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新約]강해/◆ 공동서신 · 계시록 강해-1

야고보서 1-5장 / ◆ 밤중소리

영국신사77 2020. 4. 16. 12:45


야고보서 1장

◆ 밤중소리 11-06 | VIEW : 3,135


(1) 야고보의 문안 인사

(야고보서 1:1)


오늘부터 새벽 예배 시간에 야고보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우리는 히브리서를 배우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새벽 기도 시간에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조직적으로 연구하고 전반적으로 맥을 연결시켜 자세히 배우는 기회로 삼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부끄러움이 없이 정성껏 준비합니다. 목회자가 시간을 내어 성경을 깊이 연구한다는 일은 여간만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간을 매일 새벽 예배 설교를 통해서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주의 종들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리키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기회가 매우 적습니다. 저는 새벽 예배에서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 훈계의 말씀인 줄로 믿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 시간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야고보서의 서론

야고보 서는 주님의 형제가 되시는 야고보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고보란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신약 성경에만도 네명의 야고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다른 두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유력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인데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는 12제자 중 한 명으로 행12:2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대로 주후 44년경에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신은 주후 60년경에 쓴 것으로 이 때까지 살아 있었던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이며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주후 62년경에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서는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보여주고 있는 구원론과는 많은 모순점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기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행위로 의를 얻는다고 하는 이 야고보서를 배척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구원의 교리는 시종 일관,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는다는 구원론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보면 행함으로 의를 얻는다는 내용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바울의 경우와 야고보의 경우처럼 그 얻는 방법이 하나는 믿음으로 하나는 행함으로 갈라질 수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런 것이 아니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로 극단에서 극단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구원의 교리가 달라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밝혀 준 것이요, 야고보의 경우는 구원의 결과에서 나오는 열매에 대하여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신득의를 주장하는 바울의 구원의 교리는 요3:18절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마7:16절 이하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를 쓴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양면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작을 보았습니다. 시작은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끝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끝은 언제나 열매가 따릅니다. 이들의 주장에는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야고보는 이 편지 서두에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종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맡아 주님을 대신하여 목자의 사명을 가진 사명자로서의 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지혜롭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맡은 사명을 다 이루고서도 무익한 종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자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의 종이 되어 그 지위를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사람의 종인 것입니까? 사람을 두려워하여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전하지 못할 때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양 무리들이 싫어한다고 전해야 할 교훈이나 경종이나 회개를 외치지 않는다면 이런 종은 사람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주려는 생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팔린 몸이니 자기 뜻대로 살면 안됩니다.

결론 : 우리는 야고보서를 배우면서 아직까지 열매를 맺지 못한 신앙 생활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신앙 생활의 승리는 말씀에 대한 열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매를 맺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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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험과 인내(야고보서 1:2-4)

◆ 밤중소리 11-06 | VIEW : 3,264

(2) 시험과 인내

(야고보서 1:2-4)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시험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얼마나 유익한가에 대한 격려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시험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13절에 나오는 시험의 경우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시험은 헬라어로 '페이라조메노스'란 단어인데 이 같은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정욕적인 유혹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2절에 나오는 시험은 헬라어로 시련이란 의미의 '페이라스모스'로 불려집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말씀에 나오는 시험은 시련이 아니라 죄의 유혹에서 오는 시험으로 '페이라조메노스'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시험

2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 서신을 받는 교회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시험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시험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크게 두 종류의 시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의미에서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시시때때로 만나는 시험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험을 만나야 할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내가 악한 생각으로 꾸민 일도 아니요 마음으로 죄악을 품고 유혹을 받은 일도 아닌데 난데없이 시험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일을 자신의 양심의 판단이나 자기의 지성적인 생각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일이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죄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경우는 그런 일로 인하여 오히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도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그런 일이 시험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받는 일은 똑같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받는 의미란 단순한 고통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 슬픔이 오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는 유익함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출세하는 밑거름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은 그 받는 의미가 뚜렷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일이 신앙적인 연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단에 합격하면 그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에게 오는 앞날의 모든 결실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만났을 때의 태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애에서 시험을 만났을 때의 태도에 대하여 첫째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기쁘게 여기란 말의 뜻은 아무리 슬퍼할 만한 일을 만나도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시험 중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고 여길 만한 가운데서도 결코 낙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라는 말은 바랄 만하고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여기라는 말이 성경에 몇 군데 나옵니다.

롬6: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히12: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징계가 슬퍼 보이지만 그러나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만났을 때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그 시험에 대처하면 그것이 '믿음의 시련'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시험을 신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빠져 나오려 하고 혹은 그 시험 중에서 정말로 시험에 들면 그 시험이 결코 믿음의 시련이 될 수 없습니다. 시험을 만났을 때에 기쁘게 여기고 참고 믿음으로 승리하면 믿음의 시련이 되어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시험을 당한 그리스도인 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롬9: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론 : 시험은 누구의 생애나 생활에나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시험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자신의 신앙

을 돈독히 하고 크게 성장하며 영육 간에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온전히 기쁘게 여

겨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우리의 신앙적

인 유익을 얻는 기회로 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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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험과 지혜(야고보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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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험과 지혜

(야고보서 1:5)

그리스도인이 되면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새로운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써먹던 인간의 지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분별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1. 두 가지 지혜

우리가 지혜를 말할 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간 본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인간 본래의 지혜는 선천성에 많이 좌우됩니다. 선천적으로 남다른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혈통이라든가, 불가사의적인 어떤 신체적 조건으로 남달리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에서 지혜를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문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기도 하며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생각들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또한 경험이 많으면 지혜도 따라갑니다. 경험이 인간에게 하나의 성숙한 지혜의 역할을 해 주므로 우리의 삶을 원활하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이런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는 이런 지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지혜 중에 가장 위대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생명을 얻는 놀라운 지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학문으로는 배울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의 영감으로 주십니다. 지혜의 전달자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므로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성령의 영감으로 주시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샘물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살아가는 길에 평안이 깃들고 형통하는 길을 걸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말씀과 가까이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이같은 지혜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 지혜가 절실히 소요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가 시험의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미쁘시사 우리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쉬운 시험만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큰 시험이 와도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할 힘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어린 요셉은 자기에게 부단히 닥쳐오는 시험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능히 감당케 하사 이김을 주셨습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끝까지 시험을 이긴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은 지혜를 써서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시험 중에 하나님의 이같은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더욱 큰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만났을 때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는 일에 주고 안주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둘째는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왜 요구하는냐고 꾸짖는 법이 없으십니다. 다음에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늘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즉각 하나님의 지혜로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자기 육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따르다가 낭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에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지만 인간의 지혜로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녀 교육이나 가정 생활에 하나님의 지혜가 작용하면 화평하고 감사할 수 있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아름답고 축복된 생활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출발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

