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베드로전서 1-5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45


베드로전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2,518


(1)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

(베드로전서 1:1-2)

지난 시간까지 야고보서 강해를 마치고 오늘부터 베드로전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서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기록된 서신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인 게바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본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벳새다의 어부 출신이며 요한의 아들이요 안드레와는 친 형제지간입니다.

베드로는 A.D 68년경, 네로의 박해로 순교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베드로가 바벨론의 교회에서 64년경 써서 보낸 것인데 이 바벨론 교회가 일설에 의하면 로마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애 가운데 닥쳐오는 박해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1. 문안과 축복

베드로는 이 서신을 기록함에 간단한 문안 인사를 마치고 고난 중에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해 주고 있으며 앞으로 그들이 당할 박해를 앞두고 그들에게는 이런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영적 무장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장차 인류의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날 최종적인 영광의 나라를 보여주면서 현재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승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는 서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말은 '아포스톨로스'인데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란 예수가 그의 복음을 위해 친히 파송한 하나님의 종을 의미합니다. 대개 사도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을 친히 목격하고 주님으로부터 복음 사역의 일꾼으로 선택하심을 받은 열 두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1절에서 이 서신을 받을 대상 지역을 밝히고 있는데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로 아마 그 당시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그곳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 서신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나그네라는 이름을 부친 것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지역이 그들의 고향이 아니란 점과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 나그네와 같은 생애를 살아가는 복음의 일꾼들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2. 복음을 위해 나그네 된 자의 영적 위치

베드로 사도는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미리 아셨다는 말은 그들의 택정의 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이미 택정 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누구라도 거룩함을 입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를 순종케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불순종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과 원수의 자리에 이르게 된 인간들을 이제는 순종으로 돌이키게 하시게 하시려고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택하실 때, 아무런 방법도 정하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백성들이 에덴에서 아담을 통해서 멸망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멸망 가운데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지 않으면 미리 예정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의 백성들을 택정하실 때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예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의 서신은 이런 사람에게 보내졌습니다.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축복했습니다. 우리도 이

들처럼 은혜와 평강을 입어 앞으로 닥쳐올 무서운 고난의 시기에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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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에 간직해 두신 그리스도인의 기업(베드로전서 1:3-6)

◆ 밤중소리 11-06 | VIEW : 2,744

(2) 하늘에 간직해 두신 그리스도인의 기업

(베드로전서 1:3-6)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과 4절 말씀은 우리의 구원에 교과서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늘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1.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신 일은 그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긍휼이란 말은 마음으로 뜨겁고 안타깝게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가장 크신 긍휼은 심판 받을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이란 말은 그 높이와 그 넓이와 그 깊이를 측량할 길 없는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대로 나타내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롬5:8절에서 이같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대상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9:17절을 보면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시72:13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빈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마5:7절에서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많으신 긍휼하심은 좀더 차원이 다르고 높은 긍휼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에 대한 긍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의 백성들이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을 일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게 된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중생

3절에서 이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아들로 피를 흘리실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속죄 제물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며 그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그 소망 중에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죄의 증거가 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대속의 죽으심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심만으로는 사죄의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우리의 죄 값으로 심판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 죄 값을 다 갚으심으로 사죄함을 받았다는 증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부활은 우리가 죄에서 죽고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새로운 생명을 소유했다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증거입니다. 부활한 몸은 영생의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한 몸과 연합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서 누릴 어떤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하늘의 기업입니다. 이 기업이야말로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기업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셨다고 했습니다(마6:19-21; 요14:2-3). 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말세에 나타내신다고 한 구원은 인류의 종말에 성취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우리들로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결론 :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그 많으신 긍휼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영광스러운 이 소망을 바라보고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하나님 나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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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련 뒤에 오는 영광(베드로전서 1:6-7)

◆ 밤중소리 11-06 | VIEW : 2,212

(3) 시련 뒤에 오는 영광

(베드로전서 1:6-7)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늘에 간직해 둔 것으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같은 기업을 온전히 누리게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날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5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시험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시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더욱 큰 영광을 얻게 하시는 시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시험을 만날 때의 그리스도인의 태도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시험은 '페이라스모이스'로 사람의 마음의 정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성장을 위해 거치게 하시는 시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그의 생애 동안에 이런 시련이 많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시험을 받는 동안 근심하게 되며 육신적 생활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오며 우리는 그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험이라도 그 시험이 우리를 믿음에서 끌어내릴 수 없으며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우리에게 오는 모든 악의 권세를 막으시고 시험 중에도 우리를 온전히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 물론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들로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가운데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고 말씀했습니다. 근심은 시험을 받을 동안, 잠시 동안이지만 크게 기뻐하는 일은 그 결실에서 오는 영원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는 시험을 안겨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간단히 살펴보면

① 이 세상의 영광이나 부요의 허무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② 자신의 부족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③ 우리들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④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때 겪는 근심은 잠깐동안의 일입니다.

2. 믿음의 시련의 유익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시험을 금의 연단과 비교하면서 시험을 당하는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연단한 금이 귀합니다. 연단치 않은 금은 하나의 광석에 불과합니다. 그것으로는 존귀한 보석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연단 받은 믿음일수록 아름답고 귀한 믿음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이 다 불로 연단한 금 같은 시련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시련만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불로 연단한 금처럼 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연단은 우리들로 선악을 분별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히5:14절에서 장성한 자는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생활은 많은 연단 후에 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연단은 아무리 혹독해도 그 시련으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사48:8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신대로 고난의 풀무에서 끄집어내시어 더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종말에 궁극적인 구원은 연단을 받은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단12:10절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회개시키어 정결케 하시는 방법은 금 같은 믿음의 연단에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난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로 신분의 단장을 갖추게 하여 이기는 자의 축복을 받게 하시는 믿음의 시련인 것입니다. 이 연단은 왜 귀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이 오시는 날, 그 앞에서 칭찬을 듣게 되는 것입니까? 누가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누가 존귀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많은 시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불로 연단한 금처럼 귀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주의 재림을 앞두고 주님을 맞이할 신부들을 위해 성도들에게 많은 연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3:3절 말씀에는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3:18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우리는 지난날에도 이같은 믿음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근심하지 마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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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원의 복음(베드로전서 1:8-12)

◆ 밤중소리 11-06 | VIEW : 3,165

(4) 구원의 복음

(베드로전서 1:8-12)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으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8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그 예수를 사랑하게 되고 그 예수로 인하여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즐거움과 기쁨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되며 또 믿음의 시련을 이기는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1. 보지 못했으나 사랑하는 예수

우리는 예수를 보고 그 예수를 사랑하거나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예수를 사랑하게 하고 그를 믿게 할 뿐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부어 주심으로 우리는 늘 그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깨닫고 고후5: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가난이나 질고나 환난이나 시련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런 기쁨이 없다면 그 구원은 진실한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9절에서 베도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종착역이 있습니다. 소망도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종착역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이로되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 구원에 최종적인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확실한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2. 선지자들의 구원에 대한 연구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지난날 선지자들이 어떻게 예언 했느냐의 대한 말씀이 10절과 11절에 나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선지자들에 대하여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에게 임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전한 구원에 대하여 부지런히 살펴 연구했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도 이 말씀을 부지런히 살펴 연구하고 살피고 연구한 바를 말씀으로 전하여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연구하고 살핀 구원에 관한 은혜의 예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관한 사실을 연구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신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며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하심이 과연 어느 시, 어떠한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상고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단9:25절에서 이 일에 대한 계시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란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62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요'란 말씀에서 메시야의 고난받을 시가에 대하여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선지자들이 섬긴 바가 선지자 자신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계시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계시를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우리에게 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전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곧 사도들과 초대 교회에서 파송 된 복음의 사역자들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게 하신 복음은 이런 경로로 전달된 것인데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은

혜요 축복인지 이에 대하여는 천사들까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한없이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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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값진 구원의 은혜(베드로전서 1:13-19)

