니다. 어떤 양 중에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앞에서 자기 교회 목사 흉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상담도 자기 교회 목사는 피하고 다른 목사를 찾아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양무리는 못되고 영적으로 병든 양들입니다. 신앙이 바로 박힌 양들은 자기 목자로 자랑거리로 삼고 누구 앞에서나 존귀하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가 감사하게 여기며 또 마음으로 기뻐하는 일은 우리 신생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런 성도들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지 저는 여러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3. 삼가야 할 교훈의 종류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삼가야 할 교훈이 무엇이지 이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교훈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교훈 중에는 매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심오한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자의 말, 노자의 말, 맹자의 말, 석가의 말 등, 역사상 인류 사회에 많은 공헌도하고 영향을 끼친 위대한 성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는 반 기독교적인 독소가 담긴 교훈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교훈에 미혹을 받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교훈보다도 위대한 하나님의 교훈이 주옥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무리 똑같은 모양의 교훈이라도 사람의 교훈을 따를 때에는 하나님의 칭찬이나 하늘의 상급이나 축복이 따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급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나온 교훈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하고 따라야 할 교훈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는 그 나름대로의 정당화하고 그럴듯하고 그럴만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얻는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의 도리가 제각기 있다해도 참 구원의 도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교훈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보다도 더 좋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종이에 기록된 사람의 말일 뿐 그로 인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도 아니며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3) 다음에 우리는 발람의 교훈을 삼가야 합니다.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이 썩은 누룩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탐심에 사로잡혀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교회 안에서도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물질주의에 물들면 이 교훈의 노예가 됩니다. 기도할 때도 물질에 대한 기도만 하고, 마음에 원하는 소원도 물질적인 복에만 두는 일은 우리가 발람의 교훈에 이끌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교훈을 따르면 발람의 길을 걷게 되고 그 결국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4) 다음에 우리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삼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니골라라고 하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이 집사가 집사로 선택받을 때에는 믿음이 좋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병들어 교회 안에 하나의 당을 만들어 그 당이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오도하여 그들로 올바른 신앙에서 떨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의 교훈이란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범해도 괜찮다고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 죄악이 만연케 되었고 교인들의 심령이 죄로 썩어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교훈에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의 말씀에 굳게 하여 하는 것입니다. 뿐 아니라 이단의 무리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너그러이 영접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귀가 하나님의 교훈에서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요한계시록에는 주님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의 끝절마다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이 귀는 할례 받은 귀를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주님의 피로 영영한 하나님의 종들이 된 사람들의 귀입니다. 우리의 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우려야합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귀를 그곳에 기울이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7
사죄와 마음의 정결
본문 : (잠언 20 : 9)
오늘 잠언 강해는 잠언 20:9절 말씀을 주제로 하여 ‘사죄와 마음의 정결’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9절에 기록된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정하게 할 수 없고 자기 죄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죄와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머무는 곳이 마음이고 죄가 밖으로 나오는 곳도 마음입니다. 죄라는 존재는 원래가 씻을 재료가 없는 것입니다. 렘 2:22절 말씀을 보면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한번 죄를 범하면 그 죄악이 어떤 방법을 써도 결코 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경종이신 것입니다.
