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베드로후서 1-3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45


베드로후서 1장 (1 - 7)

◆ 밤중소리 02-01 | VIEW : 478


(1) 시몬 베드로

(베드로후서 1:1-2)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 전서를 보낸 후 두 번째로 보낸 편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전서에서 이미 고난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후서에서는 주로 교회 내부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를 종말론적 견지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낸 둘째 서신인 이 베드로 후서는 그의 임종에 가까웠을 때에 썼으며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시몬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수제자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갈대란 뜻으로 그가 거듭나기 이전에 부르던 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인데 이 이름은 그의 유명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님이 직접 부쳐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은 그의 이름이라기보다 교회의 신앙적 초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몬과 베드로, 이 두 이름은 마치 야곱과 이스라엘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교만과 거짓된 성품이 얍복강에서의 기도로 무너지고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주님이 주신 이름으로 하나는 심적 변화의 결과에서 온 이름이요, 하나는 영적 진리의 깨달음에서 온 이름입니다.

2.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자리에 반드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목전에서 그 이름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래도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나 신뢰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늘 제자들 가운데서 지도적 입장에 서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에 제일 먼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이 주님에 대한 메시야 관이 무너지자 모두 주님 곁을 떠날 때,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네게로 가오리이까’하면서 주님의 힘이 되게 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죽어도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한 제자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주님을 잡으러 무리가 몰려 왔을 때, 다른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베드로는 용감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 제자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급한 탓으로 실수는 했지만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영적 진리를 잘 깨닫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지금도 역대 교회의 모범적 신앙 고백으로 우리의 설교에 인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기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는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를 타시고 전도하신 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 고기가 많이 잡히자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고백했으며 주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후에도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는 회개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목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물으심과 함께 내 양을 먹이라는 목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남은 생애를 살아가다가 종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기 때문임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며 우리의 소망은 빈 껍데기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후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이런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베드로와 함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을 받는 일에는 지위의 상하도 없고 신분의 구별도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감사하면서 주님을 아는 주님께 대한 지식으로 베드로가 축원한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받은 생명과 경건

(베드로후서 1:1-3)

오늘 본문 3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속한 생명과 경건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가진 의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베드로가 밝힌 이 말씀은 롬5:17-19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우리에게 정죄가 오고, 사망이 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이 오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죄의 전가’ 또는 ‘의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전가란 말은 그대로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고 그 죄 값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인이 되고 그의 대속의 은혜로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 즉시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자가 되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그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하나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님이 요15:5절에 포도나무의 비유로써 이런 신비한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연합 관계에 있습니다. 떨어지면 살수가 없으며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얻게 된 생명과 경건은 주님의 영광과 덕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영광에 관한 것이며 경건은 덕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하늘의 생명입니다. 주님의 이 신비한 생명을 사도 요한은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증거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이 생명을 소유라고 계셨으며 이 사실이 부활로 확인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같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연합에서 오는 그리스도인의 소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며 이런 신기한 일은 그의 능력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이런 신비한 연합 관계에 대하여 마치 두 몸이 하나를 이루는 부부간의 신비한 결합과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전6:15절에서 바울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지체와 몸은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의 생명도 그의 의도 그의 경건도 그의 영광도 그의 기업도 모두 우리의 소유인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딤전2:11-12절에서 이 일에 대하여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기업에 대하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은 이런 연합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 들만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운 시련과 시험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경건에 속한 모든 것도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의가 내 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경건도 내 경건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분의 거룩하심, 그의 겸손하심, 그의 온유하심이 모두 내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는 그런 부요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론 : 이런 일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견고히 붙드시고 그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베드로후서 1:4-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본문 4절에서 이르시기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1.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첫째로 주안에서 우리가 받아 누릴 영광의 소망은 보배로운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보배란 표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 들에게 가장 존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처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신 것입니까? 벧전1:18-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배로운 약속을 어떻게 여기며 어떻게 간수하고 있는 것입니까?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귀한 보배처럼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잡혀서 내게 실질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 어떤 고난의 대가를 치른다 해도 바꿀 수 없을 만치 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장에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의 지극히 작은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처럼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뜻이 변함이 없으실 것을 스스로 맹세하신 약속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도 말할 수 없어 큰 약속이 되십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은 누구와도 이처럼 큰 약속을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 아들 독생자를 주시며 그 아들을 통해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약속이신데 이 약속을 변치 않게 하시려고 맹세로 하셨습니다. 이 약속으로 우리는 우리 죄의 사유함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의심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 때문에 큰 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이 약속을 받은 자의 의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런 위대하고 놀라운 약속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 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신의 성품이란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런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은 심령의 변화를 받아야 하고 생활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육신으로 심어 온 우리의 생활을 영으로 심는 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두었던 소망을 하늘의 소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런 약속을 받았다는 우리의 생활이 옛날 그대로 육신의 정욕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이처럼 큰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며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목적과 배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을 주신 목적이 우리들이 옛날의 생활대로 살아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5절 이하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덕을 쌓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광신자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다음에 덕에 지식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덕에는 지식이 따라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덕은 덕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식에 절제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이 되기 때문에 이런 지식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절제에 인내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인 절제는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제 생활을 하려면 인내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에 경건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인내에는 경솔함이 없어야 합니다. 천박함도 없어야 합니다. 경건히 따르는 인내여야 합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을 겉으로 보이는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안됩니다. 그리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의 참된 모습입니다. 열매를 맺는 생활을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케 하시려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까?

(4)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베드로후서 1:8-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롭고 큰 약속을 주신 것은 우리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케 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1. 원시적 그리스도인과 근시적 그리스도인

베드로는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기 않게 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흡족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활에 어떤 일이 따르느냐에 대해 베드로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적인 썩어 질 것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에 이미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잘못되게 사용하면 안됩니다. 이적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사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를 사모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지식을 얻게 되고 그 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그 은혜 가운데서 믿음으로 성장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의 생활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자가 되기 않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열매는 아무나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으로 인한 세상의 썩어 질 것을 피하는 생활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원래가 소경은 눈이 감겨졌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소경된 그리스도인 들은 원시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우리가 갈 천국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소경이 되어 소망적인 생활을 못하고 땅의 것을 찾는 근시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는 생활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잊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사실을 잊어 버린 사람은 소경이 되어 원시치 못하는 것입니다.

2.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10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소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반드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택하심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예정을 말합니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이 두 가지로 보이지만 실인즉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양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 대한 부르심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말씀이 롬8:30절에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배롭고 큰 약속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약속으로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흔들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떤 고난이 와도 그 고난으로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11절에서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너희에게 넉넉히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구원도 엄격히 말하면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겨우 받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넉넉히 얻는 구원입니다.