◆ 밤중소리 11-06 | VIEW : 3,400

(5) 값진 구원의 은혜

(베드로전서 1:13-19)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지표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 우리가 가질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데 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에 만족된 생을 누리고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망을 바라보고 그 즐거움으로 만족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가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에게 내려지는 은혜야말로 우리가 온전히 바라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를 바라는 성도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13절에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허리는 몸의 중심부이며 몸을 지탱해 주는 부위입니다. 허리가 없으면 몸을 세울 수도 없으며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허리에 힘을 받쳐 주려면 허리에 띠를 동여매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의 허리에도 띠로 동여매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띠입니까? 엡6:14절에서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은 진리여야 합니다. 진리를 떠나면 그리스도인은 설자리가 없으며 살아갈 푯대가 없습니다. 마음의 허리란 속 사람의 중심을 말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은 진리의 허리띠로 띠를 띄어야 합니다. 살후2: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종말에 사탄의 유혹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이 유혹을 이기려면 진리로 단단히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야 하는 것입니다. '근신하라'는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잠을 자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의 사람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것이요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활은 지금 우리에게 육신적인 고난과 어려움을 수반하겠지만 얼마 안가 우리에게 올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에게 내려질 은혜를 온전히 바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10:3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는 생활이 우리들의 마땅한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 거룩한 자의 길을 걸어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분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14절에서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는 길은 순종하는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이전처럼 육신의 사욕을 좇아 살아온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그 열매로 나타납니다. 요15:7절에서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2. 우리를 구속하신 보배로운 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에 대하여 17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요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지내는 우리의 생애 중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 분 앞에 가서 서는 날, 행위를 따라 판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은이나 금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은이나 금도 값진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는 그런 것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크심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동시에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 희생의 얼마나 큰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이처럼 귀한 값을 주고 당신의 소유로 사신 우리들을 소홀히 여기시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존귀히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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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말세에 나타나신 바 된 예수(베드로전서 1:20-22)

◆ 밤중소리 11-06 | VIEW : 2,028

(6) 말세에 나타나신 바 된 예수

(베드로전서 1:20-22)

오늘 본문에서는 20절에서 말세에 나타나신 바 된 그리스도의 비밀과 21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과 22절에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이어져 나갑니다.

1.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스도는 이미 세상에 나타나신 바 된 분이요 모든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이름이지만 지금도 그 분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비밀인데 이 비밀을 깨닫는 자에게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으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그의 백성들만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창세 전에 이미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그가 친히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그의 백성들을 택정 하셨기 때문에 그는 이미 창세 전부터 알리신 바 된 분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나오는 그 다음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신 바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 마지막 시대에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의 뜻이나 혈육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난 것입니다.

21절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일반적인 창조주나 조물주라고 섬기는 범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애국가에 가사를 고쳐 쓴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2. 뜨거운 형제의 사랑은 어디서 나오나?

베드로 사도는 2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교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에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남녀간의 에로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간의 필레오의 사랑과도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신비한 사랑입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가난도 함께 체휼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음으로 진실하게 나타나야 지속적인 사랑으로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지속적이라야 정상적인 지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까? 진리를 순종함으로 그 영혼을 깨끗케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같은 사랑의 근원이 바로 진리에서 샘솟기 때문에 진리를 버린 사람들은 이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거짓 사랑에 대해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거짓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유혹입니다. 이단자들이 이 거짓 사랑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면서도 이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인색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사랑엔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희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적은 것으로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내가 베풀기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타내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사랑의 폭이 넓어지면서 사랑 가운데서 참 기쁨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그 예

정 가운데 세상에 태어나 복된 소망의 생애를 살아가니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는 이런 관계로 지

체가 된 형제들입니다.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여 아름다운 믿음으로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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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거듭나게 하시는 말씀(베드로전서 1:23-25)

◆ 밤중소리 11-06 | VIEW : 2,903

(7) 거듭나게 하시는 말씀

(베드로전서 1:23-25)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기본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일을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거듭남의 원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말이나 모두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1. 거듭나게 하신 말씀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썩지 아니할 씨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씨란 인간의 혈통적인 씨앗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1: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인간적인 방법의 씨앗은 아담의 자손으로 번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낳아도 멸망의 자식밖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비록 훌륭한 씨앗으로 인격적인 자식이 태어나고 유명한 선현이 태어났다고 해도 역시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심는 자는 그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말씀은 우리의 태어남도 동일합니다. 세상에 속한 물질적인 것 역시 썩어질 씨앗들입니다. 18절에서 말씀해 주는 은이나 금 역시 없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없어질 것은 바로 썩어질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같은 썩어질 것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2. 썩지 아니할 씨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면 이 썩지 아니할 씨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3절 종반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썩지 아니할 씨라고 비유한 것입니까? 그 말씀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데 있습니다. 히4:12절과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두 가지 뜻은 하나는 그 말씀이 택자를 부르시어 회개시키시고 구원함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일은 살아 있는 말씀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그 종교에 대한 믿음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경전에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과 기이한 능력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능력도 되지 못하고 기적도 이루지 못하며 그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도 심어 줄 수 없으므로 어리석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늙거나 쇠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일은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할 수 있거나 세상적인 학문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나 천국이란 말이 세상적인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씨란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한 것입니까? 씨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씨앗이 아무리 적어도 그 안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씨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 씨는 이미 씨가 아닙니다. 이런 씨앗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씨로 비유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밭에 심기어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실이 영생입니다. 영으로 심어 영생으로 거둔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인간의 육체의 무익함과 허무함에 대하여 24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육체는 풀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신분이 어떠하든 인간의 육체는 풀인 것입니다. 풀이란 말은 죄값이 사망이란 뜻과 같은 말입니다. 모두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이처럼 인생의 영화도 부요도 존귀도 결국은 마르고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세토록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결론 :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씨앗이 되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광의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말씀에 소망을 두고 말씀으로 영생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082


(8)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믿음

(베드로전서 2:1-2)

거듭난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입니다. 물론 이 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절 말씀에서 '갓난아이들 같이 순정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은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으며 말도 서툴고 행실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함에 따라 사회 생활을 배워가며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장 과정도 이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갓난아이와 같은 처지에서부터 점점 장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사람이 버리고 취할 것

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토를 부친 이유는 앞서 1장에서 기록했던 것처럼 너희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이란 뜻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버려야 할 일이요 다른 하나는 취해야 할 일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지난날 육체로 있었을 때에 행하던 더러운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자들이 그의 생활 가운데서 확실하게 버려야 할 것으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투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악독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죄에 대하여 롬3:13절에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악독이란 이처럼 입에서 나오는 악하고 독한 말을 의미합니다. 궤휼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궤휼이란 마음으로 악을 도모하는 일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진행하는 일을 말합니다. 잠26:24절에서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는다'고 했습니다. 외식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거짓되게 겉으로 나타난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외식은 진실과 다르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들은 진리를 떠나게 됩니다. 시기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시기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이웃이 잘 되는 일을 싫어합니다. 시기가 많은 사람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방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말을 못하고 시기에서 나온 비방을 일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비방하는 우리 입술의 말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썩어 질 육신의 것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심는 자는 결국 썩어 질 것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것

그러면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기들에게는 사모하는 것이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배를 불리우는 엄마의 젖인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들을 갓난아이로 비유했습니다. 왜 그런 표현을 한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들에게는 악독이나 궤휼이나 시기가 없습니다. 다만 젖을 사모할 뿐입니다. 이 젖이란 베드로가 1:25절에서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외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령한 젖입니다. 그러면 이 젖은 거듭난 사람에게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람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그 믿음이 우리를 능히 구원할 수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새로운 생명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자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갓난아이로부터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장의 과정에서 많이 지체하므로 우리가 과연 거듭난 사람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라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에 감사도 없고 뜨거운 사랑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자라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신앙적으로 자라나는 모

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 믿음을 날마다 확

인하는 생활이 회개의 생활입니다. 확실히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베드로전서 2:3-8)

◆ 밤중소리 11-06 | VIEW : 7,054

(9)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3-8)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1. 보배로운 산 돌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는 왜 예수님에 대하여 '보배로운 산돌'로 비유한 것입니까? 돌이란 집을 짓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가 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시멘트가 없이 돌로만 집을 지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교회를 인체에 비유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가 그 몸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머리에 붙은 몸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몸이 곧 교회이며 이 교회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집으로 비유한다면 예수님은 그 집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령한 집을 세우는 각가지 재료들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을 표현할 때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반석이란 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돌이 죽은 돌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입니다. 곧 산 돌이십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이상은 광채가 득심하고 심히 두려운 한 신상입니다. 그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며 종아리는 철이요 발은 철과 진흙이 섞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뜨이지 아니한 한 돌이 그 신상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아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꿈에서 신상은 하나님을 대적해 온 역대의 왕들을 의미하며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은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최후의 대적자 적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발을 쳐서 무너지게 한 돌이 있습니다. 이 돌은 집의 모퉁이 돌이시며 반석이시며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최종적인 심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태산을 이룬 돌은 천년왕국을 이룰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 산 돌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7절에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버린바 된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53:4절에서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버린바 된 예수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유대인들은 쓸모 없는 돌로 여겨서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이 예수를 자기들 인생의 모퉁이 돌로 여기지 아니하고 쓸모 없는 돌로 여겨 거들떠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인생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실 하나님의 택한 메시야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택하신 자는 오직 그리스도 뿐, 그 분외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가 길이시며 그가 진리이시며 그가 생명이십니다.