1. 사람의 마음의 상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은 모든 죄는 마음에 기록되는데 렘 17: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금강석 철필로 마음 판에 기록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 물든 죄는 어떤 방법으로도 정결하게 씻음 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세계적인 철학자 케케콜이란 사람은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죽음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은 암보다도 백혈병보다도 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육신으로 받는 괴로움만 병인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근원 즉 뿌리는 무엇입니까? 롬 6: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한 일은 이 죄를 씻어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망이란 병은 처방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를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렘 17: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5:19절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 나오는 것들을 열거하셨는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것이 마음에서 겉으로 나올 때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로 나타날 인간의 마음의 부패상에 대하여 딤후 3:1-5절 이하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씻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과 원수된 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존재는 누구인 것입니까? 고후 4:4절에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죄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의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증거를 들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히 9:22절에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씻는 비결은 피에 있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위한 이 피의 제사는 창 3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심으로 두 가지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는 피로서 죄를 정결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가죽옷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사용된 양이나 염소, 송아지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 제사를 드리는 그림자로 율법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피의 제사는 아벨 때에 와서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놓았으며 노아의 제사와 아브라함의 제사, 야곱의 제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애굽 땅에서 잡은 어린양으로부터 광야 교회에서 드린 제사와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 드린 모든 제물이 이 짐승의 피로써 이루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구약에서 실시했던 모든 제사 제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운명하셨고 이 후에는 다시는 제사로 속죄 제물을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후에는 제사 제도가 영원히 폐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피의 제물은 누구에게 효력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 그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결해 진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옛 주임이 찾아와 자리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2:43절에서 주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면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로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소멸된 마음속에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 37:30-31절 말씀을 보면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결하게 씻음 받은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날로 새롭게 하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잠 4장에는 마음을 지켜야 할 일에 대하여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말은 세 가지로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그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입니다. 정결하지 못한 마음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에 정결한 내 마음속에 새로운 존재 즉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악을 담는 그릇도 되고 말씀을 담는 그릇도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순종으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열매는 순종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종이 곧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악이 우리 마음에 발부칠 곳이 없도록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회개는 죄악을 막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이 방패를 든든히 하여 죄악의 거미줄을 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끊임없이 뿌려야 합니다. 이 말씀의 씨앗은 네 종류로 지라는데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효력이 있습니다. 좋은 밭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도 듣고 말씀을 읽으므로 들어 내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릴 때 그로 인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루려면 한 가지 더 따라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잠 17장 말씀을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시험하시는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을 뿐, 이 세상의 어떤 종교 의식이나 교훈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죄를 깨끗케 하는 일
다음에 죄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고 할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원죄는 아담이 이미 정죄 받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하여 이미 사망의 언도를 내린 것입니다. 아담의 사망도 이 죄로 인한 것이요 우리의 사망도 이 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가 혈통적으로 물려받은 것으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 한 사람 아담의 죄에 대하여 준엄하게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6: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으며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의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도 석가도 맹자도 절대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받을 자가 한 명도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옛날에 살았던 공자나 석가 같은 분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답변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자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그렇게 답변할 뿐입니다.
다음에 사람에게는 원죄 외 본죄라는 죄가 있습니다. 이 죄는 원죄에서 뻗어난 가지들입니다. 아담의 원죄를 이어 받은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죄가 이 본죄인 것입니다. 원죄가 있는 인간에게는 본죄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죄는 근원적으로 동일한 죄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 두 죄가 처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죄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근본적으로 해결 받지만 본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생활에 따라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회개하여 늘 죄악으로부터 정결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이 본죄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마음을 정하게 하며 죄를 깨끗케 한다는 말은 바로 죄인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의 방법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며 우리의 죄를 씻는 능력으로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확실히 믿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여러분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잠언 강해 48
너는 여호와를 기다리라
본문 : (잠언 20 : 22)
오늘 잠언 강해는 잠언 20:22절 말씀을 주제로 하여 ‘너는 여호와를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곧 소망의 종교인데 소망이란 원래 기다림이 따라야 실현될 수 있는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구원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구원이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입니다. 롬8:24-2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미래적이요 장래적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 믿을 수 있을 뿐입니다. 히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우리의 소망을 말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
그리스도인은 이 소망이 눈에 가까이 있거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망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히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소망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고난 중에 즐거움은커녕 괴롭기만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열정도 없습니다.