결론 : 우리가 이 같은 생활을 하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넉넉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겨우 얻는 구원도 있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요 상급이 전혀 없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힘쓰는 생활을 통해서 넉넉히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항상 생각하라

(베드로후서 1:12-18)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써 보낼 때 이미 그가 주님 앞에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았으려니와 그가 어떤 죽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에서 그는 ‘내가 이 장막을 벗어날 날이 임박한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글을 써 보낸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서 떠난 후에라도 그들이 베드로가 전한 권면을 생각나게 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보낸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진리에 선 자의 자세

베드로 사도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가 이미 베드로가 전한 교훈을 알고 있으며 진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12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들은 아무리 교훈의 말씀을 듣고 진리에 서 있다고 하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시와 때를 가지지 않고 삼킬 자를 찾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훈과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생각하고 따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같은 노파심에서 베드로가 이 서신을 보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이나 진리의 가르침은 언제나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교훈도 징계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잠9:7절에서 ‘거만한 자를 징계하지 말라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힌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며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요15:2절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를 잘 깨닫고 우리의 믿음이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노력하고 힘써도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진리가 없는 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는 집회 때마다 덕스럽지 못한 말하기로 유명한데 그 집회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 들은 이번에도 욕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잡소리나 좋아하고 충격적인 욕설이나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잘못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가 10년, 20년이 넘었어도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예수가 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는지, 부활의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이 그냥 그럭저럭 이래저래 믿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 들이 왜 그리 은사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이는 은사를 좋아하는데 병 고치는 은사라든지 예언의 은사라든가 방언의 은사라든가 여하튼 은사를 받으면 다 된 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구원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2. 주의 강림과 그의 능력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베드로 사도가 전한 복음은 16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알게 한’ 일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증거는 공교히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은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원어적으로 볼 때 ‘파루시아’란 말은 미래적인 단어로 주의 재림을 가리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에 관한 여러 가지 징조나 심판에 있어서 사실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공교히 꾸민 이야기로 돌려 그것을 우화적으로 해석합니다. 벧후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재림 시에 있을 여러 가지 사건들은 사도들이 받은 분명한 계시로 말씀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관한 여러 계시를 상징적 사건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변화 산에서의 주님의 영광을 모습을 증거 하면서 주의 강림하시는 일과 그의 능력에 대하여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딤후3: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격려하기를 항상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 진리의 터전 위에 믿음을 쌓은 성도라도 항상 생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고 은혜의 터전 위에 믿음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성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6) 더 확실한 예언

(베드로후서 1:16-21)

베드로 사도는 1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로 여길 것입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미 신학자들 간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의 대속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다시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심, 이런 것들은 성령의 가르침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망하게 들릴 수 있는 일들입니다.

1.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일들이 결코 자신이나 사도들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계2장과 3장에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마쳐질 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말씀해 주심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이는 진리의 말씀을 공교한 이야기로 돌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는 영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으려니와 믿을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5:2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6: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일에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들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듣고 깨닫고 믿는 일은 허락된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잃은 양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13:10절-12절에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드린 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주신 본문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남달리 출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천국의 놀라운 비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가 내세운 두 가지 증거

베드로는 이 진리를 증거 하는 일에 두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도란 주님과 생활을 함께 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15:27절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자격자를 말씀하심에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 무죄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주님께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 받으신 모습을 친히 목격했으며 주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이상 확실한 증거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확실한 일에 기초를 둔 증거이므로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베드로는 19절에서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예언이라고 한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곧 기록된 성경을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은 베드로가 친히 변화산에서 본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이 같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하여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어두움이란 죄악 세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하여 요1:5절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등불은 분명히 세상에 비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비취어지는 이 등불은 성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속에 비취어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9절 종반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샛별이란 다시 오시는 재림 주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기까지 너희가 이런 예언에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주의한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연구하고 살피고 읽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 있습니까? 이 빛을 따라 어두움이 거치고 날이 새어 주님이 오시기까지 여러분의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예언의 풀이

(베드로후서 1:20-21)

20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예언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1. 예언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언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언은 사람의 말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사람이 생각한 것을 자기 이성이나 자기 판단에 따라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 중에도 유명한 명언이나 금언이 있어서 소위 ‘어록’이라고 하여 역사에 길이 남기도 하며 민족적인 교훈으로 길이 보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무리 유명 인사나 지도층 인사가 한 말이나 글이라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런 일과는 상관이 없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2)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글이나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이란 언제나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세적인 일이요 물질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영적 일이요 내세적인 일이기 때문에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3) 다음에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야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의 감동은 대개의 경우, 선지자의 입술에 말씀을 주심으로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자기 입으로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겔7:1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하심은 사도들의 심령 속에 영감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오묘하신 진리를 깨닫거나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벧전1:24절에서 이르시기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개 됨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당신의 모든 말씀을 완전히 나타내셨습니다. 계1:2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3. 예언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예언의 풀이는 세상 학문의 풀이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사로이 푼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인간의 이성으로 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이성적인 지식으로나 명철로 깨달을 수 있거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성경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이하려는 여러 가지 신학적 방법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결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무오한 말씀으로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이성적인 신화는 빼야 한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주장인 것입니다.

(2) 성경을 사탄의 간교한 지혜로 풀이하는 일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구인회란 자칭 예수는 계21장에 나오는 천국의 성곽의 척량이 144규빗인 것을 1+4+4 = 9란 방식으로 해석하여 구씨인 자기가 천국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3) 종말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도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할 것입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도리가 여기서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예언의 해석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 올바른 성경 해석은 올바른 설교와 연결이 됩니다. 특히 주의 종들은 성경을 바로 배우며 연구해야 하며 양 무리들은 그 말씀을 잘 분별하며 또 그 말씀을 영적으로 잘 받아 드려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8 - 12)

◆ 밤중소리 02-01 | VIEW : 771


(8) 거짓 선생들이 하는 일

(베드로후서 2:1-3)

베드로 사도가 1절에서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대로 교회에는 언제든지 거짓 선생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이란 말은 거짓된 교훈을 진리인 양 가장해서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1. 거짓 선지자의 등장

거짓 선지자는 그 등장하는 곳이 두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민간에 일어난 거짓 선지자는 지금의 통일교라든가 몰몬교 혹은 안식교 등 그들 나름대로의 한 단체를 이루어 활동하는 무리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교회 안에 직접 침투하여 교회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혼란을 주며 영적 생명을 노략질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너울을 썼건 그리고 어떤 정당성을 내세우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의 정체를 좀처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한결같이 천사의 너울을 쓰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식별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7:22-23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열매는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대한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

1절과 2절에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몇 가지 일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이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교회로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멸망케 한다는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이단은 어떤 미사여구로 우리를 유혹해도 그 그물에 걸리면 영적 생명을 죽이게 됩니다. 이 같은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란 말은 잘못된 진리를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 구원에 관한 잘못된 진리 등이 이런 유에 속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토를 답니다. 보편적인 진리를 가리우고 어느 한 곳에 있는 편파적인 말씀을 체계화시켜 그것을 진리인 양 가르칩니다.

