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요한 1서 1-5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56


요한일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428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1-4)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1:5-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서신의 기록 년대는 주후 85-95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말년을 지낸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먼저 말씀의 증인의 입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이 부분의 말씀은 요 1장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한 눈으로 보기에도 요한의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태초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시간을 초월한 태초가 그것입니다. 창1:1절에 있는 태초는 물질 세계의 시간의 시작으로서의 태초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전의 태초로 대개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언급에서 이 태초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일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후자에 속하는 태초입니다.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풀이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말씀이 되신 분입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거 할 때 쓰여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부르는데 말씀이란 단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선재를 나타낼 때 그의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말씀이라고 불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1: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에 있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신 것과 18절에 나오는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란 바로 이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일5: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와 자신과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자기가 본 바 모든 것을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이 기쁨이 요한의 서신을 읽고 듣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빛에는 언제나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전한 소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빛을 비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에는 어두움의 자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진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생활은 죄에 끌려 다녀 사탄을 기쁘게 해 주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5:5절에서는 빛의 아들이란 낮에 속한 사람들임을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에 속한 사람들이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 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일을 빛으로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빛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귐이란 성도들의 교제로 진실한 성도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한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혹 죄를 범하는 일과 아주 죄 가운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의 유혹이 와도 그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 죄를 범해도 곧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 그 어둠을 속히 물리치면 우리는 계속 빛에 속한 자가 되며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죄의 자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우리 중에 있는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 빛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생활을 하려면 죄를 자백하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참 자

백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1,848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한일서 2 : 1)

(4) 우리의 화목 제물(요한일서 2 : 2)

(5) 주를 사랑하는 증거(요한일서 2 : 3 - 6)

(6) 주님의 계명(요한일서 2 : 3 - 6)

(7) 장성한 성도의 신앙(요한일서 2 : 12 - 14)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요한일서 2 : 15 - 17)

(9) 마지막 때와 인류의 종말(요한일서 2 : 18 - 23)

(10) 마지막 때와 적 그리스도(요한일서 2 : 18 - 23)

(11) 마지막 때와 적 그리스도(요한일서 2 : 24 - 29)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한일서 2 : 1)


1:8-10절까지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가 자백만 하면 용서받으니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나 주장은 궤변이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2:1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저즈러도 좋다거나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모든 불의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담대하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혹 죄를 범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곧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혹 죄를 범했을지라도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여 다시는 그런 죄의 유혹에 끌리지 말고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을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1. 우리의 대언자

요한은 말하기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으며 요한은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죄는 그 죄가 가만히 어둠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59:12절에서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민32:23절에서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계18:5절에서 이르시기를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죄악을 다스리는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자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욥에 대하여 시기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습니다. 계12:10절 말씀을 보면 참소하는 자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이 자는 인류의 종말에 가서 미가엘 천사에 의해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이같은 참소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후에는 우리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라고 밝힌 대상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롬8:33절에서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언자는 누구라고 하신 것입니까?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이십니다. 죄악의 대명사가 되는 사탄의 참소는 의인의 간구 앞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언은 아주 적법한 변론이십니다.

왜냐? 그 분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사실만 선언하신다면 사탄이 아무리 그럴듯한 참소로 우리를 정죄해도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대언자로 지금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슥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참소를 할 때,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면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노라'고 하시며 사탄을 향하여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언은 그가 이루신 속죄와 그가 가지신 의로 인하여 우리를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죄를 자백하지 않고 감추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죄를 위해 어떻게 대언 하실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탄식시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이 분만 붙잡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사탄의 송사도 그 어떤 참소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화목 제물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것입니다.


1. 화목의 필요성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화목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2:16-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이 명하신 조건 아래서 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화목의 조건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화목 대신 원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어짐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의 방법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었던 인간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이같은 장애를 없애고 화목을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깨어진 화목의 장애를 어떻게 없애느냐? 이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한 죄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에 거침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일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2. 구약과 신약의 화목제물

(1) 하나님과의 화목은 제물로만이 가능했습니다. 죄의 사함이 없이는 화목이 불가능했으므로 제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므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속죄 제물이 없었을 때임으로 죄 값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짐승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화목 제물로 삼아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히9:13-14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였고 거룩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짐승의 피로 화목하는 방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위하 화목 제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롬5: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22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목을 위한 화목 제물로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화목제물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이루신 이 화목의 혜택을 받아 무조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대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음, 거짓된 혀, 곧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진실하지 못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까? 4절 말씀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쟁이로 생활해 오지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을 우리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집어넣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치 않는 수학적 공식이나 철학자나 정치가들의 유명한 금언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참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공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금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진리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진리는 그 소유한 자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거짓말이요 둘째로 진리가 그 사람에게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치 않는것이 아닙니다. 롬6: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밝혀 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자기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가 불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의 소속은 빛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구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로 아직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진리에 서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자요 그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일은 구원의 유일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이 확실히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증거요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가짜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순종이 없는 경우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 믿음에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으니 열매가 없어도 내게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확인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유일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스스로 속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생활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6) 주님의 계명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과 옛계명