2. 너희도 산 돌 같이 되라

5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너희도 산 돌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은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들도 산 돌이신 예수님과 함께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 받는 생활, 그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우리의 생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한 지체로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방법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거룩한 제사장의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같은 그리스도인 들의 생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롬12:1절과 2절 말씀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이 영적 제사장의 생활입니다. 이 생활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인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보배로우신 산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산 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 받

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 이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입니까?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말씀을 따라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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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베드로전서 2:9-10)

◆ 밤중소리 11-06 | VIEW : 10,752

(10)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

(베드로전서 2:9-10)

오늘 본문 9절에는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영적 신분이 나오며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존귀한 신분을 주신 이유에 대하여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네 가지 신분은 첫째는 택하신 족속이요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세 번째는 거룩한 나라요 네 번째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택하신 족속

택하신 족속이란 말은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백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대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따로 있으며 오직 이들만이 그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엡1:4절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선택을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까?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 이같은 선택을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선택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담에게 메시야의 언약을 주셨고 모든 선지자들에게 메시야의 예언을 하시게 하셨으며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다른 표적이나 징조로 보이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보내셔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이 식별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1:12-13절에 있는 말씀이 이런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후3:2절 말씀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13:48절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계20:15절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사람들만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며 이 일이 표적이 되어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9절에서 '오직 너희는'이라고 하신 너희란 대상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큰 의문을 가지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예정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 예정자 가운데 들어가고 저 사람은 왜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들이 천국에 올라간 후에나 풀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2. 왕 같은 제사장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족속으로 선택받은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2:5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에 속한 족속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성별시킨 백성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말은 그 의미가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요일2:20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이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나라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그의 나라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된 것입니까? 고전6:19절에서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론 :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우리들을 그의 택하신 족속으로 만드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며 거룩한 나

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까? 이는 우리를 어두운 죄악에서 불러내시어 우리로 하나님의 빛을 받

아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 네 가지 신분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뜻을 따라야 우리의 믿음의 생활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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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어해야 할 육체의 정욕(베드로전서 2:11-12)

◆ 밤중소리 11-06 | VIEW : 4,506

(11) 제어해야 할 육체의 정욕

(베드로전서 2:11-12)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위치를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비유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이르시기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 동안의 일이요 우리의 영원한 거처는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1. 그리스도인의 참 신분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소망으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9절 말씀에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신분 중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신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분은 나그네와 행인이란 사실을 알고 나그네와 행인에 불과한 이 세상의 삶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히11:13-16절에 걸쳐 나오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서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는 본향을 찾아가는 생활로 보낸 것입니다. 왜 본향이라고 하는가?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로 받은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활은 그 안식처를 찾아가는 길임으로 우리는 지금 나그네 또는 행인으로서의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그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생활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음에 나그네의 생애는 여행이 끝나 본향에 이르기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히10:36절에서도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나그네 생활을 소망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또 행인 같다고 했습니다. 행인이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행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납니다. 이 세상에서 그토록 부자로 잘 살았던 욥도 욥30:15절에서 고백하기를 '내 복록이 구름 같이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리는 복록이 자신에게 영원히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지만 사실인즉 구름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새인가 흔적도 없어집니다. 시144:4절에서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고전7:31절에서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감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있을 것으로 알고 집착한다면 비참한 실패자의 운명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인생의 허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종해 주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 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이같은 인생을 살아가며 이런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나그네길에서 허무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거슬려 싸우려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생활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정욕은 우리의 생명에 어떤 유익을 주는 것입니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를 주는데 우리의 영혼을 거슬려 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을 가진 거룩한 존재입니다. 이 영혼이 죄악의 침범을 받거나 더럽혀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정욕은 이 영혼을 넘어뜨리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거역하며 싸운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서는 늘 격렬한 영적 투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생애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승리를 위해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어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롬6:12절에서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의 영적 신분을 올바로 이해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행실을 선하게 행하여 그 선한 바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일

은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로 입을 다물게 하고 또 그들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는 날에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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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베드로전서 2:13-18)

◆ 밤중소리 11-06 | VIEW : 3,670

(12) 그리스도인의 사회 생활

(베드로전서 2:13-18)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면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생활을 지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면서도 어떻게 이 세상과 모든 생활에 조화를 맞추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여러 가지로 교훈해 주면서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베드로의 서신은 기록한 연대가 이미 2천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간 이 사회에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생활의 변화, 정치 형태의 변화, 인간 사회 생활의 관습의 변화 등, 다양한 변화가 있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문자로 나타난 교훈에 얽매기기 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의 맥에 따라 수용해야 할 교훈으로 받아 드려야 할 것입니다.

1. 인간이 세운 제도에 순종하라

베드로 사도의 첫 번째 교훈은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사회생활을 할 때 먼저 인간 사회에 세워진 모든 제도를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이 제도는 크게는 국가적인 법률문제요 적게는 개인간의 법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런 법적인 여러 가지 규범은 우리의 생활에 구속력을 가집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런 순복은 사회의 질서와 여러 사람들과의 공동 생활을 위해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런 순복은 주를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규약이나 법률에 있어서 신앙적인 자유를 박탈하거나 어떤 우상적인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 등은 예외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집회에 가서 그 집회를 방해하거나 매도하는 일 역시 온당한 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비방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은 사회 질서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받는 자들에게 세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시요 세를 내지 않아도 괜찮으신 분이시지만 베드로에게 명하여 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져 먼저 잡히는 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의 돈을 얻어 세를 받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혹 억울하게 여겨지는 일을 당해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방해되리 만치 고성을 지르면 경범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예배시, 찬양이나 통성 기도를 드릴 때 이런 경범죄에 걸리지 않도록 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할 것을 명하고 권세를 거슬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슬리는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권세자들이나 세상 법 행정에 따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마10:16절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각 동리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들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간사함이나 궤계에서 나오는 지혜가 아니라 순결한 지혜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를 받침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은 동전에 그려 있는 화상과 글을 가리키면서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시아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는 잠8:32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훈계를 들어 지혜를 얻으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

베드로 사도는 16절에서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한한 자유자입니다. 그러면 이같은 우리의 자유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요8: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했다'고 했습니다. 이 자유를 가지고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라고 경종 했습니다. 자유에는 중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상을 섬길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의 자유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하나의 절대적인 책임이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죄에서 해방된 자유요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자유 자들입니다.

결론 : 진리 안에서의 진실한 자유는 온유와 겸손과 덕으로 나타납니다. 그 자유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때 진리의 자유 자처럼 참 자유하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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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하나님을 생각하라(베드로전서 2:19-20)

◆ 밤중소리 11-06 | VIEW : 2,290

(13) 하나님을 생각하라

(베드로전서 2:19-20)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애 중에 받는 고난이 모두 칭찬 받을 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아름다운 고난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고난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고난을 두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는데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일,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일, 이런 일은 아름다운 고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이런 고난을 받을 때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1. 애매히 받는 고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살아가는 생애에 표적이 있습니다. 바라보는 표적으로는 히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표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3:1절에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애는 정의로운 판단, 양심적인 판단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이 성행하고 불의가 판을 치며 비 양심이 사회 기반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국가 기관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문제를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어떻게 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는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0여년간 감옥에서 살다가 진범이 잡혀서 혐의가 풀려 석방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또 옛날 요셉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음란한 여자에게 누명을 쓰고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갇혀야 했던 그의 처지는 어떠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애매히 고난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고난이 아니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생활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요건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이런 문제를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까?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잠16:2절에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은 아시기 때문에 그 분을 의뢰하라는 말입니다. 히4:1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억울함을 아실진대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드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날, 나에게는 상급으로 그 보응이 오고 상대편에는 심판으로 그 보응이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 분에게 억울함을 아뢰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시91:8절에서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내게 계시고 이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니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슬픔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끄러운 인내

아직까지 주신 말씀은 애매히 받는 고난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 중에 애매히 받는 고난이 아닌 것으로 슬픔을 당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결과로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그 죄 값에 대한 보응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인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받지도 말고 받아서도 안되지만 받는다 해도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굴욕적인 인내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일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말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로 우리 주변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며 조롱을 받으며 소외를 당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법적인 억울한 제재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으로부터 시부모로부터 종교적인 박해를 받는 일도 생깁니다.

이런 일 외에도 공연스레 오해를 일으킬 사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변명도 통하지 않고 양심의 호소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분명히 죄가 없이 애매히 받는 고난입니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갈6:9절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이런 일로는 고난을 당하되 죄를 범하는 일로 고난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낙

심하지 말고 참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보상이 곧 나타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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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리스도가 보이신 고난의 본(베드로전서 2:21-25)

◆ 밤중소리 11-06 | VIEW : 2,821

(14) 그리스도가 보이신 고난의 본

(베드로전서 2:21-25)

베드로는 21절에서 우리들의 고난의 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죄 없이 애매히 받는 고난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당함을 참는 일에 있어서 그 일에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경우를 들어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주님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생애의 끝에 가서는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난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같은 주님의 고난은 그 자신으로는 애매히 받으시는 고난이셨습니다. 22절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분으로 죄가 전혀 없으셨는데도 죄인으로 취급 받으셨으며 가장 환영하고 존경하며 영접해야 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며 고난의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오직 진리를 증거 하셨고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였거늘 이 세상은 그 분을 배척하였고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정죄했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도 억울하게 당하신 일이며 참으로 애매히 받는 고난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이 십자가를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2. 주님은 왜 애매히 고난을 받으셨나?