사탄이 교회에서 하는 일은 가라지를 심는 일입니다. 이단의 씨가 자라면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에게 충성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이단이란 언제나 진리와 비슷하지만 진리와 엄연히 구분됩니다. 이단이란 진리의 가짜 상품입니다. 시장에서도 가짜 상품이 진짜를 뺨치는 것처럼 이단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입니다.

이단자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떨어뜨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다음에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특성은 호색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방법이 호색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탐심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은 말을 가지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며 양무리들을 그들의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이나 거젓된 교훈의 특성은 교묘한 헌금 방법과 수단에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산을 늑탈하고 패가망신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필연코 멸망할 것입니다. 종말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식별치 못하면 그들의 거짓된 이단에 넘어가 생명을 잃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경성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기 때문에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9) 불의를 용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2:4-9)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절 말씀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범죄한 천사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사들도 범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천사들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1. 범죄한 천사들의 심판

오늘 주신 말씀에는 범죄한 천사들의 이야기만 나올 뿐 어떤 천사들이 어떤 범죄 행위를 했느냐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씀이 유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도모하는 일에 마귀 편에 가담한 자들이며 이 자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겔28:13절 이하에는 사탄이 처음 창조함을 받았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자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내린 심판이 두로 왕을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 14절에서 ‘그룹’이란 명칭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계4장에 나오는 네 생물에 대하여 이들의 이름이 겔10:14절에서 그룹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지옥은 둘째 사망의 장소인 지옥인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자리인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을 때까지 가두어 둘 자리로 무저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사탄과 그의 사자들의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로 둘째 사람의 장소인 지옥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25:41절에서 예수님은 백보좌 심판을 거친 악인들의 심판의 장소로 지옥을 지목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마귀가 들어갈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는 영영한 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심판

베드로 사도는 범죄한 하늘의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노아와 소돔과 고모라 새대의 불의를 좇은 사람들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5절에서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멸망치 않게 하시려고 범죄가 세상에 관용할 때에도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회개하게 하셨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길을 외면하고 계속 범죄의 길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120여 년간 의를 전파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팔고 사는 세속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죄인은 어느 시대에 살아가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의 날,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엄중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6절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킨 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망시키신 것을 마지막 날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의 홍수로 다시는 이 땅위에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물보다 더 두려운 불의 심판이 될 것임을 벧후 3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불의 심판은 바로 그 불의 심판의 본보기이심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심판하시는 그 가운데서 의로운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의로운 자들을 불의한 자와 함께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 심판에서 건져 주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역사를 이루시는데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그대로 두어 심판 날 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심판에 이르도록 심판의 날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아들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0) 거짓 선지자의 죄

(베드로후서 2:10-14)

본문 10절부터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죄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광 있는 자란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그 분을 훼방하는 일에 방자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말은 진리의 말씀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진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유익을 꾀하는 일에 적용하는 무리들은 모두 거짓 선생의 무리 중에 속한 자들입니다.

1.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는 자들

거짓 선생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리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2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이 되는 유명한 목사님이 1972년4월1일자 한국일보에 부활주일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는데 부활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글을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우리는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에 집착하여 오늘의 과제를 잃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앙적인 문제로 결론을 내린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활을 우리가 받아 드려 우리 생활에 반영시키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거짓 선생들은 요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읽지 않고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의 신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오역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하나의 신이었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은연중에 천사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거짓 선생이나 가짜 예수나 자칭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지 오래지만 박태선이란 자는 자신을 영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성삼위의 한 위인 성령님임을 자처했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가짜 하나님으로 통일교의 문선명이가 있습니다. 이 자의 원 이름은 문용명입니다. 용 용자를 풀이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것을 선명으로 바꿨는데 선이란 이름 글자를 영어로 발음하면 태양이란 의미가 되고 명자는 밝을 명으로 태양의 빛을 상징시키는 인류의 메시야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적 구원만 이루었고 육적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문선명이가 그 남은 구원의 사역, 육체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생들의 도덕적 행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세 가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담대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집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떨지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연락이란 사치와 방탕함과 음란한 행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모든 악한 행실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결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를 당한다는 말은 불의의 보응을 반드시 받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에 대하여 정죄하기를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 거짓된 것으로 유혹하며 그리스도인 들을 미혹의 길로 유인하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은 허락을 받고 미혹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진리를 굳게 잡고 정신을 바싹 차리지 못하면 이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존재 가치는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을 삼가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위에 굳게 서서 비 진리와 싸우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1) 발람의 길을 걷는 거짓 선지자

(베드로후서 2:15-19)

거짓 선생들이 걸어가는 길은 발람의 길을 좇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15절에서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보을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고 했습니다. 발람이란 인물은 성경에 기록된 거짓 선지자 중 표본 인물입니다. 계2:14절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발람이란 선지자는 어떻게 하여 거짓 선지자로 타락한 것입니까? 15절 끝에서 ‘그는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발람의 길

발람이란 인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모압 지방 브돌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의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이 처음부터 거짓 선지자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고 발람은 발락 왕의 미혹을 받기 이전까지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발람이 모압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이 그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모압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각가지 이적의 소문,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이적, 적군들을 만나는 대로 섬멸한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발락 왕은 무력으로는 이스라엘을 무찌를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발란의 기도를 빌려 이스라엘을 저주하므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발람의 활동을 지켜보았던 발락 왕은 발람이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아 왔기 때문에 발람의 기도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왕은 모압 땅 장로들을 불러 발람에게 줄 예물을 준비케 하여 발람을 찾아가게 했습니다. ‘와서 한번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발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발락 왕이 보낸 그 많은 보화와 그에게 준다는 명예에 미혹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거짓된 기도를 형식적으로 드리고 결국은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재물에 미혹된 발람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악한 꾀로 이스라엘을 타락케 할 방법을 발락 왕에게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음란으로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타락케 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아 죽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같은 발람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거짓된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 발람의 길을 걷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의 결국

이들의 결국에 대하여 1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배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샘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은 생명의 생수인데 그들의 우물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있고 생명을 죽이는 쑥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할는지 모르지만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한번 태풍이 불어오면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곳은 사탄과 더불어 들어가야 할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인 지옥을 의미합니다.