여기서 요한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을 언급하면서 이 두 계명은 실인즉 둘이 아니라 하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 계명에 대하여 요한은 7절에서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것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원래가 10계명을 기본으로 주신 말씀인데 실인즉 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근본 정신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인데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인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율법은 사랑의 법이요 사랑을 완성하는 일에 율법의 존재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면서 이 계명을 이루는 일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레19:17-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람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했으며 용서 대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랑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1)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서 용서로 사랑을 나타내야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사랑은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형제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이 빚을 내 이웃에게 내 형제에게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빚을 갚는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정확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성취에서 오는 완성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림자로 보여주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체로 나타남으로 복음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자인 구약적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을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계명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많아도 그 대 강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새 계명을 따라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7) 장성한 성도의 신앙

(요한일서 2 : 12 - 1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 하나도 빠진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이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한 책이며 누구에게 읽힘이 되라고 주신 책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거나 그들을 위해 주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하시고 그리하여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주신 책이 성경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이 말씀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자는 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대상

사도 요한이 요한 서신을 써서 보낸 대상자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리에 있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14절에서 요한이 이 말씀을 들려주려고 하는 대상을 넷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이처럼 구분했는데 이것은 교인 전체에게 들려주려는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1) 처음에 나오는 자녀들에 관한 언급에서 요한은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죄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죄입니다. 죄가 사망을 가져왔고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사죄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어서의 첫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가 그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은 구원을 얻은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해졌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우리는 아니다 내 죄는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죄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가 자기에게 완전히 옮겨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죄의 소멸과 의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아비들에 대해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신 그의 신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신앙은 아이들의 속죄의 지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영적 지식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아는 믿음은 성장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청년들에게는 13절과 14절 두 곳에서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나 '흉악한 자'는 모두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년의 믿음은 이 사탄을 이기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강하다는 말은 믿음으로 강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신앙의 성장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믿음으로 능히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한 것입니다.

(4) 14절에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알았다는 말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는 알지만 아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아들이 없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들과 아버지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요한이 이 서신을 받는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사죄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실 뿐 아니라 강한 믿음으로 흉악한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생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일서 2 : 15 - 17)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세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1.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듣고 우리의 생활에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으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전면 부정하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도피주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계를 위해 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해야 합니다.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며 여유 있는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극심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세상에 있는 것들이며 우리는 이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많이 누리고 싶어하고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그의 생활에 하나님이 없이 세상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집을 짓는 일 등, 세상일에만 열중했을 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건만 자기 식구들 외에는 단 한 명도 귀를 기울이거나 경종으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눅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봅니다. 그는 열심히 일한 결과 많은 소출을 걷어 드렸습니다. 이 일은 축복 받을 일이요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길 계획만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2.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기 나오는 사랑하지 말라고 한 말의 단어가 헬라어로 쓰여진 원어를 보면 '아카페하지 말라'는 말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세 가지 의미로 나옵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사랑을,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그리고 아카페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나타날 때 사용됩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경계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세상에 쏟으면 '아버지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을 것이냐'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과 견주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물질과 연결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하신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로 삼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신약 시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십일조를 구별해서 헌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같은 생각은 더 무서운 죄악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할 일이지 왜 자기가 사용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것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한 것 하나 바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소유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정욕 때문에 그의 생활이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을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매달려 저기 인생을 걸면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건 정욕 가운데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마지막 때와 인류의 종말

(요한일서 2 : 18 - 23)

요한은 18절에서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언제를 마지막 때라고 부르며 또 인류의 종말과 이 마지막 때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때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에는 그들이 살아간 그 시기가 마지막 때인 것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마지막 때란 그 시기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시대적 구분에서 보는 시기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초림시부터 재림 때까지의 역사적 기간을 마지막 때, 곧 말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다른 하나는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서 바라보는 때입니다. 주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시대를 종말의 때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거나 시대나 재림의 시기를 잘못 판단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주 재림의 시대적인 시기를 말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때 그 때 경종 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을 소망으로 삼아야 할 일은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필요한 소망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모두 주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적인 자세가 항상 주의 재림에 있어야 하므로 재림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인 시기로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경종을 주시려는 의미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여러 가지 징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전시대를 말할 때에는 말세 또는 마지막 때란 말로 표현해 주고 징조적으로 주의 재림의 시기를 나타났을 때에는 종말이란 말로 표현하며 이 날을 인자의 날, 환난의 날, 그날, 롯의 때, 노아의 때 등으로 부릅니다.


2. 다니엘서의 신상에서 보여 준 인류의 종말

우리는 단2장에 나오는 신상을 통해서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한 인류의 역사를 크게 다섯 시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바벨론 시대인데 주전606부터 538년까지의 기간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 시대는 메데바사 시대로 주전538년부터 330년까지에 해당됩니다. 세 번째 시대는 헬라 시대인데 주전330년부터 146년까지의 시대에 해당됩니다. 네 번째는 로마 시대로 이 시대는 주전146년부터 동 로마가 무너지기까지의 1453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철과 진흙으로 된 발 시대인데 이 시대의 등장은 아직 미지수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시대는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열 뿔에 해당하는 나라인데 이 나라가 언제 등장할는지 성경에서 예언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나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단2:34절에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린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사건이 주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단9장에서 70이레로 다시 한번 종말에 관한 시대적 계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의 초림의 시대와 장차 한왕의 백성이 와서 예루살렘을 훼파하고 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는 사건을 등장시키므로 재림의 시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초림의 시기로부터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할 때까지의 역사적 시대를 마지막 때, 혹은 말세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인류의 종말은 이스라엘이 회복한 그 시점부터 열 뿔과 적 그리스도인 작은 뿔이 등장하고 일곱째 대접으로 이 지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 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런 역사적 시대 구분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1948년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이전까지의 시대를 말세, 마지막 때라고 부르며 1948년 이후의 세대를 인류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48년 이후의 세계는 언제 주의 재림이 있을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주 재림의 성경적 징조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신 말씀은 이런 우리의 시대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앞으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그 자에 의해 열 뿔이 형성되면 종말의 징조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에 의해 한 이레의 언약이 체결되고 두 증인에 의해 1260일간 예언의 사역이 시작되면 우리의 역사는 7년 환난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2천 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주의 재림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언제 오실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재림을 우리들의 신앙 생활의 소망으로 주셨기 때문에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며 그날을 준비하는 생활을 어느 시대에 살아가건 등한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시대나 그간 이 시대까지 살아온 성도들은 소망 중에만 살았을 뿐, 그 소망을 현실에서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종말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종말적 여러 징조들이 우리의 세대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바라보고 주 재림에 더욱