고 그 지혜대로 처신하십시오. 지혜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안내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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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하는 자의 태도 (야고보서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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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하는 자의 태도

(야고보서 1:6-8)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성경을 펼쳐 보면 '구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는 무엇이냐? 하나님께 구하는 생활입니다. 구하는 자가 받는다고 하셨고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는 사람이 복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 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구하여 가질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배워서 구하는 일에 차질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구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1. 믿음으로 구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을 지킬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믿음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믿습니다 라고 다짐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가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지만 그 믿음은 우리 마음대로 믿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엡2:8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1) 우리의 구하는 바가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2) 구하는 내용이 육신의 정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3) 믿음을 가지려면 순종하는 생활이 평소에 따라야 합니다.

(4) 그리고 믿음을 갖기 위해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

의 확신은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2. 의심하지 말라

6절 말씀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두 번째 원칙은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조금도'란 토를 달았습니다. 전혀 의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의 기도가 무엇과 같은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다 물결은 바람에 밀려 요동합니다. 바다 물은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동한다는 말은 마음이 믿음으로 정착되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믿음으로 깊은 뿌리를 내려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마음은 바다 물결처럼 자기 생각에 요동하고 세상 걱정에 요동하고 죄악의 유혹에 요동합니다.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이란 무슨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세상이냐 하나님이냐에 있어서 어느 한 가지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서 머뭇거리면서 이편도 쫓기도 하고 저편도 쫓기도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6:24절에서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응답해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까? 모든 일에 정함이 없을 때에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관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살아도 주요 죽어도 주요 오직 내 생애는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뚜렷한 삶의 자세를 가지지 못할 때 정함이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때 기도에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그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정욕으로 기우러질 때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육신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이 기우러 지는 사람은 정욕에 넘어지게 됩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평범한 생활에서부터 말씀에 대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마

음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도록 자기 마음을 살피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되고 담대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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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야고보서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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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인의 생활 태도

(야고보서 1:9-11)

그리스도인의 시험은 잘살려는 욕심에서 생깁니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가지 시험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딤전6:9절에는 부자가 되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시험이 나옵니다.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하려는 자들이란 말은 어떻게 해서라도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마음 때문에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되고 정욕에 떨어지고 침륜에 빠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냐,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느냐의 기준이 바로 물질로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은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돈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그 돈 관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적인 진실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가난한 형제의 자세

9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낮은 형제라고 말씀해 주는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학식이나 가문에 있어서 비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교만한 마음을 가지란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만해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위축되거니 스스로 비하하지 말고 힘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인 다운 보람있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신분의 고하나 재물의 유무를 떠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의 신분이 얼마나 높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록 멸시받아야 할 비천한 사람이라 해도 떳떳한 자긍심을 가지고 자기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차원 높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잠깐동안 누리는 명예와 부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굴한 자세로 예수를 믿지 말고 당당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가난하셨으며 연약하셨으며 육신적인 신분이나 가문은 보잘것없었습니다. 그 분은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으며 나중에는 십자가의 부끄러움까지 당하셨는데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견디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들 앞에 있는 소망의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높음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보배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같은 보배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벧전1:18절에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보배로 알고 있는 금이나 은으로도 값 주고 살 수 없는 참 생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얼마나 부요한 자인가를 알고 자기의 부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부한 형제의 자세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부한 형제들이란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의 생활 태도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데 이들에게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부를 누리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권세나 명예를 가진 그리스도인 들은 자칫하면 교만하기 쉽고 자기의 높음 때문에 교회에서 다른 형제들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말은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람들의 종이 되신 것처럼 스스로 낮아져서 형제들의 종으로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낮아지셨으니 나는 그 분에 비하여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가를 스스로 깨달아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자기의 모든 소유와 명예와 권세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인 줄 알아 스스로 낮아져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세는 풀과 같고 풀의 꽃과도 같은 것으로 하나님이 취하시면 추한 모습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11절에서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누리는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밝혀 줍

니다. ( ). 우리는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다만 주를 위해 나의 생애를 바치는 일로 삶의 보

람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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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스도인의 당하는 시험과 상급(야고보서 1:12)

◆ 밤중소리 11-06 | VIEW : 2,918

(6) 그리스도인의 당하는 시험과 상급

(야고보서 1:12)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2절 초두에 복이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누구나 다 당합니다. 시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복이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시험 그 자체는 복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불같은 시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험 그 자체는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 보인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시험에 복이 따르는 경우는 그 시험을 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시기까지 인내로 견뎌 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본격적으로 듣기 전에 여기서 말씀하시는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련 하시기 위해 주시는 연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련을 의미하는 '페이라스모스'인 것입니다. 13절에 말씀해 주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시험과는 구별되는 시험입니다. 하나는 자기 욕심에서 죄의 유혹으로 오는 시험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성도들의 신앙적인 연단으로 오는 시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르는 시험은 받을지언정 죄의 유혹으로 오는 정욕적인 시험에 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인 줄 알고 그 시험을 피하려 하지 말고 순히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욥이 받은 시험이 이런 종류였는데 욥이 이 시험을 받았을 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에는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사롬에게 쫓기어 예루살렘을 도망쳐 나갈 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란 자가 왕을 저주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장군들이 그 자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못하게 하면서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세 번째로 성도들은 이런 시련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믿음에 담대하여 끝까지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2. 옳다 인정하심을 받아야 한다.

시험은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한편 시험엔 일정한 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시험은 물론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으시거나 누구의 참소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사탄의 참소를 듣기는 하셨지만 그 참소 때문에 욥을 시험하신 것은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하십니다. 그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도 굽게 할 수도 없습니다.