소망에 대한 즐거움과 인내가 없는 사람은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도 천국도 영생도 모두 거짓말 같고 허황된 것 같고 망상 같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충성이나 열심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1) 세상 것을 바라보는 눈을 우리는 육신의 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안이라고 부릅니다. 영안이란 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눈이 열린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안이 열리면 환상을 본다거나 신비한 것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눈은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보여 주실 때 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고전2:9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런 소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바라보려면 영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으려면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죄가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볼 수 없게 합니다. 우리는 영이 맑아야 한다는 말을 곧잘 씁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를 소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소망을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 사람의 마음에 간직한 영이 맑은 영입니다. 이상이나 보고 환상이나 보면서 이상한 신비적인 예언이나 하는 사람의 영이 맑거나 밝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맑게 간수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세상적이 되고 그런 사람들은 응답을 받아도 마치 발람과 같은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란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라는데 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독교는 언약으로부터 시작해서 언약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기다리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안약에 의해 25년간을 기다리다가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노아는 120년간이나 방주를 만들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일에 어떤 모양으로 기다려야 하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2. 하나님을 기다리라
(1)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너는 악을 갚겠다고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원수에 대해 내가 그 원수를 갚는 일에 대하여 금하시는 것입니다. 롬12:19절에서 원수 갚는 일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원수를 하나님이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내 손으로 갚겠다고 해보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려는 행동으로 교만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54편에서 ‘하나님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59편에서는 ‘내 원수가 하나님께 보응을 받는 것을 나로 볼 수 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내 원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이에 대하여 롬12:20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25:21-22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끝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지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무엇을 주시리라?’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내 원수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나에게 상을 주시려는 뜻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출23장을 보면 깊은 뜻이 담긴 말씀이 있습니다. 4-5절 말씀에서 ‘네가 만일 네 원수의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눅6:27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잠24:17절에 있는 말씀이 그것인데 ‘네 원수가 넘어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 까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2)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에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그 약속이 더딜 때 의심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이 형통할 때나 의인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우리는 곧잘 분통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아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그의 공의를 나타내 보이신다고 하셨습니다. 행악자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형통이나 축복인 것이 아니라 시37편에서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도모하는 일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 잘되는 것 같고 형통하는 것 같은 것은 하나님의 미끼에 불과합니다. 악인은 그가 행한 대로 그가 뿌린 씨앗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악을 행하는 수명은 길지 않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없어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입김으로 부신즉 곧 사라져버려 우리가 그곳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악인을 비웃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멸망할 날을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이르시기를 악인이 하는 모든 악한 일은 결국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어떤 보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까? 시37: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땅이란 하나님의 기업을 말합니다. 약속에 대한 확실한 응답인 것입니다. 다음에 또 어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풍부한 화평으로 즐긴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화평으로 즐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인의 팔은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부러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붙들어 주신다고 하 신 것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몇 번 ?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 기업을 빼앗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업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환난 날에도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같은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결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니 그의 약속을 믿고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30:18절에서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우리는 시험 중에 여호와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시험에 합격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40:1-2절 말씀에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어떤 일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까?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내 입에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교훈의 말씀은 야고보 서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참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의 힘으로 곧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시험이나 어려움의 끝장을 어떻게 매듭지어 주시는 것입니까? ‘모든 하나님의 시련은 너희의 장래에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을 이루시는 일로 끝장을 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으로 심은 대로 거두시는 역사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다리는 자세는 아무런 뜻 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림에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첫째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는 인내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몇 일간의 기다림이나 몇 달 동안의 기다림에는 인간적인 의지로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기다리고 오랜 후에 성취될 언약을 기다림에는 기도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다림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여호와를 기다림에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가 있어야 합니다. 의뢰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의뢰가 없이는 기다림의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이루고 여러분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다림에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어리석은 실패자가 되지 마시고 끝까지 기다림에 승리하려 소마와 언약을 이루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49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본문 : (잠언 21 : 1 - 3)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심령을 감찰하시는 여호와’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다 같이 2절 말씀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 )
감찰이란 말은 살피신다, 꿰뚫어 보신다, 낱낱이 들추어 내신다는 뜻이 담겨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신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생김새에 대하여 언급해 주지 않고 있으며 누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모습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귀나 눈이나 팔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고기를 먹일터인데 하루나 이틀 동안만 먹이심이 아니요 코에서 냄새가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한 달간을 먹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넉두리처럼 아뢰기를 ‘하나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만도 60만명이온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이런 모세의 말에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손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손을 권능의 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권능의 손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사48:1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의 기초를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하늘을 폈다고 했습니다. 이 팔은 또 무슨 역할을 하십니까?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귀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면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원망이나 우리의 기도는 귀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시18:6절 말씀을 보면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가운데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기도는 기도가 확실히 하나님께 전달되었다고 하는 확신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는 응답의 역사가 내립니다.