큰 소망을 두고 그날을 사모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0) 마지막 때와 적 그리스도

(요한일서 2 : 18 - 23)


적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적인 증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적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서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적 그리스도를 두 가지 면에서 보았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나타난다고 한 것과 그리고 적 그리스도는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요한이 증거하는 적 그리스도

요한은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류의 종말에 일어날 단일적인 적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자에 대해서 다니엘서에는 '작은 뿔'로 나왔고 살후2장에서는 '대적하는 자'로 나왔으며 예수님은 이 자에 대하여 마24:15절에서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13장에서는 이 자에 대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라고 했으며 계17:7절에서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번 적 그리스도는 단일 인격체인 적 그리스도로 인류의 종말에 한이레의 언약을 체결할 인물로서의 적그리스도요, 세계 인류에게 짐승의 표를 찍어 줄 적 그리스도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의해 사로잡혀 산채로 둘째 사망에 던져집니다. 이 적 그리스도는 요한의 때도 출현하지 않았고 지금의 우리의 이 세대에도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는 꼭 출현할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 시를 전후한 시기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살아가고 있었던 초대 교회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적 그리스도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적 그리스도는 복수로 나온 자들로 진짜 적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 그리스도를 닮은 적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들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참람된 말로 하나님을 훼방합니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는 자신을 신이라 하여 자기에게 신적 경배를 강요합니다.

역사상 이런 유의 통치자는 많았습니다. 우선 요한이 살아 있을 당시의 로마의 황제들이 이에 해당하는 자들입니다. 근래에는 구소련의 스탈린, 나치스 독일의 힛트러, 파시스트 이태리의 뭇소리니, 일본의 도죠 등 이런 역사적 인물들은 적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적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는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아마 그 당시 이런 적 그리스도의 대표 인물들의 등장으로 주의 재림의 소망을 더욱 굳건히 가지기 위해 이같은 교훈과 경종의 말씀을 주었을 것입니다.


2. 적 그리스도의 모습

적 그리스도의 등장은 최초로 다니엘서 7장에서 넷째 짐승으로 나옵니다. 이 자의 등장에 대하여 19절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심히 무섭고 그 이는 철이요 그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숴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다'고 했습니다. 계13:2절에서는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자가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는 모습이 계13장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자는 어떤 동기에서 죽게 되지만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 자에 의해 한 이레의 세계 평화조약이 체결하게 되어 이 자는 세계 인류들로부터 평화의 왕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 자에 의해 42개월간 세계가 통치되며 이 통치 기간에 모든 인류에게 짐승의 표를 주게 됩니다. 요한은 22절에서 적 그리스도의 사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 그리스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란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상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입니다. 많은 적 그리스도의 무리들도 이 사상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왔습니다. 요한은 이런 자에게 속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종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에 동조하여 진리를 떠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것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아직까지 우리는 각 시대에 걸쳐 많은 무리의 적 그리스도를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주의 재림을 앞두고 붉은 짐승의 모습으로 적 그리스도가 등장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적 그리스도를 이기기 위해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11) 마지막 때와 적 그리스도

(요한일서 2 : 24 - 29)


인류의 종말에는 사탄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 여러 가지로 성도들을 미혹할 터인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요한은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들은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곧 그리스도요 이 복음의 시작도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습니다.


1. 처음부터 들은 것

히1:1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처음부터 들은 말은 이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직접 계시로 전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저주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 처음부터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말씀만을 우리 마음에 거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미혹한다는 말은 이 말씀을 변질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으로 유혹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들의 유혹은 대개의 경우에 아들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들었다는 말은 사도들이 교회에 편지로나 글로 보내서 밝혀 준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요한 서신을 통해서 처음부터 말씀하시는 진리의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는 비결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처음부터 들은 것을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하면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1:14절 말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이 말씀을 모시면 아들을 모시는 결과가 되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와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머무른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계시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내 안이란 내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은 밭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내 마음의 밭에 심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다는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알아야 합니다. 25절에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일이 아무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허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에 굳게 서야 진리를 깨닫게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에 있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이같은 영생,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하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으로 믿음에 연약한 자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고 값진 것이 있다 고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보다 더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약속만 굳게 잡으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기름 부음이란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이 가질 수 있고 확인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4:26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는 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말씀을 깨닫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로 그리스도를 바로 알도록 지혜를 주시며 영적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것을 들으면 거역하게 하십니다.