시험에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합격선이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선까지 꼴인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험에 합격한 것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시험을 당하는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하십니까? 감당하지 못할 어려운 시험을 안주십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우리들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합니다. 깨어 기도하게 하십니다. 만약에 시험에 든 사람이 깨어 기도하고 있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때까지 인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시험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십니다. 이 말씀

은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 시

험을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 뒤에는 영육 간에 축복이 따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하늘

에서 받을 상급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만났을 때, 이런 면류관을 받을 소망을 가지고 인내로 이길 수 있기

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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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시험과 욕심과 사망 (야고보서 1:13-18)

◆ 밤중소리 11-06 | VIEW : 4,661

(7) 시험과 욕심과 사망

(야고보서 1:13-18)

본문은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와 시험을 받는 근원적인 원인을 밝혀 주시므로 시험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받고 있는 본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시험을 받는 자의 태도

13절 초두에 나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시험을 받을 때에란 말은 시험의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시험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징계하는 것이건 우리에게 재앙이 내려지는 것이건 모든 원인이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시험을 세 가지 부분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는 징계로 다루십니다. 이 시험은 우리의 범죄로 내려지는 시험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계를 해서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계는 범죄요, 망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연단으로 다루십니다. 우리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일에 있어서 오랜 기간 연단 하십니다. 이 연단의 방법은 징계와 비슷하게 내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혹은 질병으로 받는 경우도 있으며 사업의 어려움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연단은 끝까지 인내로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판으로 다루시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의 근본 동기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왜 시험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 14절에서 그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의 원인은 시험을 받는 각 사람의 욕심에서 나옵니다. 렘17:9절 말씀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욥이나 다윗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욕심에 끌려 미혹될 죄악성, 부패성이 있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욕심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요소입니다. 욕심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욕심이 들어가면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곧 처/.리되지 못하면 당장에 죄를 낳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다는 말은 욕심이 마음속에 들어간 후, 얼마간 머물면서 자리잡아 그 마음을 주장하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에 매어 욕심의 포로로 잡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욕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까?

① 욕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엡4:22절 이하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②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갈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갈5: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

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자기의 행실 뿐 아니라 자기 마음속까지

살펴 회개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

다.

죄가 장성한다는 말은 죄는 가만히 머물러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커져 간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

고 있습니다. 죄는 적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자라나는데 죄가 자라서 성년이 된 것을 사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바늘 도둑이 황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대로 놔두면 절대로 안됩

니다. 급기야 사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죄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

까?

① 롬6:11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② 롬8:5절 이하에서 이르시기를 그리스도인은 영을 좇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

제들아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욕심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욕심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 :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각양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욕심으로 오는 시험의 요소를 믿음으로 승리하여 위로부터 내려오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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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험을 이기는 생활 (야고보서 1:19-25)

◆ 밤중소리 11-06 | VIEW : 2,851

(8) 시험을 이기는 생활

(야고보서 1:19-25)

본문은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듣고 말하는 문제와 성내는 문제, 도를 행하는 문제 등에 관하여 몇 가지로 구분해서 언급해 줍니다.

1. 듣고 말하는 문제

사람들간의 화평을 유지하는 일과 서로 사랑의 교통을 나누는 일에는 듣는 일과 말하는 일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민감한 이 문제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19절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입의 말은 화평의 무기도 되고 불화의 무기도 됩니다. 그리고 시험의 큰 요소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교훈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의 의사만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듣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들으며 그 뜻을 속히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는 대단히 훌륭한 처세술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전10:14절 말씀에는 '우매자는 말이 많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떠드는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잠10:19절에서 이르시기를 '말이 많으면 허물이 많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허물이 거의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실수에서 나옵니다.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말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15:2절에서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지만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자로 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은 남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20절 말씀을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을 내는 일은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나중에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성낸다는 말은 분을 낸다는 것으로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이 심한 분노를 내며 그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 많은 손실을 보는 것입니다. 잠29:22절에서는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다'고 했습니다. 잠15:18절에서는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켰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성내는 일, 분노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21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분을 품고 그 분을 쉽게 내는 일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더러운 것들과 넘치는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도리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격분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

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를 향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자에게 왜 자기를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까? 알면서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속이는 일은 이중적인 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에게 비유적인 말씀으로 교훈 하시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듣는 일 따로, 행하는 일 따로 이기 때문에 생활에 적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볼 때는 어떻게 생긴 것을 바라보았지만 그 거울 앞을 떠나면 그 얼굴을 잊어 버리는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는 그럴 듯 하게 들리지만 그 앞에서 떠나면 옛날 그대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5:13절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듣기만 하고 행하는 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돌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뿌리가 내려지지 않기 때문이요 가시와 엉겅퀴에 떨어진 씨앗처럼 양분을 빼앗겨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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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 (야고보서 1:26-27)

◆ 밤중소리 11-06 | VIEW : 9,123

(9)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

(야고보서 1:26-27)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에 관한 교훈의 말씀이 나옵니다. 경건이란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 하고 조심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같은 경건 생활에도 진실과 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을 자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헛것이란 헛된 경건으로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경건이란 뜻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곧 경건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경건이 외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경건 생활이란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로 거룩한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건이 외식된 경건입니까? 25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경건은 사실인즉 경건이 아니라 외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경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경건하지 못하고 죄로 얼룩진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가슴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 중 세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경건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건을 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경건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들어 내고 자신의 명예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건은 자기가 자신의 경건을 나팔 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얻는 칭찬에 목적을 두며 자기 만족에 목적을 두는 경건이기 때문에 외식된 경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헛된 경건

26절에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혀에 자갈을 먹여야 합니다. 진실한 경건 생활은 입의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말로 자신의 의를 선전하고 자기 선행을 나팔 불면 이런 경건은 혀에서 나오는 경건이지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신앙에서 나오는 경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 혀에 재갈을 먹인다는 말은 쉬 분내지 아니한다는 것이요, 말을 많이 하므로 실수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며,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므로 그 자랑이 헛된 대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이란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경건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27절에서 '정결하고 다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이란 첫째로 그 경건이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어야 정결합니다. 그가 마음에 품은 뜻과 나타나는 행실이 정결해야 경건한 생활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가 된 교회의 고아나 과부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보지 못한 척 외면하는 사람은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경건된 생활을 하려면 그런 형제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15:7-11절에 있는 말씀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것과 돈이 아까워 자기 손을 움켜지지 말 것과 자기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 생활은 세속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생활입니다. 세속에 물들면 경건 생활은 끝장 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십니다. 엡4:22절 이하에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갈2:20절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갈6:7-8절에서 성령을 위해 심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경건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경건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

가야 할 것을 삼가 하며 행해야 할 것을 행하는 생활이야말로 경건 생활의 표준입니다. 입으로 외치며 입으로만

자랑하는 경건 생활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생활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2장 (10 - 14)