왜 주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으시되 기쁘게 받으셨

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카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한 적절한 말씀이 롬5:7-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의인을 위

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은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이같은 죄인을 위한 대속 제물로 세상에 보

내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타내신 사랑, 그 사랑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아카패의 사랑인 것입니

다.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애매히 고난을 받으신 것이 주님의 고난이시며 주님은 이런 고난을 받으시면

서도 이 고난을 인내하신 것입니다.

(2) 다음에 그리스도는 이같은 그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21절에서 '그리스도도 저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우리에게 본을 끼치신 분입니다. 순종하

시는 일에, 기도하시는 일에, 그 중에서도 고난을 당하시는 일에 더욱 본을 끼치셨습니다. 히12:3절에서 '너희가 피

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고 주님이 이처럼 애매히 고난을 당하신 일은 우리로 그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

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에 대하여 22절에서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입에 궤사도 없다고 하

셨습니다. 그러나 욕을 받으시되 그들을 대항하여 욕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까닭 없이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주님은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멸하실 수 있

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공의의 하나님만을 의뢰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이 일에 베드로 사도는 24절에서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

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시고 십자가까지 지시는 고난을 애매히 받으

신 것입니다. 이처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채찍이란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

난을 의미하며 나음을 입었다고 하는 나음이란 우리의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육신적인 질병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죄에서의 나음, 사망에서의 나음

으로 영혼의 치료를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은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결론 : 우리의 인생길에는 허다한 고난의 함정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주시는 하나님의 시련이십니

다. 낙심하거나 이같은 시련의 대열에서 낙오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므로 참아야 합니다. 21절에

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름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나를 위해 애매히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의

싸움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 - 22)

◆ 밤중소리 02-01 | VIEW : 668


(15)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복

(베드로전서 3:1-5)


성경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는 최대의 요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들 가정이 이 같은 구원의 격전장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정이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온 가정이 구원을 이루는 일은 성경에서 굉장히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가정도 베드로가 방문한 고넬료의 가정도 모두 온 가족이 구원받은 가정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남편에게 순복하라

우리는 1절에 나오는 말씀에 대하여 너무 고루하고 일방적인 구시대적 교훈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기본 권리나 구원의 대상이나 축복에 있어서 남녀간의 구별이 없습니다. 특히 성적인 범죄, 간음죄에 있어서도 여자들만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쌍방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남녀 동등권이 보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 가정의 질서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권리에 있어서는 분명한 한계선이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가정에서의 아내의 슬기로운 생활 태도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해 줍니다. 순복이란 말은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의미로 절대적인 복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같은 규율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정하신 가정의 법도인 것입니다. 이런 법도가 무너질 때 그 가정은 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질서가 무너진 가정은 평화로울 수가 없으며 가정의 행복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아내가 순복하는 방법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순복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 베드로가 말하는 ‘이와 같이’란 말은 2:18절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주종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환이 주인에게 순복하듯 그런 자세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의 지위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복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인 것입니다.

(2) 엡5:21절에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라는 남편에게 평생 복종하면서 살았는데 그 태도가 마치 주께 복종하듯 사랑과 공경과 순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엡5:24절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온몸이 머리에 순종해야 몸이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이유를 선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밑에서 좋으나 싫으나 노예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아내의 자유에 속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고전7:14-1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가진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려 하지 말고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애를 희생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 그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행위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2절에서 정결한 행위를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내의 정결한 행위는 믿지 않는 남편으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결론 : 남편은 아내의 신앙의 진가를 판별하는 감시병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의 신앙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믿지 않는 남편입니다. 그에게 인정을 받는 신앙을 가진다는 일은 그 사람의 구원에 전제조건이 됩니다. 불신 남편의 구원을 위해 진실한 믿음을 정결한 행위로 보여 주는 아내가 되도록 힘쓰는 아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 속 사람의 단장

(베드로전서 3:3-6)

베드로 사도는 3절 이하에서 여인이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겉모양의 단장은 진정한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요 속 사람의 단장이야말로 여자들이 취해야 할 참 단장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운 여인

여자는 아름다움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단장으로 그 몸에 덧입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인다는 의미에서보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마음은 거의 본능적입니다.

자기 미모에 자신감을 가진 여자들은 교만합니다. 자신의 미모에 스스로 미혹되어 자기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잠31:30절에서 여인의 미모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가장 유의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기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얼굴의 미모만 바라보고 장가들었다간 큰코다친다는 사실입니다. 얼굴 고운 것은 거짓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거짓된 것입니다. 그 얼굴이 영원히 그 상태로 존재할 것이 못되고 나이에 따라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양귀비 같은 얼굴도 나이만 들면 할머니 얼굴이 되며 죽으면 송장의 모습으로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따라가는 남자는 거짓된 것과 헛된 것을 붙잡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헛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2. 여자가 단장해야 할 몸

하나님은 여인들의 참 미모에 대하여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운 미모의 표준에 의해 여인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표준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가 자신의 미모를 영원히 간직하고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께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을 받는 일에 대한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외모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1:24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말씀하고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시온의 딸들이 사치할 일에 대하여 이사야를 통해서 경종하셨습니다. 사3:16절에서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장식품에 대하여 발목거리,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 귀고리, 팔목 고리, 면박, 화관, 발목 사슬, 띠, 향합, 호신부, 지환, 코고리, 예복, 겉옷, 목도리, 손 주머니, 손거울, 면사포 옷, 머리 수건, 너울 등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딸이란 여자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세속적인 사치 생활을 삼가야 합니다. 돈이 있고 생활의 여유가 있고보면 여자들이란 누구나 이런 몸치장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30장에서 아굴은 말하기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돈이 생기면 그 돈을 몽땅 하나님의 사업에 쓸 것 같지만 돈이 손에 들어오면 갈 때 생각 다르고 올 때 생각 다르다고 우리의 마음이 변덕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시139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옵시며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는 간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여인들이 단장해야 할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4절에서 하나님 앞에 값진 단장의 비결에 대하여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숨은 사람은 어떻게 단장하는 것입니까?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한 것이란 딤전2:10절에서 이 같은 단장에 대하여 ‘선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딤전3:11절에서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여자들의 단장인 것입니다.

그 얼굴이 아무리 미모로 다듬어진 여인이라도 은혜가 없는 생활, 믿음에서 떨어진 생애를 보낼 때 보세요. 어찌 그리 흉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요?

결론 :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은 하나님 앞에 값진 여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눈에 예쁘게 보이려고 외모로 치장하는 여인입니까?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시키십니까? 값진 단장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시는 단장으로 아름다움을 가꾸시는 여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남편의 아내에 대한 태도

(베드로전서 3:7)

오늘 본문 7절에는 남편된 자들에게 주는 아내에 관한 교훈이 나옵니다. 남편들이 아내와 동거하는 일에 세 가지로 교훈을 삼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부 관은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의무만 강요하거나 어느 한편만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런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주께 대하듯 공경하고 순복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남편의 노예 같은 존재로 인식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 대한 응당한 대우와 사랑과 존경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도 아내들과 동일하게 아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한평생 함께 동거해야 할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이란 난하주를 보면 말씀이라고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특성이라든가, 성품적인 조화, 부부 생활의 본질 등 이 같은 여러 문제에 있어서 단독적인 판단이나 남성 본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아내에 대하여 ‘더 연약한 그릇’임을 알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연하고 약하다는 뜻으로 밟히면 짓눌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면 날려가고 던지면 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내를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이해해 주라는 뜻입니다. 창2:18절에서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배필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배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연약한 그릇일진대 소중하게 간직하여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억압적으로 굴복시키는 일은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참 이유에 대하여 7절에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아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일에 있어서 아내나 남편이나 하등 구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유업을 이을 자란 사실을 잊지 말고 협력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하며 서로 신앙 생활에 유익하도록 신앙적 유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본향을 찾아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생활에 협력자와 동반자로 부부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들이 비록 남편보다 한 단계 낮은 자리에서 남편을 섬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동등한 자녀로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한쪽이 죽으면 부부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천국에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남자면 장가가도 상관이 없으며 여자는 시집가도 죄가 안돼는 것입니다. 부활한 후에도 서로 다시 만나 부부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관계, 부부 생활은 단지 이 세상에서 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서로 외롭지 않고 또 태어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생산하기 위해 부부 관계가 필요한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부부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차별이 없는 한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귀히 여기라는 말씀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알라는 뜻입니다. 아내란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내가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평생 자신을 반려자로 자기 인생을 보살펴 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 주며 가정에 따듯한 사랑의 분위기로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내이기 때문에 이 존재를 귀히 여기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네 아내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대단히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함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7절 종반에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화평은 순복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들 가정에 이것이 없으면 기도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다스리고 비인격적으로 다룬다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내와의 사랑과 화평에서 더욱 힘있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서로의 의무를 이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8)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의 생활

(베드로전서 3:8-9)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들입니다. 이 복은 물론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엡1: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예정하신 자들에게 약속된 복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복을 받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를 부르신 목적

우리들이 부르심을 입을 당시에는 우리는 복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요 복을 받을 공로라고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생활도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가 세상에서 문벌 좋은 자들도 아니며 지혜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세상의 미련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의 강한 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의 뜻은 우리들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열매를 맺히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열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의 죽으심에 함께 죽었으며 그의 살아나심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참 뜻은 우리들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마7:19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셨습니다.