결론 :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니 

성령께서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굳게 잡아 

믿음에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675

(16) 영을 분별하라(요한일서 4 : 1)

(17) 영이 하나님께 속한 증거(요한일서 4 : 2 - 3)

(18)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요한일서 4 : 4 - 6)

(1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 : 7 - 11)

(20)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세 가지 조건(요한일서 4 : 12 - 21)


(12)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신분

(요한일서 3 : 1 - 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1절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했습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은 사랑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려면 먼저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기 이전의 우리의 신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골1:21절에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그의 육체의 죽으심으로 화목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롬5:10절에서도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다'고 했습니다.

(2) 우리는 본질적으로 죽은 자로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엡2: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3)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죄인들이었습니다. 진노의 자녀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자들이란 뜻입니다. 골2:32절 말씀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했습니다.

(4) 우리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롬6:17절에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였다'고 우리의 신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란 죄의 지배를 받아 죄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신분을 말합니다. 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주셨는가'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더럽고 추한 신분을가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필시 놀라운 하나님의 동기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2.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정확한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도 인간의 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3: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작 우리가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이처럼'이란 말은 짧은 세 글자지만 이 우주의 공간보다 더 넓은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독생자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그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과의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그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같은 사랑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 귀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얻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너무나도 놀라게 하며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어떻게 무엇이라 감사하며 그 이름을 찬양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기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까지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우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의 영광과 권세와 놀라운 축복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1절에서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을 그을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귀하고 놀라운 것들을 축복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비밀로서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모릅니다.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도 모릅니다. 구원도 영생도 친국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부요한 사람들이요 가장 명예로운 사람들인데도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는 낙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경한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망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심이 되면 그대로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가 죄악된 이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 정결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인과 죄

(요한일서 3 : 4 - 9)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성경 해석에 큰 난점으로 여기고 있는 구절에 해당됩니다. 특히 6절에 나온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들은 죄도 없고 죄도 범할 수 없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나오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은 범죄치 않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풀이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법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1) 먼저 알 것은 우리가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별도로 분리하여 해석할 때에는 모순된 구절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의를 얻는 일에 있어서 요1:12절이나 롬10:9절, 롬3:23절 말씀을 보면 구원을 얻는 일에는 행함이나 의로움의 행실이 필요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행함이 믿음에 앞서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약2:14절, 26절, 23-25절 등, 아브라함과 라합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그 의를 얻은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1:4절에서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계21:1절에서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도다'고 했습니다. 겔18:4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범죄한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말씀을 육체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10:28절에서는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엄연히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느 한 구절을 딱 짤라 독립시켜 해석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대개 이단의 무리들이 이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찾아가면서 마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요5:39절에 있는 말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증거는 성경 어느 한 권, 한 구절이나 장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주님을 증거 하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적인 말씀에 비취어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2. 6절과 9절에 나타난 말씀

6절이나 9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죄를 지어서는 안되며 죄를 범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1:8절이나 10절 말씀은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서신에 이토록 모순된 말씀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회개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인이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법적 선언이고 실제적으로는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 말은 죄의 종이란 뜻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는 구원을 위한 회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생활에 나타난 죄에 대한 회개로 이 회개를 통해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의 소유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4절 이하에 나오는 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죄를 회개하여 버리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죄에 동참하므로 죄의 종의 자리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습니다.

이같은 사람들의 죄는 마귀에 속한 죄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 입을 수 없는 죄임으로 이런 죄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절과 8절 말씀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없이 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로 완전히 거룩한 의인으로 만들어 육신적으로도 죄를 범할 수 없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없이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죄도 용서해 주심으로 없이하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음에 8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를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은 십자가로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다시는 죄의 종의 멍에를 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처럼 거룩함을 따라야 하며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통회하는 겸손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14) 사랑과 의

(요한일서 3 : 10 - 16)

9절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의 죄와의 관계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죄는 죄의 자리에서 죄를 선호하여 계속적으로 범죄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요한 당시 교회에는 두 종류의 잘못된 죄악 관을 가진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자는 육신의 죄악성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가 되었으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므로 육신의 죄는 그 사람을 결코 속박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그 죄가 그 사람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젓번 주장은 교회에 외식적인 의를 가져왔고 후자의 경우는 교회 안에 죄를 들여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9절에서 그리스도인은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악을 범할 수 없으며 그런 죄악의 자리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손을 잡고 지난날처럼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지배 아래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요한은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의 속에 하나님의 씨가 거합니다. 이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들로 죄에서 벗어나 변화 받은 새로운 생활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범죄 하기를 즐겨 하거나 죄 가운데 거하는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에 나타난 의로 형제 사랑

요한은 10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어둔 가운데서 빛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하여 그 어둠에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까? 엡5:8-9절 말씀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고 어두움에 속한 일을 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빛의 열매를 모든 착함과 의로움으로 나타냈고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의로운 행실과 형제의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바울은 착함과 의로움을 말했고 요한은 의와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평소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생활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으로 인하여 의로움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이 평소에 살아가는 생활 양식인 것입니다.

요한은 12절에서 악한 자의 표본으로 가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악한 자에게 속한 자란 죄악의 종으로 마귀에 속한 자란 뜻입니다. 마귀에 속한 자의 행위는 악합니다. 악한 자는 의로운 자와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에 아우를 죽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형제에 대한 사랑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사랑의 사도로 이름 있는 요한은 15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여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치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16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새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마음으로 잘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증거가 형제에 대한 사랑만으로 온전한 것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구원의 증거 중에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 귀중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구원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빛된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 빛은 죄에서 떠나 의로운 생활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런 생활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5) 사랑의 실천

(요한일서 3 : 17 - 24)

사랑이란 말은 말하기는 쉽지만 그 열매를 맺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열매의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생활에 나타내야 비로소 사랑으로서의 가치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습니다. 16절 말씀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를 삼으신 것입니다.