18절에서는 이들 거짓 선생들이 미혹하는 거짓된 복음이 나옵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유혹은 모두 허탄한 것 뿐입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전혀 실현성이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이들의 유혹의 방법으로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19절에서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고 약속하는 자유란 이단 교리에 얽어매는 또 하나의 죄의 사슬입니다. 이 사슬에 얽매이게 하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멸망의 종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멸망의 종들이 주는 자유란 함께 멸망을 받는 자유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에는 죄의 종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에게 진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으며 그 죄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그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값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죄를 이기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이긴 자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들 거짓 선생들의 미혹을 받아 그들의 교훈을 따른다면 우리는 다시 지는 자에 속하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믿음으로 이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12) 의의 도를 안 후에 범하는 죄

(베드로후서 2:20-22)

본문 20절과 21절 말씀은 대단히 심각한 말씀으로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이 되기도 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라고 말한 대상은 거짓 선생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미 거짓 진리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1. 처음보다 더 심한 나중 형편

이 말씀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저희가’라고 하는 특정한 대상자를 둔 것으로 이들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란 말씀은 거짓 선생들이나 이들에게 미혹 받은 자들의 미혹 받기 이전의 처음 신앙 상태를 가리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적 열매에 대해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라 더러움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회개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히6:4-8절에 나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겉으로 살펴보면 이들은 마치 중생한 자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과 구원과 심판에 관련된 연관 구절을 연결시켜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에 이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마귀에게도 있습니다. 진리에 서지 아니한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처음 얼마간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힘썼습니다. 물론 중생하기 이전입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아도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과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며 진리의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중생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의 도를 안 후에 범한 죄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생에 이르기 이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인 것입니다. 얽매었다는 말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 받아 죄의 종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의 생명이 없이 양심의 감동이나 교육의 영향으로 출발한 신앙 생활은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진실한 회개의 결실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원했을는지는 모르지만 원한다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부자 청년의 경우,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그의 재물이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그의 길을 막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종은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심하다는 말은 그 죄가 더 중하다, 그 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신앙촌의 박태선은 남대문 교회 장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편이 점점 나빠저 그의 임종시에는 정신병자처럼 예수님을 자기 제자라고 망언을 하고 욕설을 퍼붓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기 죄에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배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더러움에 대하여 22절에서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고 했습니다. 개는 더러운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찾아가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어 진리를 버리고 이단을 좇는 일은 마치 개처럼 지난날의 행실을 다시 행하는 일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중국의 어느 임금이 돼지를 방안에서 깨끗하게 키우고 좋은 옷을 만들어 입히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꾸몄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돼지를 데리고 밖에 나갔는데 더러운 시궁창을 지나가니 얼른 그 시궁창을 찾아 들어가 몸을 둥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의 무리들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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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

(베드로후서 3:1-7)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 구약에 기록한 거룩한 선지자들의 예언과 사도들을 통해 주님이 명령하신 바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종말에 교회에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 주의 재림을 부인할 것이란 사실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이 같은 거짓말에 속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기롱한다는 말은 희롱한다는 뜻으로 진실한 것인데도 그것을 실없는 농으로 여겨 오히려 비웃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기롱하는 것인가? 4절에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에 대해 너희는 그것을 믿느냐 이 어리석은 자들아 하면서 조롱하며 비웃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의 등장

베드로 사도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무엇을 알라고 한 것입니까?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온다고 했습니다. 온다고 한 말은 교회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는 기롱하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을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이런 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에 나타나 미혹할 것이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거짓 선생들은 그 증거로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온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거늘,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태로 인류의 역사가 계속하겠거늘 주의 다시 오시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에 대해서 마24:48절에서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란 주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강단에서는 어떤 때는 주의 다시 오심을 설교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설교는 신부를 단장시키는 메시지가 아니라 성도들로 깊은 잠을 재우는 자장가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29:10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경종하시기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으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주의 재림을 믿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있겠느냐는 탄식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실 기간 동안, 주의 재림에 관한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셨으며 주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경종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주 재림의 메시지를 복음의 주축으로 삼아 성도들을 가르치며 그날에 소망을 갖게 하며 그날을 준비시키는 생활로 인도해야 하거늘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주의 재림을 무시하고 엉뚱한 메시지로 성도들로 세속적인 생활에 정착하게 하고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하는 기롱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불로 임하는 마지마 심판

그런데 이런 자들의 관심은 어디 두고 있는 것인가? 3절에서 이르기를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한다’고 했습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는 목회자에게는 재림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주의 재림 시 자신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피하고 성도들로 주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들 거짓 선생들에 대해 노아의 때에 물의 심판을 잊으려 하는 불 신앙적인 태도임을 책망하고 노아의 때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주의 재림의 날에는 하늘과 땅이 불사른바 될 것이라고 경종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홍수 심판으로 땅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을 불의 심판은 하늘과 땅이 동시에 불로 사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6:12절에서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일곱째 대접 심판에 내리시는 불의 심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불의 심판을 위해 이 불을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보존해 두신 것입니까? 이 땅 깊숙한 지하에는 지금도 이 불꽃이 이글이글 타면서 이 지구를 불태울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늘과 땅이 홍수 심판과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이 지구가 지금가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4)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3:8-9)

베드로 사도는 8절에서 하나님의 날 수에 대하여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천년을 하루로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계산하고 구애받는 시간과 공간에 인간과 같은 구애를 받으실 분이 아니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하루와 천년

인간 사회에서는 하루와 천년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계산으로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입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24시간의 하루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도 24시간의 하루의 제약을 받으신 가운데 그의 창조를 이루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루가 인간의 계산으로는 24시간의 시간에 얽매인 시간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24시간의 하루가 인간이 계산하는 천년 아니 더 많은 시간으로도 활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은 24시간의 시간적인 하루에 얽매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시90:4절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7천년 전에 창조하셨다고 해도 인간의 과학적 판단이나 증거로는 지구의 생성이 수 10억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되는 하루 동안에 10억 년의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이 사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임하실 것이라고 하는 주의 재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일에 대하여 엄청난 시기가 지낸 는 데도 곧 오시지 않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롱하는 자가 와서 ‘주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기롱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신다면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비록 2천년이 넘는다 해도 한 밤중의 한 경점 만도 못한 짧은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의 기간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 긴 기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범사에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이유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과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더뎌도 그것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기간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소요되는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약속한 약속이 늦게 요셉에게 이뤄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애굽에서 갖가지 시험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 꿈에 보여주신 약속을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들 이삭에 대한 약속을 25년만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왜 늦어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그에게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이미 아시고 섭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작정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인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아직 경성하여 신부의 단장을 준비치 못한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이 한 명도 그의 생명에 이르는 일에 낙오됨이 없게 하시기 위해 길이 참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는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한계의 끝이옵니다. 그러므로 안일한 가운데 정욕적으로 살아가다가 심판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님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는 일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에도 인내함으로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15) 도적 같이 임할 주의 날