◆ 밤중소리 02-01 | VIEW : 889


(10)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야고보서 2:1-4)

사람에게 있어서 외모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시는 일에 있어서 외모로서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하려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외모를 그 사람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1. 사람의 외모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그 대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고 사무엘을 다윗의 아비 이새의 집에 보내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사무엘은 이 8명 중 어느 아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인지 몰랐습니다. 큰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외모의 준수함을 본 사무엘은 이 엘리압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시려는 왕의 재목으로 알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1) 사람들에게는 겉으로 나타난 것을 중시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권위 있는 옷을 만들어 자신의 권위를 겉으로 나타냈습니다. 군인들 중 장군들의 계급장이나 옷차림 역시 엄위한 모습을 보이는 외모로 치장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옷차림이나 겉으로 풍기는 자신의 또다른 모습으로 자기 위엄을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인격의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값진 단장에 대하여 벧전3:3-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줍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의(義)란 낱말의 한자를 보면 머리 위에 아름다울 미(美)자가 있고 그 아래에 자기를 가리키는 아(我)자가 엎쳐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름다워진다는 뜻인데 여기서 나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는 겉사람이 아니고 속사람을 가리키며 속사람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의로운 행실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2) 다음에 사람들에게는 물질의 부요를 그 사람의 인품과 결부시키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잠19:4절에서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장의 7절 말씀에는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판단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판단하시는 것입니까?

삼상16:7절 말씀을 보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뜻은 무엇을 말합니까?

거짓이 없는 진실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건 진실만이 통합니다. 시51:6절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회개도 진실한 회개가 열납됩니다. 이런 회개는 그가 비록 무서운 범죄를 했다해도 흰눈같이 없었던 것으로 처리됩니다. 다윗의 회개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34:18절에서 ‘하나님은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진실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런 기도에 응답을 내려 주십니다. 시15:18절에서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말도 진실한 말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잠12:19절에서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된다’고 하셨습니다. 계19:11절에는 주님의 또다른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처럼 겉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본문 1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은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몸단장에 기준을 두고 차별 대우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적어도 교회에서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차별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잠14:31절에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교회에서는 물질의 유무에 기준을 두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그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부끄러움이 없도록 진실하게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빈부에 차별을 두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들 자신이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11)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야고보서 2:5-9)

이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로 한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부자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자에 대한 것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교훈이 상당히 나옵니다. 그 교훈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부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에 대한 경고가 나오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소망이 나옵니다.

1.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그러면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어떤 차별의 기준을 두었기 때문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그 자신의 부요함으로 교만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만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압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그의 생활이 세속화되기 쉬운 것입니다. 세속화된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시고 준엄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당신의 자녀들을 그들이 가진 재물 때문에 잃어버리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재물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그의 자녀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복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성도들에게는 채찍으로 다스리시고 엄중한 경종으로 두려움을 갖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비유가 여러 번 나옵니다. 자색 옷 입은 부자의 경우, 그는 자신이 가진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등한히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돈을 벌려는 욕심에만 마음을 썼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계획에서 제쳐놓은 것입니다. 영생을 구한 한 청년은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을 버리고 근심하며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들에게는 왜 하나님께서 관대하신 것입니까? 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며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까? 사람이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보면 비굴해 지기쉬운 것입니다. 원망하기 쉬운 것입니다.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위로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붙들어 주시며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배려하십니다. 세상에서 부자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가난한 자를 택하시는 이유는 부자는 그 소유하고 있는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들도 물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자들로 자신의 재물을 의뢰하지 않게 하신 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고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느 한 가지의 부요밖에 택할 수 없습니다. 재물의 부요를 택하든가, 믿음의 부요를 택하든 가입니다. 재물의 부요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람은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부요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람은 그의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이 이치는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자신의 재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부자는 실상인즉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언제나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는 그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재물을 소중히 여기며 재물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은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요한 사람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만약 그것을 구별해서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나머지 부요한 사람과 차별을 둔다면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한 법을 알아야 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웃은 불행을 당한 가난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먼저 물질에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겸손하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 자기의 재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더욱 큰 소망을 가지고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2) 심판을 이기는 긍휼

(야고보서 2:10-13)

율법은 인간을 정죄합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가리키는 증거입니다.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복음은 설 땅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결코 율법적인 행함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본문 10절과 11절에서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법대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율법적인 의를 얻을 수 있는가.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율법에서 가르쳐 주는 바는 죄는 어떤 죄이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살인죄는 중한 죄여서 지옥에 가고 거짓말한 죄는 경한 죄여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비중은 다 똑같습니다. 온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도 아무리 적은 법이라도 그 하나에 거치게 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율법관입니다. 무슨 죄를 범해도 죄의 값은 역시 사망인 것입니다.

죄는 하나씩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하나의 죄가 그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류를 가지고 죄의 경중을 다루거나 시비의 대상으로 오르내리면 안됩니다. 나는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지만 너는 간음죄를 범했으니 누구 죄가 더 크냐고 시비할 것이 못됩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가 또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모두 같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7:3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상대방이 바라보았을 때 무서운 죄로 여긴 것입니다. 살인죄, 간음죄 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에는 같은 죄이지만 형제를 판단하는 죄가 첨가되었기 때문에 티보다 한 수위인 들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율법 전체의 죄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경중이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행동 지침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 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벗어났다는 뜻은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죄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아니하며 율법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으사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진리라면 우리는 결코 율법적인 정죄를 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말은 율법의 구속을 받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얽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심판의 두려움으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율법이 두려워 율법을 준수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에서 벗어난 일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눌 본문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지침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정죄나 구속은 받지 않지만 심판을 받을 자처럼 여겨서 말도, 행동도 조심하고 근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은 법으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생활은 하나님 앞에 율법보다 우월한 열매를 맺습니다.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났다고 방종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복음 안에서 심판을 받을 자처럼 생각하는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긍휼을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경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과실을 용서해 주고 죄를 관용해 주며 화목하며 먼저 사과하는 모든 일이 긍휼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은 율법에 근거를 두면 안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식의 생활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보다 더 온전한 법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은 자유인의 율법이요 긍휼의 율법입니다. 이런 법을 지킬 수 있는 성도의 생활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13) 믿음과 행함

(야고보서 2:14)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야고보서를 이해하는 일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1. 믿음과 행함의 올바른 관계

우리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 둘은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경우와 야고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롬4:9절에서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을 믿음에 그의 이 같은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롬9:30절에서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지만 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의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한 것입니다.