1. 사랑의 생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저 말씀만으로 받아 드려서는 아무 의의가 없습니다. 증거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증거를 요구하시고 증거가 확실한 것만을 열매로 인정하시고 그 열매에 대한 보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18절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하므로 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세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만한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잘 명심해 두어야 합니다.

신15:7-11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가난한 형제들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일은 그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도와주는 일로 네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을 남겨 두니 그 사람을 도와주는 일로 너는 복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명심하여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용하면 더욱 큰 재물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지 않았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이미 그 형제의 궁핍함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색한 마음 때문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엔 감동이 옵니다. 도와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육신 안에서 꿈틀대는 정욕이 그런 마음을 막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2. 우리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요한은 21절로부터 우리가 이같은 사랑의 행실로 얻을 수 있는 기도의 응답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는 생활이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책망이 없는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그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생활은 먼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종의 생활인 것입니다. 순종의 생활이 없이는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심령으로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에 담대함이 없게 되고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일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그런 생활을 자기 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는 담대한 믿음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너무나도 당연한 생활의 방편입니다. 이 사랑의 생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지시고 생활함으로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6,190

(16) 영을 분별하라(요한일서 4 : 1)

(17) 영이 하나님께 속한 증거(요한일서 4 : 2 - 3)

(18)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요한일서 4 : 4 - 6)

(1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 : 7 - 11)

(20)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세 가지 조건(요한일서 4 : 12 - 21)


(16) 영을 분별하라

(요한일서 4 : 1)


1절에 나오는 본문 말씀은 영적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교훈과 경종이 되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1. 영을 시험하라

말세에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두 가지 영적 생활의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을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악한 영이 존재하며 그 영이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미혹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은 자신의 겉모습을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으면 그 덧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악한 영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벧전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삼키려는 대상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잠잘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으면 그 삽킬 자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마귀의 먹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잠자는 사람이란 시험에 들어 있는 사람, 말씀을 떠나서 생활하는 사람, 기도가 끊겨진 사람, 죄악 중에서 회개치 못하고 그 안에 눌러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미혹하는 방법도 영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그가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므로 잘 분간을 못하도록 혼돈 시킨다는 뜻입니다.

마7:22-23절을 보면 악령의 역사는 선지자의 너울을 쓰고 감행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는 말은 목자의 너울을 쓰고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머리를 쳐들고 나타날 거짓 선지자는 심지어 하늘에서 땅에 불을 내리는 엘리야의 기적도 행하며 우상을 만들어 그로 입을 벌려 말을 하게도 한다고 했습니다.


2.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다음에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영들의 역사를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가의 여부를 시험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영을 시험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과는 다른 의미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은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그 말씀이 과연 이뤄질 것인가를 의심하는 일을 말합니다. 동방교 교인이 청산가리를 마셨습니다. 성경에서 믿는 자는 어떤 독을 마셔도 해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사실이 그러한가 시험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시험하는 일은 자기 앞에서 역사 하는 영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영의 역사가 정말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인지 아니면 우리를 미혹하려고 역사 하는 미혹의 영의 역사인지 분별해서 악령의 역사면 물리치고 성령의 역사면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악령은 미혹의 영이기 때문에 자기 분장을 잘합니다. 계13장에는 거짓 선지자의 분장술이 나와 있습니다. 그 생김새는 새끼 양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있는 것같고 사랑의 모습도 보이며 목자다운 면모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라 '용의 말이더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그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것을 속일 수 있습니다. 이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거짓된 기적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병 고치는 권능을 행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모습으로 천사처럼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말이 아닙니다. 이들은 어떻게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변질시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뚜렷한 말씀을 의심하게 하여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이같은 사탄의 영의 역사를 어떻게 시험하는 것입니까?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비취어 성령의 이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악영의 미혹을 당하게 됩니다.


(17) 영이 하나님께 속한 증거

(요한일서 4 : 2 - 3)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영을 시험하는 방법에 대하여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처럼 영을 시험하는 이유는 세상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영으로 미혹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는 선지자 즉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미혹의 영으로 역사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기 위해서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께 속한 영

원래가 거짓 선지자나 거짓된 종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영을 시험하여 그들에게 나타나는 영의 소속을 정확하게 밝혀 내지 못하면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미혹은 거짓된 복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의 말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임을 말씀해 줍니다. 반면에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첫째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영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들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존재에 있어서, 있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존재하신 분이라면 그 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곧 하나님으로 존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으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 하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다는 주장은 악한 영에게서 나온 용의 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증거 해줍니다.

요1:1-3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 대표적 경우에 해당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게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말로 그리스도의 신성, 그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밝혀 준 말씀입니다.

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다는 말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며 또 그의 존재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오셨다는 말은 그런 분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요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사건에 대한 진상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리는 설자리가 없어지며 우리의 구원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영, 사탄의 역사는 이같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극력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의 교리는 이 비 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요한은 3절에서 적 그리스도의 영에 대하여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적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은 사탄의 영이란 뜻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인류의 종말에 사탄의 대리자로 등장하는 자이며 역대의 역사상 이런 류의 많은 하나님의 대적 자들이 출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해 왔습니다.