(베드로후서 3:10-13)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게 하시려고 천년이 하루 같이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작정하신 심판의 날이 이르면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1. 주의 날

이 날을 베드로 사도는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란 주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고 인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 주의 날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눅21:34-36절에서 예수님은 이 시기를 ‘이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12:1-3절에서 다니엘은 ‘그 때’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습1:18절에서 이 날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날이 언제 오느냐에 대해서는 그 년, 월, 일, 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다만 징조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시기를 연구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날짜로 알려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나 징조적 시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에 담긴 뜻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적 같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24:43절에서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도적은 밤에 나타납니다. 밤은 사람들이 잠을 잘 때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밤중에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도적이 오니 깨어 방비하라는 경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살전5: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 되면 주님은 우리에게 도적 같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낮의 아들, 빛의 아들로서의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하여 마24장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준비하며 마지 할 것입니까? 마24장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오실 줄로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눅21장에서는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눅12장에서는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여러 말씀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시는 재림의 날은 아무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맞이한다고 했어요? 준비한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의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10절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은 간략하지만 사건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입니다.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계16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 심판 중에 마지막 대접인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이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심판의 모습은 이 지구 자체가 활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때 땅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불이 올라오기 때문에 땅과 그 중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 지구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하고 일이 이렇게 풀어질 터이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부의 단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은 이처럼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을 받지만 우리는 그의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

(16)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후서 3:14)

오늘 본문 14절에는 주의 날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의 자격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은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이 같은 주의 날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이란 말씀입니다.

1.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힘쓰라

그러면 이런 주의 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의 날을 사모할진대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쓰는 일이 없이는 절대로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 즐거움으로 맞이하는 그런 만남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까?

(1) 불법한 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7:23절에서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2) 악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24:48절 이하에서 악한 종들에게 내려질 징계에 대하여 엄히 경종 하셨습니다.

(3) 미련한 처녀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10절에서 이미 닫혀진 문 앞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4)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달란트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 종들입니다.

(5) 염소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31절 이하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왼편에서 지옥에 가기를 기다리는 염소의 무리 중에 낄 것입니다.

(6) 어리석은 부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12:18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셨습니다.

(7) 마음이 둔한 자로 그날에 주님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21:34절에서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8)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자리에 들어간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마22:11절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무리는 내어쫓았습니다.

마7:21절에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으로 삼는 자마다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어떤 일에 힘써야 하난?

그러면 어떤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점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점이란 더러움을 뜻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에 더러움이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약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세속적 생활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생애를 함께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의 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빌2:15절에서 세상에서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빛을 나타내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내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빛을 세상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봄철에 씨를 뿌리고 온 여름철 내내 그것을 가꾸고 손질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들이 힘씀이 없이 어찌 천국을 찾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힘쓰는 이가 들어간다고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소망이 크면 클수록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을 언제나 기회로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입니다. 순종을 시작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기회입니다. 지금이란 시간은 기회로 삼으면 늦지 않고 기회로 삼지 않으면 늦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그날을 소망으로 삼으시려면 오늘의 이 시간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힘쓰고 애쓰는 생활로 그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17)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18)

오늘로서 베드로 후서의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히 3장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성도들의 경성과 그 두려움을 경종하면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참으심은 그리스도의 인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큰 괴로움 중에도 원수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15절에서도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에 될 줄로 여기라’는 말로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방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사모하며 그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가 되기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참으심의 두 가지 면

하나님은 두 가지 면에서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는 멸망 받을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은 아무도 자기 죄로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감사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롬2: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판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심판하심에 있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심에 오래 참으십니다. 이에 대하여 인생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참으심에 대하여 오히려 더욱 악을 행하는 일에 악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8:11절 이하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우리의 죄악대로 그 즉시 즉시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진다면 우리 중에 아무라도 살아 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42:3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최종적인 심판을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날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와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한 자들을 심판하시되 이 땅에서 아주 멸절 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참으심입니다.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히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를 받을 때, 한번 깊이 자기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면 더 일찍 더 많이 징계를 받아야 마땅했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 들은 징계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심의 한계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계선에 이르기 전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회개치 못하면 끝까지 그 죄를 추궁하고 응당한 보응을 내리실 것입니다.

2. 알기 어려운 경의 말씀에 조심하라

16절 말씀에는 성경 말씀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알기 어렵다는 경의 말씀은 주의 재림에 관한 계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에 그 받은 지혜대로(계시) 썼고 다른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알기 어렵다는 말은 무식한 자가 자기 지혜나 생각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연구해야 할 경의 말씀을 천박한 지식이나 잘못된 지혜로 해석을 시도하다간 필경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기 어려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느 한 구절만으로는 분명한 뜻이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약2:24절에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인용하여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 그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뜻이지 행함이 곧 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2) 삼상28장에는 사울 왕이 만난 신접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죽은 사무엘과 접촉하여 사무엘과 대화를 하며 그 내용을 사울 왕에게 고합니다. 이 내용은 그 내용 전개가 어떻게 나왔던 간에 사무엘을 가장한 사탄의 역사이지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신접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마리아의 무죄 설, 동정녀 설, 승천 설 등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한 것으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더욱 믿음으로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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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2장 (8 - 12)

◆ 밤중소리 02-01 | VIEW : 772

(8) 거짓 선생들이 하는 일

(베드로후서 2:1-3)

베드로 사도가 1절에서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대로 교회에는 언제든지 거짓 선생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이란 말은 거짓된 교훈을 진리인 양 가장해서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1. 거짓 선지자의 등장

거짓 선지자는 그 등장하는 곳이 두 곳으로 나와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민간에 일어난 거짓 선지자는 지금의 통일교라든가 몰몬교 혹은 안식교 등 그들 나름대로의 한 단체를 이루어 활동하는 무리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 교회 안에 직접 침투하여 교회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더럽히고 혼란을 주며 영적 생명을 노략질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너울을 썼건 그리고 어떤 정당성을 내세우건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의 정체를 좀처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한결같이 천사의 너울을 쓰고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식별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7:22-23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파헤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열매는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대한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

1절과 2절에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몇 가지 일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이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교회로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멸망케 한다는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이단은 어떤 미사여구로 우리를 유혹해도 그 그물에 걸리면 영적 생명을 죽이게 됩니다. 이 같은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란 말은 잘못된 진리를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 구원에 관한 잘못된 진리 등이 이런 유에 속합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토를 답니다. 보편적인 진리를 가리우고 어느 한 곳에 있는 편파적인 말씀을 체계화시켜 그것을 진리인 양 가르칩니다.