2. 형제들에 대한 사랑

그런데 요즘 교인들을 보면 한심스러운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기는 하는데 그의 생활에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곳에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열매에 대해서 몇 가지로 구분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베드로 사도는 먼저 기본적인 교인들 간의 생활 자세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들입니다. 한 몸에 함께 붙어서 함께 움직이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을 같이 하는 생활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손이니 눈이 아니라고 싸우면 그 몸은 파괴됩니다. 손이나 눈이나 마음을 같이하여 한 몸을 이룰 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2) 다음에 체휼하라고 했습니다. 체휼이란 말은 다른 사람을 동정해 주는 따듯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같이 생각하여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는 동정을 말합니다.

(3)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고 한 말은 지속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가치는 그 사랑을 오래도록 지속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은 남에게 베풀지만 실은 그 효과는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받는 사람보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은 더욱 큰사랑으로 승화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4)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집안처럼 모이고 예배드리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불행을 당한 많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말은 그들에게 따듯한 온정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혹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입원 중에 있는 형제들 혹은 천재지변으로 집이나 전토를 잃고 거리에 나서게 된 형제들, 혹은 갑작스런 사고로 불행을 당하게 된 형제들, 어려운 살림으로 식생활에 고통을 당하는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내가 겪는 것처럼, 내 가족이 당한 것처럼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사랑의 손길을 뻗혀야 할 것입니다.

(5)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모든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서로간 겸손한 자세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을 제치고 자기가 머리가 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교만자의 대적자가 되실 것이라고 경종해 주셨습니다.

(6)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는 일은 원수를 자기가 갚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할 일은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원수에게 복수할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욕을 축복으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을 빌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하고저 하면 안됩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실 자에게라도 선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복을 유업으로 받아야 할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9) 생명을 사랑하는 자의 열매

(베드로전서 3:10-12)

베드로 사도는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에 대한 사랑의 열매를 열거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구약 시편34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하여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우리는 10절 말씀에서 우리의 이목을 이끄는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란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결실을 맺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귀히 여깁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말은 구원받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참으로 귀합니다. 이 생명의 가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며 이 생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부활을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육으로 심는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심어 영생으로 거두는 생활을 하며 이런 영적 생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성령으로 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갈6: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날이 약속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좋은 나를 바라보고 살아가며 그 좋은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생활은 자기 인생을 세상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이루는 한 과정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 길을 나그네로 여기고 그 종착점이야말로 좋은 날을 볼 수 있는 그 좋은 곳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롬8:24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요14:1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그곳에 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2. 이런 자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러면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십니다.

(1) 첫째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악한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말이란 모략, 모함, 거짓말, 욕하는 말, 악담하는 말, 저주하는 말 등으로 생명을 사랑하거나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2) 다음에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궤휼이란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는 일을 말합니다. 사기로 골텅 먹이는 일입니다. 고의로 잘못된 길로 남을 이끄는 일 등이 궤휼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3)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악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악인을 인도하려고 악한 무리 속에 들어가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은 악에서 떠나라,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4) 화평을 구하여 화평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은 용서와 이해와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어도 그곳에 화평을 심어줄 수 있는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은 소경도 아니시고 귀머거리도 아니십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소망이 아니라 허공을 맴도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믿음은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 생명을 가꾸고 성장시켜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날이 온다는 사실을 믿고 그날을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0) 선행과 의를 위한 고난

(베드로전서 3:17)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생이나 고난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2장에서 사람의 생애에 대하여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냐 일평생에 근심하여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고 술회한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 슬픔과 수고를 빼 놓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시련이나 고난은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것처럼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벧전2: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명심해야 할 일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고난으로 이 고난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에 대해서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으며 17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

베드로 사도는 13절에서 권면하기를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말씀해 줍니다. 열심히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선한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엡2:10절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보편성을 띈 선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면 선한 일에 대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잠3:27절에서 이르시기를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욕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우리 손으로 이제는 선을 이루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하되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선과 악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선한 보응이 있습니다. 금생의 축복과 내생의 상급입니다. 비록 그 선을 가로막는 고난이 따르는 경우가 있겠지만 낙심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갈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않으면 거두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전3장에서 솔로몬 왕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선을 열심히 행하여 심으면 그 열매는 반드시 평안과 건강과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2.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생활

베드도 사도는 14절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과 의는 어떻게 구별 짓는 것입니까? 선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일반적인 도덕적 행위를 나타나는 열매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 진리에 속한 문제인 것입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은 일반적인 고난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입니다.

선을 행할 때 그 선행에 대하여 해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려고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에는 놀라운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5:10-12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의를 위해 간직해야 할 몇 가지 사실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라’고 했습니다. 핍박자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이런 협박과 공갈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로 소동치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비방하고 무시하며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에게 그 소망에 대한 대답을 늘 준비해 두며 온유와 두려움으로 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양심적인 생활을 못하면 비방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결코 악을 행하는 일로 고난을 받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이 그리스도인인 까닭에 선행을 함으로 고난받는 일이 있다해도 차라리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야지 악을 행하는 일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의를 위한 일로 고난을 당할 때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 옥에 있는 영들

(베드로전서 3:18-20)

성경에는 여러 곳에 해석하기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로 교파간의 교리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구원론에 대한 차이점이 생겨났으며 신학적인 견해 차이를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난해 구절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19절이나 20절 말씀이 그런 난해구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내용인즉 문맥을 따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그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영들이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동안 순종치 않았던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본문을 해석함에 세 가지 방법으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 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의 날 불순종하여 옥에 갇혀 있는 영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전파하셨다는 설 등입니다.

1. 종말론적인 문제

이 문제는 종말론에 깊이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모로 연구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에 이 문제에 관하여 성경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문제점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말은 부활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육의 몸이 죽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2) 두 번째 문제점은 19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옥에 있는 영이라고 하신 그 옥이란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옥은 지옥이나 음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옥에는 많은 사람들의 죽은 영이 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영이 한정되어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20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인데 노아의 날 불순종했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3) 옥에 있었던 영은 이처럼 노아의 시대 사람으로 한정시켰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파했지만 그들은 그 경종을 믿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장사하고 집을 짓는 생활을 하다가 멸망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당시 물로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였으며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이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셋의 후손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겨온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를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홍수 심판으로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시사해 주는 말씀이 고전5:4절에 이처럼 나와 있습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살아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은 비록 불순종으로 물의 심판을 받아 육신으로는 죽임을 받았지만 그들에 대하여 특별히 배려하시어 옥에 가두어 두셨다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그의 영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그들로 옥에서 풀려 나와 천국에 가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상 오직 한번뿐인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20절에서 노아의 날에 불순종한 영들이라고 그 대상을 지적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영들입니다. 결코 지옥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 영들이 불신자들이라면 구태여 노아의 방주가 등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노아 시대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상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주님의 전파하시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불순종한 죄로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받아 육체적인 심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홍수 심판으로 죽은 굉장히 많은 수효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내시지 않고 옥이라는 특수한 장소를 만드시어 그곳에 그리스도의 날까지 갇혀 두셨다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 옥에서 풀어 주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으로나 구원론적인 면에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연옥과 연결시켜서는 안됩니다. 연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단 한번뿐인 일로 예수님의 영의 전파로 이미 끝났습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노아 시대로, 그 대상을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로 국한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노아의 시대 외 다른 시대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22) 세례의 의미

(베드로전서 3:21-22)

물과 세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세례는 물로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세례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그 근거는 율법에서 물로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외칠 때,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베푼 사실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3:5절에서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란 물로 씻는 정결케 하는 율법적 의식에 근거를 둔 것으로 부정한 것들을 물로 씻어 정결케 하는 것처럼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물로 세례를 받으므로 정결케 한다는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 세례의 정확한 기원과 그 시작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마3: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란 말에서 회개시키는 율법적 의식에서 이 세례가 등장했으며 세례를 받음으로 정결함을 받은 줄로 여긴 것입니다.


