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요한 2서 1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57


요한2서 1장

◆ 민병석 11-10 | VIEW : 4,582

(1)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요한2서 1:1-5)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요한2서 1:4-6)

(3)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한2서 1:7-13)


(1)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

(요한2서 1:1-5)

요한 2서는 사도 요한이 그의 노경에 요한 3서와 함께 에베소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요한은 이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진리를 대적하는 자를 정죄하고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끊을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 대한 사랑

요한은 1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편지를 받는 대상자가 부녀와 그의 자녀라고 했는데 이같은 표현은 글자 그대로 한 여인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서신 전체에 나타난 내용이 한 공동체에 주는 교훈으로 볼 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에 대한 사랑을 진리와 연관시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 지체들인 우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은 요한의 축도인데 요한은 이 축도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성부가 계획하시고 성자가 이루신 구원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공로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마음입니다. 죄인의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긍휼 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구원도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강물을 공급합니다. 이 강물이 우리의 심령에 넘칠 때, 우리의 마음에 참 평안이 깃들게 되고 생의 무한한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얻으려는 평강은 그 평강을 이루게 하는 대상이 세상적입니다. 재물이라든가 권세라든지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취해도 원하는 평강은 오지 않고 더 큰 욕심으로 인하여 불안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그의 생애를 주장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2. 은혜와 긍휼과 평안은 누구에게 임하는가?

그러면 이같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누구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3절 끝에서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만이 거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은혜도 없고 긍휼 하심도 없으며 평강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도 은혜도 없고 긍휼도 없으며 평강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사랑이 있어야 그곳에 이런 것들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이런 은혜를 사모하고 긍휼을 받기를 원하며 마음의 평강을 원해도 그런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 안에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시면 그 말씀 안에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깃들이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 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도의적인 감성적인 이성적인 육정적인 사랑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온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만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진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의 생애를 은혜와 긍휼과 평강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인도하

실 것입니다.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

(요한2서 1:4-6)

사도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1.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기쁨

하나님의 종들에게 교인들의 존재는 참으로 귀중한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종과 성도들을 양과 목자로 비유하신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그만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4:1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모하고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이 그의 기쁨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양 무리들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생각했습니다. 양 무리들의 선한 목자로 주님의 인정을 받으면 이런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양이 없으면 목자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자기 생의 전부로 여기고 기쁨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양 무리들의 목자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들을 잘 치는 목자에게 면류관을 주시는데 이 양 무리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4:15절에서 바울은 양 무리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영혼의 파수군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목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 대한 영혼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 무리들이 계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진리에 행하지 못하며 어그러진 길로 행하고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목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무리들이 잘 순종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로 인한 기쁨이나 보람이란 다른데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보람있는 목회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도들 자신이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할 태도에 대하여 히13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로 보람있고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입니다.


2. 진리와 사랑

사도 요한은 진리와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5절과 6절에서 간략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님께 던졌지만 주님은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중생 되지 못한 자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바로 이 사랑을 증거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에 구하는 바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율법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생소한 말 같지만 이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두 강령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풀이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요 복음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도 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쳐놓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결론 :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과 진리는 사랑이며 이 사랑의 생활이 계명을 지키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은사로 주신다고 고전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 은사를 주시지만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의 생활을 하기 위해 사랑을 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온전한 상을 얻으라

(요한2서 1:7-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급의 약속들이 있지만 가장 값진 상급은 하늘에 가서 받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요한은 8절에서 온전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권면이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한 2서에서 특별한 경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이단자를 멀리 할 것을 경종해 줍니다.


1.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

8절에서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삼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란 말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후1:6절 말씀에는 '지식에 절제'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뻗어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진리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요즘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신 신학이나 말씀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단들은 거의 절제가 없는 무질서의 신앙이나 지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삼가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요한은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교훈을 지나치면 안됩니다. 교훈을 지나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해야 할바를 말씀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규례로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도 없는 규례를 만들어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율법보다 더 중한 생활 지침으로 삼게 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차려 놓고 큰절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효도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교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지내치는 것입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지내치는 교훈이 나옵니다. 성경은 올바로 계시된 말씀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데서 지내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나 장래의 모든 일들이 계시 안에서 이미 나타내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계13장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용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노스틱 파라고 일컽는 이단이 머리를 들고 성경을 인간의 철학적 지혜로 해석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들의 주장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일을 부인한 것입니다.


2.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명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육신적인 원수가 아니라 영적인 원수들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우리의 생명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10절에서 이르기를 '그를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집에 들이지 말라는 뜻은 그들을 환영하거나 영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는 말씀은 이들과 교제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제는 어느 한편이 교제하는 사람의 사상적 감염을 받게 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악한 사상으로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려는 그들과의 교제는 자살 행위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들과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인사란 하나의 축복인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과의 대화까지도 단절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단자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은 절대로 삼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성경 토론에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해도 결코 진리로 돌이킬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히 성경을 배웠으며 거짓된 방법으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에 토론에 말려 들어가 이단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결론 : 진리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생활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훈을 지내치면 안됩니다. 

이단자들에게 주의 사랑을 나눠주면 안됩니다.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로 이 말씀을 잘 명심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