사탄이 교회에서 하는 일은 가라지를 심는 일입니다. 이단의 씨가 자라면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에게 충성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이단이란 언제나 진리와 비슷하지만 진리와 엄연히 구분됩니다. 이단이란 진리의 가짜 상품입니다. 시장에서도 가짜 상품이 진짜를 뺨치는 것처럼 이단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입니다.

이단자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떨어뜨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다음에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단의 특성은 호색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방법이 호색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탐심으로 일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은 말을 가지고 거짓된 것을 가르치며 양무리들을 그들의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이나 거젓된 교훈의 특성은 교묘한 헌금 방법과 수단에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재산을 늑탈하고 패가망신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필연코 멸망할 것입니다. 종말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식별치 못하면 그들의 거짓된 이단에 넘어가 생명을 잃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경성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기 때문에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9) 불의를 용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2:4-9)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절 말씀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범죄한 천사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사들도 범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천사들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1. 범죄한 천사들의 심판

오늘 주신 말씀에는 범죄한 천사들의 이야기만 나올 뿐 어떤 천사들이 어떤 범죄 행위를 했느냐에 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씀이 유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도모하는 일에 마귀 편에 가담한 자들이며 이 자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겔28:13절 이하에는 사탄이 처음 창조함을 받았을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자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내린 심판이 두로 왕을 비유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 14절에서 ‘그룹’이란 명칭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계4장에 나오는 네 생물에 대하여 이들의 이름이 겔10:14절에서 그룹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지옥은 둘째 사망의 장소인 지옥인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자리인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을 때까지 가두어 둘 자리로 무저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사탄과 그의 사자들의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로 둘째 사람의 장소인 지옥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25:41절에서 예수님은 백보좌 심판을 거친 악인들의 심판의 장소로 지옥을 지목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마귀가 들어갈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는 영영한 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심판

베드로 사도는 범죄한 하늘의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노아와 소돔과 고모라 새대의 불의를 좇은 사람들의 심판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5절에서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멸망치 않게 하시려고 범죄가 세상에 관용할 때에도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회개하게 하셨고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길을 외면하고 계속 범죄의 길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120여 년간 의를 전파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팔고 사는 세속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죄인은 어느 시대에 살아가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의 날,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엄중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6절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킨 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멸망시키신 것을 마지막 날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노아의 홍수로 다시는 이 땅위에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물보다 더 두려운 불의 심판이 될 것임을 벧후 3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불의 심판은 바로 그 불의 심판의 본보기이심을 경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심판하시는 그 가운데서 의로운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의로운 자들을 불의한 자와 함께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 심판에서 건져 주실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역사를 이루시는데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그대로 두어 심판 날 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심판에 이르도록 심판의 날까지 지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 아들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0) 거짓 선지자의 죄

(베드로후서 2:10-14)

본문 10절부터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죄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광 있는 자란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그 분을 훼방하는 일에 방자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말은 진리의 말씀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진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유익을 꾀하는 일에 적용하는 무리들은 모두 거짓 선생의 무리 중에 속한 자들입니다.

1.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는 자들

거짓 선생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리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2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이 되는 유명한 목사님이 1972년4월1일자 한국일보에 부활주일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는데 부활을 전면으로 부인하는 글을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우리는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에 집착하여 오늘의 과제를 잃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좁으러운 교리나 불투명한 역사적 자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앙적인 문제로 결론을 내린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활을 우리가 받아 드려 우리 생활에 반영시키자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거짓 선생들은 요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읽지 않고 ‘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의 신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오역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시인은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하나의 신이었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은연중에 천사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거짓 선생이나 가짜 예수나 자칭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지 오래지만 박태선이란 자는 자신을 영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성삼위의 한 위인 성령님임을 자처했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가짜 하나님으로 통일교의 문선명이가 있습니다. 이 자의 원 이름은 문용명입니다. 용 용자를 풀이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것을 선명으로 바꿨는데 선이란 이름 글자를 영어로 발음하면 태양이란 의미가 되고 명자는 밝을 명으로 태양의 빛을 상징시키는 인류의 메시야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적 구원만 이루었고 육적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문선명이가 그 남은 구원의 사역, 육체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거짓 선생들의 도덕적 행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에 세 가지 특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담대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집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떨지도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연락이란 사치와 방탕함과 음란한 행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모든 악한 행실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결국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를 당한다는 말은 불의의 보응을 반드시 받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에 대하여 정죄하기를 그들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 거짓된 것으로 유혹하며 그리스도인 들을 미혹의 길로 유인하지만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은 허락을 받고 미혹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진리를 굳게 잡고 정신을 바싹 차리지 못하면 이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존재 가치는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거짓 선생들을 삼가 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위에 굳게 서서 비 진리와 싸우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1) 발람의 길을 걷는 거짓 선지자

(베드로후서 2:15-19)

거짓 선생들이 걸어가는 길은 발람의 길을 좇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15절에서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보을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고 했습니다. 발람이란 인물은 성경에 기록된 거짓 선지자 중 표본 인물입니다. 계2:14절에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발람이란 선지자는 어떻게 하여 거짓 선지자로 타락한 것입니까? 15절 끝에서 ‘그는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발람의 길

발람이란 인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모압 지방 브돌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의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이 처음부터 거짓 선지자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고 발람은 발락 왕의 미혹을 받기 이전까지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발람이 모압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이 그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모압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각가지 이적의 소문,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이적, 적군들을 만나는 대로 섬멸한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발락 왕은 무력으로는 이스라엘을 무찌를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발란의 기도를 빌려 이스라엘을 저주하므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발람의 활동을 지켜보았던 발락 왕은 발람이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아 왔기 때문에 발람의 기도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입니다. 왕은 모압 땅 장로들을 불러 발람에게 줄 예물을 준비케 하여 발람을 찾아가게 했습니다. ‘와서 한번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발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발락 왕이 보낸 그 많은 보화와 그에게 준다는 명예에 미혹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거짓된 기도를 형식적으로 드리고 결국은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재물에 미혹된 발람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악한 꾀로 이스라엘을 타락케 할 방법을 발락 왕에게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음란으로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타락케 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아 죽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같은 발람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거짓된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이 발람의 길을 걷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의 결국

이들의 결국에 대하여 1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배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샘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은 생명의 생수인데 그들의 우물에는 음행의 포도주가 있고 생명을 죽이는 쑥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할는지 모르지만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한번 태풍이 불어오면 곧 사라져 흔적도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곳은 사탄과 더불어 들어가야 할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인 지옥을 의미합니다.