1. 세례의 기원

베드로는 세례의 기원을 노아의 방주에다 두었습니다. 그 당시 물은 두 가지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는 심판의 역사인데 회개를 거역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역사를, 회개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처럼 물은 심판과 회개의 한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전10:1-2절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널 때 홍해가 갈라져 그 가운데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홍해라고 하는 거대한 물 가운데를 지나감으로 물로 정결함을 받은 것으로 비유하여 바울은 세례와 연계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죄를 이기시고 죄에 대한 심판을 이긴 표입니다. 노아가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물의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표로 삼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원의 표라는 표현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표가 상품이 아닌 것처럼 단지 표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12:13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세례는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구원의 증거도 성령 세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물세례를 받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이 없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표로 삼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소유자인 사실을 믿을 때, 세례가 우리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2. 세례의 참 뜻

21절에는 이 같은 세례의 참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의 사유는 결코 세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수 백 번 받았다해도 그것만으로는 옛 사람 그대로이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물은 정결케 하는 하나의 의식의 표현이요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의 의식적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는 성령의 세례로서만이 실제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눈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곧 물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요는 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목적이 실제적인 성령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 받은 사람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새로운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두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중생치 못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고 받지 않고 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세례를 받았다면 죄에 죽고 의로운 생활로 새로운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23 - 26)

◆ 밤중소리 02-01 | VIEW : 617


(23) 지나간 때가 족한 죄악 생활

(베드로전서 4:1-5)


본문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강조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본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한 말은 육체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마치 갑옷처럼 삼으라는 뜻입니다. 갑옷이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몸에 방패로 무장하는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치 영적 싸움을 싸우려 나가는 전사들과 같으므로 죄와 싸울 때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체의 고난이 유익

1절과 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 성장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일에 큰 유익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고난이란 육신적으로는 싫지만 영적으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 있는 말씀처럼 고난을 통해서 죄를 그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범죄의 습성은 믿습니다로 그냥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징계를 주시고 고난의 역경을 걷게 하심으로 그 과정에서 죄를 멀리하고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오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대개 완강하고 완악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를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 온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이런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119:67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했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34:19절에서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나 태도는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란 이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내 생애 전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의 죄와 허물은 모두 용서하시지만 이제부터의 나의 생애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강력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하나님은 내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지나간 때가 족한 우리의 죄악된 생활

3절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난날 자기 생활에 있었던 죄에 대하여 미련을 갖거나 아쉬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지나간 날 우리가 즐겨 행하며 우리의 생활에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를 그 가운데로 이끌어온 죄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음란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음란의 요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소욕은 절제하기가 어렵고 그 유혹 앞에는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강력한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로는 지나간 때로 족하게 여겨 이런 유혹에 이끌리거나 그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이란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대개의 경우, 비도덕적인 요소가 작용하며 죄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정욕을 억제해야 하며 정욕이 불같이 일어날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불을 꺼야 하는 것입니다.

술취하는 일이나 방탕이나 연락이나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의 생활 습관이나 그의 육신적인 욕망을 따르면 안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이방인으로 살아갔을 때 그 때의 생활로 족하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으며 이상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비방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결국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가서 자신의 행동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행했던 그런 육체의 일에 마음을 빼앗길 사람들이 아니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 종말 성도의 기도와 사랑과 봉사

(베드로전서 4:6-11)

베드로 사도는 6절에서 심판의 하나님에 대하여 경종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직고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란 그간 육신이 죽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산 자란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날에 살아서 그 앞에 설 생존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므로 이 심판을 받을 영적 생명들이 그 육체가 살아 있을 동안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할 일은 육체는 죽어야 하지만 영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라

베드로는 우리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경종해 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말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심판은 일곱 대접 심판으로 마쳐집니다. 이 날에는 땅속에 이미 예비된 하나님의 불로 온 세계가 불타게 되어 땅속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가 매우 가까운 때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 성도들에게 세 가지 점을 경계했습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라리는 말은 지금은 잠을 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한 말은 지금은 게으름을 필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롬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또 열심을 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교회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재림에 소망을 가지고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근신하여 기도하라

다음에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의 정욕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일이 하고 싶지만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의 생활이 근신하는 생활입니다. 근신은 시련과 인내가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우리로 근신해야 할 수 있는 훈련이 되며 인내는 그 자체가 근신의 다른 한 면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생활의 방향이 기도와 전혀 다르다면 그런 기도에는 능력도 없으려니와 응답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이 기도에 합당해야 하고 그 신앙적인 방향이 기도의 방향과 한 방향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도 생활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3.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다음에 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랑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을 덮어줌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나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구원의 확신을 주고 믿음의 능력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하는 생활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 대접하는 일에 원망하지 말고 기쁘고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에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봉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종처럼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서로 봉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 :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다는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25)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

(베드로전서 4:12-16)

베드로 사도는 1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 중에 당하는 시험에 대하여 ‘불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험은 불로 연단하여 하나님께서 쓸만한 연장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시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련이란 말은 연단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시험은 우리의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익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생활이 믿음 가운데서 온전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시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한 하나의 훈련 과정으로 우리의 생애에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1.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베드로 사도는 이런 불 시험이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나의 길을 형통케 하시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실 터인데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찾아오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의심하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자기가 당하는 시험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상이 여기는 일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그는 시험을 통해서 회개하여 더 큰 은혜를 받았으며 한평생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의인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혹독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시험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더욱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더욱 큰 사명을 받을 수 있었으며 주의 이름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이건 믿음의 선진들이 겪은 이런 시험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의 생애에 어려움을 주고 많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베드로는 ‘불 시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자기에게 닥쳐 올 때 이상한 일을 만난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복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시험이건 부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이런 값있는 시험을 기피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에 누락될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애통할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 시험이 어떤 것이건 그 시험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그 시험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혹이 자신의 실수나 과실로 시험이 왔다고 해도 그런 시험에서 고난을 잘 참고이기면 그 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시험에서 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일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의 고난에서 오는 유익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 누가 그 앞에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같은 시험을 많이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시험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요 다른 하나는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지만 자기 죄악의 결과에서 오는 고난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로는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이란 말씀을 순종하는 중에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순종에는 핍박과 인내가 따르기 때문에 고난의 짐을 져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도 그런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 고난이 지기 싫어서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얼마나 나태한 것입니까?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추구하다가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박해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 앞에서는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이런 일로 고난을 받을 때 절대로 부끄럽게 여기면 안됩니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애에 이런 고난이 많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이런 고난을 감사함으로 지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베드로전서 4:17-19)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시련, 그리고 주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경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세상 사람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순서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부터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계9장에 나오는 첫째 화는 교회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심판이란 말은 알곡 중에서 쭉정이를 갈라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버리고 음녀 세력을 이루었던 세속적인 교회도 불에 사름을 받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 심판이 교회로부터 시작되느냐? 이 문제는 세려 요한이 마3:11절과 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일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로 이 일이 종말에 첫째화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일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지구가 불에 살라짐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작마당의 쭉정이들도 이 불에 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렘25:29절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겔9:3절에서 6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두려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실 때, 먼저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명하시고 그 이마에 표 없는 자들을 모두 죽이되 ‘내 성전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성전에서 시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이며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이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약3:1절에서 무엇이라 말씀한 것입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영광이 큰 직분은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두려운 심판

베드로 사도는 18절에서 ‘만약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의로운 행실과는 상관이 없으며 법적으로 보장된 의로 우리는 이 의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 겨우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어쩌다가 얻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 동안에 많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고 시련 중에서 고통을 당하며 선을 이루기 위해 많은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렇게 쉽게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생애를 살아가면서 본향에 소망을 두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서 자기 정욕과 세상의 욕망대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설자리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나 죄인들은 주님 앞에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은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일진대 이런 고난에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고 우리들로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베드로가 본문에서 주장한 대로 인내함으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우리에게 먼저 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누구에게나 안전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진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인내하여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곳이여 피난처가 되지만 쭉정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 : 교회안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로 자라는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로 영광스러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23 - 26)

◆ 밤중소리 02-01 | VIEW : 617

(23) 지나간 때가 족한 죄악 생활

(베드로전서 4:1-5)

본문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강조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본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한 말은 육체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마치 갑옷처럼 삼으라는 뜻입니다. 갑옷이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몸에 방패로 무장하는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치 영적 싸움을 싸우려 나가는 전사들과 같으므로 죄와 싸울 때 입어야 할 영적 갑옷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육체의 고난이 유익

1절과 2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 성장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일에 큰 유익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고난이란 육신적으로는 싫지만 영적으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 있는 말씀처럼 고난을 통해서 죄를 그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범죄의 습성은 믿습니다로 그냥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징계를 주시고 고난의 역경을 걷게 하심으로 그 과정에서 죄를 멀리하고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오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대개 완강하고 완악했던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를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 온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이런 결실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119:67절에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했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34:19절에서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나 태도는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란 이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내 생애 전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의 죄와 허물은 모두 용서하시지만 이제부터의 나의 생애는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강력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하나님은 내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 지나간 때가 족한 우리의 죄악된 생활

3절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난날 자기 생활에 있었던 죄에 대하여 미련을 갖거나 아쉬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지나간 날 우리가 즐겨 행하며 우리의 생활에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를 그 가운데로 이끌어온 죄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음란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음란의 요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소욕은 절제하기가 어렵고 그 유혹 앞에는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강력한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로는 지나간 때로 족하게 여겨 이런 유혹에 이끌리거나 그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정욕이란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대개의 경우, 비도덕적인 요소가 작용하며 죄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정욕을 억제해야 하며 정욕이 불같이 일어날 때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불을 꺼야 하는 것입니다.