갈2: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약2: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약2:20절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인줄 모르느냐’고 했습니다.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1절 이하에서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어느 쪽이 진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주장 모두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도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 주장이 다 진리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혼돈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울은 의를 얻는 동기를 본 것이고 야고보는 의를 얻은 사람의 행위의 결과를 본 것입니다.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는 행함의 논리는 행함으로 의를 얻어야 한다는 율법적인 의를 가리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에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 믿음에서 나온 열매가 없다면 믿음을 가졌다는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믿음에서 열매에 이르는 과정을 행함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열매

믿음에는 반드시 열매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주신 목적이 이 열매에 있기 때문입니다. 롬7: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주장의 초점을 열매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어야 하는데 진실한 믿음의 기준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논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마13:8절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에는 네 종류의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그 중에 오직 한 사람인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로 이 믿음의 사람만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30배로 60배로 100배로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열매를 행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15:2절에서 예수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같은 믿음의 열매를 행함이라고 말하고 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겠느냐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으로 의의 결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롬6:17절에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롬8:5절에서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믿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지난날의 육신의 생명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새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차의 레일처럼 언제나 병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열매로 나타나며 이 열매는 또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질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14)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

(야고보서 2:15-26)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죽은 믿음과 살아 있는 믿음으로 나누고 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야고보 사도가 주장하는 행함의 원리를 보면 그가 주장하는 행함의 믿음은 율법적인 행함인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행함임을 쉽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믿음의 종류

성경을 보면 믿음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큰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15:28절에서 예수님께서 딸을 괴롭히는 흉악한 귀신을 쫓아달라는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인의 중한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나온 백부장에게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바라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의 차이를 두셨습니다.

(2) 적은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6:30절에서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 책망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하여 염려하는 믿음을 적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3) 스스로 속이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의 믿음이 그런 믿음입니다. 스스로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으로 실상인즉 믿음의 소유자가 아닌 것입니다.

(4)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었습니다. 17절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믿음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믿음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거나 믿음은 있지만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거나입니다.

(5)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의 시험과 확증은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에 초점을 두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헛된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요 살아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장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네 믿음을 보이라

본문 15-16절에 나오는 행함의 믿음은 마25:3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에서의 심문 내용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경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에 이를 자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행함이 없는 자들에 대해 엄중한 경종을 둘려 주신 것입니다.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하고 했습니다. 그런 믿음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8-19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대조적으로 양립시켜 논쟁을 유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행함이 있는 한 사람이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는 다른 한 사람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눈여겨볼 일은 두 사람 모두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고 한 사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일은 19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의 위험성을 귀신의 경우와 결부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가졌노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인즉 귀신들만도 못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21절 이하에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을 예로 들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라합은 행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했으며 행함으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 받았습니다.

결론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의 가치가 없습니다.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헛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원하십니다. 그 증거가 행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행함의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 (15 - 17)

◆ 밤중소리 02-01 | VIEW : 709


(15) 선생들이 자들의 책임

(야고보서 3:1)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선생된 자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들은 교회의 지도적 입장에서 사실상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인데 이들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성생된 우리가‘라는 표현으로 선생된 자들의 교회에서의 위치와 직분이 사도들만큼이나 존귀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 치리권을 가지고 교회의 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장로들, 그리고 여러 기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의미합니다.

1. 선생 된 자의 책임

1절 말씀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이 말씀은 선생이 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지 못한 선생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런줄 알고 선생 된 소임을 다 하라는 경종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에서 특별히 행함의 대한 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야고보 사도는 만약 교회에서 선생의 위치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행함이 없는 생활을 한다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임은 당연한 일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선생 된 자의 책임이 이처럼 막중한즉 그 사실을 알고 선생 되기를 원하며 선생된 책임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흥회 때,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았다고 주의 종이 되기를 서원하거나 믿는 가정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주의 종으로 바치기를 서원하거나 하는 일은 대단히 경솔한 일인 것입니다. 주의 종의 명예나 그가 장차 누릴 영광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그에게 올 하나님 앞에서의 큰 심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날에 이 같은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을 줄을 모르고 자기 정욕대로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며 인간적인 목회를 하는 주의 종들이 어디 한 두 명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이 받을 영광이 큰 대신에 그들에게 요구하는 사명은 엄중하시며 그 책임 역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조심해야 할 선생 된 자들

그러면 이들 선생 된 자들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선생 된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것입니까?

(1) 선생 된 자는 외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많은 교훈과 경종을 주셨습니다. 마23:1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가르치되 겉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하며 남에게는 행함을 요구하지만 자기는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2) 선생 된 자는 소경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며 자기는 행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행함을 요구하는 일은 소경된 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목회자는 결국 자기도 양무리들도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3)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영혼의 빚 보증인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13: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사명감이 없이는 선생 된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4) 선생 된 자는 전해야 할 것을 반드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짖지 못하는 개처럼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말씀을 전한다면 그들의 피 값에 대한 보응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종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은 원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하나님의 종된 사명에 대하여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씀해 줍니다. 삯군은 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선생 된 사명을 받은 자들은 선한 목자로써의 자신의 위치를 잘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10:12절에서 예수님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의 맡은 사명을 위해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들에 대하여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고 하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님이 버리십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에서 선생된 직분을 가지고 남을 가르치며 인도하는 자들은 무릇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하며 양 무리들의 본된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기고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직분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 사람의 말의 중요성

(야고보서 3:2-12)

야고보 사도가 1절에서 ‘많은 사람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고한 말은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성도가 실수한 것은 혹 용납될 수 있지만 선생된 자가 실수한 것은 용납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생의 실수는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사람의 실수 중에 가장 위험하고 근본적인 실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의 경종은 여러 곳에 많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마12:3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1. 말이 왜 중요한가?