결론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로 영원히 존재하셨던 분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이 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분 예수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붙드는 것이요 영생을 위한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8)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요한일서 4 : 4 - 6)

우리는 영계의 비밀을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영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존재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 영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래가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만이 함께 하셔야 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탄이 등장한 후로 미혹의 영이 나타났습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 이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이 세상에 그들의 있을 자리를 펴고 인간을 대상으로 미혹하는 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미혹의 첫 대상은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 후 미혹의 영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인간들을 미혹해 왔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1. 벌써 있는 적 그리스도의 영

미혹의 영은 사탄의 영으로 이 영을 유혹의 영, 혹은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영의 활동하는 목적은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한 동기와 동일하며 그 방법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속여서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그것을 믿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진리의 영 인양 자기 존재를 위장합니다. 혹은 천사 인양 외모로 가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미혹의 영을 대처하지 않으면 그 미끼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그런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에 우리들이 이같은 미혹의 영에 역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나타할 때 악령이 그 틈을 타 스며드는 것입니다.

마13장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잠 잘 때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하셨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다음에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혹의 영은 대개의 경우, 진리에 대한 판단이 흐린 사람들, 가짜를 먹여도 진짜인 줄 알고 받아 먹는 사람들에게 손을 뻐치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이 역사 할 때는 주로 이적의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적을 사용하느냐 하면 이적은 진리를 버리게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마7장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 속에서 역사 하는 미혹의 영은 혹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쑥물을 전하기도 하며 혹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다 믿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가를 시험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세상에 속한 영

4절에서 그리스도인 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세상을 이긴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 할 수 있는 방법을 6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 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우리의 말을 듣는다'는 말은 사도들이 서신으로 혹은 말씀으로 증거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는 오직 사도들과 계시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증거 되었을 뿐 다른 세대에서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증거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근래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기도하는 종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종들에게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신비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로 이들의 결국을 살펴보면 이단으로 흐르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어 결국 자기 영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1: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란 말은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해 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미혹의 영을 좇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그대로 받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가리켜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굳게 설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 : 7 - 11)

흔히들 사도 요한을 가리켜 사랑의 사도라 부릅니다. 사랑의 메시지를 많이 전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그의 생애에 실천한 사도로 이름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8절 끝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 중간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또 나옵니다.


1.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란 말은 하나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강물에는 그 근원이 있듯이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끝없이 넓은 호수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그 호수에서 공급되는 수도관의 물줄기 같은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그 한없이 넓은 사랑의 물을 퍼서 너희끼리 서로 마시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따르지 않는 한없이 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 이 세상에 있는데 그것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바가 못되는 것은 사49:15절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나타난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양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원래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배반했으며 하나님을 계속 대적해 온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롬5장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보아도 참으로 황공무지한 사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같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삼으시려고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이 사랑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랑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그 사랑의 표현을 할만 한 낱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이처럼'이란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의 출발점이시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출발지로서의 대상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니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전혀 존재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원수지간으로 먼 거리에 있었던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사랑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랑이란 오직 하나님의 이같은 사랑에 그 바탕을 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타내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면 그것이 우리들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을 증거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존재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이시기에 그의 자녀들의 생활은 사랑에서 출발하고 사랑으로 교제하며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배워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성도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들입니다.


(20)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세 가지 조건

(요한일서 4 : 12 - 21)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 세상을 새롭게 살아가는 일에 기초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이런 토대 위에서 출발하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교회 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항상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영적 혼란은 왜 오는가?

그리스도인은 그 출발부터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활에 착오가 생기면 한평생 올바른 신앙 생활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1) 첫 번째 혼란은 자신의 정확한 영적 위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생활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생활에서부터 출발하며 생활을 떠나서는 신앙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활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은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편단심 자기 인생을 경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도 흔들리고 사업도 흔들리며 인생 그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2) 두 번째 혼란은 이런 사람은 소망이 있는 생애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실인즉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소망이 없는 삶은 그 마음의 평안도 즐거움도 감사도 모두 빼앗아 버립니다. 영적 삶이 아니라 육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 생활은 오래 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젖만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유치한 신앙 단계에서 한 발자국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차디 차거나 미지근하여 봉사나 헌신이나 전도나 교회의 유기적인 활동에서 빠져 버리고 오히려 분쟁이나 장애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하나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주안에 거하는 세 가지 증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승리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데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안에 거하는 증거의 조건을 세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우리의 생활에 나타내면 그런 일이 우리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우리가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죄를 사해 주셨으니 그 사랑으로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고 그 사랑으로 한 지체를 이루어 나가는 주안에서의 사랑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다음 두 번째의 증거는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를 요한은 16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 아들을 우리의 화목 제물로 보내신 그 놀라우신 사랑을 알고 믿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확실한 증거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다음 세 번째로 보여 준 증거는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16절 하 반절에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 바탕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사랑을 가진 사람을 보세요. 요14: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24절 말씀에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교회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생활과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순종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확신하고 신앙적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21) 사랑의 참 의미(요한일서 5 : 1 - 3)

◆ 밤중소리 11-06 | VIEW : 2,638

(21) 사랑의 참 의미(요한일서 5 : 1 - 3)

(22)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증거(요한일서 5 : 4 - 9)

(23)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요한일서 5 : 10 - 12)

(24) 성경이 말씀해 주는 두 가지 뜻(요한일서 5 : 13)