술취하는 일이나 방탕이나 연락이나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의 생활 습관이나 그의 육신적인 욕망을 따르면 안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이방인으로 살아갔을 때 그 때의 생활로 족하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으며 이상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비방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결국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가서 자신의 행동을 직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행했던 그런 육체의 일에 마음을 빼앗길 사람들이 아니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 종말 성도의 기도와 사랑과 봉사

(베드로전서 4:6-11)

베드로 사도는 6절에서 심판의 하나님에 대하여 경종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시며 모든 사람들은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직고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란 그간 육신이 죽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고 산 자란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날에 살아서 그 앞에 설 생존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므로 이 심판을 받을 영적 생명들이 그 육체가 살아 있을 동안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할 일은 육체는 죽어야 하지만 영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라

베드로는 우리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경종해 줍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란 말은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심판은 일곱 대접 심판으로 마쳐집니다. 이 날에는 땅속에 이미 예비된 하나님의 불로 온 세계가 불타게 되어 땅속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가 매우 가까운 때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 성도들에게 세 가지 점을 경계했습니다. 하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라리는 말은 지금은 잠을 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한 말은 지금은 게으름을 필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롬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해야 하며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또 열심을 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교회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재림에 소망을 가지고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근신하여 기도하라

다음에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의 정욕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일이 하고 싶지만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의 생활이 근신하는 생활입니다. 근신은 시련과 인내가 밑거름이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우리로 근신해야 할 수 있는 훈련이 되며 인내는 그 자체가 근신의 다른 한 면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생활의 방향이 기도와 전혀 다르다면 그런 기도에는 능력도 없으려니와 응답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활이 기도에 합당해야 하고 그 신앙적인 방향이 기도의 방향과 한 방향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도 생활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3.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다음에 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랑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을 덮어줌이 없이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나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구원의 확신을 주고 믿음의 능력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이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하는 생활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서로 대접하는 일에 원망하지 말고 기쁘고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에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봉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종처럼 헌신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서로 봉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 :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한다는 자만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25)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

(베드로전서 4:12-16)

베드로 사도는 1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 중에 당하는 시험에 대하여 ‘불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험은 불로 연단하여 하나님께서 쓸만한 연장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시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련이란 말은 연단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시험은 우리의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익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의 생활이 믿음 가운데서 온전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시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한 하나의 훈련 과정으로 우리의 생애에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1.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베드로 사도는 이런 불 시험이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나의 길을 형통케 하시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실 터인데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이 찾아오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의심하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자기가 당하는 시험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상이 여기는 일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그는 시험을 통해서 회개하여 더 큰 은혜를 받았으며 한평생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의인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혹독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시험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더욱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는 더욱 큰 사명을 받을 수 있었으며 주의 이름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이건 믿음의 선진들이 겪은 이런 시험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의 생애에 어려움을 주고 많은 고통을 주기 때문에 베드로는 ‘불 시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자기에게 닥쳐 올 때 이상한 일을 만난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복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시험이건 부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이런 값있는 시험을 기피한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에 누락될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애통할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 시험이 어떤 것이건 그 시험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그 시험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혹이 자신의 실수나 과실로 시험이 왔다고 해도 그런 시험에서 고난을 잘 참고이기면 그 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시험에서 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일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의 고난에서 오는 유익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 누가 그 앞에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같은 시험을 많이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1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시험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요 다른 하나는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영광스러운 고난이지만 자기 죄악의 결과에서 오는 고난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로는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이란 말씀을 순종하는 중에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순종에는 핍박과 인내가 따르기 때문에 고난의 짐을 져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도 그런 고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 고난이 지기 싫어서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얼마나 나태한 것입니까?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추구하다가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박해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 앞에서는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가 이런 일로 고난을 받을 때 절대로 부끄럽게 여기면 안됩니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애에 이런 고난이 많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 이런 고난을 감사함으로 지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6)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베드로전서 4:17-19)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시련, 그리고 주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경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세상 사람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순서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그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부터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계9장에 나오는 첫째 화는 교회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심판이란 말은 알곡 중에서 쭉정이를 갈라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버리고 음녀 세력을 이루었던 세속적인 교회도 불에 사름을 받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 심판이 교회로부터 시작되느냐? 이 문제는 세려 요한이 마3:11절과 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일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로 이 일이 종말에 첫째화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일은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지구가 불에 살라짐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작마당의 쭉정이들도 이 불에 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렘25:29절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겔9:3절에서 6절에 나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두려움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죽음의 재앙을 내리실 때, 먼저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명하시고 그 이마에 표 없는 자들을 모두 죽이되 ‘내 성전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성전에서 시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이며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이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약3:1절에서 무엇이라 말씀한 것입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영광이 큰 직분은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두려운 심판

베드로 사도는 18절에서 ‘만약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의로운 행실과는 상관이 없으며 법적으로 보장된 의로 우리는 이 의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 겨우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어쩌다가 얻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 동안에 많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고 시련 중에서 고통을 당하며 선을 이루기 위해 많은 어려운 길을 걸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렇게 쉽게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생애를 살아가면서 본향에 소망을 두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서 자기 정욕과 세상의 욕망대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날에 설자리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나 죄인들은 주님 앞에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은 우리의 구원에 유익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일진대 이런 고난에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고 우리들로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베드로가 본문에서 주장한 대로 인내함으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우리에게 먼저 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누구에게나 안전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진리에 굳게 서서 끝까지 인내하여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곳이여 피난처가 되지만 쭉정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 : 교회안에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로 자라는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로 영광스러운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장 (27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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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장로들의 책임과 영광의 면류관

(베드로전서 5:1-4)

본문에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장로된 자라고 말하는 장로의 직분은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친 지도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1절에서 ‘나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도직분도 그 당시 장로직으로 불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권고의 말

베드로는 ‘나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 직을 받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직분자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장로된 자란 말씀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장로 직은 초대교회의 사도직분에 해당하는 영광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위에서가 아니라 그 직분 적인 사명에 있어서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받으셨던 고난을 그의 제자로서 직접 목격한 증인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이 같은 증인이면서도 자신의 경험에 의한 너무나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그것입니다. 고난의 증인은 자신도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의 흔적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친히 본 증인은 아니지만 주님의 행하신 모든 행적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고난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베드로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자기 신앙의 최종적인 승리의 선언입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소망으로 하는 그 영광이 우리의 영광으로 나타날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장래 일이라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 가운데 그 영광에 참여할 일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런 영광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첫째 부활의 영광으로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장로가 해야 할 일

베드로 사도는 자기와 함께 이런 영광에 참여할 장로들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2절과 3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득이함으로 한다는 말은 이 짐을 내가졌으니 할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피동적으로 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눅16:1-3절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이런 목회는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이런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까? 소명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직업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을 의미합니다. 모세처럼, 아론처럼, 사도들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원함으로 한다는 말은 양을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주님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자기 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3) 다음에 ‘더러운 이를 위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란 목회를 이용한 물질적 이익을 말합니다. 목회자가 돈에 눈이 어두우면 가룟유다처럼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 됩니다. 이런 이유, 저런 핑계를 대고 겁도 없이 마구 씁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에게 셈하자고 말씀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따지시고 그 불의한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목회자가 돈에 욕심을 내면 발람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돈이 많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언제인가 10여만 명이 넘는 교회 목사님들이 수10억을 국가에 환수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원 원장이 수10억을 땅에 숨겨 두었다가 환수를 당했습니다. 지금 부정 축재자를 추려 낸다면 목회자 중에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것 참으로 큰 일입니다.