그러면 말이 왜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은 그 사람의 감춰진 참모습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거울처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본문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① 진실한 말만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② 한번 말로 나타낸 것은 반드시 그 말대로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③ 무익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④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 말의 실수가 있는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누구에게도 말의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2. 혀의 어거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말의 실수를 막기 위해 입에 재갈을 먹여야 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갈을 먹여 어거한다’는 말은 말이나 소를 모는 일에 그 입에 재갈을 먹여 억지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우리의 입에 재갈을 먹여 우리의 온몸을 억제하는 강제적인 억제력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들이 자기 혀를 재갈 먹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4절로부터 길게 말씀해 줍니다. 인간의 혀를 배를 젓는 키로 비유했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작은 키에 의해 방향이 잡혀지고 항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키가 방향을 잘못 잡는다면 그 배의 운명은 끝장인 것입니다. 여기서 배는 자기 생애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배를 운행하는 인간의 원동력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작은 혀에 있다고 했습니다. 항해 중에 있는 배의 운명이 작은 키에 있듯이 사람의 모든 운명이 자기 지체 중에 지극히 작은 자기 혀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간의 혀를 또 불로 비유했습니다. 많은 나무가 타서 소멸되는 것은 어떤 큰 동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불이 부쳐지면 아무리 큰 나무라도 전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무는 우리의 생애를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며 또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아간다고 해도 혀는 능히 이 같은 그 사람의 생애를 파말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혀란 이토록 무서운 파괴력과 자기 파멸의 원동력이 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혀는 인생의 불이라고 했습니다. 또 불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불의가 나오는 출구는 바로 그 사람의 혀라는 뜻입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혀는 우리 인생의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혀의 불은 곧 지옥 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란 말입니다. 혀가 인생을 파멸시키는 것이 마치 지옥의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작은 지체지만 길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지체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혀는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변화로 사람이 새로워져야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가 생명의 열매를 맺는 혀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혀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순된 생활인 것입니다.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고 했습니다.

결론 : 12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의 샘에서 나오는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 샘이 짠물을 내는 샘이면 짠물이 나올 뿐, 단물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먼저 길들여 말의 실수가 없는 자가 되기 위해 새사람을 옷 입어 단물을 내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7) 천적 지혜와 마귀적 지혜

(야고보서 3:13-18)

누가 지혜자인 것입니까? 누구에게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는 13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 짓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하나는 세상적인 지혜로 마귀적인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한다면 그는 선행으로 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은 매우 공격적이고 도전적입니다.

1. 위로부터 난 지혜

17절 말씀을 보면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에 대하여 행함으로 나타난 열매를 몇 가지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결하다고 했습니다. 성결하다는 말은 더러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사함이나 거짓됨이 들어가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성결한 마음을 소유하며 깨끗하고 진실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에 성결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둘째 화평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쟁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다툼을 멀리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화평을 심고 화평을 거둡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화평은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자기와 화목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골1:20절에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라고 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과 화평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생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회개의 과정이 없이는 화평의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에 형제들과의 화평을 기해야 합니다. 먼저 자기 집안의 식구들이 화목해야 합니다. 잠17:1절에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가난한 집의 화평이 부잣집의 다툼보다 복된 삶인 것입니다. 이웃과의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살전5:13절에서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화목은 자기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막9:50절에서 예수님은 ‘소곰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곰은 희생을 말합니다. 자기가 녹는 회생이 없이는 맛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관용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은 넓은 마음으로 가슴에 끌어안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런 관용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관용은 사랑의 깊은 뿌리가 됩니다. 관용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계속적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빌4:5절에서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내 그들로 우리의 관용을 알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위로부터 난 지혜는 양순하다고 했습니다. 양순이란 말은 온유와 겸손을 말합니다. 지극히 순결하고 온유한 마음에서 양순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긍휼의 열매와 선한 열매가 가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긍휼히 없다는 말은 잔인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편벽되다는 말은 한편 쪽으로 치우쳐 판결로 진실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2. 마귀적 지혜

그러면 마귀적인 지혜는 어떻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적인 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마귀의 지혜는 간교합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한 마귀는 그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을 가지고 유혹한 것입니다. 마귀적인 지혜는 마귀의 성품을 따르기 때문에 마귀의 본성대로 진리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모든 계획이 정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결론 : 야고보 사도는 13절에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고 묻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선행으로 그 본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건 증거를 위주로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온유함으로 그 지혜의 진실성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과연 위로부터 주신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지혜로 마음을 다스리며 선행의 열매를 맺으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 (18 - 21)

◆ 밤중소리 02-01 | VIEW : 686


(18) 정욕의 무익

(야고보서 4:1-3)


야고보 사도는 1절에서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고 말씀해 줍니다. 인간들의 시기와 싸움이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지체 중에 있는 정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이 정욕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정욕으로 좇아 난 싸움과 다툼

정욕에 대하여 야고보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이 이 육신의 정욕 때문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체 중에서 나오는 정욕으로 말미암는 싸움 때문에 고민합니다. 바울은 이 싸움에서 번번이 정욕에 지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롬7:21절 이하에서 이처럼 탄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밥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르 건져 내랴’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정욕에서 나온 싸움이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정욕을 죽이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 우리는 많은 싸움과 많은 다툼을 겪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은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기 때문에 화평의 결실이나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정욕으로는 소욕을 이루지 못한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욕대로 살아간다면 그 종말은 멸망입니다. 정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를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이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한과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 일에도 욕심을 낸다고 그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살인이나 시기한다고 해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 정욕적인 욕망의 생활을 매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마귀적인 지혜로 살 때, 결국 정욕적 생활에 노예가 되며 그 결과 시기나 살인 같은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경종하기 위해서입니다.

3. 얻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

야고보 사도가 2절 하반 절과 3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교훈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욕적인 생활은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그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정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구하는 것을 받을 것이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새로워짐이 없고 육신적인 정욕적 생활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빌4:6절에서 바울은 구하는 자의 태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했습니다. 응답 받을 기도에는 감사가 나옵니다. 지난날 응답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하는 기도를 해도 잘못 구하는 기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기도는 응받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기도에 응답이 없는가에 대하여 ‘잘못 구하는 기도’라고 말씀해 줍니다. 잘못 구하는 기도가 있는데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기도가 그런 기도라고 한 것입니다. 정욕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육신의 시기와 탐욕에서 나옵니다. 이런 기도의 응답은 기도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활에서 전욕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무엇이 정욕인가 어떤 것이 화평과 의의 생활인가를 하나님의 지혜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욕으로도 시기로도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올바른 기도를 통해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 간음하는 여자에 대한 경종

(야고보서 4:4-5)

본문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에 대한 경종이 나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라고 표현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원어 적으로 볼 때, 본문 그대로 간음하는 여자들을 가르치키는데 본문의 내용의 흐름으로 보아 간음이란 말은 세상과 벗된 성도들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란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마25장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분에 대하여 처녀란 명칭으로 불렀고 계 12장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해를 입은 여자’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호2: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내로 표현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음란을 정죄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실 일에 대하여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정절

성도란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우리로 당신의 신부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도들은 신부로서의 정절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고후11:2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정결한 처녀란 말은 정절을 지키는 깨끗한 여자란 뜻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란 말은 이미 이 야고보서를 받아 읽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주님께 대한 깨끗한 믿음의 정절을 저버리고 이미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가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란 세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세상과 벗된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간음하는 여자라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벗이 되어 간음한 여자라고 일컫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을 능히 배신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욕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의미해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욕적인 생활은 세상과 더불어 벗하는 생활로 이런 생활을 하는 자들은 간음하는 여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외식하는 자들로 이들은 주님께 순결한 정절을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과 간음하는 여자들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의 정결한 생활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활이 신랑이신 주님께 정절을 지키는 생활이 될 것입니까?