18절에서는 이들 거짓 선생들이 미혹하는 거짓된 복음이 나옵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유혹은 모두 허탄한 것 뿐입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전혀 실현성이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이들의 유혹의 방법으로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19절에서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고 약속하는 자유란 이단 교리에 얽어매는 또 하나의 죄의 사슬입니다. 이 사슬에 얽매이게 하는 일이 그들이 말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멸망의 종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멸망의 종들이 주는 자유란 함께 멸망을 받는 자유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에는 죄의 종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에게 진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으며 그 죄 가운데서 살아왔습니다. 그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값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죄를 이기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이긴 자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들 거짓 선생들의 미혹을 받아 그들의 교훈을 따른다면 우리는 다시 지는 자에 속하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믿음으로 이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12) 의의 도를 안 후에 범하는 죄

(베드로후서 2:20-22)

본문 20절과 21절 말씀은 대단히 심각한 말씀으로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이 되기도 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라고 말한 대상은 거짓 선생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미 거짓 진리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1. 처음보다 더 심한 나중 형편

이 말씀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저희가’라고 하는 특정한 대상자를 둔 것으로 이들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란 말씀은 거짓 선생들이나 이들에게 미혹 받은 자들의 미혹 받기 이전의 처음 신앙 상태를 가리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적 열매에 대해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갔다는 뜻이 아니라 더러움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열매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회개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히6:4-8절에 나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겉으로 살펴보면 이들은 마치 중생한 자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과 구원과 심판에 관련된 연관 구절을 연결시켜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에 이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마귀에게도 있습니다. 진리에 서지 아니한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처음 얼마간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힘썼습니다. 물론 중생하기 이전입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아도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과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며 진리의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중생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의의 도를 안 후에 범한 죄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생에 이르기 이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인 것입니다. 얽매었다는 말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 받아 죄의 종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의 생명이 없이 양심의 감동이나 교육의 영향으로 출발한 신앙 생활은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며 진실한 회개의 결실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원했을는지는 모르지만 원한다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부자 청년의 경우,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그의 재물이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그의 길을 막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종은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심하다는 말은 그 죄가 더 중하다, 그 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신앙촌의 박태선은 남대문 교회 장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편이 점점 나빠저 그의 임종시에는 정신병자처럼 예수님을 자기 제자라고 망언을 하고 욕설을 퍼붓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기 죄에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배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더러움에 대하여 22절에서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고 했습니다. 개는 더러운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찾아가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어 진리를 버리고 이단을 좇는 일은 마치 개처럼 지난날의 행실을 다시 행하는 일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중국의 어느 임금이 돼지를 방안에서 깨끗하게 키우고 좋은 옷을 만들어 입히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꾸몄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돼지를 데리고 밖에 나갔는데 더러운 시궁창을 지나가니 얼른 그 시궁창을 찾아 들어가 몸을 둥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의 무리들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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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

(베드로후서 3:1-7)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러 구약에 기록한 거룩한 선지자들의 예언과 사도들을 통해 주님이 명령하신 바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종말에 교회에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 주의 재림을 부인할 것이란 사실을 경계하면서 그들의 이 같은 거짓말에 속지 말 것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기롱한다는 말은 희롱한다는 뜻으로 진실한 것인데도 그것을 실없는 농으로 여겨 오히려 비웃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기롱하는 것인가? 4절에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에 대해 너희는 그것을 믿느냐 이 어리석은 자들아 하면서 조롱하며 비웃는 자들이 나타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기롱하는 자들의 등장

베드로 사도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무엇을 알라고 한 것입니까?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온다고 했습니다. 온다고 한 말은 교회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는 기롱하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의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을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이런 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교회에 나타나 미혹할 것이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거짓 선생들은 그 증거로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온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거늘,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태로 인류의 역사가 계속하겠거늘 주의 다시 오시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에 대해서 마24:48절에서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란 주의 재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강단에서는 어떤 때는 주의 다시 오심을 설교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설교는 신부를 단장시키는 메시지가 아니라 성도들로 깊은 잠을 재우는 자장가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29:10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경종하시기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으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주의 재림을 믿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있겠느냐는 탄식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실 기간 동안, 주의 재림에 관한 얼마나 많은 교훈을 주셨으며 주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경종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주 재림의 메시지를 복음의 주축으로 삼아 성도들을 가르치며 그날에 소망을 갖게 하며 그날을 준비시키는 생활로 인도해야 하거늘 그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주의 재림을 무시하고 엉뚱한 메시지로 성도들로 세속적인 생활에 정착하게 하고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하는 기롱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불로 임하는 마지마 심판

그런데 이런 자들의 관심은 어디 두고 있는 것인가? 3절에서 이르기를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한다’고 했습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는 목회자에게는 재림의 메시지가 없습니다. 주의 재림 시 자신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피하고 성도들로 주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들 거짓 선생들에 대해 노아의 때에 물의 심판을 잊으려 하는 불 신앙적인 태도임을 책망하고 노아의 때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주의 재림의 날에는 하늘과 땅이 불사른바 될 것이라고 경종 했습니다. 물의 심판은 홍수 심판으로 땅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을 불의 심판은 하늘과 땅이 동시에 불로 사름을 당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계6:12절에서 이런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일곱째 대접 심판에 내리시는 불의 심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불의 심판을 위해 이 불을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보존해 두신 것입니까? 이 땅 깊숙한 지하에는 지금도 이 불꽃이 이글이글 타면서 이 지구를 불태울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늘과 땅이 홍수 심판과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이 지구가 지금가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4)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3:8-9)

베드로 사도는 8절에서 하나님의 날 수에 대하여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천년을 하루로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시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계산하고 구애받는 시간과 공간에 인간과 같은 구애를 받으실 분이 아니심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하루와 천년