(4) 그리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즐겁게 여기지 않으면 사랑의 목회, 사명의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5)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내가 목회자니 당신들은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의 행동이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회자를 능력 있는 목회자, 권능이 있는 목회자라고 칭찬하지 않고 외식하는 자, 교만한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결론 : 이런 목회자에게 오는 상급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목자가 이런 목회자가 되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8) 순복하고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5-6)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서 장로들에 대한 책임을 천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장로들에 대한 순복과 성도들간의 겸손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양 무리들은 주님이 그들의 목자로 세운 교회의 장로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겸손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1.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순복하라는 말은 순종의 강한 표현입니다. 순복은 교회의 장로들의 강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를 지도하고 가르치며 인도하는 장로들을 존경해야 하며 존경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순복인 것입니다. 양 무리들이 목자에게 순복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면 목자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책임지도록 주님의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1)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으로 교회의 목자를 세우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사를 주의 종 또는 주님의 사자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양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목자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그 시로부터 그 양은 길을 잃은 양이 되어 버립니다.

(2)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양 무리들에게 먹이는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혜롭고 충성된 종에 대하여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6:6절에서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옛날엔 아무리 벼슬이 높은 임금이나 세자라도 자기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을 사부라 하여 존경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르치는 목자에게 순복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3) 목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세우신 가장 존경 받을 어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제사장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나의 자녀들아’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갈4:19절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 무리를 키우되 그들의 영적 생명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순복하 는 자세로 목자를 섬기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베드로 사도는 5절에서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그 겸손의 본으로 예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11:18절에서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는데 허리란 몸의 중심부위인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할 때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는 허리에 힘을 써야 합니다. 허리에 힘을 쓰려면 허리를 동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허리를 동여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없으며 지체의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하면 그것으로 허리에 힘을 얻어 몸이 세워지고 온전한 몸의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으로가 아니라 겸손으로 동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만은 몸을 넘어지게 하며 몸의 활동을 마비시킵니다. 눈이 손더러 보는 눈이 없으면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느냐는 식으로 교만하면 지체끼리 화합이 안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고전12:14절 이하에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어떤 자세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까? 바울은 빌2:3절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겸손하면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깁니다. 훌륭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높다고 여기지 아니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서로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섬기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영적 유익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자기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겸손으로 서로 허리를 동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겸손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능력의 손아래서 자신을 낮추는데 있습니다. 이런 신앙적인 바른 자세에서 나오는 겸손이 있어야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런 성도들에게 높은 상급을 주심으로 겸손의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29) 염려의 처리

(베드로전서 5:7)

사람들에게는 모두 염려가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이 세상은 축복에서 저주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왔고 그 죽음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저주받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은 잠에서 깨면서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염려의 연속입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때문에 찾아 올 내일 일에 대한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압박하고 우리의 생애를 우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3: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염려가 나쁜 이유

인생의 염려는 주로 의식주 문제 때문에 옵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6: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못사는 사람은 잘 살아보려고 염려하고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아보려고 염려합니다. 또한 병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사업에 대한 염려 등 한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 염려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염려는 인간의 생리적이요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염려에 대하여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1) 첫째로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 오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염려치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불신이기 때문에 우리의 염려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염려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익합니다. 예수님은 마6장에서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을 수 없는 염려에 얽매어 자기 인생을 파탄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적은 자들이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 믿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눅21:34절에서 주님은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주님의 날을 맞게 될 때 무서운 환난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경종하셨습니다.


2. 염려의 해결책

시37:5절에서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시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잠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권고한다는 말씀은 돌보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은 나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염려라도 모두 맡으실 수 있을만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고민거리, 염려거리를 맡으시기를 스스로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일을 처리하시는 일에 내가 해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맡겨 버리란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잠3:6절에서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자기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능히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에 하나님만을 의뢰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그 분을 끝까지 의뢰하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흑암 중에서라도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나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 ·받지 못하는 생활에서 오는 재앙이나 환난은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깨끗이 도말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손길을 나타내시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30)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8-9)

베드로 사도는 이 서신을 마감하기에 앞서 성도들의 근신과 깨어 있어야 할 일에 대하여 당부하고 있습니다. 근신은 우리의 생활에 관한 자세이며 깨어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1.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

그리스도인의 근신은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나의 생각과 지혜와 정성을 다 쏟는 생활을 말합니다. 바울은 딤후4:5절에서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생활에 당면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일에 근신해야 합니다. 이런 근신이 우리의 생활에 결여되면 침노하는 자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당장에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8절에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깨어라고 했습니다 깬다는 말은 영적 경성을 말합니다. 성도가 깨어있지 않으면 영적 수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기도하여 깨어 있지 않으면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24: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기도하시기 위해 감람산에 오르실 때에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마26:4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잠자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 잠을 자면 큰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목전에서 세 번씩이나 나는 그를 모르노라고 부인한 것입니다.


2.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

그리스도인은 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에 대하여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귀가 하는 일이 나왔습니다. 마귀는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은 잔인한 자세를 가지고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 들판에서 갈대 숲이나 풀 속에 숨어 앞쪽에서 움직이는 먹이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는 사자의 신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노리는 기회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근시하고 깨어 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벗어나 죄악의 길에서 헤메일 때가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에 빠져 세상 재미에 빠졌을 때에, 사욕과 탐심과 음란과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에, 그 기회를 포착하여 사정없이 공격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이런 시험에 빠져 있기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요 스스로 시험하는 자로 우리에게 작용하며 교회 안에 가라지들을 뿌려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란다고 했습니다. 알곡 중에 많은 가라지 떼들이 함께 서식하면서 자라고 있습니다. 양들과 함께 염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뽑기를 묻는 자에게 주님은 뽑지 말고 그냥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까 염려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자는 그가 분명 가라지 인줄 알지만 그 가라지를 뽑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계하면서도 남다른 사랑과 정성을 드려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죄악에 눈을 돌릴 때, 우리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심으며 그 일을 진행시킵니다. 요13:2절에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그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유다를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귀를 상대로 적극적인 방어 태세를 취해야 합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까? 9절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일에는 먼저 믿음을 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하려면 진리로 무장해야 합니다. 소망에 흔들리면 안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또 마귀는 고분고분한 자를 가장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이기려면 그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말은 죄와 타협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죄는 무조건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고 가까이 오는 유혹의 소리에 귀를 기우려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동정하며 사랑하는 척하는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결론 : 마귀는 여러분의 바로 그 곁에서 혹 아내, 남편, 자녀, 이웃, 친구, 형제 등을 통해서 우는 사자처럼 여러분을 삼키고자 가까이 합니다. 그 정체를 말씀과 믿음으로 보라보고 동조하거나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정면으로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31) 그가 너희를 온전케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9-14)

마귀와의 싸움은 그리스도인의 온 생애에 걸쳐 계속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한 마귀는 우리들 가까이서 우리를 유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완전히 쓰러뜨리거나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는 있습니다. 욥에게 고난을 준 자도 마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귀가 주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고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란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허락 받은 그 범위를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 시험받을 즈음에 피할 길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1. 고난이 따르는 마귀와의 싸움

마귀는 비록 우리에게 육신적인 시험과 고난을 주지만 마귀와의 싸움은 결코 육신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을 육적으로 대결하면 이 싸움의 승리는 마귀에게 돌아갑니다. 엡6:11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마귀와 싸울 때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옷은 갑옷인데 이 옷을 엡6:13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는 악한 날에 능히 마귀와 대적할 무기로 필요합니다. 엡6:13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려면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허리는 우리 몸의 중심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은 진리의 말씀을 선봉장으로 내세워야 합니다. 진리를 이길 수 있는 마귀는 없습니다.

다음에 의의 흉배를 부쳐야 합니다. 마귀는 죄의 유혹으로 우리의 심장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우리의 죄를 전부 사유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주신 그 의의 흉배를 부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이 제아무리 강력해도 이 흉배를 뚫고 우리의 심장을 꿰뚫을 힘은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발을 잘못된 길로 유인합니다. 죄의 길을 보여주면서 손짓을 합니다. 롯처럼 소돔 땅을 에덴 동산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이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입니다. 의의 길입니다. 소망의 길로 연결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선 땅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발은 복음의 신을 신고 우리의 인생 길을 늘 복음의 길로 걸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향하여 불 신앙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이것을 맞으면 믿음이 죽고 불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이 화살을 피하려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써야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어 그 죄를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너는 그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구원을 받기엔 네 죄가 너무나 많고 너무도 크다고 속삭입니다. 이런 마귀의 유혹을 이기려면 구원의 투구를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얻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 구원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성령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끈질기게 시험하는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방어적인 자세만 취했지만 이 성령의 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잠깐동안의 고난으로 얻을 영원한 영광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할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잠깐동안의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잠깐동안의 나그네길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당한 우리를 온전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로 온전케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서 첫째로 그 행위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며 우리의 소망의 터전을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마감함에 실루아노로 이 편지를 대필케 하고 간단히 권면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은혜에 굳게 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