(25) 성경이 말씀해 주는 두 가지 뜻(요한일서 5 : 14 - 15)

(26) 사망에 이르는 죄(요한일서 5 : 16 - 17)

(27)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참 모습(요한일서 5 : 18 - 21)


(21) 사랑의 참 의미

(요한일서 5 : 1 - 3)

오늘 본문 1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사랑이 필요한가? 그리고 왜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이 나오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 일에 대하여 요1:12절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게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1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외에는 다른 방법으로는 영생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었다면 우리 또한 나를 내신 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신 이'란 말은 우리를 낳으신 분이란 뜻으로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8: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모든 자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마치 한 부모에게서 난 골육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낳은바 되어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이나 방법이 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 사랑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세상에 나타내셨고 그런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교제하는 성도들 간의 사랑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몇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1) 그 하나는 우리를 낳으신 이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란 말씀은 우리를 자녀로 낳으신 분이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분이 나를 영적으로 낳으신 아버지가 되시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 분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관계로 관심밖에 분이셨지만 이제는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전엔 그 분과 원수지간처럼 거리가 있었고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그 분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분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사랑하는 아내와 살아가고 있지만 아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마음에 정말로 거짓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인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도 없고 지켜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심을 받은 자녀들은 그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감사와 기쁨으로 지키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또 하나의 증거는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갖지 않습니다. 교인을 형제처럼 여기거나 사랑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한 형제가 되어 사랑의 교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감사함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2)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증거

(요한일서 5 : 4 - 9)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라고 말하고 증거 하는 이가 셋인데 '성령과 물과 피'라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말씀 안에 있는 뜻을 살펴보아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세상을 이기는 믿음

사도 요한은 4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이긴다고 말해 주고 있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요16:33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언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한 승리의 선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 세상에 대한 이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그 분이 내 생애를 주장하시고 내 안에서 나에게 이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생애에 찾아오는 환난으로 질병이나 기근이나 죽음의 위험이나 뿌리치기 어려운 죄의 유혹도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애에 부닥치면 우리는 실망하기도 하고 환난의 어려운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롬8:37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4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1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굉장한 능력이 따릅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인들로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동조하고 동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2. 물과 피로 임하신 자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는 이로 셋을 들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서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물과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이 물과 피는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된 말입니다. 그의 사명에 관한 것으로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세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다. 물로 베푸는 세례는 회개의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회개를 가져오신 분입니다. 이 회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로 복음은 이 회개로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복음을 외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회개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 회개는 모든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다음에 피로 임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죄 값을 치루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신 속죄 제물인 것입니다. 히9:22절에서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피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는 이 물과 피만이 아니요 성령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복음은 물과 피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성령께서 세상에 증거 하십니다. 요한은 이 셋이 합하여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란 말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명으로 함께 역사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확실히 간직

하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요한일서 5 : 10 - 1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증거가 있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증거는 육신적인 증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통용하는 지식이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닙니다. 이 증거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증거로써 진리를 받아 드리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는 영적 증거인 것입니다.


1. 자기 안에 있는 증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나 증거는 영적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증거에 대해 11절에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는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죽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할 때에 영생이란 말이 영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영생이란 우리들의 생명의 영원한 계속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적 생명과도 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죽을 육신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의 무덤에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씀은 무덤에 죽어 있는 성도들의 생명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것은 영생의 확실한 약속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2.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생

다른 또 한 가지 증거는 이 영생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이 주셔야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데 그 영생은 바로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증거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생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를 이 세상에 화목 제물올 보내신 것입니다.

요3: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36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골1:14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런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가 아니면 영생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분명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다른 가식이 필요 없고 어떤 지식이 따르지 않습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많은 기독교계의 지도층 인사들은 이런 말씀을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내 놓기를 꺼려합니다.

그렇게 하면 기독교는 배타적 종교로 지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과 손을 잡고 공동적인 사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일은 기독교는 생명과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구원과 생명이 오직 예수, 그 분만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예수가 없는 다른 어떤 종교에도 구원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거나 이 일에 양보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 생존 할 땅이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당히 이방인들의 종교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이 진리를 외면하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멸망과 심판뿐입니다.


결론 :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위축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믿음에 담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4) 성경이 말씀해 주는 두 가지 뜻

(요한일서 5 : 13)

13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 요한이 요한 일서를 쓴 동기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 대하여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증언은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이 그리스도인 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이 서신을 썼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이 죽지 아니하는 생명이요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데 이 생명은 부활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 영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육신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이 생명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날, 무덤에서 잠자는 육신과 결합하여 영생을 완성하게 되며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며 성령께서 이 사실을 우리 안에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존재라도 이 증거를 소멸해 버릴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13절 말씀은 성경 전체의 진리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증거

성경은 진리의 책이며 하나님의 입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증거를 통해서만이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죄인들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죄인들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에서 구원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해 주실 이 구세주에 대해서는 아담이 타락한 직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끊임없이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류의 구세주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약속하신 그 분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적으로 메시야가 태어날 선민이었었는데도 이 사실에 눈이 어두어 그만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인류들은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지도 않으려니와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며 그들 나름대로 다른 구세주를 만들어 영생의 약속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 계시라 불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이같은 사실을 밝히심으로 그의 택한 백성들로 성경을 가까이하게 하시고 그 약속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 중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 즉 영생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확실히 알려 줄 필요성을 느껴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은 영적 무지에서 온 것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생애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결코 원치 않는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증거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이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분명히 소유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일은 그 사람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은행 예금, 창고에 쌀)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거해 줍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 드리고 영생의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진리는 사라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사라져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고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매일 읽고 듣는 일을 통해서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영생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5) 성경이 말씀해 주는 두 가지 뜻

(요한일서 5 : 14 - 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날에 무엇이 우리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라는 존재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며 또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59:1절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가 그 얼굴을 가리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불신이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일이 불신입니다. 의심은 가능한 일도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약1:6,7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1. 누가 담대하냐?