자기를 더럽히면 안됩니다. 약1:2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절이 있어야 합니다. 계14:4절에서 144.000명에 들어갈 순교자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자격에 대하여 1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을 보면 이들에 대하여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절이란 신앙적인 정절을 의미합니다. 이 정절은 진리의 말씀을 지키는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지킬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신부된 그리스도인은 신랑이신 예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갈2:20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5절에서 성령의 시기에 대하여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보내신 신랑의 영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영이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시기라고 한 말은 우리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간절함을 의미해 주는 말입니다. 두 남자를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용납해 주는 남편이 없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에 대하여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하며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하지만 우리들을 잊지 못하여 그래도 사랑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5:2절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내어쫓았는데도 주님은 문을 두드리며 이르시기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간음하는 여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기하시는 주님에 의해 매를 드시면 그 징게를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벗되는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된 생활로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야고보서 4:6-10)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행함의 생활로 열매를 맺으려면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생활의 비결은 싸우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이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1. 겸손한 생활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싸움은 겸손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도 겸손이 없다면 헛것이 됩니다. 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이란 말은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것입니까? 마귀가 교만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교만한 것입니까? 시10:2절 말씀을 보면 악한 자가 교만하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그의 특성이 악한데 아무리 자기 자신을 외식으로 가장하고 사랑으로 포장해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악하다고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호13:6절 말씀에는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난했을 때는 겸손하다가도 재물이 많아지면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재물을 흩으심으로 낮아지게 하십니다.

2.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한평생 우리 주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기회를 엿보아 우리를 미혹하므로 우리의 생명을 노략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손을 잡으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마귀는 대적할 상대지 타협하거나 양보할 상대는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 통로의 하나가 죄악입니다. 죄를 범하면 그 길로 무시로 나에게 출입하면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했을 때는 즉시 회개하여 죄를 단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거짓된 진리를 통해서 오는 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길로 우리에게 오시지만 마귀는 거짓된 진리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하와에게 다가와 거짓말로 미혹한 것처럼 거짓된 복음에 귀를 기우리면 그 길을 타고 우리에게 수시로 출입하는 것입니다.

이 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목적은 우리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속삭이거나 타협을 시도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너희를 피하리’고 했습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할 상대입니다. 대적할 때 비로소 우리로부터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로 더불어 싸우려면 먼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약1:14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 미혹의 미끼가 우리 앞에 놓여 있어도 여유를 주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각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의 공경에는 즉각 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 무기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금식 후, 주리신 틈을 타 사탄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할 때,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8절 이하에서 사람이 성결한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교훈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손을 깨끗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손에 있는 피를 씻으라는 말씀으로 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8절 하반 절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성결케 하려면 두 마음을 한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9절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고 했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뜻합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를 말합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셨습니다. 옷을 찢는 회개는 거짓된 회개요 외식하는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는 얼마 안가 다시 죄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며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려면 정말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높임이 영광스러운 높임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야고보는 우리에게 세상과 더불어 벗됨으로 간음하는 여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함으로 은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성결케 하므로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생활을 이룰 수 있도록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1)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야고보서 4:11-17)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야고보 사도는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으며 소망이 있다한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할 것입니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허무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1. 서로 비방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생활은 이웃에 대한 화목에 있습니다. 이런 화목을 이루려면 형제들끼리 비방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비방이란 사랑의 반대말로 상대방의 흠을 계획적으로 선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비방을 미워하십니다. 잠24:28-29절에서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거짓 증거가 아니더라도 까닭 없이 이웃을 치는 증인의 자리에 서는 일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잠25:9절에서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은밀한 일을 말하면 안 된다고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아무리 격렬하게 다툰다해도 그 문제에 대한 변론만 할 일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지켜야 할 도덕률입니다.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일에 대한 죄가 11절에 나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의 죄는 율법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죄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완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율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비방할 자격이 없습니다. 율법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비방과 원수 갚는 일과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 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좇겨 다닐 때 몇 번인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살해치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재판장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12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원수를 비방한다고 하나님이 그 비방에 동조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남과 다툴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나님이 내 일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실보다는 그 행실을 빚어낸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언제나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2. 허탄한 자랑을 말라

야고보 사도는 13절부터 허탄한 자랑에 대하여 경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상주의로 살아가며 장사로 이익을 꾀하는 일이 얼마나 무익한 일이며 이런 자랑이야말로 허탄한 자랑이라고 책망해 주십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고 자신의 사업계획만을 높이 평가하여 재벌의 꿈에 부푼 한 사업가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생애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 일에 대하여 자랑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내일에 어떤 일이 내게 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는 자기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사에 대하여 자랑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음에 인간의 생명이 그리 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면 그가 자랑하는 그 모든 일이 뉘것이 될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허탄한 것으로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허탄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자기 생애를 저당 잡힐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은 야고보 사도가 이 편지를 받아 읽는 교회에 주는 권면으로 그리스도인은 이런 허탄한 자랑으로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니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때로 살기를 원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 야고보는 17절에서 아직까지 말한 모든 권면의 결론으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르는 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뜻을 행할 줄 알면서도 세상의 허탄한 것을 따르며 세상과 벗된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이 없는 생활을 한다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22 - 24)

◆ 밤중소리 02-01 | VIEW : 547


(22) 부한 자들에게 주는 경종

(야고보서 5:1-6)


오늘 본문에는 특히 부한 자들에게 임할 고통에 대한 말씀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야고보 사도는 왜 말세에 재물을 쌓은 자들에 대해 엄히 경종해 주는 것입니까?