인간 사회에서는 하루와 천년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계산으로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산과 인간의 계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입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24시간의 하루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도 24시간의 하루의 제약을 받으신 가운데 그의 창조를 이루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생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루가 인간의 계산으로는 24시간의 시간에 얽매인 시간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24시간의 하루가 인간이 계산하는 천년 아니 더 많은 시간으로도 활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은 24시간의 시간적인 하루에 얽매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시90:4절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7천년 전에 창조하셨다고 해도 인간의 과학적 판단이나 증거로는 지구의 생성이 수 10억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되는 하루 동안에 10억 년의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이 사실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임하실 것이라고 하는 주의 재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일에 대하여 엄청난 시기가 지낸 는 데도 곧 오시지 않나?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롱하는 자가 와서 ‘주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기롱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신다면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비록 2천년이 넘는다 해도 한 밤중의 한 경점 만도 못한 짧은 기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의 기간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 긴 기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범사에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이유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과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더뎌도 그것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기간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소요되는 기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약속한 약속이 늦게 요셉에게 이뤄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애굽에서 갖가지 시험을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 꿈에 보여주신 약속을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들 이삭에 대한 약속을 25년만에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왜 늦어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그에게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이미 아시고 섭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작정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인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신 말씀은 아직 경성하여 신부의 단장을 준비치 못한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이 한 명도 그의 생명에 이르는 일에 낙오됨이 없게 하시기 위해 길이 참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는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한계의 끝이옵니다. 그러므로 안일한 가운데 정욕적으로 살아가다가 심판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경성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더딘 것이 아님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는 일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일에도 인내함으로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15) 도적 같이 임할 주의 날

(베드로후서 3:10-13)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게 하시려고 천년이 하루 같이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작정하신 심판의 날이 이르면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기간이 언제인지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1. 주의 날

이 날을 베드로 사도는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이란 주의 재림의 날을 의미하고 인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 주의 날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눅21:34-36절에서 예수님은 이 시기를 ‘이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12:1-3절에서 다니엘은 ‘그 때’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습1:18절에서 이 날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날이 언제 오느냐에 대해서는 그 년, 월, 일, 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다만 징조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시기를 연구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날짜로 알려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사실과 그러나 징조적 시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에 담긴 뜻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적 같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24:43절에서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도적은 밤에 나타납니다. 밤은 사람들이 잠을 잘 때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밤중에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도적이 오니 깨어 방비하라는 경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살전5: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 되면 주님은 우리에게 도적 같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낮의 아들, 빛의 아들로서의 영적 무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하여 마24장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준비하며 마지 할 것입니까? 마24장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오실 줄로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눅21장에서는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눅12장에서는 ‘혼인 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여러 말씀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시는 재림의 날은 아무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맞이한다고 했어요? 준비한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들만이 맞이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주의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의 날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10절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현은 간략하지만 사건은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입니다.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은 계16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 심판 중에 마지막 대접인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이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심판의 모습은 이 지구 자체가 활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때 땅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불이 올라오기 때문에 땅과 그 중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 지구의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말씀하고 일이 이렇게 풀어질 터이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하나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부의 단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은 이처럼 무서운 심판으로 멸망을 받지만 우리는 그의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


(16)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후서 3:14)

오늘 본문 14절에는 주의 날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의 자격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은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이 같은 주의 날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이란 말씀입니다.


1.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힘쓰라

그러면 이런 주의 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의 날을 사모할진대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쓰는 일이 없이는 절대로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 즐거움으로 맞이하는 그런 만남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까?

(1) 불법한 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7:23절에서 주님은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2) 악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마24:48절 이하에서 악한 종들에게 내려질 징계에 대하여 엄히 경종 하셨습니다.

(3) 미련한 처녀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10절에서 이미 닫혀진 문 앞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4)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달란트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 종들입니다.

(5) 염소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25:31절 이하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왼편에서 지옥에 가기를 기다리는 염소의 무리 중에 낄 것입니다.

(6) 어리석은 부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12:18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해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셨습니다.

(7) 마음이 둔한 자로 그날에 주님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눅21:34절에서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8)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자리에 들어간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마22:11절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무리는 내어쫓았습니다.

마7:21절에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으로 삼는 자마다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어떤 일에 힘써야 하난?

그러면 어떤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점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점이란 더러움을 뜻합니다. 우리의 경건 생활에 더러움이 없어야 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약1: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세속적 생활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생애를 함께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의 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빌2:15절에서 세상에서 세상의 빛들로 나타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빛을 나타내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내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빛을 세상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봄철에 씨를 뿌리고 온 여름철 내내 그것을 가꾸고 손질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들이 힘씀이 없이 어찌 천국을 찾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힘쓰는 이가 들어간다고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소망이 크면 클수록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을 언제나 기회로 포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입니다. 순종을 시작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기회입니다. 지금이란 시간은 기회로 삼으면 늦지 않고 기회로 삼지 않으면 늦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그날을 소망으로 삼으시려면 오늘의 이 시간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힘쓰고 애쓰는 생활로 그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17)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18)


오늘로서 베드로 후서의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히 3장에서 주의 재림에 관한 성도들의 경성과 그 두려움을 경종하면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참으심은 그리스도의 인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큰 괴로움 중에도 원수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15절에서도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에 될 줄로 여기라’는 말로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방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사모하며 그날에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가 되기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참으심의 두 가지 면

하나님은 두 가지 면에서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는 멸망 받을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이것은 아무도 자기 죄로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감사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롬2: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판은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심판하심에 있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심에 오래 참으십니다. 이에 대하여 인생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참으심에 대하여 오히려 더욱 악을 행하는 일에 악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8:11절 이하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우리의 죄악대로 그 즉시 즉시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진다면 우리 중에 아무라도 살아 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42:3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최종적인 심판을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날이 주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와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한 자들을 심판하시되 이 땅에서 아주 멸절 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참으심입니다.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히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를 받을 때, 한번 깊이 자기 행실에 대하여 살펴보면 더 일찍 더 많이 징계를 받아야 마땅했을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 들은 징계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심의 한계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계선에 이르기 전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회개치 못하면 끝까지 그 죄를 추궁하고 응당한 보응을 내리실 것입니다.


2. 알기 어려운 경의 말씀에 조심하라

16절 말씀에는 성경 말씀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인용한 알기 어렵다는 경의 말씀은 주의 재림에 관한 계시를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일에 그 받은 지혜대로(계시) 썼고 다른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했습니다. 알기 어렵다는 말은 무식한 자가 자기 지혜나 생각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연구해야 할 경의 말씀을 천박한 지식이나 잘못된 지혜로 해석을 시도하다간 필경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기 어려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느 한 구절만으로는 분명한 뜻이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약2:24절에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인용하여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 그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뜻이지 행함이 곧 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2) 삼상28장에는 사울 왕이 만난 신접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죽은 사무엘과 접촉하여 사무엘과 대화를 하며 그 내용을 사울 왕에게 고합니다. 이 내용은 그 내용 전개가 어떻게 나왔던 간에 사무엘을 가장한 사탄의 역사이지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신접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마리아의 무죄 설, 동정녀 설, 승천 설 등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한 것으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더욱 믿음으로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