그러면 누가 담대한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담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움직인다는 말은 운동력을 말

하는 것으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활동하느냐? 믿는 말씀대로 활동하여 그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우리들 마음에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만한 것이 없으면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일3:21-22말씀

을 보면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

게 받는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면 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22절에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의 기도는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 받는 줄로 아는 신앙은 담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그의 뜻대로 구하면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그 기도가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자기 뜻은 정욕적이며 육신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 응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담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약4:3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에 기도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같을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원하는 목적이 자신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발람의 기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외모로 보기에 그렇게 비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진실은 자신의 탐심을 이루기 위한 가증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에 의해 구한다는 뜻입니다. 약속은 하나의 언약 관계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있어서 거짓이 없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의 약속에 의한 조건을 갖추고 그 약속을 따라 구하면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토대 위에서 기도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담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취해 주시기 때문에 이런 터전 위에서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질 때, 그런 기도는 자연히 응답을 확신하게 되므로 담대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5절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이루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담대한 기도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 먼저 우리들이 기도를 하려고 하는 의지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따른 기도냐하는 것을 살펴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으면 담대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우리의 구하는 기도를 들으실줄을 알기 때문

에 하나님께 구한 그것을 또한 받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사망에 이르는 죄

(요한일서 5 : 16 - 17)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를 마감하면서 16절과 17절에서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놀라운 말씀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가 있지만 그 중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범위만 분명하다면 대단히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한편 두렵기도 한 말씀인 것입니다.


1. 사망에 이르는 죄란 무엇인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옛날 초대 교회 시대부터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 되어 온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회개하여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그 어떤 죄를 범해도 그리스도의 피로써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할 두 가지 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경우는 마12:31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히6:4절 이하에 나오는 죄로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비췸을 받은 자의 타락에서 온 죄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마도 이 두 가지 종류의 죄를 일컬어 오늘 본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 난해 구에는 반드시 그 난 해구를 해석해 주는 다른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두 종류의 죄악만이 이에 해당하는 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에 대한 해석도 구구합니다. 성령 훼방 죄는 무엇이며 '다시 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인 죄'는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이 구약 성경을 해석할 때에, 레18장이나 20장에서 말씀하신 근친 간음죄와 민15:30절에 나오는 '짐짓 범하는 죄'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고전11:30절에 나오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죄는 성찬에 잘못 참여 했을 때 받는 징계가 아니겠는가고 말하지만 이 경우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2. 사함을 받지 못할 죄의 세 가지 유형

그러면 여기서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한 죄에 대하여 

세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는 많은 영혼을 죽음의 길로 이끌어 온 배도자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요즘 말하자면 문선명이나 박태선 등과 같은 배도자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인 그 피 값에 대한 보응을 의당히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끝까지 강퍅하게 하시어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자들의 회개를 위해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회개할 길이 없는 패역한 자들의 경우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 전역에서 유행되는 사탄주의 자들의 모임이나 그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를 보면 고의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사탄을 높이며 사탄 앞에 경배합니다. 이들도 역시 마음에 화인을 맞아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죄가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정죄 받을 죄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3)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짐승의 표를 받는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계14:9절 이하에서 종말에 등장하는 적 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각인해 주는 짐승의 표는 그 표 자체가 멸망과 심판의 표식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사탄과 함께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가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요 그들을 위한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17절에서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정말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죄를 결코 범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그렇다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방심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됩니다. 사탄은 죄의 미끼로 유혹하여 타락시키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회개하는 심령으로 죄와 떨어진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순종하는 생활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구한 그것을 또한 받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참 모습

(요한일서 5 : 18 - 21)

오늘 본문 18절로 21절까지는 요한 일서의 결론으로 요한 사도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난해 구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죄 문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죄는 짐짓 범하는 죄로 고의적인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범죄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죄는 어떤 단서가 붙어 있지 않은 일반적인 범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모순된 말씀처럼 보이고 요한 자신이 요한 일서에서 증거한 여러 말씀과도 모순이 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일1:8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과 정면 충돌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8절 말씀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확실히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짤막한 한 서신 안에서 모순된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새로운 견지에서의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우리가 범죄치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육적 신분을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죄와 단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죄를 경계하고 회개하면서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범죄치 아니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그 신분을 판단할 때는 절대로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그 분은 범죄치 아니하실 뿐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같은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연합 관게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신분은 범죄치 이니하고 범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신분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하여 죄가 전혀 없는 의인으로 대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인정을 법적 인정이라고 말합니다.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법적으로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사죄의 은혜도 헛것이며 의롭다 함을 얻는 일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것도 이런 의미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롬6:1-7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하고 우리의 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음을 말씀해 주며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임으로 죄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영적 신분의 확신을 가지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여겨 다시는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음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치 아니하는 이유로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마귀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요10:27절에서 아무라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국적으로 그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분은 범죄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육신의 정욕에 굴복하여 죄 가운데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로운 생명의 능력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