하나님은 또 눈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느 일정한 곳만 쳐다 보는 인생들의 눈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역하16:9절에서 이르시기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루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을 피할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이에 대해 시10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자를 하나님이 살피셔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길은 형통합니다. 이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감찰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죄
우리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어디든 숨을 곳이 없습니다. 욥28:24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약은 꾀를 써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니느웨로 가야할 발걸음을 다시스로 돌이켰을 때 멀리 도망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알고 배 밑창에 숨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갈곳이 있는가 한번 할펴보겠습니다. 암9:1-4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디가든 찾아내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찾으시는 목적은 그들에게 복을 내리심이 아니라 화를 내리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굉장한 속도로 우주 과학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우주 로켇을 달나라에 보낸 것은 옛날이요 지금은 금성이나 토성에 보내며 얼마 안가 사람이 탄 우주선이 금성에 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우주 과학이 발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류의 마지막에 있을 일곱째 대접 심판을 면하려고 하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 같은 계흭이 성공할 것입니까? 옵1:4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별 사이에 깃들여도 거기서 끌러내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계3:10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 중,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주님이 또한 저들을 시험의 때에서 지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건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139:에서 자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어디든 숨을 곳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의 낯이 두려워 동산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담아, 아담아’ 부르시는 그 음성에 숨었던 그 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벗었음으로 숨었나이다’고 자기의 벗은 모습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숨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추적해서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죄를 내 앞에 내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간이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 백 세겔과 금 덩어리 하나를 탐내어 땅 속에 아무도 모르게 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로 이스라엘을 전쟁에 패하게 하시고 아간을 잡아내어 그를 돌로 쳐 죽이고 그 위에 불사르고 시체 위에 돌무더기로 쌓아 올렸는데 이곳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골 골짜기)
모세는 장성하여 언제인가 자기 백성들이 간역하는 사업장에 나가 애굽 사람을 때려 죽여 모래에 파묻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모망하게 되었고 애굽 왕실의 호사스런 왕자의 생활에서 하나의 목동의 자리로 전락하여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40년간이나 지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숨은 그 어떤 것이라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숨기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끝까지 추적하시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28장에서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털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자의 축복에 대하여 요일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32:5절에서 이르시기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1:1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죄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복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야 정결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이유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입니까? 잠24장에서 이르시기를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행한 모든 행위대로 보응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보응은 어떻게 내리신다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진노를 그 머리에 쏟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보응은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늘의 면류관으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격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합격할 수 있는 것입니까?
(1) 그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시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이라 거짓이 없는 정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의 진실입니다. 죄를 범했어도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면 곧 용서를 받아 정결하게 그 죄를 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일을 했다해도 진실하지 못하면 그 의로움이 교만이 되고 자기 영광이 되기 떄문에 하나님 앞에 합격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기도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만이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진실한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진실한 기도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환난 날에 어려움을 당하는 시련의 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145:18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생명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적게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짧은 기도일지라도 진실하게 하는 기도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누가 진실한 일꾼인가 누가 진실한 종인가 누가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를 지금도 부단히 살피십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부지런히 찾으십니다. 그것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선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생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일꾼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재앙이 내리는 날, 혼란 속에서 모든 인류가 해메이는 그 날에 하나님은 진실한 일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다 진실한 하나님의 청지기들이 되셔서 하나님께 기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강해 50
재앙을 대처하는 태도
본문 : (잠언 22 : 3)
오늘 밤 잠언 강해는 ‘재앙을 대처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 ). 우리는 고난이란 말과 재앙이란 말을 혼돈해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말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은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시련이지만 재앙은 죄인에 대한 죄값의 보응으로 내리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인생에게 오는 재앙
재앙은 하나의 결실입니다. 재앙은 시작인 것이 아니라 뿌린 씨에서 나온 열매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까? 잠22: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악을 뿌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행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보응으로 자기가 뿌린 악의 씨앗 때문에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행한 행실의 열매를 먹지 않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잠13:21절에서 ‘재랑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선한 보응이 절대로 악인에게 찾아 가는 일이 없고 악인이 당해야 할 보응이 결코 의인에게로 돌아오는 일도 없습니다.