1. 말세에 재물을 쌓은 자들에 대한 심판

말세는 재물을 쌓을 시기가 아닌 것입니다. 부한 자들은 그의 재물을 모으기까지 저지른 온갖 범죄와 연락과 사치로 더럽혀진 그들의 생활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한 심판을 부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4장에서 종말에 이 땅에 임할 환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44절에서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세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돈을 버는 일에 정성을 쏟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할 것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해야 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눅21:34절 이하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일이 긴급을 요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 위해 악한 일을 꾀하고 세상과 짝하는 생활을 한다면 덫과 같이 임하는 그날에 그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0절 이하에서 마지막 때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는 노력은 우리의 생활을 세속화시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있을 이 같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재앙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2. 누가 부한 자들인가?

그러면 누가 부자 되기에 힘쓴 자들입니까? 누구를 부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3절 하반 절에서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고 했습니다. 재물을 쌓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의의 재물을 말한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추수한 품꾼에게는 싹을 주지 아니했습니다. 품꾼들에게 싹을 주지 않고 모은 재물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하나님은 품꾼의 품삯을 귀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 아래 말씀을 보면 그들은 불의하게 모은 재물을 가지고 사치하는데 썼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몸을 꾸미는 일에 도에 지나친 낭비를 한 것입니다. 연락하는 생활에 그 재물을 뿌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품삯을 받고 살아가는 형제들을 염두에 둠이 없이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는 도살의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마치 도살장에서 짐승을 도살하듯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바로 자기들 가까이 오고 있는데도 그들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는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심판을 자취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옳은 자를 정죄했습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약한 자들을 무시했으며 부자들에게 경종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공의를 버리고 불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부닥친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재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법이 성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이들은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2절에서 ‘너희 재물은 썩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색하여 자기 손에 움켜쥔 재물은 썩은 재물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너희 옷은 좀먹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입은 호화스러운 옷은 좀이 먹은 옷입니다. 얼마 안가 그 옷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아지게 하실 때, 가난하게 하실 때, 심판으로 죄악을 심문하실 때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그들의 죄악의 증거가 되어 그들을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그들의 생활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까? ‘너희에게 임할 고통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재물에 치중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 재림의 날을 준비하는 신부의 단장을 해야 합니다.

(23) 참는 자의 복

(야고보서 5:7-11)

오늘 본문 7절에서 보여 주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강림하시는 그날까지 길이 참아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서 이 목적에서 이탈하면 신앙생활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기다림에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지상의 생활은 천국에 합당한 백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하나의 훈련장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조용하듯 하다가도 사나운 파도가 일고 평안할 듯 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밀어닥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로 이 세상의 안일한 생활에 빠지지 말고 늘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게 하시는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과 인내의 생활

로마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 인내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현세적인 육신의 건강이나 사업의 축복이나 가정의 평안이나 마음에 원하는 소원의 성취면에서도 해당되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히10:36로 39절에 이른 말씀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중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우리의 온전한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구원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1: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요한과 함께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인내에 동참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없는 것입니다.

2. 인내는 어떻게 이루나?

하나님은 인내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을 성경에서 보여 주시는데 몇 가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롬5:3절과 4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위해 주시는 것인가?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한다고 말씀하심으로 인내의 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는 환난이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약1:3절 말씀을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고 하심으로 믿음의 시련을 주시는 이유 역시 우리로 인내를 만드는 생활을 이루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히12:1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경주입니다. 이 경주를 끝까지 달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수인 것입니다.

종말에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성도들의 상급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시련과 핍박과 환난을 이긴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가치는 이처럼 큰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7절 이하에서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과정에서 보여 주는 인내를 예로 들어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가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농부들은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고 추수 때까지 기다립니다. 농부에게 인내가 없이는 가을에 추수의 결실을 수확할 수 없습니다. 11절에서는 욥의 인내의 경우를 예로 말씀해 줍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결론 : 인내는 믿음의 결실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이르시기를 ‘마음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9절에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0절에서 ‘서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특히 본문에서 주의 재림에 대해 대단히 강조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인내의 목적이 그의 재림의 시기까지 기다리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7절에서 8절에서 9절에서 이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4) 맹세와 믿음의 기도

(야고보서 5:12-20)

야고보 사도는 맹세에 대한 교훈을 강조해 줍니다.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특별히 병든 자를 일으키기 위한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1. 맹세하지 말라

구약성경에 보면 맹세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이 맹세에 대하여 경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만약 우리들이 어떤 재판에 증인이나 피고나 원고의 처지에서 재판정에 섰을 때 자신이 한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하여 맹세할 수 없는 것인가? 판사가 맹세시키는 일을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우리에게 그 믿는 사실에 대한 것을 맹세케 할 때 맹세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맹세하지 말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생각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된 맹세로 인하여 받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입다의 경우가 이런 맹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맹세하기를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패하게 하시면 내가 평안히 돌아 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면한 어려운 일의 해결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자신의 맹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는지 에 대해서는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맹세는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치는 일, 금식기도를 하는 일, 철야 기도, 무리한 헌금 액수를 결정하는 일 등을 맹세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자신의 파탄을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욕적인 일이나 자신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믿습니다하는 식의 만용으로 맹세하는 일은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에나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세는 최종적인 확정이기 때문에 그 후에 그 일이 어렵다거나 감당할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맹세하고 지키지 않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옹호하는 일에 있어서나 확고한 신앙 고백을 위한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시인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누구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을 고할 것을 맹세시킬 때 우리는 자기의 신앙적인 양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명을 내 걸고 맹세해야 하며 그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맹세한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질 것입니까?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맹세코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사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맹세한 사람이 그 맹세가 거짓된 것으로 발각되었을 때, 그 손실액의 5분의 1을 더 주게 하였고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림으로 그 허물을 용서받아야 했습니다(레6:4-6).

2. 고난 당하는 자의 태도

13절부터는 고난 당하는 자의 태도와 믿음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고난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더 힘을 얻어 승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애매히 받는 고난이라면 사실이 명백히 밝혀질 때까지 참아 기다리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자신의 허물로 인한 고난이라면 속히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병든 자에 대하여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이란 하나님의 종이나 존경 받는 장로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기름을 발라 주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일은 치료제로 싸 매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병을 위한 기도에 기름을 바르는 일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의사의 손을 통해서나 약을 통해서 나타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 19-20절 말씀을 보면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그가 그 사람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영광과 상급을 받게 되며 그 미혹 받은 자의 허다한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맹세를 하여 심판을 자취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활을 버리고 진실한 믿음으로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혹의 길에 빠진 자들을 돌이키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