악을 뿌린다, 악을 행한다는 말은 범위가 워낙 넓어서 몇 가지로 끄집어 내어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지만 우리가 평범하게 알기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일은 모두 악을 심는 일인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신 28장은 절반은 축복을 선언한 장이요 또 절반은 재앙을 선언한 장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입니다. 15절 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사울 왕은 버림을 당하고 하나님을 잘 공경했던 다윗이 그 위를 차지하여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믿음으로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언약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악을 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길로 가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발람이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로 그 보응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이웃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긴 일도 하나님을 대적했던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로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목이 곧아 범사에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원망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에게 악담을 퍼붓는 일도 악을 뿌리는 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탐심과 정욕을 품고 그 욕심대로 살아가면 재앙을 거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약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을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재앙을 만난다면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받을 죄값은 사망인데 이 사망이란 말은 둘째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옥을 가리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이 사망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피할 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 받는 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피로 죄의 용서하심을 받고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는 의를 얻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재앙은 임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언제 우리에게 노크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이 재앙이 내 인생 길에 나타나 내 인생을 재앙으로 이끌 때는 우리는 지혜를 써서 이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아기스 왕을 두려워하여 혹 재앙을 만날는지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슬기를 썼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 앞에서 미친척 그 행동을 변하여 대문짝에 극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습니다. 이 모양을 바라본 왕은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은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 왔느냐 어찌 이 자가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하여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자손이 번성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자 왕은 이스라엘의 산파들에게 사내아이가 출생하면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산파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면한 것입니까?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를 살렸을 때 이 소문을 들은 바로 왕이 산파들을 불러다가 너희가 어찌하여 남자를 살렸느냐고 그 책임을 묻자 산파들은 왕에게 ‘이스라엘 여자들은 애굽 여자들과 달라 몸이 건장하기 때문에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더이다고 말하여 위기를 면했던 것입니다.
재앙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우리는 완전히 의로운 생활을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할 때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때 우리에게 오는 재앙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숨어 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숨어 피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재빨리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하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재앙의 손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이 한가지 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혹 패역한 죄를 범하여 재앙이 내 발 등에 떨어지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혹 재앙이 찾아와도 그 일이 우연한 일로 온 것이지 자기가 행한 행실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떨어지는 재앙을 무방비한 상태로 그대로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 재앙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엘2: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길에서 돌이킬 줄을 모르고 악 행하기를 그치지 않는 죄인에게는 두려운 심판을 내리시고 그에게 내리시는 재앙을 결코 거두심이 없지만 죄인이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는 자에게는 관대하셔서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시며 내리시고자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며 내리시는 재앙을 가두시고 오히려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겔18:21절에서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 재앙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부어 쏟으신다고 하셨습니다(잠1:23-3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식를 미워하는 사람과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그의 책망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반드시 재앙으로 그 값을 치르신다고 경종하시는 것입니다.
2. 인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재앙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에게 내리실 무서운 재앙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18:4절에서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불의한 일을 보응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쟁앙은 무엇입니까? 습1:2-3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 바다의 고기와 땅의 짐승과 공중의 새들과 모든 악인들을 진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재앙은 인류의 종말에 일곱 대접으로 이 땅에 쏟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이런 재앙을 일곱째 대접으로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대접 재앙은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몸에 악하고 독한 헌데를 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둘째 재앙은 바다가 죽은 자의 피와 같이 되고 그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생물을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재앙은 세상의 물이 모두 피가 되는 재앙으로 이 재앙이 내릴 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피로 변한 물을 마시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재앙은 해의 뜨거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재앙은 태양이 어둠에 가리워져 온 세상이 캄캄해 지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재앙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과 그의 군대에 의해 적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몰살 당하는 재앙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이 일곱 대접 재앙으로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땅 속에 감춰졌던 불이 치솟아 온 천지가 불덩어리가 되어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죽이는 재앙인데 이 재앙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무서운 재앙을 우리는 어떻게 피할 수 있으며 이런 재앙의 날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후 3년 반에 내리실 재앙의 시기에 숨겨주실 하나님의 예비처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계3:10절에서 우리에게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심판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을 통해서 지팡이 같은 갈대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척량에 합격해야 이런 재앙의 날에 숨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끝맺음에 다른 세 가지 사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마7:2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하나의 분명한 표준을 세워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날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마7:22-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는 우리가 권능이나 능력을 행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눅17:3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세상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재앙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다음 눅18: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지켜야 할 때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시 91편에서 시편 기자는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지존자로 거처를 삼아옴으로 화가 내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내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기로운 사람이 되시어 재앙의 날에 여호와의 날개 아래 숨김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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